영화의 세계/영화 리뷰
[스크랩] [하재봉의 영화야 놀자]새벽의 저주
ddolappa
2008. 7. 17. 20:45
오락성 가미 경쾌한 호러
죽지않는 시체들 인간공격
자본주의 사회 폭력적 조롱
왜 관객들은 무서워하면서도 공포영화를 보는 것일까? 공포영화는 스릴러적 요소를 갖고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 유령이나 흡혈귀 혹은 좀비 등 초자연적인 존재이든, 연쇄 살인마 같은 정신병리학적 대상이든, 공격ㆍ방어의 이원적 대립구도로 펼쳐진다. 관객들은 공격당하는 쪽과 심리적 동일성을 갖는다. 모든 공포는 사실 내부적 결핍에서 비롯된다. 결핍은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욕망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들의 등장은, 현대사회의 불모성과 관계 있다. 그것은 마치 흡혈귀 영화가, 부르주아 사회의 노동계급과 그들을 착취하는 자본계급의 이원적 대립이 강화되는 시대적 배경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나중에는 남녀의 성적 관계를 은유하는 방향으로 발전된 것과 비슷하다.
좀비들처럼 인간 신체의 훼손은, 과학문명의 진보가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 놓기 시작한 산업혁명기부터 등장했다. 특히 원자폭탄의 무서운 효과를 목격한 이후에는 문명비판적 시각을 함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조지 로메로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9년)을 처음 만든 이후 `시체들의 새벽`(78년), `시체들의 낮`(85년)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시체 3부작을 만든 이유는, 자본주의 소비 위주의 불합리한 사회구조를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를 통해 풍자하기 위한 것이다. 좋은 공포영화는 이렇게 관객들의 집단 무의식과 반응한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 잭 스나이더가 지금 이 시점에, 시체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을 `새벽의 저주`로 리메이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원작이 갖고 있는 풍자정신을 거의 거세하고, 대신 뛰어난 엔터테인먼트 대상으로서 좀비를 활용하고 있다. 좀비가 거대 도시의 심장부를 지배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우리 내부의 괴물은 이미 외부 세계의 괴물을 탄생시켰으며, 내부는 외부에 조응한다.
`새벽의 저주`에서 좀비들은 흐느적거리지 않는다. 좀비들은 질풍처럼 도시를 질주하고, 사람들을 물어뜯으며, 피에 대한 갈증을 전염시킨다. 대형 쇼핑몰에 고립된 살아있는 인간들은, 살아있는 시체들인 좀비들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심리적 공포가 극대화된다. 소비주의의 심장인 쇼핑몰에 모여 있는 공포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이되던 원작에서, `새벽의 저주`는 많이 벗어나 있다. 자본주의와 현대문명의 희생자인 좀비들이 발휘하던 풍자정신은 사라지고, 평온한 삶을 위협하는 괴물로서의 이미지만 극대화된 `새벽의 저주`는, 호러 장르의 오락적 효과를 극대화했을 때 나타나는 모든 효과를 보여준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한판 승부를 보면서 우리는 가슴 졸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죽어도 죽지 않는, 아니 죽을 수 없는, 살아있는 시체 좀비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현대사회의 불모성을 암시하는 사회극이 될 수는 없다. `새벽의 저주`는 호러의 탈을 쓴 뛰어난 오락영화다. 수면 밑으로 잠복한 풍자정신이 어느 순간 죽지 않고 되살아나서, 부르주아적 사회에 순응해 들어가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뇌를 후려쳤다면, 걸작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좀비들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해한 이 세계의 폭력성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뜻이다.
좀비들은 결국 우리 영혼 속에 자리잡은 악마성의 구체적 현현이다. `새벽의 저주`는 폭력적 세계를 폭력적으로 조롱한다. 거기까지다. <영화평론가ㆍ인하대 겸임교수>
출처 : 금후니의 로또완전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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