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세계/영화 리뷰

[스크랩] <용서받지 못한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

ddolappa 2008. 7. 17. 20:52
용서받지 못한 자> - 이 시대 폭력과 집단주의 문화의 정체


한편의 영화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관객의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가 만들어지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흥미로운 텍스트는 수용자에게 개인과 사회, 소수와 다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다시 한번 살펴보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잘 만든 영화라는 기준을 놓고 볼 때, 영화는 내러티브적 완성도가 높아 장르적인 기대치를 훌륭하게 만족시키거나, 감독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형식적 실험과 스타일이 잘 어우러진 영화를 손꼽을 수 있다.

 

이런 영화는 관객과 영화 속 주인공과의 감정이입 혹은 그 정반대의 거리두기를 통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며, 텍스트와 주체의 끊임없는 소통이라는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킨다. 더불어, 배우의 완벽한 연기 등이 일관성 있게 어우러져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한다면 ‘영화보기 혹은 영화읽기’의 매력은 한층 배가 될 것이다.

 

대중문화가 다양한 코드로 상품화되고 소비되는 지금, 그 최전선에 놓여 있는 영화가 하나의 산업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작가주의, 독립영화, ‘저항, 선동 영화’ 라는 특수한 범주로 묶이는 영화는 대중과 비평에게 주목받기 힘든 구조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용서받지 못한자’는 의도했던 결과였든 그렇지 않았던 간에, 차별화된 다른 관점에서 우리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문제에 도발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종빈 감독이 졸업 작품으로 찍었다는 이 영화는 군대라는 조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캐릭터의 생생함을 통해 날 것 그대로 드러난다. 영화자체가 가지고 있는 방법론적인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가 이 사회와 인간에 대한 시선과 통찰의 깊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군대와 조직에서 개인은 어떻게 변해가는가.


영화의 첫 장면은 혼자 버스를 타고 가는 승영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그는 음악을 들으며 자대로 향하고 있다.  승영은 아직 완전하게 조직에 동화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아직까지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체제에 길들여 지기를 거부하는 저항적 인물이라는 설정으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승영의 후임병 지훈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은 군대내의 조직생활 특히 ’군 생활‘이라는 모습에 잘 적응하고 있다. 

 

마병장(그는  군기반장 태정보다 고참이다)과 고문관 지훈은  전형적인 캐릭터로 영화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태정은 양면적인 캐릭터다. 그는 내무반에서 2번째 서열로 폭력과 회유로 다른 인물과 조직을 통제하는 입체적인 인물이다.

 

태정은 승영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자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 그게 군 생활을 편하게 하는 길”이라고  충고한다. 내부반에서 여러 갈등을 일으키던 승영은 태정이 제대한 후 스스로 변한다.

 

 이제 자신이 상급자가 되면 불합리한 제도를 바꾸겠다는 승영은 서서히 조직에 동화되어 버린다. 체제에 적극적으로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안락한 지위를 보장받는 것이다.

 

자신의 선임병들에게 전투화와 옷을 선물하고, 적당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기도 한다. 후임병 지훈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진다. 그러나 지훈이 극단적인 행동을 한 이후, 그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불합리한 조직문화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고, 그것이 지훈을 자살로 몬 것으로 생각해 혼란스러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군대를 다녀오면 느끼는 감정 그러나 과연 무엇 때문에


짧은 머리를 하고 훈련소로 입소하면 이제 까지 전혀 마주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강압적인 위계질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훈련, 그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관계가 아닌 직급과 계급에 의한 서열 그리고 훈련번호로 자기 자신은 규정된다.  자신을 버리고 조직과 규율에 맞춰 복종하라는 강요된 명령 속에 개인은 훈련병 몇 번으로 ‘호명‘된다. 후기 구조조의자 알튀세의 지적처럼 군은  대표적인 물리적 업악기구이다.


규율과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국가기구로써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 조직  안의 구성원들은 이데올로기에 의한 자발적인 호명과 군대라는 조직에 의해 강제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번호, 계급으로 확립된다는 차이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순응한다. 

 

차츰 거대한 조직에 의해 개인의 모습은 점차 화석화 되고, 개성보다는 효율성, 통제를 통해 순응된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가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희생양 문화를 통해 서구사의 한 단면을 설명한 것처럼,  이 안에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의 차이를 차별로 강제하고,  폭력을 통해 질서와 안정을 찾는다.  군대속 사회화는 이제 우리 사회속의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구조로 치완되는 마력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장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군대라는 전형성에서 충분한 웃음과 매력적인 상황을 끌어내 관객에게 호소한다는 것이다. 군에서 우리가 한번은 경험했음직한 인물, 전형적인 캐릭터의 배치는 웃음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승영의 과거의 모습과 현재 휴가를 나와 태정을 만나는 모습을 교차해 보여 줌으로써,  관객이 승영의 변화과정을 살펴 볼 수 있도록 한다. 그 변화를 통해 어떤 결과 (영화속에서)를 가져 왔는지 관심을 유발하도록 하며 군대속의 태정의 모습과 제대 후 그의 모습을 관객에게 제시하며 더욱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이 플래시백은 또 현실과 영화속 상황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님을 관객에게 확인시킨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자신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던 승영이 욕조에서 자실한 이후, 태정은 다음날 묵묵히 게를 먹는다. 친구는 잘 들어갔는지에 대한 물음에 그는 아무런 주저 없이 잘 들어갔다고 대답한다.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고그가 내 뱉는 말은 진정성이 담겨 있다.  ‘잘 들어갔다’ 집단 속 한 개인의 죽음은 이렇게 소멸해 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

 

개인은  단지 소모되고, 대체될 수 있는 자원으로서의  역할이 끝나자마자 그는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자신의 행위가 후임병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책임에서, 자신이 조직에 순응해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괴로움에서 승영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자신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군대보다는 사회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영화는 사실 군대를 다녀와야 제대로 된 남성성을 익힐 수 있다는, 이 시대 마초들이 숭배하는 신화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적절한 소재로 풀어 냈다. 그러나 문제는 영화가 끝난 이후 이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해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자신의 경험담과 군 시절의 추억을 전형성을 띤 인물로 희화화 되는 과정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아닌가.  ‘대한민국은 군대다’‘라는 한 여성학자의 주장처럼 군대라는 조직이 가지고 있는 전형성 때문에 파급된 문제에 대한 감독의 고찰이 충분하게 드러나지 못했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숭배하는 남성성과 조직문화의 집단의식에 대한 문제, 군대문화의 폭력성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출처 : 미네르바의 영화와 삶에 대한 우울한 열정
글쓴이 : 미네르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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