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세계/영화 리뷰

[스크랩] 어둠 속의 댄서 그리고 모던타임즈의 공장이야기 : 이기만의 영화예술철학

ddolappa 2008. 9. 4. 05:19

  <어둠 속의 댄서 그리고 모던타임즈의 공장이야기 : 이기만의 영화예술철학>

 

  <어둠 속의 댄서>는 체코 사람 셀마가 아들의 시력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점점 나빠져서 끝내 빛을 잃을 것이기에 아들의 눈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미국의 한 금속공장에 다니며 겪는 공장이야기로 문을 열었다. 그녀는 음악을 사랑하고, 뮤지컬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고된 삶을 스스로 격려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크왈다가 곁에 있고,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와 그녀의 집주인 내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아들이 있어서 어려운 생활을 힘차게 살고자 힘쓰고 있다. 그녀는 공장의 기계 소리가 음악처럼 들린다고 말하곤 한다. 영화 속에서 소리를 편집하고 그렇게 연출한 덕분이지만, 그 규칙성이 화음처럼 들린 것은 사실이다. 어느 날 밤 근무를 하던 중 졸음과 피곤함 속에서 다른 동료들과 춤을 추며 노래를 하는 환상에 빠지고 보는 사람도, 옆에서 돕는 사람도 가슴 졸이던 사고를 일으키며 그 자신도 다친 일로 공장에서 쫓겨난다.

 

  또 다른 공장이야기가 어둠 속의 그녀를 다시 살피게 한다. 그리고 현실성과 희극성 사이에 놓인 공장이라는 다리를 현대성에 맞춰 생각한다. 유성영화가 등장한 뒤에도 무성영화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보여주며 20세기의 빼놓을 수 없는 영화로 자리 잡은 <모던타임즈>를 만든 무언의 행위예술가 찰리 채플린이 그린 공장은 희극의 극장이다. <어둠 속의 댄서>가 어둡게 그린 공장이라면, <모던타임즈>의 공장은 지나치게 밝고 생기발랄하다. 모든 기계는 소리를 내고, 모든 사람은 몸짓으로만 대화를 한다. 물론 영화 속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나 보는 우리들에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기계는 소리를 내고 사람은 몸짓으로 소리를 나누는 그것은 찰리 채플린이 둔 <모던타임즈>의 장치이다.
  사람들의 몸짓은 공장의 생산성이다. <어둠 속의 댄서>와 마찬가지로 공업자본가는 생산 또 생산을 외친다. 거대한 기계 속에 들어간 찰리 채플린의 모습과 기계 속에서조차 나사를 조이는 그의 모습은 <이레이저헤드>, <트레인스포팅>처럼 인간의 세계이면서 새로운 세계의 낯선 풍경을 밀착하여 설명한다. <모던타임즈>의 모든 사람은 공업자본가의 명령에 따라 기계의 하나로 전락한다. 그들의 일상도 기계에서 붙은 습관을 떨치지 못한다. 그들의 노동은 <쉰들러리스트>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쇠붙이를 조립하며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동자들과 다르고 또한 같다. 우리는 <어둠 속의 댄서>에서, <모던타임즈>에서, <쉰들러리스트>에서, <제르미날>에서, <파업전야>에서, <아름다운청년전태일>에서, 그리고 무언극 <바보 전태일>에서, <플래시댄스>가, <빌리엘리엇>이 보여준 예술의 희망과는 다른 절망에 내린 먼지를 가르는 한 줄기 빛을 다른 무대에 앉아서 보기 쉽다.

  이렇게 영화 속의 공장을 생각하면 뤼미에르가 만든 영화도, 19세기 산업화의 물결 속에 피어난 예술운동도, 21세기 후기전자시대의 마술 같은 반도체의 물길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현실은 거기서 99% 더 악랄하다. 그래서 희망도 몸부림친다. 영화라는 매체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지, 현실이라는 매체에서 무엇을 겪을 것인지 알 수 있는 길은 셀마의 어둠처럼 조금 더 땀내 나는 손길과 눈길에서 찾아야 한다. (매체예술철학을 위한 공장이야기 중에서.)

 

*위의 글은 평론가 이기만님의 글터(한글로 비평하라.)에서 허락을 받고 가져왔습니다.

출처 : 예술철학회
글쓴이 : 고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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