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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파시즘의 대중심리 -------- 빌헬름 라이히

ddolappa 2008. 7. 31. 22:14
 

파시즘의 대중심리 -------- 빌헬름 라이히

                         

 


1.물질적 힘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균열>

히틀러 이전 시기 독일의 자유 운동은 막스의 국가이론과 사회이론에 의해 주도 되었다. 따라서, 독일 파시즘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막스주의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독일에서 민족사회주의가 권력을 장악한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사회적 사건에 대해 막스주의적 기본개념의 정당성에 대해 지주 의혹을 표명해왔다. 즉, 목표와 본질에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반동의 가장 극단적인 전형을 보여주는 파시즘이 국제 현상이 되었으며, 많은 국가에서 파시즘이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능가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경제적으로 성숙하여 폭발 직전에 있다”고 주장하는 근대역사의 국면에서, 노동자 운동의 실패가 국제적인 민족주의 강화로 벌충되고 있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해 노동자인터내셔널이 실패한 것과 1918년과 23년 사이에 러시아 밖에서 일어난 혁명적 봉기들이 분쇄된 것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중대한사실과 연관된다.  만약, 이러한 의혹들이 정당한 것이라면 막스의 기본개념은 거짓이며, 그렇지 않다면 노동자운동은 단호하고 새로운 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혹들이 정당하지 않은 것이고 막스의 사회학적 기본개념이 정당하다면, 노동자 운동이 지속적으로 실패한 이유가 광범위하게 분석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파시즘 대중운동에 대해서도 완벽한 설명이 이루어 져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 새로운 혁명적 실천이 가능할 것이다. 노동자들의 ‘혁명적 계급의식’에 호소하거나, ‘쿠에‘식의 실천을 하는 것보다 정치적 반동의 국제적 강화와 진전과 비교해서 어떤 속도로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17년과 1933년 사이 혁명적 좌파들의 막스주의 이론과 실천을 보면, 그들은 새로운 역사 현상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했다. 막스나 엥겔스는 파시즘을 알지 못했고, 레닌 역시 파시즘에 대한 시작을 보았을 뿐이다.  현실에 대한 반동적 파악은 현실모순과 실제하는 관계들을 간과했다 . 반동적 정치는 발전에 저항하는 사회적 힘을 자동적으로 이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반동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혁명적 힘을 남김없이 밝혀내지 못할 때만 성공적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퇴행적이며 진보적이기도 한 사회적 힘이 파시즘의 대중적 기반, 즉 반역하는 소부루지아쥬에게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모순은 간과 되었으며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 직전까지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막스에 의하면 ‘근본적이라는 것은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개인이 사물의 근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결국 기계론적 사고, 경제주의 또는 형이상학에 빠지게 되고 필연적으로 파멸하게 된다. 그래서 비판은 사회적 실체 모순이 어디에서 간과되고 있는가를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고 실천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1929년과 1933년 사이의 거대한 경제 위기로 피해를 입은 대중등의 이데올로기를 ’틀림없이‘ 좌파쪽으로 향하게 ’할 수밖에 없을 것' 이라고 주장한 소위 ‘통속적 막스주의’는 실제 상황에서 좌파에게 유리해진 경제적 토대와 우파에게 유리해진 광범위한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와의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한다. 이 균열은 간과 되었다. 사실상 소부르쥬아지 뿐만 아니라, 프로레타리아 중 대다수의 사람들도 우파로 선회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람들은(통속적 막스주의자)은 파시즘이 싹을 틔우고 대중운동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대부르쥬아지에 대한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어디있었나?

막스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착취당하고 있으며, 자본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고 소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노동자들을 점진적으로 궁핍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막스는 ‘착취자에 대한 착취’의 필연성을 끌어냈다. 이는 사회적 생산 과 자본에 의한 생산물의 사적 전유사이의 모순은 생산력의 수준과 생산양식의 균형을 맞춤으로써 해결될 수 있으며, 사회적 생산은  생산물의 사회적 전유에 의해 보완되어야 하는데, 이 조정의 행위가 사회혁명이며, 막스의 경제 기본 정책이다.  그러나 산업화된 대다수의 국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유럽의 약 5천만명이 실업상태로 있었으나 착취자에 대한 착취는 일어나지 않았고, ‘사회주의와 야만’의 기로에서 사회는 먼저 야만 쪽으로 나갔다. 이는 파시즘의 국제적 강화는 곧 노동자 운동이 뒤쳐졌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1929년부터 1923년까지 독일경제가 급격히 쇠락하는 동안 나치당은 80만표이던 것이 1933년엔 1천7백만표로 급성장을 했다. 즉 ‘야만으로 몰락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로 상승할 것인가’의 결정을 그들이 한 것이었다. 무엇이 경제적 상황돠 대중들의 심리구조가 일치하지 못하게 방해하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이는 통속적 막스주의의 개념으로 벗어나야 한다.  이는 경제적 존재와 일반적인 사회적 존재를 도식적으로 완전히 분리하면서 인간의 ‘이데올로기’와 ‘의식’은 그의 경제적 존재에 의해 전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통속적 막스주의는 경제와 이데올로기‘토대’와 ‘상부구조’의 기계적인 대립에 이르게 되었다.


<대중심리학의 문제제기>

경제적 상황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곧바로 정치적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만약 그랳다면 사회혁명은 벌써 오래전에 일어났을 것이다.  경제적 상황은 성격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과는 다른 방법을 통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굶주린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 경우,이는 이데올로기와 행동은 경제적인 압박과 일치한다. 경제적인 상황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부합하고 있는 것이다. 반동적 심리학은 파업이 명목상 비합리적인 동기로 이해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는 언제나 반동적인 설명으로 귀결된다. 회심리학은 전혀 반대되는 관점에서 문제를 파악한다.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가 왜 도둑질이나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생각과 행위가 경제적 상황과 모순될 경우, 다시 말해서 비합리적일 경우 사회경제학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대중들 각 개인 속에 있는 심리적 모순을 알아내 제거하는 대신에 쿠에이즘이나 민족주의적 운동을 ‘대중들의 정신이상’으로 설명한다. 대중 심리학의 문제 제기는 즉각적인 사회 경제학적 설명이 실패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경제주의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적 책임의식이 정말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노동자의 책임의식의 발전을 억제하였는가라는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노동자 내부에서 보이는 반동적인 것과 진보적이-혁명적인 것 사이의 이런 모순을 알아내고, 중산계층이 위기에 빠진‘체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이미 경제적으로 비참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를 두려워하고 극단적으로 반동적이 된다는 사실은 반란의 감정과 반동적 목표 및 내용사이의 모순을 그들 내부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성억압의 사회적 기능>

막스는 사회적 생활이 경제적 생산조건과 그조건에 의해 특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촉발된 계급투쟁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억압받는 계급에 대한 생산수단 소유자들의 주된 무기는 국가기구를 강력하게 떠받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권력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라는 방법을 이용한 심리적 생활을 지배하는 과정을 보면, 첫째, 의식은 단지 심리적인 것은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둘째로, 위대한 발견은 번식과 관련없는 활발한 성이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발달된다. 셋째는 오디프스 콤플렉스의 가장 본질적인 것 까지도 포함하는 어린이의 성은 보통 성적행동과 생각에 대한 처벌의 공포(거세공포) 때문에 억압된다. 넷째는 중요한 발견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은 속세를 초월한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유년기에 부모와 그들의 대리자들이 사용한 교육조치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런 발견에서 출발한 사회적 성경제학은 막스를 프로이트로, 또는 프로이트를 막스로 대체하거나 서로를 보완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역사적 유물론을 다루면서 정신분석학은 성경제학이 수행할 수 없는 과학적 기능, 즉 이데올로기의 역사적 토대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구조와 역동성에 대한 이해를 충족 시켜주어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사회 성경제학은 성이 사회에 의해 억제되고 개인에 의해 억압되는 것은 어떤 사회학적 이유 때문인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권위를 두려워하고 복종하도록 귀위주의적인 의미에서 ‘말 잘 듣고’ 길들이기 쉽도록‘ 생동적이고 자유로운  모든 충동이 심한 두려움에 점령되고 일반적인 사고를 억압하고 비판까지도 무능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간의 반항하는 능력은 마비되어 버린다. 다시말해,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같은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

자유를 향한 의지를 억압하는 성적 도덕뿐 만아니라 권위주의적 이해에 순응하는 힘, 역시 그 에너지를 억압된 성욕에서 얻는다. 성의 억압은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인간을 자신의 구조적인 물질적 이해관계에 반하여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도록 변화시킨다.  

출처 : gr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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