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질 들뢰즈

[스크랩] 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ddolappa 2008. 8. 1. 00:25
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논쟁의 포인트가 무엇인가” … 담론의 윤리 아쉽다
2006년 07월 02일 (일) 00:00:00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editor@kyosu.net

▲교수신문 제403호에 실린 홍윤기 교수의 글

이미 방향성을 상실한 논쟁이 되어버려 사족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만, 마지막으로 전반적으로 정리해보고 싶다.


천규석은 그의 책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 ‘유목주의’, ‘노마디즘’이라는 말들이 담고 있는 복합성과 이질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침략주의’로 고발하고 있으며, 그 철학적 기초로서 ‘천의 고원’을 논했다. 여기에서 그는 이 책이 “그 어떤 철학교과서보다 지적 유희가 심했다”고 말하면서(“그 어떤”이라 했으니 아마 천규석은 ‘천의 고원’을 다른 모든 ‘철학교과서들’과 일일이 비교해보았나 보다), 이 말과는 모순 되게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 “막연한 인상만” 남았다고도 말한다.

신중한 이해 없는 비판은 독약일 뿐


천규석은 ‘유목’이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은유적 의미를 전혀 구별하지 않은 채 ‘천의 고원’을 자신의 맥락으로 환원시켜 ‘침략주의’로 규정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국가장치의 외부를 뜻하는 ‘전쟁기계’를 그저 ‘전쟁’이라는 말만 보고 일종의 정복주의로 매도하고 있으며, 68혁명 이후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생태운동, 동성애자 운동 등등)의 맥락에서 등장한 욕망 개념을 ‘퇴폐주의’로 비난한 것을 비롯해서, 단순히 틀렸다거나 오해했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에 있다. 천규석이 단지 틀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이야기들을 논의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어떤 사상을 이런 식으로 비난하려면 그 비난의 대상에 대한 신중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규석은 그 자신이 그저 ‘페이지 수만 넘겨’ 보았고 ‘막연한 인상만’ 가진 그런 책에 대해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그것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적 역량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 담론, 사유 등에서의 윤리적 문제를 함축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행위가 단순히 천규석이라는 한 사람의 지적 불성실을 넘어 한국사회의 한 병리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천규석의 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감싸지만 말고 잘못된 것은 지적도 해야


‘천의 고원’은 ‘안티오이디푸스’의 속편이다. 그리고 물론 이 책들에는 매우 복합적인 지적-역사적 배경들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 책의 사상을 논하려면, 더구나 ‘침략주의’라는 등의 정도가 심한 ‘비판’을 가하려면 이런 지적-역사적 배경에 대한 정말이지 최소한의 근거는 가져야 한다. 천규석 식으로 그렇게 ‘책’을 출간하는 것은 부실공사로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다치고 잘못된 음식이 사람들의 몸을 해치는 것처럼 즉물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경우들과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홍윤기는 이런 내 서평에 대해서 몹시 거칠게 공격해 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아리송하다. 만일 그가 내 글을 공격하려 했다면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침략주의’이자 ‘정복주의’이자 ‘퇴폐주의’ 등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 천규석은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비난했고, 나는 그 비난이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홍윤기가 해야 할 일은 천규석의 말이 맞고 내 비난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홍윤기는 오히려 들뢰즈/가타리가 항간에 떠도는 ‘유목주의’들과는 구분되어야 할 나름대로의 ‘치열한’ 사유를 펼치는 사람들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몇 가지 추상적이고 막연한 제한은 가하고 있지만, 들뢰즈/가타리가 국가 외부를 사유하려는 맑스/엥겔스를 이어받고 있는 철학자들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들뢰즈/가타리를 잘 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결국 홍윤기에 따르면 천규석이 얼마나 그릇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가가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맑스/엥겔스를 이어 국가 외부를 사유하려는 치열한 인물들을 천규석은 침략주의, 정복주의, 퇴폐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논쟁의 포인트가 무엇인가. 도대체 홍윤기는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홍윤기는 정말 논의해야 할 것을 논의하지 않고서 논의의 초점을 엉뚱하게 틀어버리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유목주의란 침략주의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유목주의는 결코 침략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일까.


홍윤기는 이렇게 정말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서 나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평에서 언급한 ‘원전’이라는 말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원전에 대해 무슨 말을 했기에 논의의 핵심이 아니라 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으며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도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


그렇다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종의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또 더 중요한 것은 꼭 원어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희랍어 원전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일본어 등등 외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또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요약본을 읽을 수도 있고, 해설서를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 책을 읽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가 아님이 입증됐다”


문제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만일 누군가를 ‘침략주의’니 하는 식으로 비난하려면(사실 이런 비난은 정말 강도 높은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침략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그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저작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논의 대상을 그렇게 성실하게 독해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를 ‘침략주의자’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부도덕한 행동이다. 이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누군가를 그렇게 비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그 사람을 정말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홍윤기는 이런 내 주장에 대해 ‘원전 패권주의’, ‘원전 파쇼’, ‘원전 사기극’을 비롯해 정말이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 공격했다. ‘원전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내가 전혀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해석’하면서 참으로 악의적인 이야기들을 내뱉고 있다. 내 이야기 어디에 이런 주장이 함축되어 있는가. 아마도 ‘원전’이라는 이 말이 홍윤기 가슴 속의 그 무엇인가를 자극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원전에 바탕한 논의는 중요하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렇게 원전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래서 지금 논의의 초점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렸던 홍윤기가 이제 원전의 어느 한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어디 한번 원전으로 해 보자’ 하는 식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만일 원전으로 해 보자고 했으면, 지금 이 논의의 핵심에 닿는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즉 ‘유목’, ‘전쟁기계’, ‘욕망’ 등등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표현’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홍윤기의 이런 행동이 얄궂게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상가에 대해 제대로 논하려면 바로 이렇게 원전을 붙들고서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홍윤기는 (비록 내용상으로는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원래 주장과는 정반대로, 누군가에 대해 논하고 평가하려면 그의 저작을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지식
글쓴이 : 한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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