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대 대학원신문(제152호)의 특집기사를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출처는 학술저널 담비이다. 편집자의 말은 아래에 옮겨져 있는데, 초점은 지젝이 이해하는 라캉과 맑스가 어떤 라캉이고 어떤 맑스인지를 살펴본다는 것이다. 자세한 정독은 다음으로 미뤄두지만, 이제 이 정도 주제에 대해서라면 국내에서 연구논문들이 쏟아져나올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시차적 관점>이 마저 소개된다면, 우리는 그의 주저들을 다 갖게 될 테니까 한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지젝을 읽는 일로도 한 해가 짧다니!
이번 호 <인문학술>에서는 슬라예보(*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들을 살펴본다. 지젝은 셸링과 칸트, 헤겔 등의 독일 철학에 바탕을 두고 라깡을 재해석하면서 이를 맑시즘과 결합해 정치, 사회, 문화 형식에 대입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지젝이 해석해 낸 라깡과 맑시즘을 지젝 이전의 다른 이론가들의 그것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본고의 이러한 논의를 통해 지젝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젝의 논의가 가지는 함의와 영향까지 엿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편집자주]
경희대학원신문(07. 06. 21) 칸트에서 헤겔로 혹은 초자아를 넘어 사랑으로
시차(parallax)라는 간극
동일성과 차이의 ‘낯선’ 동거. 동일성으로서의 차이, 차이로서의 동일성. 동일성과 차이가 겹치는 곳. 동일성도 차이도 아닌 동일성-차이라는 괴물이 숨쉬는 공간에서 지젝은 철학사를 회집한다. 대립구조가 배제하고자했던 ‘낯선’ 괴물은 이미 구조 내부에 있는 ‘친밀한’ 이웃이었다. 낯설고도 친밀한 괴물-이웃. 스핑크스의 질문에 인간이라고 답하는 오이디푸스는 이미 자신이 스핑크스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넷과 셋과 둘이 하나 속에 있는 혼합괴물. 차이는 외부에서 내부로 이동한다. 인간과 괴물을 구별하는 외재적 차이가 아닌 인간내부의 균열. 오이디푸스의 시선 이전에 이미 오이디푸스 속에서 오이디푸스를 바라보는 스핑크스의 응시(gaze)가 있다. 봄과 보여짐이 ‘함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함께 있기 때문에 시선과 응시의 간극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다. 대립이나 모순으로 해소될 수 없는 내부적 분열. 바로 이것이 시차라는 간극이다.
차이의 철학은 시차라는 간극을 통해 동일성의 철학 한 가운데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다. 칸트의 부정판단과 무한판단의 간극은 정신분석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죽었어’(I am dead)의 서술어를 부정하면 ‘나는 죽지 않았어’(I am not dead)라는 부정판단이 되지만 서술될 수 없음을 긍정하게 되면 무한판단에 이르게 된다 ‘나는 죽은것도 산 것도 아니야’(I am undead) ‘나는 죽었어’라고 말하는 살아있는 나. 긍정과 부정이 시차적 간극으로 존재하는(동시에 발생하는) 공간에서 칸트는 뱀파이어가 된다. 그는 유령을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무한판단은 결국 대립구조가 사유할 수 없는 ‘사이공간’, 대립항들의 내부적 균열을 초래하는 불가능한 공간을 불러낸다. 라깡은 이 재현불가능한 공간을 실재(Real)라 부른다.
칸트의 이율배반은 라깡의 실재를 이미 선취함으로써 정신분석의 공간을 개시한다. 대칭이나 모순과는 달리 이율배반은 모두를 긍정하거나 부정할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인과론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와 ‘자유는 인과론을 넘어선다’의 이율배반은 둘 모두를 긍정함으로써 해소된다. 자유를 예외적인 공간으로 배제할 때 인과론적인 우주는 전체를 형성할 수 있다. 예외성을 통한 전체 또는 보편성의 확립. 라깡의 남성적 우주.
반면 칸트는 ‘세계는 유한하다’와 ‘세계는 무한하다’ 모두를 부정함으로써 유한/무한이라는 대립구조로 사유될 수 없는 기원적 사이공간을 불러낸다. ‘세계는 (전체로)존재할 수 있는가?’ 전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예외적 공간이 거세될 때 또는 예외적 초월성이 전체 속으로 들어와 내부적 균열을 일으킬때 세계는 비전체(Not-All)가 된다. 라깡의 여성적 우주가 탄생하는 것이다. 예외를 통해 보편을 획득하는 남성의 우주와는 달리 여성의 우주는 보편/특수의 ‘사이공간’인 특이성들(singularities)의 집합이다. 실체화할 수 없는 빈공간인 코기토(cogito) 주체를 발견한 후 서둘러 그것을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로 바꾸는 데카르트처럼 칸트 역시 비전체를 지시하는 여성적 우주 앞에서 머뭇거린다.
지젝이 보기에 헤겔은 칸트를 전복하거나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반복(또는 완성)할 뿐이다. 그러나 헤겔의 칸트에 대한 충실성은 칸트의 결핍, 즉 칸트체계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으로 지시되는(이점에서 지젝은 데리다 역시 칸트의 한계내에 있다고 말한다) ‘대립물의 일치’를 끌어낸다.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와 ‘이미 발생하고 있다’의 차이가 지젝에게 칸트와 헤겔, 데리다와 라깡의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시차적 간극이 갖는 타자성을 절대화시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대상으로 물신화할 때 칸트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미 와있는 메시아에게 언제 올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처럼 불가능성은 절대적 타자성으로 승화된다. 타자의 절대성이 타자의 결핍을 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칸트의 예지계 역시 무한판단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상계와 예지계의 ‘사이 공간’ 다시말해 초월적 대상을 현상계의 내부적 간극으로 읽어낼 때 칸트는 헤겔과 ‘함께’ 있다. 불가능한 초월성에서 초월성의 불가능성으로, 타자의 절대성에서 타자의 결핍으로, 칸트에서 헤겔로 이동할 때 정신분석의 윤리학이 시작된다.
초자아에서 사랑으로
법은 비전체이다. 그것은 이미 기원적 폭력이라는 실재를 억압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상징적 방어물이다. 데리다가 미국독립선언문에 대한 분석에서 잘 보여주고 있듯이 법의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그래서 법 이전에 존재해야하는 ‘우리, 미국의 인민’은 단지 법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결과물일 뿐이다. 죄의식의 기원을 설명하려던 프로이트가 아들들이 이미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제할 수 밖에 없는 이유, 기원적 아버지 살해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또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원) 팬터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살해는 규정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법의 기원, 실재로서의 폭력을 상징적 행위로 환원시키는 방어일 뿐이다.
법의 내재적 분열을 초자아 논의에 한정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초자아는 상징적 금기를 넘어서는 향유, 외재적인 법을 보충하는 비합리적이고 가혹한 명령이다. 그것은 법의 전체성을 망가뜨리는 얼룩이지만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법이기도 하다. 라깡이 칸트와 사드를 ‘함께’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에겐 더 이상 식인풍습이 없어요. 어제 남아있는 마지막 놈을 처치했거든요’라고 말하는 식인종처럼 칸트의 합리적인 법을 작동시키는, 그것을 강제적 명령으로 바꾸는 외설적 행위주체는 사드적인 초자아이다.
초자아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그러나 위반이 초래하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옭아매는 법이다. 죄를 짓지 않을수록 죄의식이 증가하듯이 다양성의 담론을 통해 초자아는 오히려 자신의 단일성을 강화한다. 법의 결핍을 보여주어야 할 향유가 가혹하고도 무자비한 형태로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초자아적인 자본이 다양한 지식의 형태로 세계를 전체화하고 있는 지금 다양성의 정치학을 넘어서는 불가능한 윤리적 행위가 요구된다. 다양한 위반은 여전히 법과 위반의 초자아적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숨기고 있는 법의 불가능성, 불가능한 실재를 드러내기 위해 지젝은 바틀비적인 제스처를 위한다. 법과 위반의 악순환으로부터의 물러남.
아감벤은 명령의 형태로 설명될 수 없는 은총, 외부도 내부도 아닌 사이 공간에서 생겨나는 주권, 법의 중지와 법제정의 동시성을 주장함으로써 초자아적인 향유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사이공간, 유대인도 비유대인도 아닌(non-non-Jew) 주체의 가능성을 열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아감벤은 다시 사랑을 초자아로 설명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다. 냉소적 거리를 통해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처럼 위반적 거리에 기초한 초자아를 중지시키기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의 문자적 동일시이다. 윤리적 행위는 위반의 예외적 장소를 제거함으로써 초자아의 매개없이 사랑의 법과 만나는 것이다.
‘모든 지식을 소유하고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울의 말처럼 사랑은 예외적 지식이 아니라 지식 자체의 결핍, 지식을 비전체로 만드는 시차적 간극이다. 전체를 알지 못해 사랑하지만 전체의 지식 역시 결핍되어 있다. 주체의 결핍과 타자의 결핍이 만나는 곳에서 사랑이 발생한다. 유대교가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숨기고자 하는 신의 결핍을 드러낼 때 기독교는 ‘사랑’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모든 상징적 의미나 광채가 사라진 육체, 배설물처럼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와의 불가능한 동일시, 결핍된 신과의 만남이 사랑인 것이다.(민승기/ 경희대 영어학부 겸임교수)
경희대학원신문(07. 06. 21)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알튀세르와 라깡의 조우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알튀세르에 대한 충실한 주석서인 『이론의 우회』에서 알튀세르의 비극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었다.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서로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만나지 못했다.” 그레고리 엘리어트는 이 어긋남의 극적인 예로써(*예로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들고 있다.
1968년 파리는 그의 지병인 우울증을 매개로 알튀세르를 스쳐지나갔고, 그의 뒤 늦은 개입이 바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미완성 연구노트였다. 알튀세르는 이 뜨거운 68년도의 거리를 가능하게 했던 이데올로기의 자율성과 주체의 자율성을 정당화하려고 하였지만 그 이론적 결과물은 구조기능주의의 혐의였다. 결론적으로 이 연구노트 속에서도 이론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은 다시 한 번 어긋난다.
근본적인 논쟁을 ‘푸코 대 하버마스’가 아닌 ‘라깡 대 알튀세르’로 잡고 있는 그의 첫 저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서문을 참고했을 때, 지젝의 출발점은 바로 이 어긋남이다. 알튀세르의 무엇이 알튀세르를 이 어긋남 속에 감금하였는가? 지젝은 구조기능주의를 이유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성급히 거부하는 몸짓을 거부하고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에서부터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시작한다. 이 지젝의 몸짓에서 알튀세르는 진정으로 라깡을 만나야만 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드의 우발적 마주침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알튀세르와 라깡의 만남이 두 개의 회귀, 즉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프로이트로의 회귀’간의 만남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비경제결정론적인 사회구성체의 논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과 프로이트로의 회귀는 자아심리학의 헤게모니를 넘어서 무의식의 주체를 재확언·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두 회귀의 만남이라는 이론적 스캔들이 낳은 사생아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체라는 실체의 논리와 무의식 또는 주체성의 구성이라는 주체의 논리가 매개되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전체적인 기획 속에서 우리가 인지해야 할 것은 바로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한 정의의 변화, 즉 ‘이론적 실천에 대한 이론’에서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의 변화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보자면 알튀세르는 공식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지만 ‘주체 없는 과정 또는 구조’에서 ‘주체 있는 과정 또는 구조’로의 변화 또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에서 ‘최종심금에서의 계급투쟁의 결정’으로의 변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즉 계급 또는 주체의 논리라는 빛 아래에서 읽혀져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 지젝이 가지고 오는 개념들은 실재, 적대와 같은 개념들이다.
실재란 라깡의 개념으로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상징계의 한계, 또는 상징계의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또는 상징계가 비전체임을 보여주는 한계 차원이다. 그리고 적대란 이 실재가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한 가지 양태이다. 적대란 단순한 차이나 대립이 아니다. 좌우의 대립이라는 예를 통해서 왜 그런지 살펴보도록 하자. 우파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기적인 총체로서 인식하며 사회의 분열을 외부적인 침입의 결과로서 생각한다. 그리고 우파는 자신을 이 유기적 총체의 수호자로 좌파를 가장 나쁘게는 이 외부의 침입자로 간주한다. 이에 비해서 좌파는 사회를 본래적으로 분열되고 갈등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좌우의 구별 또한 우파의 구별법과 다르다. 이 둘 간의 관계를 차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둘이 차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 전제를 만족시켜야 한다. 하나는 음/양과 같이 서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기적인 총체를 이루어야만 한다. 두 번째는 이들의 차이가 측정되기 위해서는 이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잴 수 있는 공통의 잣대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던 좌/우의 관계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서로를 구별하고 인식하고 정의하는 방식에서 조차도 달랐다. 즉 이 둘 사이에는 소통의 공간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비소통의 공백만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좌우의 관계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와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는 일관되고 정합적인 전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존재하며 이 공백으로 인해 사회는 유기적인 전체가 아님이 드러난다. 이 공백에 대한 이름이 바로 라깡의 실재이며, 이 공백에 의해 가로질러진 비관계적 관계―상식적인 의미에서의 관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관계인―가 바로 지젝이 말하는 적대이다.
계급적대의 중층결정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계급투쟁, 즉 계급적대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지적되어야만 하는 것은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은 밤의 위엄이 아니듯이 계급투쟁 또는 계급적대란 정치의 로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급적대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 가정하듯이 실정적으로(positive)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이 사회의 궁극적인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적대란 라깡의 실재처럼 오로지 중층결정을 통해서만 그리고 증상적인 형태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중층결정이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꿈 형성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서 도입한 개념이다. 중층결정의 논리에 따르면 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 욕망의 중핵―라깡적 의미의 실재―을 결코 볼 수 없으며 오직 전치와 응축이라는 꿈 작업을 통해서 형성된 왜곡된 형태의 무의식적 욕망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계급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꿈이 무의식적 중핵과 연결된 낮의 찌꺼끼들을 배치하는, 즉 무의식적 중핵의 리비도를 전치하고 여러 다양한 꿈 사고들의 계열을 응축하듯이, 계급적대란 자신의 적대적 에너지를 다양한 사회갈등으로 전치하고 이 갈등들을 라클라우가 말한 등가의 연쇄로 응축하는 중층결정 속에서만 보여질 수 있다.
알튀세르의 “최종심급의 고독한 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는 정식화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계급적대란 항상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 갈등이라든지 여성과 남성의 대립이라든지 또는 현재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과 내국인의 갈등 등으로 중층결정된다. 즉 계급적대란 철저하게 알튀세르적인 의미에서 상이한 갈등 방식의 우연적이고 비일관적인 배치―즉 정세, 국면―를 설명해 주는 구조화 원리이자, 라깡적인 실재의 의미를 살려본다면 초월적 틈새 그 자체이다.
꿈이 탁월한 무의식의 형성물, 즉 증상이라면 이 계급적대는 증상의 형태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증상이란 억압된 것의 회귀이면서도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쾌락 시스템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즉 의식으로부터 배제되면서도 이 의식을 지탱하고 있는 실재의 한 조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젝은 이것을 사회에도 적용하고 있다.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와 등가교환을 전제로 성립된 사회구성체이다. 그런데 이 사회구성체를 지탱하면서도 이 사회구성체의 전제에 위배되는 역설적인 존재가 있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다. 다만 임금 노동을 하지 않는다면 굶어 죽는다는 부자유를 제외하고는. 모든 상품은 등가교환된다. 그러나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등가교환에서 제외되는 예외적인 상품이다. 그런데 이 예외, 즉 임금노동과 잉여가치가 없이는 부르주아 자본주의는 더 이상 유지될 수가 없다. 이 예외를 떠맡고 있는 계급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이런 측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일관되고 정합적인 사회―즉 의식―를 위해서는 배제되거나 부인되어야만 할 증상인 셈이다. 그리고 계급적대로 인한 사회의 비일관성과 마찬가지 이야기이지만 증상에 의한 사회의 비일관성을 다시금 일관된 것으로 환상화하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이다.
계급적대란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들이며, 이것은 지젝이 벤야민의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지칭하고 있는 라깡적 의미에서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실재의 고집이고, 즉 반복강박으로서의 죽음의 충동인 셈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도 그랬지만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의식상의 변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의식상의 각성으로 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데올로기가 근거하고 있는 현실적 토대가 무너질 때 폐지된다. 이와 대당하는 지젝의 개념은 바로 ‘환상의 횡단’으로서의 행위이며, 라깡적 용어로 실재의 윤리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젝의 근래의 작업들이 탁월한 행위였던 레닌적인 몸짓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무의식의 주체란 권력의 장소이자 저항 또는 전복의 장소로 정의되고, 이 논리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라는 헤겔적 모토 아래 역사적 유물론의 기획은 다음과 같이 선언된다. 즉 알튀세르의 ‘주체 없는 과정’은 ‘주체 있는 과정’이 됨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가 기획했던 역사적 유물론의 가능성의 윤곽이 잡힌다: “요컨대 절대는 실체로서 뿐만 아니라 주체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헤겔적 모토의 마르크시즘적 판본은 역사는 경제적 토대의 발전(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뿐만 아니라 계급투쟁(주체의 논리)으로도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지젝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또 다른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자인 숀 호머의 지적대로 지젝은 교조적인 라깡주의자일 수는 있어도 전통 마르크스주의자일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한 번도, 그리고 심지어 알튀세르조차도 프롤레타리아트를 모든 실정적 속성을 박탈당한 라깡의 주체로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레고리 엘리어트가 자신을 반-반 알튀세리앙이라고 지칭했던 호명법을 차용해 본다면, 지젝의 입장은 아마도 포스트-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젝이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제틀을 부활시키면서 하는 질문은 이렇다. 만약 지금 당신의 바지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 죽은 개들의 복수라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헤겔, 마르크스, 그리고 알튀세르라는. 이들이 ‘이론은 실천이다. 즉 실천은 이론이다’와 같은 정치의 시간과 이론의 시간 간의 단락의 가능성을 사유 가능하게 한다면.(이병주/ 언론정보학부 강사)
07. 06. 23.
P.S. 생각이 난 김에 지젝이 공부하고 봉직한(봉직하고 있는?) 류블랴나대학의 사진을 옮겨놓는다. 류블랴나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이며 사진상으로 보니 아담하고 아름다운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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