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의 의미론
조정환
의미의 논리에서 영원회귀의 시간은 순수생성으로 나타난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을 언어와 관련짓는 것이다. 두 개의 언어가 있다. 형상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정지와 고정의 언어, 그리고 운동과 생성을 표현하는 언어.1) 명사와 형용사가 무너져 순수생성의 동사들에 연결될 때 모든 동일성은 사라진다. 스토아 학파는 두 종류의 사물을 가른다. 하나는 물리적 성질을 가진 물체들이다. 이것은 응집력, 능동과 수동의 특성을 갖는 사물들 혹은 사태들이다. 공간 안에 실존하는 것은 이 물체들뿐이다. 또 하나는 이 물체들을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는 효과들, 즉 비물체적인 것들이다.2) 이것들은 부정법들에 관련되는 아이온,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뉘며 현재를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생성이다. 이들은 사물이나 사태가 아니라 사건이다. 스토아 학파는 비물체적인 것(플라톤의 이념)을 효과로 전화시킴으로서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 그러므로 시간에 대한 두 가지 독해가 가능하다. 물체에 기반한 독해와 사건에 기반한 독해.3)
그렇다면 존재론의 최상위의 항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를 실존하는 것들과 내속하는 것들을 아우르는 한에서의 무엇(aliquid)이어야 한다. 그 무엇은 사물과 사건, 사태와 명제, 존재와 의미(물체의 표면에서의 비물체적 사건들=표면효과)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성하며 계열화한다. 이 ‘무엇’은 선불교의 역설 혹은 영미철학의 무의미와 유사하다. 그것은 깊이를 추방하는 표면 사건들의 펼쳐짐으로서, 깊이와 높이의 기법인 아이러니에 대항하는 기법이다. 이 때 물체들은 효과들의 실제원인이며 효과들은 서로 사이에 준원인으로 작용한다.
명제의 새로운 차원에 대한 논의는 사건의 차원이 무엇인가를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명제는 일반적으로 지시, 현시, 기호라는 세 가지 작용 속에서 이해되어 왔다. 유물론은 지시를, 데카르트주의는 현시를, 구조주의는 기호를 각각 근본적인 것으로 사고해 왔다. 들뢰즈는 여기에 “순간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외부에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차원”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의미의 차원이다. 들뢰즈는 의미의 차원과 다른 명제 차원들 사이의 관계를 밝힌다. 우선 의미의 차원은 모든 지시작용에 전제된다. 즉 지시작용을 위해 우리는 의미 안에 단번에 들어간다. 그런데 지시는 신념과 욕구에 따라 현시하는 ‘나’에 의존한다. 하지만 또 나의 신념과 욕구의 질서는 기호작용의 개념적 함축들의 질서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지시가 전제했던 의미가 바로 기호작용인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기호작용은 다시 지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지시와 현시와 기호 사이에는 원환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명제의 새로운 네 번째 차원을 의미로 정의한다. “의미는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의 사물들의 표면에 존재하는 비물체적인 것이며 환원불가능한 복합적 존재이며 명제 속에 내속하거나 존속하는 순수한 사건이다”.4) 들뢰즈의 유물론적 존재론에서 나타났던 존재자와 존재의 관계는 여기서 명제와 의미의 관계로 반복된다. 의미는 존재론적 반복의 시간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물들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정신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시, 현시, 논증과 구분되는 후설의 표현, 즉 지각적 노에마에 가깝다. 그것은 감각적 성질을 갖지 않는 것, 즉 ‘지각행위의 지향적 상관자인 객관적이고 비물체적인 통일체’이다. 그것은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내속/존속한다.5) 그것은 명제와 사물의 경계선이다. 의미는 사건인데 이 때 사건은 한 사태에서의 사건의 현실화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원인과 결과, 물체적 사물과 비물체적 사건의 이원성은 사물들과 명제들, 물체들과 언어, 먹기와 말하기의 이원성으로 확장되었다. 왜냐하면 사건-효과들이 그것들을 표현하는 명제들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이원성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사물들과 명제들은 의미를 경계선으로 해서 맞붙어 있기 때문이다(수증기!). 그렇다면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태들의 부대물로서의 열외존재이며 존재에 속하기보다 비존재에 속하는 무엇(aliquid)이다. 그것은 실존하지는 않지만 명제 안에 존속한다.6) 그것은 명제와 사물, 기표계열과 기의계열 안에서 부단히 순환하면서 이 두 계열의 소통을 가능케 하면서 양식과 상식을 전복시키는 역설적 심급이다.7) 그것은 어떤 자리도 없이 존재하는 동적 대상이다.8)
들뢰즈는 의미의 이러한 개념화가 정치학에 대해 갖는 함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혁명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이 비평형이다. 혁명들은 점진적인 기술적 발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들은 기술적 발전의 부분들로서 기능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총체성의 보수를 요구하는 두 계열 사이의 이 거리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사실상 동일한 것인 두 가지의 오류가 존재한다. 첫째 개량주의 또는 기술주의의 오류는 기술적 진보의 리듬에 맞추어 사회적 관계들의 부분적 정비를 증진시키거나 강요하려고 하는 점에 있다. 둘째 전체주의의 오류는 특정한 순간의 사회적 총체의 리듬에 맞추어 기호화 가능한 것 또는 인식된 것의 총체화를 구성하고자 하는 점에 있다. 그래서 기술주의는 자연스럽게 독재와 컴퓨터의 친구가 되지만, 혁명가는 기술적 발전과 사회적 총체성 사이에서 이 사이에 그의 영구혁명의 꿈을 새기면서 그 간격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꿈 자체는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행위, 현실, 효과적인 위협이며 그가 꿈꾸는 것을 가능케 한다.9)
이 말은, 혁명(그리고 예술과 철학)이 새겨져야 하는 자리가 ‘자리를 갖지 않는’ 의미의 평면임을 의미한다. 이 평면은 차이와 반복의 관계로도, 혹은 구조와 특이점의 관계로도 설명될 수 있다. 전자의 맥락에서 볼 때 의미의 평면은 차이에 의해 추동되는 존재론적 반복의 시간 그 자체이며 후자의 맥락에서 볼 때 의미의 평면은 계열들의 미분적 관계들(즉 구조)의 함수값으로서의 특이점들이다.10) 왜냐하면 이 특이성들이 기표와 기의를 결정할 수 있도록 분배되면서 의미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특이성은 본질적으로 전 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이고 비개념적이며 중성적이다. 특이성들은 발산 혹은 수렴하는 탈물질적 사건들로서, 서로 계열화되어 특이한 구조를 구성한다. 이것은 사건을 본질과 혼동하는 독단주의와의 투쟁뿐만 아니라 사건을 사고와 혼동하는 경험주의와의 투쟁을 동시에 함의한다. 사건은 본질도 사고도 아닌 특이성들의 분출로 이해된다.11) 이제 우리는 사건을 다시 문제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건들은 문제들에 관련되며 문제의 조건을 정의한다. 문제가 존속하는 곳은 해들 자체의 생성을 조직하는 사건-총체(l'Idee) 안이다. 이 사건-총체 없이는 해들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문제는 결코 일시적인 불확정성이 아니라 사건-총체의 고유한 양상이며 사건들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지평이고 탈물질적 객관성들이다. 그러나 각각의 문제가 물음은 아니다. 문제는 계열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에 의해 규정되지만 물음은 빈칸이나 움직이는 요소들에 상응하는 우발점에 의해 규정된다.12)
특이성들의 형태 변이나 재분배는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각각의 조합, 각각의 배열은 하나의 사건이다.그러나 역설적 심급은 그 안에서 모든 사건들이 소통하고 분배되는 대사건이자 모든 다른 사건들이 그것의 조각들이나 단편이 되는 유일 사건이다. (...) 물음은 문제들 안에서 전개되며 문제들은 근본물음 안에 포함된다.13)
문제는 해와 관계를 맺지만 물음은 응답과 관계를 맺는다. 해들인 문제들을 제거하기보다 그들이 의미를 가지는 데 필수적인 존속하는 조건들을 거기에서 찾아내는 것과 같이, 응답들 역시 물음을 억압하지 않고 또 그것을 메우지도 않는다.14) 물음이 우발점에 상응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상상가능한 시간 연속체에서 최대치보다 더 큰 시간 안에서 모든 계열들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자리옮김하는 한번-던짐(unique lancer)이다. 반면 특이점은 상상가능한 연속적 시간에서 최소치보다 더 작은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계열적 최소치이다. 우발적인 한번-던짐은 혼돈이며 각각의 특이한 수는 이 혼돈의 조각들이다. 각각의 수는 특이점들의 배분을, 별자리들을 만들어 낸다. 이 배분은 결코 정주적이지 않으며 유목적이다.
이제 들뢰즈는 이상의 것을 직접적으로 시간에 대한 논의로 가져간다. 한번-던짐의 시간, 즉 결코 한계지어지지 않으며 효과들로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을 표면에 모으는 과거와 미래가 있다. 이것은 아이온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언제나 한계지어지며 원인들로서의 물체들의 활동과 이들 심층에서의 혼합상태를 측정하는 현재인 크로노스가 있다.15) 후자는 주기적인 시간으로서 물체들의 운동을 측정하고 물질에 의존한다. 전자는 표면에서의 순수한 직선이고 비물체적이고 한계지어져 있지 않으며 모든 물질에서 독립적인 시간의 빈 형식이다.16) 좀더 명확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아이온은 우발점이 그리는 직선이다. 각 사건들의 특이점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한히 나누는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소통하게 만들거나 선 전체로 펼쳐지고 늘어지게 만드는 우발점과 관련해 이 선 위에서 분배된다. 각 사건들은 아이온 전체에 적실하며, 모두 서로 소통하며 모두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 아이온의 사건, 즉 그들이 영원한 진리를 가지게 되는 사건을 형성한다. 오로지 물체들만이 서로를 투과하며 크로노스만이 사태들로 그리고 그것이 측정하는 대상들의 운동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빈 형식이자 시간에 의해 펼쳐지는 형식인 아이온은 그것을 늘 따라다니면서도 그것 안에 살지는 않는 것, 즉 모든 사건들을 대신하는 대사건을 무한히 분할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건들 또는 효과들 사이의 통일성은 물체적 원인들 사이의 통일성과는 전혀 다른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17)
우리가 코뮤니즘을 생각할 수 있는 평면은 바로 이곳일 것이다. 그것은 결코 물질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성일 수 없다. 그것은 사건들 혹은 효과들의 통일성으로서 물체들의 통일을 따라다니면서도 그 평면 외부에 있는 시간이다. 그것은 언젠가 도달할 시간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 어느 곳에서나 움직이고 있는 내속하는 시간이다. 코뮤니즘은 이런 의미에서의 사건, 즉 우발점에서 특이점으로의 이행을 표식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다.18) 이 시간은 혁명과 예술과 철학에서 발견된다. 이 카이로스의 사건은 위대한 정치의 시작이다.
우리 자신을 좀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우리의 피부를 북으로서 사용하고 그래서 ‘위대한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을 위한 것도 신을 위한 것도 아닌 빈 칸, 일반적인 것에 속하는 것도 또 개별적인 것에 속하는 것도, 또 인칭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닌 특이성들. 인간이 꿈꾸고 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와 자유, 효과 창출들에 기반하는 순환들, 메아리들, 사건들이 이 모든 것을 가로지른다. 빈 칸을 순환시키는 것, 전 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요컨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이다.19)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역설의 영역에 들어서야 한다. 역설의 열정이야말로 최고의 잠재력을 실현한다. 항상 두 방향을 동시에 향하는 역설은 시간을 대상화하여 측정하고 그것을 고정된 그 무엇에 비틀어 매어 사실상 시간을 정지시키는 양식의 시간을 절단한다. 그것은 무의식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의 등 뒤에서 상식에 반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미는 무의미의 방향을 취한다. 그렇지만 의미는 또한 기호작용의 조건들에 규정되지 않고서는 생성되지 못한다. 의미를 부여받은 계열들의 항들은 기호작용에 복종하여 가능한 현시 및 지시들의 법칙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표면 무의이이며 또 하나는 심층 무의미이다. 표면 계열의 무의미는 기호작용에 종속되지만(이차적 조직화) 심층의 극들에는 사실상 계열이 없다. 이것은 표면의 절단과 구분되는 균열(Spaltung)로서 모든 의미를 흡수하여 삼켜버리는 기관없는 신체, 밑의미(Untersinn)이다.20)
이제 의미를 인과의 맥락에서 살펴보자. 의미는 물체적 원인들 및 이들의 조합에서 유래하는 효과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원인에게 물어뜯길 위험을 감수한다. 원인들인 물체들 사이의 연결과 비물체적 효과들 사이의 연합이 생성되어 인과의 이질성이 출현될 때에만 의미는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 즉 비물체적 의미는 표면 위에서 비물체적 준원인과 결부되는 한에서만 물체적 원인과의 차이를 보존할 수 있다.21) 다시 말해 의미는 무의미, 우발점이 물체적 원인과는 별도로 그것의 준원인으로서 기능할 때 원인들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준원인에 의해 의미는 투과불가능성, 비생산성, 능동과 수동에서의 자유로움, 중성을 갖게 된다.22) 준원인은 선험적이고 중성적이며 전개체적 비인칭적 반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선험적 장에서 시작되는 표면적 조직화는 이 장을 발생적 장(특이성을 요소로 삼는 구조!)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것이 의미의 두 측면이다.
대체 어떻게 중성적 표면이 풍부한 생산성의 원리로 작동할 수 있는가? 이 선험적 장에서 방출되는 것은 특이성들이다. 특이성들의 방출은 무의식적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며 노마드적 배분에 의한 자기통일의 내재적이고 동적인 원리를 통해 작동한다.23) 특이성들은 개체들과 인칭들의 발생을 주도하지만 그 자체로 개체적이거나 인칭적이지 않다.24) 그렇다면 누가 말하는가? 내가 말하는가(데카르트), 그것이 말하는가(메를로 퐁티), 그들이 말하는가(푸코), 초인이 말하는가(니체)....
이제 개체의 발생에 대해 논해야 한다. 특이점들은 서로 이웃관계를 맺는다. 하나의 세계가 구성되는 것은 특이성의 계열들의 선별과 수렴이라는 조건하에서이다. 이것이 공가능성이다. 그리고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는 공가능하지 않은 세계들 안에서,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질러 어떤 것이 동일화될 때 나타난다. 이어 개체에서 인칭으로의 이행이 있다. 인칭은 하나의 유일한 구성원만을 포함하는 집합들이다.25) 각 인칭은 그 집합의 유일한 구성원이지만, 이는 그것에 다시 귀속되는 세계들, 가능성들, 그리고 개체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집합니다. 그렇다면 개체, 인칭이 어떻게 명제차원으로 이행하는가? 이것이 「정적 발생의 논리학․2」를 구성한다. “개체들은 무한한 분석명제들과 관련된다. 개체들은 그들이 표현하는 것 안에서 무한하지만 그들이 물체적 표현의 지대에서는 유한하다. 인칭들은 유한한 종합명제들과 과련된다. 인칭들은 그들의 정의에 있어 일정하지만 그들의 적용에 있어 일정하지 않다.”26) 개체들과 인칭들은 존재론적 명제들이다.
의미는 문제로서 표현되며 명제들이 그것에 상응한다. 문제는 발생적 요소의 실재, 명제의 어떤 테제로도 환원되지 않는 복잡한 테마이다. 문제는 해결가능성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 문제는 그것이 포섭하는 명제들과 유사하지 않다. 문제는 명제들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명제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명제들 안에 내속하며 열외존재(=(비)-존재)와 일치한다. 이 문제가 의미의 장이다. 명제가 의미의 겉이라면 의미는 명제의 안감이다. 의미는 명제 속에 존속하는 순수사건이다. 그것은 물체와 명제 사이에 형성되는 경계선으로서의 형이상학적 표면이다.
*미주
1)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45쪽.
2)같은 책, 48~49쪽.
3)같은 책, 51쪽.
4)같은 책, 74쪽.
5)명제의 빈위인 푸르다와 푸르러지다를 비교해 보라. 의미는 명제의 빈위가 아니라 사태의 부대물이다.
6)같은 책, 91~92쪽.
7)같은 책, 104쪽, 또 같은 책, 계열 12, 특히 160쪽 참조.
8)이것은 말들과 의미들, 음절적 요소들과 기호학적 요소들에 동시에 근거하면서 공존하는 계열들의 무한한 분지화를 수행하는 세 번째 종류의 신조어, 즉 선언적 신조어(disjonction) 혹은 말손가방에 상응한다. 축약하는 신조어(connextion), 순환하는 신조어(conjontion)는 말손가방(portmanteau)의 기능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같은 책, 113~4쪽.
9)같은 책, 116~7쪽.
10)같은 책, 119쪽.
11)같은 책, 124쪽.
12)특이성-(계열화)-사건-(집합화)-구조, 그리고 문제-사건-해.
13)같은 책, 129쪽.
14)같은 책, 129쪽.
15)같은 책, 136쪽.
16)같은 책, 138쪽.
17)같은 책, 140쪽.
18) 의미의 논리 계열 11에서 들뢰즈는 우발성과 특이성의 관계를 의미와 무의미의 내재적 관계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무의미는 그 고유한 의미를 말하는 하나의 말이다. 그것은 기호작용의 한 규정일 뿐만 아니라 의미를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반면 의미는 언제나 하나의 효과, 광학적 효과 음향적 효과 표면효과 위치효과 언어효과이다(같은 책, 146~7쪽). 구조주의는 의미가 무의미(죽음의 자리, 왕의 자리, 맹목적 오점, 떠다니는 기표, 제로값, 무대측면, 부재하는 원인, 빈칸 등등)에 의해 그리고 무의미의 항구적인 자리옮김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같은 책, 150쪽).
19)같은 책, 153쪽.
20)캐럴이 표면의 탐구자라면 아르토는 심층무의미의 탐구자이다. 같은 책, 계열 13 참조.
21)같은 책, 181쪽.
22) 후설이 상식과 경험의 관점에서 준원인(노에마)에 접근함으로써 생긴 결과(이중적 무의미에 대한 합리주의적 희화화)와 사르트르가 선험적 장에서의 정적 발생을 발견하고도 이를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막힌 한계에 대해서는 같은 책, 계열 14 특히 186~8쪽 참조.
23)같은 책, 194쪽.
24) 시몽동에 따르면 특이성으로서의 이 선험적 장은 1)장의 포텐셜 에너지 2)계열들의 내적인 공명 3)막들의 위상학적 표면 4)의미의 조직화 5)문제적인 것으로서의 지위 등의 특성을 갖는다. 같은 책, 196쪽.
25)같은 책, 215쪽.
26)같은 책,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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