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회화의 세계

[스크랩] 테마로 보는 미술(시조와 장르) / 바로크 미술

ddolappa 2016. 8. 29. 23:49

    
    
    르네상스 이후, 17세기에서 18세기 중엽까지 지속된 유럽의 건축, 조각, 회화적인 특징을 일컬어 바로크(Baroque) 양식이라
    고 한다. 바로크의 어원은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페롤라 바로카(perola barroca)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중세 ‘고딕(Gothic)’이라는 용어가 실상 고트족과는 아무런 연관 없이 그저 경멸의 의도로 후대인들에 의해 붙여졌듯이, ‘바로크’ 
    역시 그러했다. 18세기 중·후반, 독일 미술사학자 요한 빙켈만(Johan Joachim Winckelmann)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부활 
    옹호론자들이 볼 때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의 쇠퇴에 불과했다. 그것은 이상적인 비례와 균형을 중시한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너무나 과장되고 왜곡되어, 그야말로 가치를 잃어버린 진주와 같은 미술이었다. 
    
    ◇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 태어난 바로크 미술
    
    이후 20세기 들어 스위스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olfflin)의 연구를 필두로 바로크 미술에 대한 활발한 논의
    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학자들은 이 시기의 유럽 미술을 단순히 ‘과장되었다’는 의미의 ‘바로크’라는 용어로 통칭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실로 17세기 이후 유럽은 종교, 정치, 과학 모든 분야에서 각국의 고유한 상황에 맞게 변화를 이루고 
    근대화의 초석을 다지고 있었다. 
    이에 미술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당시 유럽은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1517년 가톨릭 교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주도한 종교개혁 운동이 발단이 되어 교황을 중심으로 단일체제를 유지해왔던 로마교회가 
    개신교와 가톨릭으로 양분된 상태였다. 
    이는 미술의 주된 후원자이자 고객이었던 교회 세력에도 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분열을 맞아 가톨릭에서는 포교의 일환으로 
    미술을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한 반면, 신교 지역에서는 호사스러운 교회 미술에 반대하고 우상숭배 논쟁을 벌이면서 더 이상의 
    대규모 미술 후원은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에 무역과 상업으로 부유해진 시민들이 새로운 고객층이 되었다. 
    따라서 가톨릭 국가를 유지한 이탈리아와 스페인, 플랑드르(오늘날 벨기에와 남부 네덜란드 지역)의 미술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득세한 신교 국가 네덜란드의 미술은 전적으로 달랐다.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위해 가톨릭은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했는데, 부패한 교회를 정화하고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유럽 대륙을 넘어 가톨릭 신앙
    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가톨릭의 개혁 노력을 
    반(反)종교개혁이라 한다. 
    로마에 지어진 일 제수(Il Gesu) 교회는 반종교개혁의 
    핵심 세력이었던 예수회 교단의 예배당으로,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이념이 미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준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예배당
    과는 달리 복잡한 장식과 소용돌이와 같은 새로운 요소
    를 도입한 일 제수 교회의 정면은 아마도 18세기 이론
    가들이 ‘바로크’라고 비난할 만한 원인이 되었을 것
    이다. 
    가톨릭은 손상된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중
    세시대 이상으로 미술의 힘을 빌어왔다. 뿐만 아니라 
    1563년 트리엔트 종교회의에서 통과된 형상 숭배의 법
    령을 통해 작품의 도상과 표현방식에도 개입하곤 했다. 
    그러면서 점차 안정을 되찾은 가톨릭 교회는 신도들의 
    시선을 압도할 만한 화려하고 극적인 미술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17세기경 로마에서 전 유럽으로 
    전파된 바로크 미술의 시작이었다.
     
    ◇  극적인 효과를 강조한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
    로마 가톨릭과 바로크 미술의 관계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가 개축
    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베르니니는 베드로의 옥좌가 있는 제단 부분을 화려한 금빛으로 장식하고 돔 지붕 아
    래에는 거대한 청동 닫집을 세워 가톨릭의 영광을 드높이고자 했다. 그리고 약 20여 년 뒤 성당과 광장을 통일성 있게 연결
    하는 열주 회랑을 만들었다, 성당 전면의 양편에서 길게 뻗어 나와 둥글게 광장을 감싸는 형태는 마치 신이 두 손을 벌려 
    신도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였다. 
    
    건축을 통한 이러한 극적인 연출과 감정적 효과는 베르니니의 조각 작품들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했다는 신화의 한 장면을 형상화한 [페르세포네의 납치]에서 
    베르니니는 차갑고 단단한 대리석을 부드러운 인간의 피부로 바꿔놓았다.  
    
    
    ◇  사실감 넘치는 카라바지오 화풍의 전파
    베르니니가 건축과 조각에서 극적이면서도 사실감 넘치는 바로크 미술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 북부출신
    의 화가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의 영향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북부 출신으로 북유럽의 사실
    주의 화풍을 구사했던 카라바지오는 화가로서 10년 여의 짧은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특히 종교적인 주제를 사실적인 묘사와 강한 명암 대비로 표현함으로써 유례없는 회화적 효과를 선보였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난 성서의 이야기를 그린 [의심하는 토마]에서 성스러운 사도들의 모습은 무지한 촌부들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는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확인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화면 속 좁은 공간 안에 배치된 인물들과 그들의 행위는 관람자로 하여금 강렬한 조명이 비추는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생생함과 긴박감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카라바지오의 회화가 모두에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비슷한 시기에 볼로냐에서 로마로 온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의 고전주의적인 종교화가 일반적
    으로 좀 더 선호되었다. 
    그러나 카라바지오의 화풍은 적극적인 포교의 일환으로 사실적인 종교화를 권장하는 교황청의 지지 하에서 이탈리아와 
    주변 국가 화가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카라바지오의 사실감 넘치는 묘사와 강한 명암대조법은 많은 추종자들을 낳았다. 
    그 가운데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아 델 디세뇨(Accademia del Disegno: 16세기 피렌체에 설립된 미술 교육기관)
    ’의 회원이 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영웅적인 여성상들을 다룬 역사화를 주로 제작했는데, 
    이는 종종 그녀가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아고스티노 타씨(Agostino Tassi)로부터 강간을 당했던 개인사와 연관해서 언급
    되곤 한다. 
    확실히 카라바지오가 그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보다는 같은 주제로 그린 그녀의 작품에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장
    의 목을 베는 강인하고 단호한 유디트의 모습이 목격된다. 젠틸레스키는 자신이 즐겨 그린 주제에서만큼은 카라바지오를 
    능가하는 강렬함과 호소력을 구사하면서 이탈리아 전역과 런던 등지에 카라바지오의 화풍을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
     
    이탈리아와 인접한 가톨릭 국가 스페인에서도 카라바지오식의 사실적이고 강렬한 바로크 미술이 전개되었는데, 그 중심
    에는 세비야의 하급 귀족 출신으로 20대에 왕실의 화가가 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가 있었다.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지오의 화풍에 매료되었으나, 보다 자연스럽고 세련된 기법으로 발전시켰다. 
    다른 화가들과 구별되는 벨라스케스의 탁월함은 물감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자유로운 붓질과 그것을 통해 전하는 미묘
    한 감정적 효과였다. 그가 1650년 로마 교황청에서 주문 받아 제작한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에서 우리는 매끈한 
    붉은 공단 망토와 부드러운 흰색 레이스 의상을 입고 다소 신경질적인 눈매를 가진 교황과 마주하게 된다. 
    더불어 그림 속 인물의 권위와 날카로운 시선은 관람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보며 느끼게 되는 이와 
    같은 심리적 동요는 베르니니와 카라바지오의 회화에서도 포착되는 바로크 미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16세기 말 로마의 일 제수 교회를 시작으로 새롭게 선보인 양식, 즉 ‘일그러지고 과장되었다’는 뜻의 바로크 미술은 사실상 
    17세기 이후 각 지역과 나라마다 참으로 다양하게 전개되어 하나의 양식 용어로 묶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미술의 전반적인 특징을 꼽자면, 그것은 바로 미술을 통해 드높이고자 했던 종교적, 영적 감흥이 일상에서
    의 심리적 효과 차원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미술가들은 전형적인 종교적 도상 이외의 일상적인 것
    들, 이를테면 주변의 사람들, 사물들, 풍경 등을 탐구하고 이를 미술의 소재로서 작품 안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더 이상 대규모 종교화 제작을 허용하지 않는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등장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한편, 보다 큰 맥락에서 
    볼 때 서구사회가 근대 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겪게 된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신교 국가 네덜란드
    의 미술을 중심으로 바로크 미술의 또 다른 이면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관련글]
    ●  카라바지오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3419
    바로크 회화의 어휘가 된 강한 빛의 사실주의
    ●  벨라스케스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3283
    17세기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중의 화가’
    ●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
    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고자 하며,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부설교육원에서 대중들을 위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  출처: 네이버캐스트(오늘의 미술), http://navercast.naver.com/art/theme/3786
    

출처 : 그저 그냥~
글쓴이 : 돌고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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