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 읽기 참고 자료

[스크랩] 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박원일)

ddolappa 2017. 8. 19. 11:03

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저자: 박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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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17  21:3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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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정치적으로 읽기
(The Gospel of Mark A Political Reading)

 저자: 박원일 목사(http://idlseminary.com/이곳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예수는 제국신학과 성전신학에 맞서서 어떻게 ‘신학하기’를 다시 했는가?
왜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선 자들이 성전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는가?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왜 로마제국 안에서 반역 행위였는가?
세례 요한의 세례는 당시 쿰란공동체가 행했던 입교의식과 어떻게 서로 다른가?
마가복음 저자는 왜 바울이 전한 복음 대신에 예수의 행적들을 기록해야 했는가?
마가공동체는 어떻게 다른 성경 없이 마가복음만으로도 신앙생활에 충분했는가?
예수의 첫 번째 귀신 축출 사건이 왜 하필이면 거룩한 회당 안에서 벌어지는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리던 예루살렘 전통신학에 대해 예수는 왜 냉소적인가?
예수는 왜 변화산에서 자신의 부활에 관해 직설법이 아닌 가정법으로 말했는가?
예수는 정말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까?
‘주님’이 마태(34회), 누가(27회), 요한(33회)과 달리 왜 마가에는 한 번만 나오나?
마가는 왜 열두 사도들을 계속 비난하는 반면에 무명인들의 믿음을 칭송하는가?
지배체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 “더러운 영”에서 벗어나는 길은?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박원일 목사는 University of Washington,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를 거쳐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객원교수로 있는 동안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캘리포니아 버뱅크 소재 새길크리스천교회(제자회)에서 ‘말 되는 신학과 신앙생활’을 목표로 공동목회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The Book of Amos as Composed and Read in Antiquity (Peter Lang, 2001)가 있으며, 번역서로 『하느님의 강』(2005)이 있다.

이 책은 구약신학을 전공한 저자가 오랜 세월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갈릴리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들과 교인들에게 마가복음을 구약과 연관시켜 가르치면서 함께 토론했던 대화의 결실이다. 저자는 성서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적 이해, 역사적 접근, 신학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특히 저자는 체드 마이어스의 마가복음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하여, 예수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1) 지배체제에 대해 저항하기(challenge), (2) 체제의 경계선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 돌보기(care), (3) 새로운 공동체 형성하기(create)라는 관점에서 일관되게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이처럼 예수의 사역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해석하는 저자는 1부에서 “마가복음의 기본 개념들”을 설명하고, 2부에서는 “갈릴리와 유대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해설하고, 3부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해설하면서,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와 부활을 독특하게 재해석한다.

따라서 이 책은 마가복음의 전체 구조에 대한 분석과 본문에 사용된 단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밝혀 마가복음 기자의 정확한 의도를 찾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예수의 신학 다시 하기”와 “마가복음 기자의 신학 다시 하기”를 토대로, 우리 각자의 “신학 다시 하기”를 촉구한다. 즉 예수가 당시 제국신학과 성전신학에 맞서서 신학을 다시 전개했던 것처럼, 또한 마가복음 기자가 당시의 바울 신학에 대해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신학을 다시 전개했던 것처럼, 오늘날 약탈적인 금융자본주의체제와 제국들과 기업국가들의 전쟁경제체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도전적인 질문을 제기하도록 격려함으로써 각자의 삶에 정직하며, 하느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는 체제변혁적인 복음을 고백하며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추천사

저자는 마가복음에 기술된 예수의 삶, 기적, 비유, 죽음과 부활 등을 당대의 사회적 갈등과 관련지어 해석하는 ‘정치적 읽기’를 시도한다. 성서 시대의 정치적 갈등을 ‘예수의 경계 허물기’라는 말로 표현하며, 예수를 요즘의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타 종교인과 같이 사회에서 배제당한 경계선 바깥의 사람들을 새로운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인 존재로 평가한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김진호 |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박원일 박사는 정치신학적 관점에서 마가복음을 읽음으로써 2,000여 년 전 쓰인 말씀에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원숙한 신학 지식과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진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기쁜 소식이 무엇이며, 이를 향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살피게 한다. 이 책이 신앙인들, 특히 청년들이 넓고 깊은 복음을 맛보고 신앙생활에 생기를 되찾게 하는 통로가 될 것을 확신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추천한다. 김학철 | 연세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신학자들의 논의를 참고하여 원문의 뜻에 충실하게 일관된 논점으로 성서를 묵상하기 원하는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의문을 가진 교인들의 갈증을 풀어줄 만한 책이다. 제목에 붙은 ‘정치적’이란 표현에 너무 부담을 느끼지만 않는다면 이 책은 마가복음을 꼼꼼히 공부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동반자 역할을 해줄 것이다. 평이하고 간결하게 쓰인 글이지만 탄탄한 지식과 폭넓은 독서에 바탕을 둔 내용이 가득하기에 일독을 권한다. 자기의 머리로 사고하고,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되새기고자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복이 있을진저. 양희송 | 청어람 ARMC 대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마가복음에 담긴 예수의 가르침이 지배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위적 경계선을 전부 허물라는 정치적 메시지였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은 ‘신학 다시 하기’ 혹은 ‘성서 다시 읽기’를 통해 성서의 교훈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단 그리스도인들뿐 아니라 현실 사회를 걱정하는 타 종교인 또는 무종교인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종교 간 대화의 물꼬가 트이기를 기대한다.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예수는 없다』 저자

이제껏 마가복음을 통해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의 인습에 따른 차별과 분리에 저항했던 예수의 언행이 지닌 정치신학적 함의를 이처럼 생생하게 풀어낸 책은 없었다. 저자는 성서 본문을 공시적으로 탐색함으로써 신학이 어떻게 영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세상과 소통하고 변화를 이끌어가는 공공의 담론이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책은 성서 시대보다 한층 더 교묘한 방법으로 국가 간 경계가 나뉘고 있는 오늘날 신학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필요한 탁월한 지침을 준다. 이상명 | 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총장

평소에 예사롭지 않던 그가 던진 ‘마가복음을 다시 읽자’는 제안은, 그답지 않게 예사로와서 오히려 놀라왔다. 오래 된 같은 글을 이렇게나 다르게 읽을 수 있음을 함께 발견하면서, 앞으로 이어갈 그와의 대화에 높은 기대가 걸린다. 장규열 | 한동대학교 언론정보문화학부 교수

제1부 마가복음의 기본 개념들 

제1장 예수의 복음
마가복음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것은 곧 마가복음은 예수의 복음을 말하는데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또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설명이다.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란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차별화 선언이다. 사람들은 메시아, 곧 다윗의 후손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구원해 주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회복을 가져다주길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 - 예수가 그리스도다 - 라는 선언은 예루살렘 정통신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반역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고대근동 문화에서 신의 대리 통치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특히 로마제국 하에서 황제는 신의 대리통치자를 넘어서 신격화되기까지 했다. "신", "신의 아들", "세상의 구세주" - 이 모두는 로마황제에게 붙이는 직함이고 찬사다. 그런데 이것을 시골 갈릴리 출신의 목수 예수에게 붙인다고 상상해 보자. 오싹한 전율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이 시작부터 내건 정치적 슬로건이자 신학적 메시지다.

예수의 복음인가, 예수에 관한 복음인가?

어떤 번역은 '예수의 복음'이라고 이해하는 반면, 또 다른 번역은 '예수에 관한 복음'이라고 읽는다. 둘 다 문법적으로 가능한 번역이다. 이 중 보다 쉽고 자연스러운 번역은 "예수의(of) 복음", 곧 예수가 전한 복음이라는 이해다. 예수의 복음이 내포하는 또 다른 의미는 세상의 복음, 즉 로마제국이 전하는 복음과의 차별화 선언이다. 로마제국의 복음은 전쟁에서의 승리나 로마 황제의 방문을 의미했다. 지배체제의 복음이란 소수의 특권층에게는 좋은 소식인지는 몰라도 피지배계급인 대다수 군중들에게는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다. 

복음의 시작
그렇다면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을 처음에 둔 마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초대교회에 현존하던 유일한 문서가 바울 서신이라고 볼 때, 바울의 복음 - 바울이 전하는 복음 - 의 내용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음의 전부일까?" 복음을 말하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 이전에 예수의 삶, 곧 공생애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이 마가복음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의 시작이고 출발점이다.

 복음의 내용
그렇다면 예수의 복음을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또 그 핵심은 무엇일까? 막 3:14-15,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장면을 통해 이렇게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더불어 사는 새로운 공동체 형성이다. 이는 기존의 공동체가 그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고발을 담고 있다. 둘째로, 전도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복음, 지배체제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다른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이다. 셋째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병자(피해자)를 돌본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기 좋게 영어의 머리글자를 딴 C. C. C.라는 단어를 가지고 접근해 보자. 

Challenge. 지배체제에 저항하기. 이것은 기존의 제국주의 신학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자세다. 예수와 지도자들 간의 대립은 "그들에게 증거하라"(1:44; 6:11; 13:9)는 말 속에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들이란 예루살렘의 지배체제를 수호하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헬라어 제3격은 우호적이거나 혹은 적대적으로 세분화해서 번역된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세 경우는 모두 적대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모두 저항의 의미를 담는다. 문둥병자를 공동체에서 분리시킨 제사장에게 저항해 보이라는 말이고(1:44), 제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고(6:11), 회당에서 매질하는 권력자와 임금 앞에서 증언하는 몸부림이다(13:9).

Care. 병든 자 돌보기. 기존의 지배체제 하에서 신음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이미 체제의 경계선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이다. 이런 피해자들을 돌보는 일이 예수가 행한 병 고침 이야기의 핵심이다. 저항이 지적인 영역이라면, 돌봄은 정적인 영역으로, 측은지심의 감성적 마음이다. 병자를 고치는 행위는 개인의 신체적 정식적 회복을 넘어, 사회 전체가 건강하게 됨을 의미한다. 복음서의 병 고침 이야기는 표층적 증상보다는 심층적 원인에 초점이 모아지고, 그런 뜻에서 복음서의 병 고침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시사 하는 바가 크다. 

Create. 새로운 공동체 형성하기.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현재 체제의 비뚤어진 것을 고치려는 의지적인 행위의 발로다. 지. 정. 의에서 의에 해당한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지배체제가 지배자들의 감시와 억압에 의해 유지된다면, 예수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의 운영체제는 감동과 설득력에 기초한다. 이것이 바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신학이 필요한 이유다. 

제2장 죄와 회개, 그리고 믿음
죄와 회개는 오늘날 교회 내에서 흔히 쓰이는 단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처음 그 말이 쓰였을 때 과연 현대 교회가 이해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회개에 대하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 "회개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구절을 보자. 여기서는 회개와 관련된 다른 문구 없이 '회개하다'라는 말이 홀로 쓰였다. 사전적 의미로만 읽으면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메타노에오'(회개하라)에 대해 메츠거는 다음 세 개의 표현을 통해 '변화'의 의미를 찾아낸다. 

- 메타바이노 :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다, 떠나다.
- 메타모르포 : 다른 형태로 바꾸다, 변형하다;
- 메타노에오 : 생각과 목적을 바꾸다, 회개하다.

이런 의미로 볼 때 회개란 기본적으로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행위이다. 감정의 변화라기보다 뜻과 의지의 확립이고 전환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 4:17)라는 선포는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어떤 상황과 구체적인 대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까지 이 세상의 이데올로기, 가치관, 복음에 대한 '마음 씀을 바꾸고', 이제는 "하느님의 복음"(막 1:14)을 따라 살라는 권고요 초대의 말씀이다. 회개는 이처럼 뿌리 깊은 가치관과 신앙의 변화를 의미한다. 

죄에 대하여
마가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도 죄 사함의 세례를 받았다. 만일 예수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야 했다면, 이런 이해는 기독교 신조에 크게 저촉될 문제다. 대속교리에 의하면 흠이 있는 예수는 속죄 제물로 부적격하고 따라서 죄를 대속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이를 죄로 여기지 않았다고 말했다(롬 5:13). 그런데 성서(토라, 율법)가 어떤 행위(말, 생각, 행동)에 대해 죄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죄가 되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똑같은 행위를 가리켜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판단(법)이 도입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판단의 대상과 경험은 존재했었다. 

월터 윙크는 그의 책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지배체제란 "권세들의 네트워크가 우상의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되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 보았다. 인간의 문명 초기부터 힘과 폭력을 통해 개인의 욕심을 추구하다 보니, 그 폭력의 신화를 둘러싸고 자연스럽게 지배체제가 형성되었다. 아울러 육체를 따라 산다는 의미, 곧 죄에 빠져있다 함은 인간 본연의 자세를 버리고 "타인의 의견에 굴복하여 외면화된 자신", 다른 말로 "지배체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이란 - 곧, 죄란 - "단지 우리 모두가 지배체제의 조건들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죄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을 넘어 사회적, 구조적 악을 지칭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죄란 예수의 가치관과 복음을 떠나 세상의 가치관과 복음을 좇아가는 행위이다. 본디 그리스도인이란 인간 본연의 삶을 그리스도로서 예수가 보여준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믿음
죄와 회개에 대해 공부하면서 함께 짚고 넘어가야 할 용어는 '믿음'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구절을 보면 회개와 믿음이 서로 연관된 개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이란 단어가 복음서에서 쓰였을 때는 어떤 교리적 이해도 성립되기 이전이었다. 따라서 어떤 신조에 동의한다는 식의 교리적 의미로 쓰인 믿음은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어떤 대상에 대한 막연한 신뢰나 동의를 넘어서 구체적인 행동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가치체제, 곧 가치관을 의미한다. 우리는 단순히 믿음을 말하기보다 누구의 믿음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예수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 복음을 믿으라"(막 1:14-15), "하느님의 믿음을 가지라"(막 11:22)고 가르쳤다. 이렇게 예수는 '하느님의 복음', '하느님의 믿음'을 말했지만, 우리말 성경은 하나같이 "하느님을 믿으라"고 번역했다. 

믿음의 반대 개념은 불신이 아니라 의심이다. 아무것도 믿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두 가지 이상을 믿는 것이다. 성서적 의미에서 의심이란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동시에 다른 대상을 믿는 것이다. 두 가지 의견이나 생각, 가치관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이 의심이고 적은 믿음 혹은 믿음 없음이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하느님과 맘몬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생각이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 예수가 그리스도 - 라고 말할 때 당신네들에게는 세상의 왕이 그리스도일지언정 우리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차별화 선언이다. 

'하느님의 믿음'이란 표현은 '예수의 복음'과 같이 그 출처를 말함과 동시에 우리들 정체성 형성에 근간을 이룬다. 하느님의 복음이 예수의 복음이고 또한 우리의 복음이다. 하느님의 믿음이 예수의 믿음이고 또한 우리의 믿음이다. 이처럼 믿음, 복음, 가치관은 서로 바꾸어 사용해도 무방하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죄와 회개를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죄와 회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결과이다. 회개는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 번만 제대로 공부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면 된다. 월터 윙크의 말로 다시 정리하면, 죄란 우리 모두가 지배체제의 조건들 아래 살고 있다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회개란 비록 몸은 이런 지배체제 아래 놓여 있을지라도 마음만은 그 지배이데올로기를 좇아 살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 복음, 믿음을 따라 살겠다고 마음가짐을 새롭게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인 세례 의식을 가짐으로써 이 결단, 의식의 전환을 알린다. 이런 의미에서 회개는 하나의 결단이자 뜻을 세움이고 이제 남은 것은 '의심하지 않고' 그 마음가짐(믿음)으로만 사는 길이다. 

신앙 공동체로서 교회는 죄인들의 모임이 아니다. 오히려 회개한 이들이 예수의 정신에 입각하여 형성한 공동체로,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가복음을 남긴 사람들이다. 죄는 개인적 타락보다 더 심각한 사회 구조악이다. 이 세상이 세운 가치관, 이데올로기, 복음의 영향 속에서 헤어나지 못함이 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죄는 역사적 의미의 '원죄'보다 폭력의 신화적 의미에서 더 뿌리 깊이 그리고 더 가까이 우리 주변에 있다. 

제3장 하느님 나라 vs 로마 제국 

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하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 곧 유일신 개념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보통명사 '하느님'을 고유명사화 한 셈인데 이것은 여러 면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래아를 에버노트에서 타이핑할 수 가 없어서 설명 패스) 더구나 하나라는 숫자에 존칭접미사 '님'을 붙이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성서, 특히 히브리 성서에서 말하는 유일신 개념은 신이 하나만 있다는 말이 아니라 여러 신들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정체성 선언(출 20:3; 신 6:4)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의 신만 섬기고, 둘을 함께 섬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하나님'을 굳이 써야 한다면, 이 말을 헬라 철학의 모나드 개념에 비유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고대 헬라 철학에서 모나드는 존재의 근원으로서 분리되지 않은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출 3:14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있는 존재'로 소개한다. 따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존재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느님이라는 명칭을 서로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신의 이름 안에 가두는 오류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에서 '하느님'이라는 말을 굳이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대자인 신을 특정한 이름 짓기로 가두려는 것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다.

 왜 천국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인가?
복음서의 핵심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나라'이고, 예수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 운동'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하느님 나라'보다 '천국'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성서에서 '천국'이란 말은 총 32번 쓰이는데 모두 마태복음에 나온다. 아마도 마태복음 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있는 '하느님' 대신 '하늘' 이란 말을 넣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하늘나라가 지상의 나라와 대조된다고 지레 짐작한다. 더 나아가 천국을 이 생과 구분되는 저 생, 곧 사후의 삶으로 비약시킨다. 심지어 요즘에는 '천국환송예배'라는 신조어마저 널리 쓰이고 있는 형편이다. 이 모두가 '나라'를 통치적 개념이 아닌 지역적 개념으로 이해한 까닭이다. 하늘과 땅을 서로 대조시킬 수는 있지만, 이것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일 뿐, 문자적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은 공간적인 위치라기보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우주의 근원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에서 하늘나라는 하늘님(하느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상징한다. 그 상대 개념은 땅의 나라, 곧 이 세상의 지배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바로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꿈꿨을 것이다. 

제4장 성령과 더러운 영 

마가복음 성령 이해의 기본 조건들
먼저 마가복음을 읽을 때 성령을 삼위일체와 같은 교리에 비추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삼위일체 교리가 등장한 것이 4세기 이후에 이르러서였던 것에 반해 마가복음은 - 그리고 성서는 - 그보다 훨씬 이전에 쓰인 문서이기 때문이다.

첫째, 마가복음에슨 예수와 하느님을 동일시하는 사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성령 - 거룩한 영 - 에 대해 말할 때, 그 상대 개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가복음에서 '거룩한 영'에 대한 상대개념은 "더러운 영"이다. 셋째, 당시에는 영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을까? 본래 히브리 사상에는 천사나 악마와 같은 영적 존재나 부활, 심판 등의 개념이 없었다. 일부 유대교 종파에서 악마를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게 된 이후였다. 신약성서의 다른 배경이 되는 그리스 - 로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고대 그리스에는, 그리고 그리스어에는, 악마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다"(라일리, <하느님의 강>, 149) 

앞에서 말한 천사나 악마와 같은 영적 존재는 이런 영이 의인화되고 인격화된 경우를 가리킨다. 월터 윙크는 그의 책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인격화된 존재로서의 영을 내부의 영적인 실재가 외부에 - "우주의 스크린에" - 투사된 것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인 힘, 즉 "사탄" 혹은 "귀신"은 단지 상징이고 투영된 것일 뿐 실재로 그 이면에는 자신의 무서운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을 앞의 장에서 이야기한 "죄와 회개"라는 주제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나의 잘못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우주 바깥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귀신이나 악령, 혹은 초자연적 존재를 설정해 놓고 거기에 내 잘못(죄)을 떠넘기면(투사하면), 나는 결코 내 잘못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수와 성령 세례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일까? 한 마디로 정리하면 성령세례란 영에 이끌리는 삶, 신들린 삶을 뜻한다. 예수의 세례는 요한의 물세례와 사뭇 다르다. 물세례는 죄를 씻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예수의 성령세례는 영이 거룩하게 나타나서 우리들 삶이 단숨에 변화되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본다. 여기에서 하늘이 열리고 음성이 들리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하늘이 열리는 일은 없다.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다. 혹 누군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되면, 이것은 정신분열 증세다. 하늘과 땅이 열린다는 말은 어떤 위대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뜻하는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다. 이렇게 열리는 하늘은 바깥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안에만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느님의 영이 자리 잡고 있는 세계가 있다. 곧 자신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말이다. 이렇게 누군가의 내면을 깊숙이 볼 수 있는 존재는 그 사람 자신 밖에는 없다. 이렇게 존재의 깊은 내면 속에서 만난 하느님의 영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낸다. 예수의 삶을 세상 한 가운데로 이끌어낸다. 이렇듯 성령세례는 마커스 보그가 말한 신에 이끌리는 삶이다. 그리고 그 신의 거룩한 나타남이 성령이다. 

제5장 기적과 병 고침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
마가복음에는 소위 '기적 이야기'가 특히 많이 등장한다. 혹자는 병 고침과 기적 이야기를 별도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 둘은 늘 맞물려 등장한다. 단지 차이라면 그 기적의 대상이 인간이냐 자연이냐에 있다. 이 이야기들이 던지는 질문과 메시지는 무엇일까? 두 가지 관점으로 접근해 보자. 

첫 번째 관점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모든 사건은 문자 그대로 병 고침 이야기며, 자연현상을 초월하기에 기적이라고 부른다는 논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 이'다. 문제는 특별한 능력을 행하던 그 예수가 지금은 부재하며, 이 세상에서 이런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만약 현재에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기적이 일어난다면 예수가 예외적인 인물이라는 관점이 문제가 된다. 또 일어난다 해도 거기에는 규칙성이 결여된다. 기적의 수혜자 입장에서 볼 때, 형평성과 공정성에 문제가 제기된다.

 두 번째 관점은 예수의 기적과 병 고침 이야기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고 이를 은유적 상징적 해석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상징으로서의 기적 

1. 귀신(더러운 영) 축출(1:21-28)
회당이 '그들' - 곧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 - 의 모임이라면, 예수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회당(모임)을 형성한다. 앞 장에서 이미 귀신축출을 예수의 가르침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다.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 기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새로운 가르침이다!"라고 외쳤다는 사실은 앞으로 이어질 예수의 사역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라"(1:25)고 명할 때, 이것은 더러운 생각, 정신, 이데올로기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귀신축출, 병 고침은 예수의 가르침이란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2. 시몬 베드로의 장모와 열병
여기서도 주목해야 할 사실은 "열병이 떠났다"(1:31)는 표현이다. 더러운 영(귀신)의 경우처럼 열병을 의인화, 인격화해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쓰인 단어는 "일어나다, 일으켜 세우다"(egeiro)로 마가복음에만 19번 쓰였는데 특별히 부활과 관련이 있다. 나중에 부활과 관련해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마가복음에서 부활이란 비인간적인 삶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섬을 뜻한다. 다시 말해, 문자적으로 죽고 다시 사는 - 그런 의미에서 부활하는 -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존엄성을 회복한다는 의미다. 예수의 병 고침은 사람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는 상징적 행위가 된다. 

3. 문둥병과 격리된 삶(1:40-45)
문둥병자 이야기는 예수가 병을 고친 것이 단순한 의료행위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문둥병자는 세상과 격리되어 있다. 레위기에서는 문둥병자로 하여금 자신이 "부정하다, 부정하다" 말하게 함으로써,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도록 명한다(레 13:45). 그리고 정결예식을 통해 이 죄를 씻도록 하는데, 예수는 이런 전통적인 이해 - 부정함과 전염 - 자체를 모두 배격한다. 본문에 "깨끗하게 하다"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말의 배경은 레위기에 나오는 표현이다 :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고, 제사장은 단지 깨끗하게 됨을 선포할 뿐이다. 막 1:40을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로 번역했지만, 실은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다고 (선포)하실 수 있습니다"로 읽어야 할 것이다. 같은 단어가 막 7:19에도 쓰였는데 거기에서는 "깨끗하다고 (선포)하셨다"로 번역했다. 

이와 연관해 주목해야 할 것은 '저들에게 증거하라'는 말인데, 이 말이 마치 건강하게 된 것을 재검사로 확인받으라는 뜻으로 들릴 수 있다. 여기서는 '저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같은 표현 "저들에게 증거로 삼으라"는 말이 마가복음에 두 번 더 나온다. 제자들을 말을 듣지 않는 사람에게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려 증거를 삼고(6:11), 회당에서 매질하는 권력자와 임금 앞에서 증언하는 몸부림이다(13:9). 지배체제의 일꾼인 '그들에게' 향한 절규이자, 저항적인 몸짓이다. 

기적 이야기가 남긴 교훈
그리스도교란 그런 초자연적인 기적의 종교가 아니다. 마가복음에서 기적 이야기를 통해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연계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로 본 그리스도교의 참 모습이다. 

제2부 갈릴리와 유대에서

 제6장 마가복음 구조분석 - 전체 줄거리
마가복음에서 기술한 예수의 행적은 한 마디로 '경계선 없애기'이다. 예수는 지배체제가 만들어 놓은 분리와 정복, 그리고 이런 체제에 순응해 사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구태의연한 태도와 가르침을 타파하고자 했으며 더불어 사는 삶을 주창했다. 두 번의 바다를 건너는 사이 지배체제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을 허무는 행위의 시작이었다면, 이것의 절정은 축배요 잔치가 된다. 두 번의 군중을 먹이는 사건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이다. 화합과 용서, 감사와 나눔으로 경계와 차별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참 모습이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단순히 지역 이름이 아닌 상징적인 무대설정이다.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내포한 말이다. 예루살렘 지배체제의 영(더러운 영)을 따라 살지 않고 갈릴리 예수의 영(성령)을 따라 살고 실천한다. 이것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이라는 말에 담긴 또 다른 의미다. 

제7장 유대 지도자들과의 분쟁 I(2:1-3:6) 

중풍병자를 고침(막 2:1-12)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이 말을 들은 서기관들은 예수가 신성모독을 했다고 정죄하지만, 예수는 단지 죄 사함을 선포한 것이다. 수동형으로 쓰인 '죄 사함을 받았다'는 표현은 능동적 주체인 하느님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가 "인자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라고 한 말은 "죄 사함을 선포할 권세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가 묻는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 어느 것이 쉽겠느냐?"(2:9) 비교되고 있는 두 문장은 표현이 다르지만 모두 같은 의미이다. 앞의 것은 종교적, 정치적 용어를 사용한 표현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의 언어이다. 이어진 말은 "그러나"(2:1)라는 접속사로 연결되는데, 당연히 후자, 곧 일상의 말이 알아듣기 쉬울 텐데 굳이 어려운 종교적, 정치적 언어를 쓴 이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인자(사람)에게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여기서 죄는 빚(debt)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불구의 몸으로 일할 수 없기 때문에 빚(죄)을 떠안게 되었는지, 혹은 빚을 갚지 못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 그를 무기력(paralutikos)하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분명 중풍병자는 빚(죄)에서 헤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지배체제의 피해자로서 비관적 운명에 빠져 있던 그가 이제 예수를 만난 후 주체적인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가 올 때는 친구들 손에 들려왔지만, 나갈 때는 자기 침상을 들고 스스로 걸어 나간다. 침상이 중풍병자가 처한 운명과 속박을 상징한다면, 일어나 걸어가는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인간성의 회복, 곧 죄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한다. 

막 2:11 헬라어 본문에 담긴 뜻을 풀어서 해석하면, [늘] 일어나는(현재 진행형, egeire) 네 상을 [단번에] 가지고(단순 과거형, aron) 집으로 [항상] 가라(현재 진행형, upage)는 뜻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일시적인 병 고침 - 기적 - 이 아니다. 지속된 투쟁, 곧 삶의 태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2:12). 이를 지켜본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다. 만일 중풍병자를 일으킨 사건이 단지 또 하나의 기적 행위였다면, 이는 이미 경험했던 유사한 사건 중 하나일 뿐이었을 것이다(1:32-34). 

"빵" - 밥상 공동체(막 2:13-17)
빵이란 표현은 마가복음에 21번 나오는데, '식사'의 의미로도 쓰인다(3:20). 이를 통해 마가복음이 밥상공동체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보이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의 신학적 구조 속에서 "빵"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일용할' 양식을 가리키는 문자적 의미로, 몸에 영양분을 공급한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의미로, 육체적 포만감과 함께 정신적인 위로, 또는 소속감 등을 암시한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을 때, 빵과 말씀이 대립 관계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육체와 정신만큼이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세리와 죄인은 마가공동체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 죄인이란 빚진 자, 곧 세금을 내지 못한 자를 일컬으며 세리는 세금을 걷는 사람이다. 따라서 세리와 죄인(빚진 자)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기 어려운 상대이다. 하물며 그 둘이 한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고 상상해 보자. 이것이 나눔과 포용의 정신을 실천하는 예수의 새로운 신학하기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경건의 생활(2:18-22)
포도주와 부대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포도주는 예수가 가르치는 새로운 가르침과 신학이고, 부대는 그 신학을 담는 틀이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붙이지 않듯, 구태의연한 사상적 체계 속에 새로운 생각을 넣을 수 없다. 둘 다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신학 다시하기'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생각하는 기존의 신학적 틀 안에서 새로운 신학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렵다. 

제8장 새로운 대안공동체(3:7-35) 

대안/대항 공동체
마가복음은 후대 사람들이 전하는 예수 이야기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예수의 시대(30년대)와 마가공동체의 시대(70년대)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예수는 열 두 사도를 택한다(3:14). 마가복음에 제자(mathetes, disciple)라는 말이 46번 쓰였는데 반해, 사도(apostolos, apostle)라는 말은 드물게 나온다(3:14; 6:30). 여기에 쓰인 '사도'가 바울 서신에 나오는 것처럼 특정 인물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전 12:28). 열둘이라는 상징적 숫자에 담긴 의미는 당시 로마제국 하에서 예루살렘 중심의 특권층이 다스리는 제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첫째,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생활한다. 이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의미한다. 기존의 혈연, 지연 혹은 사회적 지위, 권력에 따라 형성된 분할과 정복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행위다. 둘째, 예수는 제자들에게 전도를 명한다. '도'(로고스)를 전하라는 명령이다(2:2). 여기서 '도'란 무엇일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복음'(1:14)이며, 사람들이 목격한 "새로운 가르침(1:27)이다. 또는 도는 지적인 영역에 속하여 자성(깨달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과 함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 나타난다. 셋째, 제자들에게 귀신축출의 권세를 주었다. 귀신은 더러운 영과 같은 의미이다(6:7).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을 옳게 쓰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는 데 쓰는 잘못된 모습이 '더러운 영'이다. 지배체제에 물든 에고(Ego)의 욕심에서 벗어나서 그 피해자를 돌보라는 것인데 이러한 정적인 행위가 보살핌이다. 

꾸짖음과 경계
마가복음에는 '꾸짖다'(epitimao, rebuke)는 말이 총 9번 나온다. 예수가 더러운 영을 꾸짖은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를 따르지도 않으면서 아는 척 혹은 친한 척 하는 그들의 행위가 역겨운 것이다. 더러운 영이 예수를 자신들이 만든 틀에 가두고 조정하려고 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와 가족
가족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가 하는 일을 귀신의 일로 매도한다. 이는 지배체제의 권력자들이 도전을 받을 때 흔히 쓰는 수법이다. 자신들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을 악의 세력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한국의 군사정권 시절 체제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을 빨갱이로 매도한 것과 흡사하다. 또한 교회에서 교단의 체제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 역시 같은 발상이다. 예수의 병 고침, 귀신축출이 귀신의 왕의 도움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업적을 폄하할 뿐 아니라, 그를 따르는 군중들에게 은근한 협박을 가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전하는 하느님이 귀신들의 왕이란 말인가?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에게 사함이 없다'는 말로 저들을 꾸짖는다. 

예수가 말한 '용서받지 못할 죄'란 하느님을 거스르는 것이다. 여기서는 제도적인 죄를 가리키고 있는데, 곧 지배체제를 향한 일갈이다. 예수는 이 말을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에게 하고 있다. 그들이 예수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혔다고 하자 이를 되받아서 한 말이다. 이렇게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학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해서 읽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제9장 씨앗, 말씀, 신학하기(4:1-34) 

열 두 (제자)와 함께 그의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
문제는 열 두 제자인데 그들은 마음이 둔하여져 깨닫지 못했다고 여러 번 지적당한다(4:12; 6:52; 7:14; 8:17, 21).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마태복음과는 달리 깨달음에 문제가 있다(마 16:12; 17:13 비교). 예수의 말씀과 신학을 표면적으로는 따르는 듯하지만 그것을 실제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지 못한 상태가 외부인의 모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마가복음이 당면한 신학적 문제이자 담론의 초점이었을 것이다.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의 시간대(역사적 배경 - 30년대)와 독자의 시간대(이야기 배경 - 70년대)를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시(그리고 현재) 마가복음을 읽는 사람들과 열 두 제자와의 시대적, 신학적 차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함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유대 지도자들은 그 구심점을 잃고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도 예수 공동체는 살아남았고 조직화되었다. 그리고 소위 열 두 제자 /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의 핵심 멤버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리다툼에 눈이 멀었고(9:33-34), 어린아이들을 등한시 했으며(10:13), 무엇보다도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6:52; 8:17). 반면 앞에서 말한 '예수의 주위에 있었던' 마가공동체는 예수의 참 뜻을 알고 그 정신을 따른다. 이것이 마가복음이 담고 있는 정체성 선언이자, 신학적 메시지다. 

제10장 경계선 없애기 I(4:35-5:43)
-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예수이다. 예수 이야기가 허구이든지, 그리스도교는 바울이 종교라고 주장하든지, 혹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하나님을 믿는 종교라고 말하든지(대중 종교) 간에,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은 예수 이야기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 이야기는 그리스도교 담화에서 빠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핵심이 되어야 한다. 

- 성서는 경전으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가치가 있다. 다만 성서 언어가 그 자체로는 죽은 언어이고, 당시의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서 쓰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성서를 읽을 때 문자적 이해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자명해진다. 문자가 가리키는 사건/경험을 통해 저자가 품은 의미/가치가 독자에게 전달될 때 비로소 성서의 권위가 되살아난다. 

- 교회의 성경공부가 교리와 신앙고백을 통해 기존의 신학을 되풀이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전통 - 좋은 의미에서 정체성 문제 - 속에서 내 삶을 의미 있게 가꾸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혈루증 여인과 소녀의 소생
성과 속,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내부인과 외부인 등은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배자임과 동시에 피지배자이다. 가정에서는 지배자 위치에 있지만, 사회적으로 피지배자 위치에 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은 주인공의 위치에 서 있을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자나 회당장의 자리에서 가진 자처럼 행동하거나 혹은 주변 군중들처럼 구경꾼 역할을 하기도 할 것이다. 기존체제가 만들어 놓은 질서와 이념에 의해 사람들을 나누고 편 가르기 하는 상황에서 여인은 그 선을 넘어선다. 지배체제가 자신들의 이념을 공고히 할 때, 그 앞에서 당당히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여인의 믿음이다. 이것이야말로 경계선을 허무는, 그래서 소통이 가능한 상생의 신학이다. 

제11장 제자 파송, 오병이어(6:1-44) 

배척당하는 예수(6:1-6)
"마리아의 아들"(6:3)이란 호칭에서 예수를 업신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그 말에는 아비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하는 일 -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권능 - 을 보고도 그것을 폄하할 목적으로 그의 출신을 들먹인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일이 저런 하찮은 사람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가?
세례 요한의 죽음과 부활(6:14-29)
헤롯 안티파스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했을 때, 그 말이 시체의 소생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여기에서부터 부활이 문자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 -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다님(마 28:52-53) - 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를 찾아 볼 수 있다. 부활이란 죽은 자, 즉 앞선 자의 삶과 철학이 그의 제자들, 나중에 사는 이들에게 되살아나 역사함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가 주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학적 기능은 이어지는 이야기, 오병이어와의 관계이다. 이날 모임은 헤롯이 베푼 만찬 자리이다. 그는 자신의 생일잔치에 "대신들, 천부장, 갈릴리 고위층 인사들"(6:21)을 초대했다. 그리고 헤롯과 헤로디아는 이 자리를 세례 요한을 죽일 "좋은 기회"(6:21)로 삼았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제자들은 음식 먹을 기회조차 얻지를 못했다. 

제12장 경계선 없애기 II(6:45-7:37) 

정결법의 신학적 조명
바리새인이 말하는 정결함(purity)은 질서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부정함과 오염(dirt)은 무질서를 상징한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를 누가 세웠으며 무질서가 누구의 눈에 그토록 불편한가? 언제나 그 잣대가 되는 것은 가진 자, 지배계층, 체제를 수호하려는 자의 시각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구별 자체를 거부한다. 본래 더러운 것이란 없다(7:17-19). 다만 "더러운 영"이 있을 뿐이데, 이것은 더러운 생각과 신학,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삶을 말한다(막 7:20-23).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란 표현에서 마음(kardia, heart)은 감정이 아닌 생각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는 보다 심각한 가치관과 신학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예루살렘 제의신학은 부정한 것이 외부로부터 들어온다고 전제했기 때문에 그것을 차단하는 길을 모색했다. 외부와의 접촉을 피함으로써 정결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반면에 예수는 오히려 부정한 생각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경계했다. 정결과 부정은 인간의 내부, 즉 마음과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의 거룩한 영과 더러운 영, 이 둘을 분멸하는 것이 마가복음 신학의 기초이다. 

제13장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1-21) 

표적과 바리새인의 누룩
예수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데, 제자들은 그 뜻을 문자적으로 이해 - 혹은 오해 - 하여 자신들이 떡을 갖고 오지 않은 것 때문에 불안해한다. 예수의 말은 은유적인 표현이다. 앞서 마가복음 저자는 예수가 비유 외에는 말씀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는데(4:34), 여기에서도 문자를 넘어 그 이면에 자리한 뜻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누룩은 빵을 부풀리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빵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빵이 말씀이라면 누룩은 그 말씀을 해석하는 신학적 틀이고 가르침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말이 있다. 꿰는 일, 일관성 있는 이해가 신학하기라면, 이것이 누룩에 해당한다. 문제는 어떤 누룩인가라는 점이다. 빵을 부풀리듯 생명을 일으키는 누룩인가, 혹은 위선과 독재로 가득 차 해악을 끼치는 누룩인가(눅 12:1)? 

제14장 메시아 비밀과 신학 다시하기(8:22-30) 

브레데(Wilhelm Wrede) : 메시아 비밀(1901)
브레데가 메시아 비밀을 마가복음 저자의 창작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시 예수에 대한 두 가지 대표적인 기독론을 절충하려는 노력이 마가복음에서 엿보인다고 생각할 뿐이다. 보다 오래된 전승에서는 예수가 부활과 함께 메시아로 승격되었다고 주장한다(행 2:36; 롬 1:4; 빌 2:6-11_. 그 이후 예수는 처음부터 메시아였다는 이해가 등장한다(요한복음). 브레데에 의하면,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로 여기지 않았고 제자들 또한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부활을 전후로 예수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함에 따라, 이를 설명할 목적으로 메시아 비밀이라는 가설이 등장한다. 이 가설의 핵심은 예수는 본래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생애 동안에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붙이도록 명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제자들 또한 예수가 드러내놓고 가르쳐 주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다는 주장이다(8:30; 9:9)......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가설은 후대 마가복음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일반적 이해는 마가복음을 역사적 예수 연구를 위한 역사적 기록(자료)으로 여겼지만, 브레데는 마가복음 역시 또 하나의 신앙 / 신학적, 문학적 산물임을 밝힌다. 마가복음 또한 교리의 영역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이 모두는 마가복음의 거친 표현, '꾸짖음'(epitimao, 에피티마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처음부터 메시아였다는 주장(근본주의)이나 그것은 후대의 산물이라는 주장(자유주의) 모두 "메시아 비밀"이라는 가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제15장 제자도 I : 십자가와 부활(8:31-9:29) 

부활의 의미
"저희가 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 않는 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9:9)

우리 말 번역은 이 문장을 직설법으로 이해한다 : "살아날 때까지는". 그러나 헬라어 본문은 직설법이 아닌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다. 예수가 살아나는 것이 현재 일어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직설법으로 번역할 때 예수가 '살아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다. 단지 그 시간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헬라어 가정법은 미래 사건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 놓고 말하는 용법이다. 이 말을 직설법으로 이해한다면 예수가 살아나는 것은 예수 개인의 일이다. 하지만 가정법으로 이해할 때 예수가 살아나는 것은 제자들의 몫이 된다. 제자들의 선택에 따라 예수가 제자들 마음속에 살아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살아나지 않는 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명령은 언행을 주의하라는 경계의 말씀이다. 우리들 삶 속에 예수의 신학을 온전히 되살리지 못하는 한(9:9; 6:14 참조), 예수의 일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산 위에서 무엇을 경험했던 간에 - 영적 체험과 신비한 환상 - 그 경험을 예수의 신학으로 재조명하라는 명령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죽은 자의 몫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의 숙제이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과 신학이 우리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의 문제이다. 

제16장 제자도 II : 섬김과 나눔(9:30-10:31)

제자도
제자도 - 제자의 길 - 는 예수를 선생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공식적인 호칭은 선생 또는 랍비이다. "주님"(kirie)이란 호칭은 오직 한 번 등장하는데(7:28), 마태복음에 34번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차이를 보인다. 

예수를 주로 고백할 때에는 주종관계가 성립한다. 그리고 종의 할 일이란 주어진 일, 정해진 임무에 충실한 것이다. 여기에는 자발적인 삶이나 발전적인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선생이라고 부를 때에는, 선생에게서 보고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보다 나은 생각, 진일보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이 책에서 우리가 쓰는 말로 신학 다시 하기이다. 

제17장 제자도 III : 눈 뜸과 예수 살기(10:32-52) 

예수는 우리들 삶의 본보기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선생으로서, 예외가 아닌 모범적 삶을 선보인다. 이와 관련해 매우 의미심장한 구절 하나를 살펴보자. '인자의 온 것 역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 주려 함이니라'(10:45). 대부분 우리말 성경은 "인자는"(표준새번역) 혹은 "인자가 온 것은"(개역)이라고 번역함으로써 예수와 그의 신학을 예외적으로 취급하는데, 오히려 마가복음은 예수의 신학을 복음의 모범으로 이해한다. '나는'이 아니라, '나도' 혹은 '나조차도'라고 읽어야 한다. 참고로 공동번역은 "사람의 아들도"라고 번역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을 대신한 값/삯"이란 말은 무슨 의미일까? 이 단어(lutron)가 신약성서를 통틀어 여기에만(막 10:45 // 마 20:28) 쓰였기 때문에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이 단어는 무엇을 사거나 보상할 목적으로 치르는 값을 의미했는데, 피해 보상금(출 21:30), 토지 무르기(레 25장), 혹은 몸 값(민 3장) 등이 이에 해당한다. 마가복음에는 그 값을 누구에게 주는지, 또 그 값을 통해 벗어나야 할 상황이 무엇인지가 드러나 있지 않다. 무엇보다 소위 '대속의 교리'로 본 이해가 예수가 세 번이나 반복해 말한 죽음 예언(8:31; 9:31; 10:33-34)이나 또는 예수가 이어지는 예수의 수난사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통한 구원, 곧 대속의 죽음이라는 교리는 마가복음의 핵심도 아니고 관심사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대신한 값/삯"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과 맞바꿀 만한 값, 그에 상응하는 가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가치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 추구해야만 했던 - 가치를 뜻한다. 지배체제에서는 힘과 권력을 말하고, 자본주의 제도에서는 돈과 재물을 의미할 것이다. 오늘날처럼 권력과 재물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 사회제도 하에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혹은 더 나은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것이 '하느님의 복음'(1:14-15)이며 '하느님의 믿음'(11:22)이다. 예수가 주창한 '하느님 나라', 곧 더불어 사는 삶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을 대신하는 값/삯이다. 

제3부 예루살렘에서 

제18장 성전 개혁인가 타파인가?(11:1-33)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행적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하나는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기적과 병 고침을 행한 것이고(1-10장)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와의 정면대립이다(11-16장). 후반부에는 기적과 병 고침 이야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마가복음의 신학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지배체제의 문제는 고쳐서 될 성질이 아니다. 멀리 지방에 위치한 갈릴리가 당시 로마제국의 피지배지역을 대표한다면, 예루살렘과 성전은 식민지 아래에서 지배체제를 상징한다. 

예루살렘 입성
'호산나'는 히브리어 '호쉬아-나'를 음역한 것으로, "구하소서"라는 뜻이다. 이는 시편에서 쓰인 것처럼 개인과 공동체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때 쓰는 제의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억울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할 때 쓰였던 표현이기도 하다. 바디매오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보았듯이 군중들 역시 예수가 다윗 왕조를 이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찬미는 전통적인 구조 속에서의 행동일 뿐이다. 체제 자체의 변혁이라기보다는 기존체제 속에서 지도자만 바뀔 뿐이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왕'(슥 9:9)과 감람산(슥 14:4)은 스가랴의 예언에 나오는 말로 마지막 심판 날에 메시아가 등장할 것을 알린다. 이는 유대 전통에서 다윗 왕조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동편의 문을 열어 환영해주는 사람은 제사장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예수를 환영하는 사람은 힘없는 농민들이다. 기존체제 속의 권력자가 아니다. 군중들이 자신들의 겉옷을 땅에 깔고 새로운 왕을 외칠 때에는 현 체제의 종말을 의미한다(왕하 9:13). 예루살렘 입성은 이만큼 정치적 의미를 담는다. 

성전 개혁인가 타파인가
무화과나무에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겉모양만 그럴듯하고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웅장한 성전의 외형에 감탄한 제자들(13:1-2)과는 달리 예수는 그것의 알맹이, 곧 열매를 구하고 있다...... 예수의 시대와 마가공동체의 시대를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 시대에는 성전이 번듯이 서 있었고 정치와 종교의 중심 무대였지만, 70년 예루살렘 성전 붕괴 이후를 살았던 마가공동체에게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과거의 역사로만 남아 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로마의 지배체제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체제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부패한 체제였기 때문에 사라져야만 했다. 그리고 마가복음 공동체 스스로가 성전 역할을 한다. 

제19장 성서 다시 읽기(12:1-17) 

포도원 비유 다시 읽기(12:1-12)
마가복음 12:1-12는 당시의 정치 사회적 현실을 비유를 통해 고발한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간 사람은 소위 부재지주들을 가리킨다. 산업화 과정에서 대규모 경작이 확대되자 소규모 자작농들은 적은 소출로 인해 경쟁력을 잃게 된다. 그들이 다음 해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땅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살인적인 이자는 대출금 상환불능을 가져오고 결국 농민들은 저당 잡힌 토지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한편 서기관들은 지배체제에 속한 일꾼들로서 지배계급의 법적 대리인 역할을 한다. 비유 속의 포도원 주인은로마제국도 아니고 예루살렘 지배계급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고용인일 뿐 토지의 진짜 주인은 하느님이다(레 25:23).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제멋대로 주인 행세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말을 멸시하고 그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오늘날 정치적인 눈으로 읽으면,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층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주인이 고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지만, 실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저자는 비유를 통해 묻는다. 주인이 이 악한 소작인들을 어떻게 할까? 비유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악한 소작인을 멸한 것처럼 현 지도자들과 이를 지탱하는 지배체제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세금 문제(12:13-17)
포도원 비유에 이어 세금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다. 예수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말한다(12:17).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본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이 본문을 근거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거나 기껏해야 십일조를 강조하는 정도로 만족한다. 본문에서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물을 때 켄소스(census)라는 단어를 썼는데, 영어의 센서스 즉 인구조사를 뜻하는 말이다. 데나리온은 로마제국의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진다(마 20:2). 예수는 그들에게 데나리온 하나를 보여 달라고 하고, 이로부터 예수의 반격이 시작된다. 

데나리온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함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성전에서 카이저(가이사)의 형상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그 자체로 황당한 일이다. 세금을 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과 가치관을 고취해야 할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로마제국의 가치관을 - 그것도 성전에서 - 공공연히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카이저의 것을 카이저에게 주라. 카이저의 것이 무엇인가? 단지 화폐에 새겨진 형상뿐이고 그것은 로마제국의 억압적 존재를 확인시키는 역할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을 그에게 되돌려 주라. 그 형상을 가지고 꺼지라는 말이다. 카이저의 것을 카이저에게 주라는 말을 통해 예수는 오히려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신앙 없는 것을 고발한다. 동전에 카이저 형상과 글이 있다면, 그것을 주인인 카이저에게 되돌려 주어라.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면에 새겨진 하느님의 글(가치관)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믿음을 가지고 성전에서 행세하고 있다는 고발이다. 이 이야기는 세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과 가치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20장 신학 다시 하기 : 유대 지도자와의 분쟁 II(12:18-44)
예수와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 또 다시 충돌이 일어난다. 앞서 다루었던 분쟁(막 2:1-3:6)이 갈릴리 지역에서 벌어진 것에 반해 막 12:13 이후에 나오는 분쟁의 배경은 예루살렘 성전이다. 여기서 예수는 지배체제 신학과 정면 승부를 벌인다. 

부활에 관하여
사두개인은 마가복음 전체를 통틀어 여기에만 등장한다. 이들은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현실적이고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로마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면서 지배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사두개인들을 소개할 때 그들이 추구하는 것을 언급하기보다는 부정적인 면 - 곧 그들이 추구하지 않는 것 - 을 이야기하면서 등장시키고 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 사실 당시 대부분의 유대 종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고 오직 바리새파와 쿰란공동체만 부활사상을 믿었다. 

본문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산 자의 하느님'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부활을 문자적으로 풀면 '다시 삶'이다. 문제는 우리들 대부분은 '부활'을 이야기 할 때 육체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당연시 한다는 점이다. 사두개인은 부활 개념을 비판하면서 저 세상에서의 삶이 현재의 삶의 연속이라고 지레 짐작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도 부활을 이렇게 이해하는 듯하다. 현 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그 안에서 보다 풍족한 혜택을 누리는 것을 내세의 삶으로 기대한다. 

산 자의 하느님
모두가 하느님께 살아 있다. 이 말을 풀어보자. 헬라어 여격은 단순히 "...에게"라는 일반적인 해석보다 더욱 세밀한 의미를 함축한다. 마찬가지로 '모두 하느님께 대하여 산다'는 말은 어떤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제멋대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울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느님께 대해서는 산 자로 여기라"(롬 6:11)고 말한 바 있다. '죽은 자'란 인간의 능력,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웅크린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다. 자의든 타의든 창조 본연의 모습을 상실한 채 방황하던 상태에서 회복하는 것이 부활이고 다시 일어섬이다. 

제21장 종말론의 성서적 이해(13:1-37) 

문학적 구성과 이해
마가복음 13장이 종말론에 대해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고 볼 때, 문학적 배경에 예루살렘 성전파괴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 13장에서 예수는 성전을 떠나면서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을 예고한다. 예수의 긴 종말론적 담화(13:5-37)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공개강좌나 어떤 주제에 대한 조직신학적 성찰이 아니라, 제자들의 구체적인 질문에 기초한 사적인 담화이다(13:4).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언제 일어나는가
'이런 일들'(13:4)은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여러 일련의 사건, 곧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핍박을 받으며,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예루살렘에 자리하는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이런 일들'이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초점은 다시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 맞춰진다. 그들이 회당과 공회, 그리고 권력자들 앞에서 고난을 받게 되는 일이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근본주의나 세대주의에서 이해하듯 세상의 종말에 오는 대환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공회에 넘겨지고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이미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당할 일을 예언하면서 썼던 말이다(8:31; 9:31; 10:33-34). 세례 요한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9:13). 제자들 역시 예수의 삶의 연장선에 서 있기 때문에 예수의 길을 뒤따르게 될 것이다. 

고난의 핵심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자리하고 있다. 이 표현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것으로 역사적으로는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175-163 BCE)가 유대인의 종교를 말살할 목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운 후 그 앞에 제물을 바치고 돼지의 피를 성전에 뿌린 행위를 가리킨다(단 9:27; 11:31; 12:11). 현실적으로 보자면 마가공동체가 이러한 전통적인 표현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최근에 목격한 성전붕괴 사건이다. 

무슨 징조가 있는가
마지막 때를 알리는 또 다른 징조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설명되어진다(13:28-29).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보고 여름이 온 것을 안다. 이것과 인자가 가까이 온 것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인자가 오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재림이 아니다. 다니엘서에서 인자가 하느님에게 와서 그로부터 권능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곧 현 지배체제의 종말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와 여름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암 8:1-3에서, 야훼 하느님은 아모스에게 여름과일 한 광주리를 보여주며 이스라엘의 끝이 가까이 왔고 용서치 않겠다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여름은 '카이쯔'이고 끝은 '케이쯔'이다. 동음이의어 - 비슷한 발음과 다른 의미 -를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의 문학적 천재성이 번득인다. 

깨어 있음과 종말론적 삶 : 신학적 해석
그 때와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13:32-33). 역설적으로 '그 때'는 시간을 초월한다는 말이다. 시와 때에 매이지 않고,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는 것이 이야기의 초점이다. 종말론적 삶이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매일 매 순간을 이 생의 마지막 삶처럼 사는 것을 뜻한다. 지배체제의 편에 서서 승리를 독식하기 위해 애쓸 것인가, 혹은 예수의 뜻을 따라 상생의 삶을 위해 헌신할 것인가? 

제22장 보물(비밀) 찾기(14:1-52) 

이 여인을 기억하라
이 여인의 이야기는 모든 복음서가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복음서들은 이 사건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예수를 제거하려는 계획과 함께 등장시킨다.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은 여인의 이야기를 예수의 수난 이야기와 분리시켜 공생애 중간에 삽입한다(7:36-50). 그리고 여인을 기억하라는 명령(막 14:9)은 예수를 기억하라는 명령으로 대체된다(눅 22:19; 고전 11:24-25). 이 차이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울 서신이 복음서보다 먼저 쓰였다고 보면, 성만찬 제정과 함께 쓰인 문구가 마가복음에 역으로 도입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예수에게 붙여졌던 찬사 - '나를 기억하라'는 문구 - 를 떼어내 이름 없는 한 여인의 행실에 돌리는 격이 된다. 또는 여인을 기억하라는 전승이 예수의 수난 이야기와 관계없이 따로 존재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마가복음은 여인의 믿음을 복음의 핵심으로 보고, 이를 전하고자 했다고 본문을 근거로 주장할 수 있다. 무엇이 먼저가 되었든, 교회사를 통해 여인은 기억되기 보다는 오히려 잊혀져 갔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다. 이 말은 종종 가난한 자를 충분히 돕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왜곡되어 쓰인다. 예수의 이 말이 과연 가난의 필연성을 옹호하는 이야기일까? 예수는 지금 일반 사람들에게 강연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나무라는 몇몇 제자들을 저지하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가난은 잘못된 제도의 결과이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배체제 하에서 소수를 위한 정책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가난에 처하게 된다. 이런 피폐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 생활해야 할 자리, 친구로 삼고 더불어 살아야 할 사람들은 권력과 물질을 쥐고 흔드는 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제도의 피해자들인 가난한 자, 억눌린 자들임을 상기시킨다(10:15. 42-45). 

제23장 십자가 다시 읽기 - 정치적 이해(14:53-15-47)
예수가 고문을 받지 않았거나 혹은 피를 흘리지 않고 죽었다면, 그의 죽음(삶)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한 발 양보해서, 죄 사함 혹은 구원을 위해서는 피 흘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오랜 시간 극심한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나? 고통과 피 흘림은 구원의 논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일이다. 십자가형은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옛 시대의 미개한 문화의 유물일 뿐이다. 예수는 정치범으로 제거 당했다. 이는 또한 신학적으로 예수의 죽음이 단순한 속죄제물이 아니라, 거대한 지배체제와 이 세상의 가치체제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었음을 의미한다. 

신학적 의의
십자가 처형은 전혀 반가운 일도 칭송 받을 사건도 아니다. 시편 22편은 고통 중에 구원을 호소하는 개인 탄원시에 속한다. 비통한 마음을 노래한 비가요 애가이다. 시편 22편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묘사하는 과정에 세 번 인용된다. 십자가는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에게 던져진 불편한 운명이다. 문자적 의미의 십자가는 없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포장한다고 해도 고통이 아름다울 수는 없다.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기릴 때 십자가 형벌 자체에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운명적 저항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형은 실패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맞게 된 운명적 결론이었다.

 제24장 부활과 성서 다시 쓰기(16:1-20) 

마가복음의 부활이야기
여인들은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무덤에 온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죽은 자의 몸에 향료를 바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여인들은 죽은 예수를 향해 가졌던 마지막 선의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오히려 새로운 임무를 전달받는다. 너희가 예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이제 남은 할 일이란 고인의 뜻을 받드는 일인데, 그것은 예수가 갈릴리에서 시작한 하느님 나라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다. 

부활과 정의
마가복음에서 부활의 의미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성서 중간기 이후 성서는 마지막 때와 관련해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가 모두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단 12:2; 마 25:46; 계 20:13). 하지만 마가복음은 불의한 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예수가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다는 선언만으로 충분하다(12:36; 14:62; 16:19). 다시 말해,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확신이다. 

바위가 입구를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15:46-47). 그런데도 그것을 옮길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않는 채 무덤에 갔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돌이 옮겨져 있었다. 물론 이 단어의 쓰임새가 '신적 수동태'를 취하기 때문에 혹자는 그 행동의 주체로서 하느님을 거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초자연적인 신적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눈을 들어 보다'(anablepo)는 앞에서 소경이 눈 뜨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8:24; 10;51-52). 소경이 다시 보게 된 것을 말할 때 이 표현을 써서 제자들이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었다. 예수의 무덤을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은 로마제국의 거대한 힘을 상징한다. 바위로 막힌 것과 같은 암담한 현실이지만, 다시 눈을 들어 새로운 안목으로 희망을 본 것이다.

성서 다시 쓰기

마가복음이 본래 16장 8절로 끝난 것이라고 하면,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성서 다시 쓰기에 해당한다.

 끝나지 않은 부활이야기
부활 신앙은 저 세상에서의 삶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또 부활이 예수 개인의 이야기도 아니다. 마가복음은 부활 이후 예수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은 제자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하려느냐? 막 16:8 이후는 이에 대한 각 신앙공동체의 응답이다. 막 16:9-20은 제자들 자신의 소명과 응답을 적고 있다. 마가복음 끝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넣음으로써 미완성처럼 보이는 마가복음을 완성시킨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이제는 우리들 이야기를 할 때이다. 


출처 : 이마고데이
글쓴이 : stephe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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