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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 - 삼성을 말하다

ddolappa 2008. 2. 6. 19:04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대한민국의 절대권력 삼성, 이건희는 실질 군주?

 
 


  
 온나라를 달구고 있는 황우석 교수 줄기세포 논문 사건의 여파는 해가 바뀌어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는 이번 사건을 놓고 여러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의혹들의 배경에 삼성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그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이 검찰의 X파일 사건 삼성일가 무혐의 처분 발표시점인 지난해 12월 14일과 16일. 그 사이에 바로 노성일 미즈메디 이사장의 폭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노 이사장의 폭로로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줄기세포 논문 사건의 여파로 삼성 일가와 검찰이 욕을 덜 먹긴 했지만 삼성 연루설이 떠돌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X파일 도청테이프에 담긴 내용에서도 볼 수 있듯 정권마저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삼성의 무소불위한 영향력 때문일 것이다.

 

 

 

본보는 삼성이라는 그룹을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한 김정란 상지대 교수의 <삼성이여, 기만적 폐쇄회로를 돌파하라>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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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란, 삼성을 말하다ⓛ] 삼성의 상징, 별이 세개인 이유

 

 

 


삼성, 세 개의 별. 지금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는 삼성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다. 이 독특한 행태를 보이는 이익 결사체를 단순히 기업이라고 부르기에는 그것이 누리고 있는 권력이 지나치게 막강하다. 뿐만 아니라, 이 이익 결사체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법을 멋대로 어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법 사실에 대해 처벌받지 않는 것은 물론, 최근에 공정거래법 헌법소원을 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공동체가 지켜야 할 룰 자체를 바꾸어 버리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하다.

 

 

 

재벌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국내의 거대 언론들이 X파일 문제의 본질을 물타기 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동안, 파이낸셜타임스 지는 사설을 통해 이 문제의 본질이 “기업 지배구조 문제를 넘어 누가 한국을 통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재벌그룹들이 시장을 넘어 정부정책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때때로 정책을 지시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고 지적한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파이낸셜타임스의 지적은 정확하고 매섭다. 삼성은 이미 단순한 <기업>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정점에 있는 X왕국이다. 정혜신 박사는 안기부 엑스파일에 나타난 것은 “정치권력-경제권력-언론권력-검찰권력 등 이른바 <4각동맹>이며” 삼성의 “이건희 회장의 모습은 4각동맹 구성원 가운데 가장 힘있는 맹주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은 권리의 영역에서만 절대군주일 뿐 책임의 영역에서는(...) 안개 속의 흐릿한 실체로만 존재한다“.

 

 

 

법은 이 막강한 결사체의 신비한 군주를 피해 간다. 그는 법을 어겨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일찌기 이런 막강한 군주가 흔히 있었던가? 국민에 의해 선출되어 정당한 권력을 구성한 대통령은 날마다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있는데, 선출되지 않은 권력자 이건희 회장은 죄를 지었어도, 본인은 신비한 안개에 쌓여 있고, 대신 가신들이 알아서 떠들어댄다. 대통령을 알기를 뭐같이 아는 조중동 3사는 이 이건희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행여 몸을 다칠세라 열심히 안개를 피워댄다. 불법도청이 문제다. 불법도청만이 문제다! 우리 거룩한 주인님을 건드리지 말라.

 

 

 

이건희 회장 고려대 명예박사 학위 수여식 해프닝 때는 또 어땠던가? 조중동 3사의 오버의 극치를 보이는 보위 행태는 물론이고, 고려대 교수들까지 나서서, 몸을 숨기고 있는 보이지 않는 거룩한 이건희 회장 앞에 엎드려 “아이구 살려주십시오”하며 두려워 떨지 않았던가? 엄정해야 할 언론은 물론, 학인의 자존심과 자유로운 지성을 그 존재 의미로 삼아야 할 대학교수들이(그것도 대한민국 1등 그룹이라는 대학 소속의) 보여준 비참한 행태는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그랬다. 아, 삼성이 그렇게 막강한 권력이었구나. 이 소란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규찬 교수는 명쾌하게 한 줄로 정리한다: “근엄한 가장은 말을 아끼고, 작은 아버지들이 알아서 떠들어대는 폭언의 가부장 체제.”

 

 

 

삼성이라는 특이한 이익 결사체의 위험성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삼성은 이미 괴물이다. 그것은 <이익>이라는 몰가치적 숙주 주위에서 무섭게 성장한 바오밥나무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삼성은 최소한의 성찰성마저도 던져버렸다. 이들이 이토록 최소한의 성찰성마저도 지니지 않고 있는 까닭은, 자신들의 행위가 우리 사회에 돈을 벌어다 준다는 확신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부의 바탕이 박정희의 개발 독재 시절부터 국민에게 강요된 엄청난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다.

 

 

 

이 기업-왕국은 바깥으로 완강하게 문을 걸어 닫고,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자기 신화를 스스로 생성시키며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세기 봉건시대의 왕국을 닮아 있다. 그곳에서는 일체의 합리적 비판이 용인되지 않는다. 삼성에는 삼성을 지배하는 법이 따로 있다. 가신들은 총수-제왕의 안위가 자신들의 안위, 더 나아가 자신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안위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총수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 보편성의 명령 따위는 간단히 무시한다. 왕께서 불편하시면, 그것으로 바로 종말인 것이다. 그곳에는 단 하나의 신만이 있다. 그 왕국은 바깥의 모든 세력을 악의 하수인, 또는, 어떤 기사가 인용하고 있는 삼성 가신 한 사람의 판단에 따르면, “인사고과가 바닥을 기는 불만 세력들”, “삼성의 성공을 질시하는” 무능력자들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반면에 삼성 안쪽의 모든 구성원들은 자애롭게 보살펴주어야 할 신의 백성으로 여긴다. 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원리만이 실재성을 가지는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중세기 멘탈리티에서 별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에게 바깥 세계란 없는 것이다. 지난 겨울 프랑스 스키장 한 곳을 자신만을 위해 일정 기간 전세를 내서 프랑스 언론의 놀림감이 되었던 이건희 회장의 행태는 시대착오적 봉건군주의 행태 바로 그것이었다.

 

 

 

이 왕국의 이름이 <삼성>, 세 개의 별이란 우연한 일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이병철 회장이 <삼성>이라는 이름을 선택했을 때, 3이라는 숫자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인류학적 의미를 고려에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호들, 특히 상징적 기호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상징 기호 뒤에 숨겨진 기나긴 심리학적 연대기를 드러낸다. <삼성>이라는 이름을 이루고 있는 3이라는 숫자는, 처음에는 긍정적 의미에서 선택되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 의미만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3은 인류학적으로 가장 기본적인 숫자, 또는 완전수로 여겨진다. 그것은 비현시태로서의 존재인 1과 그 짝 또는 보완물인 2에 이어, 현시태로서 우주 안에 모습을 나타낸 첫번째 존재를 상징한다. 그것은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결합으로 인하여 태어난 최초의 인간의 숫자이다. 동양의 천.지.인의 3의 상징주의는 그렇게 해석된다.

 

 

 

더군다나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인 신의 3신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러한 3위일체는 기독교 문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힌두교 전통에서도 나타난다. 이른 바 트리무르티(브라마, 비슈누, 시바)가 그것인데, 이들은 각기 생산자, 유지자, 변형자(개혁자)를 나타낸다.

 

 

 

일체의 사유의 근본이 되는 단어 “옴”은 AUM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불교 전통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三寶의 개념이 있다. 켈트 신화 안에서도 신들은 항시(특히 여신들) 삼인조 한 짝(트리아드)으로 나타난다. 우리 나라의 삼신할머니도 같은 상징적 맥락을 공유한다. 이 뿐이 아니다. 아랍세계, 또 아프리카 원시인들에 이르기까지 숫자 3이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무한하고 깊다. 3에 관한 상징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정도로 그것은 인류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마법의 숫자였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숫자의 상징주의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사상 체계는 중세기 신비주의인 카발라일 것이다. 3에 대한 카발라의 해석은 삼성 문제와 관련하여 흥미롭다. 카발라는 3의 상징성을 매우 특권적인 위치로 격상시켰다. 카발라에게

 

 

숫자 1은 행동하는 원리, 행위의 원인 또는 주체,

 

 


숫자 2는 이 주체의 행위, 주체의 동사,

 


숫자 3은 이 행위의 목적, 행위의 효과 또는 결과

 

 

 

를 각기 의미했다. 따라서 1은 정신(지성적 원리), 2는 영혼(도덕적 원리), 3은 육체의 원리(역동적 원리)에 상응한다고 보았다. 이병철 회장이 카발라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이지는 않지만, 카발라의 3의 해석은 행위자의 행위의 결과물을 중시하는 기업인의 생리에 잘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신비주의자들의 입장은, 때로 이들이 연금술이라는 중세기적 기업가 마인드(납이라는 최소한의 인푸트로 금이라는 최대한의 아웃푸트를 끄집어내기)를 드러내기는 하지만, 3만을 따로 떼어 내어 1과 2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려는 것은 아니었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은 1과 2는 잊어버리고 3만을, 행위의 결과만을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카발라주의자들은 1, 2, 3의 통합을, <완전한 존재>를 꿈꾸었다. 자신의 정신과 영혼과 육체를 하나의 전체성 안에서 통합하려는 의지를 숫자 3으로 상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이 현대에 다시 숫자 3의 상징주의를 풀어내야 한다면, 그들은 결코 삼성이 지금 현재 3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해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인류는 이미 사제, 귀족, 평민의 사회적 삼부제를 경험했기 때문이며, 3위일체를 앞세워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억압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또한 보았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들에게 3은 분리의 덕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3은 언제나 통합의 숫자였다. 그들에게 발달의 3단계는 정화, 깨달음, 통일의 세 국면을 거쳐가는 것이었다. 나 홀로 잘 살기, 나 홀로 다 지배하기 신화를 숭앙하는 삼성의 지배 욕망에 이들이 3의 이름으로 손을 들어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현대의 카발라주의자라면 삼성의 3이 사용자, 노동자, 공동체라고 해석하지 않을까. 이미 힌두의 현자들이 생산자, 유지자, 변형자를 3인조 한 짝의 신의 원리로 받아들였듯이. 만드는 자, 유지하는 자 곁에 변화시키는 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이다. 죽어도 지금 지니고 있는 경영권을 못 내놓겠다는 삼성 가문이여, 모든 변화를 거부하는 삼성이여, 이 위대한 고대적 지혜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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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화과학> 겨울호에 게재된 글로 문화과학의 양해아래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보기 http://www.dailyseop.com/data/article/39000/0000038523.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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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과 한나라당의 상징이 파란색인 이유는?

 

 

 

[김정란, 삼성을 말하다②] 로고의 청색 타원-겸손인가 기만인가

 

 

 

김정란 상지대 교수 

 

 

 

삼성의 처음의 로고는, 그 당시의 모든 기업 로고들이 그렇듯이 유치하고 사랑스럽다. 그것은 둥근 원 안에 세 개의 별이 삼각형 도형으로 배열되어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의미는 쉽게 짐작된다. 세계를 의미하는 둥근 원 안에서 위대한 숫자 3처럼 빛나는 기업이 될 것. 실제로 이병철 회장 휘하의 삼성이 그런 기업이었는지는 논외로 하자. 어쨌든, 그의 순진한 로고가 의미하는 것은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2005년 삼성의 로고는 조금 더 복잡하다. 대문자로 쓰여진 영어 알파벳을 푸른색 타원형이 둘러싸고 있다. 보기에 따라서, 그것은 수평 방향을 따라(즉 민주적 질서를 따라) 옆으로 늘어난 겸손한 원의 모양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타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ellipse은 “결핍"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elleipsis에서 왔다.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중심에서 원주까지의 거리가 어느 지점에서나 동일한 완전한 도형을 상징하는 원과는 달리, 타원은 두 개의 중심을 가지고 있으며, 중심까지의 거리도 들쑥날쑥하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찌그러진 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도정이 완벽하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망설이고 주춤댄다. 그래서 프랑스의 현존 시인 이브 본느프와는 초월성을 찾는 자신의 도정에 원이 아니라 타원의 도형을 부여한다.

 

 

 

그는 천상과 지상이라는 두 개의 중심 사이에서 망설이는 탐색자, 결코 자신의 탐색이 끝났다고 주장하지 않는, 왔다가 다시 떠나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겸손한 순례자이다.

 

 

 

삼성의 타원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아니, 나는 그렇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두 중심은 사용자와 노동자이다. 그런데 삼성 안에서 노동자는 완전히 그 존재 의미가 없다. 삼성의 무노조 신화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삼성이 자행해 온 노조 탄압 사례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삼성이 두 개의 중심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도정을 반성한다는 기미는 어디에도 없다. 혹시 그 두 개의 중심이 이건희와 이재용이라거나, 이건희와 삼성구조본이라면 몰라도. 그런데 그 둘은 하나의 이익을 위해 한몸이 되어 있으니, 행위의 도정이 타원형이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타원형은 기만의 타원형이다. SAMSUNG를 에워싸고 있는 타원은 결코 겸손한, 자신의 도정을 반성하는 타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 도형이 SAMSUNG이라는 글자를 에워싸기 위해서, 그것을 어떤 불멸의 아우라로 장식하기 위해서, 물리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즉, 타원 안에 SAMSUNG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SAMSUNG이 먼저 있고 그 후에 타원형이 그것을 에워쌌다는 것이다.

 

 

 

두번째 기만은 글자 표기에서 드러난다. 첫 글자인 S와 마지막 글자인 G는 각기 그 끝이 살짝 문대져 있다. 두 글자는(또는 그 두 글자가 양쪽에서 붙잡고 있는 SAMSUNG 전체는) 대체 어디로 꼬리를 감추는 것일까?

 

 

 

문제만 터지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신비의 안개를 피우며 자신의 성채로 숨는 이건희 회장의 행태와, 이 끝이 슬며시 문대진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는 너무나 닮아 있다. 책임지지 않는 이름, 삼성. 저 편할대로 이익만 챙기고 문제가 불거지면 어디론가로 도망치는 무책임한 삼성.

 

 

 

또 한 가지 흥미로운 특징은 이 타원형이 오른쪽이 올라간 형태로 도안되었다는 것이다. 그야 물론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희 회장이 왼쪽 편을 드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전통적으로 오른쪽은 체제순응적인 태도, 현실적 태도 등을 상징한다.

 

 

 

물론 정치적 우파의 <오른쪽>과의 상징적 연계는 순전히 우연에 의하여 정해진 것이지만, <오른쪽>의 인류학적 상징성은 정치적 상징성과 완벽하게 겹쳐진다. 반면에 왼쪽은 늘 체제비판적, 몽상적, 종교적, 영적인 태도 등을 상징한다.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따라가는 방향이다.

 

 

 

이 오른쪽으로 찌그러진 타원은 결코 겸손하지 않다. 그것이 청색이라는 것도, 이 기득권을 사수하는 거대 기업이 진정한 모험 정신을 가지고 미래의 변화를 견인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왕에 획득한 것을 결코 내놓지 않으려는 우파적 상상력에 함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당의 파란 색이나, 삼성의 파란 색은 상징적으로 완전히 똑같다. 그들은 비판자들, 빨간 장미를 들고 왼쪽에 서있는 사람들에 대해 선천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 데일리서프라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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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을 두려워하는 이건희, 무노조 신화 만들다


 


 [김정란, 삼성을 말하다③] 이재용 편법상속도 인간에의 공포때문
 

 

 

김정란 (상지대 교수) 
 

 


삼성은 스스로 세계 초일류 기업이 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지만, 하고 있는 행동을 보면,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기는 힘들 것같다. 아무리 기업적 성취가 뛰어나다고 해도, 인권 의식이 유난히 높은 서구 사회에서 삼성이 지금같은 반인권적 행태를 계속한다면, 일류기업 대접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삼성의 이른 바 “무노조 신화”는 아주 잘 알려져 있는 것인데, 삼성의 노조에 대한 알레르기는 거의 병적 수준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노조는 인권이 신장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조직이다. 노조는 악마도 아니고 괴물도 아니다. 노조는 단지 분쟁 조정 기구일 따름이다.

 

 

 

삼성 쪽에서는 노조가 생길 경우 사측이 담당해야 할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 동안 정치권에 가져다바친 어마어마한 불법자금들을 생각해 보면, 그 걱정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 확연해진다. 삼성의 무노조 강박은 기업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어떤 심리적 강박에서 기인하는 것이 틀림없다.

 

 

 

삼성의 노조 강박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잘 알려주는 신화적인(오히려 엽기적이라고 해야 할) 일화가 있다. 사내 화장실에서 ‘노동자의 권익’과 관련한 낙서가 발견되었는데, 삼성은 전사원 필적조회를 통해 결국 낙서의 ‘범인’을 잡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없다.

 

 

 

국내 제일의 기업이며, 세계적으로도 유수한 기업이 노조 설립을 방해하기 위해 벌이는 유치하고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다 못해 무참한 느낌마저 든다. 마치, 아주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는 신사의 양복 자락 밖으로 빠져나온 때묻은 와이셔츠 자락을 보는 것 같은 민망함. 세련된 겉모양 안에 숨겨져 있는 끔찍한 봉건적 무지, 또는 잔혹함.

 

 

 

삼성의 ‘무노조 신화’는 1977년에 제일제당 김포공장 여공들이 노조 설립을 시도하다가 좌절한 이후 30년 동안 똑같은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른 바 일류 기업이라는 삼성이 노조 설립을 막아온 방식은 무지막지하다. 보도에 따르면(한겨레21, 2005. 9. 6) 삼성은 노조 설립의 기미가 보이면, 사업장 단위의 복수 노조 금지 조항이 명시되어 있는 노동법을 악용하여 유령 노조를 설립한다고 한다.

 

 

 

삼성 안에 존재하고 있는 ‘에스원노동조합’과 ‘호텔신라노동조합’이 바로 그러한 유령 노조인데, 조합원이 3∼4명에 불과하지만, 서류상으로는 신고필증을 받은 정식 노조로 되어 있다. 이 노조는 노동자들이 노조 설립을 시도하자 회사 쪽이 노조 설립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한발 먼저 급조해 설립신고를 마친 실체가 없는 유령 노조이다. 유령이 진짜 존재가 존재하지 못하도록 숨통을 틀어막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서? 푸른색 기만의 타원형 안에 들어 있는 끝이 뭉개진 글자 저 너머에서.

 

 

 

그뿐이 아니다. 삼성은 노조 설립이 시도될 때마다 유령 노조를 만들고, 그룹 차원의 집요한 회유, 협박, 매수, 감시를 자행한다. 작년 7월에 삼성의 하청업체인 삼성SDI 노동자들 6명이 누군가 휴대전화를 불법 복제해 위치를 추적하고 있다고 서울 중앙지검에 고소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 노동자들은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와 함께 이건희 삼성 회장 등 임원 6명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작년 10월 우원식 의원이 발간한 <삼성SDI 백서>를 보면, 1천 여 건에 달하는 노동법 위반 사례가 그 사업장에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정황을 염두에 두면,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SDI 노동자들은 아직도 도청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어떤 노동자의 아내는 우울증까지 걸렸다고 한다.

 

 

 

물론, 삼성은 강력하게 부인했고, 대통령에게도 맞짱 뜨고,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도 사표를 쓰며 저항하지만, 삼성 앞에만 서면 아주 온순한 양이 되는 검찰이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했을 리는 없다. 우리 나라 검찰은 재벌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므로. 검찰은 기술적으로 진범을 밝히기 힘들다며 수사를 중단했다.

 

 

 

이렇게 유령 노조 설립, 협박, 회유, 매수 등으로 악착같이 노조 설립을 탄압하는 삼성의 행태는 나라 밖으로까지 이어졌다. 1995년 3월 프랑크푸르트 근교 줄츠바허에 있는 삼성전자 독일 지사는 노동자들의 ‘종업원평의회’(Betriebsrat : 노동조합과 별도로 사용자쪽과 근로조건 등을 협의해 공동 결정하는 노동자 대표 조직)‘ 설립 시도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고 금품으로 매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위와 같은 기사).

현지보도에 따르면, 당시 삼성전자 본사는 독일지사에 “종업원평의회는 노조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삼성의 무노조 경영 철학에 위배된다. 종업원평의회가 설립되면 우리는 공장을 이전하거나 폐쇄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은 전문을 보냈다고 한다. 결국 종업원평의회는 삼성 쪽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관계 노동자 5명도 해고됐다. 해고 노동자들은 프랑크푸르트 노동재판소에 제소했고 “회사는 종업원평의회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삼성전자측은 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서 종업원평의회 선거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 제출을 요구하고 금품 제공을 통한 회유에 나섰다는 것이다. 삼성전자 측은 한국에서 사용했던 노하우를 그대로 사용해서 회사측 주도로 ‘종업원평의회’를 한발 앞서 구성해,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평의회 결성을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독일의 상업은행·보험산별노조(HBV)는 삼성전자 독일지사를 프랑크푸르트 검찰 당국에 고발했고, 독일 헤센주 노동법원은 다시 “종업원평의회 구성을 보장하라”고 판결했다. 삼성은 한국에서 잘 사용하던 수법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국제적 망신을 당했던 것이다.

 

 

 

최근에는 동남아에서도 같은 행태를 되풀이 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인터넷 신문 데일리서프라이즈 보도에 따르면(2005. 10. 13), 말레이시아와 태국에서 현지 노조설립을 방해하고 노조가 설립된 이후에는 조합원들에게 탈퇴서명 강요, 협박, 해고 위협 등을 가한 것이 드러났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삼성전자는 1999년 6월 14일 현지 노동자들이 노조설립 신고서를 제출하자 가입된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조탈퇴 서명을 받았으며 결국 노조설립은 무산됐다. 말레이시아 현지 전기산업노조의 한 관계자는 “노조설립을 하자마자 사측의 한국 관리자들은 ‘삼성에서 노조는 있을 수 없다’며 탈퇴를 강요했고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탈퇴서에 서명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기산업노조와 국제금속노련은 삼성에 노조탄압 중단, 기본권 보장을 촉구하는 항의 서안을 보냈으나 무시됐고 현재까지 말레이시아 삼성전자의 노조결성을 위한 활동은 전무한 상태라고 한다. 또한 올해 5월, 태국에 있는 삼성 일렉트로-메카닉스는 사측이 본청노동자들을 하청업체로 전출시키면서 경력 인정 없이 신규사원으로 재계약하면서, 수당, 복지 등을 깍는 조건을 제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삼성의 일방적인 처사에 노동자들이 강력하게 항의하자, 삼성은 7명의 노동자를 노동환경 저해, 노동자 선동 등을 이유로 해고했다. 물론 이러한 작태는 삼성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른 기업들도 저지르고 있는 일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삼성의 부끄러운 행태를 정당화시켜주지는 않는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삼성을 사로잡고 있는 무노조 강박이 일체의 분석적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업체라면, 그것이 사회에 대해 지고 있는 일정한 책무에 관한 윤리적 문제는 접어둔다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이윤 창출과 관련하여 합리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따져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한 한, 삼성의 태도는 거의 “무대뽀”이다. 아예 “노조” 자체에 그야말로 신화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조는 삼성에게 결코 그 존재를 인정해서는 안되는 어떤 절대악으로 설정되어 있는 것같다. 한겨레 21 조계완 기자는 이 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병철 회장뿐 아니라 한국의 1세대 창업주들은 대부분 무노조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그러나 대다수 재벌 사업장에 노조가 만들어졌는데도 유독 삼성에서만 ‘노동조합 인정투쟁’이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동조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병철 회장의 말은 처음에는 ‘방침’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갔어도 노조는 안 된다”로 바뀌었다. 무노조가 삼성의 기업문화이자 경영철학, 나아가 이데올로기로 굳어져버린 셈이다. 무노조 신념이 체계화돼 신화가 아닌 신화가 만들어진 것일까? 삼성의 무노조주의는 ‘배부른 노동자’라고 불리는 삼성 노동자뿐 아니라 삼성의 중소 협력업체 노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다. 한국노총은 지난해 삼성전자 수원공장 청소용역업체인 ‘애니스’를 대상으로 노조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즉각 삼성전자쪽은 협력업체 계약을 해지해버렸고, 노조는 와해되고 회사도 폐업 위기까지 몰렸다. 한국노총 수원지역지부 관계자는 “삼성전자 비정규직과 협력업체를 타깃으로 조직화 사업에 나섰는데, 오히려 협력업체 노조가 궁지에 몰리고 삼성의 대자본 앞에서 중소 영세 노동자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삼성은 왜 노동조합을 그토록 필사적으로 막는 것일까? 삼성에서 무노조 경영의 비용-편익을 놓고 자체 분석한 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은 “노조는 기술도입과 혁신을 지체시키고 방해해서 기업성과를 해친다. 그래서 노조는 나쁘다”는 식의 흔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상수 상무(인사조직실)는 “삼성에서 노조가 있는 기업과 없는 기업을 비교 분석해 경영 성과를 따져본 적은 없다. 무노조 경영이 삼성의 경영 성과에 얼마나 어떻게 기여하는지도 분석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치밀한 정보력과 거대 조직력을 갖춘 삼성에서도 노조만큼은 ‘왜?’에 대한물음도 답도 없고, ‘무조건 안 된다’는 이건희 회장 일가의 뜻만 있을 뿐이다. 어떤 뚜렷한 논리도 근거도 없고 오직 노조 설립을 막는 ‘지침’과 ‘대응 방안’만 있을 뿐인데, 창업주의 말 한마디에 “죽어도 노조는 안 된다”고 믿는 지독한 신화가 삼성 무노조다. 사실 삼성 내부에서 ‘무노조 경영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다. 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노조 설립을 막는 과업을 이건희 회장을 보위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업무라고 여긴다.

 

 

 

관계자들은 무노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삼성이 들이는 노력과 비용이 오히려 노조 설립을 허용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그야말로 신화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삼성가가 앞으로 과학적 분석을 통해 태도를 바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2007년이면, 삼성도 어쩔 수 없이 입장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2007년부터 개별 사업장에 복수 노조가 허용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령노조를 만들어 노동조합 설립을 원천봉쇄해 왔던 삼성의 전략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삼성도 이에 관한 대책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복수 노조 시대를 앞두고 새로운 기법을 연구 중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한 한 연구원의 답변을 보면, 삼성이 이 문제에 관해 발상의 전환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운 듯하다.

 

 

 

삼성이 어떤 신출귀몰할 방법으로 다시 세인들을 놀래킬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을 인간으로, 살아있는 정신과 영혼의 집적체로(우리가 앞서 말한 카발라의 1과 2의 결과로서 3을 통합하는) 보지 않고, 단지 기능적 이익행위를 창출하는 기계로 보는 한, 삼성의 신화는 비참한 결과를 맞으리라는 것이다.

 

 

 

결국 삼성의 무노조 강박은 인간을 살아있는 인격체로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돈만 주고, 잘 살게만 해주면, 일체의 비판적 언행은 틀어막을 수 있다는 착각. 인간은 본디 천한 존재이므로, 이익이 보장되면 왕의 권위에 결코 도전하지 않으리라는 착각.
 
그러나 인간은 뻔한 것 같으면서도 신비한 존재이다. 입에 밥만 틀어막는다고 모두 입을 다무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자신이라는 존재 근거가 필요하다. 노동자들은 돈만 가지고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할> 권리를, 내 생의 현장에서, 단지 이익을 창출하는 데 동원되는 기계가 아니라, 주체적 행위자로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삼성의 무노조 신화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이건희 회장의 구부정한 어깨, 겁먹은 듯한 큰 눈,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듯한 특징은 이 기업이 지니게 된 비인간적 특성과 일정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인간이 아니라, 돈에 일생을 건 것은 아닐까? 그 엄청난 부를 가지고서도 그는 어쩐지 세계를, 인간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마치 세계와 인간을 지워버리기 위해, 인간의 이해하기 힘든 역동성과 불안정성을 잊기 위해 기업활동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나에게 또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인간이라는 연약함, 인간이라는 허망함, 인간이라는 공포. 그 공포 때문에 그는 온갖 무리수를 두어 가면서 아들 이재용에게 편법 상속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모른다. 돈이 아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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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문화과학> 겨울호에 게재된 글로 문화과학의 양해아래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외부 필자의 컬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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