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회화의 세계

[스크랩] 구스타브 클림트의 관능미

ddolappa 2008. 5. 7. 03:41

 

구스타브 클림트의 관능 미술

 

 사랑 (1895) ]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을 드러내지 못하는 한 커플의 애닯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사랑을 그려내었습니다. 자신을 포기한 듯 남성에게 매달린 여자의 표정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사랑의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이 그림을 가운데에 놓고, 좌우에 표현된 장식이 우아해 보입니다.

 

출처 : 진아랑님블로그

 소냐 크립스 (1898) ]
육국 여단장의 딸이자 실업가의 아내였던 이 여인은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클림트는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붉은 가죽을 씌운 스케치북 여러 권을 주었고,그 중 하나에는 자신의 사진도 끼워 넣었다고 해요. 이 그림에도 그 스케치북 중 하나가 등장하죠. 이 그림에는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이 균형 있게 나뉘어 있고, 투명한 드레스의 흰색과 핑크색은 어두운 배경에 의해 더욱 돋보입니다.

 

 

유디트 (1901) ]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스라엘 여인 유디트는 앗시리아군에게 남편을 잃은 뒤 적장을 유혹하여 그의 목을 베는 복수를 하고 이스라엘을 구합니다. 그러나 클림트에게 있어 그녀는 나라를 구한 여걸이 아니라 적장까지 유혹할 수 있는 요부로 그려지고 있죠. 과장된 머리,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입을 반쯤 벌린 그녀는 몽환적이면서도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이는 복수나 구국의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성욕을 채우기 위해 적장까지 유혹한 것처럼 보이게 하죠.

 

 

 베토벤 프리즈 (1902) ]
적대적 힘이라는 소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 작품은 예술가인 베토벤을 신처럼 숭배하고자 제작된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신전, 조각상, 그림 시리즈, 그리고 부조 등이 제작되었는 데요. 조각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성서나 신화 속에서 그 주제를 찾았습니다. 이 그림 속의 연극적이면서도 희화적인 고릴라 또한 신들조차 싸움 상대가 되지 않았다는 티포에우스입니다.

 

 

 에밀 플로게 (1902) ]
육체적인 사랑을 뛰어넘어 평생을 정신적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 플로게는 클림트가 죽는 순간까지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녀 또한 클림트의 많은 작품에 주인공이 되었고, 클림트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것도 즐겨했습니다. 그러나 여느 에로틱한 작품과는 다르게 작품 속 에밀 플로게는 고고하고 정숙해 보입니다. 그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있는 그대로 표현된 거죠.

 

[ 물뱀 (1907) ]
벌거벗은 두 레지비언간의 사랑의 순간을 그려낸 이 작품은 동성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업실 안에서는 모델인 여인들과 소녀들이 벌거벗은 채 혹은 속옷만 입은 채 돌아다녔고, 그는 그녀들의 순간 동작들을 드로잉하여 작품에 담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그녀들은 그의 성적 대상이 되기도 했죠. 그러나 그는 그녀들을 육체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해요.

 

 의학 – 히게이아 (1907) ]
오스트리아 교육부의 주도로 제작된 빈 대학의 천장화 시리즈는 의학, 철학, 신학, 법학이었고, 클림트는 신학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그렸습니다. “의학”의 부분그림인 이 작품은 에로틱한 복수의 여신 “헤게이아”입니다. 이 여신 위에는 죽음의 신이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듯 서 있습니다. 그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의학을 무시하고 있다는 의료진들의 엄청난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 다나에 (1908) ]
아크리시오스는 그의 딸인 다니에가 낳은 아들에 의해 죽는다는 신탁을 받고는 딸을 지하에 가두어 놓고 어떤 남자도 접근할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이를 지켜 본 제우스가 황금 빗물로 변신하여 그녀의 두 무릎 사이로 스며들어가 교접(交接)하여 페르세우스가 태어나고 그는 외손자의 손에 죽게 된다는 신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 중 가장 에로틱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그림은 제우스의 여자 중 다나에가 가장 도발적이고 뇌쇄적이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합니다.

 

 

[ 키스 (1908) ]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하는데요. 화려한 황금빛 색채감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작품은 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입니다. 이제 막 성숙에 눈을 뗀 어려보이는 여자와 그녀에게 키스하고 있는 한 남자의 정열을 화려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강한 팔로 여자를 감싸고 있고, 여자는 표정으로 감미로운 키스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삶과 죽음 (1911) ]
당시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에는 여러 흉조로 인해 말세적 비관주의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1908년에는 8만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 뒤에는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갔습니다. 그리고 1912년에는 호화여객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구요. 여러 사건들로 인해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클림트는 죽음의 신에 직면한 사람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크리스마스때에도 빵한조각 없는, 지독히 가난한 한 가정에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클림트는 순전히 타고난 미적 감각으로 20세기 초 미술계를 들썩이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사람입니다. 초등교육만 마친 상황에서 클림트는 담벼락에 낙서를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는 일을 겪게 되었고, 덕분에 미술에 대한 재능을 인정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월급이 보장되는 미술교사를 꿈꾸며 국립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던 클림트는 교사들에게도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생 신분으로 여러 기관에서 의뢰한 그림 제작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죠. 덕분에 학비도 조달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도 도울 수 있었구요.

고난을 이겨낸 성공의 가치가 더 값진 것처럼, 예술가로 살아가는 그의 시작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1892년 같은 학교에 입학하여 예술적 동지의 역할을 해주던 동생 에른스트가 죽고, 부친마저 유명을 달리하면서 클림트는 정신적 공황상태를 겪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누나는 정신병 증세를

보였고, 어머니는 심한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클림트는 쉽지 않은 환경에서 정규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많은 화가들의 선생이자 친구역할을 톡톡히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생활 속의 예술을 추구하고자 분리파도 조직하였습니다.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버리자” 라는 모토 아래 진행되었던 이 조직의 활동은 외국의 뛰어난 화가들을 오스트리아에 소개하고,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던 현대 미술의 전시회도 개최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빈분리파는 공방도 설립하여 건축에서부터 목공예, 가구 디자인, 도서 디자인, 식기 제작, 금속 공예, 의상 디자인 까지 한 지붕아래에서의 일관성있는 예술화를 진행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이 공방에서 건축한 주택에서, 함께 제작된 가구를 배치하고, 디자인된 의상을 입으며 사는 삶 – 사람조차 디자인의 일부처럼 보여지는 - 이 중산층 여성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특히 의상은 그리스 신화 속 주인공의 옷처럼, 여성들의 허리와 가슴, 목을 졸라맨 코르셋에서 그녀들을 해방시키는, 자유롭고 편안한 옷들이었으니까요.

클림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지만 그의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한 여성편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며 동반자의 삶을 살아온 에밀 플로게는 동생 에른스트의 처제였습니다. 그리고 미치 침머만은 그의 아이을 둘이나 나았구요. 클림트는 친구의 딸이나 초상화를 의뢰한 귀족 부인들, 그리고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많은 모델들과도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덕분에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이라며 재산 분배를 주장한 사람들이 14명이었다고 하네요.

말년의 클림트는 1년중 6개월은 그의 작업실에서 그림에만 몰두하고, 나머지 6개월은 전원에서 에밀 플로게와 지내면서 풍경화를 그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드로링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점점 더 에로틱해지고 화려해졌어요. 하지만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논문들은 날마다 쌓여가고, 함부르크 미술관장은 클림트를 동시대 가장 위대한 화가로 꼽기도 하였습니다. 또 오스트리아 정부와 많은 사업가들은 그의 작품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구요.

행복이나 불행은 모두 그 끝이 존재하잖아요. 1918년 뇌졸중으로 반신불수가 된 클림트는 자신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는 급속도로 쇠약해져 갔습니다. 그리고는 1달도 지나지 않아 에곤 쉴레 보다 조금 먼저 독감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관능적이면서도 우아한 클림트의 그림 양식은 미술사에서 한정적이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유파도 없었고, 에곤 쉴레 외에는 그와 유사한 화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많은 추종자를 가지고 있는 클림트는 그 특유의 그림으로 열정을 소유한, 수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출처 : 양지방이올
글쓴이 : 에릭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