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칼 맑스(Karl Marx) - 삶과 업적

ddolappa 2008. 5. 17. 05:42

 

칼 맑스(Karl Marx)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

 


※ 이 글은 1990년 존 이트웰(John Eatwell), 머레이 밀게이트(Murray Milgate), 피터 뉴먼(Peter Newman)등이 편집 발간한 『맑스주의 경제학』(Marxian economics) (London, 1990) 1-38쪽에 실린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칼 맑스」(Karl Marx)란 연재물을 번역한 것으로 카피레프트 규약 2.0에 따릅니다.(원문은 www.ernestmandel.org에서 접속할 수 있음) 자유로운 이용은 환영하지만 영리 목적의 개작은 불허합니다.

 


1. 삶과 업적(Life and Work)

  칼 맑스는 1818년 5월 5일, 변호사 하인리히 맑스(Heinrich Marx)와 앙리에트 프레스부르(Henriette Pressburg)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오래된 유대인 랍비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계몽 사상을 찬미하는 리버럴로서 종교적이지 않았다. 그(맑스의 아버지)는 맑스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여전히 프러시아에서 유대인에게 가해지고 있던 제한에서 벗어나기 위해 개신교도로 개종했다. 그의 어머니는 네덜란드계 유대인의 자손이었다.

  칼 맑스는 트리어(Trier)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Wilhelm) 김나지움(Gymnasium,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교)과 본 대학,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ischen Naturphilosophie(한국어로는 2001년 그린비 출판사에서 고병권씨의 번역으로 『맑스의 박사학위 논문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로 번역 출간)는 1841년 4월 15일 예나 대학(University of Jena)에서 통과되었다. 1843년 그는 프러시아 고위 관리인 베스트팔렌 남작(Baron von Westphalen)의 딸 예니 폰 베스트팔렌(Jenny von Westphalen)과 결혼했다.

  맑스의 대학 공부는 여러 분야를 망라했지만 주로 철학과 종교학에 집중되었다. 그는 위대한 철학자 헤겔(Hegel)의 보다 급진적인 추종자 써클에 자주 어울리며 그들의 주된 대표자 중 하나인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친구가 되었고, 1841년 출간된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의 Das Wesen des Christentums(The Nature of Christianity, 한국어로는 『기독교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1982년 종로서적 출판사에서 박순경씨의 번역으로 첫 출간. 같은 제목으로 1992년 까치글방에서 김쾌상씨의 번역으로 재출간 됨)으로부터 특히 영향을 받았다.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할 작정이었지만 그러나 곧바로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그는 자신의 사상을 선전하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로 선회했다. 1842년 5월 맑스는 쾰른(Cologne)의 리버럴한 신문인 『라인신문』(Rheinische Zeitung)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의 관심은 더욱 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향했는데 이를 그는 더욱 점증하는 급진적인 방법으로 다루었다. 한 해가 지나자 『라인신문』은 프러시아 당국에 의해 (발행이) 금지되었다.

  그러자 칼 맑스는 프러시아 당국의 검열을 피하고 당시에는 프랑스 주변에 집중되었던 정치사회적인 해방을 위한 진정한 투쟁들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며 이를 확인하기 위해 파리에서 『독불연보』(Die Deutsch-Französische Jahrbücher)라 불리는 잡지를 발간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로 이주하여 거기서 그의 평생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les)를 만났다.

  맑스는 헤겔의 정치 철학 체계에 비판적으로 되어가서 그의 첫 주저 Zur Kritik des Hegelschen Rechtsphilosophie(A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한국어로는 『헤겔 법철학 비판』이란 제목으로 1988년 아침출판사에서 홍영두 씨의 번역으로 출간)을 1843년 집필했다. 파리 체류 기간 동안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그는 프랑스 수도에 있는 사회주의자와 노동계급 써클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1844년 ‘파리수고’(Oe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한국어로는 이론과실천사에서 1987년 『경제학-철학 수고』란 제목으로 김태경씨가 번역하여 첫 출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명백히 생산 수단의 집합적 소유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프러시아 대사관의 압력 때문에 1845년 초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브뤼셀(벨기에의 수도)로 이주했다. 그의 역사적 유물론으로의 명백한 선회는 엥겔스와 함께 1845~6년 사이에 썼지만 생전에 결코 출간되지 않은, 11개의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들』(Theses on Feuerbach)로 끝나는 수고 Die Deutsche Ideologue(한국어로는 두레출판사에서 1989년 김대웅 씨의 번역에 의해 『독일이데올로기 I』으로 출간)에서 나타날 것이었다.

  이러한 추방은 또한 맑스가 1846년 프랑스에서 쓴 오직 하나의 책 Miserè de la Philosophie (한국어로는 1995년 아침출판사에서 강민철, 김진영이 공역하여 『철학의 빈곤』이란 제목으로 출간)에서 표출된, 당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프랑스 사회주의자 프루동(Proudhon)과의 논쟁적인 단절을 초래했다.

  동시에 그는 더욱 더 현실 사회주의 정치에 연루되어, 엥겔스와 그 자신에게 원칙에 대한 선언문의 초안 작성을 의뢰한 공산주의자 연맹(Communist League)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1848년 발표된『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 독일어로는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한국어로는 여러 판본으로 출간되었지만 박종철출판사에서 1998년 선언 발표 150주년을 맞아 맑스 엥겔스 에센스 제1권으로 김태호씨가 번역 출간한 『공산주의 선언』이 가장 우수함)의 기원이다.

  1848년 혁명이 터지자마자 그는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처음에는 프랑스로 갔다가, 1848년 4월 쾰른으로 갔다. 1848년 독일 혁명 기간 동안 그의 정치적 행동은 일간지 『신라인신문』(Die Neue Rheinische Zeitung)의 발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만끽했다. 프러시아 반혁명의 승리 이후, 『신라인신문』은 1849년 5월 발행이 중지되고 맑스는 프러시아로부터 추방된다. 그는 프러시아 시민권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맑스는 짧은 간섭과 함께 죽을때까지 체류했던 런던으로 이주했다. 15년 동안 그는 주로 경제학을 연구했는데 이는 1859년 Zu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한국어로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1989년 김호균 교수에 의해 중원문화사에서 번역 출간)의 첫 발간과 1867년 『자본』(Das Kapital, 여러 판본이 있지만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유통되는 것은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출판사의『자본론』이다. 비봉출판사판은 1976년 미국 펭귄(Penguine) 출판사에서 펴낸 『자본』영어 개역본을 원저로 하고 있는데, 만델은 그 영어 개역본 『자본』각 권 도입부마다 80쪽 분량의 해제를 붙였다. 『자본』제1권에 만델이 붙인 해제는 노동사회과학연구소(소장 : 채만수) 창립준비위원 강성윤 박사가 번역하여 기관지『정세와 노동』에 11차례 연재하였다) 제1권의 발간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그는 대영박물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모든 주요 경제학자들의 저술과 영국 정부의 ‘청서’(Blue Books)들, 영국 의회 의사록(Hansard), 그리고 영국 및 세계의 사회 정치적 조건들에 대한 다른 많은 동시대 자료들을 연구했다. 그가 읽은 것들은 정치경제학과 경제사 뿐 아니라 기술, 민족학(ethnology), 인류학 등도 포괄했다. 많은 공책들이 그가 읽은 책들로부터의 인용문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주로 학습 활동을 할 때도 그는 결코 현실 정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 혁명의 재생을 통해 공산주의자 연맹이 존속하는 것을 희망했다. 공산주의자 연맹이 존속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발전적으로 망명자 정치에서 이탈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정치활동에 대한 대차대조표이자 지난 1848~52년 간 혁명과 반혁명의 순환에 대한 분석인 프랑스 반혁명에 대한 가차없는 고발장 Der 18, Brumaire des Louis Bonaparte(『루이 보나파르트와 브뤼메르 18일』, 한국어로는 1988년 태백출판사가 출간한『프랑스혁명연구』제3부에 실려 있음)을 1852년 썼다. 그는 영국 노조 지도자들과 친구가 되어 그들을 국제 노동계급의 관심사와 정치를 향해 끌어들이려고 점진적으로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맑스와 엥겔스가 정치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국제노동자협회(1864년 창립) - 소위 제1인터내셔널 - 의 탄생 때 절정을 이루었다.

  맑스의 정치적인 관심과 혁명에 대한 열정만이 그를 순수하고 단순한 경제학도가 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물질적인 필요성의 압력 또한 그가 순수하게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의 희망과는 달리, 맑스는 자신의 과학적인 저술들로부터 그 자신과 늘어나는 가족들을 부양하는데 충분한 돈을 결코 받지 못했다. 그는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언론계로 선회해야만 했다. 1851년 여름 『뉴욕데일리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을 때 그는 처음에 겸손하게 처신하여 이 분야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맑스는 그러한 협력으로부터 결코 정규적인 수입을 얻지 못했으며, 이 또한 10년 뒤에 끝나버렸다.

  따라서 맑스의 런던 망명시절은 대개 커다란 물질적 박탈과 정신적 재난의 시기였다. 맑스는 그가 깊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최소한의 정상적인 생활 조건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크게 고통받았다. 불충분한 식량과 의료 공급에 더하여 콜레라가 들이닥친 소호(Soho)의 불결한 셋방살이는 맑스와 그의 아내의 고질적인 건강 악화는 물론 몇몇 아이들의 죽음까지 이끌었는데, 그 중 장남 에드가(Edgar)의 1855년 죽음은 맑스에게 특히 더 심한 충격을 주었다. 맑스의 일곱 자식들 중 오직 세 딸만이 살아남았는데, 제니(Jenny), 로라(Laura), 그리고 엘리너(Eleanor)(Tussy)가 그들이다. 이 셋은 모두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으며 국제노동운동에서 주목할만한 역할을 엘리너는 영국에서, 제니와 로라는 프랑스에서(이 둘은 사회주의 지도자인 롱게(Longuet)와 라파르그(Lafargue)와 결혼했다) 수행했다.

  이러한 물질적인 궁핍의 긴 시절동안, 맑스는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재정적이고 정신적인 원조 덕택에 생존했다. 맑스에 대한 엥겔스의 헌신은 과학과 정치사에 있어서 보기 드문 우정의 사례에 기반한 것이었다. 생활 여건은 맑스가 어머니의 유산을 물려받았을 때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노동계급 정당들(하나는 라살레의 추종자, 다른 하나는 맑스와 엥겔스의 추종자인)이 독일에서 발전하여 맑스 저술의 훨씬 넓은 시장을 창출했을 때, 국제노동자협회(IWMA, 제1인터내셔널)가 몇몇 유럽국가들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리고 엥겔스의 재정 여건이 맑스의 가족들에게 더욱 정규적인 기반에 의한 물질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시점이 되었을 때도 물질적인 조건들은 개선되었다.

  맑스가 경제학 연구와 『자본』초고 집필에 집중했었던 시기인 1865~71년 사이 그는 파리코뮨에 대한 열정적인 옹호(1871년 발표된 Der Bürgerkrieg on Frankreich, 한국어로는 2003년 박종철출판사에서 맑스 엥겔스 에센스 제3권으로 안효상 박사가 『프랑스 내전』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한 것이 가장 괜찮다)에서 절정에 달했던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에 대한 현안 관련 정치적 충고들을 하느라 많은 방해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 혁명의 두 번째 국면에 참여 - 오직 간접적으로밖에 할 수 없었지만 - 할 수 있었던 것의 만족은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내부의 깊은 분열 - 미하일 바쿠닌(Michael Bakunin) 주변에 모인 아나키스트들과의 분열 - 에 의해 교란되었다.

  맑스는 『자본』제2권, 제3권의 최종본을 탈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는데, 『자본』제2권, 제3권은 광범위한 편집 이후 맑스 사후에야 엥겔스에 의해 출간되었다. 초기 게획에 따라 맑스가 이 두 권보다 더 많은 권수를 『자본』에 추가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게속되고 있다. 맑스 사후 25년이 더 지나서 칼 카우츠키(Karl Kautsky)는 『자본』제4권이라 불리는 원고를 편집했는데, 이것이 다른 경제학자들에 대한 맑스의 포괄적인 비판인 Theorien über der Mehrwert(Theories of Surplus Value, 한국어로는 『잉여가치학설사』라는 제목으로 1989년 아침, 백의, 이성과실천, 이성과현실 출판사 등이 부분적으로 출판했는데 거의 1967년 평양의 조선로동당출판사에서 발간한 『자본론 제4권 - 잉여가치학설사』를 재편집한 것이다)다.

  맑스는 말년에 조금씩 생활 여건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건강이 나빴던 것이 아마도 『자본』제2권, 제3권의 최종본을 탈고하지 못한 주요 원인인 듯 싶다. 1878년 독일 사회민주당 통합 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에 대한 강력한 비판 『고타강령비판』(Kritik des Gothaer Programms, 한국어로는 아직 번역출간 되지 않음)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맑스는 그의 모국에서 통합된 노동자 계급 정당이 탄생된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 단체들의 확산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그의 사상의 영향력이 성장한 것도 맑스의 원기를 북돋았다. 맑스의 아내는 1880년 병에 걸려 그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이는 칼 맑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는데, 그의 아내를 장수할 수 있도록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맑스는 1883년 3월 14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