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리뷰는 1991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도올 김용옥의 화이트헤드의『과정과 실재』란 책의 서평이다. 그의 글은 너무나 재미있다. 박식한 동서양 고전의 풍부한 해설은 자뭇 빠져들게 한다. 다음은 도올 김용옥의 리뷰다. 글/ilovepalgong
어려운 문장의 그 어려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자기가 쓰고 있는 글이 뭔지를 몰라서 생겨나는 것이요. 하나는 제대로 알아서 생겨나는 어려움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의 어려운 글의 상당수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그렇게 된 것이지만, 이러한 시니컬한 정황은 비단 한국학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서양철학사를 장식하고 있는 난해한 서양철학자들의 대부분이 뭘 모르고, 즉 잘못 놓여진(misplaced) 개념들의 착종(얽힘)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다. 동양철학자들의 경우, 그 해독의 어려움은 있으되, 해독된 내용이 어려운 예는 거의 없다. 정말 어려운 문장을 쓰는 자로서 정말 뭘 잘 알고 있다고 판단되는 철학자! 동서고금을 통하여 나는 아직 단 한 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바로 화이트헤드(1861~1947)이다. 나는 그를 백두선생(白頭先生)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백두산의 정기가 영국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에까지 뻗친 모양이다.
인간의 문자역사는 넉넉잡아야 겨우 반만년 남짓한 것이지만, 그 역사를 통틀어 아마도 가장 어려운 책 한 권을 뽑으라면 단연코 『과정과 실재』(1929)가 꼽힐 것이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에 전체의 상이 내함되어 있다면, 백두선생의 한 문장 한 문장에도 그 전체 사상이 내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 전체를 파악치 못하면, 그 어느 한 줄도 이해할 수가 없다. 하나 전체의 파악이란 용렬한 범인의 지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고로 난해에 난해만 거듭된다. 이 엄청난 난해의 밀림이 드디어 조선말을 빌려 그 모습을 드러냈다. 참으로 경하할만한 일이다.
깡마른 백발노인, 독기어린 노여움으로 인간세를 직시하는 버트란트 러셀이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매로 언어의 희롱을 희롱하는 비트겐슈타인이나, 과학의 장난에 양보할 수 없다는 촌놈의 뱃심으로 의식(베부스트자인)을 파고드는 후세를 같은 이름은 우리에게 친숙하지만, 화이트헤드라는 백두선생의 이름은 우리 독자에게 낯설다.
왜냐? 이유는 간단하다. 난해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를 읽는 자가 없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자를 만날 수 없다. 러셀도 그의 제자지만 끝내 그를 이해치 못했다. 백두선생의 고고한 불운이다.
그렇다고 때려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백두선생의 세계는 모든 것이 움직인다. 그의 생각의 모든 대상이 움직이며, 그가 생각하고 있는 생각의 모든 순간이 움직인다. 그의 언어도 움직이며, 그 언어를 둘러싼 세계도 움직인다. 그의 세계는 <움직임>밖에 없다. 따라서 정태적(개념화된) 사고에 젖은 우리의 관념으로는 그를 파악(프리헨드) 할 수 없다. 그의 언어는 통찰이며, 체계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이해는 영원히 나의 통찰일 뿐이다. 서양철학사의 모든 문제가 나는 일단 『과정과 실재』에서 종결되었다고 감히 선포한다. 그 위에서 우리는 새롭게 오류의 체계가 아닌 <철학> 그 자체를 말해야 한다.
서평이란 원래 책을 읽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읽기 위해서' 이 책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책을 왜 사는가? 서재에 신주 모시듯 모셔놓기 위해 이 책을 사라고 나는 권한다. 그리고 고사 지내라! 우리의 후손 가운데 백두와 같이 위대한 난해서를 쓸 수 있는 학자가 나오기를 비는 심정으로. 여섯 해 걸린 오영환 교수(연세대)의 번역은 정확하며 공이 들였다.
글/도올 김용옥
출처 : 찰칵찰칵, 쓱쓱
글쓴이 : ilovepalg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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