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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들뢰즈-가타리의 개념에 처음부터 가치론적 함의 넣었기 때문에 오해 초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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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환…"『안티-오이디푸스』에서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관점 애매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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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민…"전쟁기계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며 실천적 가능성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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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욱…"정치적 해석으로부터 분리해 들뢰즈가 말한 일의적 존재론으로 돌아가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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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다”라고 미셸 푸코가 말한 것처럼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21세기 철학계의 큰 화두다. 들뢰즈는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의 존재론으로서의 유목론을 언급했으며, 그 이후 『천 개의 고원』에서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국가구속의 해체를 지향하는 ‘전쟁기계와 유목론’을 논했다. 이러한 유목론의 의미를 포착해 이진경은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행위를 ‘노마디즘(유목주의)’으로 규정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목주의’는 기존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기도 하며, 철학적 개념으로서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ㆍ심리ㆍ경제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 쓰일 정도로 용례의 범주가 넓어졌다. 그러나 과연 유목주의라는 개념은 올바로 사용되고 있는가? 과연 유목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대학신문』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서면인터뷰 형식으로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의견을 들어봤다.
난무하는 유목주의 담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이 출간돼 지난해 한바탕 논쟁이 일었다. 노마디즘이 침략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그의 주장을 원전을 오독해 생긴 문제쯤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정우: 유목주의가 공격성 혹은 침략성을 띤다는 주장은 들뢰즈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다. 전쟁기계(사회 구성원들을 국가의 체계로 포섭시키는 국가장치의 기능을 해체하는 주체를 설명하기 위해 명명된 개념)는 국가장치 외부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그것이 어떤 전쟁기계냐는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초국적 기업이나 거대 종교들도 전쟁기계이고, 대안 화폐를 모색하는 단체들도 전쟁기계일 수 있다. 전쟁기계는 하나의 개념이다. 그 자체에 처음부터 어떤 가치론적 판단이나 함의를 넣어 해석해서는 안 된다(이정우의 니체식 물음 "어떻게" 혹은 "어떤"은 전쟁기계 개념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유목주의-전쟁기계 개념 쌍이 같이 간다면, 즉 개념기계들로서 배치를 이룬다면 그 배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김진석: 이정우나 이진경은 유목주의가 침략성ㆍ공격성을 갖는다는 점을 완강히 혹은 완곡히 부인하지만 유목주의는 많은 경우에 공격성과 침략성을 띤다. 한국에서 유목주의는 어떤 공격성도 없이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고 소개되는데, 이 이해는 ‘관념적 철학의 안일한 자기만족’이 아닌가 싶다. 유목주의는 실제로 전쟁기계와 합체돼 상당한 공격성을 가진 ‘까칠까칠한 현존재’를 구성한다. 전쟁기계는 본질적으로 국가 체계에 반기를 드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여기서 김진석은 이정우나 이진경의 들뢰즈 이해 방식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유목주의-전쟁기계 개념의 배치를 고려하지 않고 들뢰즈를 이해했다고 단언하는 김진석, 김재인의 논의에 동의할 수 없다. 이정우는 그렇다치더라도 그들이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제대로 읽었을까?).
김재인: 김진석의 의견에 동의한다. 유목주의(굳이 이 용어를 써야 한다면)는 이진경이 주장하는 것처럼 국가의 구속력을 쉽게 탈주하는 ‘사유’로 볼 수 없다(이미 그가 알라딘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결코 제대로 읽어 본적이 없다. 이진경이 유목주의를 그렇게 쉽게 정의하고 이해했을 것 같나? 그렇게 쉽게 단언하는 김재인의 몰상식함에 정말 어이가 없다. <노마디즘>어디에서도 들뢰즈의 유목주의가 국가장치의 외부로부터 쉽게 탈주할 수 있으리라고 100% 자신한 부분은 없다). 공격성과 파괴를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모든 창조는 파괴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구성원을 구속하는 국가체제를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침략성ㆍ파괴성을 가질 수 있다.
◆유목주의를 현실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이정우: 유목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느냐의 여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선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유목주의 개념이 현실성이 있느냐, 혹은 침략성을 갖느냐라는 논의는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 저자의 어떤 측면을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에 따라 다른 함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나는 들뢰즈 철학의 주요한 측면 중 하나를 ‘소수자 윤리학’으로 본다.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포획하면서 노동자가 기득권 세력이 된 20세기 중엽 이후, 그런 노동자의 대열에조차 끼지 못한 사람들이 소수자다. 오늘날의 ‘유목’은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천 개의 고원』의 다양한 층위를 현대 과학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혹은 그의 전쟁기계론을 어떻게 현대 대안 운동들과 연계시켜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이 부분은 적극 동의한다. 들뢰즈 정치철학의 핵심적 테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김재인: 이진경 등이 주장하는 ‘앉아서 하는 유목주의’와 같은 현대적 유목은 대부분 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아이러니컬하게도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에서도 이미 앉아서 하는 유목주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과연 김재인은 이진경을 비판할 정도의 실천론을 구성하고 있는가? 그는 지극히 들뢰즈의 실천론을 관념적 수준에서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그들은 오늘날 사회가 주체를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충분히 분석하지 않고 단순히 추상적인 대안으로서 유목주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럼 그는 어디 어느 글에서 그런 구체적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번에 <진보평론>에 게재된 그의 글에서 단초를 얻을 수 있지만, 그리 썩 훌륭한 글은 아니였다. 왜냐하면 그도 역시 강단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실천의 측면에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을 전유하는 방식은 이진경이 김재인 보다 훨씬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에 대한 논의나 현행 세계체제에 관한 분석은 거의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 뿐이지만 그들은 너무 거시적이고 도식적인 구도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 학계는 논쟁 구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상태다.
들뢰즈 철학을 실천적으로 전유하려면 87년 시민혁명, 88년 이후의 개방과 외국여행 자율화, 97년 외환위기와 수평적 정권교체, 2002년 월드컵과 촛불시위, 2002년 전자민주주의와 노무현 정권의 탄생, 2007년 FTA 체결 등 사회 문제의 굵은 선을 분석해야 하고 각 시기별로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망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앞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확산이 끼칠 대ㆍ내외적 영향이 무엇일지에 대해 깊이 고찰해야 한다. 현실 분석 없이 개념만 떠도는 사태는 인문학적 담론에 대한 사회적 불신을 증폭시킬 뿐이다(굳이 이진경이 문제라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이진경은 들뢰즈의 사유를 자신의 철학, 자신의 사유를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구상자처럼 활용한다면 김재인은 단순히 주석달기, 재현하기의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이성민: 유목주의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 구성원의 생활 유형을 설명할 수 있다는 데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목주의 안에 어떤 혁명적이거나 대안적인 가치가 전제돼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들뢰즈는 단지 그의 저서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대인의 행동 양식을 노마드적(nomadic)인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유목주의 자체는 기술(記述)적인 것이지 규범적인 것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 철학을 가장 심하게 왜곡하고 오인한 대표적 사례이다. 어디 이 정도의 언급은 최명관 선생인 <안티-오이디푸스>의 역자후기에 언급한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있는가?).
또한 유목주의와 한 축을 이루는 전쟁기계 자체는 또 하나의 재건된 환상에 불과하다. 라캉은 그의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환상 없이는 욕망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천 개의 고원』에서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부분을 읽어본다면 그 개념들이 현실성을 가진 규범이 아니라 남성적인 환상에서 비롯된 은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역시 라캉주의자 답다 ! 더 이상의 할말이 없다).
박기순: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낭만적 혹은 무정부적일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전쟁기계는 국가의 외부에 존재한다.
들뢰즈-가타리가 다양한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듯이, 전쟁기계는 국가해체의 지평(地坪)이 된다. 국가외부에 존재하는 전쟁기계의 힘은 네그리가 스피노자에서 찾아낸 ‘대중’(multitudo)의 역량(puissance)이다. 그런데 들뢰즈-네그리의 정치철학적 주장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자발적 역량에 의지해 있다. 즉 그들이 말하고 있는 개념은 ‘개인 주체’들의 자발성과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전쟁기계-유목론이 개인의 자발성 혹은 역능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한다(존재의 일의성 테제를 놓고 볼 때, 이는 들뢰즈 철학을 오해한 측면이 있지 않나 싶다. 들뢰즈에게 주체는 그 자체로 이미 집합적 주체이자, 집합적 신체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를 ‘반자본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진석: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태도는 부정적이지 않다. 들뢰즈 해설자들은 마치 자본이 유목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거나 혹은 『천 개의 고원』에서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하는데, 그 관점이 들뢰즈 등의 관점을 정확히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자꾸 확장시키며 한계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말했고 또 그들의 작업은 철저하게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김재인: 자본주의가 주적이 아니라는 김진석의 지적에 동의한다(주적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 푸꼬의 언급대로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윤리학적 저서이다. 즉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모든 종류의 억압과 금지, 억제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라고 한다고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에 대한 들뢰즈의 객관적 분석에 주목해야 하고, 그 부분에서 논의가 시작돼야 한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려면 자본주의의 외부에서 이를 생각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자체는 끊임없는 확장 운동을 하고 있으며, 그 바깥에 어떻게 이를지는 역사적으로건 논리적으로건 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현행 자본주의가 좋거나 옳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자본의 객관적 운동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자본주의의 분열적인 모습을 잘 포착했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작업은 의미가 있다.
김상환: 김재인과 김진석의 지적 일리 있다. 이미 1972년 『안티-오이디푸스』에서부터 자본주의와 들뢰즈-가타리의 관계는 애매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자본주의가 분열증적 한계에 이르는 극단적 탈영토화와 탈코드화의 운동을 일으키면서도 과거의 잔재와 상투적인 유산 속에 영토화된다고 고발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창조한 기계, 욕망, 유목주의 등과 같은 개념들은 자본이 이미 창조해 놓은 사태를 번역하고 재현한다는 느낌과 더 나아가 정당화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본을 비판하고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고 옹호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 부분은 일견 동의한다. 분명 <안티-오이디푸스>에서는 그런 소지가 분명 있어 뵌다. <천 개의 고원>에서 자신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이는 그들의 분명한 한계였다. 그렇지만 <천 개의 고원>은 여기서 한 걸음, 아니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문제는 물론 들뢰즈-가타리도 어느 정도 의식한 것 같다. 후에 『천 개의 고원』에서 탈영토화의 문제를 보다 정교하게 전개하는 것도 이런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탈영토화와 구별되고 또 그것을 능가하는 어떤 다른 유형의 탈영토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두 저자가 끝까지 맞서려는 가장 중요한 적임에는 틀림이 없다.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의 공통 부제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인 것만 봐도 그렇다.
이정우: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은 넓게 보면 모든 형태의 억압과 닫힘이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봉건성을 깨는 열림의 면도 있지만 모든 것을 화폐의 회로 속으로 몰아넣는 닫힌 면도 있다. 따라서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은 자본주의이기도 하다.
◆유목주의나 전쟁기계 같은 개념 자체를 긍정적인 가치로 평가할 수 있는가?
이정우: 전쟁기계나 유목주의 같은 개념에 처음부터 어떤 가치론적 판단을 넣어서 읽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작년의 논쟁과 같은 오해가 생겼다. 유목주의는 그 자체로서 ‘좋은’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를 오해하는 가장 일차적인 메커니즘은 이들의 개념에 처음부터 가치론적 함의를 넣어서 읽는 것이다. IBM 컴퓨터도 농촌공동체도 모두 전쟁기계다. 모두 국가장치의 바깥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전쟁기계를 추구할 것인가이다.
김재인: 들뢰즈의 개념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바로 이원론적 사고다.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rhizome: 뿌리줄기.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는 접속과 창조의 무한성을 가리킴)과 지도(carte: 현실을 물화된 실체로 다루지 않고 역동적인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가변화되고 새롭게 구성되는 공간으로 봄)를 좋은 쪽으로, 나무나 뿌리 혹은 사본(지도와 다르게 폐쇄적인 대상을 복제하는 것에 그침)을 나쁜 쪽으로 대립시키는 것은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는 것 같아 위험하다. 들뢰즈는 1980년 10월 23일 「리베라시옹(Lib럕ation)」과의 인터뷰에서 “천 개의 고원에서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좋은 것은 결코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매끈한 공간(espace lisse)만으로 주름(striages)과 억압을 이겨낼 수 없고, 기관 없는 육체만으로 조직을 이겨낼 수 없다”고 말한다. 나무, 뿌리로부터 리좀으로 가는 것은 창조의 실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에서 길을 뚫는 일이다.
김진석: 유목주의는 자유로운 사유이며 침략과 전혀 상관없다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념성을 깨야 하지만, 유목주의의 침략성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역사 속의 모든 침략적 이동성을 비난하려고만 하는 맹목적 생태주의자도 자신의 관념성을 깨야 한다. 그 두 측은 서로 유목주의에 자신의 가치를 대입해서 사고했기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한국 사회에서 ‘유목주의’ 개념이 혼동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길을 찾아가야 하는가?
이정우: 이런 문제는 여러 층위의 유목주의를 구분하지 않아 생긴 문제다. 유목주의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자크 아탈리 식의 문명론, 삼성에서 강조하는 디지털 유목주의, 몽골 초원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복고주의 등을 모두 뜻할 수 있다. 말은 하나지만 사유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다. 『천 개의 고원』을 숙독한 사람보다는 대기업의 선전을 본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이 현재 비극의 원인이다.
김진석: 최소한 들뢰즈-가타리의 탓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포획장치가 굳건하다는 명제와 함께, ‘유목주의’와 ‘전쟁기계’가 합체한다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서 들뢰즈 철학을 소개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포획장치는 강조하면서도, 상대적으로 그 체계를 해체하려고 하는 ‘전쟁기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유목주의’는 디지털 소비문화 등에 포획되거나 무정부주의적 의미를 많이 가지게 됐다.
이성민: 김진석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자신의 철학이 정치적으로 손쉽게 해석되는 데 들뢰즈 후기철학이 협조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 본연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협력 작업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한다. 지젝은 이같은 후기 들뢰즈의 경향을 부정한 바 있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유목주의’와 같은 추상적 대상을 너무 쉽고 단순하게 대안으로서 제시할 뿐이다(정말 이런 주장은 지겹다. 지극히 지젝적이지 않은가 ! 그리고 지극히 아카데미컬 하지 않은가? 가타리라는 정신의학자가 전도유망한 한 젊은 철학자의 앞날을 망쳐 놓았다고?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들뢰즈는 그 정신의학자를 너무도 사랑했는데 어쩌나? 그리고 더욱 더 아이러니컬하게도 들뢰즈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저서로 <천 개의 고원>을 꼽고 있는데 어쩌나? 들뢰즈-가타리의 논의가 추상적이라면 그럼 구체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제시해 주시길. 어디 지젝의 논의에서 그 대안이 나오는가?).
서동욱: 작년의 논쟁과 들뢰즈 철학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정치적 관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과 같은 들뢰즈 초기 저작으로 돌아가서 ‘유목주의’를 고찰해 봐야 한다. 단순히 대안 개념으로서 유목주의가 아니라 그의 중요한 개념인 일의성(univocite)을 기초로 존재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존재자들 사이에서 개별화되는 차이들을 주목하는 일의성의 관점에서 ‘유목주의’를 해석한다면 좀 더 풍부한 함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역시 강단 철학자다운 언급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제시된 '존재의 일의성'테제는 <천 개의 고원>에서 어떻게 다시 반복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인터뷰 및 정리 이민석 기자
ground28@snu.ac.kr
■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김상환(서울대 철학과 교수), 이정우(철학아카데미 대표), 김재인(서울여대 철학과 강사), 이성민(도서출판b 기획위원), 서동욱(서강대 철학과 교수), 김진석 교수(인하대 철학과 교수), 박기순(서울대 철학ㆍ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