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질 들뢰즈

[스크랩] 들뢰즈의 칸트 읽기

ddolappa 2008. 8. 1. 00:47
들뢰즈의 칸트 읽기
김인호

칸트의 이성은 입법자이다. 이성은 추리하고, 지성은 판단한다. 그래서 미학에서는 상상력이 입법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입법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상에 대해 입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해서 입법한다. 우리는 입법자이기는 하나 유한자로서 이성에 대한 입법자인 것이다. 오직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만이 그의 현존 자체에서 현존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판단력 비판』에서 ‘자율성’을 획득한다. 자유를 실현한 것은 자연이 아니지만, 자유 개념은 자연 속에서 실현되거나 성취된다. 감성계 안에서 자유와 최고선의 성취는 이처럼 인간의 고유한 종합적 활동을 함축한다. 상상력은 입법적 지성이 개념들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판단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판단’은 다양한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다. 그것은 칸트 이전의 합리론이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기획했다면, 칸트는 대상이 주체에 종속되는 입법적인 이성의 인식 능력을 발견한 데 있다. 곧 우리가 명령하는 자라는 것이다.

1.

들뢰즈는 왜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등을 연구하는가? 고전을 자기 철학의 도래를 고지하는 가브리엘 천사로 삼기 위해서인가, 자기가 계획한 혁명을 선동하기 위한 빌미를 제공하는, 훌륭하지만 불태워버려야 할 베르사유 궁정으로 만들기 위해서인가? 물론 두 가지가 다 중요한 계기이다. 그러나 보다 함축적으로 말하자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거인의 그 너머를 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시대는 흐르고 있고, 사회는 변하고 있다. 그리고 대중은 항상 사회조직 속의 새로운 물결(굴곡)이다. 그렇기에 예전의 철학가의 사유로 현대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들의 입을 빌어 현대를 이야기한다면, 그 철학가들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들뢰즈는 관념론자도 아니고 포스트 칸트주의자도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들뢰즈도 합리론 철학의 여러 가지 유산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이어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칸트에 다가선다. 실상 칸트의 출현으로 합리론이 종말을 고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합리론의 맥락은 연면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들뢰즈의 고전 철학 연구는 이미 존재하는 철학 텍스트를 매개로 한 새로운 사유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저술들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들뢰즈는 『대담』에서 말한다. “칸트에 관한 나의 책은 마치 어떤 적을 대하듯, 그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장치를 이용하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쓴 책이다. ‘이성’의 법정, 기능들의 절제된 사용, 입법권이 우리 스스로에게 넘겨지는 만큼 더욱 위선적인 복종같은 그런 장치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쓴 그러한 책이다. 다시 그는 자신의 철학적 태도를 ‘조정자’라는 개념을 통해서 보여준다. “본질적인 것은 조정자들intercesseurs이다. 창조, 그것은 조정자들이다. 조정자들이 없으면 텍스트도 없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사물, 식물 혹은 동물일 수도 있다. 공상적인 것이든, 생명체건 아니건 간에 조정자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은 계열이다. 완전히 상상적인 것이건 아니건, 계열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지고 만다.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는 조정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들도 나 없이는 표현되지 못한다.”1) 그는 조정자로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조정자만이 ‘창조’를 할 수 있다는 당위로써 철학을 시작한다. 물론 그가 푸코의 <계몽>처럼, 료따르의 <숭고함>처럼 칸트를 포스트 모더니스트들 간의 친화성과 간격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는 칸트에 보다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이 책은 칸트 해설서로도 공인받을 만큼 엄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들뢰즈는 칸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한다. 차라리 그는 칸트와 더불어 굴곡지어지고 포개어지기를 바란다. 칸트와 자신을 구분지어 자신만의 공간을 획득하기를 바란다. 그는 라이프니츠의 말을 빌어서 “인간은 굴곡 속에서 지각하고, 세상은 각자의 영혼에 접혀 있다가, 시공간의 질서에 따라 부분부분 다시 펼쳐지기”2) 때문에 굴곡의 힘은 오늘날에도 전혀 고갈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책이 보고서나 기록 자체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책이란 가족이나 특별한 경험들을 잇는 그러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이나 저술이 자기자신이나 자기 작품의 기자가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책이 아니다. 창조적 의도가 담겨져 있지 않은 책은 우리 시대의 잡다한 쓰레기이다. “만일 영화나 비디오가 책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에 부합되는 표현 수단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시청각 그 자체에 담겨 있는 창조적 잠재성마저 질식시키려는 행위이다. 만일 문학이 죽는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암살에 의한 난폭한 죽음이 될 것이다.”3)
우리는 창조적 힘과 예속적 권력 사이에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문학이란 누구에게 있어서나 특별한 연구를 요하는 그러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창조한다는 것은 전달이 아니라 저항을 의미한다. 글은 아직 언어를 갖추지 못한 미래의 민중을 위해 씌어지는 것이다.”4] 그래서 텍스트는 새로운 자재에 부합하는 굴곡짓기가 된다. 그런데,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이름하에 유치해지고자 하는 광적 욕망을 가진 출판계의 작금의 현상은 해체의 핵심을 왜곡하고 신보수주의자의 농락에 놀아난다. 그러한 모방은 ‘탈중심’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찌꺼기들의 조합’이다. 모방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한다. 그래서 그들은 번식력이 강한 것이고, 처음의 모델(원전)보다도 낫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창조자는 스스로를 미로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는 창조자가 아니다. “창조자는 자기 스스로 특수한 미로를 만들어내는 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상구를 창조해내는 자이다. 벽을 더듬고, 거기에 머리를 부딪쳐대면서 뭔가를 찾아내는 사람, 그 사람만이 창조자가 될 수 있다. 미로가 없다면 탈출로도 없을 것이며, 창조를 성립시키는 출구, 진실을 규정하는 허위의 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 다시 말해 “글쓰기는 항상 생명을 주기 위해서, 삶이 갇혀 있는 곳에서 삶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탈출구를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6) 그 말은 결코 지구를 벗어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더욱 굳건히 이 지상에 발을 딛고서, 단어들을 열어야 하고, 사물들을 쪼개야 한다는 것을 저변에 깔고 있다. 마르께스의 인물들은 상상적이긴 하지만 그 인물들은 글쓰기에 의해 기능이 주어짐으로써 실제적이 된다. 문학에서 “많이 보고 많이 여행하였다”는 식으로 경험을 하여 그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체제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체제로는 결코 멀리 나아갈 수 없다. 미래를 향한 ‘열린 공간’을 만들 수 없다. 작가들의 자아도취는 역겨운 것이다. 그림자에게는 자아도취가 없기 때문이다.

2. 공통 감각 이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공통감각koine aisthesis이란 우리 오감에 주어지는 다양한 감각을 통일하는 능력이다. 또 데카르트는 공통감각을 “잘 판단하고, 참된 것을 거짓된 것으로부터 가려내는 능력, 바로 양식 혹은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나면서부터 평등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는 어떤 경우에도 특정 감각 위에 철학을 근거지우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미감적 공통감각’과 ‘논리적 공통감각’에 대해서 말한다. 또 그는 편견에서 벗어나는 사유를 ‘계몽’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칸트가 이 공통감각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핵심적인 사유 끝에는 이성의 ‘능력들의 일치’에 대해서 말하곤 한다. 칸트는 말한다. “입법하고 판단하는 것은 지성이다. 그러나 지성 아래서 상상력은 종합하고 도식schema을 산출한다. 이성은 추리하고 상징화하며 그 결과 인식은 체계적 통일의 최대를 얻는다. 그런데 이들 능력 간의 모든 일치는 ‘공통감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정의한다.”7)
들뢰즈는 칸트 철학에서 공통감각을 능력들의 선험적 일치와 그 결과를 나타내는 말로 이해한다. 그것은 곧 들뢰즈의 칸트 읽기이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본성상 다른 주관적 능력들 사이의 관계 문제로 된다. 어떤 것이 인식이 되려면, 나와 남이 동일하게 인식해야 하고, 내가 인식한 것이 인식의 대상과 일치해야 한다. 이리하여 수용적 감성을 통해 다양성은 주어지며, 능동적 이성은 이에 입법하여 경험 대상을 만든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관적 원리를 공통감각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다.
그의 철학적인 태도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이렇게 개념들을 새롭게 찾아내고, 나아가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내는 데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개념이란 “사고가 단순한 하나의 생각, 의견, 수다가 되는 것을 막아주며, 필연성과 이질성의 역설을 담고 있다.”8)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하나의 지역적 구도를 만들고, 하나의 지역을 기존의 것에 덧붙이고, 새로운 지역을 탐구하고, 결핍된 것을 보충하는 일이다. 개념은 복합체로서 곡선들이 굳어진 것이다. 개념들이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는 내재적 구도가 지역을 통해서 구축되기 때문이다.”9) 우리에게는 이제 “철학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더 이상 플라톤적이지 않은 문제들에 플라톤을 접목할 것인가” 하는 식의 문제만 남는다. 물론 그는 후자를 택한다. 그는 칸트가 불명료하게 이야기한 지점을 그의 언어로 명료하게 말하고자 한다. 특히 그는 칸트의 『판단력비판』에서 그 해결책을 찾는다.
판단력이란 일반적으로 개별적인 경우들을 보편적인 것 아래에서 파악하는 능력이다. 판단에는 도덕적 존재가 판단 주체로서 전제된다. 이리하여 가다머에 이르면 공통감각이란 윤리적 동기를 함축하는 실천적 지식이 된다. 공동체에 누적된 도덕적 역사적 원천이 되는 진리가 있다. 이것이 이론적 이성이다. 이러할 때 전통과 역사는 이해와 해석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다머는 말한다. 진리의 원천을 실증주의적 과학 정신으로부터 시민정신으로 옮겨 오려는 노력이야말로 공통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이리하여 들뢰즈의 칸트 읽기는 ‘가다머로 칸트 읽기’로 나아갈 수도 있다.
“실천이성은 자유로운 존재에 대해 입법한다. 혹은 자유로운 존재들의 인과성에 입법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유로운 존재는 어떤 것의 원인이 된다.”10) “실천이성은 물자체의 자유로운 존재에 대해, 또는 그런 존재의 지성적이며 가상체적인 인과성에 대해, 그런 존재가 형성한 가상계에 대해 입법하는 것이다.”11) 그리하여 자유로운 존재만이 실천이성에 종속될 수 있게 된다.
본래 자유는 개인적이어서 규정되어 있지 않다. “자유가 도덕법칙으로부터 직접적인 실천적 규정을 획득할 때 논리적 사변이성은 자유를 규정해 주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 이러한 자유 개념에는 오직 실천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실재성만이 주어진다. 우리는 단지 도덕법칙을 통해, 그런 존재가 현존하며 자유 인과성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12)

2-1. 판단력 비판에서 능력들의 관계

“상상력은 개념없이 도식schema을 산출한다. 그렇다 해도 도식 작용은 언제나 자유롭지 않은 상상력의 활동일 뿐이다. 지성의 입법이 상상력을 활동하도록 규정해 주기 때문이다. 대상의 형식을 반성함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자유와 함께 형태를 관조하면서 활동하는 상상력은, 직관의 임의적 형식으로서 자발적이며 생산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유로서의 상상력과 규정되지 않은 지성의 일치가 있다.”13) 그러나 상상력과 지성의 활동은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느껴질’ 뿐이다.
숭고의 느낌은 광대함이나 강력함에 직면할 때 나타난다. 이때 상상력은 자기 능력을 극단까지 몰고가는 맹렬함을 체험한다. 우리는 이러한 숭고를 통해 상상력과 이성 사이의 주관적 관계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이다. 즉 불일치이다. 이 때문에 상상력은 자유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숭고의 느낌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불일치의 심층에도 일치가 있다. 즉, 고통이 즐거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알기 위해서 천재(성)이 필요하다. 천재성은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취미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취미의 관점에서는 완벽하나 천재(영혼)가 없는 작품들이 있다. 취미가 자유로운 상상력과 지성의 형식적 일치를 나타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활기가 없는 것, 즉 천재가 없는 것이다. 예술에서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는 오로지 천재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다. 천재는 다른 천재를 부른다. 천재는 모든 능력의 초감성적 통일을 표현하며 그 통일을 살아 있는 것으로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천재는 자연에서의 미적 결과들이 예술에서의 미로 확장될 수 있는 규칙들을 제공하다. 곧 판단력은 천재성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능력들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칸트의 낭만주의적인 면을 엿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들뢰즈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철학사를 통해 어떻게 존재론적 ‘차이’가 은폐되어 왔는가를 밝히는 작업”이다. 그는 말한다. “철학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차이를 동일성, 혹은 동일자, 유사성, 반대, 유비에 종속시켰다. 그리하여 그들은 차이의 개념이 아니라 개념적 차이를 달성함으로써, 차이를 개념의 동일성 속으로 흡수했으며, 개념 자체 속에 가두어 버렸다.”14) 그래서 지금까지의 로고스 중심 철학은 차이를 동일성에 종속시켰다. 차이를 그 자체만으로 사유하지 못한 것이다. 들뢰즈는 그러한 차이나 타자를 발견하기 위해서 고전 철학책을 다시 펼친다. 차이의 힘은 전통적 사유의 이미지를 문제삼을 때 열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의 철학서의 선입견들에 주목한다.
전통적인 인식론이 개념의 창조와 그 전개라는 철학적 활동 이전에 구체적으로 어떤 선철학적인 요소를 보편타당한 전제로 가지고 있었는가, 또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이 전통적인 사유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인식론적인 전제들이 공통감각이다. 차이와 타자의 발견은 현대 철학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지만, 차이를 희석시키는 것이 공통감각이라는 존재론의 전체주의적 성격이라는 것이 들뢰즈의 독창성이다. 물론 이 글을 쓴 10년 후에 칸트는 들뢰즈의 적이 된다. 즉, 그는 칸트가 공통감각이라는 무기를 가지고서 어떻게 차이를 은폐시키는지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들뢰즈는 칸트의 이성 능력을 넘어선다. 들뢰즈는 말한다. “입법권이 우리 스스로에게 넘겨지는 만큼, 거기에는 더욱 위선적인 복종같은 그런 장치들이 있다.”15)

3.

프루스트는 많은 면에서 플라톤주의자이면서 라이프니츠주의자이다. 그런 측면은 모더니즘의 기획을 완성하는 데 상당히 요긴하다. 프루스트가 그런 철학적인 면에 얼마나 충실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해석자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서 그러한 냄새를 맡는다. “본질들은 진정한 모나드들이며 각각의 모나드는 세계를 표현하는 각각의 관점에 의해 정의된다. 각각의 관점은 모나드의 근본을 이루는 궁극적인 성질을 나타낸다.” 프루스트에게 있어서 각각의 주체의 관점을 통해서 표현된 세계는 주체와 뒤섞이지 않고, 관점은 그 관점에 위치하는 사람과 뒤섞이지 않는다. 주체들의 차이를 보증해 주는 것은 각각의 주체가 지닌 관점이며, 따라서 이 고유한 관점이 그 주체를 그것이게끔 해주는 성질, 곧 본질인데 이 본질은 어떠한 심리적 상태에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베르고트가 죽었을 때 마르셸은 명상한다.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은 그 세계로부터 나와 이 지상에서 태어나고, 아마도 마지막에는 그 세계에 되돌아가 미지의 법칙의 지배 밑에서 다시 사는 게 아닐까……. 그래서 베르고트가 영원히 죽지 않았다는 생각에도 일면 진리는 있다.”16)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도식에 입각해 영혼불멸의 가능성에 대해 사유하고 있다.
독자가 프루스트를 읽을 때, 어느 지평에서 읽기를 멈추고, “그래, 프루스트가 자기 입장을 설명하는 곳이 바로 여기야” 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횡단적 여행을 일컬어 노마드적 사고17)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프루스트를 통해서 존재자들은 수직적 위계 없이, 그저 차이라는 간극으로 나누어진 채 수평선상에 파편으로 널려 있을 수 있게 된다.
프루스트가 철학의 이미지를 텍스트에 구현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사유가 내면의 심리를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을 때 여러 철학적인 질문들이 필요해서 적절한 도용을 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는 모더니즘의 정신을 구현하려고는 하지만, 그의 체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철학들을 공격한다. 정적인 현상인식에 불과한 ‘능력들의 일치’, 곧 공통감각이란 것을 프루스트는 거부하는 것이다. 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사유가 실제로는 얼마나 임의적이고 추상적인가, 그는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선한 의지와 미리 짜여진 사유 모델에 따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폭력 앞에 노출될 때 진리 탐구를 위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다. 이 폭력은 무엇인가? 우리를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기호’이다. 애인의 거짓말이라는 기호의 폭력 앞에서 질투에 빠진 남자는 진실을 모색하려는 사유를 시작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기호를 감시하는 기호의 해석자가 된다. 기호는 ‘강요’와 ‘우연’의 성질을 띄고 있다. 기호는 그와 마주친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유(해석)하도록 강요한다. 다시 말하면 ‘능력의 일치(공통감각)’보다는 ‘능력의 불일치’가 사유하게 한다. 마침내 들뢰즈는 말한다. 공통감각이란 로고스는 없다. 기호들만이 있고 이 상형문자의 해독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들뢰즈는 칸트를 부정적 매개로 삼아 프루스트에게서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칸트에서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이 일치에 의해서 체험된다. 그러나 그것이 들뢰즈에 오면 일치보다는 ‘불일치’에서, 즉 ‘이성과 상상력 사이의 싸움’에서 온다.

4.

그동안 전통철학은 플라톤의 이성중심주의, 칸트의 주체중심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특히 칸트에게 있어서 세계란 그 자체로 인식론적 질료이며, 인식 성립의 근거로써 주체에게 주어져 있었다. 이성적이고, 통일되고, 조화로운 기능을 가지고 있는 주체, 즉 ‘나’라는 주체는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관점에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지만, 여기에서는 ‘타자’ 또한 또다른 관점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의 초월성을 내포하고 있는 주체의 문제는 칸트 이래로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왔다. 이런 경우, 특히 싸르트르의 경우에 “주체와 타자는 ‘나냐 너냐’의 끝없는 투쟁 속에 갇혀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18) 들뢰즈는 이러한 이성과 주체의 통일성을 전복시키고자 한다. 그리하여 ‘욕망’, ‘타자’, 혹은 ‘광기’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이성의 바깥’의 세계가 열린다. “’여기에 있는 나’가 타자에게는 ‘저기에 있는 그’일 수 있는 가능성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19)
들뢰즈는 욕망의 탈속령화를 통해서 이전의 코드들을 해체하고 미래의 열린 공간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이 꼭 무엇이라고 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동안 동일자 철학에 의해 배제되었던 ‘타자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존재의 낯선 차원으로서 ‘탈중심적인 주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들뢰즈의 주요 저서
1.『흄, 그의 삶, 그의 작품』, 1952.
2.『니체와 철학』, 1962. 『칸트의 비판 철학』, 1963. 『베르그송 주의』, 1966.
3.『마르셸 프루스트와 기호』, 1964. 『사셰 마조크 소개』, 1967.
4.『차이와 반복Difference et repetition』,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1968.
5.『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 『중첩Superpositions』, 1979.
6.『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La logique de la sensation』, 1981.
7.『영화-1―이미지-운동』, 1983. 『영화-2―이미지-시간』, 1985.
8.『푸코』, 1986.
9.『굴곡, 라이프니츠와 바로크Le Pli, Leibniz et le Baroque』, 1988.

■들뢰즈/가타리의 저서
1.『앙띠 오디푸스』, 1972.
2.『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 1975.
3.『천 개의 세트Mille plateaux』, 1980.```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와 배경


후기산업사회의 주요 논리가 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post'가 '넘어서'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이 언젠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워질 것이지만, 그것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이론일 수밖에 없다는 이유로 너무나 안이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경향은 물론 대중문화를 산출하는 사람이나 자칭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주도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괴물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포스트모던한 현상만이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그러할까? 정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의 상식(합리성)에 혼란만을 초래하는 몹쓸 것일까?
아니다. 결코 그것은 우리를 미혹에 빠뜨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갑자기 돌연변이로 발생한 것이 아닌, 서구 형이상학적 전통의 변천 과정에서 나온 자연발생적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 전통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헤겔이 칸트를 해체하듯, 또는 니체가 헤겔을 해체해서 자신의 개념을 만들어 내듯이, 해체를 통해 '도구적 이성'에 대해 전면적으로 검토하려는 행위이다. 즉, 칸트나 헤겔에게서 나온 '근대성'이나 '주체'의 문제를, 니체의 후계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이 광범위하고 진지하게 천착하여 '새로운 근대성'의 문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알려면, 니체를 위시해서, 라깡, 푸코, 데리다 등의 탈구조주의적 입장과, 비판철학자인 하버마스의 입장, 그리고 미국의 에드워드 사이드나 리처드 로티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나아가 해석학, 생태철학, 페미니즘 등에 그것이 어떻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할 때, 우리 시대에 자리잡기 시작하는 탈중심, 탈경계, 다원화, 다문화주의 등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유행으로 범람하는 가짜 포스트모더니즘은 사라져야 한다.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의 전통문화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우리의 비평 풍토에도 활력을 줄 수 있다. 정보가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에 부초처럼 흔들리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실체를 자리매김해 줄 수도 있다. 곧, 우리의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을 찾아보자는 것이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배경들을 소개하는 이유이다. 사유와 비판은 독자의 몫이다. 독자와 ‘뒤엉켜’ 역동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유희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출처 : 배드민턴과 일상
글쓴이 : 겨울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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