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무엇인가? - 김 진(울산대 철학과 교수)
1. 철학이란 무엇인가
누구든지 철학을 처음 접하게 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사람들은 철학을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와 철학 교수들도 이러한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워 한다. 특히 철학개론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고 나서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써놓은 답안지를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철학을 한심하게 가르쳤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철학은 교수가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고,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보다 심각하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은 우리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철학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로서 우리는 결국 철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철학개론은 원로교수가 가르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개론은 실제로 철학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서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가르쳐야만 되기 때문이다.
철학(Philosophie)은 어원적으로 고대 희랍어의 ‘지식’(sophia)과 ‘사랑’(philos)이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지식이나 지혜에 대한 사랑이 바로 철학에 대한 어원적 정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모든 것에 관하여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사랑은 신적인 사랑처럼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이성간의 사랑처럼 주관적 애착도 아니다.
‘필로스’는 친구들 간의 우정을 뜻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중도적이고 객관적인 선호성의 척도가 된다. 신에 대한 사랑이나 신적인 사랑에 너무 깊게 빠지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신비적, 광신적 차원으로 전락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에 너무 집착하면 정신과 육체가 손상된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더욱더 이성적으로 인도하여 광신주의와 정염주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차적인 쾌락을 가져다준다.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은 우리가 인간과 자연과 신과 같은 모든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묻고 생각하면서 구체화된다.
폴크만 쉴룩은 희랍사람들이 철학을 시작하였던 사실에 착안하여 철학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철학은 제1의 시작과 근원을 찾는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이 물었던 아르케 물음이 철학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철학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학문이다.
아르케 물음의 전통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철학으로 다루었던 존재론의 문제인 것이다.
셋째로 철학은 진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철학은 진리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넷째로 철학은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세계관이나 실천철학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현 세계로 추락하면서 순수한 영혼이 육체 속에 갇히게 되었고,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이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것(상기설)이고,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이른바 죽음에의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철학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철학은 신적인 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참된 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신적인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도덕적 수행을 통하여 신과 일치하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철학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고 성립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할 것이다.
2. 철학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은 물음(Fragen)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가능한 물음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가 철학의 대상인 것이다.
철학은 바로 묻는 행위이다.
우리는 철학 속에서 모든 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묻게 된다.
철학은 물어볼 수 있는 존재자, 그리고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존재방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고유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누구든지 철학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면 누구든지 의심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떤 문제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고 또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한다.
누구든지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철학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철학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상인들이 생활에 필요한 단순한 문제들에 관해서만 물어왔다면, 철학자들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전문적인 물음, 곧 자연과 인간과 신에 관한 물음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왔던 것이 다를 뿐이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별다른 의미 없이 던져지고 있는 상식적 물음들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논구하여 보다 전문적으로 체계화하면서 철학적 물음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묻는 전문적인 물음들만이 철학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생활 속에서의 호기심으로부터 던져지는 물음들도 보다 철학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물음이 보다 더 철학적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실제로 무의미하게 된다. 모든 물음이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물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바로 ‘놀라움’(Staunen)이다.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과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관심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에 대하여 충격을 받게 되고 경이와 놀라움을 갖게 된다.
놀라움과 경이란 바로 내가 밖으로부터 받은 ‘존재론적’ 또는 ‘의미론적 충격’이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와 같은 충격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수많은 상품들에 대한 광고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새로운 상품으로 인하여 나의 내면에 충격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속에서 그 상품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 상품에 관하여 보다 더 자세하게 알기를 원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상품의 품질과 용도 및 가격 등, 모든 것에 관하여 철저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세계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또한 어디로 가는지를 통 채로 알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외부세계로부터 받은 놀라움과 충격들은 모든 물음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고 있다.
3. 철학은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은 물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물음들이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물어진 것들은 우리들의 생각들(Denken)에 의하여 다시 정리된다. 우리가 거의 날마다 내던지고 있는 물음들 가운데서 바로 대답되어진 것들을 제외하게 되면 풀려지지 않은 문제들만이 남게 된다. 우리에게는 아직 풀려지지 않은 수없이 많은 물음들이 있다.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들을 처리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던져진,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물음들을 다시 체계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음은 이제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이처럼 생각하는 힘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묻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생각의 힘을 통하여 자신이 물었던 문제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 알게 된 상품이 나의 실생활에 필요한 것인지, 또는 다른 상품이 그것보다 더 나은지를 꼼꼼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것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의 힘을 통하여 어떤 새로운 것을 기준으로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들을 평가하거나 대체해 버릴 수도 있다.
사유는 넘어서는 것이고 전복하는 것이다(Denken heißt Uberschreiten: Ernst Bloch).
생각하는 것은 바로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가진 이성의 힘은 생각과 사유의 지평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물어진 것들 가운데서 무엇이 생각해 볼만한 것들인지를 가리게 된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힘은 모든 것에 잇대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고 또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든 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생각의 방향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이란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어떤 특정한 관심에 의하여 유발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철학은 주관적인 또는 주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외부적인 충격과 놀라움은 각자의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며, 물음의 해결 방식도 주관적인 관심과 판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해 볼만한 것들을 선택하는 일은 적어도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려는 사람의 고유한 관심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심들 모두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관심들 중에서도 도저히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궁극적 관심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리를 탐색하려는 나의 관심, 도덕적 세계를 설계하려는 나의 실천적 행위, 그리고 우리 시대를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가치관을 모색하려는 끝없는 탐구정신이 우리를 철학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세계의 근원을 탐색하려는 관심에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도 그는 비판적 태도를 포기할 경우에 보장될 수도 있는 시민적 삶에 연연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최소한 철학적 태도가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세속적인 타협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개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도대체 어떤 물음들을 궁극적인 것으로 탐색하는 것일까?
4. 철학은 본질에 관하여 묻는다
철학에서는 그 어떤 ‘무엇’(Was)에 관하여 묻는다.
여기에서 ‘무엇’이란 사물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을 보다 확장하면, 그것은 자연과 세계의 본질에 관한 물음(Was-Frage)으로 된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누구든지 간에 이와 같은 물음들을 물어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 또는 “그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이것은 책상이다”, “저것은 사슴이다”, “그것은 배나무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대부분의 일상적인 대화는 이 정도의 차원에서 끝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로 이 책상과 저 책상, 그리고 바로 그 책상을 우리가 책상이라고 알아듣게 되고 또한 책상이라고 부르게 되는 이른바 책상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사슴이라고 하는 동물을 고양이와 구별되게 하는 사슴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 가운데서 크기와 장소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배나무로 분류될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그리하여 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묻는다. 그리고 이 세계와 자연현상의 실제 모습에 관하여 묻는 것이다.
탈레스(Thales 약 624-545 B.C.) 이후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본질에 관한 철학’(Wesensphilosophie)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탈레스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본질이 바로 물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의 대답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러셀은 이러한 탈레스의 대답이 적어도 19세기의 과학지식에 이르기까지는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물질들 가운데 90% 이상이 수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물질분자식에는 수소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탈레스의 대답이 과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사에서 탈레스의 대답은 정확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철학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가 물음을 제기하고 그 물음을 풀어 가는 과정에 있다.
그가 물었던 바로 그 물음은 지금까지의 철학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을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존재자들이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아르케(Arche) 물음이었고, 존재자의 근원과 이유, 그리고 시작과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탈레스가 처음으로 물었던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과학적인 노력을 시도해 왔다.
예를 들면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0-545 B.C.)는 성질이나 분량에 있어서 전혀 제약되지 않고 경계가 없는 이른바 ‘무규정적인 것’ 또는 ‘무한한 것’(apeiron)을 바로 만물의 근원과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 528 B.C.)는 그것을 ‘공기’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95-435 B.C.)는 ‘네 개의 뿌리’(rhizomata),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500-428 B.C.)는 ‘씨앗들’(spermata)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결국 로이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의 근원과 세계의 본질에 관한 물음들을 통하여 ‘원자’(atoma)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르케를 정점으로 하는 철학적 물음은 이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적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리고 중세의 보편논쟁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본질철학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그 이후의 철학사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은 무엇에 관한 물음, 곧 사물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5. 철학은 원인과 이유에 관하여 묻는다
‘무엇’(Was)에 관한 물음은 근원적으로 ‘왜’(Warum)에 대한 물음과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탈레스가 물었던 세계의 본질(arche)에 관한 물음은 바로 세계의 ‘원인에 대한 물음’ (Warum-Frage)과 같은 것이다.
‘아르케’는 근원(Ursprung), 시작(Anfang), 근거(Grund), 본질(Wesen), 원인(Ursache)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들은 살면서 어떤 사건이나 행위에 대한 원인과 동기를 물을 때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도대체 왜 그들을 못살게 구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엄마는 왜 나를 때리려고 하는지를 묻게 된다. 왜 착한 아이들은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는가?
봉급생활을 하는 어른들 역시 왜 자신들만이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의 정치인들은 국민의 생존에 가장 민감한 문제인 원자력 발전소에 대하여 가장 둔감한지를 묻게 된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면서 자연의 운행과 우주의 신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학생들의 시위현장을 바라보면서 사회와 역사의 전개 과정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자들은 법칙의 인과성을 추적하면서,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다시 작업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세계현상을 일관된 하나의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추적하면서, 이 세계가 그곳으로부터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인 운동인과, 또는 그곳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목적인을 탐색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세계 현상의 근원과 원리를 과거적인 고향(Heimat) 상태로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이데아적인 것에 대한 기억, 즉 아남네시스(Anamnesis)로부터 기인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옛날에 있었던 이상적인 것의 궤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은 과거적인 이상을 동경하고 지향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원인계열을 추적하여 결국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면서 그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제1의 부동의 원동자’(der erste unbewegte Beweger)를 제시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은 목적론적 계열의 마지막에 위치한다. 그것은 최초원인이면서 또한 동시에 최후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존재원인을 전지전능하신 신의 존재에로 귀속시키려고 한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같은 역사주의자들은 세계사는 일정한 발전법칙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절대정신이나 계급 없는 사회와 같은 역사발전의 종국점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변화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숙명론자들은 인간의 운명은 이미 기계론적인 원인과 결과의 틀 속에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자율적인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도덕적 이상향을 제시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성의 함양이나 자율성과 책임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과론적인 세계의 진행 가운데서 개인적인 자유의 행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가라는 철학적 문제가 새롭게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원죄론 또는 하느님의 섭리와 예정론에서 개인적인 결단과 책임의 문제, 그리고 불교적인 윤회사상에서 선을 향한 도덕적 의지의 역할과 같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막힌 길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인간과 자연의 원인과 근원에 대한 성찰을 계속한다.
6. 철학은 방법에 관하여 묻는다
철학은 지금까지 거의 모든 것에 관여하면서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물어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Wie)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목표와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고 성취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물음’(Wie-Frage) 앞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화 가운데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사랑하는 쥐들은 그들의 철학적 사색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동료들이 자주 실종되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과 본질 규명을 시도하였고, 고양이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난관은 바로 ‘어떻게’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이상적인 실천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우리에게 막혀있는 것은 바로 ‘어떻게’라는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진리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방법론에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리고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보편적인 개념 정의법, 플라톤의 변증법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법과 같은 학문방법론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특히 중세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대규모의 방법론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과 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로부터 발단된 보편논쟁(Universalienstreit)이었다.
근세철학에 이르게 되면 학문방법론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면서, 귀납적인 방법을 근간으로 경험을 중시하게 되는 영국의 경험론과 연역적인 방법을 근간으로 이성을 중시하게 되는 대륙의 합리론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학문방법론을 다시 통일시키려고 한 칸트의 선험철학이 철학사의 새로운 정상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칸트 이후의 학문방법론은 크게 현상학적 방법론과 분석철학적 방법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론이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해석학과 비판이론, 과학철학과 구조주의 등의 학문방법론이 있어서, 이른바 방법론적인 무정부주의까지 주장되기도 한다. 철학에서 방법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방법의 규정은 그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지식의 한계를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지금까지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았던 과학적 방법론조차도 수정되거나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자연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어 왔던 귀납적인 방법론이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포퍼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학문방법론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이 현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은 앞으로 우리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을 처음 묻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설명될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객관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리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철학사의 개관이나 특정한 철학자의 이론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철학은 학습대상이 아니라 학습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려 깊은 철학교수들은 단편적인 철학사의 지식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바르게 묻고 바르게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직접 구체적으로 철학적 물음을 던질 수 있으며, 사물과 사건의 본질과 원인규명을 합리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의 문제를 탐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철학적 정신들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나의 역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아발견의 활동일 수도 있으며, 그와 같은 자아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열어 가는 개방적인 활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의 주제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나와 생활세계 그리고 우주적 세계와의 관계정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은 외부로터의 충격과 놀라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나의 주체적인 문제제기를 한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는 활동이다.
철학에서의 물음은 철학을 이루게 하는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철학적 정신의 산물이며 창조적인 사유활동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은 더 나아가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유는 넘어서는 것이며 전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것, 즉 참된 철학 활동이란 그 시대를 살면서 물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 관하여 철저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과 생각만으로도 선지자처럼 핍박과 탄압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철학행위를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서 배우지는 못한다. 철학 행위 또는 철학적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시대 속에서 책임 있게 생각하고 발설하려는 소명의식 가운데서 배태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어떤 특정한 지식체계를 단순히 학습하는 것만일 수 없으며, 그것은 바로 실천적 진리의 이론화와 이론적 진리의 실천화에 대한 가능성 조건을 끊임없이 사색하고 발설하는 활동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바로 이론과 실천의 일치 가능성 또는 통합 가능성에 대한 요청적 탐구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요청(Postulat)이란 우리의 일정한 생각들 속에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그리하여 그 이론적 모순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막힌 길의 상황에서 그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이론명제들이다. 어떤 철학자가 무엇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철학자의 이론세계에서 빚어지는 모순구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일정한 전제에서 시작되고 있는 자기 철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자기의 사유세계 속에서 제기되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합리적인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실천적 가능조건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은 요청이며, 철학적 방법론은 새로운 도덕적 세계질서의 실현 가능성의 필요 충분한 조건으로서의 요청명제를 탐구하려는 요청적 사유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것은 진리 실현의 가능성 조건을 사색하는 요청활동이다. 철학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요청하는 것이다.
<<정 리>>
1.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은 존재 세계의 신비로부터 오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부터 시작된다. 존재론적 의미론적 가치론적 충격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2. 철학은 생각해 볼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반성하게 한다. 생각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볼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진 힘이다. 우리는 생각을 통하여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개진하게 된다.
3. 철학은 본질에 관하여 묻는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아르케-물음을 통하여 세계 존재의 궁극적 원리를 알고자 하였다.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도록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이 바로 본질철학의 과제이다.
4. 철학은 원인과 이유에 관하여 묻는다. 인식과 진리의 근원, 역사의 전개 방향, 자율성과 책임의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설정된다.
5. 철학은 방법에 관하여 묻는다. 어떻게 진리에 접근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이다. 방법의 규정은 그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지식의 한계를 결정하게 된다.
▶ 출처 : 울산대학교 철학과 -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실 중에서
보충 참고 자료
플라톤 철학
붕괴해 가는 그리스 도시 국가를 구하려는 노력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중단한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완성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플라톤 철학의 동기의 핵심은 독립된 정치·경제·사회 단위로써 폴리스의 귀족정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민주적이며, 점차 지적으로 개화되어 가는 폴리스는 더 이상 옛날의 신에 대해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귀족정 폴리스의 법률과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사라져 가는 신에 대치할 만한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타당성을 가진 이념이 필요해졌다. 바로 여기에서 플라톤 철학이 성립한다.
플라톤은 물질적 존재보다 정신적 존재가 근원적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긍정한 최초의 인물이며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관념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해결해야 했던 당면 과제는 먼저 소크라테스의 유산이었던 절대적 도덕의 기준을 확립하는 일이었는데, 여기서 도덕 개념의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주장함으로써 절대적 도덕의 기준을 보증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윤리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 학적 지식의 전반적 가능성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관심을 가졌는데, 이리하여 플라톤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학적 인식과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결합시키고 있다. 실재의 본성에 관한 학적 인식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모든 것이 변화하고 어떤 것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면, 세계에 대한 인식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식될 불변의 대상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은 이와같이 명확성·영원 불변성을 갖는 실재를 이데아라 부르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우리들의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성을 갖는다. 즉, 이데아는 개별자의 공통된 요소로부터 귀납적으로 추정한 개념이 아니라 머리 속에 담겨 있는 관념의 범위를 벗어나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더욱이 이데아는 시공적 규정을 초월해 있어 불변하기 때문에 초월적 실재이다. 즉, 이데아는 결국 자연계의 영원하고 완전한 원형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이상적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가지(可知)적인 불변의 세계인 이데아계과 가시(可視)적인 변화의 세계인 현상계로 양분된다.
그렇다면,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경험적 대상들의 관계되는데, 플라톤은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관여' (혹은 '분유')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현상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이데아의 보편적 본질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다. 결국 관여에 관한 사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철학적 문제는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보편자는 개별자의 본질이고 개별자는 보편자를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 결국 이데아계가 관여를 통해 현상계에 낮은 수준의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현상계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데아를, 언제·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서 플라톤의 유명한 상기설이 성립한다. 즉, 이데아 인식을 설명하기 위한 필요한 전제로서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이미 이데아계에 존재했으며, 이데아의 지식을 갖고 있던 것이다. 인식이란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직관했던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이다. 즉, 인식이란 신체에 의해 오염됨으로써 망각된 지식을 회상하는 과정, 즉 상기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경험에 앞선 인식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입장인 선천주의적 인식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일의적이 아니라, 이중적이다.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크게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로 대별된다. 여기에서 변증법이란 말이 플라톤에 이르러 철학 용어로 정착하게 된 계기가 나타난다. 철학의 과제는 인간의 영혼을 자극하여 감각에 의해서 흐려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데아의 인식을 추구하게 하는 데 있는데, 플라톤은 이데아의 상기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변증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데 플라톤에게 있어 변증법이란 인간 영혼을 이끌어 이데아에 이르게 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는 변증법을 이데아에 이르는 학문으로 규정했는데 그에 따라 변증법은 플라톤 철학에서 철학 그 자체와 일체화된다. 플라톤은 그의 이데아론 속에 변증법을 위치시킴으로써 변증법을 독자적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이 되게 했으며, 이론과 실천이 일치한 인간의 가장 높은 경지라는 의의를 부여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변증법은 존재의 변화와 연결되지 못하고 불변하는 이데아와 연관됨으로써 형이상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의 변증법은 개념의 변증법이 존재의 변화와 연결되지 못하고 개념 자체에 머물 때 관념론의 신비의 빠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변증법의 역사
* 제논의 궤변이라고 불리는 이야기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있다. 이 궤변의 극복방법은 공간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되는데 공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 된다. `공간은 잘려 있지 않지만 결국 잘린다.` 즉 자기발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날아가는 화살의 경우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화살은 공간의 한 점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순된 정의가 나오는 것은 움직임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소피스트
소피스트들은 회의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수사학과 논쟁술이 되었다. 진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성공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궤변술을 사용하는데, 진리와 무관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익에 맞추어 반대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자기편에 유리한 주장을 증명하려는 하나의 변증법이다.
* 소크라테스
제논의 변증법과는 반대로 긍정적인 것으로 볼수있다.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데에, 또 단어가 나타내는 사물의 성질을 규정하는 데에 유념하였다. 그는 정의를 요구하며 그것을 탐구,논의한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그의 변증법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그가 제자에게 정의를 물으면 제자가 답하고 그는 다시 구체적 적용에 대해 물어 제자가 실체를 깨닭게끔 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 플라톤
플라톤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과 비슷하다. 즉 대화술이며 논쟁술로서, 구체적 사실들에서 출발하며 일반적 정의에 이르고 그것을 다른 사실과 대조하여 검증하는 기술이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플라톤에게만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변증법을 구성한다고 한다. 이것을 이데아론에서 볼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은 그럴듯한 전제(함께 토론하는 상대가 승인한 명제를 실질적으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에서 출발한 추론을 목표로 한다. 플라톤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토론 방식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것일 뿐이다.
변증법이란
변증법이란,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 ·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 ·반(反) ·합(合)(정립 ·반정립 ·종합, 또는 卽自 ·對自 ·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철학은 내일의 양심과 미래를 위한 당파성이나 또는 희망에 관한 지식을 가지게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어떤 지식도 가지게 되지 않을 것이다. - 에른스트 블로흐
1. 철학이란 무엇인가
누구든지 철학을 처음 접하게 되면,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사람들은 철학을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대부분의 철학자와 철학 교수들도 이러한 물음에 쉽게 답하지 못하고 곤혹스러워 한다. 특히 철학개론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하고 나서 도대체 지금까지 무엇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써놓은 답안지를 읽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철학을 한심하게 가르쳤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철학은 교수가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고,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보다 심각하게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철학은 우리가 그토록 고통스럽게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철학은 우리의 삶을 더욱더 복잡한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로서 우리는 결국 철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철학개론은 원로교수가 가르치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점점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개론은 실제로 철학의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서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가르쳐야만 되기 때문이다.
철학(Philosophie)은 어원적으로 고대 희랍어의 ‘지식’(sophia)과 ‘사랑’(philos)이라는 두 단어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지식이나 지혜에 대한 사랑이 바로 철학에 대한 어원적 정의인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는 모든 것에 관하여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사랑은 신적인 사랑처럼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이성간의 사랑처럼 주관적 애착도 아니다.
‘필로스’는 친구들 간의 우정을 뜻하는 사랑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중도적이고 객관적인 선호성의 척도가 된다. 신에 대한 사랑이나 신적인 사랑에 너무 깊게 빠지면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신비적, 광신적 차원으로 전락한다. 이성에 대한 사랑에 너무 집착하면 정신과 육체가 손상된다.
그러나 지식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더욱더 이성적으로 인도하여 광신주의와 정염주의의 차원을 넘어서서 고차적인 쾌락을 가져다준다.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철학은 우리가 인간과 자연과 신과 같은 모든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묻고 생각하면서 구체화된다.
폴크만 쉴룩은 희랍사람들이 철학을 시작하였던 사실에 착안하여 철학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철학은 제1의 시작과 근원을 찾는 것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이 물었던 아르케 물음이 철학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둘째로 철학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에서의 존재자에 대한 학문이다.
아르케 물음의 전통 속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1철학으로 다루었던 존재론의 문제인 것이다.
셋째로 철학은 진리를 고찰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철학은 진리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넷째로 철학은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세계관이나 실천철학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에서 현 세계로 추락하면서 순수한 영혼이 육체 속에 갇히게 되었고,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잊게 되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이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되찾는 것(상기설)이고,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이른바 죽음에의 연습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물론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철학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철학은 신적인 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참된 진리를 터득한다는 것은 신적인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도덕적 수행을 통하여 신과 일치하는 것을 이상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철학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철학이 어떻게 시작되고 성립되는가를 살펴보기로 할 것이다.
2. 철학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은 물음(Fragen)으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가능한 물음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그 자체가 철학의 대상인 것이다.
철학은 바로 묻는 행위이다.
우리는 철학 속에서 모든 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묻게 된다.
철학은 물어볼 수 있는 존재자, 그리고 문제를 제기할 줄 아는 존재방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고유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면 누구든지 철학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면 누구든지 의심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떤 문제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고 또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 한다.
누구든지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될 수 없으며, 물어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든지 철학활동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철학은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상인들이 생활에 필요한 단순한 문제들에 관해서만 물어왔다면, 철학자들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전문적인 물음, 곧 자연과 인간과 신에 관한 물음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왔던 것이 다를 뿐이다.
철학자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별다른 의미 없이 던져지고 있는 상식적 물음들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논구하여 보다 전문적으로 체계화하면서 철학적 물음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철학자들이 묻는 전문적인 물음들만이 철학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생활 속에서의 호기심으로부터 던져지는 물음들도 보다 철학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물음이 보다 더 철학적인가를 구별하는 것은 실제로 무의미하게 된다. 모든 물음이 철학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와 같은 물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바로 ‘놀라움’(Staunen)이다.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연과 세계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에 관하여 관심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관심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에 대하여 충격을 받게 되고 경이와 놀라움을 갖게 된다.
놀라움과 경이란 바로 내가 밖으로부터 받은 ‘존재론적’ 또는 ‘의미론적 충격’이다. 사람들은 이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와 같은 충격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 저녁마다 수많은 상품들에 대한 광고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품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 새로운 상품으로 인하여 나의 내면에 충격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 속에서 그 상품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 상품에 관하여 보다 더 자세하게 알기를 원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는 그 상품의 품질과 용도 및 가격 등, 모든 것에 관하여 철저하게 알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과 세계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또한 어디로 가는지를 통 채로 알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외부세계로부터 받은 놀라움과 충격들은 모든 물음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고 있다.
3. 철학은 생각하는 것이다
철학은 물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나 모든 물음들이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물어진 것들은 우리들의 생각들(Denken)에 의하여 다시 정리된다. 우리가 거의 날마다 내던지고 있는 물음들 가운데서 바로 대답되어진 것들을 제외하게 되면 풀려지지 않은 문제들만이 남게 된다. 우리에게는 아직 풀려지지 않은 수없이 많은 물음들이 있다.그리하여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들을 처리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던져진,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물음들을 다시 체계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물음은 이제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이처럼 생각하는 힘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묻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생각의 힘을 통하여 자신이 물었던 문제들을 보다 합리적으로 처리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 알게 된 상품이 나의 실생활에 필요한 것인지, 또는 다른 상품이 그것보다 더 나은지를 꼼꼼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우리는 지금까지 축적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것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의 힘을 통하여 어떤 새로운 것을 기준으로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지식들을 평가하거나 대체해 버릴 수도 있다.
사유는 넘어서는 것이고 전복하는 것이다(Denken heißt Uberschreiten: Ernst Bloch).
생각하는 것은 바로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가진 이성의 힘은 생각과 사유의 지평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물어진 것들 가운데서 무엇이 생각해 볼만한 것들인지를 가리게 된다.
우리가 가진 생각의 힘은 모든 것에 잇대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든 것에 관하여 말할 수 있고 또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우리들은 모든 것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의 관심에 따라 생각의 방향과 내용은 크게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물음이란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어떤 특정한 관심에 의하여 유발된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철학은 주관적인 또는 주체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외부적인 충격과 놀라움은 각자의 삶의 정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으며, 물음의 해결 방식도 주관적인 관심과 판단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해 볼만한 것들을 선택하는 일은 적어도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려는 사람의 고유한 관심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관심들 모두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은 관심들 중에서도 도저히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궁극적 관심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진리를 탐색하려는 나의 관심, 도덕적 세계를 설계하려는 나의 실천적 행위, 그리고 우리 시대를 바르게 살 수 있도록 가치관을 모색하려는 끝없는 탐구정신이 우리를 철학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추구하기보다는 세계의 근원을 탐색하려는 관심에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하였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도 그는 비판적 태도를 포기할 경우에 보장될 수도 있는 시민적 삶에 연연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통하여 최소한 철학적 태도가 무엇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세속적인 타협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개진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도대체 어떤 물음들을 궁극적인 것으로 탐색하는 것일까?
4. 철학은 본질에 관하여 묻는다
철학에서는 그 어떤 ‘무엇’(Was)에 관하여 묻는다.
여기에서 ‘무엇’이란 사물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을 보다 확장하면, 그것은 자연과 세계의 본질에 관한 물음(Was-Frage)으로 된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누구든지 간에 이와 같은 물음들을 물어왔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이것은 무엇인가?”, “저것은 무엇인가?”, 또는 “그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을 배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마찬가지로 “이것은 책상이다”, “저것은 사슴이다”, “그것은 배나무이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대부분의 일상적인 대화는 이 정도의 차원에서 끝난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로 이 책상과 저 책상, 그리고 바로 그 책상을 우리가 책상이라고 알아듣게 되고 또한 책상이라고 부르게 되는 이른바 책상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사슴이라고 하는 동물을 고양이와 구별되게 하는 사슴의 고유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여러 종류의 나무들 가운데서 크기와 장소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배나무로 분류될 수 있는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그리하여 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 묻는다. 그리고 이 세계와 자연현상의 실제 모습에 관하여 묻는 것이다.
탈레스(Thales 약 624-545 B.C.) 이후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본질에 관한 철학’(Wesensphilosophie)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탈레스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본질이 바로 물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의 대답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러셀은 이러한 탈레스의 대답이 적어도 19세기의 과학지식에 이르기까지는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물질들 가운데 90% 이상이 수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부분의 물질분자식에는 수소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탈레스의 대답이 과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사에서 탈레스의 대답은 정확했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철학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받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가 물음을 제기하고 그 물음을 풀어 가는 과정에 있다.
그가 물었던 바로 그 물음은 지금까지의 철학사 속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 모든 것들을 바로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원리는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존재자들이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변화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변화하지 않는 존재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것은 바로 아르케(Arche) 물음이었고, 존재자의 근원과 이유, 그리고 시작과 본질에 대한 물음이었다. 그리고 탈레스가 처음으로 물었던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계속적으로 과학적인 노력을 시도해 왔다.
예를 들면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0-545 B.C.)는 성질이나 분량에 있어서 전혀 제약되지 않고 경계가 없는 이른바 ‘무규정적인 것’ 또는 ‘무한한 것’(apeiron)을 바로 만물의 근원과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 528 B.C.)는 그것을 ‘공기’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엠페도클레스(Empedokles 495-435 B.C.)는 ‘네 개의 뿌리’(rhizomata),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500-428 B.C.)는 ‘씨앗들’(spermata)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결국 로이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의 근원과 세계의 본질에 관한 물음들을 통하여 ‘원자’(atoma)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르케를 정점으로 하는 철학적 물음은 이제 근대의 자연과학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학문적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그리고 중세의 보편논쟁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은 본질철학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그 이후의 철학사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은 무엇에 관한 물음, 곧 사물의 본질에 관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5. 철학은 원인과 이유에 관하여 묻는다
‘무엇’(Was)에 관한 물음은 근원적으로 ‘왜’(Warum)에 대한 물음과 뿌리를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탈레스가 물었던 세계의 본질(arche)에 관한 물음은 바로 세계의 ‘원인에 대한 물음’ (Warum-Frage)과 같은 것이다.
‘아르케’는 근원(Ursprung), 시작(Anfang), 근거(Grund), 본질(Wesen), 원인(Ursache)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들은 살면서 어떤 사건이나 행위에 대한 원인과 동기를 물을 때가 있다.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도대체 왜 그들을 못살게 구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엄마는 왜 나를 때리려고 하는지를 묻게 된다. 왜 착한 아이들은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하는가?
봉급생활을 하는 어른들 역시 왜 자신들만이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도대체 왜 우리의 정치인들은 국민의 생존에 가장 민감한 문제인 원자력 발전소에 대하여 가장 둔감한지를 묻게 된다.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다. 떨어지는 낙엽을 밟으면서 자연의 운행과 우주의 신비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학생들의 시위현장을 바라보면서 사회와 역사의 전개 과정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자들은 법칙의 인과성을 추적하면서, 그것이 적용되지 않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다시 작업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은 세계현상을 일관된 하나의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추적하면서, 이 세계가 그곳으로부터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인 운동인과, 또는 그곳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목적인을 탐색하려고 한다.
플라톤은 세계 현상의 근원과 원리를 과거적인 고향(Heimat) 상태로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은 이데아적인 것에 대한 기억, 즉 아남네시스(Anamnesis)로부터 기인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계는 옛날에 있었던 이상적인 것의 궤도 속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의 모든 것은 과거적인 이상을 동경하고 지향하게 된다.
그와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의 원인계열을 추적하여 결국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면서 그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제1의 부동의 원동자’(der erste unbewegte Beweger)를 제시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신은 목적론적 계열의 마지막에 위치한다. 그것은 최초원인이면서 또한 동시에 최후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의 존재원인을 전지전능하신 신의 존재에로 귀속시키려고 한다. 헤겔과 마르크스와 같은 역사주의자들은 세계사는 일정한 발전법칙에 의하여 전개되고 있으며, 절대정신이나 계급 없는 사회와 같은 역사발전의 종국점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변화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숙명론자들은 인간의 운명은 이미 기계론적인 원인과 결과의 틀 속에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자율적인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원인과 결과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도덕적 이상향을 제시하는 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도덕성의 함양이나 자율성과 책임의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과론적인 세계의 진행 가운데서 개인적인 자유의 행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가라는 철학적 문제가 새롭게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원죄론 또는 하느님의 섭리와 예정론에서 개인적인 결단과 책임의 문제, 그리고 불교적인 윤회사상에서 선을 향한 도덕적 의지의 역할과 같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는 막힌 길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은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인간과 자연의 원인과 근원에 대한 성찰을 계속한다.
6. 철학은 방법에 관하여 묻는다
철학은 지금까지 거의 모든 것에 관여하면서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것에 관하여 모든 것을 물어왔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Wie)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가장 이상적인 목표와 과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고 성취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물음’(Wie-Frage) 앞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우화 가운데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사랑하는 쥐들은 그들의 철학적 사색을 총동원하여 그들의 동료들이 자주 실종되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과 본질 규명을 시도하였고, 고양이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난관은 바로 ‘어떻게’라는 문제였다.
우리는 이상적인 실천목표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우리에게 막혀있는 것은 바로 ‘어떻게’라는 방법의 문제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진리에 접근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방법론에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였다. 그리고 방법론의 도움을 받아 그들의 철학적 사색을 전개하려는 구체적인 노력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과 보편적인 개념 정의법, 플라톤의 변증법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추론법과 같은 학문방법론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특히 중세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대규모의 방법론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개념과 신의 존재방식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로부터 발단된 보편논쟁(Universalienstreit)이었다.
근세철학에 이르게 되면 학문방법론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면서, 귀납적인 방법을 근간으로 경험을 중시하게 되는 영국의 경험론과 연역적인 방법을 근간으로 이성을 중시하게 되는 대륙의 합리론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두 개의 학문방법론을 다시 통일시키려고 한 칸트의 선험철학이 철학사의 새로운 정상으로 부각되기에 이른다. 칸트 이후의 학문방법론은 크게 현상학적 방법론과 분석철학적 방법론,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적인 방법론이 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해석학과 비판이론, 과학철학과 구조주의 등의 학문방법론이 있어서, 이른바 방법론적인 무정부주의까지 주장되기도 한다. 철학에서 방법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방법의 규정은 그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지식의 한계를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지금까지 절대적 가치를 부여받았던 과학적 방법론조차도 수정되거나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자연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적용되어 왔던 귀납적인 방법론이 반박될 수 있다는 사실은 실제로 포퍼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학문방법론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이 현대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은 앞으로 우리가 보다 더 효과적으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물음을 묻고 있는 것이다.
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을 처음 묻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설명될 수 있는 대상인 것처럼 객관화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리하여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철학사의 개관이나 특정한 철학자의 이론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철학은 학습대상이 아니라 학습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려 깊은 철학교수들은 단편적인 철학사의 지식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바르게 묻고 바르게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직접 구체적으로 철학적 물음을 던질 수 있으며, 사물과 사건의 본질과 원인규명을 합리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의 문제를 탐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철학적 정신들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철학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나의 역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자아발견의 활동일 수도 있으며, 그와 같은 자아에 대한 확인으로부터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열어 가는 개방적인 활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의 주제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으며, 나와 생활세계 그리고 우주적 세계와의 관계정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은 외부로터의 충격과 놀라움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나의 주체적인 문제제기를 한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는 활동이다.
철학에서의 물음은 철학을 이루게 하는 근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철학적 정신의 산물이며 창조적인 사유활동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며, 그것은 더 나아가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유는 넘어서는 것이며 전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것, 즉 참된 철학 활동이란 그 시대를 살면서 물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 관하여 철저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와 같은 물음과 생각만으로도 선지자처럼 핍박과 탄압을 받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런 철학행위를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서 배우지는 못한다. 철학 행위 또는 철학적 삶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시대 속에서 책임 있게 생각하고 발설하려는 소명의식 가운데서 배태된다. 그러므로 철학은 어떤 특정한 지식체계를 단순히 학습하는 것만일 수 없으며, 그것은 바로 실천적 진리의 이론화와 이론적 진리의 실천화에 대한 가능성 조건을 끊임없이 사색하고 발설하는 활동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은 바로 이론과 실천의 일치 가능성 또는 통합 가능성에 대한 요청적 탐구인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요청(Postulat)이란 우리의 일정한 생각들 속에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그리하여 그 이론적 모순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막힌 길의 상황에서 그 모순들을 해소하기 위하여 요구되어지는 이론명제들이다. 어떤 철학자가 무엇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철학자의 이론세계에서 빚어지는 모순구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일정한 전제에서 시작되고 있는 자기 철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그가 자기 한계를 극복하고 자기의 사유세계 속에서 제기되는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서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합리적인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실천적 가능조건을 모색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철학은 요청이며, 철학적 방법론은 새로운 도덕적 세계질서의 실현 가능성의 필요 충분한 조건으로서의 요청명제를 탐구하려는 요청적 사유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것은 진리 실현의 가능성 조건을 사색하는 요청활동이다. 철학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요청하는 것이다.
<<정 리>>
1.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은 존재 세계의 신비로부터 오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부터 시작된다. 존재론적 의미론적 가치론적 충격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2. 철학은 생각해 볼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반성하게 한다. 생각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뒤집어엎고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볼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주어진 힘이다. 우리는 생각을 통하여 자신의 궁극적 관심을 개진하게 된다.
3. 철학은 본질에 관하여 묻는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아르케-물음을 통하여 세계 존재의 궁극적 원리를 알고자 하였다. 어떤 것을 바로 그것이도록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것이 바로 본질철학의 과제이다.
4. 철학은 원인과 이유에 관하여 묻는다. 인식과 진리의 근원, 역사의 전개 방향, 자율성과 책임의 문제가 중요한 주제로 설정된다.
5. 철학은 방법에 관하여 묻는다. 어떻게 진리에 접근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가장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이다. 방법의 규정은 그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지식의 한계를 결정하게 된다.
▶ 출처 : 울산대학교 철학과 - 청소년을 위한 철학교실 중에서
보충 참고 자료
플라톤 철학
붕괴해 가는 그리스 도시 국가를 구하려는 노력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중단한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완성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플라톤 철학의 동기의 핵심은 독립된 정치·경제·사회 단위로써 폴리스의 귀족정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민주적이며, 점차 지적으로 개화되어 가는 폴리스는 더 이상 옛날의 신에 대해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 전통적인 귀족정 폴리스의 법률과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사라져 가는 신에 대치할 만한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타당성을 가진 이념이 필요해졌다. 바로 여기에서 플라톤 철학이 성립한다.
플라톤은 물질적 존재보다 정신적 존재가 근원적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긍정한 최초의 인물이며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관념론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해결해야 했던 당면 과제는 먼저 소크라테스의 유산이었던 절대적 도덕의 기준을 확립하는 일이었는데, 여기서 도덕 개념의 형이상학적 실재성을 주장함으로써 절대적 도덕의 기준을 보증하려고 시도하였다.
또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윤리학의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 학적 지식의 전반적 가능성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관심을 가졌는데, 이리하여 플라톤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학적 인식과 윤리적 행위의 문제를 결합시키고 있다. 실재의 본성에 관한 학적 인식과 관련하여 플라톤은 모든 것이 변화하고 어떤 것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면, 세계에 대한 인식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여 인식될 불변의 대상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은 이와같이 명확성·영원 불변성을 갖는 실재를 이데아라 부르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우리들의 마음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성을 갖는다. 즉, 이데아는 개별자의 공통된 요소로부터 귀납적으로 추정한 개념이 아니라 머리 속에 담겨 있는 관념의 범위를 벗어나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다. 더욱이 이데아는 시공적 규정을 초월해 있어 불변하기 때문에 초월적 실재이다. 즉, 이데아는 결국 자연계의 영원하고 완전한 원형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이상적 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가지(可知)적인 불변의 세계인 이데아계과 가시(可視)적인 변화의 세계인 현상계로 양분된다.
그렇다면, 이데아계와 현상계의 경험적 대상들의 관계되는데, 플라톤은 이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관여' (혹은 '분유')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현상계의 개별적인 사물은 이데아의 보편적 본질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다. 결국 관여에 관한 사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철학적 문제는 개별자와 보편자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보편자는 개별자의 본질이고 개별자는 보편자를 나누어 가질 때 비로소 존재한다. 결국 이데아계가 관여를 통해 현상계에 낮은 수준의 실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현상계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데아를, 언제·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한 부분에서 플라톤의 유명한 상기설이 성립한다. 즉, 이데아 인식을 설명하기 위한 필요한 전제로서 영혼은 육체와 결합하기 전에 이미 이데아계에 존재했으며, 이데아의 지식을 갖고 있던 것이다. 인식이란 영혼이 신체와 결합되기 이전에 직관했던 이데아를 상기하는 것이다. 즉, 인식이란 신체에 의해 오염됨으로써 망각된 지식을 회상하는 과정, 즉 상기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경험에 앞선 인식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인식론적 입장인 선천주의적 인식론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일의적이 아니라, 이중적이다. 이데아를 상기하는 과정은 크게 수학적 사유(오성적 사유)와 변증법적 사유(이성적 사유)로 대별된다. 여기에서 변증법이란 말이 플라톤에 이르러 철학 용어로 정착하게 된 계기가 나타난다. 철학의 과제는 인간의 영혼을 자극하여 감각에 의해서 흐려지지 않고 끊임없이 이데아의 인식을 추구하게 하는 데 있는데, 플라톤은 이데아의 상기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변증법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요컨데 플라톤에게 있어 변증법이란 인간 영혼을 이끌어 이데아에 이르게 하는 학문인 것이다.
그는 변증법을 이데아에 이르는 학문으로 규정했는데 그에 따라 변증법은 플라톤 철학에서 철학 그 자체와 일체화된다. 플라톤은 그의 이데아론 속에 변증법을 위치시킴으로써 변증법을 독자적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이 되게 했으며, 이론과 실천이 일치한 인간의 가장 높은 경지라는 의의를 부여했다. 하지만 플라톤의 변증법은 존재의 변화와 연결되지 못하고 불변하는 이데아와 연관됨으로써 형이상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의 변증법은 개념의 변증법이 존재의 변화와 연결되지 못하고 개념 자체에 머물 때 관념론의 신비의 빠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변증법의 역사
* 제논의 궤변이라고 불리는 이야기에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있다. 이 궤변의 극복방법은 공간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되는데 공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 된다. `공간은 잘려 있지 않지만 결국 잘린다.` 즉 자기발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날아가는 화살의 경우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화살은 공간의 한 점에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모순된 정의가 나오는 것은 움직임 자체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소피스트
소피스트들은 회의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수사학과 논쟁술이 되었다. 진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성공만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궤변술을 사용하는데, 진리와 무관하게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익에 맞추어 반대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자기편에 유리한 주장을 증명하려는 하나의 변증법이다.
* 소크라테스
제논의 변증법과는 반대로 긍정적인 것으로 볼수있다. 용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데에, 또 단어가 나타내는 사물의 성질을 규정하는 데에 유념하였다. 그는 정의를 요구하며 그것을 탐구,논의한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그의 변증법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그가 제자에게 정의를 물으면 제자가 답하고 그는 다시 구체적 적용에 대해 물어 제자가 실체를 깨닭게끔 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 플라톤
플라톤의 변증법은 소크라테스의 변증법과 비슷하다. 즉 대화술이며 논쟁술로서, 구체적 사실들에서 출발하며 일반적 정의에 이르고 그것을 다른 사실과 대조하여 검증하는 기술이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플라톤에게만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방법으로 변증법을 구성한다고 한다. 이것을 이데아론에서 볼 수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의 변증법은 그럴듯한 전제(함께 토론하는 상대가 승인한 명제를 실질적으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에서 출발한 추론을 목표로 한다. 플라톤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토론 방식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킨 것일 뿐이다.
변증법이란
변증법이란, 동일률(同一律)을 근본원리로 하는 형식논리에 대하여,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이 말은 그리스어의 dialektik에서 유래하며, 원래는 대화술 ·문답법이라는 뜻이었다.
일반적으로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하는 엘레아학파의 제논은 상대방의 입장에 어떤 자기모순이 있는가를 논증함으로써 자기 입장의 올바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문답법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홀륭하게 전개되고, 그것을 이어받은 플라톤에 의해 변증법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중시되었다. 근세에 와서 변증법이란 말에 다시 중요한 의의를 부여한 것은 칸트이다. 칸트는 변증법(칸트의 경우 보통변증론이라고 번역되지만 원뜻은 마찬가지이다)을 우리의 이성(理性)이 빠지기 쉬운, 일견 옳은 듯하지만 실은 잘못된 추론(推論), 즉 ‘선험적 가상(假象)’의 잘못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가상의 논리학’이라는 뜻으로 썼다. 이와 같이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변증법이란 말은 어느 경우에서나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유효한 기술 및 방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모순율(矛盾律)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변증법이란 것을 인식뿐만 아니라 존재에 관한 논리로 생각한 것은 G.W.F.헤겔이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 ·반(反) ·합(合)(정립 ·반정립 ·종합, 또는 卽自 ·對自 ·즉자 겸 대자라고도 한다)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3단계적 전개를 변증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실은 암암리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에 부딪침으로써 제3의 합(合)의 단계로 전개해 나간다. 이 합의 단계는 정과 반이 종합 통일된 단계이며, 여기서는 정과 반에서 볼 수 있었던 두 개의 규정이 함께 부정되면서 또한 함께 살아나서 통일된다. 즉, 아우프헤벤(aufheben:止揚 또는 揚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에 관해서도 변증법적 전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존재 그 자체에 모순이 실재한다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변증법은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변증법은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일반적이며, K.마르크스, F.엥겔스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도 마찬가지로 해석된다.
출처 : 배드민턴과 일상
글쓴이 : 겨울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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