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간 돕는 ‘도구’에서 종속시키는 ‘기계’로 세상을 변형시킬 ‘인간 의지’ 각인되지만 때론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발전 꼼짝없이 예속 당한다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이 필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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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① 기술이란 무엇인가
“문자기능을 없애주세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시 긴 연애편지를 쓰도록.”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무선통신회사의 광고 카피다. 광고는 “기술은 언제나 사람에게 지고 맙니다.”라는 가슴 찡한 메시지를 남기며 끝난다.
이 광고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것의 진실성에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편지지에 꾹꾹 눌러 쓰는 연애편지를 쓰지 않게 되었다. 우리들 대부분이 중독이라고 할 만큼 핸드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기술이 사람에게 진다는 광고 카피가 감동을 준다. 통신 서비스로 이익을 남기는 회사가 스스로의 서비스를 구매하지 말아 달라는 역설은 기술에 휴머니즘의 외피를 입힘으로써 이에 대한 작은 거부마저도 무력하게 만든다.
기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핸드폰과 같은 형체가 있는 대상이나 통신 회사가 제공하는 무형의 서비스도 기술이다. 이러한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이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도 기술의 일부이다. 핸드폰이 상징하는 우리가 사는 세상도 넓은 의미의 기술로 포함되며, 핸드폰을 통해서 사람들의 관계를 바꾸려는 의지도 기술이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기술에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술은 대상, 과정, 지식, 상징, 의지라는 다섯 가지 층위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한다.
기술, 사회적 권력관계 바꿔
과학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서 꼭 하이데거의 입장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20세기 기술은 연관 과학의 발전을 기반으로 해서만 발전하는 것이 많다. 그렇지만 지금의 기술이 상당 정도 과학화되었다고 해도 기술에는 아직도 과학과 다른 점이 있다. 기술은 물질적 생산에 관련되어 있으며, 인위적으로 무엇을 만들고, 이를 통해서 인간의 가능성과 목적하는 바를 확장한다. 기술은 자원에 기초해서 자원을 확장하고, 과학의 응용만이 아닌 시행착오에서 복잡한 실험에 이르는 나름대로의 지식을 활용한다. 기술 디자인과 선택에는 경제, 정치, 문화적 고려가 개입하고, 이러한 경제, 정치, 문화적 요소는 기술에 의해 다시 형성되면서 변화한다.
우리가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은 우리 경험과 인간관계 및 사회적 권력관계를 바꿈으로써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 어떤 기술은 인간 사회를 더 민주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만, 다른 기술은 독재자의 권능을 강화한다. 라디오와 같은 동일한 기술이 어떻게, 누구에 의해, 어떤 환경에서 사용하는 가에 따라서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싶어도 그렇게 사용할 수 없는 기술도 있다. 핵무기를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낙타를 바늘구멍에 넣는 것 보다 힘들다. 내가 시계태엽을 감아야 시계가 작동하듯이 인간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이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계로 상징되는 시간의 노예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듯이, 어떤 기술에게는 꼼짝달싹 못하게 예속되어 버린다. 모든 기술이 예측불능인 것은 아니지만, 일부 기술의 궤적은 그것을 발명한 사람도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발전한다.
19세기 독일의 기술철학자 에른스트 캅은 모든 기술이 인간 몸의 연장(延長)이라고 주장했다. 갈고리, 그릇, 칼, 창, 노, 삽, 괭이와 같은 기술이 인간의 손, 이빨, 팔이 연장된 것이며, 철도는 인간 순환계의 연장이고, 전신과 같은 통신기술은 인간의 신경계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헌도 텔레비전과 같은 미디어나 컴퓨터가 인간의 대뇌와 신경계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1964)에는 ‘인간의 연장’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술을 인간 몸의 연장으로 볼 수는 없다. 기술 중에는 해시계나 철조망처럼 자연을 모방하거나 자연을 체화한 기술도 있다. 그러나 캅이나 맥루헌의 기술관은 전근대적인 기술과 근대 기술의 차이를 무시한다는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전근대적 기술은 화살처럼 인간의 육체를 대체하고, 망치처럼 인간을 강화시키거나, 바퀴처럼 인간을 편하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근대기술은 자연적인 물질을 인공적인 물질로 대체하거나(제련기술), 자연적인 힘을 기술의 힘으로 대체하는 것(증기기관)이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 기술은 인간 몸의 연장이라기보다는 자연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근대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도와주는 ‘도구’였다면, 근대 기술은 인간의 노동을 종속시키는 ‘기계’의 외양을 지닌다.
기술은 개별 기술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어 ‘기술 시스템’(technological system)을 이루기도 한다. 19세기 이후 철도와 전신, 전력의 보급 이래 기술은 점차 통합된 시스템을 이루면서 확산되었다. 여기서 보듯이 기술 시스템 속에서는 기술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의 경계가 희석된다. 기술과 사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면서 기술의 진보가 사회의 진보로 자동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거대한 기술 시스템은 이미 그것에 투여된 수많은 사회적 이해관계 때문에 그 발전 방향을 바꾸지 않으려는 관성을 가지게 된다.
기술의 진보-사회의 진보 혼동
개별 기술처럼 보이는 것이 시스템의 일부인 경우도 많다.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개별 기술이 아니라 자동차 시스템의 한 구성물이다. 자동차 시스템은 자동차의 디자인 및 연구, 핵심 부품 및 기타 사양 생산, 조립, 도로 건설, 도시·토목 공학, 국토개발에 관한 장단기 계획, 도시구조, 주택구조, 주유·정유체계, 신호체계, 주차 등 수많은 제도와 인적 자본이 얽혀있는 시스템이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현대 산업사회의 직장 중 20%가 자동차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자동차가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지금까지 대체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이유도 자동차 시스템이 가진 엄청난 관성 때문이다.
기술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에게 거역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듯 보인다. 자크 엘룰이나 루이스 멈포드와 같은 초기 기술철학자들은 이러한 거대 기술 시스템의 특성을 인지하고 이를 각각 ‘테크닉’(technique)이란 개념과 ‘독재적 기술’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미국의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는 이를 ‘자율적 기술’(autonomous technology)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기술 시스템의 불확실성과 위험이 강조되고 있다. 기술 시스템이 복잡해지면서 그것이 세분화되고 쪼개져서 그 각각이 전문가들에 의해 다루어지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파편화는 종종 전체를 볼 수 없는데서 기인한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경우 책임이 실종되는 결과가 종종 생긴다.
기술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기존의 가능성 중 일부를 소멸시킨다. 따라서 이렇게 도입된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기술 환경’을 바꾸고, 결과적으로 사회 세력들과 조직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뀐다. 새로운 기술 때문에 더 힘을 가지게 된 그룹과 힘을 잃게 된 그룹이 생기며, 이를 바탕으로 사회구조의 변화가 수반된다. 이렇게 변화된 사회구조는 다시 새로운 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하는 조건을 만든다. 기술 중에는 우리가 잘 이해하고 통제하는 기술도 있지만, 대규모 기술 시스템은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 기술은 그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이 언제나 사람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믿다가는 기술의 지배와 통제를 벗어나기 힘들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술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그것도 비판적이면서 균형 잡힌 철학과 사상이 필요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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