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목적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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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④ 인간과 기술 공생 강조-돈 아이디
오늘날 인간의 문제, 특히 인간의 실존과 관련된 문제는 기술을 배제하고 더 이상 논의될 수 없다. 주위를 둘러보라. 초음파 기기의 인체 질환 진단, 전자 현미경의 물질 나노구조 분석, 전파 망원경의 우주 현상 관찰, 대중매체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 등등 기술을 통하지 않고 과연 우리가 세계와 의미 있게 만날 수 있겠는가? 오늘날 기술은 인간 삶의 양식에서 매우 필요한 존재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술시대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그에 기초한 인간이해도 분명 달라져야 할 것이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그동안 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이분법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왔다. 기술에서 인간 삶의 질을 개선할 유용성과 함께 궁극적으로 인간을 해방시킬 조건을 보았던 유토피아적 입장이 한쪽 끝에 있었다면, 다른 쪽 끝에 환경 파괴적 속성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지배하려는 억압성을 현대 기술에서 발견한 디스토피아적인 입장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은 오늘날 인간과 기술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로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설득력 있는 입장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돈 아이디(Don Idhe, 1936~)는 이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오랜 동안 연구해 온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컴퓨터와 정보기술이 발달한 1970년대부터 이 문제에 접근함으로써, 기존 논의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실천적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의 출발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디스토피아적 관점을 고집한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다. 아이디는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기술을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 인간이 존재자들과 교섭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규정하였다. 기술이 야기한 결과들 혹은 효과들보다는, 기술현상 그 자체 곧 현상적 차원에서 생생하게 감지되는 기술의 본성과 그 역할에 주목한 것이다. 또한 현대의 기술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중립적 수단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 사이에 개입하여 그 관계를 굴절시키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방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준다는 점도 동일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하이데거와 달리 현대 기술의 부정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기술의 편재함을 깊이 고려한 상태에서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인간학의 새로운 주제를 던져 주었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은 무엇이며, 그러한 분석이 오늘날 기술에 대한 성찰에서 어떤 의의를 지니는가?
비관론자 하이데거 사유 출발점
해석관계(hermeneutic relation)란 기술이 해석을 요하는 텍스트를 제공할 때 성립하는 관계다. 전자현미경으로 미시입자의 원자구조를 탐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자 현미경에서 특정의 전파를 발생시켜 입자에 쏘고 입자의 어떤 성질이 그것과 반응하여 특정의 물리적 신호를 산출하면, 전자현미경이 이 신호를 수신하여 컴퓨터의 정보처리 과정을 거쳐 그 결과를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화면에 그림으로 재현해 낸다. 그러니까 화면 속의 그림은 기술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에 관한 텍스트인 셈이다. 이는 미시세계에 불가능성 때문에 생긴 결과다. 기술을 통하지 않고는 인간은 미시세계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기술을 사용했는가가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는데 직접적인 조건이 된다. 그래서 기술이 구현해 낸 텍스트만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열쇠가 된다. 정리하면 기술은 더 이상 나의 신체의 연장이 아니며, 오히려 내가 탐구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 곧 텍스트로 다가 온다. 한편 사용된 기술에 따라 텍스트들이 달라지므로, 기술은 세계에 대해 매우 불투명하거나 세계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서 해석학적 문제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이는 일상생활 속에 보편화된 컴퓨터의 가상공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주장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차단이 아니라 처음부터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관측 망원경’ 시각경험만 확장
배경관계(background relation)는 기술이 배경으로 숨어 있으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그런 관계다. 가령 컴퓨터의 제어기술로 불빛이 조절되고 난방이 통제되며 실내 공기가 통풍되는 인공지능 건물에, 내가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기서 기술은 더 이상 신체의 연장 혹은 세계에 접근하는 통로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 곧 대기권에 대비되는 ‘기술권’(techosphere)으로 인간과 관계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기술사이의 배경관계다. 여기서 우리는 기계들과 직접 관계하지 않으면서 이들을 배경으로 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런 현상은 미래의 유비쿼터스 사회처럼 사회가 고도로 기술화될수록 한층 확대·심화될 것이 자명하다. 한마디로 인간과 기술의 관계는 이처럼 인간이 기술을 통해 세계를 어떻게 경험하는가에 따라 구분되고, 그 본질 또한 달라진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아이디의 이러한 분석은 고도 기술시대의 인간을 이해하고자 할 때, 기존과 다른 새로운 해명을 제공해 준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체현관계만을 보더라도, 우리는 오늘의 인간이 과거의 인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 기능이 확대되고 인간과 세계가 만나는 영역도 훨씬 깊고 넓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해석관계도 기존에는 도달할 수 없었던 영역(미시세계나 우주 등)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가상공간 등)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아가 배경관계에서 논의된 기술권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인간 삶의 패러다임이 새롭게 바뀔 것임을 강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가능성의 확대는 기술시대의 인간이해에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요소임에 분명하다. 실제로 현대 기술을 온전히 긍정하는 낙관론의 입장은 바로 이러한 측면들을 배타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해 축소시킨 기술 반성적 비판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인간적 가능성의 이 같은 확대가 필히 또 다른 가능성의 축소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가능성의 확대가 주로 자연현상의 정밀한 관측에 용이한 시각적 혹은 청각적 경험 등과 같은 특정한 경험들에 국한된 반면, 축소는 인간의 정서적 감성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험 전반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는 세계를 그 자체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특화된 그것도 몇몇 단일-감각적인 도구들에 의거해서만 제한적으로 보도록 함으로써, 결국 세계 혹은 현상에 대한 축소된 이해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것이 인간의 자기이해와 관련된 현상들인 경우, 인간의 자기이해에 있어서도 축소가 불가피해진다. 한편 기술의 개입으로 인한 특정 경험의 확장은 인간에게 매우 극적이고 환영할 만한 것으로 언제나 강하게 각인되지만, 다른 포괄적 경험들의 축소는 흔히 무시되거나 간과되어 이를 자각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를 자각할 수 있는 반성적 비판도 뒤따라 주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기술시대에 새롭게 드러난 이 양자의 측면을 동시에 고려할 때, 기술시대의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키는 기술과의 공생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디 기술철학의 중요한 함축이 아닌가 생각한다.
jwlee@uos.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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