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질 들뢰즈

[스크랩]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

ddolappa 2008. 11. 14. 02:45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
─지난 호 이종영의 들뢰즈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며     _ 김재인

1
글을 쓰게 된 계기부터 밝히겠다.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에 실린 이종영의「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反)파시즘을 말하다」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집자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한국에 '수입'된 이래 실제로 '실행'된 사례는 얼마나 있는가? 황차 그것이 '소화'되고 '반죽'되어 '변용'되기를 희망할 수는 있는가? 아마도 한국의 들뢰지엥들은 가장 전복적인 사상에 가장 황홀한 정념으로 침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더도 덜도 아니고, 이론적으로만. '관념들'만으로 이루어진 연물로서?"(p. 762. [이하 인용한 이종영 글의 출처는 모두 『문학과사회』 2002년 여름호이다])라는 의문에 붙여 가장 급진적인 반-들뢰즈의 '표상'으로서 이종영의 글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런 편집 의도에 십분 동의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종영의 글은 너무 심했다. 초보적인 문헌학 작업마저 무시한 채 억측과 선입견만 가지고 글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글을 써갈 방향과 관련해서 몇 가지 고민이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실제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내용을 직접 설명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해서는 선결 과제가 적지 않았다. 초보적인 것으로 기계와 욕망에 대한 이해부터 각종 지층, 개체군population, 비인간주의(또는 반인간주의)의 문제, 끝으로 파시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해명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그동안 오해되었던 내용과 그 주된 이유에 대해서까지 밝혀야 했다. 나는 이 모든 일이 이 지면에서는 물론이고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임을 곧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짧은 길을 택했다. 한 대목을 들어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직접 읽는 장면을 실연(實演)하기. 이로써 나는 무의미한 비판에 할애할 지면을 절약하고자 한다.

2
철학은 개념의 정확성을 생명으로 한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철학이란 무엇보다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다. "철학은 개념을 형성하고 발명하고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단일한 개념이란 없으며, 모든 개념은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잡다한 요소들에 '고름'이 부여될 때 개념이 탄생한다. 그런데 들뢰즈에게는 개념 사용을 마구잡이로 하고 개념을 정의 없이 사용한다는 비난이 유독 많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언제나 들뢰즈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명료하게 사용한다. 그것도 수십 년의 저작 기간 동안 대체로 일관되게. 내가 방금 '대체로'라고 한 것은 개념이 언제나 똑같은 외연과 내포를 가지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개념은 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폐기되기도 하며 다른 것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개념은 공시적으로 보면 자족적이며, 통시적으로 보면 탄력적이다.
그렇다면 유독 들뢰즈에게 개념에 관한 비난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의 서술이 집약적이고 생략이 많아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특히 글을 읽는 능력이 떨어지는 한국과 미국의 독자에게는 이 점이 치명적이다. 말하자면 문헌학적 훈련이 덜 된 사람들이 들뢰즈의 글을 읽게 되면 마치 암호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들뢰즈의 서술은 많은 주석과 설명을 생략하면서 진행된다. 일일이 다 적어가다가는 너무 둔해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들뢰즈의 글에 투사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들뢰즈를 읽으려면 그가 공백으로 남겨놓은 부분을 독자 스스로 채워가면서 읽어야 한다. 바로 그때에만 들뢰즈는 읽히고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들뢰즈의 정확한 개념 사용보다는 너스레에 더 주목할 뿐이다.
가령 사람들은 개념의 정확한 이해보다 유용한 사용이 중요하다고 들뢰즈에 힘입어 말한다. 그러나 어찌 들뢰즈가 개념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라고 권유했으랴. 그는 단지 스콜라적인 철학 연구가 지배적인 프랑스 대학의 관행을 비판하고자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공허한 개념 논쟁을 이제 그만두자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요지의 말을 개념을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잘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로 오해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왜냐하면 대개 들뢰즈의 권위에 힘입은 개념 사용만이 횡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개념의 권위주의적 사용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온당치 않다. 필요한 것은 겸손하면서도 정확한 사용이다. 그때에만 어떤 개념이든 적절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반대로 한국에서의 이러한 오남용을 비판하면서 들뢰즈를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역시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들뢰즈 비판은 들뢰즈에 입각해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를 둘러싼 한국적 현상' 말고 '들뢰즈를 향한' 비판은, 그러나 결코 쉽지 않다. 외국의 경향은 어떤가 하면 '들뢰즈'란 이제 갓 연구가 시작된, 아직 해명해야 할 것이 많은 중요한 철학자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분위기이다.1) 한국의 상황은 아직 걸음마를 겨우 시작한, 그래서 버둥대다 쓰러지곤 하는 초보적 상태에 머물고 있다. 차분하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한 단계라 하겠다.2)

3_ 『안티 오이디푸스』 첫 문단 읽기
이종영이 읽고 인용한 『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4)는 오역으로 악명이 높다. 오역의 정도가 어떤가 하면, 한국어판만 읽고서 이 책을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바보라고 말하는 셈이다. 번역본만 가지고는 개념 이해가 불가능하다. 철학책을 읽고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면 줄거리를 이해해야 할까?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최명관의 한국어판 『앙띠 오이디푸스』는 원서 『L'Anti-CEdipe』를 빌린 위서(僞書)이다. 오역을 확인하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첫 문단을 세 부분으로 쪼개어 하나씩 차례로 살펴보자.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들이다. (한국어판, p. 15)

Ca fonctionne partout, tantot sans arret, tantot discontinu. Ca respire, ca chauffe, Ca mange. Ca chie, ca baise. Quelle erreur d'avoir dit le ca. Partout ce sont des machines, avec leures couplages, leurs connexions. (불어판 원본: p. 7. 앞으로 AO로 약칭)

첫 문장의 구두점이 잘못되어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첫 단어부터 문제가 있다. 역자는 이렇게 주석을 달고 있다. "여기서 〈그것〉이라 옮긴 말은 불어 원서에 Ca로 되어 있다. 영역에서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Id로 해석되고 있고, 독일어역에서는 Es로 옮기고 있는데, 이것 역시 프로이트의 개념인 Id를 가리킨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역주야말로 『앙띠 오이디푸스』를 잘못 읽게 만든 가장 큰 주범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ca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Id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이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Id라 하더라도, 오히려 정신분석이 발견해놓고도 오해한 무의식을 가리킨다. 그것은 Ego(자아), Superego(초자아), Id(그것)의 그 Id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다양체로서의 무의식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ca를 뭔가 특수한 함의가 있는 양 '〈그것〉'이라고 옮긴 것은 잘못되었다. 특별한 부호를 사용하지 말고 그냥 '그것'이라고 옮겨야 옳다.
여기서 간단한 퀴즈를 내보자.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그것이 하는 기능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를 하듯이. 그것은 숨쉬고, 열을 내고('뜨거워지고'는 오역이다), 먹고,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또는 '키스를 한다'고 옮겨도 된다). 자 알겠는가? 정답은 '입'이다. 저자들은 '입'을 예로 들며 논의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꼭 입을 예로 시작하지 않아도 좋지만, 입은 적절한 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입만큼 다기능으로 사용되는 예도 많지 않으므로. 똥을 눈다는 건 토악질을 가리킬 테고, 키스야 그냥 키스겠지만 성교라 해도 이해가 간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입은 그냥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는 서로 전혀 다른 기관들의 복합체인 듯싶다. 저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문장이 나온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물론 이렇게만 옮기고 나면 뜻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것은 원어로 'le ca'이다. 여기서 'le'를 이탤릭으로 강조한 것은 불어의 ca가 단수라고 본 것에 대한 의아함의 표현이자 유일무이한 의미를 나타내는 단수 정관사를 썼다는 점에 대한 항의이다. 이 점은 다음 문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처에서 그것들은 기계들이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결합들, 연결들을 지니는 기계들의 기계들인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ca가 무엇을 가리키건, 그것은 아무튼 기계들(복수)이다. 이러한 기계들은 결합하고 연결된다는 것. 그러나 물론 아직 '기계'의 뜻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어지는 대목은 이렇다.
한 기관기계는 한 원천기계에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흐름을 내보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끊는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연결되어 있는 기계다. 식욕 상실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숨쉬는 기계(천식의 발작) 중 어느 것이 될 것인지 망설인다. 이렇듯 우리는 모두 이것저것 긁어모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다. (한국어판, p. 15)
Une machine-organe est branchee sur une machine-source: lune emet un flux, que lautre coupe. La sein est une machine qui produit du lait, et la bouche, une machine couplee sur celle-la La bouche de lanorexique hesite entre une machine a manger, une machine anale, une machine a parler, une machine a respirer (crise dasthme). Cest anisi quon est tous bricoleurs; chacun ses petites machines. (AO, p. 7)

이 부분에서 기계의 의미가 조금 밝혀진다. '하나의 기관-기계가 하나의 원천-기계에 접속되어 있다. 하나는 흐름을 방출하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절단한다.' 기계는 적어도 둘이 있어야 성립하는데, 하나는 흐름을 방출하는 기계(원천-기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절단하는 기계(기관-기계)이다. 가령 원천-기계인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요, 기관-기계인 입은 유방에 결합되어 젖의 흐름을 절단하는 기계다. 그런데 식욕을 상실한 자의 입은 어떠할까? 물론 먹는 기계가 될 수도 있지만, 항문 기계(=토하는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 기계 등 다른 기계가 될 수도 있다. 기관-기계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천-기계와 접속하는 바로 그 순간에 결정된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기관-기계와 원천-기계가 미리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두 기계가 접속하는 순간 비로소 기관-기계와 원천-기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니체 해석에서 힘과 권력 의지의 관계를 해석하는 부분을 떠오르게 한다(『니체와 철학Nietzsche et la philosophie』 2장 참조).이제 끝 문장에서 중요한 오류가 보인다. 바르게 옮기자면 이렇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두 브리콜뢰르들이다. 각자는 자신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브리콜뢰르bricoleur란 말은 '브리콜라주'를 하는 자를 뜻한다. 브리콜라주는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저자들은 나중에 이 말을 설명하고 있으나(AO, p. 13), 워낙 중요한 개념이기에 미리 이해해야 한다. 이 표현은 기계의 연결에 대해 이야기한 바로 앞 문장을 부연 설명하는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를 직접 보자.

한편 사고의 면에서라면 '원시 과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전prior과학'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타당하게 하는 한 활동이 기술적인 면에서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이것을 불어로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한다. 〔……〕 이 '브리콜뢰르'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엔지니어와는 달라서 그 일의 목적에 맞게 고안되고 마련된 연장이나 재료가 있고 없고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재료의 세계는 한정되어 있어서 '손쉽게 갖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승부의 원칙이다. 말하자면 그가 갖고 있는 도구와 재료는 항상 얼마 안 되고 그나마 잡다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저 주어진 것들의 내용은 현재의 계획이나 또 어떤 특정한 계획과 관련되어 구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 때고 종전의 파손된 부품이나 만들다 남은 찌꺼기를 가지고 본래 모습을 재생시키는가 하면 완전히 새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브리콜뢰르'가 사용하는 것들은 계획에 따라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엔지니어의 경우엔 가능한 한 많은 연장과 재료의 집합 또는 일의 계획에 따라 몇 벌의 도구를 가질 것을 전제로 한다). '브리콜뢰르'의 도구와 재료라는 것은 잠정적 용도로밖엔 정의할 수가 없다. 이것을 '브리콜뢰르' 자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여러 가지 부품들을 수집하여 갖고 다니는 이유는 '언제든지 쓸모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품들은 극히 세분화되어 '브리콜뢰르'가 모든 업종에 대한 지식과 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되지만 그 부품들이 단번에 정확히 쓰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 각 부품은 실제적이면서도 가능한 관계들의 집합을 나타낸다. 그 부품들은 '조작 매체operateur'이다. 그러나 동일한 유형에 속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조작에로도 쓸 수 있는 매체이다. (C. 레비 스트로스, 안정남 옮김, 『야생의 사고』, 한길사, 1996, pp. 71~73. 역자는 브리콜뢰르를 '손재주꾼'으로, 다른 이들은 '시골 목수' '자질구레한 솜씨꾼' 등으로 옮긴다.)

따라서 이 말의 용법에 비추어 보면, 우리 각자는 작은 기계들을 가진 존재이며, 경우에 따라 접속의 양태에 따라 각기 다른 존재로 변모할 수 있다. 이 글 제일 앞에 등장하는 리처드 린드너의 그림 「소년과 기계Boy with Machine」는 이를 잘 보여준다(그림 참조). 이 소년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이러한 미결정성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계란 작동의 순간에 비로소 그 기능과 용도가, 다시 말해 그 이름과 정체identity가 잠정적으로나마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기 다른 접속에 따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달라짐의 폭을 제한하는 것이 바로 사회체socius이지만.
이어지는 마지막 부분을 보자.

에너지-기계에 대해서 기관기계가 있는 것은 언제나 흐름들이 있고 단절들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장 슈레버는 엉덩이 속에 태양 광선을 지니고 있다. 태양 기계. 그것이 작동함을 확신하시오; 법원장 슈레버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그리고는 거기에 관한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무엇인가가 생산된다: 그것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결과들이요, 은유가 아니다.
Une machine-organe pour une machine-energie, toujours des flux et des coupures. Le preident Schreber a les rayons du ciel dans le cul. Anus solaire. Et soyez surs que ca marche; le president Scherber sent quelque chose, pruduit quelque chose, et peut en faire la th대rie. Quelque chose se produit: des effects de machine, et non des metaphores.

첫 문장에서 중요한 오역이 발견된다. 역자는 'Coupure'를 '단절'로 옮기고 있으나 단절에 해당하는 말은 'Rupture'이고 여기서는 '절단'이 맞다.3) 절단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중요해서 잘 이해해야 한다. 이 말은 플라톤이 말하는 '자르다' '재단하다'라는 의미에 가깝다. 한편 역자는 가령 조금 뒤에서도 '절단'이라는 말을 쓰는데4) 사실 이 말의 원어는 'Couplage'이며, 이 경우는 '결합' 정도로 옮겨야 한다. 역자는 아주 중요하며 서로 구분되는 (적어도) 세 단어 Coupure(절단), Rupture(단절), Couplage(결합)를 책 전체에 걸쳐 혼동되게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은 프로이트가 자세히 분석한 바 있는 법원장 슈레버와 관련되어 있다.5) 여기서 저자들은 슈레버의 환상이 단지 은유가 아니라 실재라는 것을 강조하려 한다. 뒤에 자세한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마지막 문장이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무엇인가가 생산된다. 은유들이 아니라 기계의 결과들이." 생산물은 기계의 결과들이다. 이 결과들은 또한 다시 기계이다. 즉 기계가 생산하는 것은 다시 기계이다. 기계의 생산의 연속적 진행만이 있을 뿐이다. 생산된 것은 기계와는 구별되며 차원을 달리한다고 여겨지는 '기계가 만들어낸 결과들'이 아니다. 조심해야 할 대목이다. 이처럼 생산하는 기계와 생산된 기계의 연속을 저자들은 "기계권"(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p. 144, p. 976. 이후 『고원』으로 약칭)이라 부른다.
기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는 기계 제품들을 가리키지 않는다(뒤의 5절 참조). 저자들은 기계를 '절단들의 체계systeme de coupures'라고 정의한다(AO, p. 43). 이때 사용된 절단이라는 말은 적어도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선 단지 잘라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자르면서 잇다는 뜻을 지닌다. 자르면서 잇는 일은 기계의 일차적인 기능이다. 에너지-기계와 기관-기계는 미리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으로 절단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며(상호적 구분 및 각각의 결정) 동시에 바로 그 순간에 연결이 있게 된다(종합). 이렇듯 절단은 나눔과 이음을 동시에 뜻하는 주요한 개념이다.6) 또한 절단은 두 가지 기능을 더 포함하는데, 하나는 코드화의 기능 및 이것이 필연적으로 전제하는 탈코드화의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주체를 생산하는 기능이다(AO, pp. 46~50 참조).7) 절단은 사실 세 가지 종합(연결 접속적 종합, 분리 접속적 종합, 접합 접속적 종합), 또는 세 가지 생산(생산의 생산, 등록의 생산, 소비의 생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나 기계라는 말 자체의 의미를 해명하는 일은 다른 자리로 미루도록 하겠다.
이상의 해석에 근거해서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불연속적으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열을 내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유일무이한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도처에서 그것들은 기계들이다. 결코 은유적인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결합들, 연결들을 지니는 기계들의 기계들인 것이다. 하나의 기관-기계가 하나의 원천-기계에 접속되어 있다. 하나는 흐름을 방출하고, 다른 하나는 그 흐름을 절단한다. 유방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요, 입은 유방에 결합되어 있는 기계이다. 식욕을 상실한 자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 기계(천식의 발작) 사이에서 망설인다. 바로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모두 브리콜뢰르들*이다. 각자는 자신의 작은 기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기계에 대해서 기관-기계가 있는데, 이는 언제나 흐름들과 절단들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장 슈레버는 엉덩이에 태양 광선들을 지니고 있다. 태양 기계. 그것이 작동함을 확신하시오. 법원장 슈레버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그것으로 이론을 만들 수 있다. 무엇인가가 생산된다. 은유들이 아니라 기계의 결과들이.

4
일단 나는 번역의 첫 문단에 있는 몇 개의 중요한 오류 또는 오해를 지적했다. 사실은 제목부터 문제가 심하게 드러나는데, '앙띠 오이디푸스'라는 국적 미상의 명명은 차치하고라도(불어인 '앙띠 외디프'가 되든지 희랍어인 '안티 오이디푸스'가 되든지 해야 옳다), 부제의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은 'Schizophrenie'가 임상적인 병리적 사태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존재 양태로서의 분열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분열증'으로 해야 옳다. 병이 아닌 분열증도 있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병원에서 보는 임상적인 분열증은 분열증 일반의 극단적인 사례이다. 분열증이란 "생산의 과정으로서의 자연"(AO, p. 9)을 가리킨다. 임상적인 분열증은 그 과정이 변질될 때 발생한다(AO, p. 11). 저자들은 로렌스를 인용하면서 이는 사랑의 과정과 마찬가지라고 한다.8) "하나의 과정을 우리는 목표로 삼았다. 모든 과정의 목적은 그 자신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그것의 완성이다. [……] 과정은 자신의 완성을 향해야지 정신과 육체가 끝내 파멸해버리는 어떤 끔찍한 강화 또는 어떤 끔찍한 극단을 향해서는 안 된다"(AO, p. 11). 병으로서의 분열증, 즉 정신분열증은 저자들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비록 정신분석을 벗어나는 정신분열증을 계기로 분열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긴 했지만.
비판이 가능하려면 일단 비판 대상이 정확해야 하는데, 오역으로 충만한 한국어판만 읽었다는 점에서, 이종영은 아예 처음부터 비판 대상인 들뢰즈-가타리와는 무관한 이야기를 한 셈이다. 이종영은 시작부터 잘못을 범했다. 원서로 1천 페이지가 넘는 두 권의 '자본주의와 분열증'을 읽을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비판에 필요한 부분만 찾기 위해 빠른 속도로 검색하듯 두 권의 번역서를 읽었다. 이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번역서 중 하나는 읽히지 않는 위서였으니. 논의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획이었던 것이다. 가혹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저자들을 손수 읽지 않고 모종의 선입견만 가진 채 어림짐작으로 상상해서 말했다. 학자로서 이처럼 비양심적인 태도가 또 있을까?
그러나 이종영이 이 번역을 통해 번역의 문제를 극복하고 저자들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간파해냈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다. 물론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가령 분열증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종영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병원이 인위적인 정신분열증 환자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정신분열증을 전혀 갖고 있지 않던 사람이 병원에 들어간 이후 갑자기 인위적으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될 수 있을까?"(p. 768)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단지 생산의 과정이 변질될 때 병이 생긴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그러나 이 둘은 엄밀히 다른 사태이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식으로 해석하려는 태도가 정신분석의 특징이라면,9)이종영은 뛰어난 정신분석가이다.
'그것'을 다루는 태도도 그렇다. 이종영은 그것을 das Es라고 자의적으로 이해한 후 다시 프로이트의 Id라고 해석한 후 비판을 가한다(p. 765, p. 766, p. 774 등).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설사 그것이 무의식을 지칭하는 Id라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들뢰즈-가타리가 그런 표현을 쓴 적은 없지만 마지못해 썼다면 아마도 Id의 복수형인 ea(그것들)라고 했을 테니까. 그러나 저자들은 같은 개념을 지칭하기 위해 '다양체multiplicite 라는 말을 사용한다(『고원』 전체, 특히 제1편, 2편, 14편 참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들에게 무의식은 심리적 실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차라리 물질적 실재이며 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심리적인 면(무의식을 포함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즉 인간의 측면은 아주 나중에야 탄생한다. 사실 가장 난해하다고 꼽히는 『고원』 제3편은 온통 이 주제에 골몰하고 있다.
한편 『고원』은 내가 번역해서 잘 아는데10)이종영은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 오독을 행한다. 단순한 오독이 아니라 뜻을 정반대로 바꿔놓기까지 한다. 조갑제의 최장집 읽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하나만 예를 들자.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자립적 개인성에 입각한 개인적 차이는 백인 남성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인간의 표준적 규정은 '남성-어른-백인-인간'인데, 여성 아이 유색인 동물은 단지 '표준적 규정'과의 관계 하에서 대립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여성은 오로지 남성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존재하고, 유색인은 백인과의 대립을 통해서만 존재할 뿐, 그 개인적 차이를 존중받지 못한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물-되기'와 '여성-되기'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성은 누구나 마음대로 될 수 있는 존재일까? 또 동물도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여성과 동물을 열등한 존재로 설정하고, '우리 우월한 남성'이 선심이라도 쓰듯이 언제든지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언제든지 될 수 있는 열등한 존재로서의 여성. (pp. 777~78)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는 '표준' 또는 '다수'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11) 가령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시에서의 다수성은 투표권을 전제하며, 투표권을 소유한 자들―그 수가 얼마가 되었건―사이에서만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투표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행사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서의 다수성은 남성의 권리나 권력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전제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여성, 아이, 그리고 동물, 식물, 분자는 소수파이다." 이렇게 보면 이종영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립적 개인성에 입각한 개인적 차이'는 차라리 소수파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된다. 물론 저자들은 '자립적 개인성' 따위는 허구로 보지만, 요점은 남성이 표준이자 다수로서 이 현실의 지배자라는 점이며, 저자들은 이를 극복해야 할 상황으로 본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동물-되기'와 '여성-되기'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은 '소수자-되기'라는 맥락에서이다. 이것은 언제든지 선심 쓰면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하기 힘든 짓이다. '소수'가 어떻게 '열등'으로 읽힐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까지 거꾸로 읽을 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이종영의 독서는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세간의 일반적인 오해와 무관하지 않다. 다들 책을 읽지 않고 기본적인 공부를 게을리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비유컨대, 중학 수학 실력으로 미적분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법이며, 통념으로 진화론을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만이 전문 영역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 지식은 분명 존재하며, 얼마간은 공부를 해야만 알 수 있다. 내가 미적분과 진화론을 예로 든 것은 실제로 들뢰즈-가타리의 논의가 이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5
왜일까? 들뢰즈와 가타리가 읽히지 않는 더 깊은 원인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비인간주의(또는 반인간주의)가 문제인 것 같다. 이론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실천적 차원에서도 이들의 비인간주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본능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며 오해의 주된 원천이 된다. 심지어는 들뢰즈-가타리에 호의적인 사람마저도 이 측면만은 도려내고 싶어한다.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것이다.
이종영의 글도 처음부터 끝까지 비인간주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핵심 논점은 주체성을 결여한 맹목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출이며 이는 결국 파시즘이라는 것이 이종영의 판결인데, 이로써 "내적 논리로부터 그들의 파시즘을 충분히 논증"(p. 764)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곳곳에서 기계와 욕망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으며 감수성 지성 용기, 요컨대 주체성과 자립성을 중요한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비인간주의는 양보할 수 없는 거점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바로 문제의 초점이기 때문이다. 거창한 이론적 재구성물인 인간 말고 주변에서 평범하게 접하는 바로 그 인간이 문젯거리인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의 핵심어인 '욕망하는 기계들'이라는 표현은, 나중에는 폐기하지만, 물질적 생산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욕망과 무의식이라는 프로이트의 사상을 종합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그러나 종합이라는 말이 종종 숨기기 쉽지만, 이것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균등한 종합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종합은 마르크스와 니체, 스피노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이들의 기여를 낱낱이 따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왜 욕망하는 기계들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 기게 자연이라는 삼분법에 익숙해 있다. 통상 "기계를 조작하는 주체는 인간이고 기계가 변형시키는 대상은 자연"12)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잘못이다.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인간 기계 자연은 모두 하나이며, 동일한 '생산의 과정'이다. 우선 인간 주체의 측면을 보면, 저자들은 행위의 배후에 행위자는 없다는 니체의 명제를 그대로 수용한다.13) 일차적인 것은 행위 자체 또는 힘들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 기계는 작용(=절단)하지만 기계 자체가 주체인 것은 아니다. 모든 기계는 다른 기계에 의해 창조되며 생산의 무한 사슬 안으로 퇴행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듯이"(AO, p. 6). 생산 과정이 시작되는 기원의 점은 없다. 모든 생산과 기계는 다른 생산과 기계의 결과물이다. 한편 자연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기계들은 흐름들과 다른 기계들에 작동한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 보는 두 대립항과 같은 것이 아니라 〔……〕 오히려 하나이며 동일한 본질적 실재성을 가진다. 생산자-생산물이라는"(AO, pp. 4~5). 다시 말해 생산자와 생산물은 동일한 본질을 가지며, 이 본질은 생산이다. 모든 것은 생산이며, 생산자와 생산물은 이 과정 속으로 구별되지 않게 흡수된다. 통념과는 달리 인간 주체나 자연 대상은 기계적 존재의 결과 또는 생산물일 뿐이다. 생산 또는 산업의 형태 속에서, 즉 '기계로서의 존재'라는 생각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본질은 하나이다.14)그래서 "모든 것은 생산이다"(AO, p. 4), 또는 보다 관행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은 생성이다. 모든 의미에서 모든 기계들은 잠재적으로 무한히 접속될 수 있다. 바로 이 생산의 힘, 그것이 욕망이라는 말로 지칭하는 바이다. 따라서 '주체성을 결여한 맹목적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출'이라는 식으로 읽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최상급의 오해라 하겠다. '맹목성을 벗어난 주체성'은 기계들이 작용해서 생산된 결과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그 주체성의 생산 과정이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비인간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이런 생각의 당연한 귀결이다. 전통적 범주인 인간을 고집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생산의 과정 속으로 용해되어 다시 태어나야 한다. 새로운 모습으로.
비인간주의라는 문제틀은 푸코가 잘 지적한 것처럼 자발적 예속으로 정의되는 파시즘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15) 들뢰즈-가타리는 스피노자와 라이히의 질문을 이어 왜 사람들이 자신을 예속하는 그것을 자발적으로 원하는가를 물었다(AO, 제1장 4절 참조). 주체적이라고 여겨온 인간 개념에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 앞에서 인간주의는 당연히 재검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론적 실천적으로 비인간주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뭔가 다른 가치와 다른 의미가, 즉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올가미에 넣는 존재이므로.
파시즘의 문제는 정치(精緻)하면서도 정치(政治)적인 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서두에서 밝혔듯이 그러기 위한 충분한 시간과 지면이 아직은 없다. 다만, 내 생각으로는, 인간주의의 틀에 갇힌다면 여전히 파시즘 논의는 출발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이 다시 논의의 핵심에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에서 그래야 한다. 니체의 말처럼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혐오할 수 있지 않겠는가. _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강사


▨각주내용

1)  이 기회에 중요한 영어권 저술 몇 권을 소개할까 한다. Brian Massu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Deviations from Deleuze and Guattari, MIT Press, 1992. 맛수미는 『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로 이 책은 철학 이외의 개념들에 대한 충실한 소개가 돋보인다. 초기 연구서 중 대표적인 책이라 할 수 있다. Michael Hardt, Gilles Deleuze: An Apprenticeship in Philosoph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3. 베르그송, 니체, 스피노자 순서로 들뢰즈의 사상이 진화했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책으로, 초기 저술들에 관한 분석을 담고 있다. 네그리와의 여타 공동 작업이 암시하듯이 스피노자를 핵심으로 놓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며, 바로 이 점만 제외하면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한편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는 「들뢰즈와 가타리, 자본주의와 분열증에 대한 독서 노트Reading Notes on Deleuze and Guattari Capitalism and Schizophrenia」도 참고할 수 있다(http://www.duke.edu/~hardt/Deleuze&Guattari.html). Eugene W. Holland, Deleuze and Guattarai's Anti-Oedipus: Introduction to Schizoanalysis, Routledge, 1999. 이 책은 『안티 오이디푸스』에 관한 가장 친절한 매뉴얼로, 초기 저작들 및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와의 연관 속에서 이 책에 대한 꼼꼼한 독서를 도와준다. John Rajchman, The Deleuze Connections, MIT, 2000. 푸코에 대한 연구에서 저력을 보여주었던 저자는 관심을 들뢰즈로 돌린 지 오래인데, 이 책에서는 여섯 개의 키워드(연결들 실험 사유 다양체 삶 감각)로 들뢰즈의 사상을 재구성해 보여준다.

2)  이런 점에서 권혜원, 「들뢰즈, 가타리 다시 읽기―분자혁명 안티 오이디푸스 천의고원: 비(非)파시스트적 삶에 관한 입문서들」(『진보평론』 5호, 2000년 가을호)은 잡지의 난이 그러해서였는지 몰라도 '다시 읽기'의 형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렇다면 언제 읽은 적이 있었다는 말인가? 파시즘과 관련된 독서는 처음부터 들뢰즈-가타리 읽기의 출발점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읽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글의 필자에게가 아니라 모든 독자에게 묻고 싶다.

3)  이와 유사한 문제와 관련해서 진태원, 「라캉과 알튀세르 '또는' 알튀세르의 유령들 I」(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캉의 재탄생』, 창작과비평사, 2002), p. 396, 각주 42 참조.

4)  한국어판, p. 20: "욕망은 계속하는 흐름과 본질적으로 단편적이고 단편화된 부분적 대상들의 절단을 실현하는 일을 그치지 않는다"(강조는 인용자).

5)  프로이트, 「편집증 환자 슈레버: 자서전적 기록에 의한 정신분석」(김명희 옮김, 『늑대인간』, 열린책들, 1996) 참조. 영어를 대본으로 옮겼지만, 아쉬운 대로 참고할 수 있다.

6)  서동욱의 해석은 아쉽게도 이 점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차이와 타자』, 문학과지성사, 2000) 및 「들뢰즈의 욕망하는 기계와 라캉의 부분 충동: 스피노자적 욕망 이론의라캉 해석」(『라캉의 재탄생』, 앞의 책) 참조.

7) 사실 기계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1장 「욕망하는 기계들」 전체를, 특히 5절 '기계들'을 중심으로 꼼꼼히 읽어야 한다. 나아가 『고원』의 「도덕의 지질학」 또는 '지층론'과 비교해서 읽어야 한다.

* 이 부분들이 필자가 보기에 주석이 필요한 곳이다.

8)  참고로 말하면, 이종영은 인신공격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데, 가령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잠재력의 존재를 논증하지는 못하고, 몇몇 모호한 입장의 작가들(클라이스트, D.H.로렌스, 헨리 밀러, 니체)의 작품을 인용할 뿐이다"(p. 776)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결코 모호하지 않으며, 오히려 명료함이 지나쳐서 문제가 되기까지 한다.

9) 가령 『고원』 p. 59 참조.

10) 물론 내가 번역했다고 해서 오역이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진경 등이 번역한 판본을 인터넷에서 쉽게 구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비교도 가능하다. 나름대로 나는 홈페이지를 통해 오역의 수정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하려 하고 있다. ('철학과 문화론' http://armdown.net 참조.)

11) 『고원』, pp. 203~05 및 pp. 550~54 참조.

12)  마이클 하트의 「독서 노트」(앞의 주 1 참조) 참조.

13) F. Nietzsche, Zur Genealogie der Moral, Erste Abhandlung: "Gut und Bose," "Gut und Schlecht" 13 참조.

14)  저자들은 마르크스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안티 오이디푸스』, p. 11에 나오는 '자연인Homo natura'은 '자연 속의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인간'으로서의 인간 규정을 가리킨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실재'로서의 일차적이고 보편적인 생산"(AO, p. 11)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15)  푸코가 『안티 오이디푸스』 영어판에 붙인 서문 참조. "Preface"(1977), in M. Foucault, Dits et ecrits 1954~1988 tome II, 1976~1988, QUARTO, Gallimard, 2001, pp. 133~36.

출처 : 깃발없는 군대
글쓴이 : 이윤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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