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이미지의 사유, 사유의 이미지

[스크랩] 사진의 종말, 혹은 죽음

ddolappa 2008. 12. 5. 23:47
사진의 종말 혹은 사진의 죽음
                                          -디지털 시대 사진을 보는 눈


사진의 위기는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사진은 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진과 부딪쳤고, 90년대 포스트리얼리즘과 부딪쳤으며, 그리고 오늘 디지털과 격렬히 부딪치고 있다. 사진의 역사를 기술의 역사 절반, 표현의 역사 절반이라고 할 때, 새로운 매체의 출현과 새로운 인식체계의 출현은 분명 사진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과 수용태도를 요구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처럼 사진의 종말과 죽음을 거론할 정도의 위기 국면은 아니었다.
  
사진의 위기가 처음 거론됐던 때는 80년대이다. 오로지 예술만을 지향한 전통적 모더니즘 사진과 그러한 모더니즘의 예술지상주의, 작가중심주의, 그리고 유일무이한 창작중심주의를 해체시키려 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싸움이 발단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 사진에 심각한 정체성 위기가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출현으로 인해 사진의 역할과 임무가 예술지상주의에서 이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사회적 메시지여야 함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서 과연 사진을 찍지 않고 미술처럼 만들어도 되느냐, 하는 사진의 순수성 문제가 대두되고, 이에 따라 사진은 위기 국면으로 치달았으나 그러나 위기 국면을 넘어서서, 사진의 시대적 책무와 사회가 요구하는 사진의 기능을 향해 처음으로 자각하는 자기 정체성의 국면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특정분야에 한정된 예술이론이 아니었다. 동시대를 포괄하는 사회철학이자 문화이론이었고, 표현양식 또한 모더니즘의 그것과 분명히 구별되는 뉴 웨이브(New Wave) 모습이었다.

스트레이트 포토에서 메이킹 포토로

80년대 사진의 위기는 모더니즘 사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과정에서 생겨난 위기였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메이킹 포토(Making Photo)'의 범람에 따른 위기였다. 이른바 만드는 사진의 출현은 구성하고 연출해서 찍은 사진이다. 그러니까 눈앞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로 옮기는 스트레이트 포토가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가짜 현실을 진짜 현실처럼 구성하고 연출하여 찍는 사진이다. 이것들의 범람은 따라서 사진을 눈앞에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알았던 전통적 순수 사진가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미술과 사진을 혼용했던 메이킹 포토는 스트레이트 사진을 무력화시켰지만, 사진의 순수성과 진실성 추구보다 오히려 매체로서 강력한 시대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의 힘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시대성을 일 깨우기도 했다.

80년대 메이킹 포토는 제작 방법에 따라 구성사진, 설치사진, 무대사진으로 분류되고, 용례에 따라 연출사진, 조작사진, 배치사진, 위조사진의 이름으로 분류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진이 구성사진이다. 구성사진은 각본에 따라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이미지를 가공하거나 구축한 사진을 말한다. 이러한 구성사진의 모습에는 4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사진이 "자기표현"을 위한 구성사진이다. 이 사진은 주도 면밀하게 시나리오를 짜고 연기자가 동원되어 시나리오에 의해 인물들이 연출되거나 만들어지는 허구 이미지, 가상 이미지이다. 사진은 주로 셀프 포트레이트였으며, 여성사진가들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한 여성성을 재현한 경우가 많았다. 동시대 사회와 문화 속에서 여성들이 제도적으로 어떻게 억압받는지를 몸을 통해서 보여주려 했던 페미니즘 사진이 구성사진으로서 인기를 끌었다. 80년대 사진은 새롭게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꽃을 피웠으나 사진은 위기로 치닫는 최초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사진은 형식과 내용이 급격하게 변모했으며, 미술과 사진의 광범위한 크로스오버가 더욱 정체성 혼란을 가져왔다. 메이킹 포토의 출현 지점이, 미술과 사진의 교류 지점이 바로 전통적 사진이 흔들리는 위기의 지점이었던 것이다.

리얼리즘에서 포스트리얼리즘으로

사진은 90년대에 들어 리얼리즘에서 포스트리얼리즘으로의 이행과정에서 또 한번 생겨났다. 일상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새로운 일상에 대한 표현 논쟁에서 사진의 정체성 위기가 심화되었다. 아마 동서양 근·현대사에서 리얼리즘만큼 그 성격규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조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만은 이러한 시대사적인 리얼리즘 논쟁에서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리얼리티'라는 말은 사진사 문맥에서 빈번히 쓰이고, 또 통용되었던 말이었으나 사진에서 리얼리즘이란 단어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사진의 속성상 가장 빈번하게 쓰여질 리얼리즘이 이처럼 사진 텍스트에서 찾기 보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진이 스스로 그 속성을 리얼리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리얼리즘이란시대에 따라 변해야 한다는 창작적 관점에서, 그리고 사진 그 자체가 리얼리즘일 수 없다는 편협한 태도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던 90년대 사진의 모습이다. 포스트리얼리즘의 출현은 이제껏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리얼리즘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사회문화 환경 속에서 오늘날 리얼리즘의 진정성은 어디에 있는지를 규명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전통적 순수사진과 또다시 위기 국면을 조성했던 것이다.

90년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사실적인 재현과 현실적인 재현의 경계에서 나왔다. 여기서의 경계점이란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의 경계점이기도 한데, 정통적 리얼리즘이 사실성을 토대로 삼는다면, 포스트리얼리즘은 현실성을 토대로 삼고, 정통적 리얼리즘이 스트레이트 포토를 토대로 삼는다면, 포스트리얼리즘은 메이킹 포토를 토대로 삼았다. 여기에 포스트리얼리즘은 과거 리얼리즘이 이념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이었던 것에서 벗어나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조성하는 환경 중심적이고, 타자 중심적이고, 시추에이션 중심적인, 즉 변화된 현대 리얼리즘을 발생조건으로 삼았다. 예술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창작방법의 변화는 그 시대의 현실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바로 그러한 리얼리즘에 대한 해석이 이제 샤롭게 달라져야 한다는 인식하에서 출현한 현대사진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현실을 왜곡한 이미지, 연출하고 가공하여 만든 이미지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연출에 있었다. 영화처럼 고도의 연출력을 통해서 획일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드러내고자 했다. 현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인위적인 연출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메시지를 강화시키기 위하여 무대를 극화했다. 인공성의 영역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주된 창작방법이었으며, 일상은 전략적으로 세트화 시키거나 철저히 연출시켰다. 그래서 사진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영화의 세트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학적 서사가 진행중인 연극의 단막극처럼 단절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포스트 리얼리즘 사진이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과 만나고 문학과도 만났다는 말은 이와 같은 모조현실, 인위적인 창작방법에 의해 현실을 세팅했기 때문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의도와 컨셉이 바로 보인다. 하나같이 강렬한 컬러사진이며, 계층적 삶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인공조명을 사용하고, 그것들에 의해 삶의 도구들이 현실감 있게 드러난다. 세팅은 주방, 거실, 침실 등 일상의 가정을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변두리 외곽지역, 다음으로는 도시의 특정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세부적인 연출로 들어가면 대상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침묵하고 있으며, 인물들간의 시선이 부딪치는 일이 없다. 세트는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하며, 전체적으로 순간정지(혹은 일시정지)의 느낌이 강하다. 일상적 삶의 모습을 예리하게 자름으로써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모두 포스트리얼리즘의 전형성을 보여준 것이다. 때문에 연출에 의한 현실묘사가 과연 리얼리즘이 될 수 있는지, 조작하고 구성한 인공적 현실이 과연 진정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등,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출현 단계에서부터 전통적 사실주의 창작방법과 위기 국면을 조성했다.

아날로그 사진에서 디지털 사진으로    
    
2000년대인 지금 우리는 디지털 시대, 전자매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진은 급속하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해 가고 있고, 그에 따라 사진의 정체성에 역시 위기의식이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다. 과연 디지털 사진을 사진이라 할 수 있는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만약 디지털 사진을 디지털 이미지라고 분리시킨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는지 등등, 디지털 사진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 의식과 여러 가지 의구심들은 또 다시 사진을 위기 국면으로 치닫게 했다. 디지털 사진은 무엇보다도 사진=진실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파괴하여 사진의 진실성을 무용화한다. 디지털 사진은 또한 완전히 다른 코드, 다른 기호체계를 갖고 있으며, 거기에는 각양의 합성과 조작, 왜곡이 있고, 프로세스에서도 기존 아날로그와 달라 이미지가 알고리즘과 수치영상으로 존재하며, 모니터에서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방식을 취한다.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 사진을 위협하고, 사진의 진실성을 파괴하는 토대는 바로 포토샵이다. 포토샵에서 연출되는 이미지는 디지털 픽토리얼리즘이다. 컴퓨터에 의한 자유자재의 이미지 합성, 전용, 변조는 새로운 미학적 표현양식으로 자리한다. 이제 디지털 사진의 미학은 사진의 전통적 "타임(time)" 이미지에서 "이벤트(event)"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모니터에서 순간적으로 생성되고 소멸되기 때문에 곧바로 정체성에 대한 두 가지 의문을 던진다. 첫째는 사진의 순수성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진실'이라는 진위성에 대한 당위론적 물음이다. 먼저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디지털 사진의 순수성 문제는 제작 프로세스에 관한 것으로서 디지털 사진이 아날로그 사진의 정반대 축에 있음으로써 발생한다. 디지털 사진은 눈에서 렌즈로의 이행체계가 아니라, 눈에서 스크린, 혹은 렌즈에서 모니터로의 이행체계를 갖추고 있다. 디지털 사진은 근본적으로 디지털 마인드와 사고에서 출발한다. 기존사진의 순차적인 아날로그 체계라면 디지털 사진은 'on-off', 'yes-no', 'right-wrong'과 같이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를 갖는다. 따라서 디지털 사진은 하나의 로직(logic) 체계라기보다는 실제적인 신호를 중시하는 체계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항상 하나의 명령과 답만 있다.

디지털 사진의 두 번째 이슈는 이미지 가공, 변조, 증식에 대한 진실성 시비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새로운 글쓰기, 새로운 문법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예컨대 픽션 포트레이트(Fiction Portrait) 양식은 컴퓨터를 이용해 인물의 조작, 변조, 변형을 가하는 이미지이며, 이 픽션 포트레이트는 [타임]과 [뉴스위크]의 심슨(O.J. Simpson)표지 사진 변조에서부터, 최근 일곱 쌍둥이 부모사진 변조에 이르기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장르이다. 버추얼 랜드스케이프(Virtual Landscape) 역시 그렇다. 여러 가지 풍경을 합성하거나 기존 풍경 위에다 새로운 오브제를 끌어들여 창조적 풍경을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언뜻 보아서는 식별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현실의 풍경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다큐멘터리 픽션(Documentary Fiction) 또한 컴퓨터 합성을 통해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제작하는 것으로서 현장성과 사실성을 생명으로 하는 전통 다큐멘터리 사진에 도전하는 새로운 모습의 다큐멘터리 이미지이다. 포토샵에서 가공된 이 모든 디지털 이미지들은 정통사진의 존재론적 근간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시뮬라크르 시대 사진의 재현체계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에 닥친 궁극적인 위기는 재현의 위기이다. 즉 사람들이 사진을 현실을 재현하는 가장 유효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점점 카메라를, 사진을 여흥의 도구, 유희의 수단으로 생각한다. 사진은 오랫동안 믿음과 신뢰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시뮬라크르 시대를 맞아 이제 진실의 대명사에서 탈각되고, 시대의 증언자, 시대의 목격자로서의 권능도 상실했다. 디지털 시대는 가상이 현실을 우선하는 시대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이미지 생산과 순환 방식, 소비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제 육안으로 보는 것을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 하는 가변적 신뢰체계를 구축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이를 하이퍼리얼의 세계라고 말했다. 하이퍼리얼의 세계는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어왔던 인식 체계를 해체하여, 가짜가 실재를 대용하고, 가짜가 실재보다 더 실재처럼 보이는 버추얼(virtual) 세계를 말한다.

오늘날 사진은 현실의 충실한 재현에서 물러났다. 대신 시뮬라크르를 모사하는 새로운 유희적 도구로서 자리했다. 시뮬라크르 세계에서 현실의 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가짜라고 해서 회의하지도 않는다. 사진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진이 참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이, 현실이 참이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의 세계는 모조물로 채워진 가짜이다. 사진에 찍힌 이미지들은 그래서 더 이상 참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현실이 점점 모조의 세계를 연출하는 이상 사진은 정체성을 잃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테크놀로지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사진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체성을 의심받는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재현의 진실, 시각과 상상의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전자 미디어에 포섭당했음을 상정하며, 현실 체험이 현실 효과로 대체하고, 현실 공간이 가상 공간으로 둔갑하는 시뮬라크르 상황을 상정한다.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텔레비전 앞에서 보낸 아이가 텔레비전을 허구로 보지 않는다고 하는 현실효과가 말하듯이 이제 텔레비전은 세계의 해석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되고 있다. 텔레비전은 더 이상 허구도, 가상의 공간도 아니다. 사진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사진의 사실성을 회의하는 것은 사진의 도구적 특성 때문이라기보다는 현실의 모조성, 현실의 인공성, 현실의 가상성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진의 대상이 되어왔던 원본(현실) 자체가 이미 모조이고, 이미 인공물이고, 이미 가짜이기 때문에 재현된 사진은 필연적으로 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진의 절대적 위기는 사진의 진실성을 묻는 진실의 시뮬라크르이다. 진실의 시뮬라크르는 대상의 실재성과 실재의 효과에 대한 문제를 폭넓게 수렴한다. 사진은 그동안 보는 것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을 주어 왔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데카르트적인 사고는 사진을 통해 발현되었다. 카메라의 렌즈는 신체의 연장으로서 육안이었으며, 사진은 세계의 외관과 똑같이 재현한 현실의 거울, 실재의 증거로 인식되었다. 수잔 손탁은 "우리는 오랫동안 사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주요 활동으로 삼는 세계에 살아왔고, 우리가 요구하는 현실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것들은 눈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기계의 수동적 객관화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인간의 육안은 진실과 대면하고 있는가? 카메라 렌즈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이 문제가 오늘날 사진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사실 모사는 실재와 대립하지 않는다. 모사 그 자체는 허위가 아니며, 실재와 똑같은 외관을 지닌다. 우리가 시뮬라크르, 하이퍼리얼에 대해 문제삼는 것은 외관을 넘어선 삶의 실재성에 관한 것이다. 실재의 문제가 외형적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뮬라크르는 단순히 실재의 유비적 복제 혹은 닮음의 닮음이라는 허위적 본성을 넘어서 있다. 실재가 실재의 모사물 속에서 증류되고, 증발되고, 사라져 버린다는 보드리야르의 말뜻은 실질적 삶의 정황을 두고 한 말이지, 복제의 필연성을 옹호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사진과 디지털 이미지와의 관계는 그래서 갈등 관계이다. 세계를 곧장 모사했던 사진은 언제나 실재 아닌 실재에 덧붙여진 존재의 인덱스로 자리했다. 그랬기 때문에 사진은 실재를 대용한 모조물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하이퍼리얼한 상황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디지털 조작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물론 사진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실재에 대한 뿌리깊은 인식론에서 온 것이며, 눈앞의 현실을 가감 없이 꼭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실재이고 사실이라는 실증주의적 믿음이 너무도 강력한데서 온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카메라 렌즈에 순응한 현실의 기계적 재현만이 실재이며 사실로 받아들이고, 디지털 조작과 허구적인 무대는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역사는 사진의 기계적 순응성을 실재의 자국으로써 여전히 그 인덱스성을 충분히 수용해왔다. 사진은 모더니즘 시대에서 지금까지 진실의 거울, 사실의 징표로서 증거 능력을 인정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불변의 증거능력이 시효만료에 이르렀다고 본 곳이다. 우리 앞에 꿈조차 꿀 수 없는 테크놀로지의 세상이 펼쳐져 있다. 가상의 이미지에 말을 걸고, 가상의 이미지에 옷을 입히며, 가상의 이미지에 돈을 강탈당하기도 한다. 삶의 구조는 시뮬라크르를 지향하며, 하이퍼리얼은 새로운 유토피아의 모습으로 자리한다. 모조의 세계가 세계에 대한 환상과 환영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 기욤은 디지털 시대의 인공성, 시뮬라크르의 스펙터클을 말한다. 그는 실재란 그저 수수께끼 같은 것이며, 모조가 함정이 아니라 실재라고 믿는 그 자체가 함정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세상이 사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있다면 바로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미디어는 대중의 의향을 따른다. 모사물이 실재를 대용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대중의 눈 때문이다. 사진의 위기는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재현의 도구에서 유희적 도구로

오늘날 사진은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여흥과 오락의 도구, 즉흥적인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로 나타난다. 가상현실 시대의 신체와 성은 디지털 방식으로 결합한다. 디지털에서 신체와 성은 욕망 없는 육체, 유혹 없는 포르노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디지털 시대의 성은 전적으로 상품화된 광고이거나 오로지 욕망으로서만 기능할 뿐이다. 인터넷 포르노는 신체가 사라진 이미지이며, 접속이 끊겼을 때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디지털 이미지이다. 광고의 벌거벗은 육체 또한 디지털 시대 시뮬라크르의 전형으로 말해질 만하다. 상품과 광고는 곳곳에서 이미지로 떠다니며 어느 공간에서나 소비방식으로 존재한다. 오늘날 이것들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구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시뮬라크르 시대의 신체와 성, 광고와 욕망은 참의 의미를 상실한 기표로서 떠돌 뿐이다. 소실점을 상실한 육체를 보드리야르는 '육체가 사라진 양상'이라고 했다. 파편화된 육체, 유혹을 상실한 성은 시뮬라크르 시대, 하이퍼리얼 시대의 중요한 대상이다.

디지털 시대 사진의 유희적 모습은 관광과 여가공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관광은 문화 체험이라는 명목하에 주도면밀하게 연출된 우리 시대의 모습이다. 관광과 여가는 점점 공연물에 가까워지고, 문화 체험이라기보다는 체험을 가장한 문화 상품으로 변질해 가고 있다.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가상 공간, 모조공간이 창조되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정교하게 설계된 하이퍼리얼의 축하를 받는다. 관광코스에는 가상의 역사, 가상의 자연 경관이 복제되어 있고, 모조의 성당, 박물관, 궁전, 공원이 관광객들을 위한 하이퍼리얼을 연출한다. 사진도 여기에 적극 가담한다. 여가에 대해 깊이 성찰을 했던 크리스 로젝은 더 이상 우리 시대의 여가는 탈출, 자유, 삶의 만족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가는 이미 시뮬라크르화 되었고, 관광은 인공적으로 꾸며진 가상현실 속에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이제 그 유희적 순간에 기꺼이 봉사하고 있다.

관광과 여가가 패키지화되고 하이퍼리얼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관광을 문화상품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계량화된 관광은 관광객들에게 미리 예정된 코스를 통해서 여행할 수 있게 한다. 계량화된 관광은 패키지 상품으로서 지구촌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고, 관광지에서 모조화된 조각물, 모조화된 역사와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모조화된 자연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아니 너무도 익숙하다. 관광객들은 이제 가상의 시뮬라크르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순응한다. 오늘의 테마 파크는 가장 스펙터클하게 드러나는 시뮬라크르의 모습이며, 사진은 이것들을 가장 적나라하게 조응하는 유희적 도구로서 자리한다.

게임과 오락문화 또한 사진의 유희성을 잘 보여주는 소재이다. 게임이 문화상품의 모습으로 변질한 것은 컴퓨터그래픽 혁명 이후의 일이지만 게임은 강력한 소비 문화를 촉진한다. 오늘의 전자 게임은 확실히 그리고 직접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시뮬라크르를 조성한다. 게임의 도구와 이미지는 모조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신화, 상상, 환영을 새롭게 창조했다면 게임이야말로 만화, 애니메이션과 더불어 하이퍼리얼의 천국이다. 환영을 실재화 했던 것이 디지털이지만 그 이면은 일상의 가벼움, 감각의 가벼움, 여흥의 가벼움, 바로 디지털적인 삶이다. 사진은 게임을 통해서 가상 공간의 현대성을 보여주고 실재보다 더 생생한 실재 효과를 재현한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의 오락 또한 가상성을 일깨워주는데 절대적이다. 사진은 이와 같은 우리시대의 우울한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의 유희성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별없이 진행된다. 화상채팅방에서 디스코텍까지, 노래방에서 쇼핑몰까지, 그리고 휴대폰 카메라까지 시공간을 초월한다. 사진은 오락과 유희의 도구로서 가상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욕망의 지지대로 작용한다.

유희적 도구로서 사진은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바로 기념사진, 스냅사진에서이다. 기념사진과 스냅사진의 변모는 전통적 가족사진, 기념사진의 모습과 비교할 때 잘 나타난다. 사진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가족사진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왔다. 가정이 기념화되었던 것은 근대 문화의 체계와 연계되어 왔음을 말한다. 그래서 가족모임, 가족의 대소사에서 사진은 기념의 증거, 존재의 증거로서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같은 가족사진의 소통 체계가 디지털 문화에서는 크게 변모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가족사진, 기념사진은 전자문화, 소비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자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제시'하며, 일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일상을 재현한다. 변화된 스냅사진의 의미는 이제 기념적, 기록적 맥락이 아니라 유희적 소비문화의 일상성을 기념하는 것이다.

오늘의 디지털 스냅사진은 빠르게 기념의 의미, 기록의 의미를 실종키고 있다. 포토샵은 그 중심에 서서 모조 이미지, 이미지 가공에 기여하고 있으며, 가공된 일상을 오히려 더 의미화시키고 있다. 가족 앨범이 지녔던 역사성은 쇠퇴하고 대신 즉흥적인 유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디지털 스탭샷이야말로 탈역사화된 일상의 현재적 모습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의 방을 스타의 방으로 꾸미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광고가 사진의 유희성을 강화한다. 오늘날 모조화된 상품, 가공된 광고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누구도 그 모조성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하지 않으며, 오히려 실재인 것처럼, 아니 실재보다 더 실재라는 인식을 갖는다. 종로거리에 진열된 수많은 모조 음식들과 지하철의 수많은 조화(造花)들과, 놀이 공원의 수많은 인공 조형물들은 친숙하게 자리잡은 시뮬라크르의 모습이다. 이러한 시뮬라크르 상품과 광고들은 사진에 의해 현실 효과로 작동한다.

사진은 죽었는가?

그렇다면 사진은 죽었는가? 더 이상 사진은 사실의 증거, 진실의 대변자로서 설 수 있는가? 그저 오락의 수단, 유희의 도구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세계는 과연 사진에 더 이상 어떤 믿음도 희망도 갖고 있지 않는가? 사진의 종말, 사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화두가 되고 있다. 사진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다. 케빈 로빈슨은 사진이 발명되었을 당시 폴 들라로슈가 외쳤던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고 했던 말을 카피하여 "오늘부터 사진은 죽었다"고 말한다. 물론 케빈 로빈슨의 이야기는 사진이 용도폐기 되었다거나, 우리 시대 사진이 무용지물 해졌다는 말이 아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진에게 부과된 오랜 재현의 임무로부터, 그리고 눈앞에 일어난 사건을 오로지 참인 것으로 받아들인 사진의 오랜 실증주의적 태도로부터 이제 자유스러워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사진에게 다가온 정체성 혼란은 사진의 발명당시 회화가 겪었던 정체성 혼란과 같다. 자! 그렇다고 한다면 사진의 죽음을 이제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까?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눈부신 발전 앞에서는 "그렇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사진에게 과거와 다른 인식 체계, 즉 보는 방식에서부터 감각방식에 이르기까지 과감한 융통성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디지털 시대라고 하여 사진의 죽음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디지털 이미지의 당위성이 확보되고, 그 지위가 공고히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진의 존재론적 징후와 흔적들을 가치 있게 여기며, 사진이 담지 하는 진실의 리얼리티 또한 가치 있게 여긴다. 사진이 수행해왔던 세계와 우리를 향한 창과 거울로서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진의 본질의 문제라기보다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는 사진의 생산 방식과 소비 방식에 대한 문제 때문이다. 사진은 어떤 경우든 삶의 모든 분야에서 펼쳐지는 상호텍스트성을 전제로 한다. 즉 사진의 전제는 사실, 믿음, 진실을 드러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통해서 사회와 문화의 층위를 드러내는 상호텍스트성이다.

존 택(John Tagg)은 사진이 여전히 믿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기계적 객관성과 시각적 정직함이 아니라 이미지의 생산방식과 소비방식을 제대로 반영할 때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실재와 허구를 구분할 수 없는 시뮬라크르의 시대, 하이퍼리얼리즘의 세계에 살고 있다. 실재와 허구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세상에서 그렇다면 사진의 책무는 무엇인가! 이것이 디지털 시대 사진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이제 사진은 물질적 대상이라기보다는 담론적 대상이며,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삶,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새롭게 말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세상은 시간이 지배하며, 시간의 지배 속에 놓여 있다. 인간의 얼굴과 마주하는 시간보다 텔레비전, 컴퓨터, 휴대폰의 전자 창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인터넷에서 가상의 인물들과 진짜처럼 연기하고 스스로 캐릭터화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휴대폰 창에 뜨는 글자, 이미지를 현실과 동일시한다. 시간은 삶을 이렇게 시뮬라크르해 왔다.

그렇다면 사진은 진짜 현실에 대해서 말해야 할 때이다. 사진의 힘은 세상 모든 것이 가짜일 때 진짜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객체는 없고 오로지 이미지만 난무하는 세상에서 사진이 할 일은 진짜를 진짜라고 했던 어제의 관념에서 벗어나 참으로 세상의 "진짜"를 말하는 일이다.

출처 : artkiss의 사진사랑 산사랑
글쓴이 : artkis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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