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사람들 그리고 우리/[번역]

[번역]존 피스크 입문 - 일상의 실천과 저항 사이의 대중문화

ddolappa 2009. 1. 15. 10:41

존 피스크 John Fiske
- 일상의 실천과 저항 사이의 대중문화

 


지빌레 니키쉬(Sibylle Niekisch)

 

 

존 피스크는 1939년 태어났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후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영국과 호주의 커뮤니케이션 대학원(Advanced Level Communication) 심사위원회에서 외부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한동안 호주 커뮤니케이션 협회(Australian Communikation Association)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8년 피스크는 미국 매디슨주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학과로 초빙되어 미디어와 문화연구를 가르치며 200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강의를 계속 했다.

 


1. 비판이론으로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피스크에게 "문화"라는 용어는 "대중문화"(Massenkultur)와 구분되는 미학적 엘리트주의의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을 지닌다. 그에게 문화란 체험된 일상의 경험으로서, 즉 의미가 생성되고 순환되는 장소로서 기능하는 매우 실천적 의미를 갖고 있다. 피스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 비판이론으로서 문화연구는 보다 정의롭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사회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피스크의 중심과제는 대중의 차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문화이론을 개발하는 것이다. 대중의 차이들이란


"사회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특수한, 아래로부터 활동하는 차이들이며, 따라서 개인적 차이에 대한 심리학적 경향의 이론들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관념론적 비전들로 설명되지 않는다. 대중의 차이들은 생물학적 개인주의나 인간 정신의 근원적 자유의 산물이 아니다. 구상화되고, 구체적이며, 특수한 맥락적인 일상문화는 이러한 차이들이 실천되는 영역이며, 그래서 이러한 일상문화적 실천은 차이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생산하기도 한다."1)


피스크는 하위계층의 생활방식들이 그들의 고유한 아비투스(Habitus) 내에서 고안해낸 의미에 상응하는 의미를 이론적 차원에서 그들의 구체적 실천들에 부여할 수 있는 문화이론을 계발하는데 기여하고 싶어한다.2)


문화연구 내에서 피스크는 중요한 이론가들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문화연구는 사회적 상황과 그로 인한 고통을 기술하는 비판이론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미시정치적 차원에서 저항의 형식들에 대한 그들의 탐구는 따라서 문화연구의 자기이해를 이루는 중심적 구성요소이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연구는 일차적으로 항상 사회적 폐단을 개혁하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연구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지식을 생산하면서 자신의 연구작업을 통해 사회적 변혁의 동력에 연료를 공급하고자 한다. 피스크는 스튜어트 홀과 레이몬드 윌리엄스와 같은 다른 문화연구 이론가들의 작업에 의존하면서, 이들의 작업을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미셸 드 세르토, 미하일 바흐친, 움베르토 에코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와 같은 작가들의 이론적 개념들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는 사회적 변화를 위한 추진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유연한 문화이론을 개발할 수 있었다.

 


2. 사회적 변화의 맹아로서 저항적 독서방식


사회적 변화를 위한 중요한 추진력은, 피스크에 따르면, "텍스트"를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는 대중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텍스트"는 매우 다양한 성격을 지닐 수 있다: 뮤직 비디오부터 의상 스타일, 소설이나 영화에 이르기까지 메세지를 지닌 것은 무엇이든 일종의 텍스트이다. 피스크에게 텍스트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의 부분이면서 그러한 환경 안으로 삽입되어 있다: "저는 텍스트에서 의미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사회적 투쟁의 반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투쟁의 일부이지요. 저는 한 쪽이 다른 쪽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꼭 말해야 한다면, 물질적 조건에 대한 사회적 투쟁은 만일 사람들이 그러한 조건의 의미에 대한 투쟁을 할 수 없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3)


그에 따르면 "텍스트"는 고립되어 관찰되거나 분석되어서는 안된다. 텍스트의 사회적 맥락에서만 그것은 어떤 의미를 산출해낸다. 따라서 문화분석가가 미디어 사용자들의 환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을수록, 그들의 기호, 취향, 의도 그리고 사용 방식에 대한 그의 경험적 연구는 더 정확해진다. 피스크는 한 가지 예를 든다.


"가령 '깜둥이'(Nigger)란 단어를 흑인 랩퍼들이 자신들의 뮤직 비디오에서 강하게 발음하고 있다면, 그들은 이 단어에 검은 피부색, 인종적 예속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지배자였던 백인들이 부여한 의미들에 대한 선입견 등 그들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한 단어의 의미들을 둘러싼 투쟁일 뿐 아니라 그러한 의미들을 통제하는 힘을 지닌 자가 누구인가를 둘러싼 투쟁이기도 하다. 기호학적 투쟁은 사회적 투쟁을 반영하지 않으며, 이러한 투쟁의 일부일 따름이다."4)


피스크는 사람들의 일상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거대한 전체"에 대한 그들의 특수한 참여를 이해하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며 노동을 하는 지, 어떻게 잠을 자고 거주하고 있는 지, 어떻게 물건을 구매하고 식사를 하는 지를 관찰하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그는 스튜어트 홀이 개발했던 "선호하는 독서방식"이란 개념을 유용하게 사용한다. 즉 여기에서 의미들은 단순히 수동적으로 수용되지 않고, 이해 대립의 테두리 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5) 자기 자신에 대해 피스크는 다음처럼 쓰고 있다: "기호학자로서 나는 의미들이 우리의 사회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또한 이러한 구조를 변화하기 위한 모든 잠재적인 추진력은 주로 이러한 의미들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한다."6) 대안 문화들은 자신들의 이탈 잠재력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차이들을 통해 "사회적 변화의 원천"7)이 된다. 그래서 지배구조들을 찾아내고 분석하는 일종의 해체구성적 비판은 마찬가지로 사회적 변화를 위한 동력원이 될 수 있다.


피스크는 엘비스나 마돈나의 팬 문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정체성 형성 과정을 서술한 바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제시된 의미들을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이용하고 이러한 의미들을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권력획득 전략에 포함시킬 때 발생하게 된다.8) 게다가 팬 문화는 사회 통합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연속극이나 보이그룹은 학교 운동장에서나 휴식 시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다와 대화의 소재를 제공한다. 하지만 피스크에게는 육체적 경험이 맨앞에 위치한다. 육체적 경험은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본적으로 관여해 왔다. 그 때문에 소비를 할 때 느끼는 쾌락의 경험과 만족 역시 동기를 유발하는 요인들이 된다. 동기를 지닌 자만이 실천하게 되고, 실천은 사회적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쾌락의 경험에 있어 중요한 것은 "상품"이 사용자를 위해 숨기고 있는 의미들의 잠재력이며, 그래서 그가 얼마나 많은 의미들을 자신의 정체성에 추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제공된 "상품"은 각각의 사용자들에게 개별적으로 메세지가 된다. 예를 들어 부랑자 숙소 거주자들은 텔레비전 방송을 거의 보지 않는데, 왜냐하면 TV 방송들은 가정 생활, 노동활동 및 여가시간에 대한 규범들을 전송하지만 그들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그들은 비디오 시청을 좋아하는데, 특히 폭력적 비디오를 선호한다. 피스크가 확인한 것처럼 그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장면들에 극도의 주의력을 기울인다.


"그들은 영화 '다이 하드'을 관람하면서 악당들이 기업 회장을 살해하자 열광적인 갈채를 보냈다 (....) 하지만 비디오를 끝까지 다 보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마지막엔 주인공과 경찰이 법과 질서를 다시 재건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강화하기 때문이다."9)

 


3. 보론 : 미디어의 힘


미디어는 사회적 현실의 기능적 구성요소로서 이러한 전체 시스템의 과정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마치 이러한 일이 계획된 전략들의 범주 내에서 의식적으로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지배 이데올로기 담론을 재생산한다. 미디어는 결코 중립적이거나 "순진무구"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미디어는 사회적 사건들을 반영하는 거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미디어는 독자적 가치를 갖고 있는데, 왜냐하면 수많은 사건들은 미디어적 연출이 없다면 이러한 형태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은 그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그 결과 스캔들은 거의 미디어의 산물로서 간주될 수 있다. 미디어는 현실을 단순히 중립적으로 모사하지 않으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려고 하는 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담론은 미디어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학교, 가정, 정치 기구, 교회 등등의 다른 부분 체계들을 통해 체험된 일상생활의 실천에 의해서도 재생산된다. 행위규범, 관습들 그리고 규칙들의 섬세한 네트워크는 개인의 육체와 사회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한 편으로 그러한 네트워크 자체는 사회적 공통체 생활이 기능할 수 있도록 해주며, 다른 한 편으로 지배 이데올로기의 전범을 전달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볼링 포 컬럼바인"(Bowling for Columbine)에서 미국의 텔레비전은 폭력의 기제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10) 매일같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미국의 일상은 일방적인 TV 보도에 의해 현실과 아무 상관없이 폭력적 분위기로 물들게 된다. 이 거대한 나라 어디에선가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미디어는 즉각 현장에 출동해 사건을 보도한다. 수많은 리포터들은 오직 그 일만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뉴스를 이렇게 자동적으로 내보내게 되면 불안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볼링 포 컬럼바인"은 총기 발사에 의한 사망자수가 미국에서는 11,000명 이상인 반면, 사람당 총기 보유수가 미국과 비슷한 이웃나라 캐나다에서는 총기 발사에 의한 살인이 거의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묻고 있다. 무어 감독이 자신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답은, 텔레비전 뉴스 보도가 만들어낸 일상생활의 히스테리가 이러한 살인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캐나다에서는 폭력 사건을 보도할 때 수많은 주제들 중 단지 하나의 주제로 보도되며, 미국과 달리 언론 보도의 중심적 구성요소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 약간 과장해서 표현해 보면 - 텔레비전이 연이어서 보도하는 폭력 범죄들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미디어를 일종의 살인 무기로 만드는 힘의 한 형태를 다루어야만 한다. 폭력을 자연스러운 일로 만드는 미디어의 수사학은 모든 (백인) 미국인이 잠재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미디어의 이러한 프리즘적 속성, 즉 복제하고 왜곡하는 능력은 정치적 장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정치적 사건들과 결정들을 미디어가 즉각 보도하게 되면, 결정을 내리는 데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 종종 사라지게 된다. 미디어의 지속적인 관찰은 우선적으로 정보 전달의 신속한 가속화를 초래하며, 동시에 그리고 또 다른 결과로서 마비라고 서술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정보를 미리 보도하는 것은 과잉 자극과 정신 분산을 초래하며, 결국에는 미디어 사용자의 결정능력을 정지시킨다. "질주하는 정지상태" - 비릴리오에 의한 그 표현보다 더 적확하게 정치적 사건의 응결 상태를 서술하지는 못할 것이다.11) 이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면, 어떤 일이 발생하기도 전에 그러한 일이 있을 거란 사실을 항상 미리 알고 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미디어는 현실의 모습을 만든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전능한 힘에 대한 환상"이란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문화적 의미의 다양성과 다의성은 프랑프푸르트 학파의 대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할 만한 계기가 아니다. 1944년 및 1963년에 쓰인 아도르노의 문화산업 비판에 따르면, 문화산업의 생산물들, 특히 텔레비전은 수용자들을 생각 없고 동질적인 대중으로 만들어, 그들은 원격 조정당하고 적응된 상태에서 권력자들의 전체주의적 의지에 종속되고 만다.12) "만족한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무기력이 만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13) 이러한 주장은 시청자가 텔레비전이 방송되고 있는 장소에만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 자체가 텔레비전의 산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방송의 의미는 오히려 시청자들이 어떤 태도를 취한 결과물이며, 그들의 사회적 태도가 방송의 어떤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 생산 과정에 관련된 모든 참가자들의 관계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시스템적 성격을 띤 관계이다.14) 프랑프푸르트 학파의 몇몇 대표자들이 했던 것처럼 문화의 소비를 조작의 관점에서만 관찰하는 것은 일방적인 것이다.


피스크에게는 "보다 긍정적인 비판적 실천"이 중요하다.15) 대중문화(Populaerkultur)는 그에게 고급 문화의 전복적 타자가 아니다. 일상의 자명한 배경근거로서 대중문화는 고급/저급의 이분법을 폐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대중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미의 배경근거로서 대중문화는 공통의 준거 체계를 제공하지만, - 그래서 이러한 체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기화된 이해관계 역시 전달할 수 있지만 - 이러한 범주 내에서 서로가 서로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다양한 대중들이 호명된다. 그러한 대중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적 준거체계를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준거체계는 그대로 존속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저항적 행위들이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4. 이론적 발전 : 맑스로부터 홀을 거쳐 푸코에게로


피스크는 맑스주의에 의해서만 현재의 자신이 될 수 있었다고 인정하지만 맑스주의적 구상으로부터 분명한 거리를 취한다. "나의 모든 작업은 맑스주의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만일 내가 맑스주의를 통해 성장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내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이 현재 맑시스트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맑스주의는 내가 사유하는 방식 깊숙히 각인되어 있다."16) 자본주의 체제는 거대한 변혁을 통해 변화할 수 없는데, 그러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나 유연하고 적응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피스크에 따르면 맑스주의 사상에서 이데올로기적 의식과정들은 지나치게 동질인 것으로 그리고 너무나 "위에서 아래로" 작용하는 것으로 사유되고 있다. 그에게 '허위적' 의식과 '참다운' 의식의 구분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빼앗기게 된 하나의 이상일 뿐이다.


"지난 세기는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자기파괴를 입증했던 것이 아니라 맑스가 예상하지 못했던 자본주의의 능력, 즉 스스로를 재생할 수 있고 저항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을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했던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진정한 의식을 소유하게 되는 계급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17)


맑스주의적 사유방식은 시대에 뒤쳐져 있었기 때문에 피스크는 푸코의 권력이론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것은 사회적 현실 내의 권력 관계들을 명시하기 위해 다양성과 분화도를 보다 적절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피스크는 권력이 사회체 전체를 감싸고 있는 섬세한 그물망을 들추어 냈다. 하지만 그는 "인민"(people)의 저항중심지를 발견해내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헤게모니적 의지로부터의 그들의 능동적 이탈을 서술함으로써 푸코의 권력이론을 더 발전시켰다.18) 권력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나 저항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는 없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지극히 사소한 경우들에서만 정치적이다. 이는 저항 활동들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뜻하지는 않는다.


피스크는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적 활동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어떤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는 하층민들이 지극히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의 경험들을 주목하는 한편 그들에게 사회적 중요성을 부여한다. 자신의 논문들에서 그는 변두리로 떠밀린 주변집단의 사회적 현실을 다루고 있다: 매일 인종차별과 대면하는 아프로아메리칸, 복지사회의 이면을 이루고 있는 부랑자들, 제한된 가능성 내에서 가부장적 강제들에 맞서 권력획득전략을 수행하는 가정주부들. 그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당사자들에게 그들이 놓여 있는 사회적 관계들 내에서 그들이 처한 상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고 싶어한다.


스튜어트 홀의 경우처럼 피스크에게 사회적 현실은 한편으로는 파워 블록(power-block)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people)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분석적 범주들은 "사회적 계급" 개념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 이 두 집단은 서로 대립적인 이해집단으로 마주세워져 있지만, 고정된 사회적 범주로서가 아닌 일시적인 연합이란 의미에서 그러하다. 동일한 한 개인이 동시에 두 연합체의 일부가 되는 일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통상적인 일이다: "한 명의 노동자 계급은 젠더 정치에서는 파워 블록과 연합을 맺을 수도 있으며 계급 정치에서는 인민의 이해관계와 연합을 맺을 수도 있다. 따라서 대립을 구조화하는 것은 사회적 범주들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변동적인 일련의 연합관계들이다."19) 파워 블록이 끊임없이 통제을 추구하고, 공간적으로 그리고 피지배자들의 신체에서 스스로를 확장하고, 어떠한 한계를 모르거나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는 반면, 인민은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일탈에 몰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한계들을 알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날마다 한계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부과된 경제적, 사회적, 신체적 제한들이 그들 안에 기재되어 있다. 권력자들이 타인에 대한 통제을 추구하는 반면, 힘없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이미 만족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지식 형식들은 다른 지식 형식들을 비진리로 경멸할 수 있지만, 하위계층의 지식 형식들은 지배적 지식을 비진리로 비난하는 호사를 누릴 수 없다. 만일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된다면, 하위계층의 지식 형식들은 '비진리'로 선언되고 만다. 지배 집단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이해관계를 상식(common sense)으로 자연화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통제 지점들"에서 자신의 이해관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저항이 이루어질 수 있다. 저항 형식들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더욱 잘 파악하기 위해 피스크는 드 세르토로부터 게릴라전이란 은유를 수용한다: 시스템 내의 약점들이 발견될 수 있다면, 내부의 저항은 외부를 향하게 되고, 그래서 시스템은 공격받게 된다.20)


사회적 부조리의 개선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후퇴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고 점차 확대된다면, 느린 변화가 내부로부터 일어날 수 있게 된다. "대중문화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기능들 중 하나는 인민들을 파워 블록의 영향들로부터 멀리 떼어놓을 수 있는 사회적 정체성의 영역들을 유지하고 확장시킨다는 점에 있다."21)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미 간섭으로부터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나마 달아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스크는 이러한 작은 사이공간들 내에 사회적 변화의 맹아들을 위치시켜놓는다.


피스크는 자신의 착안점을 다른 비판이론들로부터, 특히 정치경제학과 이데올로기 비판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고 싶어했다. 정치경제학의 착안점은 특히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경제적 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 있다. "소비자가 맥도날드에서 자주 사먹게 될 수록, 그의 욕구는 점차 상품화되고, 상품을 통해 충족될 수 없는 그의 욕구는 더욱 더 사라지게 된다."22) 그러나 피스크에 따르면 이 경우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전략과 그것의 영향력이 서로 혼동되고 있다.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특히 알튀세르의 변형들에서 "주관성은 상품이 정치경제학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을"23) 하고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있는 주체들이다. 스튜어트 홀의 "그람시로의 전환"은 투쟁의 역할을 작동시켰다. 홀의 헤게모니 이론은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갈등 없이 작동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지배가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들의 일시적인 동의가 필수적이다. 그로 인해 헤게모니에 의한 지도는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어 있고, 그것은 의미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5. 의미의 생산 : 두 가지 경제들


문화적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 피스크는 한 편으로 경험적 현장연구의 민속지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다른 한 편으로 한 텍스트의 기표들을 이 텍스트의 바깥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체계 내의 기의들에 연결시키는 기호학적-구조주의적 텍스트 분석을 사용하고 있다. "생산된 의미들이기도 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배치된 의미들에 대한 민속지적 연구가 텍스트의 기호학적 분석과 연관된다면, 문화 분석은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24) 그래서 한 편으로 텍스트의 구조는 사회 체계와 관계를 맺게 되고, 이를 통해 어떤 지배 이데올로기들이 전달되고 재생산되고 있는 지 그리고 어떤 일탈적 독서방식이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한 편으로 민속지적 연구는 텍스트의 사회적 환경이, 즉 인민이 어떻게 텍스트를 이해하고 사용하는 지를 보여줄 수 있다. 이 경우 인민은 기의들, 즉 텍스트와 그것의 기표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코드화/탈코드화의 매듭은 의미가 생산되고 순환되는 장소이다. 문화적 생산물을 이용하고 읽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생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문화적 생산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작성된 문서가 아니라 "독서 과정을 통해 비로서 쓰여지는 책"이다.25)


도시적 대중문화의 일상적 실천이 지닌 전형적 특성은 의미들이 본래의 맥락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스타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의미들을 분리시키는 행위는 이러한 맥락으로부터 의미의 이용자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을 나타낸다."26) 가령 텔레비전 텍스트는,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경제적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기구들에 의해 전적으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구들은 당연히도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저항적 의미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적으로 생성되지 않으며 항상 그것과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 의미들을 생산할 때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사회 내에서 모든 다른 자유가 그러하듯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량으로 생산된 텍스트는 인민을 통해서만 대중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27)


분석적 층위에서 피스크는 텔레비전 텍스트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누는데, 그것들은 실제로 하나로 합쳐지지는 않지만 서로 분리된 채 존재하지는 않는다.


1) 텔레비전 화면 위의 최초 텍스트는 시청자들에 의해 시청되고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전체 맥락 속에서 텍스트의 생산조건에 의거해 관찰되어야 한다.


2) 그 아래 놓여 있는 층위는 팬진(역주-팬들이 만드는 잡지), 텔레비전 논평 그리고 가십란과 같은 텔레비전 텍스트와 연관된 상업적 생산물들을 포함한다.


3) 세 번째 층위는 시청자들 자신이 생산한 것, 즉 방송에 대한 대화들, 시청자 투고, 팬레터 그리고 팬들에 의해 수용된 의상 양식, 행동양식, 언어양식 그리고 사유양식 등이다.


"텔레비전이 대중적일 수 있으려면 수많은 대중들에게 매력적이어야 하며, 그리고 대중들에 의해 수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개방적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 개방적 텍스트는 다양한 하위 문화들이 이 텍스트로부터 자신들의 고유한 하위 문화적 정체성의 욕구에 부합하는 의미들을 생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28)


그래서 호주의 애보리진(역주-호주 원주민들)들은 영화 "람보"에서 미국 시청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읽어내게 된다. "미국 시청자들과 로널드 레이건이 그 영화를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 사이에 어떤 유사점이 존재하며 그들에 의해 생산된 의미와 쾌락이 서로 비교된다고 우리가 가정해서는 안된다."29)


자본주의 체제는 유연하다. 상품을 판매하려는 욕구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소비자들의 필요에 반응하고 그들에게 보조를 맞춘다. 개성과 전복성이 잘 팔린다는 사실을 에이치엠(H & M), 나이키 그리고 이케아(IKEA)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사용자들은 정해진 의미들에서 벗어나고, 제작자들은 그것을 억지로 강요한다. 이러한 피드백 과정은 의미들이 생산되고 교환되는데 근본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즉 이러한 교차점에서 문화가 생성된다.


분석적 이유들 때문에 피스크가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두 가지 경제, 다시 말해 화폐경제와 문화경제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둘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그래서 동일한 생산물들, 예를 들어 텔레비전 방송은 동시에 이 두 경제들 안에서 유통된다.


"화폐경제는 문화적 상품들이 두 가지 상이한 순환의 형태를 갖추도록 할 수 있다. 한 편으로 방송 제작자들은 텔레비전 방송을 판매기업들에 팔게 된다. 방송은 한마디로 물질적 상품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으로 상품으로서 텔레비전 방송은 자신의 역할을 바꿔서 스스로가 생산자가 된다. 이 때 방송이 생산해낸 새로운 상품에 있어서 특정한 시청자층이 중요한데, 이들은 다시 광고나 스폰서들에게 판매된다."30)


텔레비전 방송은 자본의 영역 내에서만 생산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화적 영역 내에서도 생산물이다. 그것은 자본의 의미에서만 대중을 생산해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문화경제 내에서 소비자의 역할은 직선적인 경제적 생산과정의 최종산물로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문화경제 안에서 의미와 쾌락은 순환하고 있으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실제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31) 아마도 화폐경제의 섹터에서 권력을 지닌 자들은 문화경제의 섹터에서도 통제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시도일 뿐이다. 의미들은 통제되지 않거나 단지 매우 어렵게 그리고 일시적으로만 통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 역시 항상 폭넓은 레퍼토리의 상품을 소유하고 있어야만 한다. 어떤 생산품들이 소비자들에 의해 수용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소비는 생산을 통해 시작되는 경제 사슬의 최종지점일 뿐 아니라 교환의 체계, 다시 말해 상품이 모든 다른 언어와 마찬가지로 개인에 선행하는 기호학적 체계로 사유되는 대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언어이다."32)


의미가 거래된다면 거래자는 의미 생산의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의 그물망 안에서 순환되고 있는 모든 메세지들을 어떤 유동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것을 분석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그것을 확정하고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메세지들의 중요성이 반감되는 시기는 기록되었던 바가 아마도 다음날부터 벌써 기록하던 시점의 상태가 더 이상 아니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6. 실천 담론의 역설


학자들이 직면했다고 생각하는 어떤 역설, 피스크 자신이 확언한 것처럼33), 해결되지 않는 역설이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발생하게 된다. 아카데믹한 서술은 체험된 경험에 대해 보고하고 토론하고자 한다면 실천을 담론으로 전환시켜야만 한다. 그러나 이 때 실천의 존재론적 지위는 변화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실천의 특성이라 할 만한 특징은 담론이 아니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석의 과정에서 풍부한 내용을 지닌 사회적 현실의 몇몇은 사라지게 되고, 그래서 사회적 현실을 담론으로 전환시키게 되면 관찰의 "대상"을 왜곡하게 되고 만다. "해석적 비평은 의미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일부이다. 해석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며, 순진한 행위나 객관적 행위도 아니다."34) 필연적으로 이런 저런 양상들이 전면에 제시되고 그 때문에 다른 양상들은 무시되고 만다.


"문화분석이 모든 소용돌이를 측량하기란 불가능하다. (....) 소용돌이의 수많은 흐름들은 표면 위에서 지각될 수 없으며 모든 분석적 개입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 그로 인해 문화분석은 그러한 흐름들을 구분하는 범주들과 차이들이 분석 과정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분석의 대상을 왜곡시킨다는 불가피한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35) "텍스트"는 항상 그것이 위치한 사회적 맥락 속에 포함시켜 관찰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 텍스트는 의미를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분석가는 서술하기 위해서 개별적 부분들을 고립시키는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


또 다른 분석적 문제가 문화분석가가 위치해 있는 사회적 맥락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된다. 즉 아카데믹한 학자가 어떻게 주변화된 사회적 집단을 자신의 것과 유사하지 않은 그들의 일상적 행동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가? 피스크는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는 일이 가능할 뿐더러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그러한 운동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데, 왜냐하면 우리 또한 결국에는 다른 아비투스들 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고, 우리가 그 안에서 가장 친숙하다고 느끼는 그 아비투스로서만 다른 아비투스들 안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와 같은 일시적 체류가 우리에게 어떤 내적 통찰을 허락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체류는 이러한 아비투스들 안에 거주하고 있거나 거주해왔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상황의 경험을 결코 매개할 수는 없다."36)


여기에서 암시되고 있는 문제는 문화인류학이 참여적 관찰이라는 작업 방법으로 인해 직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 문제와 매우 유사하다. '문화 쓰기 논쟁'(Writing-Culture-Debatte)은 해법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사그러들고 말았던 1980년대의 "민속지적 재현의 위기" 문제로 귀결되었다.37)


피스크가 기술하고 있는 것처럼 수많은 학술적 이론들에서 세속적 문화에 대한 평가절하가 그러한 문화를 연구하거나 혹은 그러한 문화를 서술하거나 연구 대상으로 확인하는 일에서조차 인식론적, 방법론적 그리고 윤리적 문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수한 개별자에 대한 학문은 우리의 학술적 아비투스에서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38) 그러나 문화연구는 "객관주의 논리"에 맞서서 자신이 전체의 일부만을 고찰하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은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화분석의 기초에 놓여 있는 착안점은 담론분석에서 유래하며, 그래서 그것의 타당성 증명방식은 체계적이지 대리표상적이지 않다. (....) 담론분석은 어떠한 발화도 어떤 다른 것에 대한 대리표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 따라서 주어진 것들은 그것이 실제적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경험적이다. 하지만 주어진 것들은 경험주의적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에 의해서 경험의 층위가 고유한 의미의 조건들이기도 한 어떤 객관적 현존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되지는 않기 때문이다."39)


우리가 그려놓은 형상은 플라톤이 동굴 벽 위로 스쳐지나갔던 그림자를 서술했을 때 이미 알고 있었던 현실의 모상에 다름 아니다.

 


7. 쾌락, 환상 그리고 능동성


피스크는 그들의 작업에서 "능동적인 상태"가 동시에 "권력을 지닌 상태"를 의미하는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촉발되었던 저 문화연구 이론가들에 속한다. 대중들이 소비하는 행위를 할 때마다 대중들의 문화 사용에 대한 피스크 이론의 추종자들은 도취와 희열에 빠져든다고 비판을 받았다. 특히 피스크는 능동적 소비에 대한 그의 강조는 소비하는 자유만 지니고 있는 자유주의적 주체를 선전하고 있을 뿐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그의 이론적 추진력을 허용할 수 없을 만큼 축약시켰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노르베르트 볼츠는 다른 장소에서도 종종 마주치게 되는 이러한 투쟁의 핵심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어떤 나쁜 세계에 대한 흥미진진한 꿈이었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는 그 꿈을 끝까지고 꾸었고 마침내 깨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깨어남은 거부하는 몸짓으로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것으로 도망쳤다는 인상을 줄 것임에 틀림없다."40)


피스크의 관심은 그와 같은 대중문화 이론가들의 그것에 정확히 대립하고 있다. "나는 헤게모니가 실패하는 순간, 이데올로기가 저항보다 약해지는 순간, 사회적 통제가 규율위반과 마주치는 바로 그와 같은 순간들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41) 우선 그에게 이러한 명성을 가져다 준 것은 쾌락적이고 육체적인 경험이 동기화되고 능동적인 소비에 포함된다는 그의 주장이었다. 자신의 이해관계가 충족될 수 있을 때만 미디어 사용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비디오 테잎에서부터 음악 시디, 비디오 게임 그리고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미디어 생산물들에 대한 애호는 이용자에게 쾌락을 가져다 주는 미디어의 속성에 기인한다. 사회적 영역에서건, 정치적 영역에서건 아니면 그 밖의 기타 영역에서건 간에 쾌락 없이는 동기화도 없고, 동기화 없이는 실천도 없다.


쾌락은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 사용을 통해서, 가령 자신의 사회적 경험에 대한 재인식적 가치를 통해서, 또는 이러한 드라마가 마련해준 수다의 요소를 통해서, 또는 마돈나의 의상 스타일을 따라서 입고 그를 통해 그 때부터 자신의 여성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면서, 독자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입안하게 될 때 느끼게 되는 쾌락을 통해서 마련된다. 특권적 지식의 배타적 소유 역시 쾌락을 예비한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지도, 사전 그리고 비밀회합을 갖고 있는 모든 환상문학 애호단체들이 형성되었다. "있는 그대로 현실" 세계에서 "가상" 세계로 진입하는 것도 쾌락을 준다. 가령 변두리화된 주변집단은 지배자들의 의미 담지체들을 빼앗은 다음 그것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쾌락을 느끼게 된다.


피스크는 "쾌락"(pleasure)이란 용어가 왜 그에게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다음처럼 설명하고 있다:


"좌파 이론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들이 쾌락의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많은 쾌락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좌파들은 너무나 청교도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못된다. 쾌락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것은 동기적인 것이며 (....) 그래서 이러한 쾌락을 헤게모니의 미끼 혹은 갈고리인 이데올로기적 쾌락와 구분하는 것은 (....) 매우 중요하다."42)


사회의 토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내고 사회적 변화를 도모하도록 동기화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경고하는 목소리들을 듣는데, 왜냐하면 나는 아카데믹한 이론가일 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추종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팬으로서 나는 대중문화에 관여하며, 학자로서 나는 비판적 거리를 두고 그것을 관찰한다. (....) 나는 통속소설을 읽고 "톰과 제리"(Tom and Jerry) 같은 만화영화를 평가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자신을 자본주의 체제의 바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나의 쾌락만을 쫓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43)


일상적인 미디어 소비의 전복적 잠재력이 실제로 얼마나 거대한 지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미시적 정치" 안에는 유토피아적 요소가 내재해 있다. 변두리화된 주변집단은 그를 통해 정해진 역할 모델과 규범의 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현실을 보다 쉽게 견뎌낼 수 있게 된다. 환상과 꿈은 개성의 토대들이며, 그래서 그러한 것들은 미래의 실천을 위한 소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종종 평가절하된다.


"대중문화는 세계에 대한 재현은커녕 세계로부터 벗어날 도주로만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비판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대중문화는 '소박한 현실도피주의'라는 평결을 받고 매우 간단하게 비판적이고 사회적인 일정표로부터 지워져 버렸다. (....) 이러한 피상적 비난은 현실도피주의나 환상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어떤 것으로부터 도피' 혹은 '어떤 것에 대한 회피'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 또한 '선호하는 대안으로의' 탈주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있다."44)


'~으로부터의 도피'와 '~에 대한 회피'와 같은 용어들은 수동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반면, '어떤 것으로의' 운동은 능동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신에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고, 그것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환상은 재현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정치적 특성을 획득하게 된다. 비록 내적 저항이 폄하되어 환상으로 규정되고 있지만, 그것이 없다면 사회적 혹은 정치적 저항은 존재할 수 없다. 대중문화로부터 급진적인 효과들을 기대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그러한 효과들이 결핍되어 있다고 비판해서도 안된다.

 


- 끝 -

 


[저자 소개] 지빌레 니키쉬 Sibylle Niekisch. 1973년 생.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사회학과 민족학 공부. 현재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문화재 재단에서 연구중.

 


[원문 출처] Culture Club: Klassiker der Kulturtheorie, hrsg. von Martin Ludwig Hofmann, Tobias F.Korta und Sibylle Niekisch, Frankfurt am Main 2004, S.240-258.

 


[한국어 번역서]


- 존 피스크(강태완 외 옮김),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 존 피스크(이익성 옮김), TV읽기, 현대미학사 1994.


- 존 피스크(박만준 옮김), 대중문화의 이해, 경문사 2005.


- 존 피스크, 팬덤의 문화경제, 실린 곳: 박명진 외 편역, "팬덤의 문화경제학: 문화, 일상, 대중", 한나래 2007.

 

 

translated by ddolappa

 

 

[미주]


1) John Fiske: "Cultural Studies und Alltagskultur", in: Rainer Winter/Lothar Mikos(Hg.): Die Fabrikation des Populaeren. Der John Fiske-Reader, Bielefeld 2001, S.139-178, hier S.153.


2) Ebd., S.161. 아비투스는 피스크에 의해 부르디외의 의미에서 인간이 태어난 환경으로 이해된다. 아비투스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우리를 생산하며 동시에 우리는 그것을 만든다.


3) John Fiske: "From Ideology to Knowledge and Power. An Interview with John Fiske", Madison 17.9.1991, von Eggo Müller.


4) John Fiske: "Die britischen Cultural Studies und das Fernsehen", in: Winter/Mikos (Hg.), a.a.O., S.17-68, hier S.37.


5) Stuart Hall: "Kodieren/Dekodieren", in: Roger Bromley/Udo Goettlich/Rainer Winter: Cultural Studies. Grundlagentexte zur Einführung, Lüneburg 1999, S.92-112.


6) John Fiske: "Fernsehen: Polysemie und Popularitaet". in: Winter/Mikos (Hg.), a.a.O., S.85-110, hier S.107.


7) Ebd., S.107.


8) 마돈나 현상에 대해서는 John Fiske: "Die britischen Cultural Studies und das Fernsehen", S.46ff. 엘비스 팬 문화에 대해서는 John Fiske: "Elvis. The Body of knowledge", in: Karl H.Hoerning/Rainer Winter (Hg.): Widerspenstige Kulturen. Cultural Studies als Herausforderung, Frankfurt am Main 1999, S.339-378.


9) John Fiske: "Die britischen Cultural Studies und das Fernsehen", S.41.


10) Michael Moore: Bowling for Columbine, USA 2002.


11) Paul Virilio: Rasender Stillstand, Frankfurt am Main 1998.


12) Max Horkheimer/Theodor W. Adorno: "Kulturindustrie. Aufklaerung als Massenbetrug", in: dies.: Dialektik der Aufklaerung, Frankfurt am Main 2000, S.129-176.


13) Ebd., S.153.


14) John Fiske: "Wie ein Publikum entsteht. Kulturelle Praxis und Cultural Studies", in: Hoerning/Winter (Hg.): Widerspenstige Kulturen, S.238-263, hier S.256.


15) John Fiske: "Fernsehen: Polysemie und Popularitaet", S.96.


16) John Fiske: "From Ideology to Knowledge and Power", S.3 des Internetausdrucks


17) John Fiske: "Die britischen Cultural Studies und das Fernsehen", S.19.


18) 피스크와 푸코의 권력이론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글을 참고할 것: John Fiske: "Koerper des Wissens", in Winter/Mikos(Hg.): Die Fabrikation des Populaeren, S.242 ff.


19) John Fiske: "From Ideology to Knowledge and Power", S.4 des Internetausdrucks


20) John Fiske: "Koerper des Wissens", S.230.


21) Ebd., S.232.


22) John Fiske: "Wie ein Publikum entsteht", S.258. 정치경제학의 착안에 있어 소비는 자본주의의 재생산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23) Ebd., S.259.


24) John Fiske: "Die britischen Cultural Studies und das Fernsehen", S.46.


25)  John Fiske: "Elvis. The Body of knowledge", S.342. 피스크는 엘비스의 육체가 그의 사후 미디어와 팬들이 지식을 생산하고 통제권을 얻기 위해 투쟁을 벌였던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예시하기 위해 이러한 은유를 선택하고 있다. "엘비스는 죽었지만 그의 신화는 태어났다."


26) John Fiske: "Die britischen Cultural Studies und das Fernsehen", S.54f.


27) Ebd., S.64.


28) John Fiske: "Fernsehen: Polysemie und Popularitaet", S.86.


29) John Fiske: "Die populaere Oekonomie", in: Winter/Mikos(Hg.): Die Fabrikation des Populaeren, S.111-138, hier S.121.


30) Ebd., S.115.


31) Ebd., S.117.


32) John Fiske: Lesarten des Populaeren, Wien 2000, S.42.


33) John Fiske: "Cultural Studies und Alltagskultur", S.149.


34) John Fiske: "From Ideology to Knowledge and Power", S.6 des Internationaldrucks.


35) John Fiske: "Wie ein Publikum entsteht", S.249ff.


36) John Fiske: "Cultural Studies und Alltagskultur", S.142.


37) Vgl. Sibylle Niekisch: Kolonisation und Konsum. Kulturkonzepte in Ethnologie und Cultural Studies, Bielefeld 2002, sowie dies.: Cultural Studies und Ethnologie. Zu einem schwierigen Verhaeltnis", in: Udo Goettlich/Rainer Winter/Lothar Mikos (Hg.): Die Werkzeugkiste der Cultural Studies. Perspektiven, Anschluesse und Interventionen, Bielefeld 2001, S.131-158.


38) John Fiske: "Cultural Studies und Alltagskultur", S.149.


39) John Fiske: "Wie ein Publikum entsteht", S.253ff.


40) Norbert Bolz: "1953-Auch eine Gnade der spaeten Geburt", in: Jochen Hoerisch (Hg.): Mediengeneration, Frankfurt am Main 1997, S.60-89, hier S.75.


41) John Fiske: "Politik: Die Linke und der Populismus", in: Roger Bromley.Udo Goettlich/Rainer Winter (Hg.): Cultural Studies. Grundlagentexte zur Einfuehrung, Luenenburg 1999, S.237-280, hier S.259.


42) John Fiske: "From Ideology to Knowledge and Power", S.4 des Internationaldrucks.


43) John Fiske: "Politik: Die Linke und der Populismus", S.260.


44) John Fiske: "Die populaere Oekonomie", S.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