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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겨레] 아글리에타 교수와 대담, 빚에 의존한 ‘거품성장’이 이번 위기 불렀다

ddolappa 2009. 2. 2. 22:31

아글리에타 교수의 ‘조절이론’
자본주의 불안정성 폭발하면
새로운 ‘성장체제’로 변화발전
한겨레 최우성 기자

미셸 아글리에타(70) 교수는 평생토록 현대 자본주의 ‘동학이론’을 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 왔다. 아글리에타 교수는 자본주의란 안정적이고 균형적인 상태의 ‘단힌’ 시스템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정성을 때로는 억누르고 또 때로는 폭발적으로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가는 ‘열린’ 가능성으로 본다. 자본주의의 ‘동태성’에 특히 주목한 것이다. 그의 이론적 관심을 핵심적으로 집약해 보여주는 두 단어가 바로 ‘조절’과 ‘위기’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다양한 ‘조절양식’을 경험하며 존재해 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특정 시기의 자본주의가 반드시 특정 형태의 조절양식을 통해서만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두 개의 대표적 상품, 즉 노동력과 화폐가 갖는 특수한 성격 때문이다. 아글리에타 교수는 일반 주류 이론가들과는 달리, 노동력과 화폐는 그 자체가 하나의 일반 상품이면서, 동시에 ‘상품이 아닌 것’이라고 정의한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일반 상품과는 달리, 다양한 형태의 ‘제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아글리에타 교수가 보기에는 이처럼 최정점에 놓인 국가 뿐 아니라 다양한 중간 형태의 제도적 틀에 의해 자본주의적인 축적과 재생산과정이 유지·발전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인 불안정성으로 인해 기존 조절양식으로는 더 이상 축적과 재생산과정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면, 마침내 위기가 폭발하고 새로운 조절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2차 대전 이후의 자본주의 황금기는 바로 케인즈주의적 대타협을 핵심으로 하는 포드주의적 조절양식의 결과였지만, 70년대 내내 이어진 인플레이션 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조절양식에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성장체제’란 조절양식보다 시야를 조금 더 넓힌 것으로, 이번 대담에서 아글리에타 교수는 성장체제를 일러 “다양한 제도들이 일관적으로 유지되면서 일정 기간 동안 규칙적인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태”라고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아글리에타 교수의 최근 고민은 시장의 효율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되, 시장근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성장체제의 가능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로 모아지고 있다. / 최우성 기자

빚에 의존한 ‘거품성장’이 이번 위기 불렀다
‘대전환’의 시대
한겨레 최우성 기자

세계 석학과의 대담 두번째 무대는 미셸 아글리에타 파리10대학 교수가 연다. 아글리에타 교수는 ‘조절’(레귤라시옹)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심층적 변화과정을 짚어내는 조절이론의 창시자이자,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 경제학자이다. 아글리에타 교수와의 대담은 지난달 19일(현지시각) 파리 소재 국제경제전망예측센터(CEPII) 내 연구실에서 이뤄졌고, 파리정치대학의 안정현 연구원이 진행자로 나섰다.

  

8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가계·기업 부채규모 커져
투자은행 수명도 끝났다

안정현 연구원(이하 현)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당신의 저작들을 다시 살펴봤는데, 아주 흥미로운 공통점을 하나 발견했다. 발간된 지 30년이 넘은 첫번째 저작 <자본주의의 조절과 위기>, 2004년의 <금융자본주의의 난파>, 그리고 아주 최근에 나온 <위기>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위기’는 언제나 당신의 주요 연구주제였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위기’를 연구한 전문가로서, 이번 위기에 대한 생각이 우선 궁금하다.

 

아글리에타 교수(이하 아)금융의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바라볼 때, 자본주의는 항상 글로벌한 성격을 띠었고, 또 위기란 자본주의가 성립된 이래 줄곧 존재해왔다. 첫 번째 금융위기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의 이른바 ‘튤립위기’가 바로 첫 번째 금융위기다. 이후 위기는 수세기 동안 되풀이해서 나타났다. 여기서 우리는 주류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바로 금융 불안정성 가설이라 할 수 있다. 케인즈가 그 기초를 닦았고, 훗날 민스키가 더욱 발전시켰다.

 

이 가설의 핵심은 금융자산시장, 특히 신용시장은 여타의 일반 재화시장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부를 축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용이 발전한 단계에서는 신용시장의 수요-공급 조정 메커니즘이 여타 일반 재화의 경우처럼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경우의 신용이란 생산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신용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신용시장이 금융자산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에 따라 작동할 경우, 금융자산의 가격은 일종의 ‘자기준거과정’을 거쳐 그 가격 자체에 대한 기대함수가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특정 자산의 가격이 계속해서 오르리라고 예상할 때 그 자산을 구입하는데, 결국 신용에 대한 수요는 금융자산의 가격이 오를수록 더욱 늘어나게 된다. 신용에 대한 공급 역시 가격이 오를수록 더욱 증가한다. 왜냐하면 금융기관들이 신용을 공급할 때 자산을 담보로 잡아 자산가격이 높다면 그만큼 신용도 더 많이 공급하려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재회시장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서로 독립적이지만, 만일 이처럼 수요와 공급이 서로 상관관계를 갖게 되면 일반적인 수요-공급 법칙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된다. 주류 이론가들이 주장하는 가격에 의한 조정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신용시장이 일반적인 재화시장과 같은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해봐라. 그렇다면 신용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서 신용가격이 오르면 수요는 다시 낮아져야 한다. 그러나 신용시장에서는 이런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신용가격이 오르는데 수요도 덩달아 상승한다. 금리가 수요와 공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시장이 조절 기능을 상실하게 되므로, 결국 위기에 이르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신용시장이 여타 다른 재화시장과는 다른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내에서 금융위기란 내재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핵심이다.

 

금융위기의 가능성이 시스템 내에 항상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뭔가? 왜 ‘위기’를 통해서만 폭발적으로 드러나는가?


이런 금융 불안정성은 바로 호황기에 형성되고 축적되지만, 동시에 은폐된다는 점을 또 하나 덧붙여 애기해야 한다. 오늘날 은행이 사용하는 고도로 발달된 신용리스크 관리모델들은 오히려 이런 현상들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평가기준인 VaR(Value at Risk)를 보자. VaR는 자산가격이 오르는 기간에는 오히려 내려가기 마련이다. 담보물인 자산이 높은 가격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빌려준 채무는 우량한 것으로 평가된다. 위기를 불러오는 비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란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자산가격이 상승하는 중에는 거픔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고, 겉보기에 신용 리스크가 가장 낮을 때가 오히려 가장 위험한 때일 수 있다. 주류 이론에서 사용하는 리스크 평가방법은 바로 이런 점을 무시하는데, 이런 게 바로 가장 핵심적인 위기의 요인이다. 바로 지금껏 봐온 자본주의 금융위기의 공통요소들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가 걸어왔던 전체 역사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뜻인가 ?

 

신용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하도록 놔두는 한 확실히 그렇다. 물론 신용시장을 규제하는 경제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정책당국이 금리를 통제해 다른 자본시장이 존재하는 경우를 말한다. 일본의 금융 시스템이 그랬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약 30년 동안의 유럽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단 한 차례의 은행위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어떤 금융시장 제도를 유지하느냐가 위기가 현실적으로 나타날 가능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로 들리는데.

 

앞서 말한 그런 체제에서는 자산을 구입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신용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거다. 실질적인 생산을 위해 투자될 신용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때 신용은 소득 수준에 연계돼 있었을 뿐, 자산가치에 연동돼 있지는 않았다. 문제란 신용이 자산가치에 따라 움직일 때 발생한다. 위기는 금융시장이 ‘자유화’되어 있으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재 위기의 원인은 결국 20~30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텐데, 80년대 이후의 무분별한 금융자유화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 폭이나 깊이에서, 우리는 지금 과거와는 쉽게 비교하기 힘든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번 위기가 과거 자본주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다른 위기들과 질적으로 좀 더 확실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찾는다면 무엇이라고 봐야 하나.

 

내가 보기에 그 해답은 이번 위기가 바로 70년대 동안 세계경제가 인플레이션 위기를 겪은 뒤에 등장한 자본주의 조절방식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70년대의 인플레이션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착된 포디즘이라는 조절방식에 종지부를 찍었다. 포디즘의 역기능이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인플레이션이 점차 심해지다 결국 금융위기로 나타났고, 이를 계기로 80년대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조절방식이 등장하게 됐다. 고금리를 통한 매우 높은 가격의 신용이 바로 그것이다. 고금리 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의도에서 채택됐다. 이 새로운 조절방식이 포디즘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과거 포디즘의 특징은 큰 틀에서의 임금관계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단체협상에 의해 결정되고, 이것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조절해 왔다는 데 있다. 그런데 포디즘이 무너지면서 이제 이 원칙은 바로 주주가치라는 새로운 원리에 자리를 물려줬다. 주주가치 원리는 기업의 권력을 주주들에게 넘겨주고, 기업의 시장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 즉 주가를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가 되는 체제를 말한다. 결국 생산력 상승분을 노동과 자본이 함께 나누던 과거의 조절방식은 이제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체제로 대체된 것이다.

 

포디즘의 몰락과, 주주가치 극대화도 대변되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현재의 위기와는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핵심은 주주가치 극대화 원리 아래에서는 경제주체들이 챙겨가는 몫을 정하는 일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조절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금융의 성격이 변화했다. 대주주들은 대부분 기관투자자들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포트폴리오투자 논리, 금융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투자은행, 헤지펀드 등 이전의 전통적 의미의 상업은행들과는 성격이 다른 금융기관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뒤따랐다.

 

첫째, 주주들은 기업이 장기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자본이익율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의 수익성을 요구하고 나섰다. 기업이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 결국 부채를 지는 수밖에는 없다. 굉장히 중요한 특징이다. 둘째, 임금은 생산성 증가에 비례해서 늘어나지 못한다. 소득 증가가 이루어 질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다. 미국의 경우, 지난 25년간 생산성이 엄청나게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임금의 중간값(median)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 결과, 임금-이윤 분배는 매우 불평등한 방식으로 진행됐고, 소득 불평등정도는 엄청나게 심화됐다.

 

세 번째 결과가 특히 중요한데, 가계의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이다. 소비를 늘리려다보니 결국 저축을 줄이게 되고 가계 역시 점점 더 부채에 의존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략 20여년전부터 기업부채와 가계부채가 모두 증가했다. 앵글로-색슨계 나라들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모든 선진국에서 이런 흐름이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이번 위기의 싹은 이미 80년대 중반부터 잉태되어 온 것이라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가처분소득 대비 부채비율이 90년대 중반만 해도 70%에 불과했는데 2006년엔 무려 150%나 됐다. 영국의 경우, 98년에 가처분소득 대비 80%였던 가계부채가 10년 만에 180%까지 올라섰다. 그 누구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지만, 이런 부채 증가 추세는 현재의 자본주의 조절방식, 즉 주주가치 극대화와 연결된 체제적인 현상이다. 여기에다 옛 소련 블록의 붕괴 이후 나타난 ‘워싱턴컨센서스’도 빼놓을 수 없다. 워싱턴컨센서스의 뼈대는 금융자본주의를 개도국에 확대하려는 구상이다. 그 결과, 개도국들 역시 똑같은 논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부채에 의존하는 시스템 말이다. 하지만 개도국들은 아직 선진국들에 견줘 금융시스템이 덜 발달해 있어 그만큼 위기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97~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가 그 본보기다.

 

가격 메커니즘 작동않는
신용시장 결국 위험해져
정책당국 금리통제 필요

이번 위기 진행과정에서 잘 드러났듯이, 8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이른바 ‘금융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레버리지 효과를 극대화하며 자산시장 거품을 키우는 데 앞장선 주인공으로 무엇보다 거대 투자은행들을 꼽을 수 있다. 이른바 미국의 5대 투자은행의 현주소를 보자. 두 곳은 상업은행에 인수됐고, 다른 두 곳은 상업은행으로 전환했다. 나머지 한 곳 리먼브라더스는 파산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투자은행 모델은 확실히 역사적 수명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나.

 

물론이다. 생각해 보자.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차입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내가 보기에, 이번 위기는 그저 지금까지의 다른 위기와 비슷한 ‘또 하나의’ 위기가 결코 아니다. 기존의 성장체제, 즉 주주가치 극대화에 밑바탕을 둔 성장체제의 종말이라 봐야 할 것이다. 이 성장체제는 한마디로 부채를 먹고 사는 것이었다. 빚지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는 체제였다.

 

빚지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는 체제란 말이 피부로 와 닿는다. 만일 당신 말대로 이번 위기를 계기로 기존 성장체제가 종말을 맞는다면, 그것이 가져올 변화는 무엇인가.

 

변화는 많은 부문에서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봐 왔던 방식의 투자은행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해 볼 수 있다. 첫번째 시나리오는 과거로의 회귀다. 물론 이 시나리오는 위기의 여파가 예상보다 훨씬 더 크지 않는 한 실현가능성은 적은 편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란 바로 1930년대 금융위기 이후 나타났던 각국의 대응과 개념적으로는 같은 것인데, 모든 상업은행 업무와 자본시장 관련 업무 사이에 완전한 칸막이를 쳐서 둘을 구분하는 것이다. 모든 자본시장 관련 업무는 상업은행으로부터 자금조달을 받을 수 없도록 하는 거겠지. 말하자면, 1933년 미국의 글래스-스티걸법 체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둘 사이의 칸막이를 완전히 없애버렸던 99년 ‘금융서비스 현대화법’ 이전 시대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뜻인가?

 

그렇다. 99년의 이 법은 그간 투자은행이 할 수 없었던 영역을 확장시켜주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처럼 과거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시나리오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날 금융혁신 과정은 대단히 미시적인 차원에서 세밀하게 진전돼 왔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가 갖는 장점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는 점도 중요하다.

 

결국, 달리 생각해볼 수 있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좀 더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화의 장점은 나름대로 유지하면서 여기에 적절한 규제를 덧붙이는 것이다. 과거처럼 두 사업영역 사이에 장벽을 치기보다는,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하고도 효율적인 유인책을 제공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 것이라 하겠다. 관건은 이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적절한 금융규제를 실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어쨌거나 내 예상대로 두 번째 시나리오가 선택된다면, 앞으로 금융기관의 모습은 현재의 ‘유니버설뱅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투자은행 업무는 유니버설뱅크의 한 부서에서 담당하게 된다. 은행 전체에 적용되는 자기자본 규제 등의 장치에 따라, 예전처럼 레버리지효과를 이용한 과도한 차입이나 자산유동화(Securitization)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장부외거래(off-balance sheet transaction)는 바젤II에 명시된 자기자본 규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따르는 위험도 동시에 있다. 첫째는 금융기관의 대형화와 집중화가 진행되면서 내부 지배 및 규율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내부규율이나 감시장치가 작동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금융기관이 규모를 무기로 정책당국을 볼모로 잡을 가능성이다.

 

금융기관들이 대마불사(too-big-to-fail)에 기댈 위험을 말하는 것인가 ?

 

한마디로, ‘덩치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too-big-to-fail)과 ‘너무 복잡해서 망하지 않는 것’(too-complex-to-fail)의 문제가 공존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금융당국은 매우 세밀하게 감독지침을 마련해야 하고, 금융감독에 대한 정치적 의지 또한 매우 중요하다. 중앙은행의 금융감독 기능도 강화해야 한다. 금융부문에서 앞으로 일어날 변화도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우선 투자은행의 자율성 폐지와 더불어 금융기관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건전성 감독 기준을 지금보다도 훨씬 강화해서 금융기관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레버리지 활동에 더 이상 기대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규제 강화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도 필요하다. 아마도 G20과 같은 무대를 통해 이런 합의가 이뤄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본다. 규제를 받지 않는 역외금융영역에 대해서도 중요한 합의를 이뤄내야 한다. 이건 매우 중요한 이슈인데, 이들 역외금융영역을 공통의 국제법 아래에 두어야 한다. 규제 피난처를 없애지 않는다면, 대형은행들은 쉽게 규제를 피할 곳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이다.

 

중앙은행의 역할 역시 변화를 겪을 것이다. 여러 차례 위기를 겪으면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단지 물가안정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놓여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왜냐하면 물가안정이 금융 안정성을 확보하는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이 계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금융시장에서 자율규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모든 위기의 역사적 경험은 이런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케인즈 이론을 추종했던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반면,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웃음) 중요한 점은 바로 그것이다. 만일 중앙은행이 지금까지처럼 위기가 발생했을 때만 한시적으로 맡아왔던 최종대부자의 역할을 넘어서 금융시스템 안정과 물가안정이라는 두 가지 정책 목표를 상시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면, 금리라는 정책수단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앙은행은 한편으로 감독에 직접 참여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황기에 신용의 확대가 자산가격 급등으로 치닫지 못하게 할 거시적인 정책수단을 개발해야 한다. 현재 중국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무 지불준비금 제도를 통해 일정 수준의 유동성을 늘 확보하도록 한다거나, 아니면 ‘동태적인 자본 비축’(dynamic provision of captial), 다시 말해 거품이 심화될 가능성이 클 때엔 은행으로 하여금 더 많은 자본을 비축하도록 하는 제도가 그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스페인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맞다. 스페인 중앙은행이 이런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다. 내 아이디어는 이런거다. 금융시스템 전체의 차입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좀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지수를 개발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하자. 개인적으로는 이런 변화를 통해 중앙은행의 역할도 크게 달라질 것이고, 중앙은행의 독립성 개념도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으로 본다.

 

앞서 이번 위기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면서 미국의 99년 금융서비스 현대화 법을 언급했는데, 사실 한국에서는 2월부터 이 법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는 ‘자본시장 통합법’이 시행된다. 이미 미국에서는 이번 위기를 통해 이런 법률의 문제점을 톡톡히 체험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한국의 경우엔 사정이 어떨 것이라고 보나?

 

이런 법안이 시행되면 자연적으로 금융기관의 대형화와 집중화를 초래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런 법 아래서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게 하려면 강력한 금융감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많은 문제를 나을 것이다. 한국도 과잉부채에 따른 위기에서 결코 예외가 되지 않는다. 이미 2003년 카드사태를 겪지 않았나.

 

결국 지금까지 당신이 들려준 얘기의 핵심은 세계화의 장점은 살리되, 단점은 통제하는 방향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데. 아직까지는 그 내용이 뚜렷하게 잘 잡히지 않는 느낌이다.

 

사실 요즘 쓰고 있는 책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전 세계에는 아직도 수많은 투자수요가 존재하는데, 정작 세계화의 폐해를 막겠다고 자본이동을 통제해서 예전보다 신용공급이 더 줄어든다고 생각해 보자. 특히 개도국의 성장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투자전략을 가진 자본조달자를 찾아야 한다. 이런 자본조달자들은 단기유동성에 대한 수요가 없는 투자자여야 한다. 단기적으로 자본을 회수할 유인이 없는 투자자여야 한다는 얘기다. 연기금이나 국부펀드들이 바로 이런 투자자에 속한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앞으로 연기금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연기금은 은행에 비해 약간 낮은 지위에 있었다. 연기금은 지금까지 자산유동화증권(ABS)이나 부채담보부증권(CDO) 등 수많은 신용파생상품들을 사들였다. 이번 위기를 겪으며 이들 연기금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앞으로 연금지급 등에서 문제를 일으킬 여지도 있다. 그래서 내가 제안하려는 건 앞으로 이들 연기금에게 금융시장에서의 주요 행위자에 걸맞는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 리스크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하고, 기업이나 은행의 주주로서 그들 스스로 장기적인 목표를 설장할 수 있는 능력도 키워줘야 한다. 단기적인 수익성만을 추구하기보다는,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수익성을 목표로 삼도록 유도하고, 이런 관점에 따라 포트폴리오를 재구성하도록 해야 한다.

 

위기 이후 나타날 새로운 자본주의 ‘성장체제’(growth regime)에 대해 당신이 그리고 있는 밑그림으로 봐도 되나.

 

지난 30년간 주주가치 극대화에 뿌리를 둔 성장체제가 지배해왔지만, 이제 더 이상 규칙적인 성장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성장체제의 변화는 이제 피할 수 없다. 새로운 성장체제에서 우리가 꼭 되찾아야 할 게 있다면 생산성 향상과 임금 증가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현재의 체제는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단절시킴으로써 신용팽창을 불러왔고 그것을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이제 더 이상 신용 확대가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우리는 파국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다.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저성장 시대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다시 생산성 향상과 임금 상승 사이의 관계를 복원하거나 하는 두 가지말이다.. 이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일부에서는 우리가 다시 포디즘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주주 자본주의’ 작동방식 바꾸는데 힘써야

세계화의 폐해 막기위해
연기금·국부펀드 등 활용
기업지배구조 개선 필요

이번 위기를 계기로 ‘케인즈주의의 부활’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런 움직임과는 약간 거리를 두는 것인가? 케인즈주의 부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도 사실상 케인즈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케인즈를 이해한다는 것과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적용됐던 그의 방식을 지지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얘기다. 케인즈를 거론하는 것은 조절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케인즈를 여러가지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금융에 관한 것, 특히 ‘시간’이라는 변수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정확하게 해석해야 한다. 케인즈에게 ‘장기’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케인즈는 금융이란 매우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장기투자를 위해서는 자본의 유동성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러 차례 ‘장기’에 관해 언급한 바 가 있다. 문제는 오늘날처럼 글로벌화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야 하고, 주주가치 원리가 앞으로도 계속해서 유지된다면, 이 원리의 작동방식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즉 주주들로 하여금 올바른 소득 분배와 양립할 수 있는 새로운 규준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주주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바대로 단기적으로 매우 높은 금융자산의 수익성만을 추구하는 것을 거부해야 하고, 그들이 적절한 임금 상승과 양립 가능한 연기금의 수익성을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위기를 계기로 기업 지배구조가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매우 어려운 과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답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엄청난 피해를 피하기 어렵다.

 

기업지배구조 변화나 기관투자자들의 의식 변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너무나 낙관적인 시각이 아닌가라는 지적도 있다.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당신이 제시하는 새로운 성장체제의 싹을 찾아볼 수 있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몇 가지만 예를 들어 줄 수 있는가?

 

분명 새로운 체제는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정치적 행동이 당연히 따라야 한다. 위기를 통해 우리는 기존의 방식대로는 더 이상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위기의 긍정적인 역할이다. 만일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면 우리는 어떤 개혁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위기 속에서 비로소 다른 대안을 찾게 된다. 예를 들어 중국을 보자. 이미 2005년에 중국은 앞으로 수출에 덜 의존하면서, 내륙지방, 농촌지방 발전을 통해 성장을 도모하겠다는 개혁 플랜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수출이 급감하고 있는 현재의 경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은 바로 그런 방향의 경기부양책을 마련했다. 앞으로 내륙의 사회간접자본 건설, 농촌지역 개발 등이 속도를 낼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한계에 다다러서야 어쩔 수 없이 변화를 선택하게 된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단기대출보다는 좀 더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대출해주는 금융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이 논리를 이해하고 이를 실행할 의사가 있는 경제 주체, 그리고 할 수 있는 경제 주체가 있다면 그들은 바로 대형 기관 투자자들이다. 그리고 실제로 대형 기관투자자들 중 적지 않은 부분이 이같은 공적인 이해관계에 연결돼 있다. 오늘날 점점 더 많은 돈이 공공부문에 축적되고 있다. 집단행동 (collective action)의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성장체제의 도래에 힘을 보탤 또 다른 요소는 전지구적인 문제의 등장이다. 환경문제처럼 국제적인 수준의 거버넌스와 협력이 필요한 문제들로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사안이 등장하고 있다. 절대적인 희소성으로 인해 우리의 소비양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들, 예를 들어 에너지를 비롯한 모든 지속가능하지 않은 자원들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고, 이와 더불어 이러한 전지구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 더욱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자동차 산업의 경우엔 아주 급격한 전환을 경험할 것으로 본다. 만일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않으면 그대로 도태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위기 없이 진전을 바라기는 어렵다. 더 많은 국가들이 이런 문제들에 직면할수록, 더 많은 정치세력들이 이 문제를 인식할수록, 우리가 찾고자 하는 새로운 성장체제에 쉽게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위기를 돌파하는 데 무엇보다 국제적인 협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제 이번 위기를 계기로 나타나는 국제 통화협력 움직이랄까, 새로운 국제통화제도 구상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레 화제를 옮겼으면 한다.

 

국제 통화협력이라는 관점에서 지난 98년에서 2008년 사이의 기간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부조화의 공조’라 할 수 있겠다. 이 기간 동안 몇몇 나라들이 자국 통화가치를 달러에 연계하고 엄청난 외환을 보유함으로써 인위적으로 미국이 국제수지 균형을 유지하는데 기여해 왔다. 결국 앞서 얘기한 부채 시스템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데, 부채가 더 이상 성장의 동력이 될 수 없다면, 환율은 변화를 겪게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아시아 나라들은 자국통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아시아 나라들의 통화를 달러화에 연동시키는 일이 처음엔 의미가 있었다. 아시아 나라들 사이에서 통화협력이 어려운 이상 모두가 다같이 하나의 통화, 즉 달러에 연계함으로써 일정한 일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국의 부채 수준을 볼 때, 특히 공공부채 수준을 볼 때, 이제 달러는 심각한 위기에 빠지거나 적어도 가치하락을 겪을 것이다.

 

이른바 ‘달러시대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그건 아니다. 결국 향배는 각국 정부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공동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하는가에 달려있다. 이러한 공조가 성사되지 못할 경우엔, 환율 위기와 같은 극도의 혼란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장기적으로는 아시아 지역도 하나의 블럭을 형성하면서 유럽, 북미와 함께 삼극 체제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아시아는 내가 보기에 마치 유럽이 90년대에 경험했던 것과 유사한,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다. 역내 무역관계는 점점 통합되고 있는데, 환율은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환율이 요동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 위안화 대비 원화의 변동폭은 최근 들어 엄청난 수준을 기록했다. 중국 당국으로서는 위기의 한가운데서 자국 통화가치가 상승하고 국제무역은 침체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는 앞으로 역내 환율 전쟁으로 이어질 소지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수준에서의 통화 협정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 역내 경기부양을 위해서 엄청난 자본이 필요한 만큼, 역내 채권시장을 조성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때 발행되는 채권들은 달러표시가 아닌 자국 표시로 발행하고, 역내의 공동 외환보유액을 통해 달러 및 유로와 같은 주요통화 대비 환율이 일정한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공조하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와 같은 통화 협력 움직임은 이를 담당할 지역기구의 탄생으로 나아가게 될 것으로 본다. 유럽은 이제 하나의 통화지대가 되었고, 앞으로 동유럽국가들도 여기에 가입하게 될 것이다. 최근 영국 파운드화를 보면, 결국 파운드 역시 혼자서는 계속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결론적으로 유럽은 지금보다도 더 큰 통화지대가 될 것이고,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일종의 지역화(Regionalization)로 몰고갈 것으로 본다. 지역화라고 해서 서로간에 협력이 필요없다는 뜻은 아니다. 세 지역간에 일종의 유연한 협력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 임무는 이들 지역간의 통화정책이 불협화음을 일으킬 소지는 없는지, 시스템 위기가 발생될 소지는 없는지를 감시하고 정기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현재의 G7이나 G20이 아닌 다른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종의 ‘신브레턴우즈 체제’라고 볼 수 있겠는가 ?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다극적 통화체제’가 될 것이다. 만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브레튼우즈 체제 논의가 옛 브레튼우즈체제 때와 같은 고정환율제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은 그와는 오히려 정반대다.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고정환율제로의 회귀가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견해는, 바꾸어 말하면, 일종의 통화정책 공조다. 그러나 이런 구상은 통합 지역내에서 원심력이 존재한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가장 큰 이슈는 역시 아시아 지역에서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고 일정한 공조체제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제 아시아가 세계 경제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상, 이 지역에서 반복적으로 외환위기가 발생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중·일 3국이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을 당신의 구상과 관련해 바람직한 움직임이라 볼 수 있겠나 ?

 

이제 시작이다. 하지만 훨씬 더 나아가야 한다. 전반적으로 지역 국가들의 환율에 대해 근본적인 점검이 있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최근과 같은 환율 불안 사태의 재발을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 근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아시아의 일부 통화가 중국 위안화 대비 20% 이상 폭락했는데, 이는 위험하다.

 

아시아·아메리카·유럽…
‘다극적 통화체제’될 것
아시아도 통화협정 시급

이제 유로화에 관해 이야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다. 2009년은 유로가 공식적으로 탄생한 지 10년째다. 10년이 지난 지금, 유로에 대해선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유로화가 다시 힘을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유로가 역내 국가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또 일부 국가들이 외환 위기로 이어질 위험을 차단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동유럽 국가들은 유로존 가입을 서두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유로존 가입과는 거리가 멀었던 영국에서도 최근 파운드화 가치의 하락과 함께 유로존으로 들어가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불과 2, 3년 전같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유로존에 가입함으로써 거시정책 수단을 잃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높다. 당장 유로존 가입과 동시에 자국의 통화정책 권한을 유럽중앙은행에 넘겨줘야 한다. 유로존 역내 국가들이 준수해야 하는 ‘안정성장협약’으로 때문에 재정정책 여지 또한 제한을 받게된다. 이 와중에서 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역내 국가간 미묘한 갈등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 당신은 최근의 이런 움직임을 어떻게 보는가 ?

 

정책 부재에서 비롯된 갈등이 굉장히 크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회귀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해야 한다고 본다. 이 말 뜻은 기존의 안정성장협약에서 문제가 된 기계적이고 임의적인 규칙에 의한 조정메커니즘으로부터 공동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공동행동은 정치적인 진보를 전제로 하고 이는 유럽 차원의 주권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유럽은 이미 광대한 자유무역지대가 되었다. 유로존이 계속 확장될 것이라고 볼 때, 통화정책 기제만으로는 이제 부족하다. 다른 정책 기제가 필요하다. 현재의 위기를 거치면서 다른 정책기제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라 기대한다. 현재 위기에 대한 각 정부의 대응을 보면 매우 불충분할뿐만 아니라 국가별로 상이한 모습을 보여준다. 영국은 소비 진작으로, 프랑스는 투자 촉진으로 방향을 정하는 등 저마다 제각각이고, 그 규모 또한 위기의 파장과 경기침체의 여파에 비해 매우 적다. 겨우 국내총생산(GDP)의 1.2%에 불과한 수준이다. 해결책은 미국과 같은 대규모 뉴딜 정책이다. 사실 30년대 위기 이전에 미국의 각 주들은 연방예산주의에 찬성하지 않았었다. 위기가 터지자, 각 주들이 연방 차원에서 대규모 예산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연방예산주의를 승인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다. 이번 위기를 유럽 차원의 예산을 발전시킬 계기로 활용해야 한다.

 

연방예산주의가 유로존이 지속가능한 것으로 남기 위한 당신의 대안인가?

 

그렇다. 이런 유럽 차원의 예산은 유로존의 장기 성장을 위한 곳에 쓰여져야 할 것이다. 연구개발 투자라든지 사회간접자본 투자 같은 걸 들 수 있다. 만일 그게 힘들다면, 적어도 유럽투자은행을 매개로, 유럽 차원의 채권을 발행해서 공동 지출을 위해 사용하는 수준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유럽연합 공동지출 내역이 존재하는 만큼, 공동예산을 책정하고 잠재적 성장동력 마련에 투자하면서 역내 회원국들간의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은 중요한 과제이긴 하지만 장기적 차원의 과제가 될 것이다. 단기적인 과제는 물론 회원국들간의 재정정책을 조율하는 일이다. 유럽 전체 차원에서 회원국들의 재정정책 방향, 총예산 규모와 내역 등에서 조율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개별 회원국들의 사정과 유로존에 기여가능한 역량을 감안해서 말이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서만, 지금까지의 맹목적인 안정성장협약 조절기제에서 벗어나, 공동재정정책을 통해 회원국들이 공감할 수 있는 조절기제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 두 가지가 내가 보는 유로존의 대안이다. 이중 어떤 것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우려되는 시나리오 하나는 미국이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후 대규모 경기부양 정책을 펼칠 것이므로 미국의 경기가 살아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이를 통해 이득만 보겠다는 사고이다. 굉장히 측은한 상황이다. 안젤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 상황이 되면 하고 싶은 말이 대충 짐작 간다. “우리 독일 가계는 부채가 없고 부동산 거품도 없다”고 할 것이다. 유일한 위기가 있다면, 수출이었는데, 수출도 다시 살아나니, “우리는 독일 기업들의 경쟁력 강화에나 힘쓰겠다”고 할 것이다. 그야말로 비협조 정책의 전형이 나올지도 모른다.

 

유로 대 달러 환율의 긴장은 없겠는가 ?

 

있을 것이다. 이미 두 통화간 환율 변동폭을 보고 있지 않은가? 일단 달러가치 하락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미 연준의 제로 금리 정책에다 연준이 인수한 대규모 부실채권 때문에 심지어 중앙은행이 파산하는 사태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 경우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아야 할 것이고 중앙은행의 독립적인 통화정책,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로화의 미래는 어떻게 보는가?

 

‘강한’ 통화란 환율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통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경제성장을 추동할 수 있는 통화가 바로 강한 통화다. 그것이 ‘좋은’ 유로 아니겠나 ? (웃음) 이런 의미에서 강한 유로가 되기 위해선, 우선 내가 앞서 말한 개혁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여파가 단순히 저성장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현재 채권시장을 보면, 유로존 국채들간의 이자율 격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것은 현재 일부 국가들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시장의 예상을 반영하는 것이고, 이같은 시장의 예상은 현재 유로존 나라들의 통합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다. 최근 유로존 국가들간 국채금리 격차가 사상 유례없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리스가 가장 높고 이탈리아 등도 높은 수준이다. 일부 유로존 국가들의 경우, 어쩌면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고 시장에서 예상하는 것이다. 유로의 안정성에는 커다란 위험이다. 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연방예산주의이다. 다른 대안으로는 충분히 다이내믹한 성장을 이를 수 있는 정책을 펴서 이들 국가들이 국가 채무를 적정선에서 관리할 수 있게 하는 것뿐이다.

 

바쁜 중에 귀한 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매우 풍부하고 유익한 대담이었다.

 

감사드린다.

안정현(38) 연구원은 고려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뒤 파리10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했다. 파리10대학 강의요원을 거쳐 지금은 사회과학 전문 학위기관인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금융기업국 연구원으로, ‘OECD 국가들의 금융부문-가계부문간 금융 리스크의 전이 과정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주요 연구 관심분야는 1980년대 금융자유화 이후 등장한 이른바 ‘금융혁신’ 기법들, 특히 신용평가 기술과 자산 유동화 메커니즘이 금융부문에 어떤 파급효과를 가져다주는지에 있다.

 

미셸 아글리에타(70) 교수의 첫번째 저작 <자본주의 조절과 위기>는 1870년에서 1970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동안 미국 경제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밝혀낸 독보적인 고전으로 꼽힌다. 이 책에서 처음 싹튼 그의 문제의식은 훗날 로베르 부아예, 알랭 리피에츠 등 젊은 학자들과 함께 ‘조절이론’이라는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프랑스 내 엘리트의 산실인 에콜폴리테크닉에서 수학한 뒤 파리1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의 한국개발원(KDI)에 해당하는 국제경제전망예측센터(CEPII) 수석 경제분석가를 거쳐 자문위원을 맡고 있고, 사회당 정부 시절에는 경제분석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출처 : 안일규의 정치 이판사판
글쓴이 : Forever GuGu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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