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말에 스무 살이 된 우리의 아지트는 남포동의 음악다방이었습니다.
베토벤의 석고 데드마스크가 있던 빨간 카펫의 백조, 카라얀의 패널이 걸린 전원, 마른 꽃 걸린
필하모니, 솔파, 합창, 그리고 모딜리아니의 목이 긴 여자가 걸려 있던 '까페 떼아뜨르'….
집이 대평동이던 나는 걸핏하면 남포동으로 불려나갔지요.
대평동 도선장에서 통통배를 타면 남포동까지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으니까요.
그래선지 불러내는 친구들을 그다지 마다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하긴 꼭 누가 불러내지 않더라도
어쩐 일인지 당시 집에 붙어 있은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서울에서는 걸핏하면 누군가 내려와서
강연을 했고 이런저런 모임이며 남포동과 광복동의 화랑에 다리품을 파는 일도 심심찮았습니다.
까페 떼아뜨르에서 모딜리아니(이하 모디)를 본 것은 그런 날들 가운데였습니다.
샤갈을 좋아하고 시를 쓰던 친구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목이 긴 저 여자가 모디의 마지막 여자였다고 말했습니다. 결핵성 뇌막염으로 죽은 남편을 따라 임신한 몸으로 투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까페 떼아뜨르에 걸렸던 그림이 정확히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친구가 손가락질을 하면서 저 여자라고 한 걸로 보아 잔느 에뷔테른이었던 건 분명한데 모디가 그린 여러 점의 잔느 중에 어느 그림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모자를 쓰지 않은 것은 분명하고, 또 노란 스웨터를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배가 불렀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모디가 그린 잔느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그린 걸로 추정되는 이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1919년) 에 제일 마음이 끌립니다. 알코올과 마약과 끊임없이 여자들과 연애에 빠지는 방탕한 남자, 언제 분노가 폭발할지 모르는 이 광기의 남자를 잔느는 천사 같은 부드러움으로 감싸안은 겁니다.
그녀는 그 많은 몽파르나스의 어떤 여자들과도 달랐습니다. 그녀는 모디가 처음으로 사랑하고 최후까지 사랑한 여자였습니다. 자신의 집에 여자를 두기를 거부하던 모디가 흔쾌히 자기 옆에 두기를 원했던 여자는 잔느뿐이었습니다. 순진무구한 그녀의 눈에 모디는 누구보다 아름답고 순수한 남자였습니다. 그녀는 일생을 통해서 그의 고뇌를 나누어 지면서 지극한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에서 깊은 종교성이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겠지요.
모디가 그린 모든 여성들의 특징은 역시 긴 목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긴 목에서 희화적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지요. 차라리 관능과 고독과 우수가 느껴지죠. 이 세상에서 그토록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던 남자를 머잖아 죽음이 갈라놓으려 하는 운명을 가진 여자.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푸른 눈은 마치 그런 자신의 심연을 바라보는 것만 같습니다. 모디는 색조를 만들어내는 데도 신중했지만 자기만의 독특한 형태를 생각해내는 데도 열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적처럼 자기의 스타일을 발견하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미술사의 저 위대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은 자신은 별로 말을 하지 않고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잔느의 신중한 얼굴이 느껴집니다. 그녀는 언제나 모디를 달래는 입장이었지만 그녀 자신 또한 그에게 완전히 의지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디의 마음과 재능에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그의 본성을 존중했습니다. 그가 광폭해질 때에 언제나 변함없이 저 소녀 같은 부드러운 얼굴과 여리고 순한 손으로 그를 구원해주었습니다.
잔느의 두 번째 임신 소식을 듣고 모디는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가 그린 이 그림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 있는 아이는 결국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지만요. 더 이상 헌신적일 수 없었던 여인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