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회화의 세계

[스크랩] 캄비세스왕의 재판

ddolappa 2008. 3. 6. 03:31

 

 

캄비세스왕의 재판   서경식(徐京植)   

   
  벨기에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고뿔도 고약한 놈에 걸려 한여름내 기침을 해댔다. 누이하고 단둘만 남게 돼버린 집에서 할일 없이 누웠다 일어났다 하는 중에 8월도 다 가고, 내가 사는 쿄오또(京都)에서는 지장분(地藏盆: 지장보살을 기리는 일종의 불사ㅡ옮긴이)도 끝나갈 무렵, 유럽여행이나 하고 올까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솟구치더니 나를 쑤셔대는 것이었다. 15년쯤 전에 한국에 다녀온 것밖에 해외라곤 나간 일이 없었다.


부모를 잇따라 잃고 허탈해진 누이에게 기분전환 한번 시켜주자는 생각이 없진 않았으나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 기분전환이라기에는 마음이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헤랄드 다비드 「캄비세스왕의 재판」



비행기 요금이 뚝 떨어지는 10월을 기다려, 마침내 출발하는 때가 되었건만 마음이 들뜨기는커녕 도리어 서서히 고개가 수그러지는 듯한, 기묘하게 경건한 심경 그대로였다.


스위스에서 4,5일 어정거린 다음 기차편으로 독일로 들어가 하이델베르크에서 1박, 암스테르담에서 2박한 뒤, 나와 누이는 벨기에의 브뤼주로 갔다. 1983년 10월 15일 토요일이었다. 실제의 브뤼주는 부드러운 늦가을의 햇살이 함빡 비치고 관광객으로 붐비는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다소 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운하를 유람하고 탑에 오르는 따위의 정해진 관광코스를 거친 다음 그곳에 가서, 그 그림과 맞닥뜨렸다.
그 그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곳이라고 하는 것은 흐루닝헤 미술관(Groeninge museum)이다.
이렇듯 '예사롭지 않은 것'과 맞닥뜨리기 위하여 나는 멀리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가……
그 그림의 제목은 「캄비세스왕의 재판」이다.


뒤에 알아본 바이지만 캄비세스(Cambyses)왕은 기원전 6세기에 재위한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전제군주이고, 가죽벗김을 당하는 형벌의 희생자는 시삼네스라는 판사인 모양이다. 유럽인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것일지 모르나, 나로서는 생소한 주제일 뿐이다.


작자인 헤랄드 다비드(Gerard David)는 1460년경 유트레히트 근방의 아우데와텔이란 고을에서 태어나 1484년에 브뤼주 화가조합 회원이 되고, 1494년에 한스 멤링(Hans Memling: 플랑드르의 대표적 화가ㅡ옮긴이)이 죽자 그 뒤를 이어받아 브뤼주의 공화가(公畵家)가 되었다 한다.


사람들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읽을까?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흐르는 피 한방울까지도 놓치지 않고 그려내려고 하는, 가열한 사실정신(寫實精神)에 압도당했다.


나의 시선은 화면 오른쪽의 사나이, 나이프를 입에 물고 사뭇 익숙한 손놀림으로 왼쪽 발목에서 뒤꿈치 언저리의 날가죽을 벗기고 있는 사나이에 붙박인 채 움직일 줄 모른다. 역시 축산문화(畜産文化)를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이런 묘사가 어렵겠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옆의 조수인 듯한 소년이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오직 이 소년만이 폐쇄된 화면 공간의 바깥쪽으로 연결되고 있는데,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왼편, 그러니까 희생자의 오른팔 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나이한테서는 정밀성을 추구하는 장인적 열성조차 느껴진다. 아마도 화가 자신의 장인적 열성의 투영이리라.


브뤼주에 오기 전,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렘브란트(Rembrandt)나 로이스달(Jacob van Ruysdael)그리고 고흐(Vincent van Gogh)를 숱하게 보았다. 그것들을 직접 내 육안으로 보는 일은 오래된 나의 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 못지않게 내가 흥미있었던 것은 이곳 플랑드르 지방 특유의 정물화들, 구체적으로 말해서 새우며 생선토막, 병, 은그릇, 껍질이 반쯤 벗겨진 레몬 따위 그 질감이나 양감에 있어서 사뭇 묘사해내기 어려운 대상들만을 골라서 더 바랄 나위 없이 정밀하게 그려낸 17세기의 숱한 정물화들이었다. 화가들은 그리고 그림의 구매자들(대개는 장사꾼 따위 시민계급이었겠지만)은 어째서 그토록이나 사실 그 자체에 집착했을까?


급기야 그것은 오직 신기(神技)에 가까운 사실력(寫實力)만을 과시하는 '트롱쁘뢰유' (trompe-l'oeil: 실물로 착각할 정도로 정밀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ㅡ옮긴이)로 이어졌다(1984년에 토오꾜오와 쿄오또에서 개최된 비엔나 미술사 미술관전에는 네덜란드 화가 호흐슈트라텐(Samuel van Hoochstraten)의 '트롱쁘뢰유'의 걸작 「창가의 노인」이 전시되었다).


그보다 거의 2세기나 앞선 시대에 이 브뤼주의 화가는, 벗겨지는 살껍질의 주름살과 그 밑에 드러나는 근육의 부풀어오른 혈관 따위를 묘사하는 데 17세기 플랑드르 사실화의 선행자다운 집요함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그림에서 곧바로 아버지의 죽음을 연상하고 있었다.
시뻘건 왼쪽 발목을 꽉 잡고 마치 양말이라도 벗기고 있는 듯한 형리(刑吏)의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나 자신이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여기가 나른하다니까" 하고 중얼거렸다는 아버지의 목쉰 음성이 귓속에서 낮게 울리는 듯하다.


이 여행을 떠나기 5개월 전인 1983년 5월 9일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지 꼭 3년, 어머니와 같은 끔찍한 병이었다.


아버지는 어려서 고향을 떠나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으로 흘러왔었다. 피지배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많은 굴욕과 신고를 겪었다. 만년이 가까워서야 작은 공장의 주인이 되었으나 도산의 위기를 여러차례 겪으며 마음고생이 끊이지 않았다. 4남 1녀를 두었으나 그 가운데 아들 둘은 조국의 감옥에 갇힌 채 죽는 날까지 석방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한많은 죽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3개월이 지난 어느 무더운 날, G시에 사는 맏형네 집에 마쯔무라라는 아는 아주머니 한 분이 갑자기 찾아왔는데 이 아주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 물을 다오."
하고 걸걸한 사내 목소리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그때 아주머니를 맞아 접대를 했던 형수의 말인즉슨, 그 목소리가 영락없는 아버지 목소리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 마쯔무라씨와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다.
마쯔무라씨는 마침내 왼쪽 발목을 자꾸 만지면서,
"여기가…… 여기가 나른해."
하고 중얼대기 시작했다.


왼쪽 발목의 그 부위는 아버지가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사바늘을 꽂아 테이프로 고정시켜놓았던 곳이었다. 몽롱한 상태의 아버지가 무의식중에도 손을 뻗어 바늘을 뽑아버리려고 해서, 항상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곳이었다.
놀라서 벌떡 일어서려는 형수의 어깨를 붙잡고
"여기 있거라."
라고도 말했다는데 어깨를 붙잡는 그 힘은 도무지 연약한 여성의 그것이 아니었다고, 매사에 침착한 형수는 말한다.


마쯔무라로 통하는 이 여인의 출생지는 중부지방의 소도시지만 엄연한 조선사람이다. 조선에는 예부터 무당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요컨대 일본의 미꼬(巫女)나 이따꼬(우리나라의 무당에 해당하는데, 특히 아오모리현 오소레산(恐山)에 모여사는 자들을 이렇게 부름ㅡ옮긴이)에 해당하는 샤먼으로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상당한 수요가 있는 듯, 오오사까(大阪), 나고야(名古屋) 등지에는 지금도 이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쯔무라씨는 어려서 나고야의 한 무당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목을 받은 일이 있다니까, 그 방면에 대한 특별한 감수성이 그 무렵부터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


마쯔무라씨는 결국 무당이 되지 않고 평범한 서민으로서 수십 년을 살아온 터이지만, 도대체 무슨 조화로 우리 아버지의 영혼과 감응하게 되었을까……


렘브란트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



신교(新敎)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렘브란트를 많이 보고 온 탓인진 모르겠으나, 나는 이 그림에서 막연하나마 구교적(舊敎的)인 무엇을 느꼈다. 렘브란트한테도 일견 잔혹해 보이는 그림이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산물이었다. 이를테면 저 유명한 「데이만 박사의 해부학 강의」이다.
해부학과 껍질 벗기는 형벌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은 물론이다.


브뤼주에는 또 그 이름마저 성혈(聖血, heilig Blut)이라 붙여진 성당(1150년 기공)이 있는데, 십자군원정 때 예루살렘에서 몇방울 가져왔다는 그리스도의 '피'를 성유물(聖遺物)로 모셔놓고, 지금도 해마다 5월의 첫째 주일이면 '성혈제'를 지낸다고 한다.


11세기에서 12세기 무렵의 유럽에서는 이런 종류의 성유물 숭배가 급격히 번져, 거의 전부가 가짜이긴 하지만 성인의 유골이니 성의(聖衣)니 하는 것들이, 더러는 쟁탈의 대상이 될 정도로 떠받들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聖)야곱의 유골을 모셨다고 일컬어지는 스페인의 싼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성당인데, 지금도 그리스도 교도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


나 자신도 이로부터 4년 뒤에 그곳을 방문했는데, 그땐 정말 지긋지긋하리만큼 많은 '피투성이의 종교화'를 보았다. 14,5세기에는 '레꽁끼스따'(Reconquista, 國土回復運動)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스페인을 중심으로, 사도(使徒)의 순교나 수난을 주제로 한 피비린내나는 그림들이 무수히 그려졌는데, 그것은 회교도와의 전쟁심리상태에 있던 그리스도교 진영의 시각적 선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아마도 십자군적 열광이라고도 할 수 있을 무엇이 있었다. 내가 구교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개 그런 의미이다.


하지만 카탈로그에 있는 해설을 보니 이 그림은, 1498년에 브뤼주 시청사의 시참사회실(市參事會室)에 걸 목적으로 위탁된 것으로 "이 그림은 무시무시한 리얼리즘에 의하여, 모든 판사와 시참사(市參事)들에게 영원히 타락•부패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그림은 신이나 교회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지상의 인간에게, 그들의 시민적 자치제도에 바쳐진 것이다. 부정부패에 내려지는 것은 신벌(神罰)이 아니라 인간들 스스로가 내리는 형벌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여기 표현되어 있는 것은 구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시 한자동맹의 자치상업도시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브뤼주 시민들의 각박하고 가열한 합리정신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또 북방 르네쌍스의 정신적 풍경이었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진 15세기 무렵부터 브뤼주는, 안트베르펜(Antwerpen)에 그 지위를 뺏긴 채 '죽음의 도시'라 불리는 침체 속으로 몰락해간다.


흔히 '문예부흥' '인간성 부활'이라 말하는 르네쌍스의, 몸 전체로 피를 철철 흘리며 근대를 향해 탈피해나간 추상열일(秋霜烈日)의 모습이 여기 있다. 나는 이 한 장의 으스스한 그림으로 하여, 중세로부터 근대로 이어지는 '서양'역사의 계승과 전환이 응축된 현장에 문득 맞닥뜨린 느낌이었다.


여행길에 무심코 들른 미술관이나 성당에서 갑자기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발길이 얼어붙는 경우가 있다. 한 장의 그림, 한 덩어리 조각상이 시공을 초월해서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내가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돌이켜보건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시작이었다.

◁ 호세 데 리베라 「성바르똘로메오의 순교」

그 뒤로 여행에 나설 때마다 마음을 쓰고 있건만 「캄비세스왕의 재판」 같은 주제의 그림은 아직 접하지 못했다.
다만, 1987년 5월에 바띠깐의 회화관(繪畵館)에서 매우 흡사한 구도로 된 그림을 발견했다.


이것은 성(聖)바르똘로메오의 순교가 주제인데, '피투성이의 종교화'들 가운데서 그 주제 자체는 흔해빠진 것이다. 그 대표격이 쁘라도 미술관에 있는 호세 데 리베라 (Jos de Ribera: 이딸리아에서 활동한 스페인 화가ㅡ옮긴이)의 작품이다(이 그림에 대해서는 성(聖)빌립을 그린 것이라는 이설도 있다).


하지만 바띠깐에 있는 그것은, 「캄비세스왕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위를 향해 누운 채 결박지어진 희생자의 다리 가죽을 벗기는 구도로 되어 있다. '성바르똘로메오의 순교'를 주제로 삼은 그림이 수없이 많이 있지만 이런 것은 달리 본 일이 없다. 「캄비세스왕의 재판」과 어떤 공통성이 있는지 혹은 또 당시의 처형방법과 관계가 있는지 흥미있는 일이기는 하나 거기까지 캐보지는 못했다.


헤랄드 다비드「삐에따」▷



브뤼주의 그 일로부터 5년이 지난 뒤(1988년 11월 29일), 스위스의 빈터투어에 있는 오스카 라인하르트 컬렉션에 들렀을 때 뜻밖에도 헤랄드 다비드와 재회했다. 소품인 「삐에따」였다.
제작연대가 1500∼10년이라니 「캄비세스왕의 재판」보다 적어도 2년 뒤에 그려진 것임을 알겠다.


그때까지 본 많은 삐에따 중에서도, 소품이면서도 투명한 고요로움이 마음에 와닿는 명품의 하나였다. 하기는 5년이란 세월이 지난 뒤에 그것을 보고 있는 내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터이지만.


가열한 사실정신은 이와같은 마음의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 실마리를 화가에게 제공했음직하다. 과묵한 장인적 연찬과 수련만이 보편성에 이르는 길을 열어주는지도 모른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나 한스 멤링의 아류쯤으로 생각하고 있던 이 화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창비 웹매거진/2002/6]

출전나의 서양미술 순례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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