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삶과 죽음/회화의 세계

[스크랩] 유디트, 여러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던 여성

ddolappa 2008. 3. 6. 03:32

 

유디트는 여러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던 여성이다. 어떤 이는 '팜므마탈'의 전형으로, 어떤 이는 애국심 넘치는 여성 영웅으로 표현하고, 또 각각의 그림들에 대한 해석 역시 차이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형태든 '힘쎈 남성을 <해치운> 여성'이라는 형상은 공통적인 듯 하다. 어제 유디트에서 클림트로 이어졌던 상상력이 한권의 책을 보게 했는데, <클림트, 황금빛 유혹>이라는 책이다. 저자는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는 성서에 나오는 사건, 즉 유디트의 행위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데, 클림트는 '사건이 아니라 유디트의 상태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래서 클림트는 '유디트의 전복성을 성적인 의미로만 한정짓고 단순화'하여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오직 쾌락만을 위해 남자의 목 혹은 그 목이 상징하고 있는 성기를 자르는 가학적인 이미지 뿐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클림트의 유디트를 잘 들여다보면, 다른 유디트와 달리 흥건한 핏자욱도, 두꺼운 목을 잘라낸 날카로운 칼도, 심지어는 그녀가 잘라낸 홀로페르네스의 목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잊을 정도로 강한 쾌감을 거침없이 표출하고' 있는 몽롱한 눈, 몽환적인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이 책의 작가는 '유디트의 행동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 떠나 심리적이고 개인적, 본능적 영역으로 들어오게 만'든 19세기 예술경향의 변화에서 찾는다.

 

작가는 클림트의 유디트와 비교하기 위해 카라바조와 젠텔레스키를 내놓는다.

 

 

'카라바조의 유디트는 연약한 여성이다. 칼을 쥐고 남자의 목을 자르고 있는 순간에도 얼굴에 망설임과 혐오감을 가득 담고 멈칫거리고 있다. 그 자세로 사람 목을 벨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반면 젠틸리스키의 유디트는 억세다. 굵은 팔뚝과 표정은 아무리 힘들어고 역겨워도 이 남자의 목을 자르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카라바조의 하녀와 달리 젠틸레스키의 하녀는 유디트의 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진짜로 한 남자의 목이 베어지고 있다.'

 

'남자들을 보자. 카라바조의 홀로페르네스는 고통과 저항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면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는 수동적이다. 술에 취해서 잠을 자다 느닷없이 당하는 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체념을 한 채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칼을 든 당신이 내 목을 자르겠다는데 내가 어쩌겠소.> 카라바조가 남성이고, 젠틸레스키가 여성이란 사실을 감안하면 두 그림의 차이에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

 

나는 저자의 대부분의 해석에 동의를 하면서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만은 없었다. 카라바조와 젠텔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젠텔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가 훨씬 더 격렬하고 저항적이기 때문이다. 입을 벌리고 '끽'소리 못하고 죽어가는 카라바조와 목을 비틀고 두 팔을 뻗어 발버둥치는 젠텔레스키를 비교해 보라.

 

내게는 젠텔레스키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것도 강한 남성에 의해 강간을 당했던 경험을 가진 여성이기에, 남성의 힘, 폭력성을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는 여성이었기에 두 그림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인다.

 

남성 카라바조가 그린 유디트는 일상적 통념(유약하고 예뻐야 하고...등등)의 여성이고, 그는 오로지 애국적 열정만으로 하기 싫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그래서 여성은 애국심이라는 고귀한 이념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이런 비현실적인 그림이 나온 것이다. 카라바조의 유디트가 주는 힘으로는 절대로 홀로페르네스의 두꺼운 목을 자를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뒤에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하녀가 상징하는 '의지'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젠텔레스키의 유디트는 일단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충분히 자를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그녀의 힘만으로는 서방세계를 모두 함락시킨 앗시리아 군대의 사령관인 홀로페르네스의 '힘'과 '폭력'을 당해낼 수 없다. 그래서 그녀의 하녀까지 온 힘을 다해 그를 누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젠텔레스키의 유디트는 목을 잘라내었고, 승리했다. 젠텔레스키가 여성이었기에 사실 가능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두 그림에서 성서에 나오는 영웅 설화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현실, 애국적 열정만으로는 쉽게 뛰어넘기 힘든 '성적 차별'이 녹아 있는 것을 본다.

힘든 '일'을 마치고 나서는 젠텔레스키의 유디트의 표정은 여전히 긴장되어 있고, 어깨에 둘러맨 칼은 언제든지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곳은 여전히 적진(남성들이 우글거리는)이기 때문일까?

 

 

 

내친 김에 다른 유디트를 함께 보자. 감상만 합시다.[펌]


 

 

 

보티첼리의 유디트

 

 

 

 

조르지오네

 

 
 

 

크라나흐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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