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임마누엘 칸트

[스크랩] 칸트와 마르크스의 `윤리적 개입`

ddolappa 2008. 5. 16. 04:18

칸트와 마르크스의 '윤리적 개입'

가라타니 고진(지음), 송태욱(옮김), <<윤리21>>, 사회평론, 2001.
E. 카멘카(지음), 이재현(옮김),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중원문화, 1986 재판.
cf. Eugene Kamenka, The Ethical Foundations of Marxism

 

칸트의 윤리학을 검토하면서 고진은 일상적으로는 혼용되는 도덕과 윤리라는 말을 구별한다. 그의 용법에서 도덕은 "공동체적 규범" -- 이는 '관습Sitte'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을 가리키고 윤리는 "'자유'라는 의무와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그에 따르면 칸트는 윤리를 주장했다. 칸트의 지상명령인 '자유' --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자유로운 주체]으로서 대하라'는 명제로 표현된다 -- 는 공동체의 규범을 따르는 것도, 인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것과 무관한 또는 그러한 타율을 벗어난 차원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고진은 자유라는 명령을 놓고 칸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킨다. "자본제 경제에서 타자는 단지 수단으로 취급된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자본제 경제를 지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칸트의 윤리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코뮤니즘에 대해서는 이 임노동(노동력 상품)의 폐기가 핵심이다... 임노동의 폐기란 바로 '타자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는 말의 현실적인 형태다...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윤리적인 개입니다. 즉 그것은 '자유'의 차원에서만 오는 것이다."

칸트와 마르크스를 연결시키는 시도가 처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진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 점은 20세기 초에 신칸트학파(마르부르크파) 철학자들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칸트 전집>>을 편찬한 칼 폴랜더Karl Vorländer의 논문 "Kant und Marx"를 참조할 수 있다). 고진이 설명하는 칸트 윤리학의 핵심은 대체로 수긍된다. 그러나 그것을 마르크스와 연결시키는 데에는 설명이 더 필요할 듯도 하다.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개인주의적이며, 주관적이라고 이해되곤 한다. 사회적 현실과 같은 실질을 배제한 채 윤리적 명령의 형식만을 제시한다하여 형식주의 윤리학이라 규정되기도 한다. 삶의 현실은 엉망인데 그 상황에서 자유의지만을 떠들고 있는 무기력이 지적되기도 한다. 마르크스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관계구조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고진은 <<자본>>의 서문을 인용한다: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발전을 '자연사적'[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파악하는 나의 입장은, 각 개인이 스스로 주관적으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여길지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그 피조물에 머물러 있는 바의 그 모든 관계들에 대한 각 개인의 책임을 다른 어떤 입장보다도 적게 묻는다." 이렇게 보면 칸트는 관계구조에 대한 파악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채 개인의 의지의 자유만을 말하고 있고, 마르크스는 의지의 자유는 도외시한 채 관계구조의 파악만을 주장하고 있으므로 두 사람이 만날 지점은 전혀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관계구조의 파악은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수행되는 일이다. 마르크스의 자연사적 입장을 따른다면 관계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는 사회과학적 파악으로부터는 도출 -- 이게 가능하다고 해 버리면 사실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 되지 않는다. 그저 관계구조를 아는데 그칠 뿐이다. 칸트 역시 윤리학적 명령을 자연으로부터 이끌어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고진은 이 두사람의 주장을 "윤리적 개입"이라 표현했을 것이다. 분명 그것은 '개입'이지 논리적 귀결은 아니다.

칸트와 마르크스의 윤리적 개입을 연결시키려면 최소한 칸트의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형식적 윤리학설에 현실의 구조에 대한 적극적인 파악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마르크스가 주장한 사회과학적인 이론들과 맞닿아 있는가, 마르크스가 칸트와 동일한 윤리적 요청을 가지고 있는가 등과 같은 의문에 답을 내놓아야 하는데 고진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칸트의 도덕법칙에는 이러한 생산관계를 바꾸자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다. 신칸트학파(마르부르크 학파) 철학자들 -- 예를들면 코헨 -- 중에서 칸트에게서 사회주의를 본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윤리적인 것이지 역사적 법칙(자연과정)의 필연은 아닌 것이다... 영미계의 윤리학이 칸트를 배척한 것은 사실 칸트 철학 안에 자본제 경제에 대한 비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고진의 논의는 상세한 논증을 동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칸트의 '세계시민적 견지'가 이러한 입장에 올라서 있음을 언급하며 그에따라 개인적, 주관적 윤리학설이 아님을 주장한다. 이렇게 본다면 칸트와 마르크스에 있어서는 '공공'의 영역을 끊임없는 재규정을 통해서 넓히는 일, 그에따라 사사화私事化를 최대한 막는 일, 모든 사태를 공식적 의제public agenda로 제시하는 일이 윤리적 개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된다.

마르크스는 생산이 조직화되고 착취되는 방식과 구조를 천착했다. 그런 다음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화 -- 국유화가 아니다 --'를 통해서만 왜곡된 인간관계를 되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회복의 상태가 공산주의 -- 이것은, 사적 소유는 그대로 두고 공적 통제를 도입하는,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분배문제에 치중하게 되는 사회민주주의와 구별되어야 한다 -- 라고 결론을 내렸다. '왜곡된 인간관계를 되찾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윤리적 개입은 많은 반대 논증에 봉착했다. 카멘카 -- 카멘카는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칸트적인 기질"을 지적하고 있다 -- 의 책은 그것들을 집약하고 있다.

우선 그는 마르크스주의 윤리학설을 다음과 같이 총괄적으로 평가한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우리는 윤리학적 상대주의, 진화론적 윤리학, 자결주의self-determination의 윤리학, 자기실현의 윤리학, 공리주의적 기질, 협동의 윤리학, 그리고 일종의 사회적 주관주의 등이 무비판적으로 뒤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이 논증되기 보다는 주장되거나 제창되었다." 한마디로 마르크스의 윤리학에는 왠만한 윤리학설이 잡탕으로 들어있는데, 그것도 큰목소리로 떠들어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카멘카의 이러한 평가는 타당한 것인가. 마르크스에 대한 카멘카의 논박을 두가지 정도 검토해보기로 하자.

먼저 '관계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입장에 대한 논박. 카멘카는 "인간이 자신의 능력에 너무 취하지 않고, 타인들의 현실적 경험적 욕망을 존중하며, 그의 정열과 모험을 제어할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전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최선의 행위일 것"이라 주장하면서 "제도화된 변혁과 기술적인 진보의 체제의 능력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카멘카의 이 주장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의 전형적인 개량주의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 자체로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사회적 긴장과 불의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커다란 혼란이나 혁명적 폭발"을 선택하는 것이 싫다는 뜻으로 읽으면 된다. 그런데 이 주장은 마르크스의 논의 전개를 반만 이해한 뒤에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먼저 생산이 조직화되고 착취되는 구조를 개념적으로 파악Begreifen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것을 전복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런데 카멘카는 구조로 인해 만들어지는 왜곡된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전복의 수단만을 문제삼는다. 이는 상대의 말을 잘라서 자기에에 유리한 부분만 논박하는 싸구려 논증이다.

다음으로 '인간적'이라는 개념에 대한 논박. 카멘카의 주장을 보자: "인간이 자신을 일종의 짐나르는 짐승이나 쾌락의 대상 혹은, 끝없는 경쟁에의 참가자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성을 거슬리는' 것은 아니다. 과거, 수많은 선남선녀들이 실제로 그래왔던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한다고해서 그들이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말에 실제적, 경험적인 의미로부터 끌어내지지 않는 도덕적 의미를 부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멘카는 여기서 말이 꼬이고 있다. 마르크스는, 카멘카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적'이라는 말에 도덕적 의미를 부과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그 말을 쓸 때는 선남선녀들이 옛날부터 어찌해왔는지와는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윤리학적 술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게도 사람이 수단화되는 것이 '인간성에 거슬리는 것' 아니겠는가.

대체로 보아 카멘카의 마르크스주의 윤리학 비판은 마르크스 이론의 뼈대와 그것의 현실적 형태 사이의 괴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는데 소련에서는 그게 아니더라'는 식의 대조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오랫동안 널리 유포되어 왔으므로 이제는 대중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윤리는 결국 현실세계에 대한 충실한 이해나 관계구조의 파악과는 다른 차원에 놓인 결단에의 요청이다. 그런 까닭에 칸트와 마르크스의 윤리적 개입의 요청은, 모든 인간관계가 물질화된 상황을 그대로 둔채 또는 현 체제가 오랜 옛날부터 그래왔다고 여기고 기술의 진보와 체제의 능력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최소한 물질화된 인간관계 그 자체라도 의문시하고 붙들고 늘어지며, 그에 대한 확실한 대안을 탐색해보는 것이 인간적인지를 묻고 스스로 답을 내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전자는 사이보그의 길이 아닌가 싶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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