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임마누엘 칸트

[스크랩] 칸트는 어떻게 로봇을 만들었나

ddolappa 2008. 5. 16.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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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현재는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주저는 3권의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판단력 비판》이다.

그는 흄의 비판을 받아들여, 이성이나 주관이 진리를 보증한다는 이성주의자의 생각을 '독단' 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경험이 진리를 보증해준다는 경험주의자의 생각을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떻게 보증될 수 있는가? 그는 이성이 과연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가 말한 '비판 철학' 의 출발점이다.


칸트는 어떻게 로봇을 만들었나

칸트의 옛 제자 오시모프가 로봇을 만들려고 어느 날 칸트를 찾아오는 데, 그것도 인간처럼 생각하는 로봇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전에 데카르트형 로봇과 로크형 로봇은 실패했다. why?
데카르트형 로봇은
로크형 로봇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분석판단은 주어에 이미 술어가 포함되어 있는 판단. 예)로봇은 스스로 움직인다.
- 경험없이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선험적인 것과 일치
- 어떤 새로운 지식은 얻을 수 없지만 선험적인 것은 확실하고 필연적이다.
종합판단은 주어에 술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명제. 예)로봇은 죽지 않는다.
- 경험적인 것과 일치
-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지만 경험적인 것은 불확실하고 필연성이 없다.

(로봇에 있어 선험적인 것은 연산 장치나 논리규칙, 경험적인 것은 정보와 자료)

따라서 올바른 판단을 하려면 양자를 융합해야 한다. 즉 필연적이면서 경험을 종합할 수 있는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다.

▷이성주의자의 '필연적이긴 하나 공허한 지식(선험적인 것=분석판단)'이나 경험주의자의 '풍부하나 불확실한 지식(경험적인 것=종합판단)'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선험적이면서 종합적인 판단'은 불가능할까?

가능하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그렇다.
1) 500+700=1200
2)작용과 반작용은 언제나 동일하다

수학의 모든 명제와 물리학의 원리는 선험적 종합 판단이다.

▷사물 자체와 현상
인식의 근원이 되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사물 자체(Ding an sich '물자체'라 하기도 한다)라 하고, 인간의 눈에 비친 대상의 모습, 인식된 대상의 모습을 '현상'이라 한다.
예) 뚱뚱한 백설공주와 거울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이 사물의 본래 모습과 같은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즉 인간의 인식기관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눈에 비친 사물의 모습(현상)만 알 뿐. 따라서 물 자체는 인식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인식이란, 대상에 상응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는 상식과 반대다.
즉 대상이 인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면, 이제 대상을 연구한다고 객관적인 지식이나 진리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거꾸로 인식과 인식작용을 연구해야 한다.

결론은 객관적인 진리, 올바른 판단을 하게 해주는 것은 인식이나 인식작용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 이제 문제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하게 해주는 인식작용이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감성''지성''이성'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대상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이미지(표상)를 갖는 인간의 능력을 '감성'이라 한다.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하는 모든 활동을 말한다.
- 감성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과 같은 선험적 형식이 필요하다.
예)로봇의 시각센서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분류하고 비교하여 그 관계를 파악함으로써, 그 정보를 지식으로 정돈해내는 인간의 능력을 '지성(Verstand, understanding)'이라 한다.
- 지성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범주'와 같은 선험적 형식이 필요하다. '범주'는 인간이 경험이나 정보를 분류하고 정돈하기 위해 사용하는 커다란 통이라 할 수 있다.
예)수박과 딸기의 크기 비교 - '크기(양)'란 범주

하나하나의 규칙이나 법칙을 넘어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원리로 담고자 하는 능력을 '이성' 이라 한다. 오성이 현상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규칙의 능력' 이라면 이성은 그 규칙을 어떤 하나의 원리 밑에 통일하는 '원리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성은 오성과 달리 경험에 제한되지 않으며, 경험을 넘어서까지 일반 원리를 찾아내려 한다.
- 이처럼 원리를 만들어내고 그것으로 판단이나 규칙을 하나로 모아 내려는 이성의 능력을 '이념'이라 한다. 이성은 경험을 넘어선 것, 즉 신, 영혼불멸, 정의, 자유 같은 것을 사유의 대상을 삼기 때문에 이율배반에 빠지기 쉽다.(서로 반대되는 두 개의 명제가 옳다고 증명되는 것을 일러 '이율배반'이라 한다)
예)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은 더 쪼갤 수 있다.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 사유하는 건 인간의 사유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 그런데 바로 그러는 순간 우리의 사유는 이율배반의 함정에 빠져버린다. 이율배반이 생길 줄 뻔히 알면서도 경험을 넘어서 이념과 원리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판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처한 이율배반적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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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10년간의 연구 끝에 오시모프는 멋진 로봇을 만들어 내지만 어느 날 그 로봇은 집을 나가고 말았다.
Why?
'사유란 스스로 하는 것이다.'란 명제와 '사유란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란 명제가 동시에 입력된 로봇은 두 개의 상반되는 명령 속에서 이율배반의 상황을 견디지 못해 달아났던 것이다.

스스로 사고하라는 명령만 따르기 위해서...

인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 아닐까?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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