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연구소 논문집 「인문학연구」4 ’98.1 2.
설화의 상상력과 민족적 창조력 임 재 해* 1. 설화의 상상력을 포착하는 상상력 설화의 세계는 넓고 깊다. 작품의 소재와 내용은 물론 형식과 유형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특히 설화의 유형은 그 목록화 작업만 하더라도 엄청난 분량이다. 더군다나 그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갈무리하고 있는 뜻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층위가 많다. 같은 이야기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제각기 다를 수 있는 데다가, 듣는 이가 어느 수준까지 이해하느냐 하는 문학적 수용 역량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1) 그러므로 설화를 두루 대상으로 삼아서 그 상상력을 파악하는 일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버거운 일일 뿐 아니라, 특정 유형의 설화 작품을 대상으로 상상력을 포착해내는 일도 여간 벅찬 일이 아니다. 상상력에 대한 인식도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어떤 문화가 형성될 때 그 뿌리가 되는 마음’을 상상력으로2) 합의할 수도 있지만, 설화와 같은 문학을 대상으로 상상력을 이해할 때는 ‘문학적 창조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문화 형성의 뿌리가 되는 마음을 상상력으로 간주할 때, 상상력은 곧 원형적 상상력을 말한다. 원형적 상상력에 의하여 문화가 생성되고 설화도 창작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상력 역시 문학적 창조력 구실을 한다. 원형적 상상력이 일정한 세계관적 인식에 기초를 두고 발휘되는 문화적 창조력이라면, 설화에 의한 문학적 창조력은 현재의 문화적 현상과 상상력을 토대로 발휘되는 서사적 형상화의 역량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초의 세계를 말하는 신화를 통해 원형적 상상력을 추적해야 할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전형적 설화 또는 지금 막 지어지고 있는 동시대 설화들을 통해 서사적 형상화의 문학적 창조력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형적 상상력의 틀은 두 가닥으로 분별되어 인식되기 일쑤이다. ‘집단적 무의식의 구조’를 일컫는 칼 융(C. G. Jung)의 원형이 있는가 하면, ‘모범적인 본보기(exemplary model)’ 또는 ‘전범(典範, paradigm)’을 뜻하는 멜시아 엘리아데(M. Eliade)의 원형이 있다.3) 융과 엘리아데는 원형을 이처럼 제각기 규정했지만, 크게 보면 서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함께 아울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융은 원형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동서고금을 초월하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무의식의 요소라고4) 한 데 비하여, 엘리아데는 원형을 천상의 신성한 존재 곧 하느님이 태초에 행한 신성한 본보기(devine model)라고 하였다.5) 원형에 대한 이러한 두 인식은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과 ‘천상의 신성한 보기’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엘리아데가 말하는 천상의 신성한 보기로서 원형은 융이 원형으로 규정한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으로부터 설정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선험적으로 갖추고 있다고 여기는 집단적 무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천상의 신성한 보기이다. 다시 말하면 엘리아데의 원형인 제의의 신성한 모델은 곧 칼 융의 원형인 인간의 집단적 무의식의 구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엘리아데는 원형을 종교 제의적인 신성한 것에서 찾고, 융은 꿈과 민담, 신화와 제의 등 인간의 무의식적으로 전승하는 문화 전반에서 찾는 차이를 지닐 뿐이다. 따라서 엘리아데의 원형 연구는 종교와 제의의 분석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칼융의 원형 탐색은 꿈과 민담의 분석으로까지 확산된다. 그러므로 두 원형의 개념은 동전의 양면처럼, 드러난 뜻매김만 고려하면 서로 상이한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 내포하고 있는 값어치를 따지면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집단적 무의식으로서 원형상이 신화와 종교 현상에 갈무리되어 있다든가, 이들 신화와 종교 현상의 실현 형태인 제의는 신성한 모델로서 원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원형적 상상력과 달리 문학적 창조력으로 설화의 상상력을 주목할 때에는 설화의 존재양식을 결정하고 서사적 형상화를 그럴듯하게 하는 이야기 창작의 역량을 말한다. 기록문학처럼 특정 작가에 의하여 일정한 시기에 창작 완성되는 개인작의 경우에는 문학적 형상화 역량만 문제될 수 있지만, 설화처럼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구비전승되는 동안에 계속해서 재창조되는 공동작의 경우에는 개인적 형상화 역량 못지 않게 집단적 전형화의 상상력도 문제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화의 상상력을 개성 있게 포착하려면 집단적 전형화의 상상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원형적 상상력에 대하여 이를 전형적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전형적 상상력은 민족적 세계관과 연관되어 있다. 시대와 사회를 뛰어넘어 우리 민족이면 누군가 공감할 수 있는 일정한 이야기의 틀이 있을 수 있다. 이른바 우리 설화의 유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별도로 있다면, 이는 민족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형성되고 전승되는 설화로서 전형적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독자적 유형을 포착하고 그 상상력의 정체를 밝히게 되면 상상력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와 상상력의 전형을 통해 우리 민족문화의 개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목적에 어느 정도 이를 수 있다. 원형적 상상력과 전형적 상상력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역량이라면 문학적 창조력은 앞으로 발휘하게 될 가능성의 역량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두 역량은 서로 배타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적 관계에 있다. 원형적 상상력을 토대로 문학적 창조력이 발휘되게 마련이며, 문학적 창조력이 축적되면서 원형적 상상력의 토대를 확장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설화에 의해 틀지워져 있는 원형적 상상력을 터득하지 못하면 민족적 창조력을 발휘할 수 없으며 우리 문학다운 문학을 창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화를 통해서 원형적 상상력의 정체를 여러 모로 밝혀낼 필요가 있다. 설화는 예사 문학과 달리 구비전승되는 문학이다. 따라서 갈래나 양식 또는 미적 범주도 기록문학과 다른 독자성을 지닌다. 구비문학은 수용자인 듣는 사람을 전제로 연행되고 연행될 때만 작품으로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기록문학처럼 관념적으로 수용자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면관계 속에서 동시적이고 현장적인 시공간의 범주 안에서 직접적인 대면 상황 아래 작품이 생산된다. 특히 설화는 민요와 달리 자족성이 없기 때문에 대상적 연행이 필수적이다. 이처럼 설화 작품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생산자와 수용자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존재하는 까닭에 대립적이거나 논쟁적인 관계 속에서 설화적 상상력이 발휘되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화가 이야기되는 현장을 의식하는 가운데 대립적 상상력과 논쟁적 연행을 주목하면서 설화의 상상력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할 필요가 있어서 말을 하는 것처럼, 설화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설화를 들려줄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 설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구연의 필요성이 설화를 생산하고 설화를 전승하며 설화를 재창조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화의 상상력은 설화의 연행 의도나 욕구에 의해서 발휘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 욕구는 이야기하는 집단이나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누가 왜 그때 거기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연행상황이 중요하다. 민족적 상상력이 이야기의 전승을 통해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에 따라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공간이 바로 이야기가 연행되는 현장이다. 그러므로 설화가 연행되는 현장의 역동성을 놓쳐서는 설화적 상상력의 실체를 포착할 수 없다. 소설과 같은 기록 서사문학과 달리 구비문학으로서 연행성을 고려한 설화의 상상력이 논의되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 설화 갈래의 준거와 상상력의 보편성 설화는 크게 세 가지 갈래로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하는 근거를 설정하는 데 따라 설화의 인식도 분별된다. 설화를 자아와 세계의 대결로 볼 때, 신화는 자아와 세계의 상호우위에 있는 데 비하여 전설은 세계의 우위, 민담은 자아의 우위로 포착된다. 이런 관점에 서면 자아와 세계의 관계 설정이 곧 상상력의 원형이다. 문학 작품은 어느 경우에나 자아와 세계의 대립으로 존재한다고 보고 그 대립적 구조의 양상에 따라 문학 일반은 물론 설화의 갈래도 분별된다고 보는 것이다.6) 그 결과 설화의 갈래는 아래와 같이 인식된다. 신화는 자아와 세계가 상호 보완적인 성격 또는 동질성을 갖도록 대결하여 자아와 세계에 일관된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고, 전설은 자아와 세계가 세계의 우위에 입각해서 대결하여 세계의 경이를 보여주는 것이고, 민담은 자아와 세계가 자아의 우위에 입각해서 대결하여 자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7) 이와 달리 설화를 의식과 표현의 결합으로 볼 때,8) 신화는 신성시하는 내용을 사실답지 않게 초월적으로 표현하는 데 비하여, 전설은 사실로 여기는 내용을 사실답지 않게 초월적으로 표현하며, 민담은 허구적으로 여기는 내용을 사실처럼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설화는 의식과 표현의 어긋진 만남 속에서 문학적 양식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신성시되는 이야기가 사실처럼 그럴듯하게 이야기되면 신성시될 수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초월적으로 이루어질 때 신성성을 획득할 수 있다. 신화는 반드시 초월적으로 이야기될 수밖에 없다. 사실로 여기는 전설이 사실처럼 이야기되면 설화로서 충격적 재미를 자아낼 수 없고, 허구로 인식되는 민담이 사실성에 바탕을 둔 그럴듯함마저 상실하게 되면 한갓 말장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거짓 같은 거짓’이나 ‘사실 같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 같은 사실’, 또는 ‘사실 같은 거짓’이라야 설화로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화는 사실성과 허구성이 긴장관계 속에서 대립적으로 존재해야 문학성이 획득된다고9) 하는 원형적 상상력에 입각해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결말의 성취 관계를 통해 볼 때, 설화는 여전히 세 가지 갈래로 분별된다. 신화의 경우에는 위대한 인물이 세계와 대결하는 가운데 세계와 화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일구어낸다. 그러한 세계는 우주나 국가와 같은 거대한 현실로 존재한다. 그 세계는 한결같이 대단한 것이어서 예사 사람들은 이룰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초월적인 존재인 신격이 성취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전설의 주인공은 예사 사람 이상의 탁월한 역량을 지녔지만 예기치 않던 사태에 부딪쳐서 좌절한다. 사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바위 구멍에서 쌀이 나왔는데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던가, 못물이 단오가 되면 붉었는데 지금은 붉어지지 않는다던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모두 자연물 전설이다. 따라서 전설은 비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다가 합리적인 것에 부딪힌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증거물은 합리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은 누구나 현실적인 것에서 초월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신비한 것을 추구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영웅들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서 실패하게 마련이다. 대단한 인물의 한계를 나타낸다. 인간은 아무리 뛰어나도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잘난 인물의 자만심을 경계하는 것이 전설이다. 민담은 사정이 다르다. 일상적이거나 예사 이하의 사람들이 등장하여 큰 성취를 이루는 데서 이야기가 끝이 난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길을 떠난 고아가 마침내 성취하여 잘 살았다던가, 가난하게 살던 나무꾼이 어떤 일로 횡재로 하여 부자가 되었다던가 하여, 어떤 문제가 우연한 일로 해결되거나 또는 뜻밖의 원조자가 나타나서 큰 성취를 이룬다. 운명을 개척하는 데 낙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이 뛰어나지 않고 가문이 미천해도 자기 맡은 일을 부지런히 하다가 보면 성공하게 된다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 민담이다. 그러므로 전설에서는 위대한 인물이 실패로 끝나는 데 비하여, 민담에서는 예사 인물이 크게 성공하게 된다. 타고난 능력을 믿고 자만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전설이라면, 무능하고 하찮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민담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인식과 설화의 갈래에 따른 반전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도 지니고 있지만 인간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미리부터 절감하고 좌절하거나 자신의 역량을 지나치게 믿고 자만심에 빠져서 날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좌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고 자만심으로 들떠 있는 사람에게는 한계를 일깨워주어야 한다. 그러자면 못난 사람이 실패하고 잘난 사람이 성공하게 되어서는 이야기로서 효과도 없고 문학적 반전의 묘미도 없다. 마치 사실을 사실처럼 이야기하거나 거짓을 거짓처럼 이야기해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처럼, 못난 사람은 성공하고 잘난 사람은 실패해야 이야기 거리가 되는 것이다. 자연히 이야기의 서사적 전개는 반전을 이루고 문학적 형상화를 획득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잘난 인물의 실패를 통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주고 못난 인물의 성취를 통해서는 인간의 가능성을 심어주는 것이 설화적 상상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보편적인 것이자 민중적인 것이다. 지배층에 속하는 양반들의 경우는 반드시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양반들도 이들 전설처럼 잘난 사람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자신들의 존재 기반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촌 어른들은 전설을 이야기하더라도 훌륭한 선조들의 탁월한 성취를 자랑삼아 이야기하기 일쑤이다. 반면에 민중적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잡성스러운 이야기라 하여 잘 하지 않거나 우스개로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민촌 사람들은 오히려 못난 사람들의 성취담을 즐겨 이야기한다.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10) 서애와 겸암의 형제 이야기처럼 둘다 대단한 양반 가문의 인물이라도 그 사회적 성취 정도에 따라서 실제와 어긋지게, 서애는 영의정이되 무능한 인물로, 겸암은 시골집에서 짚신이나 삼고 지내되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이인으로 양극화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민중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11) 그러므로 설화 전반이 인물의 지체와 결말의 성취가 어긋지게 반전 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민중에 의하여 생성되고 전승되었다고 하는 민중문학으로서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3. 신화의 서사구조와 세계관적 상상력 설화가 서사문학의 한 양식이라면, 설화의 상상력은 서사구조를 통해서 형상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설화의 유형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그 서사구조를 포괄적으로 일반화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설화의 유형마다 서사구조가 다르다고 할 만하다. 따라서 한국인의 상상력을 이해하기 위한 대상으로 기능적인 구실을 할 수 있는 유형만 한정해서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원초적 상상력을 나타내는 설화의 서사구조는 아무래도 신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화 가운데에서도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는 건국신화보다 천지개벽 신화나 인류시조 신화와 같이 원초적 세계의 생성과 구조를 다룬 신화를 주목하는 것이 한층 원형에 가까운 상상력을 포착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들 신화는 신화의 본디 양상대로 굿의 현장에서 구송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형식도 원초적이다. 박봉춘 구술의 ‘초감제’를 보면 태초의 천지개벽 상황이 자세하게 서술된다.12) 천지가 개벽하는 과정을 노래한 대목을 천지개벽신화라 할 수 있다. 이를 구송 단락에 따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이 때 구송 단락이란 ‘어떠한 것이 천지혼합입니까?’, ‘어떠한 것이 개벽이뇨?’와 같이 신화가 구송되는 과정에서 문답 형식으로 줄거리가 전개되어 질문과 대답에 따라 자연스레 단락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1. 천지가 혼합하여 하늘과 땅이 맞붙어 있는 혼돈 상태이다. 2. 붙어 있던 하늘과 땅이 떨어져서 천지가 개벽한다. 3. 음양의 교섭으로 천지가 개벽하면서 천지인이 제각기 열린다. 4. 하늘이 점점 맑아져 청색을 이루며 모두 삼십 삼천으로 갈라진다. 5. 땅에서 산이 생기고 물이 나서 산수를 형성한다. 이러한 단락의 맥락만 간추려 보면 (1)개벽 이전의 혼돈 상태, (2)천지가 개벽하는 자력적 이치, (3)하늘과 땅, 사람이 열리는 양상, (4)개벽후 하늘의 모습, (5)개벽후 땅의 모습으로 전개된다. 이를 한층 추상화하면 혼돈 - 개벽 - 천지인 - 하늘 - 땅의 서술로 이어진다. 이것이 천지개벽 신화의 서사 구조이자 우주 공간의 형성에 대한 원초적 인식의 순서이다. 우리 신화의 서사 구조는 ‘혼돈’의 ‘하나’에서 비롯하여 ‘개벽’의 ‘둘’로 분리됨으로써 마침내 ‘천지인’의 ‘3재’를 구성하게 된다. 물론 하나의 혼돈 안에는 음양이 ‘대대’ 관계를 이루는 ‘±’의 상태로 존재한다. 둘로 개벽하게 되면 하늘과 땅으로 구체화되어 음양이 ‘대립’ 관계를 이루는 ‘+ : -’의 상태로 존재한다. 음양의 대립은 마침내 하늘과 땅, 사람으로 생성 발전하여 음양이 ‘조화’ 관계를 이루는 ‘+ : ± : -’의 상태로 구조적 안정을 이룬다. 이러한 서사적 전개 과정의 세 단계를 “음양의 혼돈 상태인 ‘잠동(潛動)의 우주’ 하나에서, 음양의 교섭에 의하여 하늘과 땅을 개벽하는 ‘생성의 우주’ 둘을 거쳐, 마침내 개벽에 의하여 조성된 하늘과 땅, 인간이 상호교섭하며 정립되어 있는 ‘생동의 우주’ 셋에 이른 셈”이라고 볼 수도 있다.13) 천지개벽이 완성되는 세 번째 단계에서 천지인의 3재가 조화를 이루는 데도 불구하고 ‘생동하는 우주’의 상태로 포착한 까닭은 여기서 우주의 형성이 멈추거나 고정적인 상태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발전하기 때문이다. 천지가 개벽되어 천지인의 3재로 세계의 큰 구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되, 세계의 큰 구조를 이루는 3재의 각 부분들은 다시 자기 세계 안에서 생성되고 분리되어 독자적 세계를 이루고자 한다는 점에서 생동하는 실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따라서 3재론적 세계의 구조를 그 구성 요소별로 자세하게 주목하면 다시 개벽신화의 서사 구조와 같은 전개를 보인다. 다시 말하면 천지개벽 신화는 천지의 개벽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개벽의 결과로 존재하는 하늘과 땅, 사람에 대한 세계의 개벽을 다시 서술하는 것이다. 개벽신화의 이러한 서술방식은 마침내 ‘서사 구조의 서사 구조’를 다시 주목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럼 천지인 3재 가운데 하늘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구체적 서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다룬 개벽신화의 서사 구조 분석의 결과를 이해하고 있으면 쉽게 하늘의 세계에 대해서도 구조적 인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세계가 음양으로 생성되어 천지인 3재로 이루어져 있듯이, 하늘 또한 3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날은 어떤 것이 하날이냐 청청 맑은 청하날이요 잉은이도 삼하날 지하에도 삼하날 지자도 삼하날 삼십삼천구천서른세하날, 이것이 하날이외다.14) 하늘은 천지인 3재의 하나이자 3재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 하늘이 다시 3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하늘이 크게 셋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늘 셋이 다시 셋으로 분화되어 있다. 거듭 말하면 푸른 하늘이 “하늘 위에도 세 하늘, 땅 아래도 세 하늘, 땅 위에도 세 하늘”이15)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인의 하늘과, 그 하늘에 또 세 하늘이 있는 것은 물론, 땅의 아래 위에도 제각기 세 하늘이 있어 모두 열 개의 하늘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나뉘어진 하늘은 열 하늘이 아니라, ‘삼십삼천구천서른세하날’이다. 수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엄청나게 많은 수의 하늘을 나타내되, 계속해서 그 하늘이 3으로 분화되어나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자동복제의 원리에 따라 자기증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카오스 이론에서는 프랙털 현상이라고 한다.16) 하늘은 이렇게 계속해서 3으로 분화되어 존재하는 까닭에 ‘삼십 삼천 구천 서른 세 하늘’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프랙털 현상에 따라 세계를 묘사하고 서술하는 방식은 일관되어 있다. 천지인의 하나인 땅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다고 서술하는가. 다음 단락인 땅의 모습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하늘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땅은 백사지땅 천지간에는 무엇이 갈입니까, 산도 수도 �이라 산수중에 무엇이 몬저 낫소리까 구별못하옵니다 산이 나고 물이 낫소니 산섭에 물이 나고 물 속에 산이 낫스니 산으로 몬저 셍기겟나니다17) 서사적 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늘의 묘사와 땅의 묘사는 서로 다른 것 같으나, 음양론에 의해 생성되고 3재론적 구조의 프랙털 이론에 입각해서 세계를 설명한다고 하는 논리를 염두에 두고 보면, 땅의 세계도 하늘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서술되고 있음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땅 곧 천지 사이에 존재하는 지상의 세계는 무엇으로 분별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 산과 물이 분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땅의 원초적 모습이라 할 수 있는 백사지땅은 산과 물, 곧 양과 음이 분별되어 있지 않은 혼합 상태이다. 개벽 이전의 세계와 같은 혼돈상황이라 해도 좋다. 땅은 산과 물로 분별되는 것이 천지개벽과 같은 질서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인가. 산이 먼저인지 물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구별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산이 나고 물이 났다고 하여 산기슭에 물이 났다고 하는가 하면, 반대로 물 속에 산이 났다고 하여 모순된 진술을 하기도 한다. 형식논리로 보면 모순이지만 실상을 고려하면 이치에 합당한 진실이다.18) 천지가 혼합 상태에서 개벽되듯이 산과 물은 선후관계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산과 물이 혼합되어 있는 원초적 땅에서 산과 물이 제각기 생겨나 산(+)과 물(-), 땅(±)의 3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이 있어야 산 기슭에 물이 흐를 수 있고, 물이 흘러야 산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산(+)과 물(-)은 본디 땅(±)에 내재되어 있는 실체인데,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산과 물로 분리되었을 따름이다. “산섭에 물이 나고 물속에 산이 낫스니”라는 대목은 천지가 혼합한 상태에서 음양의 이슬을 내면서 서로 교섭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렇게 교섭하여 땅은 산과 물로 분화된다. 그리고 그 산과 물은 다시 “산중에는 천하명산”과 같이 다양한 산의 세계를 이루고, “수중에는 서강물위”라 하여 다양한 물의 세계를 이룬다. 이때 문제되는 백사지땅은 천지개벽 신화에서 하늘(+)과 상대되는 ‘용(用)’으로서 땅(-)이 아니라, 산과 물로 개벽되어야 할 ‘체(體)’로서 땅이므로 산과 물의 음양이 혼합되어 있는 땅(±)이다. 따라서 땅의 변화 과정도 천지개벽의 진화론적 변화 발전의 과정과 같은 논리와 순서로 서술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천지의 혼합 상태가 ‘대대적’ 음양 관계의 ‘체(±)’를 이루고 있다가 하늘과 땅의 ‘반대/대립적’ 음양 관계의 ‘용(+ : -)’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원초적 백사지땅(±)에는 산과 물의 요소가 ‘대대적’ 음양 관계 속에서 ‘체’를 이루며 내포되어 있다가 마침내 산과 물의 대립적 형상으로 분리되어 현상화된 것이 땅의 실상이다. 그리고 그 산과물은 다시 분화되어 다양한 산과 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계의 구성을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전체적 서사 구조나 구성 요소들을 제각기 설명하는 부분적 서사 구조도 동일한 체계와 세계관적 인식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신화 속의 모든 세계는 삼재론적 구조로 끊임없이 분화되어 반복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프랙털 현상의 세계로 포착된다. 이러한 서사 구조의 원리를 논리적으로 일반화하면 아래와 같은 체계를 이룬다.
1. 천지가 맞붙은 혼합( ± ) → 천지혼합으로 하늘과 땅이 맞붙어 있다. 2. 천지의 대립과 생성( + : - ) → 하늘과 땅이 교섭하여 천지가 개벽한다. 3. 천지인의 3재 구조( + : - : ± ) - 천지인이 일정한 시기와 방향으로 열린다. 4. 천지인 가운데 하늘( + ) 4.1. 하늘이 분별없이 혼합( ± ) - 하늘은 맑은 청하늘이다. 4.2. 하늘의 대립과 생성( + : - ) : 하늘이 음양으로 교섭하여 하늘이 개벽한다. 4.3. 세 하늘의 3재 구조( + : - : ± ) : 삼십삼천 구천 서른 세 하늘이다. 5. 천지인 가운데 땅( - ) 5.1. 산수 분별없는 땅의 혼합(±) - 땅은 백세지땅이다. 5.2. 땅의 대립과 생성( + : - ) - 산과 물이 서로 교섭하여 생성된다. 5.3. 산과 물, 땅의 3재 구조( + : - : ± ) - 산과 물이 생겨나 땅의 세계를 이룬다. 6. 하늘(+)에 해(+)와 달(-)이 제각기 둘씩 있다. 단락 6도 분석하면 같은 서사 구조를 이루고 있다. 해(+)와 달(-)이 제각기 둘이어서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그 가운데 하나씩을 떼어내서 별(±)을 만듦으로서, 일월성( + : - : ± )의 3재 구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 신화의 서사 구조와 세계관적 인식은 음양론적 생성론과 삼재론적 구조론에 입각하여 부분과 전체,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자동자기복제 논리로 포착되는 카오스 이론의 프랙털 현상으로 질서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 신화가 현대 우주물리학의 성과인 카오스 이론을 전제로 형성된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원형적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신화의 내용이 결과적으로 이 이론과 합치되었을 따름이다. 여기서 거론된 음양론이나 삼재론도 마찬가지이다. 4. 창세신화에 나타난 우주론과 원형적 상상력 신화에 대한 엘리아데의 해석처럼 우리의 천지개벽신화 역시 혼돈에서 질서로 변화되어 조화로운 상태를 이룬다. 그러나 신의 창조 행위로서 혼돈에서 질서 상태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음양의 자력적 교섭에 의해서 저절로 변화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신화의 원형은 독자성을 지닌다. 스스로 그렇게 음양이 교섭하고 하늘과 땅이 분리되어 사람이 출현하며, 분리된 천지가 질서를 찾아가는 자연적 이치가 우리 민족이 집단적 무의식을 토대로 상상해낸 신성 모델로서 원형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천지 또는 우주의 형성론은 천지창조신화처럼 조물주의 의지에 따라 피조물로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천지가 음양의 교섭에 의하여 자력적으로 개벽되었다는 개벽론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창조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개벽론적 세계관이 우리의 원형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면, 다른 신화에도 이러한 세계관이 일관되게 나타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주론은 생성론과 구조론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천지개벽신화를 이와 같은 논리로 나누어 보면, 우주 생성에 대한 인식은 음양론에 입각해 있으며, 우주 구조에 대한 인식은 삼재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리도 다른 신화에 일관되게 나타나므로 민족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일월조정신화를 보면 음양론과 삼재론이 한층 논리적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지개벽 신화 다음, 곧 위의 단락 5에 이어서 해와 달이 둘씩 만들어지는 것은 음양의 부조화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낮에는 더워서 죽고 밤에는 추워서 죽는다. 이를 해결하는 주체가 천지왕으로서 하늘이자 양이다. 천지왕은 지상으로 내려와 땅이자 음인 바지왕과 혼인한다. 천지왕과 바지왕은 마치 천지개벽의 과정에서 하늘과 땅이 제각기 내놓는 음양의 이슬이나 다름없다. 새로운 생성이 잉태된다. 음양의 교섭으로 천지가 개벽하고 인간이 등장하듯이, 천지왕과 바지왕의 혼인으로 대별왕과 소별왕 형제를 낳는다. 음양의 교섭과 생성의 결과로 천지인의 삼재를 이루듯이, 하늘과 땅의 두 신이 교섭하여 아들 형제를 낳아 천부(天父)․지모(地母)․자녀(子女)의 삼재를 이룬다. 여기서 천부지모(天父地母) 사상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천지왕은 아버지고 바지왕은 어머니로서 아들 형제가 아버지 천지왕을 찾아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천지왕과 바지왕이 천지, 음양, 부모로서 해와 달에 해당된다면, 아들 형제는 별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름조차 대별왕과 소별왕이다. 대별왕 형제가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면서 해와 달 또는 음양의 질서를 바로잡고 별을 만들어 천체의 운행을 순조롭게 만듦으로서 천지개벽에 이어 일월조정의 작업과 별을 만드는 작업이 온전히 끝난다. 그 과정은 천지개벽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음양의 교섭으로 생성되고 그 결과는 3재론의 구조를 이룬다. 다만 천지개벽의 내용과 달리 간단하지 않고 한층 복잡할 따름이다. 이를테면 천지왕과 바지왕이 자식을 낳아서 부․모․자의 3재를 이루기 위해 천지왕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며, 해와 달을 조정하여 별을 만들고 일․월․성의 3재를 이루기 위해 별왕 형제들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린다. 이렇게 오르내리는 것이 일종의 음양 교섭이며, 그 결과 음양의 대립 관계가 구조 조정을 이루어서 마침내 3재론적 구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천지개벽의 과정에서 천지의 음양 교섭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천지왕과 바지왕의 결합으로 대별왕과 소별왕이 태어나는 것은 바로 천부지모 사상에 입각한 생성론인 것처럼, 천지의 음양교섭으로 천지가 개벽하고 인간이 출현하여 천지인의 3재를 이루는 것도 결국 천부지모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로는 청이슬이 내리고 땅으로는 흑이슬이 솟아나 서로 합수가 되어 만물이” 생겨났다고19) 구송하는 천지개벽의 대목은 ‘천부지모’ 또는 ‘천남지녀’로서 음양의 교섭과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20) 5. 인류시조신화의 자력적 생명관과 진화론적 상상력 천지가 자력적으로 개벽하고 우주의 천체들이 일정한 논리에 따라 발전되어 진화되고 바로잡혀서 지금과 같은 우주 질서를 이루듯이, 인류시조의 출현도 같은 논리와 상상력에 따라 인식되고 있다. 인류시조를 다룬 인류시조신화는 김쌍돌 구연의 ‘창세가’ 와 강춘옥 구연의 ‘셍굿’이 있는데,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유형이므로 제각기 주목할 만하다. <김쌍돌이본> 1. 미륵님이 금은 쟁반을 제각기 두 손에 들고 축수를 하였다. 2. 하늘에서 금은 벌레가 다섯 마리씩 제각기 쟁반에 떨어졌다. 3. 그 벌레들이 자라서 금벌레는 남자가 되고 은벌레는 여자가 되었다. 4. 이들 남녀가 장성하여 부부를 맺어 세상 사람들이 생겼다.21) <강춘옥본> 1. 천지가 개벽할 때 사람도 생겼다. 2. 사람이 생길 적에 어디서 생겼는가. 3. 천지 압록산 흙을 모아서 남자를 만들었다. 4. 여자는 어찌 생겼는가. 5. 여자를 만들었다. 6. 사람들이 만가지 물건을 만들어 먹고살았다. 7. 사람들이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22) 두 자료 가운데 흔히 김쌍돌 구연의 ‘창세가’를 가장 원형 또는 고형으로 보거나23) 독창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강춘옥의 ‘셍굿’은 외국 신화소의 이입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24) 강춘옥본은 성서 창세기의 인간창조신화와 같다는 논의까지 있어서,25) 이래저래 민족신화로서 정체성을 인정받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신화의 문맥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중국의 여와신화나 기독교신화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도 아니며 창조론적 세계관에 입각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김쌍돌의 창세가보다도 더 원초적인 인류기원 신화이자 최초의 인간이 자력적으로 생겨나는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때나 그 시절에는 새가 말이 말을 하고 나무들이 걸음 것고 烏鵲까지 말살하고 말 머리는 뿔이 나고 쇠 머리느 모래기(말 갈기) 돋고 달(雉) 그 머리느 귀가 나고 개머리어(에) 벳이 돗는, 이런 時節입니다. 그 옛날에 史蹟이 그렇고, 인간 사람이 하날이 열릴적에 子어方으로 열리시고, 이 땅이라 벽(생기다)할 적에 축방이(丑方)로 벽합시고 사람으느 寅方으로 범을시게 놓고, 이 天地를 개벅(開闢)하고 사람이라 옛날에 생길 적에 어디서 생겼음니다(까). 天地 암녹山에 가黃土라는 흙을 모다서 男子를 만들어 노니 女子 어찌 생산될까? 女子르 만들었음니다. 흘기가 사람이 되는대로서, 살 동안에 따에서 만가지 물건을 내서 잡숫고 살아 노이러가다가, 사우(死后)에 떠나므느 그따에 도로 늘어가 흘글 보태게 되였읍니다.26)
인용 부분의 절반 가운데 전반부는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 상황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람이 생겨나기 이전의 옛날 사적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잘 알아야 사람의 기원에 관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서론적 단락 1 이전의 상황을 보자. ‘그때나 그 시절에는 새가 말을 하고 나무들이 걸음 걷고 …… 개 머리에 벼슬이 돋는 이런 시절입니다. 그 옛날 사적이 그렇고’ 라고 하여, 인류시조가 처음 출현하는 상황을 “이런 시절” 또는 “사적이 그렇고”하여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태초의 상황 속에서 다른 단락들의 내용도 이해되어야 한다. 그 시절에는 나무가 걸어다니고 새가 말을 한다고 하지 않은가. 나무나 새와 같은 동식물들이 다 인격을 갖춘 존재로서 영성(靈性)을 지니고 있다. 이는 곧 모든 자연물에 인격성과 영성을 부여하고 있는 개벽론적 세계관과 일치한다. 이들 나무와 짐승들도, 여와신화처럼 여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저절로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생겨나기 전에 이들 동식물을 만든 신격도 없고 만들어지는 과정도 없다. 태초부터 사람에 선행하여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람도 저절로 생긴다고 보는 까닭에 “어디서 생겼는가” 질문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자연스런 발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황토라는 흙을 모아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만든 주체가 없으므로 저절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흘기가 사람이 되는대로서”라고 하여 흙이 스스로 변해서 사람이 되었음을 말한다. 나무가 걸어다니듯, 황토흙도 천지(天地)와 강산(江山)처럼 음양의 이치가 맞아떨어지는 곳에 있으면 자력적 생명력에 의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흙이 자력적으로 사람이 되어 평생을 살다가 죽게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류시조 신화의 서사 구조는 인간이 생겨날 때 어디서 생겨났다가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공간적 세계관을 말하는 것으로서,27) 그 공간을 땅과 흙에 둠으로써 전능한 하늘의 창조주보다 땅의 생명력을 중요시하는 자연관이 두드러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땅이 살아 있어서 모든 생명을 낳고 또한 품는다는 지모신(地母神) 사상이 토대가 되어 형성된 신화라 하겠다. 김쌍돌의 창세가에 갈무리되어 있는 인류시조 신화는 강춘옥본에 비하여 후대적으로 변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름 없는 거인신이 미륵이라고 하는 불교의 신격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28) 신격이 인간의 출현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자연의 자력적 생명관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앞의 신화에서 상당히 문화적 변화를 겪었다. 서대석은 하늘과 땅이 미륵에 의하여 분리되었으므로 하늘과 땅이 분리되기 이전에 존재했던 미륵을 창조주라고 하였으며,29) 조동일 또한 단락 1 이전의 천지개벽 신화 부분을 두고 미륵이 “천지 미분의 혼동을 바로잡아 하늘이 하늘이고, 땅이 땅이게 한 창조자”라고 하였지만,30) “하늘과 땅이 생길 적에 미륵님이 탄생한즉” 창조라고 하기 어렵다. 이처럼 하늘과 땅, 미륵은 동시적으로 생겼는데, 미륵이 하늘과 땅을 창조한 창조주라 할 수 있는가. 실제로 미륵은 창조주로서 초월성을 지니지 못했다. 다만 하늘과 땅을 붙지 않도록 기둥을 받치는 거인신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창조주와 구별하여 창세주 또는 조화주라 일컬은 바 있다. “창조주가 ‘무’에서 완벽한 우주 또는 자연을 창조하는 조물주라면, 창세주는 부조화스러운 우주 또는 자연을 조화로운 자연 상태로 변화시키는 조화주라 할 수 있다. 거듭 말하면 창조주가 신격으로서 절대성을 지녔다면, 창세주는 어느 정도 자연을 변화시키고 적응하는 인격으로서 한계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31) 미륵은 하늘과 땅이 서로 붙지 않도록 구리 기둥을 세우고 해와 달을 하나씩 떼어다가 별을 만드는 능력도 지녔으되, 옷이 없어 옷감을 마련하여 옷을 짓는 데도 시행착오를 거듭할 뿐 아니라, 불과 물의 근본을 몰라 생쥐에게 물어서 아는 한계를 보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미륵이 개입하여 사람이 출현하게 되는데, 단락 1에서 보는 것처럼 미륵의 기도로부터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자 단락 2와 같이 하늘에서 금벌레와 은벌레가 미륵이 들고 있는 금쟁반과 은쟁반에 제각기 다섯 마리씩 떨어진다. 금은 벌레의 생성은 천지개벽 신화의 음양론적 생성구조와 일치한다. 미륵이 하늘에 축수하였다는 것은 땅의 미륵과 하늘의 신이 음양의 교섭을 했다는 것을 말한다. 천지의 두 신격이 서로 교감한 결과 금은벌레가 생겨난 것이다. 금은쟁반과 금은벌레 또한 음양을 상징한다. 금쟁반이 해라면 은쟁반은 달이다. 해와 달의 음양 교섭에 의하여 금은벌레가 생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륵은 금은벌레의 창조주가 아니라 음양론적 생성론의 자연관에 입각하여, 금은벌레가 출현하게 하는 보조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조화주인 셈이다. 미륵과 하늘의 교감으로 또는 해와 달의 교감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생겨남으로써 천지인의 삼재론적 세계상을 이룬다. 개벽신화에서 천지인의 3재가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아서 일월이 만들어지고 다시 조화롭게 일월이 조정되는 쪽으로 진화 발전되듯이, 금벌레 은벌레도 진화 발전한다. 벌레들이 점점 자라서 단락 3에서처럼 남녀의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물론 미륵의 개입도 없이 벌레 스스로 자력적 변신을 한 것으로 일종의 돌연변이라 할 수 있다. 벌레가 자라서 인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미물의 생명체들이 오랜 기간 진화를 거쳐서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하게 된 과학적 진화론과 같은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돌연변이를 거친 남녀가 성장하여 부부로 결연을 맺어 세상사람을 낳았다는 것이 단락 4이다. 금은벌레가 변신한 남녀의 음양적 결연에 의하여 비로소 세상사람이 등장한다. 벌레의 출현과 같이, 음양의 생성론에 의하여 사람도 그렇게 같은 방식으로 출현한 것이다. 이러한 생성론은 개벽신화에서부터 일관된 것이다. 천지인의 존재에 대한 세계관적 인식도 한결같다. 조물주의 인간 만들기가 창조론이라면, 벌레와 같은 생명체의 자력적 출현 및 그 생명체의 돌연변이에 의한 인류시조의 등장은 진화론이다. 우리 신화가 창조론이 아닌 개벽론 또는 진화론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었다는 것은 이미 개벽신화에서 일월조정 신화, 인류시조 신화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양상이므로, 민족신화로서 세계관적 일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개벽론적 진화론은 창조론적 완벽론의 신본주의와 다른 인본주의적 상상력에 입각해 있다. 성서의 인류시조신화에서는 인간이 잘못하여 낙원에서 내쫓기고 인간이 고통받으며 살게 되었다는 원죄의식을 심어주는 동시에 인간은 신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존재로 그리는 반면에, 우리의 인류시조신화에서는 인간의 실수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이 세상자치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죄를 지어 지금의 인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신격의 존재에 문제가 있음을 제기한다. 그러므로 앞의 신화가 신본주의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 신화는 인본주의적 상상력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단군신화에까지 이어져서 환인의 아들 환웅도 인간세상을 동경하여 홍익인간의 구현을 이상으로 삼고, 곰과 범 등 동물들도 인간세상을 동경하여 사람이 되고자 동굴 속에서 시련을 겪는다. 그 결과 환웅은 인간세상에 내려와 신시를 열고 천왕이 되며 곰도 마침내 사람으로 변신하여 단군의 시조모가 된다.그리고 고조선의 시조왕이 된 단군은 천신으로서 신격(神格)인 환웅과, 동물로서 수격(獸格)에 속했던 곰녀 사이에서 태어난 제3의 존재로서 하늘의 ‘신격’도 아니고 땅의 ‘수격’도 아닌 지상의 ‘인격(人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세상을 동경한 신격 환웅은 ‘신(인)격’이라면 인간이 되고자 한 곰은 ‘수(인)격’이며, 그 두 존재의 교섭으로 생성된 단군은 ‘인(신수)격’이다.32) 그리고 환웅도 곰녀도 아닌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다. 고조선을 건국하는 성취는 인격인 단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단군신화의 전개 과정은 신과 동물이 모두 자신들의 세계보다 인간을 동경하여 마침내 인간세계에 편입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적 상상력에 입각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단군신화는 민족신화이면서도 홍익민족을 이야기하지 않고 홍익인간을 이야기하는 것도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인본주의의 표방이라 해석된다. 따라서 단군신화를 지탱하는 원형적 상상력은 천지개벽신화나 인류시조신화의 그것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늘과 땅, 신과 동물 등 음양론적 생성론에 의하여 인간세계 또는 단군이 출현하여 천지인의 삼재론적 세계를 구현할 뿐 아니라, 천지개벽신화의 천부지모 사상 또는 천남지녀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격을 신격과 동물격의 양면성을 포괄하는 존재이면서 중간적 성격을 지닌 존재로 표현한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다. 6. 미의식의 설화적 상상력과 공포의 미학 설화적 상상력은 민족적 창조력으로서 원초적인 세계관을 형상화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미의 기본적 인식과도 만난다. 인간의 다양한 미의식을 일정한 유형으로 체계화시킨 것이 미적 범주이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어떠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집단적 무의식의 구조로서 원형적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우리 설화를 대상으로 미적 범주를 새롭게 확장하지만 이것은 민족적인 미의식으로 한정되지 않는 보편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설화의 갈래에 나타난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설화를 통해 본 미적 범주의 상상력 또한 원형적인 것이다. 설화의 상상력은 기록문학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원초적인 것이 있듯이, 미적 범주 문제를 따져보아도 기록문학을 대상으로 한 기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독창적인 범주를 이루고 있다. 그 동안 동서고금의 미학자들이 설정하고 있는 미적 범주는 숭고미와 우아미, 비장미, 골계미가 고작이다. 학자에 따라서 추의 미를 설정하는 경우도 있으나, 수많은 미학자와 예술철학자들이 문예작품의 아름다움을 이 네 가지 미적 범주 안에서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많은 연구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긴 했으되, 기존의 미적 범주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만 기존 연구와 다르게 미적 범주의 설정 근거를 새롭게 마련하거나 또는 네 가지 범주의 관계를 새로운 체계로 설명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설화가 구연되는 현장을 보면 이들 네 범주 외에 별도의 범주를 설정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설화를 통해 미적범주를 새로 확장할 수 있는 것으로 ‘공포의 미’를 들 수 있다. 듣는이에게 웃음을 겨냥하고 이야기하는 골계미의 우스개가 있는 것처럼, 순전히 듣는 사람들을 소스라쳐 놀라게 할 목적으로 하는 무서운 이야기가 있다. 물론 듣는 사람들도 무서운 이야기를 원한다. 그런 까닭에 구조적으로 이야기 말미에 듣는 사람이 공포를 느끼며 놀라도록 의도된 이야기가 생산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슬픈 이야기나 비극적 문예작품을 즐기는 이들이 있고, 작가들은 이를 겨냥하여 슬픈 소설이나 비장한 희곡작품을 의도적으로 창작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아이들은 곧잘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자 하고, 또한 이러한 욕구에 따라 무서운 이야기를 즐겨 하고 듣는다. 옛날에 깊은 산골에 오형제가 살았다. 셋째가 자다가 보니 큰형이 한밤중에 밖을 나가서 한참씩 있다가 들어오곤 하였다. 하루는 뒤를 따라가 보니, 큰형이 공동묘지로 갔다. 형은 새로 쓴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놀란 셋째가 도망해 오자 이를 눈치챈 형이 쫓아왔다. 셋째가 얼른 자리에 누워 자는 척하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형이 들어오더니 자는 아우들 가슴에다 차례로 귀를 대어보는 것이다. 둘째에 이어 셋째의 가슴에 귀를 대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넷째, 다섯째로 넘어갔다. 셋째가 ‘휴-!’하고 안도를 하고 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형이 다시 셋째에게 와서 귀를 대보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그게 바로 너지!”33) 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소리를 빽 지르면 좌중에서 듣는 이들은 모두 소스라쳐 놀란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밤에 할뿐만 아니라, 이야기꾼은 큰형이 된 듯이 실제로 듣는이들의 가슴에 귀를 대는 시늉을 하고 특히 셋째로 지목된 듣는이를 째려보며 긴장감을 조성해야 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좌중을 놀라게 할 목적으로 한 이야기이므로 이야기의 결말은 없다. 듣는이들이 놀라는 데서 이야기가 끝난다. 사람들이 공포를 즐긴다는 것은 사실일까 하는 것부터 의문이다. 일단 무서운 이야기들을 제쳐놓더라도 다른 문화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상대를 깜짝 놀라게 하는 놀이를 한다든가, 또는 유원지나 위락 장소에 마련되어 있는 공포의 동굴과 같은 상업적 오락 시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드라큐라>와 같은 공포영화를 즐긴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공포의 동굴이든 ‘드라큐라’와 같은 공포영화든 어설프게 무서우면 손님을 동원할 수 없다. 재미없다면서 모두들 외면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실감나게 무서워서 공포로 전율을 느낄만해야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몰려든다. 공포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면 과연 사람들은 공포를 실제로 겪기를 원할까.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를 즐긴다고 여기며 미적 범주로 설정한다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실제 처한 현실과 상상 속의 문학적 현실은 다르다. 아무도 비극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비극적인 문예작품을 적극적으로 즐긴다. ꡔ시학ꡕ에서도 비극을 가장 훌륭한 문예작품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악몽을 꾸고자 원하는 사람이 없듯이 현실적으로 공포의 상황을 즐기려고 하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입장료를 내면서까지 공포의 동굴을 통과하려 하고 공포영화를 보고 싶어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왜 그럴까? 악몽은 싫어하면서도 악몽을 깨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악몽에 시달리다 꿈에서 깨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행복감에 빠지게 된다. 너무나 실감나는 공포를 체험했기 때문이다. 비극을 보고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듯이 공포의 이야기나 공포영화, 공포의 동굴을 통과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공포에서 해방되고 긴장이 풀리면서 안도감에 빠져들 수 있다. 자기는 안전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공포를 통해서 상대적으로 확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안도감이야말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삶의 양식이다. 그러면서도 악몽은 꾸려들지 않는 것은 적어도 꿈을 꾸는 동안에는 꿈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현실로 착각하는 까닭에 실제적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와 영화 등은 수용자가 순간순간 꾸며낸 상상의 세계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의적으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허구적인 세계의 가상적인 공포를 무서움과 해방감이 반복되는 긴장 속에서 적극적으로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공포의 미’를 새삼스레 미적 범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은 설화의 현장에서 공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통해서 듣는이를 깜짝 놀라게 할 수는 있어도, 소설과 같은 기록문학을 통해서는 결코 독자를 놀라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서사적 사건을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설화에서는 이야기하는 사람이지만, 소설에서는 작품을 읽어나가는 독자 자신인 까닭이다. 설화나 연극, 영화와 같이 연행(performance)되는 문예작품만이 수용자를 공포 속으로 휘몰아갈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을 읽다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놀라는 법은 없다. 다만 긴장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설화와 같은 구비문학을 주목하며 기록문학을 대상으로 했을 때 발견하지 못한 공포의 미와 같은 미적 범주를 새로 발견할 수 있어, 문예이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다.34) 7. 우리 설화의 유형과 전형적 상상력 우리 민족 고유의 설화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적인 설화 목록집을 두루 섭렵해 봐야 한다. 방대한 설화 목록들과 대조해서 우리 고유의 설화 유형들을 찾아낸다고 하더라도 그 전형성을 포착하는 일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만 전승하고 있는 유형이 엄청나게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각 지역 단위로 널리 전승되는 전설들은 제각기 고유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구조적으로 같은 유형이라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전승의 빈도와 분포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차이가 곧 우리 민족다운 상상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민족적 전형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특징적인 설화 유형 몇 가지만 한정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설화를 전승하지 않는 민족은 없다. 그리고 민족마다 자기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배우기 쉽고 익히기 쉬운 이야기이되, 그들의 문화적 특징을 갈무리하고 있을 개연성이 크다. 어른들이 자기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 주는 이야기,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제일 먼저 익혀서 하고 듣는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민족적 개성을 가장 잘 갈무리하고 있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이다.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설화적 창조력의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꼬부랑이라는 말이 거듭 반복되면서 이야기되는 언어적 흥미 곧 말놀이 차원의 재미 외에 문학적 흥미라고 하는 것은 별로 없다. 기껏 꼬부랑할머니가 뒤를 누다가 자신의 대변을 먹는 개를 때려서 벌어지는 아주 단순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사문학으로서 가지는 주제라고 할 것도 없다. 이 이야기는 아직 언어 차원의 말놀이 수준에 머물면서 문학적 차원의 설화 동네로 기웃거리는 정도이다.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의 상상력이 듬뿍 배어 있으며, 아이들에게 우리 삶과 사회와 자연을 일깨워 준다. 우리 할머니는 꼬부랑 할머니이다. 허리가 꼿꼿한 할머니는 아무리 늙어도 할머니같지 않다. 여성의 일생과 질곡이 꼬부랑 할머니의 굽은 허리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꼬부랑 할머니라야 진짜 할머니이다. 지팡이도 꼬부랑하지 않으면 예사 막대기일 뿐 지팡이답지 않다. 길도 우리 길은 꼬부랑길이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이다. 지금처럼 곧고 넓게 닦은 길은 일제 이후에 비로소 생긴 신작로일 따름이다. 미루나무가 들어오기 전에는 곧은 나무도 찾아보기 어렵다. 똥을 두고 개와 다투는 것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실감나는 일이다. 기저귀가 흔하지 않던 시절에 아기가 똥을 싸게 되면 으레 개를 불러들여 변을 말끔하게 핥아먹게 한다. 그러나 서너 살이 되어 오줌똥을 가릴 나이가 되면 마당이나 거름더미에 앉아서 변을 보게 한다. 이 때 개는 변을 보고 있는 아이에게 접근하여 입을 들이대는 바람에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어른들이 지켜 서서 개를 쫓아주거나, 제법 소견이 있는 아이들은 아예 회초리 하나를 들고 앉아서 개의 접근을 스스로 막아가며 뒤를 본다. 이것이 우리가 어릴 적에 개와 맺었던 삶의 한 실상이다. 이러한 아이들의 경험이 자신과 가장 친숙한 관계망 속에 있는 할머니의 삶을 통해 대상화된 것이다. 할머니도 뒤를 누고 그것을 먹는 개와 다투는 사건을 통해서 늙은이와 어린이의 삶의 궤적을 하나로 휘어잡아 연결하고 있다. 그리고 한참 먹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아이들에게 먹는 일 못지않게 싸는 일이 더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처럼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들려주는 설화의 상상력은 아주 주변적이고 경험적이면서도 사람과 나무와 개 등 동식물이 더불어 얽혀 있는 세계상을 그리면서, 먹는 것에 집착해 있는 아이들의 관심을 ‘싸는 것’의 문제로 돌려놓는 구실까지 담당한다. 다시 말하면 아이들 세계의 주변적이고 경험적인 대상을 통해서 상상력의 현실성을 확보하되, 할머니의 삶 또는 먹고사는 문제 등 자칫 어릴 때부터 굳어지기 쉬운 통념을 뒤집어 놓음으로써 융통자재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 설화 가운데 민족적 전형성을 이루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도깨비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도깨비는 민족적 상상력이 빚어낸 가장 한국적인 신격이기 때문이다. 도깨비가 우리들이 믿고 섬기는 신격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보면, 그 성격이 한층 뚜렷해진다. 동신이든 천신이든 산신이든 이들 신격은 인간과 더불어 나란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섬김의 대상이다. 따라서 일방적으로 믿고 받드는 제의를 베풀어야 하며, 그 앞에서는 늘 삼가하고 재계하는 온갖 금기들이 사람들의 말과 행위를 제약하고 일방적인 섬김을 요구한다. 반대로 잡신이나 객귀와 같은 뜨내기 신격들은 늘 사람들에게 해악과 질병을 줌으로써, 사람들은 이들의 범접을 기피하며 이들의 침입을 막고자 여러 가지 제의를 행한다. 양밥이나 푸닥거리 또는 객귀물리는 일이 모두 이러한 제의가 된다. 위협적인 방법이나 어루만짐의 방법으로 잡귀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앞의 신격들이 섬김의 대상이라면 뒤의 신격들은 다스림의 대상일 따름이다. 자연히 도깨비와 같이 민중들의 삶과 함께 하는 신격과는 구별된다. 신앙의 대상도 혐오의 대상도 아닌 신격이 도깨비이니 한층 인간적일 수밖에 없다. 자연히 도깨비 이야기는 전설과 민담 등 갈래를 넘나들며 널리 전승된다. 설화 속의 도깨비는 장꾼과 함께 동행하여 도깨비감투를 선물하는가 하면, 아침 일찍 대문을 연 집에 찾아가 돈을 꾸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김서방과 사귀어서 친구가 되는가 하면 과부와 혼인하여 동거하기까지 한다. 메밀묵을 써 주면 보를 막아 주기도 하고 팥죽을 얻어먹고 명당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비가 와서 날이 궂은 때에는 넋나간 얼간이들을 홀려서 혼줄을 내주기도 하고, 저녁 무렵 으쓱한 산길에 나타나서 씨름을 하자고 대들기도 한다. 따라서 그 형상도 어수룩한 장정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과 나란히 걷고 일도 함께 하며, 씨름이나 부부생활도 가능한 존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깨비라는 정체를 스스로 밝히지 않으면 그 정체를 알지 못할 정도로 인간적이다. 도깨비의 민족적 정체는 그 실체에서 더욱 고스란히 드러난다. 도깨비는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이다. 도깨비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과 생활 속에 개별적으로 경험하고 머리 속에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이며, 없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이것이 도깨비라고 할 만한 뚜렷한 실체가 항구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도깨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다른 실체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허상의 신격이다. 일정한 실체에 깃들어 서식하면서 필요에 따라 도깨비의 형상으로 변신되어 나타나는 셈이다. 이러한 실체의 확인 작업은 도깨비가 허상으로 고려되기 때문에 추구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 씨름을 하여 쓰러뜨린 도깨비를 잡아서 나무에 묶어두고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 보니 절구공이었다던가 몽당 빗자루였다는 이야기를 흔히 듣는다. 이런 식으로 도깨비의 실체를 확인한 결과 다음 몇 가지로 모아진다. 도깨비가 깃들어 있는 실체는, 다 떨어져 버려 두다시피 한 몽당빗자루이거나 부지깽이,키,절구공이,방아공이,체,조리 등으로 다양하지만, 이를 일반화해 보면 일정한 합의에 이를 수 있다. 어느 것이나 쓰다 버린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 여성의 손때나 특히 피가 묻은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손때나 피가 묻은 살림살이들이 다 닳아서 제 구실을 하기 어려운 지경에 있지만, 그러한 하찮은 연모들, 그래서 버려도 좋을 것 같은 연모들이 뜻밖에 도깨비로 변신하여 삶의 일상에 충격과 긴장을 주며 판박이 같은 심심한 삶을 역동적으로 살아 숨쉬게 하는 것이다. 몽당빗자루는 더러운 것을 쓸어내고 필요한 것은 쓸어 담는데 일생을 다 바쳤다면, 절구공이나 방아공이, 체 등은, 겉곡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알곡으로, 알곡은 떡을 빚을 수 있는 가루로 바꾸어 놓는데, 그리고 키나 조리 등은 바람과 물을 이용하여 쓰지 못할 것은 바람에 날려 버리거나 쓸 것만을 물 속에서 건져내어 쓸 것과 못 쓸 것을 분별해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부지깽이 역시 땔감을 지펴 불꽃을 살려내고 음식을 익히는 일에 자기 몸을 태우며 죽어 가는 희생적 존재이다. 부를 축적하는 재물이나 재산의 목록에 감히 낄 수조차 없는 하찮은 살림살이의 도구들이 사실은 삶을 변혁시키는 중요한 연모로 인식했다면, 그 속에서 도깨비와 같이 삶의 일상을 크게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초월적 역량을 한량없이 갖춘 신격을 자연스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깨비와 같은 독자적 개성을 지닌 신격을 별도로 창출하고 있는 것을 한국인의 집단적 심상, 또는 정서적 관념들을 투사한 결과로 받아들인다면, 도깨비의 신통력과 그 어리숙함은 한국인의 한 속성을 드러내는 거울일 수 있다. 우선 도깨비의 속성을 보면 ‘도깨비의 조화(造化)’라고 할만큼 초월적인 능력과 신통한 주술을 지니고 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다. 적어도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자신의 뜻대로 손쉽게 척척해낼 만한 신통력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발휘할 만한 주보(呪寶), 곧 도깨비 방망이나 도깨비감투를 지녔다. 용이 하늘로 오르는 데 필요한 여의주와 같은 보물이다. 무엇이든 모두 만들어내고 가져다주는 요술방망이이자, 사람을 남의 눈에 뜨이지 않게 만들어 주는 요술 감투인 것이다. 이러한 역량과 주술적 도구를 통해, 보(洑)도 막아주고 다리도 놓아주며 금은보화나 돈을 무한정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예사사람들에게 늘 속고 이용당하는 어리숙한 구석이 있다. 우선 기억력이 없어서 장꾼으로부터 돈을 한 번 빌리면, 다음날부터 매일 아침 빌린 돈의 금액을 계속 던져 준다. “어제 빌린 돈 석 냥 받으라구!” 하면서 매일 돈 석 냥을 갚으니 빌려준 사람은 떼부자가 될 수밖에 없다. 더러는 도깨비와 사귀었다가 계속 치근덕거리는 것이 싫어서 관계를 끊고자 수작을 벌이는 이도 있다. 도깨비에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서 ‘말 피(또는 말 대가리)’라는 것을 알아내고, 도깨비의 같은 질문에는 ‘돈’이 싫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고는 대문과 담장 둘레에 말피를 뿌려 두면 다음날 저녁에 도깨비가 왔다가 배신감을 느끼고, 사람이 싫어한다는 ‘돈’을 매일 저녁 던져주며 보복을 한다. 이렇게 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나 그 이웃들은 도깨비가 준 돈을 계속 지니고 있어서는 미덥지 못하다고 여긴다. ‘도깨비가 준 돈으로는 땅을 사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것이 되고 만다.’고 믿고 있다. 언제 도깨비가 다시 돈을 회수해 갈 지 모르는 탓이기도 하지만, 도깨비가 가져다 준 돈은 뒤에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릴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도깨비 이야기에는 한국인의 경제 관념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도깨비로부터 확보한 돈으로는 으레 논을 사 둔다는 것은 땅에 대한 투자가 가장 확실한 부의 축적이라는 의식과 함께, 화폐보다 땅에 대한 소유욕이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도깨비 보’ 이야기는 농경활동에 따른 인공적인 관개기술에 관한 것으로 ‘도깨비 논’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서 농경활동에 의한 생산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내용이다. 이러한 도깨비의 몇 가지 속성을 통해서 한국인의 가능성과 한계, 또는 가치관을 포착해낼 수 있다. 도깨비의 신이한 능력처럼 한국인은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적 역량을 갖추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나 도깨비의 어리석은 몇 가지 행동양식에서 드러나듯이 교활하게 거짓으로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은 나머지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고 만다. 비범한 역량과 기대되는 가능성을 지녔으면서도 어리석은 행동과 사려 깊지 못한 판단 때문에, 이웃과 좋은 사귐을 유지하면서도 늘 그 이웃에 속고 안타까워하는 처지, 그러면서도 교활하지 않고 신통력을 무기로 이웃을 위협하지 않는 인간미 넘치는 존재가 도깨비의 속성이자, 곧 한국인의 속성이다. 이처럼 도깨비 설화의 상상력은 도깨비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능력보다 슬기를 비범성보다 신중성을 더 중요한 역량과 행동양식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설화의 고유한 성격은 그 자체로 논의될 수도 있으나, 다른 나라 이야기와 대비되어 그 특성이 드러날 때 전형적 상상력의 정체가 한층 뚜렷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솝우화의 하나인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두 동물의 경주를 통해서, 빠르긴 하지만 게으른 탓에 경주에 지고 마는 토끼의 부정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설화에서 그려지는 토끼는 그러한 전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약하긴 하지만 슬기로운 존재로서 위기에 부닥뜨려도 그때마다 재치 있게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하는 긍정적인 모습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토끼를 위협하거나 잡아먹으려는 존재는 백수(百獸)의 왕인 호랑이거나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바다의 왕인 용왕이다. 호랑이나 사람, 또는 용왕이 토끼를 잡아먹으려고 하면 그때마다 기지로 위기를 벗어나서 오히려 자기에게 위협적인 군림하는 존재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특히 ‘토끼와 호랑이’ 이야기는 일련의 연쇄담을 이룰 정도로 다양한 유형이 전승되고 있으되, 그 유형적 틀은 일정하다. 호랑이가 뭇 짐승의 왕이라면 토끼는 그 백성이다. 따라서 호랑이와 토끼의 관계는 왕과 백성의 관계나 다름없다. 왕이 막강한 권력의 힘으로 백성을 수탈하는 데 대하여 백성은 슬기로 이를 모면하는 것은 물론, 탐욕스런 왕을 오히려 궁지로 몰아넣는다. 민중들은 왕정의 횡포에 대한 저항의식을 호랑이와 토끼의 이야기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는 일종의 우화이다. 그러므로 우리 설화 속에서 토끼가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법은 없다. 판소리 수궁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여기는 것도 토끼에 대한 우리 민족의 특별한 정서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가르쳐야 우리 아이들답게 자랄 수 있다. 그러자면 우리 설화를 가르쳐야 한다. 한국인을 한국인답게 가르치는 데 가장 기능적인 교재가 바로 우리 설화이다. 왜냐하면 우리 설화에는 우리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에 입각한 한국인다운 정서가 갈무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이야기 공부를 시작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부터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갈무리하고 있는 우리 설화를 가르치지 않고, 이솝우화를 번역해서 싫은 일본 교과서를 보고 벳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곧 우리 아이들이 타고난 민족 정서와 원형적 상상력을 기초부터 흔들어 버리는 의도적 교육의 한계이자 계획 교육의 무계획성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국정 교과서로 이솝우화를 의도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들은 우리 설화를 들으면서 한국인다운 정서와 한국인다운 상상력을 지닌 한국인으로 온전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형적 상상력은 더 이상 발휘되기 어렵다. 현재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는 다른 매체들에 의하여 아이들에게 전승될 기회를 거의 잃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에는 이야기의 현실성도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감력이 떨어지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자란 청소년들이 거의 없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전환되면서 도깨비에 관한 이야기도 더 이상 전승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되었다. 도깨비 방망이와 같은 초월적 주술물에 얽힌 이야기는 동화책이나 방송극을 통해 여전히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농경생활을 바탕으로 한 도깨비 보나 도깨비 논 이야기들은 점점 전승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요즘 아이들은 드라큐라나 강시와 같은 남의 나라 이야기를 즐겨 읽고 듣는 까닭에 우리 신령에 대한 인식이 더욱 흐려지고 있다. 토끼와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들도 학교에서부터 이솝우화와 같은 외래동화를 가르치기 때문에 전형성에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들 이야기는 특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므로 설화적 상상력의 전형성을 유지하는데 더욱 문제가 있다. 8. 설화의 전승지역과 생태학적 상상력 설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생태학적 존재이다. 생태학적 존재로서 이야기를 하고 듣는 한 그 설화적 상상력은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못지 않게 자연환경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연환경에 의한 상상력을 생태학적 상상력이라 한다면 설화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화는 전승지역의 생태적 조건에 따라서 전승 목록과 전승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설화를 통해서 생태학적 상상력을 추론하려면 구체적인 지역을 한정해서 대비를 해야 기대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논의에서는 금강유역의 설화를 한정하여, 설화에 나타난 생태학적 상상력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금강유역의 설화 전승 상황을 지리적 위치에 따라서 상․중․하류로 나누어 살펴보면, 설화의 전승목록은 물론 자연을 인식하는 세계관의 차이가 뚜렷하다. 상류에서는 자연이 곧 생명이자 신령이다. 자연은 사람들의 삶과 생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기(氣)의 교감물일 뿐 아니라, 사람들이 죽어서 마침내 되돌아가 자연물이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어, 자연과 사람이 서로 유기적 공생관계 속에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자연물 속에 학과 거북 또는 용과 같은 신성한 생명이 그대로 갈무리되어 있다고 믿으며, 바위와 산, 소(沼) 등 자연물의 훼손은 곧 이들 생명을 죽이는 일로 여기는 동시에 사람들의 삶까지 훼손하는 일로 믿는다. 중류에서는 자연물 자체의 생명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산과 바위 속에 신기한 보물이 있거나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되, 그것은 상당히 문화적인 매개물을 통해서 드러난다. 식장산이나 보문산에 묻혀 있다고 하는 화수분 구실을 하는 접시나 옹기 또는 주머니는 어느 것이나 문화적 구조물이다. 산 자체의 생명력으로 사람들의 삶을 좌우한 것이 아니다. 신령한 힘을 미치는 경우도 선녀라든가 도사, 도승, 산신령 등의 신성한 존재가 출현하여 이를 매개한다. 넓은 강을 끼고 있으므로 강을 신성하게 여기는 의식도 상당히 강하다. 따라서 강의 수신(水神)이 나타나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하류처럼 용왕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러는 자연물이 인간적 삶의 단순한 흔적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때로는 말의 불알 자욱이 남았다든가 상두꾼들이 남긴 발자욱이 문제되어서 바위 전설이 전승되는 정도이다. 자연물이 사람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보다 사람들의 삶에 종속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류에서는 바다가 중요한 자연물로 인식될 뿐 아니라 이상세계로 생각된다는 점에서 중상류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금강도 바다의 해일이 넘쳐서 생긴 것으로 믿고 있을 뿐 아니라, 바다 속에는 용왕국이 있고 거기에는 해인(海印)과35) 같은 신기한 주술물이 있어서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마음먹은 대로 수월하게 좌우할 수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하류 유역 사람들은 바다와 강에 서식하는 자라와 잉어 등을 하나같이 용왕의 자녀들로 인식하여 함부로 죽이지 않는가 하면, 용궁에 자유롭게 출입하며 용궁의 사정을 소상하게 묘사하는 등 직접 가본듯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결과 해풍이 일어 배를 띄우기 어려우면 용왕제를 지낸다. 모든 자연현상은 용왕의 조화로 믿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바다에 서식하는 생물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바다신을 섬김으로써 사람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상류 사람들이 산과 바위 등 자연물 자체와 삶을 직접 교감하는 관계로 인식하고, 중류 사람들이 자연물과 삶 사이에 문화적 구조물 및 신령한 존재가 끼어들거나 또는 자연물이 사람들의 삶에 종속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하류 사람들은 자연물의 대상이 바다로 한정되고, 바다의 용궁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 육지의 사람 세상이 편안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면서 상중하류는 어느 둘과 동질성을 지니면서 다른 한 쪽과는 대립성을 지니는 복합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관계를 동질성과 대립성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자연과 인간의 평등 및 종속 관계 상하류 : 자연이 인간에 상호 우위 관계(자연 >= 인간) 중 류 : 자연이 인간에 상하 종속 관계(자연 < 인간) 2) 자연 현상이 산 중심인 경우와 바다 중심인 경우 상중류 :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현상은 산과 바위와 소 하 류 :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현상은 바다와 수산물 3) 자연과 인간 사이에 문화적 구조물의 개입 여부 상 류 : 인간과 자연의 직접적인 교감 중하류 : 인간과 자연 사이에 문화적 산물의 개입 생업과 관련하여 볼 때, 일반적인 농사꾼 이야기를 제외시켜 두면 상류에는 나뭇군 이야기가 주로 등장하고 중류에는 나뭇군과 머슴 및 새우젓 장수, 하류에는 소금장수가 등장하는 특성을 지녔다. 나뭇군이 상류의 산촌 사람들의 민중성을 대표한다면, 소금장수는 하류의 해촌 사람들의 민중성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중류에는 나뭇군과 머슴, 새우젓 장수가 함께 등장하는데, 이는 상하류 사람들의 생활 특성을 어느 정도 지닌 논농사 중심 지역이므로 농사꾼인 머슴이 야촌 사람들의 민중성을 대표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중류에는 나뭇군과 새우젓 장수도 함께 등장한다. 이처럼 의식과 행위의 주체가 유역의 위치와 입지적 조건에 따라 나뭇군과 농사꾼, 소금장수 등으로 부각될 뿐 아니라, 그들이 삶의 성취를 이루거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근거도 제각기 다른 데 토대를 두고 있다. 이를테면 상류의 산촌 사람들은 산신령의 계시로 산삼이나 귀한 약초를 캐서 부모의 병을 고치고 성취하는 데 비해, 중류의 야촌 사람들은 단지에 돈을 모아 저축을 하거나 화수분과 같은 신기한 보물그릇을 얻어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성취를 이룬다. 그런데 하류의 해촌 사람들은 자라나 잉어와 같은 수중 어류를 살려주고 용궁의 신이한 보물을 얻어서 자신의 뜻을 펼치며 훌륭한 성취를 이룬다. 산삼이나 화수분 및 해인(海印)은 전혀 다른 물건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예사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가치의 신성한 주술물이다. 산삼은 신령의 계시가 있어야 구할 수 있고 화수분이나 해인도 신령과 용왕의 도움과 배려가 있어야 얻을 수 있다. 다만 삶의 무대에 따라 산촌 사람들에게는 신비한 약효를 지닌 산삼이 그지없는 보물이며, 풍성한 수확이야말로 최대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야촌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든 계속해서 쏟아지게 하는 화수분이 최고의 보물이다. 그리고 바다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바다를 생업의 무대로 삼고 있는 해촌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용궁의 ‘해인’이 인간의 모든 삶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일 수밖에 없다. 산삼은 먹어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므로 지속적 보존에 관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화수분이나 해인은 누구든 지니고 있는 한 계속 그 신이한 힘을 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수분은 다시 찾을 수 없게 사라지도록 만들고 해인도 어느 승려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자취를 감추어 버리도록 이야기한다. 강을 끼고 형성된 문화적 구조물로는 다리와 보를 들 수 있다. 상류에서는 내가 좁고 급류이므로 보는 설치될 수 없으며 다리도 소규모의 돌다리나 바위를 걸쳐두는 양식이다. 힘이 센 장수 개인이 놓은 다리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중류에서는 강의 폭이 넓고 흐름이 완만하므로 다리의 규모가 크다. 어느 개인이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무리이다. 자연히 다리를 놓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다리를 둘러싸고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다리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정도이다. 상대적으로 다리가 많기 때문에 다리에 얽힌 이름 전설도 제법 많다. 그리고 중류에는 들이 넓고 강의 흐름이 완만하기 때문에 물을 막아서 농업용수로 쓰는 보(洑)가 발달되어 있다. 보는 관개기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강의 문화적 이용물이지만 예사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작업이다. 자연히 보의 위치나 물길의 설계를 계시하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게 되고 그에 따른 이야기가 전승되게 마련이다. 하류에서는 다리나 보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강폭이 넓기 때문에 현대적인 교량이 가설되기 전에는 배를 이용해서 나루를 건너다녔다. 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넓은 강을 가로막아 보를 만들 수 없다. 그것은 관개기술이 발달한 요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자연히 하류에는 보에 관한 이야기가 전승될 리 없다.36) 이처럼 문학적 창조력은 인간적 상상력으로 일반화할 수 없는 생태학적 제약이 따른다. 자연에 대한 대상적 인식은 물론 자연의 생명성에 대한 인식이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따라서 설화의 상상력은 인간적 보편성으로서 설화의 갈래와 미적 범주를 주목할 수 있고 민족적 특수성으로서 신화를 통해 민족적 세계관을 추론할 수 있으나, 지역적 자연환경에 의한 설화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설화의 구체적인 현장을 대상으로 그 전승목록과 이야기의 주인공, 자연관, 주술물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해야 가능하다. 지역에 따라 주목해야 할 국면들도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생태학적 상상력은 어느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9. 설화에 나타난 여성주의다운 상상력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이른바 여성주의 또는 여성숭배주의라고 일컫는 가장 현대적인 문예사조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 몇몇 여류 작가들에 의하여 페미니즘 소설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들이 두루 발표되고 이들 작품 가운데 몇 편은 베스트 셀러 목록을 점유하는 동시에, 평론가들에 의하여 페미니즘 문학의 진정성에 관한 논쟁도 만만치 않게 전개되기도 해서, 한때 우리 문단에 페미니즘 열기가 고조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문단의 이러한 사정은 마치 우리시대에 막 불붙기 시작한 여성운동과 함께 진보적인 의식의 작가들에 의하여 비로소 문제되기 시작한 것이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이해하는 데서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자료를 설화로 바꾸어보면,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속에서도 페미니즘의 성격을 절묘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 열녀와 효부를 다룬 이야기 이상으로 풍부하고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면 페미니즘의 전통에 대한 재인식이 가능하다. 몇 가지 유형의 이야기들을 통해 옛날이야기 속의 페미니즘을 읽어보면 페미니즘에 입각한 문학적 창조력을 되살릴 수 있다. 힘깨나 쓰는 장사 이야기라면 으레 남성들을 들먹일 터인데, 여성들이 남성 힘꾼을 무색하게 한 이야기들이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치는 힘을 빌미 삼아 동네사람에게 횡포를 부리는 포목장사의 기를 꺾어놓은 새댁이야기이다. 어느 마을에 힘이 아주 센 포목장사가 나타나서, 길마 위에 실은 포목짐을 길마채로 번쩍 들어서 길 한 복판에 내려놓고 포목을 팔기 시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포목장사의 대단한 힘을 보고 놀라서 길을 피해 다닐 뿐 아무도 불평을 하지 못했다. 이 때 어느 집에 갓 시집온 새댁이 물동이를 이고 오다가 길을 가로막고 있는 포목짐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서서 포목짐을 치워 주기를 기다렸다. 포목장사가 빙긋이 웃으면서 어디 지나갈 테면 지나가 보라는 듯이 팔짱을 낀 채 보고만 있자, 다소곳하게 서 있던 새댁이 발을 길마채 밑에 넣어서 발등으로 길마와 포목짐을 덜렁 들어 울타리 너머로 넘겨버리고 태연하게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 광경을 본 포목장사는 얼른 짐을 챙겨 마을을 떠났으며, 그 이후부터는 절대로 길마채 짐을 내리는 따위의 힘 자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힘깨나 쓰는 사내들 가운데에는 힘 자랑이 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쓸데없는 일에 힘 자랑을 하며 횡포를 부리기 일쑤이다. 힘이 센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일이지만 넘치는 힘을 쓸데없이 발휘하여 남에게 겁을 주거나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드는 것은 한갓 폭력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마을사람들이 겁을 먹고 슬금슬금 피할 때 물동이를 인 새댁은 포목장사와 맞서 말없이 그의 기를 꺾어놓고 말았다. 이로써 새댁은 힘이 있어도 정당하게 쓸 줄 모르는 비굴한 남성들의 몰골을 비판하고 발군의 힘을 기껏 자신의 장삿속이나 챙기는 데 발휘하는 옹졸하고 한심한 포목장사를 주눅들게 하여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셈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희롱하는 것이 자신들의 특권인 양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공연히 길가는 여성에게 집적거리며 성적 희롱을 일삼는 이가 있다. 천하의 잡보이자 건달인 정만서가 길을 가다가 앞에 가는 여인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리면서 고쟁이가 드러나는 것을 보자, “여보, 대문 열�소.” 하고 희롱을 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앗다! 뒷집 개가 안 짖었으면 도둑맞을 번했네.” 하고 치맛자락을 여미며 잽싸게 걸어가는 것이었다. 정만서는 능글맞게 희롱의 말을 던졌다가 느닷없이 개로 몰리는 무안을 당하고 만 셈이다. 건달의 희롱을 잠재울 만한 여인의 반격이 한층 격렬하다. 여자 뱃사공과 남자 손님 사이에 벌어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내가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보니 여자 뱃사공인지라 은근히 희롱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여보 마누라 얼른 배를 저으시오.” “내가 왜 당신 마누라요?” “내가 당신 배를 탔으니 당신이 내 마누라가 아니고 뭔가요?” 사내의 말에 뱃사공은 괘씸하였다. 마침내 배가 강을 건너 나루터에 이르자 사내가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사공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 한다. “아들놈아 조심해서 가거라.” “아니 내가 왜 당신 아들이오?” “내 배에서 나왔으니 내 아들놈이 아니고 뭔가요?” 사내는 보기 좋게 당하고 말았다. 남성들이 희롱을 하면 여성들은 으레 당하고만 있으리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한층 적극적으로 되받아쳐서 남성들의 희롱을 무색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옛날에는 글도 남성들의 독점처럼 인식되었다. 특히 진서(眞書)라고 하는 한문은 남성들의 전용물이었으며 여성들은 기껏 언문 또는 안글이라고 하는 한글이나 익혔다. 그러나 민중들이 구전하는 옛날이야기 속에서는 이러한 남성 중심적 문장생활을 용납하지 않는다. 내노라 하는 선비들이 여성들의 글재주에 당한 얘기도 적지 않다. 이를테면 글깨나 배웠다는 양반집 도령이 첫날밤에 신부를 상대로 글 시합을 하자는 것이다. 자기 글귀에 화답을 잘 하면 초야를 치르고 그렇지 못하면 첫날밤에 소박을 하겠다며, “청포대하(靑袍袋下)에 자신노(紫腎怒)라”, 푸른 도포 띠 아래 붉은 남근이 성을 냈도다 하니, 신부가 잠깐 있다가 글을 받아서 “홍상고의(紅裳袴依)에 백합소(白蛤笑)라”, 분홍치마 속옷 속에 흰 조개가 웃는다 하고 답을 하여, 신랑의 글재주를 무색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남성이 얼굴을 붉히며 성을 내어 공격적인 태세로 덤벼들었지만 여성은 그러한 남성을 가소롭게 여기며 흰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여성들은 문장만 뛰어난 것도 아니다. 위기를 극복하고 살림을 일으켜 세우는 슬기 또한 뛰어났다. 친정아버지가 시집에 웃손으로 와서 음식을 탐하다가 설사가 나는 바람에 도저히 수습하기 어려운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를테면 자기 바지 대신에 얼떨결에 안사돈의 고장주를 입어서 사타구니가 다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자, 딸이 나서서, “아버지는 실수하지 말라고 해도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잘 못살까봐 싶어서 기어코 실수를 하네. 어느 점장이가 사돈댁에 가서 큰 실수를 하면 딸이 잘 산다는 말을 듣더니만, 일부러 저런 실수를 하네요.” 하고, 아버지의 실수가 사실은 딸의 장래를 위한 충정인 양 임기응변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시집 식구들이 이를 미담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재치와 슬기를 발휘한다. 가난한 살림을 부자로 바꾸어놓은 여성 이야기도 많다. 집이 워낙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어려운 데에도 시어른과 남편은 탄식만 하며 있을 때, 며느리가 나서서 앞으로 자기에게 가장권을 넘겨주면 부자가 되도록 하겠다고 제안을 하였다. 이에 시어른이 동의하자, 며느리는 그날부터 시어른과 남편에게 밖에서 들어올 때 소똥이든 개똥이든 똥을 하루 한 산테미씩 주워오라고 하였다. 며느리가 시키는 대로했더니 몇 달이 안 가서 마당에 똥무더기가 집채만하였다. 그러자 마을의 부자들이 서로 자기 논을 부치라고 땅을 내놓았다. 거름을 많이 주고 농사를 지으니 농사가 잘 될 수밖에 없었다. 가을이 되자 볏가마니가 그득그득 쌓이고 몇 해가 지나지 않아서 큰 부자가 되었다. 살림살이를 풍요롭게 하는 데에도 여자들이 나서야 한다. 살림살이뿐만 아니다. 형제들끼리 우애 있게 지내거나 집안의 일가들끼리 인정 있게 지내는 것도 사실은 여자들 하기에 달렸다. 삼동서가 노력하여 삼형제가 우애 있게 지낸다는 이야기가 좋은 보기이다. 형제들이 모이기만 하면 ‘우리는 형제가 의가 있어서 남들 같지 않게 인정 있게 지낸다’고 자부심에 넘치는 말들을 늘어놓자, 삼동서가 ‘정말 자기들 형제 덕분에 그런지 어디 두고 보자’면서 서로 수작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부터 별식을 해서 서로 나누어먹지 않고 의도적으로 감추곤 하여 인정을 끊어버리자 마침내 사촌 아이들과 형제들이 서로 흉을 보며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아버지 제삿날이 되어 삼형제가 다 모였을 때 삼동서들이 나서서 사실을 털어놓자, 삼형제들이 그제서야 부인들 덕분에 우애 있게 지냈음을 인정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남정네들이 아무리 우애가 있어도 동서들끼리 우애가 없으면 다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이야기이다. 집구석이 잘 되고 안 되는 것은 전적으로 여자들한테 달렸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이야기는 가부장사회의 남성중심적 고정관념을 뒤집어엎는 데서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있는 것을 부정하고 있어야 할 것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우스개 이야기가 많다.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힘이 세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짜 힘은 여성들의 것이되 다만 쓰잘 데 없는 일에 힘 자랑을 하지 않을 뿐이다. 여성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일을 남성적 특권으로 알고 있는 건달에게 오히려 역습을 가해서 남성을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것도 여성이다. 여성이 하고자 들면 남성들보다 더 적극적인 성희롱을 할 수 있으되, 다만 그러한 천박한 짓거리를 삼갈 따름이다. 문장력도 마찬가지이다. 선비들만 글을 읽고 시를 읊조릴 줄 아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남성이다. 여성들도 남성 이상으로 문장력이 있으되 다만 겉으로 문장력을 과시하며 으시대지 않을 뿐이다. 아버지의 실수를 재치로 변명하는 일도 그러려니와 집안의 경제적 경영은 물론, 인간적 경영도 모두 여성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남성적 한계를 다각적으로 지적하고 풍자하는 한편, 여성적 역량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여성주의 설화의 문학적 상상력이다. 여성주의 설화들의 문제의식과 상상력을 주목하고 문학적 창조력의 보기로 삼는다면 새로운 페미니즘 문학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10. 설화의 상상력과 메타설화의 상상력 지금까지 엉성한 그물로 설화의 바다를 헤집고 상상력의 실물을 건져 올리려 했으나 역부족이다. 워낙 넓고 깊은 바다인 데다가 그물질이 서툴기 때문에 더더욱 그 성과는 일반화하기 어렵다. 숨만 가쁘고 기운만 소진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의 실체를 그물코에서 분리시켜 본다면 다음 몇 가지로 상상력을 건져 올릴 수 있다. 설화의 상상력은 민족적 특수성을 뛰어넘는 설화의 갈래론과 미적 범주와 같은 기본적인 존재 양식에 관한 것에서 태초의 세계에 관한 우리 민족의 원형적 상상력으로서 우주와 천체, 인류시조 등 원초적 세계관을 주목했다. 설화는 갈래 차원에서 상상력의 보편성도 지니지만 기록문학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미적 범주도 새로 설정할 수 있다. 원형적 상상력은 뜻밖에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세계 인식의 구조를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어, 신화의 서사구조와 세계관이 일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민족적 특수성을 포착할 수 있는 전형적 상상력으로서 몇 가지 설화 유형을 주목하였으나 그 지속성을 담보하기 어려움을 발견한다. 설화는 일정한 지역적 기반 아래 형성되고 전승되는 생태학적 구조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족적 상상력 아래 동질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지역적 특수성을 지니기도 한다. 설화의 생태학적 상상력은 자연물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그리고 초월적 주술물이 제각기 다른 설화들을 창출하고 있다. 이처럼 설화의 상상력은 환경적 조건에 따라 민감할 뿐 아니라 민주적이기도 하다. 성차별의 문제도 예외일 수 없다. 이른바 여성주의 문학은 최근의 한 진보적 문학 운동의 결과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설화의 세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성주의 문학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가부장적 사고의 고정관념을 뒤집어엎고 있다. 그러므로 설화의 상상력이 얼마나 진보적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설화를 엮어내는 창조력은 가장 원초적 상상력이면서 또한 가장 당대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설화적 상상력은 즉각적이고 현실적이어서 기동력이 뛰어난다. 설화는 옛날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막 지어지는 이야기도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설화는 과거의 것이자 고전문학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이른바 현대문학이라고 하는 동시대의 기록문학보다 더 빠른 기동성과 즉각성을 갖추고서 널리 확산되고 있다. 이를테면 성수대교 및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나 의정부 지방법원의 판사 뇌물 수수 사건 등을 풍자하는 이야기들이 좋은 보기이다. 그러나 동시대 이야기로서 가장 풍부하게 지어지고 가장 널리 이야기되는 것이 흔히 음담패설로 인식하고 있는 육담들이다. 요즘 막 지어지는 육담들은 동시대 성문화를 반영하면서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서사구조를 통해 지금 여기 우리들의 성적 욕망을 대상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다.37) 이 밖에도 참새 시리즈, 최불암 시리즈, 만득이 시리즈, 사오정 시리즈 등 지금 막 지어져서 널리 전승되는 이야기들이 아주 많다. 이들 이야기에서 발휘되는 상상력은 현대 구비문학으로서 문학적 창조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것이다. 이처럼 설화의 상상력은 지금도 살아 있다. 원형적 상상력은 과거 신화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지금 여기 당장 새롭게 발휘되는 창조적 상상력의 현실까지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 그리고 공간적 범주에 따라 세계적 보편성과 민족적 특수성은 물론, 지역적 범주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특정 전승집단의 사회문화적 상상력까지 주목할 수 있다. 이야기 속에는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구애되지 않고 발휘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사람이 소가 되기도 하고 소가 사람이 되기도 한다. 중이 호랑이로 둔갑하여 사람을 위협하기도 하고 호랑이가 아리따운 아가씨로 변신하여 길 가는 남정네를 홀리기도 한다. 사람이나 동물이 아닌 고정적인 자연물들이 쉽게 움직이며 오고가기도 한다. 그래서 산이 큰물에 떠내려오기도 하고, 바위가 하늘 위에 떠 있기도 한다. 이야기의 세계에는 땅 밑이나 하늘 위에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과 세상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로 올라가 살기도 하고 땅 속 세상을 다녀오거나 바다의 용왕국을 다녀오기도 한다. 이것은 이야기를 하고 듣는 사람들의 풍성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상상력은 지금껏 놓치고 있다. 그것은 설화에 대한 설화적 상상력이다. 메타(meta) 설화의38) 상상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이야기의 이야기’ 또는 ‘이야기 주머니 이야기’ 등 메타 설화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도령이 이야기를 듣기만 하고 남에게 들려주지 않자, 이야기 주머니에 갇혀 있던 이야기 귀신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도령이 장가드는 날 도령을 해치려고 모의했는데, 마침 이 모의를 엿들은 하인이 도령을 구하고, 전후 사정을 알게 된 도령이 그때부터 들은 이야기를 남에게도 부지런히 들려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소박하게 말하면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이며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야기의 본질을 이야기로 형상화한 이야기 해석이다. 메타설화의 설화이론처럼 이야기의 생명은 이야기하는 데 있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야기는 죽는다. 구비전승되지 않는 이야기는 사실상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죽으면 그냥 이야기만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 곧 설화 전승 집단도 더불어 죽는다. 이야기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이야기 없는 사회, 침묵하는 사회, 그것은 곧 상상력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처럼 설화의 상상력은 설화의 전승력과 함께 간다. 설화 없는 곳에 설화의 상상력이 문화 창조의 뿌리로 작용할 수 없다. 설화에 대한 상상력을 이해하고 설화의 전승력을 북돋우기 위해서도 이야기의 이야기부터 널리 보급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이야기의 담지자들인 민중들이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다양한 설화들을 널리 이야기하여 살아 생동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 설화 유산을 되살리는 일이자 민족적 창조력과 설화적 상상력의 역동성을 지금 여기서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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