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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olappa 2008. 5. 16. 04:24
서화담 기철학의 현대적 의미

1. 들어가며
한사람의 사상을 공부할 때 자기시대와의 연관성상에서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 서화담의 사상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의 사상을 통해 현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게다. 현대에 있어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일차적인 과제로 떠오르는 것으로 우리는 남북통일, 환경생태계회복, 도덕성상실극복 등을 꼽을 수 있을 게다. 이러한 문제들의 공통점은 그 단절성에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단절성은 원래의 모습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그 해결책 역시 그 원래의 성질을 회복하는 선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서화담의 기철학을 언급하는 이유 또한 어느정도 드러났을 텐데 바로 그의 기철학이 가지는 연속적인 의미에 주목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속적 의미는 서화담이라는 한 인간이 가지는 의미와 그의 기철학이 가지는 의미를 모두 포괄한다. 이 글은 화담과 그의 기철학이 가지는 연속성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단절된 문제들의 해결책으로서 과연 어떠한 가치가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2.서화담이라는 인간이 가지는 연속성
서화담은 모든면에서 중간적 입장에 서 있다. 이것은 그의 신분적 입장과 사상적 입장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신분적 입장은 시대환경에 의한 제한과 자신의 기질에 의해, 그의 사상적 입장은 그의 학문 탐구의 독자적 태도와 중국선현들의 사상의 창조적 결합에 의해 주어진다.
먼저 전자를 살펴보자.
그의 생몰연대는 조선 성종 20년(1489)에서 명종 1년(1546)까지다. 그의 집안은 당시 명분상 양반일 뿐, 대대로 벼슬을 하지 못하여 빈궁한 살림을 꾸려갔는데, 그의 조부이후에는 형편이 더욱 어려워져서 남의 토지를 소작할 정도였다. 이러한 집안형편으로 볼때 그에게는 양반으로서의 특권 의식이나 우월감은 이미 존재하지 않은 준서민적 정체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질과 지위가 보장되는 양반의 길을 걷지 않았는데 이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볼 수 있겠다. 즉 그의 소박한 서민적 기질에 의해서였거나 아니면 당시의 사화로 얼룩진 정치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환멸감에서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한평생을 가난 속에서 학문만을 탐구하며 고독하면서도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생애를 꾸려갔다. 이러한 그의 삶을두고 혹자는 "그는 유가의 ‘下學而上達’ 이란 궁극적 이상을 외면한 채 ‘下學’만을 꾀하다가 갔다"고 평가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가의 ‘上達’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시대상황에서, 더구나 그러한 상황이 ‘하학이상달’을 근본으로 한다는 정치집단에 의해 초래된 마당에 그를 그런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오히려 시대적 상황을 망각한 채 한 개인이 시대를 이끌 수있다고 호언하는 것이야 말로 크나 큰 착각이요, 오만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서민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는 학문탐구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이는 그가 천성적으로 공부하기를 즐겨했다는 연보에서도 드러나듯이 그는 어렸을때부터 학문에 대한, 특히 자연현상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그는 주희의 格物致知의 학문방법론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즉 사물에 직접 나아가 그 원리를 궁구하는 격물치지를, 화담은 어렸을때부터 자연을 벗삼아 지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깨달아 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방법론은 당시의 학자들의 출세를 위한, 지식 자체를 위한 격물치지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는 ‘하학이상달’의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학문에 대한 탐구, 진리에 대한 탐구는 그 어떤 인위적인 목적이 끼어 들때 오히려 왜곡되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진리 또는 학문은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충실히 찾아갈 때 자연히 그 탐구자에게도, 타인에게도 참되고 유용한 가치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때, 송대 주희의 주자학이 그 근본취지가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원대에 들어와서 과거제에 의한 관학으로 승격되었을때 그 학문의 본질이 퇴색하고, 그 형해만 남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그에 앞서 자연과 세계에 관해 훌륭한 연구를 해 놓았던 중국의 여러 先哲들의 작업을 창조적으로 소화하여 그의 기론을 더욱 독창적으로 전개한다. 물론 그 자신은 자신의 작업의 독창성만을 강조하는 등 앞선 선철들의 업적을 별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의 글의 군데군데에서 그러한 의양한 부분들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어쨌든 그는 자신의 자득한 사유 속에 기존의 이론들 즉, 소옹, 장재, 주돈이의 설을 선별적으로 취하여 결합했다고 볼 수 있겠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천과 후천이라는 소옹의 발생론적 구도 속에 장재의 기론을 결합하여 우주 발생론과 존재론의 정합적 체계를 만들고, 주돈이가 `無極而太極`이라고 표현한 무형상의 법칙성 및 운동성을 `機自爾`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기의 내재적 성질로 설정한 것이다. 또한 노장 특히, 장자적 사유와 주역의 논리는 그의 사상에 전체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학문경향의 중도성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사상만을 외골수로 고집하지도 않고 기존의 사상 즉, 정주학의 논리에 완전히 매몰되지도 않은 가운데 양자의 절충점을 찾아 자신의 독창적인 논리로 삼은 것이 바로 그의 기철학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에게는 유가와 도가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없는데 이 또한 그의 중도적 경향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위에서 우리는 화담의 신분적 입장과 사상적 입장에 있어서의 중도적 경향을 살펴보았다. 이와 같은 그의 중도적 경향은 자연히 양 극단을 지양하고, 이를 연결하게 된다. 즉, 화담이라는 인간의 신분적, 학문사상적 연속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성적 경향은 그의 기본사상인 氣論에 있어 본격적으로 그 의미를 드러낸다. 어쩌면 그의 그러한 경향이 理가 아닌 氣를 그의 학문탐구의 중심영역에 놓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3. 화담의 氣의 연속성적 의미
필자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작업은 앞서 언급한 현대적 제 문제들과 관련하여 화담의 氣의 연속성적 의미가 가지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있다. 이러한 논의는 분명 논리적으로 아직 다듬어야 할 거친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 글의 목적은 현대적 문제 해결을 위한 하나의 시론에 불과한 것이지,어떤 논리적으로 정치하고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함도 아니요, 또 그러기에는 필자의 학식이 너무 일천하다.
화담의 기는 그 내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그 외적인 측면에서 연속성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내적인 측면은 화담의 氣 자체의 성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외적인 측면은 현대라는 시대 환경과의 관련선상에서 추출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화담의 氣는 일반적인 의미의 氣의 의미와 많은 부분에서 겹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래 氣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많은 변천을 겪어 온 것인 만큼 그러한 의미의 중복 역시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리라 본다.
화담의 기는 기본적으로 유가와 도가 양자의 절충적 의미의 氣이다. 유가로서의 기라는 말은 즉, 그가 氣를 비록 정주학적 의미에서는 아니더라도 理氣論적 맥락 속에서 살펴 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原理氣」,「理氣說」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의 氣는 정주계 성리학의 氣보다는 도가의 氣에 더 가깝다. 성리학의 氣는 理에 의해 그 존재의미를 가지는데 반해, 화담의 氣는 理없이도 존재 가능하며, 오히려 그에게서 理는 氣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氣는 도가의 氣와 마찬가지로 道法自然의 측면이 드러난다. 즉, 氣로 표현되는 자연은 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재적 법칙에 지배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화담이 말하는 '機自爾하여 自能爾하고 自不得不爾한 이치'와 같은 의미맥락을 갖는다.
이러한 화담의 절충적 氣는 현대 한국사회의 근대성논의에 있어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서구 근대성의 한계선에 봉착하여 전 지구차원의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혹자는 유가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하고 있고, 혹자는 도가의 무위자연과 같은 이론이 21세기의 대안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화담의 절충적 氣가 유가와 도가적 의미를 두루 포괄하고 있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우리에게 필요한 논의는 유가만으로도, 또는 도가만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한 총체적이고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위기다. 따라서 화담이 그 자신의 자득한 바탕위에 선철들의 유가적, 도가적 사상을 선별적으로 취해, 자신의 독창적인 氣哲學을 창조해 내었듯이 오늘의 우리 역시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은 우리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이해인 것이다. 그러고 난 후에 동양이든, 서양이든 과거의 것이든, 오늘의 지혜든 필요한 것들을 종합 또는 재창조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화담의 기철학에 일관해서 흐르고 있는 것은 주역의 생명적 자연관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역의 생명적 자연관이 유가와 도가의 자연관을 일관하는 동양사유의 전범임을 알 수 있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위기가 기본적으로 서양의 잘못된 자연관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현대 과학기술문명의 모태가 된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에는 '힘으로써의 지식'을 강조한 베이컨의 근대적 패러다임, 자연의 비신격화와 동일한 맥락에서 정신과 물질을 분리시킨 데카르트의 이원론, 그리고 인간중심적인 성서의 자연관이 근저를 이루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 문명이 야기한 생태계 위기의 뿌리가 바로 이와 같이 자연의 본질에 대한 그릇된 시각, 즉 잘못된 자연관이라고 한다면, 위기의 극복은 사회경제체제적 접근이나 과학기술적 접근만으로는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보다 근원적인 대체방안으로서 새로운 자연관을 모색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서구 근대의 자연관과 주역의 자연관을 대비시킬 때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차이점은, 주역은 자연을 기계적 물체가 아니라 생명체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서 목적 지향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심적인 요소까지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에서 그 천지의 마음을 볼진저(復見其天地之心)’라고 하여 천지에 心을 적용하고 있는 復卦‘象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역의 내용을 서화담은 그의 논의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자연을 氣로써 이루어진 개체 생명들의 유기적 관계망으로 이해함으로써, 각 개체들의 상호 의존성,상함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자연의 생명성뿐만 아니라 심적인 요소까지 인정하고 있다. 이 같은 자연관은 정신과 물질을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물질로써 이루어진 자연을 영혼이 빠져버린 죽은 세계로 보고 자연과 인간을 염격히 구분하여 자연을 정복 착취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서구 근대의 자연관과는 그 근본전제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氣論적 사유방식에 의한다면 인간도, 자연을 구성하는 다른 생명들과 상호의존적·상함적 관계에 있는 하나의 개체 생명이다.
근대성의 한계점에 있어서 현대사회의 위기는 자연생태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도구적 이성을 중시하고 개인과 개인을 별개의 원자로서 떼어놓은 서구적 인간관과 정치철학은 자본주의체제로 들어서면서 인간소외문제를 야기하였고 심지어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결과 도덕윤리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얼마전 TV에서 학교체벌에 관한 찬반논의가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참담한 심정을 가눌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도덕위기논의에 있어서 단지 유가의 전통적 질서 만을 운운하며 학교에서 명심보감을 가르치자느니, 국민윤리헌장을 새로 제정하자느니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도가적으로 학생들에게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학교는 시장바닥이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서화담의 사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가? 우리는 그의 氣論에 있어서의 변증법적인 면에 주목하게 된다. 그는 사물의 통일체 속에는 서로 모순되는 성질을 가진 대립물이 존재하며 그것들 간의 투쟁(生剋)에 의하여 모든 운동변화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물론,성리학자들도 사물의 운동을 음양의 원리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음양이 상호작용하게 하는 원인, 즉 그 필연(所以然)을 理라고 함으로써 사물 운동의 원인을,그 사물 외적인 데서 찾는 관념론, 즉 형이상학적 견해에 편중되었다. 즉,주자학자들에게 사물의 운동이란 절대적,정신적 실체인 理의 운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믿을 수 없이 변동하는 가치 뿐이므로 불변의 일반적 형식 가치인 理만이 철학의 주제로 채택되어서는 곤란한 것이다. 오늘의 윤리관의 정립문제는 오직 현재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 밖의 모든 것은 거짓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화담의 유가적 時中사상과 도가적 止의사상에 주목하게 된다. 즉 그의 기론에서의 時中之道는 정통유가와 마찬가지로 시기에 적중한 도, 즉 현실적으로 적용할 만한 가치가 있는 도를 말한다. 이는 곧, 오늘에 있어 시대적 변화에 대한 인식과 그에 적합한 창조적 실천이다.한편, 그의 도가적 止의 사상은 그의 《送沈敎授義序》에 나타나는데, 이는 곧, 자연의 작용에 각기 멈춤이 있듯이 인간의 만사에도 멈춤이 있음이 만물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 역시 근본적으로는 주역의 천인합일 사상과 같은 맥락이지만, 특히 자연에 순응하는 그의 도가적 安分知足의 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위와 같은 서화담식의, 시기에 맞는 적절한 양보, 또는 멈춤의 지혜가 요청된다 하겠다. 이는 인간과 인간간의 과도한 권리주장으로 인해 초래된 윤리문제를 위한 하나의 완충작용, 중화작용으로서 작용 가능한 것이다.
이제 그의 氣가 가지고 있는 그 외적인 측면을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한국의 분단현실을 극복할 철학을 모색해 보자. 이러한 시도는 서화담의 철학이 분단된 양 체제에서 모두 연구되어지고 수용되어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각기 다른 체제하에서 각기 다른 의도하에 이러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분단현실과 그리고 앞으로 언제 이루어 질진 알 수 없지만 실현될 통일을 위해 어떠한 형식으로든 이질적인 양 체제의 이념과 정서를 극복하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 철학의 요구가 필연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작업은 결코 무의미한 공염불은 아닐 것이다. 다만 문제는 논리적 정합성과 현실적 실현가능성을 얼마나 담보하고 있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화담의 철학을 바라보는 양체제의 입장은 어떻게 다른가? 먼저 우리가 주지하듯이 대체로 한국철학사를, 남쪽에서는 관념론적인 시각으로, 북쪽에서는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서화담의 철학 역시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 될 수 있겠다. 즉, 남한에서는 그의 氣의 의미를 가능한 한 성리학 내에서의 主氣論적인 시각으로 보면서 그가 조선 성리학에서 최초로 主氣論을 완성한 主氣論者이며, 자연철학자인 것만을 얘기한다.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는 철저히 유물론과 변증법의 입장에서 그의 철학을 서술한다. 그들은 철학사는 관념론과 유물론, 형이상학과 변증법이 투쟁해 온 역사라고 하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사의 관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주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이고, 서화담의 사상은 그것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의 기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 서화담의 존재는 ‘우리에게도 이처럼 훌륭한 막스주의적 성격의 철학이 있다’는 하나의 자부심으로서 환영받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완전히 다른 가치체계 속에서 다른 의미로서 대접받고 있는 양자의 시각에서 그래도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요소는 바로 그의 사상의 핵심인 氣의 개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氣는 남한의 관념적 요소를, 북한의 물질적 요소를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이다. 즉, 데카르트 이래의 이원론으로부터 유발된 몸과 마음,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는 시각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이 氣에 있는 것이다. 특히 그에게 있어서 氣의 의미가 해석하기에 따라서 때로는 극히 관념론적으로 때로는 극히 유물론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앞에서 밝힌 그의 氣의 절충적인 측면에 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서화담에게 있어서 氣의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이 아무런 문제없이 잘 조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오늘의 분단된 양 체제가 각기 주장하는 입장이 그 모순된 측면 못지 않게 잘 조화될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氣의 정적이면서도 동적인 성격이 모두 하나의 기틀 속에 존재하듯이 남한과 북한의 관념과 유물 또한 어떻게 보면 하나의 기본 바탕 속의 다른 측면에 주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통합가능성에 주목하여 氣에 대한 연구를 더욱 진작시키는데 있지 않을까?
또한, 氣는 현실의 사회체제에서 나타나는 많은 변화를 그 무엇보다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의 주된 사상의 원천이 주역임은 이미 앞에서 말한바 있는데, 주역에서의 자연은 끊임없이 생성,순환,변화, 소멸하는 생생지도의 자연이며, 인간 역시 그러한 도를 무의식중에 쓰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연적 존재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그가 살피고 있는 氣의 생극의 원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된다. 즉, 문명권과 문명권의 관계를 비롯하여,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 지방과 지방, 계급과 계급의 관계, 또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도 근본적으로 이러한 원리와 일치한다. 이러한 각도에서 바라볼 때 사회주의국가의 붕괴를 두고 자본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할 필요도 없고, 서양에 대한 동양의 열세를 두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각은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남과 북이 언제나 분단상황에 놓여 있으리라는 법도 없고, 더구나, 서로의 사상이 언제나 이처럼 커다란 골을 형성하고 있으리라는 법도 또한 없다. 남과 북이라는 분단상황의 극복은 그 주체들이 각기 다른 양 체제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질서의 회복이라는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3. 끝맺으며
우리는 여기서 편의상 단지 서화담의 氣사상에 국한하여 논의를 전개해왔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현시대적 문제의 해결은 어느 하나의 사상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은 분명 아니다. 또한, 여기서 파악하고 있는 그의 사상 역시 엄연히 시대적 한계를 갖고 있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사상이란 것이 앞 시대와의 연관속에서 형성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한 인간의 역사에 공시성과 통시성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 진리라면,한 철학자가 한 시대에서 살아오면서 형성한 삶의 지혜는 곧, 조선의 서화담이라는 한 인간과 그의 사상, 특히 氣哲學의 차원을 떠나 오늘날 우리의 철학으로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1.조선유학의 자연철학,한국사상사연구회 편저,예문서원,1998,서울
2.인간과 자연,송영배 외 지음,철학과 현실사,1998,서울
3.동양철학-서양철학과 어떻게 다른가,양재혁 지음,소나무,1998,서울
4.新實學의 탐구,尹絲淳 外,열린책들,1993,서울
5.논쟁으로 보는 한국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예문서원,1995,서울
6.氣와 인간과학,유아사 야스오편,여강출판사,1992,서울
7.인문학문의 사명,조동일,서울대학교출판부,1997,서울
8.서화담문집,김학주 외 역,세계사,1993,서울


4 Aug. 2004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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