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와 한비 비교
Ⅰ. 들어가는 말
『史記』는「신불해와 한비가 노자와 장자에 사상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고, 실제로 『한비자』에는 도가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중에서도『韓非子』의 「解老」편은 완정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분적인 章節이나 文句가 문헌에 전하는 것으로 현존하는 판본가운데 가장 오래된 『노자』 해설서이다. 『한비자』의「解老」편은 먼저 노자의 원문 구절을 조목조목 해석한 다음,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에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故曰……)라며 『노자』의 원문을 밝히는 식으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모아 보면 현재 통용되는 판본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많은 학자들은 이 「해로」편은「喩老」와 더불어 한비자의 저작 중 드물게 순수한 철학적 내용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데, 이러한 점에서 이는 분명 한비의 법가사상에 있어 중요한 철학적 근거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할 수 있겠다. 상식적으로 법가의 사상체계는 노자의 그것과 완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한비가 노자를 해석하여 자신의 사상의 주요한 근거로 삼았을 때에는 필시 일정한 윤색 또는 왜곡의 과정을 거쳤음에 틀림없다. 이는 한비의 노자 사상에 대한 의도된 곡해이든지 아니면 노자사상 자체가 원래 오해의 소지를 갖기 쉬운 것이던지 간에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는 한비가 「해로」편을 통해 노자의 사상을 어떻게 변용시켜 나가는지(오해하고 있는지)를 법가의 주요개념인 法·術·勢와 노자의 주요개념인 道·無爲·小國寡民를 각각 비교해 봄으로써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Ⅱ. 老子의 道와 韓非의 法
노자는 자연·무위가 도의 근본특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도가 존숭받고 덕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명령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도와 도를 체현하는 덕은, 모두 주재를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하며 억지로 함이 없는 특성을 구유하고 있다. 스스로 그러함은 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天·地·人의 본성이기도 하다. 노자의 이러한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도(法自然之道)가 한비에 이르러 어떠한 형식으로 바뀌게 되는 지 그의 「해로」편의 몇 구절을 통해 살펴보자.
道란 쌓음이 있는 것이고 德이란 功이 있는 것인데, 德이란 道의 공적이다. 功에는 實이 있고 實에는 광채가 있는데 仁이란 덕의 광채이다. 광채에는 윤택함이 잇고 윤택함에는 일이 있는데, 義란 仁의 일이다. 일에는 禮가 있고 禮에는 꾸밈이 있는데, 禮란 義의 꾸밈이다. 까닭에「道를 잃은 후에는 德을 잃고, 德을 잃은 후에는 仁을 잃고, 仁을 잃은 후에는 義를 잃고, 義를 잃은 후에는 禮를 잃는다.」고 한 것이다.
道란 만물이 그렇게 되는 근거이며, 萬理가 모여있는 것이다. 理는 개별적인 만물을 이루는 법칙이며, 道는 만물을 이루어내는 근원이다. 그러므로,「도는 만물에 리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물에는 각각의 理가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한다. 만물에 각각의 理가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므로, 理는 각각의 사물을 통제하게 되고, 만물은 각각 理를 달리하는 것이다. 만물이 각각 理를 달리하지만 道는 만물의 각각의 理를 통할하고 있으므로 化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化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영원불변함은 있을 수 없다.
무릇 理란 네모진 것과 둥근 것, 짧은 것과 긴 것, 거친 것과 섬세한 것, 굳은 것과 연한 것의 분별이다. 그러므로 理가 정해진 후에야 道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道와 德의 지위나 성격이 仁·義·禮와 별로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노자가 道와 德을 仁·義·禮를 부정하기 위해 끌어들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일단 다르다. 물론 노자 38장을 보면 노자 역시 仁·義·禮에 대해서 상당히 높이 평가함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인을 작위하되 어떤 대가를 바라는 계산된 의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의는 인의 그런 자연스런 유출이 방해받지 않도록 외재적인 환경과 조건을 규제해서 안과 밖, 나와 남, 행위와 일 등 모든 사회적 관계를 서로 알맞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마땅함(宜)이라고 했고, 예는 인과 의가 무너졌을때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강제성을 띤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한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노자는 仁·義·禮의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데, 그는 일단 인간의 순수성(도, 상덕)이 흔들리면 층차적으로 가치의 상실을 가져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계속 문제 자체를 쫓아감으로써 끝없는 문제의 순환고리에 빠져드는 인위적인 치료방법을 쓸 것이 아니라 그런 지엽적인 방법을 배제하는 무방법의 방법, 곧 순수성으로의 회귀만이 바로 근본적 치료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인위적인 작위나 지식은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아무리 최선이 된다 할지라도 자연이나 도에는 미칠 수 없는 차선의 것에 지나지 않는 방편일 뿐이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노자』의 원문과는 달리 '失'자가 붙은 것 역시 한비의 그러한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즉「道를 잃으면 禮도 잃게되고」는 곧「禮를 얻으면 道를 얻게 되는 것」이라는 '禮'의 정당화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禮' 다음에 위치하는 '法'에 道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한비자의, 노자에 대한 '의도적·본질적 곡해'인 것이다. 이는 곧 노자의 무차별·무분별의 '道'가 한비의 노자해석을 통해 분별·차별의 '法'이 되어 나오는 장면으로, 한비는 이로부터 그의 법의 철학적 근거로서 도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김충열 교수는 『한비자』「해로」편이 노자 사상을 곡해했다는 주요한 근거로 두 번째 문장을 들고 있다. 그가 보기에 「해로」편은 인위문화를 부정하는 『노자』의 초본체론적 논리구조를 왜곡시켰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도'(법자연지도), 즉 '만물이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하는'(萬物自生自化) '무위의 도'를 만물이 의지해야 하는 '도', 즉 만물의 '所以然'의 '근본'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노자』의 '道'를 '理'로 교묘하게 탈바꿈시켜 자기들 철학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 노자철학은 변질되고 나아가 법가의 우상인 黃老學으로 이용당해 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에서의 '理가 정해진 후에나 道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리' 즉 법가의 '法'이 '도'에 선행된다는 것, 즉 법가의 '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도'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로써 '도가의 도'는 '법가의 법'으로 확실하게 대치되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도가의 도를 절대적 도로 변질시켜, 이를 법가의 법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법가의 법에다 변질된 절대자가 가지는 절대성, 존엄성, 우월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군주를 도와 동체로 놓을 뿐만 아니라 법의 군주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법 내용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군주에 의해 제정·개정·집행되는 법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당한 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군주는 절대적 법보다도 더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주에게 있어 '道'는 나라를 보전하는 방법의 근원인 '법'인 것이다.
Ⅲ. 老子의 無爲와 韓非의 術
노자는 자연과 무위를 도의 근본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무위는 똑같이 도의 본성이며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즉도의 내적 표현양식이 '자연'이라면 그것의 외적 표현양식이 곧 '무위'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을 연용한 '무위자연'은 도가 표현한 바의 기본특성이며 기본정신이다. 이것은 노자의 중심사상으로 기타의 중요관념들은 모두 이 '무위자연'이라는 관념을 둘러싸고서 전개된 것이다. '무위자연'은 사물자신의 상황이 자유롭게 전개되는 것에 따르고 맡겨서 외재적 강제나 힘을 사용하여 그것을 속박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無爲'란 '자연에 따르는 행위(法自然)'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본성이 흐르는 대로 행위하지만 사물이나 사건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자유자재의 행위를 말한다.
노자에서 무위와 관련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1.성인은 無爲의 일에 거처하며, 불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2.無爲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3.분명하게 알고 사방으로 통달하여 無爲할 수 있는가?
4.道는 항상 無爲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侯王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장차 스스로 자신을 전개한다.
5.최상의 덕을 지닌사람은 無爲하여 의도적인 행위가 없다.
6.천하의 지극히 유약한 것이 지극히 강견한 것을 부릴 수 있다. 무형의 존재는 간극이 없는 사물을 뚫고 들어 갈 수 있다. 나는 이로써 無爲가 유익함을 안다. 그러나 불언의 가르침과 무언의 유익함은 천하사람들 가운데 이것에 미칠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1
7.학문을 닦으면 날마다 늘어나며 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이로써 無爲에 도달한다. 無爲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8.내가 無爲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변화한다.
9.無爲를 실천하라.
10.聖人은 無爲하는 까닭에 실패가 없다.
이상의 자료에서 우리는 노자의 '無爲'가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의 노력하는 행위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爲道工夫'를 통해서 날마다 우리의 행위를 갈고 닦아 인위적인 군더더기는 모두 덜어낸 최선의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이 최선의 행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일체 모든 것을 성취해 내려는 역설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불위와는 질적으로 판이한 상태이다. 불위는 최초의 원시적 상태로서 나태하고 게으른 행위인 반면에 무위는 '體道工夫'를 거쳐 인위적인 작위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조금의 瑕疵도 발견할 수 없는 완전무결에 도달하는 적극적 행위개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不爲'로 잘못알아서 무위자연을 소극적 염세주의 내지 은둔사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無爲는 '無不爲'의 적극적 개념이다. 그것은 차별적인 이기적 욕구의식에서 벗어나 어떤 것과 접하든지 간에 그대로 응하여 함께 나아가는 태도로서 주객의 합일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선입견이다 편견이 없는 상태이며, 내적 명상을 통한 순수자아의식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자연'이 천지만물의 운행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무위'는 인간의 활동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 순응하여 무위하게 되면 이 둘은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므로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도는 그 자신의 상황에 의거하여 그 자신의 내재원인으로 자신의 운동과 운행을 결정한다. 따라서 기타 외재하는 원인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이런 도의 본성을 자연이라고 표현하므로 자연이라는 말은 결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형용한다. 이런 형이상적 자연개념을 인간의 현실 즉 인생과 정치방면에 적용한 것이 '무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방면에서 무위를 운용한 통치는 바로 백성들에게 취대의 자주성을 안겨주고 특수성과 차이성을 허용한다. 다시말해 개인의 인격과 개인의 소망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활동범위까지 침범하여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치자에게 있어서 무위관념은 위정자들의 독단적인 의지와 전제적 행위의 확대와 진전을 해소하여 백성의 권리에 대한 협박이나 병탄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의 무위는 일정한 현실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자의 무위론은 한비가 보기에 어처구니가 없는 것일지 모른다. ''無爲自然의 道''를 ''萬物의 '所以然'의 根本''으로 탈바꿈시킨 그에게 있어 '無爲自然'의 의미는 '法化된 道'를 여과할 수 밖에 없었으니 달리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비자 역시 겉으로는 노자처럼 無爲論을 내세우지만 그 이상에 이르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노자는 「지식이 줄고 또 줄어들어서 無爲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했다. 仁義와 孝慈가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法令이 밝아지는 것'은 더욱 허용할 바가 못된다. 군주는 백성의 마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삼아야 하며, 천하를 자연에 맡기니, 천하는 그렇게 다스려진다. 그러나 한비가 無爲에 이른다는 것은 明法勅令(법을 밝게하고 명령을 갖춤)과 重刑壹敎(무거운 형벌과 하나의 교령)의 방법을 통하여 결국 '明君은 위에서 無爲로 주재하며, 뭇 신하들은 아래에서 두려워 한다'는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배기술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그보다 못한 임금이면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는 3류의 정치이며, 그 지위는 아직 유가의 仁政 아래에 두어졌던 것이다. 노자는 방임으로써 無爲에 이르려고 했으나, 한비는 專制로써 無爲에 이르려고 했으니, 이 兩者의 無爲에 이르는 과정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한비의 '無爲'는 사실 申不害로 부터 이어 받은 '術'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신불해의 '術'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면 자연히 한비의 '無爲而治'로서의 '無爲而術'의 실체가 드러난다.
申不害의 術治사상에 대해 『사기』의 「老莊申韓列傳」에서는 〈申不害의 학문은 '黃老'에 근본을 두고 있고 '刑名'을 주로 하였다.〉고 하면서 申不害를 老子·莊子·韓非子와 함께 거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申不害가 말하는 '無爲而術'이 노자의 '無爲'를 어떻게 변용한 것인지를 알아야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申不害는 老子의 '無爲'와 '有爲'의 형식을 빌려와, 그 내용을 교묘하게 변질시켜 '君主의 無爲'와 '臣下의 有爲'라는 〈名分論〉과 접합시키고 있다. 신불해가 변질시킨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노자의 '무위'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었다. 즉, 君主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불해는, 이를 완전히 왜곡하여, 군주만이 무위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따라서 이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가 아닌 신불해식의 '職分行爲配屬'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신불해는 '군주의 무위의 태도'에 있어서도, 무위의 의미를 군주 '자신'의 有爲적 영역을 초월하는 의미가 아닌, 도리어 신하들의 모든 행위를 군주가 헤아리는 것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따라서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비판·비난·평가'만이 있을 뿐, 자기자신에 대한 내적 초월의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로써 군주에게는 노자의 도덕이 가지는 일체의 모든 공능과 그 우월성을 독차지할 수 있는 절대권위와 절대권능이 부여될 수 있게 되었고, 반면 '신하백성'에게는 현상계의 잡다한 직무와 사무를 처리해야만 하는 열등성이 부과되었다. 타인으로 하여금 「일하도록 하고, 살아가도록 하고, 내나가도록 하고, 공을 이루도록 하면서도」 동시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聖君의 無爲而治'는 신하·백성으로 하여금 「과중하게 일하도록 하고, 해나가도록 하고, 공을 이루도록 유위로써 강요·위협하면서도」 항상, 「자신은 타인의 노력과 공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자기자랑으로 삼는」 '군주의 간교한 無爲而術'로 변질되게 된다. 즉, 노자에 있어서의 성군간의 수평적·상보적·쌍방적 조화관계를 수직적·상대적·일방적 대립관계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것은 만물이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하는 '道家의 道'를 '만물이 의지해야만 하는 道'로 왜곡시켜, 이 왜곡된 道의 우월성'을 군주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것이 君主를 道와 동체로 만들어 '一人의 絶對君主의 우월성과 존엄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은 자명하다.
다음의 몇 문장을 통해 그의 '無爲而術'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훌륭한 군주는 몸과 같고, 신하는 두 손과 같다. 군주는 소리와 같고, 신하는 메아리와 같다. 군주는 근본을 세우고, 신하는 세부업무를 처리한다. 군주는 요체를 다스리고, 신하는 구체적 사항을 처리한다. 군주는 권세를 장악하고, 신하는 일상업무에 종사한다. 군주는 부결을 잡고서 신하에게 그의 '名'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名'이란 천지의 綱領이며 성인의 符信이다.
한 명의 신하가 군주를 제멋대로 할 수 있다면 나머지 많은 신하들이 가리워질 것이다. 그러면……그 亂臣이 어려움 없이 국가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 때문에 훌륭한 군주는 그의 신하들을, 마치 수레바퀴의 많은 살들이 가운데의 바퀴축 하나로 모이듯이 하여 모두 나란히 陞進시킴으로써, 아무도 군주를 제멋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군주가 명확하게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에 대비한다. 군주가 아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에 꾸밈을 가한다. 군주가 모르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을 감추어 버린다. 군주가 바라지 않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보며 살핀다. 군주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으로 유혹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나는 아는 것을 따르지 않으며, 오직 무위함만이 사람들의 태도를 규제할 수 있다.
말을 신중히 하라. 사람들이 너를 알려고 할 것이다. 행동을 신중히 하라. 사람들이 너를 따르려고 할 것이다. 아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너에게 감추려할 것이고, 모르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네 뜻을 추측하려 할 것이다. 네가 아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너에게 감출 것이고, 네가 모르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너에게 자신의 뜻을 실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직 無爲함만이 사람들의 태도를 규제할 수 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군주의 무위'란 자신의 의중을 전혀 신하에게 드러내지 않는 일체의 말과 행위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바라는 것을 드러내지 말라는 단순한 不作爲的 態度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안지 못하는 것,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을 그때 그때의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드러내지 않기도 하는 '作爲와 不作爲를 모두 포함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無爲而術'의 목적은 '자신의 意中', 즉 자기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에 있다기 보다는 '타인의 意中'을 알아내어 '타인을 통제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아는 것도 모르는 체,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여 상대방의 意中을 떠보는 방법이나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중을 표명하도록 만드는 방법 등도 모두 '무위이술'에 포함된다. '말과 행위를 신중히 하라'는 것은 바로, 그때 그때마다의 경우에 적합하게 타인과 자신을 모두 고려하여 '자신의 의중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의중을 가장 잘 헤아려 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선택하여 말하고 행위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미 신하를 적극적으로 통제하여 절대군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군주의 권모술수'이지, 결코 노자가 제출한 '無爲'가 아니다.
이제 이러한 신불해의 사상을 통해 한비의 術治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역시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앞에서 이미 살핀 노자의 도에 대한 한비의 해석, 그리고 한비가 이어받은 신불해의 '무위술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한비의 「解老」편에서 한비가 언급하고 있는 몇몇 문장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명확해지는 것이다.
無爲, 無思를 귀하게 여겨 虛를 위하는 사람을 일러 그 뜻이 제약되지 않는다고 한다. 無術이라고 하는 것은 無爲, 無思로 虛를 위하기 때문이다. 無爲, 無思로 虛를 위하는 사람은 그 뜻이 항상 虛를 잊지 못하는 데 이는 虛를 위하는 데에 제약되기 때문이다. 虛란 뜻이 제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虛를 위하는 데에 제약되는 것은 虛가 아닌 것이다. 虛란 無爲라는 것이고, 無爲로써 有常을 삼지 않는다. 無爲로써 有常을 삼지 않는 것이 虛이다. 虛란 , 德이 성대한 것이고 이를 上德이라 한다. 그러므로 「上德은 無爲이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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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은 외물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위한 禮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존경함으로써 禮를 삼기 때문에 때로는 노력하고 때로는 쇠미해진다. 군자는 자신을 위함으로써 禮를 삼는데, 자신을 위하므로 神하여 上禮가 된다. 上禮는 神하고 衆人은 貳하니 고로 서로 응할 수 없다. 서로 응할 수 없으므로, 「上禮로 하면 應할 수 없다.」고 한다.
嗇이란 그 정신을 아끼고 그 지식을 아끼는 것이다. 그러므로「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는 아낌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는 얼핏 보기에는 노자의 사상을 잘 풀이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위의 글은 앞서 신불해의 '無爲而술'의 내용을 통해 그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리고 한비의 다른 편과의 연관선 상에서 바라볼때 비로소 정확하게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문장에서 한비는 無爲·無思의 虛靜을 內省의 방향이 아니라,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요당하는 일'이 없다는 절대로 자유로운 전개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신불해에 대해 살핀 방식으로 접근해 보아야 한다. '術'에 있어서 한비는 신불해의 충실한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한비가 강조하는 군주의 '術' 역시, 신불해와 마찬가지로 군주가 스스로 賞罰의 權을 확실히 장악하고 이를 엄정히 집행하며, 臣民에게 법을 이행시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形(名에 대한 실적)과 名(신하가 해야할 일정한 일)을 審合하여 그 일치를 구하며, 약간의 과부족도 허용치 않고, 그 직분 이외의 일에는 신하가 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形名을 審合하려면, 사람을 믿는 일은 남의 지배를 받는 원인을 제공하므로 군주는 자기의 情·意를 조금이라도 드러내어 신하가 아첨할 틈을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無爲·無思의 '虛'이고, 그 뒷 문장의 예측불능의 神이며, 정신과 지식을 소모하지 않는 嗇이다. 虛하여 神하고, 神하여 嗇한 채로 기다리면서, 名으로 하여금 스스로 命하고, 일로 하여금 스스로 定하게 한다. 군주는 이러한 '無爲而術'을 통해 군권을 신하로부터 확고히 지키고, 나아가 그것을 절대화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비가 지향한 무위의 본질은 통치자가 관료조직을 전체적인 질서의 메커니즘 속에서 사역하는 시스템, 즉 관료들의 '有爲'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통치자의 무위적 통치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노자가 당시의 권위적인 질서, 인위적인 문명을 비판하려고 도입한 '무위'의 기획이 도리어 한비의 군주의 절대권력을 옹호·유지하려는 논리로 둔갑한 것이다.
Ⅳ.노자와 한비의 성인관 비교
가장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 다음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친하게 여겨 칭송하고, 그 다음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가장 나쁜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이는 노자의 성인관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노자는 여기서 백성들이 경멸하는 통치자가 있고, 백성들이 두렵게 여기는 통치자가 있으며, 백성들이 친하게 여겨 칭송하는 통치자가 있고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통치자가 있다고 하였다. 번다한 금령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경멸하고, 형법을 담들어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은혜를 베풀며 덕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백성들이 친하게 여겨 따를 수 있다고 보았다. 형법을 만들어 다스리는 것이 법가적인 정치라면, 은혜를 베풀며 덕으로 다스리는 것은 유가적인 정치일 것이다. 노자는 번다한 금령으로 다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법가적인 정치와 유가적인 정치조차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노자가 이상시하는 정치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는지조차 모르게(太上不知有之)다스리는 것이다. 그럼 노자가 보는 성인의 모습은 어떠한 지 몇몇 문장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들의 마음을 비워 그들의 배를 채우며, 그들의 뜻을 약하게 하여 그들의 뼈를 강하게 한다.
여기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망상과 사려하는 마음을 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에도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도록 대상지향적 의지를 약화시키고, 내면세계를 풍부하고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의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며, 백성의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기자신을 백성들보다 뒤에 돌본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들 위로 초대되어도 백성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아니하며, 백성들 앞에 있어도 백성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즐거이 추대하며 싫어하지 않는다.
왕이란 歸往 또는 嚮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往'자와 통하니 그에게로 백성들의 마음이 쏠려간다는 뜻이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시냇물은 강과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민심이 한 사람에게로 쏠리면 그가 왕이 될 수 있듯이, 온ㅇ갖 시냇물이 흘러들어가는 강과 바다는 온갖 새냇물의 와이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와이 돌 수 았는 까닭은 그것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자는 사람들이 말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낮출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라의 굴욕을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 이를 일러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일러 천하의 제왕이라 한다.
이 외에 성인과 관련해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문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하나를 껴안아 천하의 법식이 된다.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을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아니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가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나가지 않고서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이름하며, 일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침을 행한다.
성인은 자기의 고정관념이 없이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
이 때문에 성인은 사람들이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구하여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며, 사람들이 배우려고 아니하는 것을 배워서 뭇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으로 돌아가서 만물의 자연을 돕고, 감히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상의 자료에서 노자가 그리는 '聖人'은 無爲로써 살아갈 뿐, '임금'이라는 직분을 추구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백성에 의해 일단 임금으로 추대되면, 그 맡겨진 직분을 무위로써 수행할 뿐 그 자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성인은 임금의 직분에 상응하는 일을 무위로써 수행할 뿐 백성에 대해 자신의 임금으로서의 권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무위의 삶과 무위의 직분행위가 중요할 뿐 직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무위의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통치자나 피치자라는 통치구조가 가지는 구별·차별을 근본적으로 부정·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임금과 백성이 수직적인 대립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조화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임금과 백성의 無爲의 구도 속에서 부패한 통치자나 부패한 백성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4 Aug. 2004
Ⅰ. 들어가는 말
『史記』는「신불해와 한비가 노자와 장자에 사상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고, 실제로 『한비자』에는 도가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 중에서도『韓非子』의 「解老」편은 완정하지는 못하더라도 부분적인 章節이나 文句가 문헌에 전하는 것으로 현존하는 판본가운데 가장 오래된 『노자』 해설서이다. 『한비자』의「解老」편은 먼저 노자의 원문 구절을 조목조목 해석한 다음, 대부분의 경우 마지막에 "그래서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故曰……)라며 『노자』의 원문을 밝히는 식으로 문장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을 모아 보면 현재 통용되는 판본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많은 학자들은 이 「해로」편은「喩老」와 더불어 한비자의 저작 중 드물게 순수한 철학적 내용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데, 이러한 점에서 이는 분명 한비의 법가사상에 있어 중요한 철학적 근거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할 수 있겠다. 상식적으로 법가의 사상체계는 노자의 그것과 완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한비가 노자를 해석하여 자신의 사상의 주요한 근거로 삼았을 때에는 필시 일정한 윤색 또는 왜곡의 과정을 거쳤음에 틀림없다. 이는 한비의 노자 사상에 대한 의도된 곡해이든지 아니면 노자사상 자체가 원래 오해의 소지를 갖기 쉬운 것이던지 간에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는 한비가 「해로」편을 통해 노자의 사상을 어떻게 변용시켜 나가는지(오해하고 있는지)를 법가의 주요개념인 法·術·勢와 노자의 주요개념인 道·無爲·小國寡民를 각각 비교해 봄으로써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Ⅱ. 老子의 道와 韓非의 法
노자는 자연·무위가 도의 근본특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도가 존숭받고 덕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명령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함에 맡기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도와 도를 체현하는 덕은, 모두 주재를 받지 않는 스스로 그러하며 억지로 함이 없는 특성을 구유하고 있다. 스스로 그러함은 도의 본성일 뿐만 아니라 天·地·人의 본성이기도 하다. 노자의 이러한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도(法自然之道)가 한비에 이르러 어떠한 형식으로 바뀌게 되는 지 그의 「해로」편의 몇 구절을 통해 살펴보자.
道란 쌓음이 있는 것이고 德이란 功이 있는 것인데, 德이란 道의 공적이다. 功에는 實이 있고 實에는 광채가 있는데 仁이란 덕의 광채이다. 광채에는 윤택함이 잇고 윤택함에는 일이 있는데, 義란 仁의 일이다. 일에는 禮가 있고 禮에는 꾸밈이 있는데, 禮란 義의 꾸밈이다. 까닭에「道를 잃은 후에는 德을 잃고, 德을 잃은 후에는 仁을 잃고, 仁을 잃은 후에는 義를 잃고, 義를 잃은 후에는 禮를 잃는다.」고 한 것이다.
道란 만물이 그렇게 되는 근거이며, 萬理가 모여있는 것이다. 理는 개별적인 만물을 이루는 법칙이며, 道는 만물을 이루어내는 근원이다. 그러므로,「도는 만물에 리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물에는 각각의 理가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한다. 만물에 각각의 理가 있어 서로 침범하지 못하므로, 理는 각각의 사물을 통제하게 되고, 만물은 각각 理를 달리하는 것이다. 만물이 각각 理를 달리하지만 道는 만물의 각각의 理를 통할하고 있으므로 化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化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영원불변함은 있을 수 없다.
무릇 理란 네모진 것과 둥근 것, 짧은 것과 긴 것, 거친 것과 섬세한 것, 굳은 것과 연한 것의 분별이다. 그러므로 理가 정해진 후에야 道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첫 번째 문장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道와 德의 지위나 성격이 仁·義·禮와 별로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노자가 道와 德을 仁·義·禮를 부정하기 위해 끌어들인 개념이라는 점에서 일단 다르다. 물론 노자 38장을 보면 노자 역시 仁·義·禮에 대해서 상당히 높이 평가함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인을 작위하되 어떤 대가를 바라는 계산된 의식이 없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했고, 의는 인의 그런 자연스런 유출이 방해받지 않도록 외재적인 환경과 조건을 규제해서 안과 밖, 나와 남, 행위와 일 등 모든 사회적 관계를 서로 알맞게 하는 방법으로서의 마땅함(宜)이라고 했고, 예는 인과 의가 무너졌을때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강제성을 띤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한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노자는 仁·義·禮의 기능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는데, 그는 일단 인간의 순수성(도, 상덕)이 흔들리면 층차적으로 가치의 상실을 가져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계속 문제 자체를 쫓아감으로써 끝없는 문제의 순환고리에 빠져드는 인위적인 치료방법을 쓸 것이 아니라 그런 지엽적인 방법을 배제하는 무방법의 방법, 곧 순수성으로의 회귀만이 바로 근본적 치료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인위적인 작위나 지식은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아무리 최선이 된다 할지라도 자연이나 도에는 미칠 수 없는 차선의 것에 지나지 않는 방편일 뿐이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 『노자』의 원문과는 달리 '失'자가 붙은 것 역시 한비의 그러한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즉「道를 잃으면 禮도 잃게되고」는 곧「禮를 얻으면 道를 얻게 되는 것」이라는 '禮'의 정당화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禮' 다음에 위치하는 '法'에 道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한비자의, 노자에 대한 '의도적·본질적 곡해'인 것이다. 이는 곧 노자의 무차별·무분별의 '道'가 한비의 노자해석을 통해 분별·차별의 '法'이 되어 나오는 장면으로, 한비는 이로부터 그의 법의 철학적 근거로서 도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김충열 교수는 『한비자』「해로」편이 노자 사상을 곡해했다는 주요한 근거로 두 번째 문장을 들고 있다. 그가 보기에 「해로」편은 인위문화를 부정하는 『노자』의 초본체론적 논리구조를 왜곡시켰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는 도'(법자연지도), 즉 '만물이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하는'(萬物自生自化) '무위의 도'를 만물이 의지해야 하는 '도', 즉 만물의 '所以然'의 '근본'으로 왜곡시킨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노자』의 '道'를 '理'로 교묘하게 탈바꿈시켜 자기들 철학의 근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어 노자철학은 변질되고 나아가 법가의 우상인 黃老學으로 이용당해 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에서의 '理가 정해진 후에나 道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리' 즉 법가의 '法'이 '도'에 선행된다는 것, 즉 법가의 '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도'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로써 '도가의 도'는 '법가의 법'으로 확실하게 대치되는 것이다.
한비자는 이렇게 도가의 도를 절대적 도로 변질시켜, 이를 법가의 법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법가의 법에다 변질된 절대자가 가지는 절대성, 존엄성, 우월성을 부여해 주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군주를 도와 동체로 놓을 뿐만 아니라 법의 군주의 소유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법 내용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군주에 의해 제정·개정·집행되는 법이라면 무엇이든지 정당한 법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군주는 절대적 법보다도 더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주에게 있어 '道'는 나라를 보전하는 방법의 근원인 '법'인 것이다.
Ⅲ. 老子의 無爲와 韓非의 術
노자는 자연과 무위를 도의 근본특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과 무위는 똑같이 도의 본성이며 도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구체적인 표현이다. 즉도의 내적 표현양식이 '자연'이라면 그것의 외적 표현양식이 곧 '무위'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을 연용한 '무위자연'은 도가 표현한 바의 기본특성이며 기본정신이다. 이것은 노자의 중심사상으로 기타의 중요관념들은 모두 이 '무위자연'이라는 관념을 둘러싸고서 전개된 것이다. '무위자연'은 사물자신의 상황이 자유롭게 전개되는 것에 따르고 맡겨서 외재적 강제나 힘을 사용하여 그것을 속박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無爲'란 '자연에 따르는 행위(法自然)'를 말하는 것으로 자기본성이 흐르는 대로 행위하지만 사물이나 사건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자유자재의 행위를 말한다.
노자에서 무위와 관련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1.성인은 無爲의 일에 거처하며, 불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2.無爲를 행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3.분명하게 알고 사방으로 통달하여 無爲할 수 있는가?
4.道는 항상 無爲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侯王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장차 스스로 자신을 전개한다.
5.최상의 덕을 지닌사람은 無爲하여 의도적인 행위가 없다.
6.천하의 지극히 유약한 것이 지극히 강견한 것을 부릴 수 있다. 무형의 존재는 간극이 없는 사물을 뚫고 들어 갈 수 있다. 나는 이로써 無爲가 유익함을 안다. 그러나 불언의 가르침과 무언의 유익함은 천하사람들 가운데 이것에 미칠 수 있는 경우가 드물다.1
7.학문을 닦으면 날마다 늘어나며 도를 닦으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면, 이로써 無爲에 도달한다. 無爲하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8.내가 無爲하면 백성들은 저절로 변화한다.
9.無爲를 실천하라.
10.聖人은 無爲하는 까닭에 실패가 없다.
이상의 자료에서 우리는 노자의 '無爲'가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의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자는 인간의 노력하는 행위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爲道工夫'를 통해서 날마다 우리의 행위를 갈고 닦아 인위적인 군더더기는 모두 덜어낸 최선의 행위를 하라는 것이다. 이 최선의 행위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써 일체 모든 것을 성취해 내려는 역설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 개념은 불위와는 질적으로 판이한 상태이다. 불위는 최초의 원시적 상태로서 나태하고 게으른 행위인 반면에 무위는 '體道工夫'를 거쳐 인위적인 작위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조금의 瑕疵도 발견할 수 없는 완전무결에 도달하는 적극적 행위개념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무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不爲'로 잘못알아서 무위자연을 소극적 염세주의 내지 은둔사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無爲는 '無不爲'의 적극적 개념이다. 그것은 차별적인 이기적 욕구의식에서 벗어나 어떤 것과 접하든지 간에 그대로 응하여 함께 나아가는 태도로서 주객의 합일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선입견이다 편견이 없는 상태이며, 내적 명상을 통한 순수자아의식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자연'이 천지만물의 운행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무위'는 인간의 활동상태를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 순응하여 무위하게 되면 이 둘은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므로 둘이면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도는 그 자신의 상황에 의거하여 그 자신의 내재원인으로 자신의 운동과 운행을 결정한다. 따라서 기타 외재하는 원인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이런 도의 본성을 자연이라고 표현하므로 자연이라는 말은 결코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상태를 형용한다. 이런 형이상적 자연개념을 인간의 현실 즉 인생과 정치방면에 적용한 것이 '무위'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 방면에서 무위를 운용한 통치는 바로 백성들에게 취대의 자주성을 안겨주고 특수성과 차이성을 허용한다. 다시말해 개인의 인격과 개인의 소망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활동범위까지 침범하여 제한하지 않는다. 그리고 통치자에게 있어서 무위관념은 위정자들의 독단적인 의지와 전제적 행위의 확대와 진전을 해소하여 백성의 권리에 대한 협박이나 병탄을 방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노자의 무위는 일정한 현실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자의 무위론은 한비가 보기에 어처구니가 없는 것일지 모른다. ''無爲自然의 道''를 ''萬物의 '所以然'의 根本''으로 탈바꿈시킨 그에게 있어 '無爲自然'의 의미는 '法化된 道'를 여과할 수 밖에 없었으니 달리 보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비자 역시 겉으로는 노자처럼 無爲論을 내세우지만 그 이상에 이르는 과정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노자는 「지식이 줄고 또 줄어들어서 無爲에 이르게 된다.」라고 말했다. 仁義와 孝慈가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해도, '法令이 밝아지는 것'은 더욱 허용할 바가 못된다. 군주는 백성의 마음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삼아야 하며, 천하를 자연에 맡기니, 천하는 그렇게 다스려진다. 그러나 한비가 無爲에 이른다는 것은 明法勅令(법을 밝게하고 명령을 갖춤)과 重刑壹敎(무거운 형벌과 하나의 교령)의 방법을 통하여 결국 '明君은 위에서 無爲로 주재하며, 뭇 신하들은 아래에서 두려워 한다'는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지배기술은 바로 노자가 말하는 '그보다 못한 임금이면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한다'는 3류의 정치이며, 그 지위는 아직 유가의 仁政 아래에 두어졌던 것이다. 노자는 방임으로써 無爲에 이르려고 했으나, 한비는 專制로써 無爲에 이르려고 했으니, 이 兩者의 無爲에 이르는 과정은 전연 다른 것이었다.
한비의 '無爲'는 사실 申不害로 부터 이어 받은 '術'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신불해의 '術'의 기본 성격을 파악하면 자연히 한비의 '無爲而治'로서의 '無爲而術'의 실체가 드러난다.
申不害의 術治사상에 대해 『사기』의 「老莊申韓列傳」에서는 〈申不害의 학문은 '黃老'에 근본을 두고 있고 '刑名'을 주로 하였다.〉고 하면서 申不害를 老子·莊子·韓非子와 함께 거론하고 있다. 그렇다면, 申不害가 말하는 '無爲而術'이 노자의 '無爲'를 어떻게 변용한 것인지를 알아야겠다.
한마디로 말하면 申不害는 老子의 '無爲'와 '有爲'의 형식을 빌려와, 그 내용을 교묘하게 변질시켜 '君主의 無爲'와 '臣下의 有爲'라는 〈名分論〉과 접합시키고 있다. 신불해가 변질시킨 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노자의 '무위'의 대상은 '모든 사람'이었다. 즉, 君主에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불해는, 이를 완전히 왜곡하여, 군주만이 무위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따라서 이는 노자가 말하는 무위가 아닌 신불해식의 '職分行爲配屬'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신불해는 '군주의 무위의 태도'에 있어서도, 무위의 의미를 군주 '자신'의 有爲적 영역을 초월하는 의미가 아닌, 도리어 신하들의 모든 행위를 군주가 헤아리는 것으로 변질시켜버렸다. 따라서 거기에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비판·비난·평가'만이 있을 뿐, 자기자신에 대한 내적 초월의 의미가 전혀 들어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셋째, 이로써 군주에게는 노자의 도덕이 가지는 일체의 모든 공능과 그 우월성을 독차지할 수 있는 절대권위와 절대권능이 부여될 수 있게 되었고, 반면 '신하백성'에게는 현상계의 잡다한 직무와 사무를 처리해야만 하는 열등성이 부과되었다. 타인으로 하여금 「일하도록 하고, 살아가도록 하고, 내나가도록 하고, 공을 이루도록 하면서도」 동시에, 「간섭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聖君의 無爲而治'는 신하·백성으로 하여금 「과중하게 일하도록 하고, 해나가도록 하고, 공을 이루도록 유위로써 강요·위협하면서도」 항상, 「자신은 타인의 노력과 공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자기자랑으로 삼는」 '군주의 간교한 無爲而術'로 변질되게 된다. 즉, 노자에 있어서의 성군간의 수평적·상보적·쌍방적 조화관계를 수직적·상대적·일방적 대립관계로 변질시킨 것이다. 이것은 만물이 스스로 생하고 스스로 화하는 '道家의 道'를 '만물이 의지해야만 하는 道'로 왜곡시켜, 이 왜곡된 道의 우월성'을 군주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것이 君主를 道와 동체로 만들어 '一人의 絶對君主의 우월성과 존엄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임은 자명하다.
다음의 몇 문장을 통해 그의 '無爲而術'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훌륭한 군주는 몸과 같고, 신하는 두 손과 같다. 군주는 소리와 같고, 신하는 메아리와 같다. 군주는 근본을 세우고, 신하는 세부업무를 처리한다. 군주는 요체를 다스리고, 신하는 구체적 사항을 처리한다. 군주는 권세를 장악하고, 신하는 일상업무에 종사한다. 군주는 부결을 잡고서 신하에게 그의 '名'에 대한 책임을 추궁한다. '名'이란 천지의 綱領이며 성인의 符信이다.
한 명의 신하가 군주를 제멋대로 할 수 있다면 나머지 많은 신하들이 가리워질 것이다. 그러면……그 亂臣이 어려움 없이 국가를 무너뜨릴 것이다. 이 때문에 훌륭한 군주는 그의 신하들을, 마치 수레바퀴의 많은 살들이 가운데의 바퀴축 하나로 모이듯이 하여 모두 나란히 陞進시킴으로써, 아무도 군주를 제멋대로 할 수 없게 만든다.
군주가 명확하게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에 대비한다. 군주가 아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에 꾸밈을 가한다. 군주가 모르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을 감추어 버린다. 군주가 바라지 않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을 눈치보며 살핀다. 군주가 바라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그것으로 유혹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나는 아는 것을 따르지 않으며, 오직 무위함만이 사람들의 태도를 규제할 수 있다.
말을 신중히 하라. 사람들이 너를 알려고 할 것이다. 행동을 신중히 하라. 사람들이 너를 따르려고 할 것이다. 아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너에게 감추려할 것이고, 모르는 것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네 뜻을 추측하려 할 것이다. 네가 아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너에게 감출 것이고, 네가 모르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너에게 자신의 뜻을 실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직 無爲함만이 사람들의 태도를 규제할 수 있다.
이상의 자료를 통해 우리는 '군주의 무위'란 자신의 의중을 전혀 신하에게 드러내지 않는 일체의 말과 행위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바라는 것을 드러내지 말라는 단순한 不作爲的 態度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아는 것, 안지 못하는 것,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을 그때 그때의 상황과 상대방에 따라 때로는 드러내고 때로는 드러내지 않기도 하는 '作爲와 不作爲를 모두 포함하는 태도'이다. 이러한 '無爲而術'의 목적은 '자신의 意中', 즉 자기가 아는 것, 모르는 것, 바라는 것, 바라지 않는 것에 있다기 보다는 '타인의 意中'을 알아내어 '타인을 통제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아는 것도 모르는 체, 모르는 것도 아는 체' 하여 상대방의 意中을 떠보는 방법이나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중을 표명하도록 만드는 방법 등도 모두 '무위이술'에 포함된다. '말과 행위를 신중히 하라'는 것은 바로, 그때 그때마다의 경우에 적합하게 타인과 자신을 모두 고려하여 '자신의 의중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의중을 가장 잘 헤아려 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선택하여 말하고 행위하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이미 신하를 적극적으로 통제하여 절대군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군주의 권모술수'이지, 결코 노자가 제출한 '無爲'가 아니다.
이제 이러한 신불해의 사상을 통해 한비의 術治이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역시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앞에서 이미 살핀 노자의 도에 대한 한비의 해석, 그리고 한비가 이어받은 신불해의 '무위술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한비의 「解老」편에서 한비가 언급하고 있는 몇몇 문장에 대한 이해가 비교적 명확해지는 것이다.
無爲, 無思를 귀하게 여겨 虛를 위하는 사람을 일러 그 뜻이 제약되지 않는다고 한다. 無術이라고 하는 것은 無爲, 無思로 虛를 위하기 때문이다. 無爲, 無思로 虛를 위하는 사람은 그 뜻이 항상 虛를 잊지 못하는 데 이는 虛를 위하는 데에 제약되기 때문이다. 虛란 뜻이 제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虛를 위하는 데에 제약되는 것은 虛가 아닌 것이다. 虛란 無爲라는 것이고, 無爲로써 有常을 삼지 않는다. 無爲로써 有常을 삼지 않는 것이 虛이다. 虛란 , 德이 성대한 것이고 이를 上德이라 한다. 그러므로 「上德은 無爲이면서 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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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은 외물에 의해 움직이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위한 禮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존경함으로써 禮를 삼기 때문에 때로는 노력하고 때로는 쇠미해진다. 군자는 자신을 위함으로써 禮를 삼는데, 자신을 위하므로 神하여 上禮가 된다. 上禮는 神하고 衆人은 貳하니 고로 서로 응할 수 없다. 서로 응할 수 없으므로, 「上禮로 하면 應할 수 없다.」고 한다.
嗇이란 그 정신을 아끼고 그 지식을 아끼는 것이다. 그러므로「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데는 아낌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한다.
이상의 자료는 얼핏 보기에는 노자의 사상을 잘 풀이한 것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위의 글은 앞서 신불해의 '無爲而술'의 내용을 통해 그 기본적인 성격을 파악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리고 한비의 다른 편과의 연관선 상에서 바라볼때 비로소 정확하게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문장에서 한비는 無爲·無思의 虛靜을 內省의 방향이 아니라, 그것이 외부로부터 '강요당하는 일'이 없다는 절대로 자유로운 전개의 방향에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신불해에 대해 살핀 방식으로 접근해 보아야 한다. '術'에 있어서 한비는 신불해의 충실한 계승자이기 때문이다.
한비가 강조하는 군주의 '術' 역시, 신불해와 마찬가지로 군주가 스스로 賞罰의 權을 확실히 장악하고 이를 엄정히 집행하며, 臣民에게 법을 이행시키는 일이다. 그러려면 形(名에 대한 실적)과 名(신하가 해야할 일정한 일)을 審合하여 그 일치를 구하며, 약간의 과부족도 허용치 않고, 그 직분 이외의 일에는 신하가 관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形名을 審合하려면, 사람을 믿는 일은 남의 지배를 받는 원인을 제공하므로 군주는 자기의 情·意를 조금이라도 드러내어 신하가 아첨할 틈을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無爲·無思의 '虛'이고, 그 뒷 문장의 예측불능의 神이며, 정신과 지식을 소모하지 않는 嗇이다. 虛하여 神하고, 神하여 嗇한 채로 기다리면서, 名으로 하여금 스스로 命하고, 일로 하여금 스스로 定하게 한다. 군주는 이러한 '無爲而術'을 통해 군권을 신하로부터 확고히 지키고, 나아가 그것을 절대화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비가 지향한 무위의 본질은 통치자가 관료조직을 전체적인 질서의 메커니즘 속에서 사역하는 시스템, 즉 관료들의 '有爲'를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통치자의 무위적 통치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노자가 당시의 권위적인 질서, 인위적인 문명을 비판하려고 도입한 '무위'의 기획이 도리어 한비의 군주의 절대권력을 옹호·유지하려는 논리로 둔갑한 것이다.
Ⅳ.노자와 한비의 성인관 비교
가장 좋은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 다음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친하게 여겨 칭송하고, 그 다음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며, 가장 나쁜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이는 노자의 성인관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노자는 여기서 백성들이 경멸하는 통치자가 있고, 백성들이 두렵게 여기는 통치자가 있으며, 백성들이 친하게 여겨 칭송하는 통치자가 있고 백성들이 그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통치자가 있다고 하였다. 번다한 금령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경멸하고, 형법을 담들어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은혜를 베풀며 덕으로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들이 백성들이 친하게 여겨 따를 수 있다고 보았다. 형법을 만들어 다스리는 것이 법가적인 정치라면, 은혜를 베풀며 덕으로 다스리는 것은 유가적인 정치일 것이다. 노자는 번다한 금령으로 다스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법가적인 정치와 유가적인 정치조차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노자가 이상시하는 정치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는지조차 모르게(太上不知有之)다스리는 것이다. 그럼 노자가 보는 성인의 모습은 어떠한 지 몇몇 문장을 통해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성인의 다스림은 그들의 마음을 비워 그들의 배를 채우며, 그들의 뜻을 약하게 하여 그들의 뼈를 강하게 한다.
여기서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망상과 사려하는 마음을 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에도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도록 대상지향적 의지를 약화시키고, 내면세계를 풍부하고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시냇물의 왕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의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말로써 자기를 낮추며, 백성의 앞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기자신을 백성들보다 뒤에 돌본다. 이 때문에 성인은 백성들 위로 초대되어도 백성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아니하며, 백성들 앞에 있어도 백성들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즐거이 추대하며 싫어하지 않는다.
왕이란 歸往 또는 嚮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往'자와 통하니 그에게로 백성들의 마음이 쏠려간다는 뜻이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시냇물은 강과 바다를 향해 흘러간다. 민심이 한 사람에게로 쏠리면 그가 왕이 될 수 있듯이, 온ㅇ갖 시냇물이 흘러들어가는 강과 바다는 온갖 새냇물의 와이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냇물의 와이 돌 수 았는 까닭은 그것이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자는 사람들이 말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낮출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라의 굴욕을 자기가 받아들이는 것, 이를 일러 사직의 주인이라 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함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일러 천하의 제왕이라 한다.
이 외에 성인과 관련해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문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하나를 껴안아 천하의 법식이 된다.
문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를 알고, 창�을 내다보지 않아도 천도를 아니니, 그 나감이 멀면 멀수록 그가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이 때문에 성인은 나가지 않고서도 알고, 보지 않고서도이름하며, 일하지 않고서도 이룬다.
성인은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가르침을 행한다.
성인은 자기의 고정관념이 없이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
이 때문에 성인은 사람들이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구하여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며, 사람들이 배우려고 아니하는 것을 배워서 뭇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으로 돌아가서 만물의 자연을 돕고, 감히 만들어 내지 않는다.
이상의 자료에서 노자가 그리는 '聖人'은 無爲로써 살아갈 뿐, '임금'이라는 직분을 추구하지 않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백성에 의해 일단 임금으로 추대되면, 그 맡겨진 직분을 무위로써 수행할 뿐 그 자리에 집착하지 않는다. 즉 성인은 임금의 직분에 상응하는 일을 무위로써 수행할 뿐 백성에 대해 자신의 임금으로서의 권위나 권한을 주장하지 않는 것이다. 무위의 삶과 무위의 직분행위가 중요할 뿐 직분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직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무위의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통치자나 피치자라는 통치구조가 가지는 구별·차별을 근본적으로 부정·초월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임금과 백성이 수직적인 대립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조화관계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임금과 백성의 無爲의 구도 속에서 부패한 통치자나 부패한 백성은 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4 Aug. 2004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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