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 '글쓰기' 그리고 '맥락'
이승환(고려대 철학과)
사고와 글쓰기: 그 불가분리성에 대하여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문제는 그동안 동양철학계에서 관행으로 여겨져 온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학계의 '글쓰기'에 담긴 문제점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이미 제기된 문제점은 요약하자면 '식민지적인 서구추수주의' '현실과 유리된 탈맥락성' 그리고 '지적 엘리트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피력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미 제기된 문제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나는 '동양철학'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재확인하고 우리 학문 발전을 위한 시금석으로 삼고자 한다.
우리 학계의 글쓰기와 관련된 지적에 대하여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지적을 '논문폐기론'으로 오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글쓰기의 문제를 단순히 '스타일'이나 '문체'의 문제쯤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하려는 '글쓰기'의 문제는 '논문'이라는 글쓰기를 다른 쟝르의 글쓰기로 대체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며, 논문의 '문체'를 다른 식으로 바꿔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글쓰기'의 문제는 단순히 '스타일'이나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글'에 담고자 하는 '내용'과 '글'을 쓰는 '목적', 그리고 '글'을 전개하는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용과 유리된 형식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형식은 이미 그 안에 담길 내용을 예시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한 지적은 단지 글의 '형식'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동시에 '내용'에 대한 지적이며, 나아가서는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기도 한 것이다. 언어와 유리된 사고는 있을 수 없으며, '사고'는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언어 사용의 과정 속에서 구체화된다.
서양의 전통 철학자들은 쓰여진 글들은 이차적인 기표에 불과하며, 내면의 사유로부터 거리가 멀어진 것이라고 보아왔다. 이에 의하면 글쓰기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매개'나 '수단'에 불과하고, 진정 중요한 것은 '의미'라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의미/말, 사고/언어, 내용/형식, 의도/표현의 이분법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사고와 언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사고에 전적으로 우위를 부여해 온 형이상학적 위계질서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언어는 사고의 집"이며, 사고는 언어행위와 분리되어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사고의 전개 과정이다. 글은 사고의 외피가 아닌 사고 그 자체이며, "철학한다는 것은 곧 글쓰기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철학계의 글쓰기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관한 지적은 곧 동양철학 연구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의 문제로 통하게 된다.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유희
우리 동양철학계의 글쓰기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대부분의 논문들이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차단한 채 고고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관념의 유희만을 일삼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시대부터 우리 나라에 소개된 근대 서양철학의 영향 때문이다. 소위 데 . 칸 . 쇼 학파로 불리는 서양의 관념론은 그것이 철학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고, 서양철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고들 여기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일본철학'이라는 말 대신에 '일본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의 많은 서양철학자들이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다"고 주저없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념론은 철학을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으로 나누고, 이론철학은 물론이고 심지어 실천철학마저도 철저하게 순수사변에 의해 전개한다. 관념론은 역사적 맥락이나 현실과의 연계고리를 차단한 채 연구실 안에서 머리통 하나에 의지해 자폐증에 걸린 환자처럼 독백과도 같은 사변을 전개한다. 서양철학이 '보편철학'으로 숭앙되고 한국의 철학계를 주도하는 상황 속에서 동양철학자들은 전통사상을 근대 서양철학의 잣대에 맞추어 재구성하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동양의 철학은 현실과 관련된 문제의식이나 역사적 배경은 외면한 채, 철저하게 '탈맥락화'되거나 '탈역사화'되고 말았다. 주자나 율곡이 썼던 상소문 한편도 읽어보지도 않은 채 이기심성(理氣心性)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고담준론에만 몰두한다던가, 노자와 장자가 몸담았던 전국시대의 험난했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맥락은 외면한 채 현학적인 언어로 '도'(道)의 심원함에 대해 늘어놓는다던가, 전통 사회의 계급질서와 사회구조는 배제한 채 '예'(禮)의 우수성을 찬미하는 일들은 모두 '탈맥락화'된 글쓰기의 전형적인 경우들이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철학은 순수이성에 의한 이론지(理論知)나 사변지(思辨知)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지혜가 주종을 이룬다. 전통 철학의 연구를 담당했던 지식인들도 머리통만 굴려서 밥먹고 사는 전업 철학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였거나, 상소문을 올려 정치 풍토를 바로잡으려는 사회 비판가였으며, 아니면 학생을 가르치며 몸으로 모범을 보이는 교사들이었다. 이들 전통 철학자들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역사'는 사고의 기틀을 제공해 주는 주요한 토대였으며, '역사'와 '현실'에서 유리된 순수 사변은 공허한 현담(玄談)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은둔적이고 도피적인 색채를 지녔다고 말해지는 노자와 장자에서도 강렬한 시대의식과 현실의식을 읽어 낼 수 있다. 노자.장자와 같은 도가학파도 이럴진데, 통치계급의 이념적 지주역할을 담당했던 유가학파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철학 논문들은 이렇게 '철학'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과 '문제의식'은 외면한 채 관념론적인 사변으로 일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동양철학 본연의 글쓰기가 아니라, 근대서양 관념론의 틀을 통해 재구성된 '격의 동양철학'일 따름이다. 이러한 탈맥락적 글쓰기의 배후에는 철학을 현실로부터 격리시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려는 권력의 음모가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철학이 역사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여기는 절대주의 진리관에 대한 맹신이 깔려있다. 이러한 탈맥락적 글쓰기는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이유를 흐리게 하며, 글을 읽고 나서도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하는 공허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탈맥락적 글쓰기는 나아가서 불순한 의도를 지닌 권력에 손쉽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전국시대의 전제군주들을 교화하기 위해 제기되었던 맹자의 '성선론'과 '인성론'이 이제는 이 땅의 젊은이를 순치(馴治)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유리된 관념의 유희는 철학자를 그가 속한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이간질 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삶의 현장으로부터 유리시킨다. 나는 근래에 {유가 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이라는 졸작을 출간하고 나서 수많은 동양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철학자가 철학을 해야지 왜 사회학을 하느냐?"라는 엉뚱한 질책이 있는가 하면, "당신 운동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노인은 전화로 "철학이라는 학문은 순수 이론을 하는 학문인데 왜 '현실'을 들먹거리느냐"고 30분이 넘게 훈계를 한 적도 있다. '사회'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으로 보아 버리는 이상한 학문 구분법, 철학에 '현실'은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관념적 태도, 철학에 '사회'라는 말만 들어가도 '사회주의'를 연상하는 경직된 풍토, 원본 서양의 관념론보다 더 교조화되고 추상화된 글쓰기-- 이것이 우리 동양철학 글쓰기의 현주소이다.
'순수철학'에 대한 결벽증적 집착은 사고를 탈맥락화시키는 주범이다.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순수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나는 철학이라는 작업이 구체적 현실과 일상적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우러나와 한층 일반화되고 객관화된 형태로 정리된 사고의 체계라고 본다. 나는 철학적 사고가 구체적 '현실'에 터하고 있다 해서 그것을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려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철학의 '순수성'이라는 관념론적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언어 자체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오류에서 빚어진다. 언어는 그 것이 형성되고 사용되는 언어 공동체와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 맥락을 거세한 채, 사고와 언어를 투명한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이는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도 사고의 투명성을 강조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아도 철학자는 결코 그가 속한 문화와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제1증명으로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제2증명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제3증명에서 비로소 '객관 사물'의 존재를 증명한다. 데카르트는 객관 사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만일 데카르트가 동양 사람이라고 해도 과연 그는 똑같은 증명의 단계를 밟았을 것인가? 칸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도덕 실천을 보장받기 위해서 '하느님'이라는 주재자와 '불멸하는 영혼' 그리고 '자유의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누메나(noumena)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인간의 도덕 실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불멸하는 영혼' 그리고 '자유의지'가 필연적으로 요청(postulat)된다고 말한다. 칸트가 동양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도덕 실천을 보장받기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을 요청했을 것인가? 데카르트나 칸트 모두 그렇게도 투명한 이성에 의한 순수사변을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의 사고는 순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전통에 짙게 물든 것이다.
모든 사고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에서 나온다. 모든 사고와 주장은 특정한 개념틀(conceptual scheme)과 이념의 산물이다. 단어나 문장은 그것들이 사용되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고, 이 맥락은 담론과 엮어져 있는 사회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탐구의 초점은 문장에서 텍스트로, 컨텍스트(맥락)로, 언어게임과 언어공동체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언어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로 확장된다. 철학적 사고를 투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백색의 글쓰기'를 요구하는 일은, 사고를 낳는 조건과 그 조건이 낳는 사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데서 나오는 오류이다.
'앎'을 의식의 순수활동과 관념의 현전으로 여기는 근대 서양철학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고'에 대한 강박관념이 담겨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칸트에서 볼 수 있듯이 채색되지 않은 투명한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성의 강박관념 아래서는 구체적 삶 속에서의 체험, 상상력과 비유, 역사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모호하거나 불순한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서양에서 수입한 이론과 그 명목적 권위 뒤에 자신을 숨기는 것을 학문적 미덕으로 삼는 '순수철학'에 대한 강박관념은 명백한 식민성의 발로이다. 맥락이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철학은 순수하지 않다고 보고, 오직 투명한 이성에 의한 순수사변만이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 순수하지 않은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철학은 근대서양의 관념론에 짙게 물든 철학이기 때문이다.
서구 근대철학적 글쓰기의 식민지적 추종
자생적인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서양이론만 추수하는 "기지촌 지식인"의 허위의식은 서양학문하는 학자들에게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김영민이 지적하는 소위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은 동양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동양철학의 글쓰기는 기지촌의 지식인이 지닌 허위의식과 더불어 과거 조공국(朝貢國)의 지식인이 지녔던 사대주의마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우리의 동양철학은 '동양철학'이 아니다. 우리의 동양철학은 서양 관념론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된 '격의 동양철학'이다. 서양철학은 철학을 서술할 때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 등으로 구분한다. 서양철학의 이러한 영역별 구분은 우리 동양철학계의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구분은 동양철학의 주요한 특성들을 학문적 논의로부터 배제시켜 버리는 우를 범한다. 예를 들어, 노자가 이러한 틀에 따라 구분될 때 노자의 사상은 형해화되고 박제화되어 참다운 맛은 사라지게 된다. 노자 사상 속에는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사상, 정치사상도 들어 있지만, 아울러 양생(養生), 수양, 건강, 처세, 제왕술(帝王術),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서양철학의 틀에 맞추어 노자를 재구성한다면 이러한 중요한 부분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학문적 논의에서 제외되고 만다.
동양철학을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서술하는 작업은 근대이래 중국인들이 서양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시작한 일이다. 오강(吳康)이나 당군의(唐君懿)의 철학개론은 모두 이러한 서양철학의 틀에 따라 동양철학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술방식은 오늘날 한국의 동양철학 글쓰기에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근대에 들어 서구열강의 문화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전통철학을 서양철학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서양철학의 서술방식을 '보편적 모델'로 상정하고 자신의 전통을 이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왔다. 모종삼은 칸트를 통하여, 당군의는 헤겔을 통하여, 양수명은 베르그송을 통하여, 그리고 방동미는 화이트헤드를 통하여 각기 '격의 동양철학'을 추진해왔다. 서양철학을 '보편'의 지위에 놓고 동양의 철학을 거기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이러한 작업은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서양철학을 끌어다 자기의 입지를 정당화하려는 근대 동양철학의 태도는 이미 그 안에 지적 패배주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건강한 문화의 교류와 보다 나은 합리성의 추구를 위하여 비교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된 목적을 위한 비교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서양철학을 끌어다 정당화의 근거로 삼는 일은 '권위 의존적 정당화'에 불과할 뿐이다. 하버마스나 로티 그리고 퍼트남과 푸코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동양의 철학에 기대지 않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서양철학자들의 발언에 기대어 이야기를 하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보다, 항상 남의 목소리에 기대어 말하는 일에 길들여져 왔다.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를 꺼려왔다. 서양학문하는 사람들은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고 냉소하고, 동양 철학자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에는 스스로 신뢰를 보내지 않아왔다.
근대 중국철학자들이 서양철학을 통해 재구성한 '격의 동양철학'을 수입해서 이를 수정없이 추숭하는 학인, 중국대륙과 물꼬가 트인 이후에는 '유심/유물'의 이분법적 틀을 그대로 가져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학인,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미국식 동양철학을 그대로 수입해서 전파하고 다니는 전도사와 같은 학인..... 우리에게는 대만식 동양철학, 대륙식 동양철학, 미국식 동양철학은 있어도 우리의 동양철학은 없다. 서양학문하는 사람은 단지 기지촌 지식인이라는 욕만 먹으면 끝나지만, 동양철학하는 사람에게는 여기에 덧붙여 조공국의 지식인이라는 역사적 원죄가 고스란히 이어지게 된다.
언어의 투명성에 대한 백색 신화
근대 서양철학을 흉내내려는 동양철학의 글쓰기는 형식논리적인 투명한 문체를 요구한다. 물론 논리적으로 글을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양의 철학에는 형식논리로는 담아 낼 수 없는 또다른 측면들이 담겨 있으므로 형식논리적 글쓰기만을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야기이다. 형식논리는 그리스어의 문법구조에서 추상화된 것이고, 인도-유럽어의 문법구조속에서 자연스럽게 '사고의 규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문처럼 주어가 빈번하게 생략되고, 어미변화가 없으며, 계사(copula)가 없고, 단수.복수의 구분이나 격(格)이 없는 언어구조속에서는 서양언어의 문법구조에서 추상된 형식논리가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만약 형식논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나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은 역설이나 궤변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논문'이라는 글쓰기는 과학주의와 객관주의의 신화가 극성을 부리던 실증주의 시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과학과 형식논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며, 세계의 진상은 형식논리나 과학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 과학과 논리로 포착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사고하고 기술하려는 근대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에서 다루는 문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하고 미묘하다. 전통의 동양철학자들이 논리성과 투명성 대신에 은유와 비유, 그리고 우언과 상징을 동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장자의 경우를 보자. 공허하고도 아득한 언설과 터무니없고 과장된 말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들. 장자의 은유에 의한 글쓰기는 '어떠한 상징이나 비유도 없는 과학적 언어에 대한 꿈'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려주며, 매개물이 필요없는 투명한 언어를 찾는 꿈은 '백색신화'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장자의 비유적 글쓰기는 형이상학적 언어에 대한 도전이며,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의 비유들은 은유가 어떻게 해서 철학과 삶을, 그리고 철학과 문학을 연관시켜 줄 수 있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개념들이 이해되고 명백해지는 것은 바로 은유와 비유, 그리고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은유와 비유, 상징과 이미지를 제거하고 투명한 글쓰기를 요구하는 '논문'이라는 양식은 근대 서양의 형식적 합리성을 표현하기 위한 위한 도구이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지식의 객관적 표현, 논거와 증명...... 계몽주의 이래 비롯된 '도구적 합리성'의 이념은 우리 학계에서 글쓰기의 표준이 되었다. 형식논리적 합리성이 학문적 글쓰기에 필요한 것이라는데는 동감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동양적 사유에 있어서도 최적의 표현양식인지 하는 점은 다시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문양식은 동양사상의 어떤 측면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외 많은 부분들의 이해를 구조적으로 차단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서 원래의 사상가들이 지닌 생각을 재구성해낸다.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에서 '논문'의 양식은 원래 사상의 다양한 측면들에 접근하는 일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차단한다. 서양철학적 글쓰기에서 요구하는 합리성은 사상의 다원적이고 중첩적이고 복합적인 면을 '형식논리'라는 획일적 기준에 의하여 학문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고 배제하고 억압한다.
서양 고.중세의 교수법은 문법.논리학.수사학의 3학과를 기본으로 해서 진행되었다. 수사학은 언어적 표현과 그 쓰임이 의미를 갖는 구체적 상황과의 관계를 통하여 '언어와 삶'의 세계에 관련된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주류의 흐름은 변함없이 수사학보다는 논리학에 우위를 부여해왔다. 플라톤의 형상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술어론, 중세의 보편자 논쟁, 라이프니츠의 보편기호학, 그리고 근대의 경험론과 합리론에 있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흐름에 의하면 수사학은 언어의 본질을 훼손시키거나 왜곡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은유'의 모든 잔재들을 철학적 담론으로부터 일소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자연히 수사학을 평가절하하기 마련이었다.
논리학을 수사학의 우위에 놓는 '백색의 글쓰기'의 신화는 이제 서양인 자신의 손에 의해 깨어져 가고 있다. 마르쿠제는 "형식논리가 인간의 사유를 하나의 고정된 체계안에서 정식화하고 규율화한다"고 비판한다. 퍼스와 찰스 모리스는 수사학적 의미가 일차적인 뜻에서 의미이며, 의미가 지니는 논리적 측면은 그 범위 안에서 다만 제한된 지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의 논리적 고찰보다는 문맥적 혹은 수사학적 고찰이 언어의 의미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듀이는 {논리학: 탐구의 이론}에서 '추론의 형식'보다는 '추론의 쓰임'에 대해 고찰한다. '의미'는 표현의 형식적 성격보다는 그것의 실용적 문맥과 쓰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쓰임'에 관한 분야는 논리학이 아니라 수사학의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1940년대이래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은 논리학 대신 수사학을 언어와 의미의 기초로 간주하는데 엄청난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서양철학의 형식논리적 글쓰기가 간직한 '이성중심주의'의 허구성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최근의 철학자는 데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양인 자신의 손에 의해 허물어져가는 '백색의 글쓰기'를 여전히 고집한다는 점에서 한물간 근대 서양철학의 충실한 하수인이다.
만약 세계를 미학적이고 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술가의 작품을 형식논리적 틀로 옭아맨다면 원 작품이 지닌 생동감과 미적 감수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자의 작품을 형식논리적 엄밀성으로 재구성한다면 장자는 형해화되고 박제화된, 그리고 서양의 논리학에 의해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된 서양식 장자가 아닐 수 없다. 이성중심주의의 신화에 물들지 않은 동양철학의 경우 '논문'의 형식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가 존재해왔다. {노자}에서는 시나 잠언 식의 글쓰기가 사용되고, {장자}에서는 우언(寓言)이나 치언( 言)의 글쓰기가 사용되며, {논어}에서는 대화체의 글쓰기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유학자들의 문집이 그러하지만, {주자문집}의 경우 제일 처음에 시(詩) . 사(詞) . 부(賦)가 나오고, 이어서 각종 상소문(奉事.箚子)이 실려있고, 뒤에는 온갖 서간문과 비문.묘지명이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문집의 배열에서 오늘날의 학문적 글쓰기에 해당하는 [元亨利貞說]이나 [易感說]과 같은 논문류는 '잡저'(雜著)라는 항목으로 분류되어 문집의 중간쯤에 배열된다. 전통 철학자의 문집 속에서는 '시'나 '사'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논문류는 오히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저'로 분류되는 것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다. 이처럼 전통철학자의 문집에서는 체험적 진리가 농축적으로 담겨있는 시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은유나 비유를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오늘날 동양철학계에서 요구하는 논문의 양식이나 문체는 근대 서양철학식 글쓰기에 종속되어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형식논리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동양적 사유의 다양한 내용을 과학주의의 틀 안에 환원시켜 버린다. 형식논리적 동일율에 합치하는 이야기만이 말해지도록 허용될 뿐, 여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말해지는 것이 금지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진술은 모호하거나 불안정한 것으로 치부되고, 여기로부터의 일탈은 논리적 오류 혹은 철학적 오류로 간주된다. 이러한 글쓰기의 체제 속에서 노자의 '무위이무불위'나 장자의 '무용지대용' 그리고 불교의 '불생불멸'의 이야기는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피상적인 의미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고유한 의미는 담론 밖으로 배제되거나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진다.
이러한 논문의 양식에서는 언어의 원초적 구성단계인 은유와 비유조차 '철학적 의미'를 지니지 않은, 혹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치부받는다. 이러한 글쓰기는 형식논리로 사유되지않는 모든 사유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제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강요는 '글쓰기'뿐 아니라 '생각하기'조차 근대 서구의 형식논리적 합리성에 맞출 것을 요구한다. 즉, 글쓰기와 생각하기, 나아가서는 '현실' 자체를 서구철학적 지배관계 안에서 형성하고 통제한다.
"우리는 상당히 긴 시간 남의 언어로 남의 이야기만 해왔기 때문에 우리 이야기 하는 법을 모른다" 일상적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의 느낌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 자기에게 맞는 표현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 '우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감지하면서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글쓰기에서의 탈 식민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며,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새롭게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의 문제는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기원 중심주의
요즈음은 젊은 연구자가 늘어나서 그래도 조금 나아진 편이지만, 아직도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풍토가 뿌리깊게남아있다. 나는 일전에 최한기의 신기(神氣)개념을 괄호 안에 '정신적 기운'이라고 풀어썼다가 한 원로 학자로부터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뒷 세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의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의 언어감각에 맞게 끊임없이 고전을 재번역해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물며 수백년 수천년 전의 개념을 어떻게 현 세대의 독자들이 설명이나 해석, 그리고 풀어쓰기 없이 읽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개념의 해석(풀어쓰기)을 허용하지 않는 동양철학자들이 의외로 많이 존재한다. 이들에게 원래의 개념은 결코 손대거나 개조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기원'이다.
원전을 읽을 때도 기존의 주석서에 나와있지않은 새로운 해석이면 반드시 "누구의 주(註)에 근거하였느냐"고 따져묻고, 만약 기존의 주에 근거하지 않은 해석이라면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기존의 '주'도 하나의 '해석'이고 나의 해석도 하나의 '해석'이다. 주석 작업을 통해 원전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가능하고, 이러한 주석학의 전통 속에서 동양의 철학은 명맥을 이어왔다. 따라서 새로운 관점과 시각에서 새로운 주석서를 써내는 일은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을 인정치 않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참신한 철학과 창조적 사고는 나올 수 없게 되고, 우리는 고전의 울타리에 갇힌 수인(囚人)이 된다. 주자의 철학도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그의 {집주}도 사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만약 고전적 주석만을 인정하고 새로운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주자의 탄생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퇴계.율곡도 탄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기원중심주의는 학문의 엘리트화를 초래한다. 한국의 동양철학은 두 갈래로 양극화되어있다. 강단의 동양철학자들은 소수의 동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언어로 전공분야의 지식을 독점한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런 난해한 글이 읽힐 수 있는지의 여부에는 관심없이, '비전(秘傳)의 전수자' 혹은 '비의의 담지자'인양 자기들끼리만 지식을 독점한다. 마치 성직자만이 신과 교통할 수 있듯이, 강단의 철학자들만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신성한 '기원'(원전)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또다른 한 극에는, 형편없는 싸구려 언어로 재포장된 상업화된 동양철학이 존재한다. 기계적 사고와 물질문명의 삭막함에 질식해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허황한 이야기들이 상업주의의 물결을 타고 동양철학의 베스트 셀러로 등장한다. 풍수에 관한 이야기 혹은 성명철학과 운세에 관한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한글세대를 겨냥하여 쉬운 언어로 재포장되어 서점가를 장식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화된 동양철학의 판도 속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춘 한글세대 독자들은 읽을 거리를 찾지 못한다.
오늘날 강단 동양철학의 글쓰기는 '박제화된 글쓰기'의 전형적 본보기이다. 난해한 형이상학적 언어로, 맥락과 현실감을 결여한 채, 유령보다 훨씬 더 유령같은 문체로 읽는 이를 미궁에 빠트린다. 이러한 글쓰기는 소수의 '전문가'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암호이다. 왜냐하면 그 분야에 속하는 전문가밖에는 이러한 어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회자들만이 쓰게 되어있는 이러한 언어는 그 테두리 바깥의 일반 사람들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모종의 권위를 부여해준다. 이러한 권위적 체계 속에서 창조적 사고는 억압되고, 모든 이단적 사고는 불가능해진다. 사고는 사어(死語)의 감옥 속에 갇히고, 모든 부정과 비판 그리고 상상과 해석은 금지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폭력이다. 학계에서의 폭력은 글쓰기를 통해 나타난다. 언어의 구속은 모든 구속중 가장 효과적인데, 그 이유는 그 것이 행동이 아니라 사고자체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된 확고한 의미를 지닌 텍스트(원전)란 없다. 텍스트는 의미를 해독하는 작업에 매번 자신을 새롭게 드러낸다. 텍스트는 고정적 의미를 지닌 진리의 금고가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산출해내는 유동적 실체이다. 다양하고 대립적인 독해가 언제나 가능하며, 텍스트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될 수 있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억압적으로 부과되는 존재가 아니다. 텍스트는 그 거룩한 의미를 암송하고 묵수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자유로이 산책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일 뿐이다. 텍스트 속에는 무한히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의 씨앗들이 산포되어있다. 그리고 우리의 독해는 종착점을 갖지 않는 연속의 과정이다. 새로운 해석을 금지하는 우리 학계의 관행은 다양한 독해 위에 군림하는 '지배적 독해'의 억압적 성격을 말해준다. 우리의 동양철학계는 텍스트를 '주어진 진리'로서 신앙하려고 한다. 조선시대에 백호(白湖) 윤휴(尹鐫)는 주자학에 거스르는 해석을 했다고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지만, 아직도 이러한 풍토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기원중심주의의 태도 아래서 '나의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다. 우리의 철학계에서 모든 주제와 문제는 항상 연구대상이 되는 고대 사상가의 것이며, '나'는 그 사상가의 문제의식을 답습하는 충실한 '신도'일 따름이다. 이렇게 되면 부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손오공처럼, 우리는 그 사상가의 구도안에 종속되고 만다. 지나간 사상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주어진 진리체계'로 여기고, 여기에서 빗나가는 해석은 한 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학문하는 태도가 아니라 신앙하는 태도이며, 이러한 풍토아래서는 '나의 문제'와 '나의 고민'은 사고되거나 쓰여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기원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학계에는 의외로 고증학적, 문헌학적, 혹은 판본학적 고찰마저 미비한 점은 놀랍기만 하다.
'나'를 중심의 위치에 놓기
육상산은 "육경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다"(六經皆我註脚)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원전에 종속시킨 것이 아니라, 원전을 자신에게 종속시킨 것이다. '나'를 원전에 종속시키지 않고 역으로 원전을 '나'를 위한 주석이라고 보는 일은 혁신적인 '뒤집어 보기'이다. 서양철학을 보편에 놓고 나를 추숭자의 위치에 놓기보다는, 서양철학은 '나의 삶'을 위한 주석이라고 볼 수 없을까? 원전을 신성불가침의 비전(秘傳)으로 숭앙하기보다는, 원전을 '나의 고민'을 위한 주석으로 볼 수 없을까? 이렇게 '나'를 중심의 위치에 다시 세울 때, '식민지적 서구 추수주의' '현실과 유리된 탈맥락성' '지적 엘리트주의' '원전중심주의' 등의 문제는 절로 해소되게 될 것이다. 결국 동양철학에서 글쓰기의 문제는 "누가 글쓰기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회귀하며, 이는 결국 우리의 '삶'과 '현실' 그리고 '역사'의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이승환(고려대 철학과)
사고와 글쓰기: 그 불가분리성에 대하여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글쓰기의 문제는 그동안 동양철학계에서 관행으로 여겨져 온 글쓰기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그동안 우리 학계의 '글쓰기'에 담긴 문제점이 몇몇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이미 제기된 문제점은 요약하자면 '식민지적인 서구추수주의' '현실과 유리된 탈맥락성' 그리고 '지적 엘리트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내가 피력하고자 하는 내용도 이미 제기된 문제의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나는 '동양철학'이라는 영역 안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재확인하고 우리 학문 발전을 위한 시금석으로 삼고자 한다.
우리 학계의 글쓰기와 관련된 지적에 대하여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논문중심주의'에 대한 지적을 '논문폐기론'으로 오해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글쓰기의 문제를 단순히 '스타일'이나 '문체'의 문제쯤으로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하려는 '글쓰기'의 문제는 '논문'이라는 글쓰기를 다른 쟝르의 글쓰기로 대체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며, 논문의 '문체'를 다른 식으로 바꿔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글쓰기'의 문제는 단순히 '스타일'이나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글'에 담고자 하는 '내용'과 '글'을 쓰는 '목적', 그리고 '글'을 전개하는 '사고방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용과 유리된 형식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형식은 이미 그 안에 담길 내용을 예시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대한 지적은 단지 글의 '형식'에 대한 지적이 아니라 동시에 '내용'에 대한 지적이며, 나아가서는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기도 한 것이다. 언어와 유리된 사고는 있을 수 없으며, '사고'는 '말하기'와 '글쓰기'라는 언어 사용의 과정 속에서 구체화된다.
서양의 전통 철학자들은 쓰여진 글들은 이차적인 기표에 불과하며, 내면의 사유로부터 거리가 멀어진 것이라고 보아왔다. 이에 의하면 글쓰기는 '의미'를 전달해주는 '매개'나 '수단'에 불과하고, 진정 중요한 것은 '의미'라고 본다. 이러한 견해는 의미/말, 사고/언어, 내용/형식, 의도/표현의 이분법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사고와 언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사고에 전적으로 우위를 부여해 온 형이상학적 위계질서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언어는 사고의 집"이며, 사고는 언어행위와 분리되어서 진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체로서 사고의 전개 과정이다. 글은 사고의 외피가 아닌 사고 그 자체이며, "철학한다는 것은 곧 글쓰기이다". 이런 점에서 동양철학계의 글쓰기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관한 지적은 곧 동양철학 연구자들이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의 문제로 통하게 된다.
현실과 유리된 관념의 유희
우리 동양철학계의 글쓰기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대부분의 논문들이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차단한 채 고고한 형이상학의 세계에서 관념의 유희만을 일삼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시대부터 우리 나라에 소개된 근대 서양철학의 영향 때문이다. 소위 데 . 칸 . 쇼 학파로 불리는 서양의 관념론은 그것이 철학의 전부인 것처럼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고, 서양철학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기준에 의하여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고들 여기게 되었다. 현재 일본에서 '일본철학'이라는 말 대신에 '일본사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의 많은 서양철학자들이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다"고 주저없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관념론은 철학을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으로 나누고, 이론철학은 물론이고 심지어 실천철학마저도 철저하게 순수사변에 의해 전개한다. 관념론은 역사적 맥락이나 현실과의 연계고리를 차단한 채 연구실 안에서 머리통 하나에 의지해 자폐증에 걸린 환자처럼 독백과도 같은 사변을 전개한다. 서양철학이 '보편철학'으로 숭앙되고 한국의 철학계를 주도하는 상황 속에서 동양철학자들은 전통사상을 근대 서양철학의 잣대에 맞추어 재구성하려고 안간힘을 써왔다. 그러한 작업의 결과로, 동양의 철학은 현실과 관련된 문제의식이나 역사적 배경은 외면한 채, 철저하게 '탈맥락화'되거나 '탈역사화'되고 말았다. 주자나 율곡이 썼던 상소문 한편도 읽어보지도 않은 채 이기심성(理氣心性)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고담준론에만 몰두한다던가, 노자와 장자가 몸담았던 전국시대의 험난했던 역사적 상황과 시대적 맥락은 외면한 채 현학적인 언어로 '도'(道)의 심원함에 대해 늘어놓는다던가, 전통 사회의 계급질서와 사회구조는 배제한 채 '예'(禮)의 우수성을 찬미하는 일들은 모두 '탈맥락화'된 글쓰기의 전형적인 경우들이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철학은 순수이성에 의한 이론지(理論知)나 사변지(思辨知)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지혜가 주종을 이룬다. 전통 철학의 연구를 담당했던 지식인들도 머리통만 굴려서 밥먹고 사는 전업 철학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였거나, 상소문을 올려 정치 풍토를 바로잡으려는 사회 비판가였으며, 아니면 학생을 가르치며 몸으로 모범을 보이는 교사들이었다. 이들 전통 철학자들에게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과 '역사'는 사고의 기틀을 제공해 주는 주요한 토대였으며, '역사'와 '현실'에서 유리된 순수 사변은 공허한 현담(玄談)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은둔적이고 도피적인 색채를 지녔다고 말해지는 노자와 장자에서도 강렬한 시대의식과 현실의식을 읽어 낼 수 있다. 노자.장자와 같은 도가학파도 이럴진데, 통치계급의 이념적 지주역할을 담당했던 유가학파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양철학 논문들은 이렇게 '철학'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과 '문제의식'은 외면한 채 관념론적인 사변으로 일관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동양철학 본연의 글쓰기가 아니라, 근대서양 관념론의 틀을 통해 재구성된 '격의 동양철학'일 따름이다. 이러한 탈맥락적 글쓰기의 배후에는 철학을 현실로부터 격리시켜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려는 권력의 음모가 숨겨져 있거나, 아니면 철학이 역사나 현실을 넘어서는 초월적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라고 여기는 절대주의 진리관에 대한 맹신이 깔려있다. 이러한 탈맥락적 글쓰기는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이유를 흐리게 하며, 글을 읽고 나서도 "그래서 어쨌단 말이냐?"하는 공허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탈맥락적 글쓰기는 나아가서 불순한 의도를 지닌 권력에 손쉽게 이용당하기도 한다. 전국시대의 전제군주들을 교화하기 위해 제기되었던 맹자의 '성선론'과 '인성론'이 이제는 이 땅의 젊은이를 순치(馴治)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서 유리된 관념의 유희는 철학자를 그가 속한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이간질 시킬 뿐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삶의 현장으로부터 유리시킨다. 나는 근래에 {유가 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이라는 졸작을 출간하고 나서 수많은 동양 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아왔다. "철학자가 철학을 해야지 왜 사회학을 하느냐?"라는 엉뚱한 질책이 있는가 하면, "당신 운동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노인은 전화로 "철학이라는 학문은 순수 이론을 하는 학문인데 왜 '현실'을 들먹거리느냐"고 30분이 넘게 훈계를 한 적도 있다. '사회'라는 글자가 들어가면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으로 보아 버리는 이상한 학문 구분법, 철학에 '현실'은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관념적 태도, 철학에 '사회'라는 말만 들어가도 '사회주의'를 연상하는 경직된 풍토, 원본 서양의 관념론보다 더 교조화되고 추상화된 글쓰기-- 이것이 우리 동양철학 글쓰기의 현주소이다.
'순수철학'에 대한 결벽증적 집착은 사고를 탈맥락화시키는 주범이다. 나는 그들이 주장하는 '순수철학'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나는 철학이라는 작업이 구체적 현실과 일상적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우러나와 한층 일반화되고 객관화된 형태로 정리된 사고의 체계라고 본다. 나는 철학적 사고가 구체적 '현실'에 터하고 있다 해서 그것을 '순수하지 못한 것'으로 보려는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철학의 '순수성'이라는 관념론적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언어 자체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오류에서 빚어진다. 언어는 그 것이 형성되고 사용되는 언어 공동체와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는다.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와 맥락을 거세한 채, 사고와 언어를 투명한 것으로만 간주한다면 이는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도 사고의 투명성을 강조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보아도 철학자는 결코 그가 속한 문화와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제1증명으로 '생각하는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제2증명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 제3증명에서 비로소 '객관 사물'의 존재를 증명한다. 데카르트는 객관 사물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만일 데카르트가 동양 사람이라고 해도 과연 그는 똑같은 증명의 단계를 밟았을 것인가? 칸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도덕 실천을 보장받기 위해서 '하느님'이라는 주재자와 '불멸하는 영혼' 그리고 '자유의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누메나(noumena)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이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지만, 인간의 도덕 실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불멸하는 영혼' 그리고 '자유의지'가 필연적으로 요청(postulat)된다고 말한다. 칸트가 동양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도덕 실천을 보장받기 위한 조건으로 '하나님'을 요청했을 것인가? 데카르트나 칸트 모두 그렇게도 투명한 이성에 의한 순수사변을 강조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의 사고는 순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전통에 짙게 물든 것이다.
모든 사고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에서 나온다. 모든 사고와 주장은 특정한 개념틀(conceptual scheme)과 이념의 산물이다. 단어나 문장은 그것들이 사용되는 특수한 맥락 안에서 진정한 의미를 획득하고, 이 맥락은 담론과 엮어져 있는 사회적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탐구의 초점은 문장에서 텍스트로, 컨텍스트(맥락)로, 언어게임과 언어공동체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언어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로 확장된다. 철학적 사고를 투명한 것으로 간주하고, '백색의 글쓰기'를 요구하는 일은, 사고를 낳는 조건과 그 조건이 낳는 사고 사이의 연관성에 대한 성찰이 결여된 데서 나오는 오류이다.
'앎'을 의식의 순수활동과 관념의 현전으로 여기는 근대 서양철학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사고'에 대한 강박관념이 담겨있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칸트에서 볼 수 있듯이 채색되지 않은 투명한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성의 강박관념 아래서는 구체적 삶 속에서의 체험, 상상력과 비유, 역사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모호하거나 불순한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서양에서 수입한 이론과 그 명목적 권위 뒤에 자신을 숨기는 것을 학문적 미덕으로 삼는 '순수철학'에 대한 강박관념은 명백한 식민성의 발로이다. 맥락이나 현실을 이야기하는 철학은 순수하지 않다고 보고, 오직 투명한 이성에 의한 순수사변만이 '철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 순수하지 않은 셈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철학은 근대서양의 관념론에 짙게 물든 철학이기 때문이다.
서구 근대철학적 글쓰기의 식민지적 추종
자생적인 이론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서양이론만 추수하는 "기지촌 지식인"의 허위의식은 서양학문하는 학자들에게만 한정된 일은 아니다. 김영민이 지적하는 소위 "기지촌 지식인"의 습성은 동양철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동양철학의 글쓰기는 기지촌의 지식인이 지닌 허위의식과 더불어 과거 조공국(朝貢國)의 지식인이 지녔던 사대주의마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우리의 동양철학은 '동양철학'이 아니다. 우리의 동양철학은 서양 관념론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된 '격의 동양철학'이다. 서양철학은 철학을 서술할 때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철학..... 등으로 구분한다. 서양철학의 이러한 영역별 구분은 우리 동양철학계의 글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구분은 동양철학의 주요한 특성들을 학문적 논의로부터 배제시켜 버리는 우를 범한다. 예를 들어, 노자가 이러한 틀에 따라 구분될 때 노자의 사상은 형해화되고 박제화되어 참다운 맛은 사라지게 된다. 노자 사상 속에는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사상, 정치사상도 들어 있지만, 아울러 양생(養生), 수양, 건강, 처세, 제왕술(帝王術), 삶의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서양철학의 틀에 맞추어 노자를 재구성한다면 이러한 중요한 부분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고 학문적 논의에서 제외되고 만다.
동양철학을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등의 영역으로 나누어서 서술하는 작업은 근대이래 중국인들이 서양철학을 받아들이면서 시작한 일이다. 오강(吳康)이나 당군의(唐君懿)의 철학개론은 모두 이러한 서양철학의 틀에 따라 동양철학을 서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서술방식은 오늘날 한국의 동양철학 글쓰기에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근대에 들어 서구열강의 문화침략에 대응하기 위하여 중국의 철학자들은 자신의 전통철학을 서양철학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서양철학의 서술방식을 '보편적 모델'로 상정하고 자신의 전통을 이에 맞게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왔다. 모종삼은 칸트를 통하여, 당군의는 헤겔을 통하여, 양수명은 베르그송을 통하여, 그리고 방동미는 화이트헤드를 통하여 각기 '격의 동양철학'을 추진해왔다. 서양철학을 '보편'의 지위에 놓고 동양의 철학을 거기에 맞추어 재구성하는 이러한 작업은 서구문화에 대한 열등감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서양철학을 끌어다 자기의 입지를 정당화하려는 근대 동양철학의 태도는 이미 그 안에 지적 패배주의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건강한 문화의 교류와 보다 나은 합리성의 추구를 위하여 비교철학적 작업을 수행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된 목적을 위한 비교작업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서양철학을 끌어다 정당화의 근거로 삼는 일은 '권위 의존적 정당화'에 불과할 뿐이다. 하버마스나 로티 그리고 퍼트남과 푸코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동양의 철학에 기대지 않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서양철학자들의 발언에 기대어 이야기를 하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기보다, 항상 남의 목소리에 기대어 말하는 일에 길들여져 왔다.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를 꺼려왔다. 서양학문하는 사람들은 동양에는 철학이 없다고 냉소하고, 동양 철학자는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일에는 스스로 신뢰를 보내지 않아왔다.
근대 중국철학자들이 서양철학을 통해 재구성한 '격의 동양철학'을 수입해서 이를 수정없이 추숭하는 학인, 중국대륙과 물꼬가 트인 이후에는 '유심/유물'의 이분법적 틀을 그대로 가져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학인,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미국식 동양철학을 그대로 수입해서 전파하고 다니는 전도사와 같은 학인..... 우리에게는 대만식 동양철학, 대륙식 동양철학, 미국식 동양철학은 있어도 우리의 동양철학은 없다. 서양학문하는 사람은 단지 기지촌 지식인이라는 욕만 먹으면 끝나지만, 동양철학하는 사람에게는 여기에 덧붙여 조공국의 지식인이라는 역사적 원죄가 고스란히 이어지게 된다.
언어의 투명성에 대한 백색 신화
근대 서양철학을 흉내내려는 동양철학의 글쓰기는 형식논리적인 투명한 문체를 요구한다. 물론 논리적으로 글을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동양의 철학에는 형식논리로는 담아 낼 수 없는 또다른 측면들이 담겨 있으므로 형식논리적 글쓰기만을 글쓰기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야기이다. 형식논리는 그리스어의 문법구조에서 추상화된 것이고, 인도-유럽어의 문법구조속에서 자연스럽게 '사고의 규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한문처럼 주어가 빈번하게 생략되고, 어미변화가 없으며, 계사(copula)가 없고, 단수.복수의 구분이나 격(格)이 없는 언어구조속에서는 서양언어의 문법구조에서 추상된 형식논리가 그대로 적용되기 어렵다. 만약 형식논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나 장자의 '무용지대용'(無用之大用)은 역설이나 궤변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현재 우리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논문'이라는 글쓰기는 과학주의와 객관주의의 신화가 극성을 부리던 실증주의 시기의 산물이다. 그러나 과학과 형식논리는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며, 세계의 진상은 형식논리나 과학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다. 과학과 논리로 포착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만 사고하고 기술하려는 근대 서양철학과 달리 동양철학에서 다루는 문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하고 미묘하다. 전통의 동양철학자들이 논리성과 투명성 대신에 은유와 비유, 그리고 우언과 상징을 동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장자의 경우를 보자. 공허하고도 아득한 언설과 터무니없고 과장된 말들, 그러나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실들. 장자의 은유에 의한 글쓰기는 '어떠한 상징이나 비유도 없는 과학적 언어에 대한 꿈'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려주며, 매개물이 필요없는 투명한 언어를 찾는 꿈은 '백색신화'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장자의 비유적 글쓰기는 형이상학적 언어에 대한 도전이며,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의 비유들은 은유가 어떻게 해서 철학과 삶을, 그리고 철학과 문학을 연관시켜 줄 수 있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개념들이 이해되고 명백해지는 것은 바로 은유와 비유, 그리고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서이다.
은유와 비유, 상징과 이미지를 제거하고 투명한 글쓰기를 요구하는 '논문'이라는 양식은 근대 서양의 형식적 합리성을 표현하기 위한 위한 도구이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지식의 객관적 표현, 논거와 증명...... 계몽주의 이래 비롯된 '도구적 합리성'의 이념은 우리 학계에서 글쓰기의 표준이 되었다. 형식논리적 합리성이 학문적 글쓰기에 필요한 것이라는데는 동감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글쓰기가 동양적 사유에 있어서도 최적의 표현양식인지 하는 점은 다시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문양식은 동양사상의 어떤 측면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는 해줄 수 있지만, 그 외 많은 부분들의 이해를 구조적으로 차단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서 원래의 사상가들이 지닌 생각을 재구성해낸다. 이러한 재구성의 과정에서 '논문'의 양식은 원래 사상의 다양한 측면들에 접근하는 일을 구조적으로 배제하고 차단한다. 서양철학적 글쓰기에서 요구하는 합리성은 사상의 다원적이고 중첩적이고 복합적인 면을 '형식논리'라는 획일적 기준에 의하여 학문의 영역 밖으로 몰아내고 배제하고 억압한다.
서양 고.중세의 교수법은 문법.논리학.수사학의 3학과를 기본으로 해서 진행되었다. 수사학은 언어적 표현과 그 쓰임이 의미를 갖는 구체적 상황과의 관계를 통하여 '언어와 삶'의 세계에 관련된다. 그러나 서양철학사에서 주류의 흐름은 변함없이 수사학보다는 논리학에 우위를 부여해왔다. 플라톤의 형상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술어론, 중세의 보편자 논쟁, 라이프니츠의 보편기호학, 그리고 근대의 경험론과 합리론에 있어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흐름에 의하면 수사학은 언어의 본질을 훼손시키거나 왜곡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은유'의 모든 잔재들을 철학적 담론으로부터 일소하려는 이들의 노력은 자연히 수사학을 평가절하하기 마련이었다.
논리학을 수사학의 우위에 놓는 '백색의 글쓰기'의 신화는 이제 서양인 자신의 손에 의해 깨어져 가고 있다. 마르쿠제는 "형식논리가 인간의 사유를 하나의 고정된 체계안에서 정식화하고 규율화한다"고 비판한다. 퍼스와 찰스 모리스는 수사학적 의미가 일차적인 뜻에서 의미이며, 의미가 지니는 논리적 측면은 그 범위 안에서 다만 제한된 지위를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의 논리적 고찰보다는 문맥적 혹은 수사학적 고찰이 언어의 의미를 지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듀이는 {논리학: 탐구의 이론}에서 '추론의 형식'보다는 '추론의 쓰임'에 대해 고찰한다. '의미'는 표현의 형식적 성격보다는 그것의 실용적 문맥과 쓰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말의 쓰임'에 관한 분야는 논리학이 아니라 수사학의 분야에 속하는 것이다. 1940년대이래 오스틴과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은 논리학 대신 수사학을 언어와 의미의 기초로 간주하는데 엄청난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서양철학의 형식논리적 글쓰기가 간직한 '이성중심주의'의 허구성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최근의 철학자는 데리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양인 자신의 손에 의해 허물어져가는 '백색의 글쓰기'를 여전히 고집한다는 점에서 한물간 근대 서양철학의 충실한 하수인이다.
만약 세계를 미학적이고 관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예술가의 작품을 형식논리적 틀로 옭아맨다면 원 작품이 지닌 생동감과 미적 감수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자의 작품을 형식논리적 엄밀성으로 재구성한다면 장자는 형해화되고 박제화된, 그리고 서양의 논리학에 의해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된 서양식 장자가 아닐 수 없다. 이성중심주의의 신화에 물들지 않은 동양철학의 경우 '논문'의 형식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가 존재해왔다. {노자}에서는 시나 잠언 식의 글쓰기가 사용되고, {장자}에서는 우언(寓言)이나 치언( 言)의 글쓰기가 사용되며, {논어}에서는 대화체의 글쓰기가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유학자들의 문집이 그러하지만, {주자문집}의 경우 제일 처음에 시(詩) . 사(詞) . 부(賦)가 나오고, 이어서 각종 상소문(奉事.箚子)이 실려있고, 뒤에는 온갖 서간문과 비문.묘지명이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다. 이러한 문집의 배열에서 오늘날의 학문적 글쓰기에 해당하는 [元亨利貞說]이나 [易感說]과 같은 논문류는 '잡저'(雜著)라는 항목으로 분류되어 문집의 중간쯤에 배열된다. 전통 철학자의 문집 속에서는 '시'나 '사'가 제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논문류는 오히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저'로 분류되는 것은 오늘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다. 이처럼 전통철학자의 문집에서는 체험적 진리가 농축적으로 담겨있는 시문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으며, 은유나 비유를 사용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오늘날 동양철학계에서 요구하는 논문의 양식이나 문체는 근대 서양철학식 글쓰기에 종속되어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모든 것을 무차별하게 형식논리적으로 단순화시킴으로서 폭력적이고 파괴적으로 동양적 사유의 다양한 내용을 과학주의의 틀 안에 환원시켜 버린다. 형식논리적 동일율에 합치하는 이야기만이 말해지도록 허용될 뿐, 여기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말해지는 것이 금지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진술은 모호하거나 불안정한 것으로 치부되고, 여기로부터의 일탈은 논리적 오류 혹은 철학적 오류로 간주된다. 이러한 글쓰기의 체제 속에서 노자의 '무위이무불위'나 장자의 '무용지대용' 그리고 불교의 '불생불멸'의 이야기는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피상적인 의미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고유한 의미는 담론 밖으로 배제되거나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어진다.
이러한 논문의 양식에서는 언어의 원초적 구성단계인 은유와 비유조차 '철학적 의미'를 지니지 않은, 혹은 '비논리적인' 것으로 치부받는다. 이러한 글쓰기는 형식논리로 사유되지않는 모든 사유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배제한다. 이러한 글쓰기의 강요는 '글쓰기'뿐 아니라 '생각하기'조차 근대 서구의 형식논리적 합리성에 맞출 것을 요구한다. 즉, 글쓰기와 생각하기, 나아가서는 '현실' 자체를 서구철학적 지배관계 안에서 형성하고 통제한다.
"우리는 상당히 긴 시간 남의 언어로 남의 이야기만 해왔기 때문에 우리 이야기 하는 법을 모른다" 일상적 상호작용 속에서 자기의 느낌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자기가 몸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 자기에게 맞는 표현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 '우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감지하면서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글쓰기에서의 탈 식민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며,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새롭게 확인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글쓰기의 문제는 단순히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기원 중심주의
요즈음은 젊은 연구자가 늘어나서 그래도 조금 나아진 편이지만, 아직도 동양철학에 등장하는 주요 개념의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 풍토가 뿌리깊게남아있다. 나는 일전에 최한기의 신기(神氣)개념을 괄호 안에 '정신적 기운'이라고 풀어썼다가 한 원로 학자로부터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뒷 세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의 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새로운 세대의 언어감각에 맞게 끊임없이 고전을 재번역해내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물며 수백년 수천년 전의 개념을 어떻게 현 세대의 독자들이 설명이나 해석, 그리고 풀어쓰기 없이 읽어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개념의 해석(풀어쓰기)을 허용하지 않는 동양철학자들이 의외로 많이 존재한다. 이들에게 원래의 개념은 결코 손대거나 개조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기원'이다.
원전을 읽을 때도 기존의 주석서에 나와있지않은 새로운 해석이면 반드시 "누구의 주(註)에 근거하였느냐"고 따져묻고, 만약 기존의 주에 근거하지 않은 해석이라면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기존의 '주'도 하나의 '해석'이고 나의 해석도 하나의 '해석'이다. 주석 작업을 통해 원전에 대한 새로운 독해가 가능하고, 이러한 주석학의 전통 속에서 동양의 철학은 명맥을 이어왔다. 따라서 새로운 관점과 시각에서 새로운 주석서를 써내는 일은 가능하기도 하거니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 해석을 인정치 않는 이러한 풍토 속에서 참신한 철학과 창조적 사고는 나올 수 없게 되고, 우리는 고전의 울타리에 갇힌 수인(囚人)이 된다. 주자의 철학도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그의 {집주}도 사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그러나 만약 고전적 주석만을 인정하고 새로운 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주자의 탄생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퇴계.율곡도 탄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신성불가침의 기원중심주의는 학문의 엘리트화를 초래한다. 한국의 동양철학은 두 갈래로 양극화되어있다. 강단의 동양철학자들은 소수의 동업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난해한 언어로 전공분야의 지식을 독점한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런 난해한 글이 읽힐 수 있는지의 여부에는 관심없이, '비전(秘傳)의 전수자' 혹은 '비의의 담지자'인양 자기들끼리만 지식을 독점한다. 마치 성직자만이 신과 교통할 수 있듯이, 강단의 철학자들만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신성한 '기원'(원전)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또다른 한 극에는, 형편없는 싸구려 언어로 재포장된 상업화된 동양철학이 존재한다. 기계적 사고와 물질문명의 삭막함에 질식해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허황한 이야기들이 상업주의의 물결을 타고 동양철학의 베스트 셀러로 등장한다. 풍수에 관한 이야기 혹은 성명철학과 운세에 관한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한글세대를 겨냥하여 쉬운 언어로 재포장되어 서점가를 장식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양분화된 동양철학의 판도 속에서 건전한 상식을 갖춘 한글세대 독자들은 읽을 거리를 찾지 못한다.
오늘날 강단 동양철학의 글쓰기는 '박제화된 글쓰기'의 전형적 본보기이다. 난해한 형이상학적 언어로, 맥락과 현실감을 결여한 채, 유령보다 훨씬 더 유령같은 문체로 읽는 이를 미궁에 빠트린다. 이러한 글쓰기는 소수의 '전문가'만을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암호이다. 왜냐하면 그 분야에 속하는 전문가밖에는 이러한 어휘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입회자들만이 쓰게 되어있는 이러한 언어는 그 테두리 바깥의 일반 사람들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모종의 권위를 부여해준다. 이러한 권위적 체계 속에서 창조적 사고는 억압되고, 모든 이단적 사고는 불가능해진다. 사고는 사어(死語)의 감옥 속에 갇히고, 모든 부정과 비판 그리고 상상과 해석은 금지된다. 이러한 글쓰기는 폭력이다. 학계에서의 폭력은 글쓰기를 통해 나타난다. 언어의 구속은 모든 구속중 가장 효과적인데, 그 이유는 그 것이 행동이 아니라 사고자체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된 확고한 의미를 지닌 텍스트(원전)란 없다. 텍스트는 의미를 해독하는 작업에 매번 자신을 새롭게 드러낸다. 텍스트는 고정적 의미를 지닌 진리의 금고가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산출해내는 유동적 실체이다. 다양하고 대립적인 독해가 언제나 가능하며, 텍스트는 항상 새로운 것으로 될 수 있다. 텍스트는 우리에게 억압적으로 부과되는 존재가 아니다. 텍스트는 그 거룩한 의미를 암송하고 묵수해야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자유로이 산책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일 뿐이다. 텍스트 속에는 무한히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의 씨앗들이 산포되어있다. 그리고 우리의 독해는 종착점을 갖지 않는 연속의 과정이다. 새로운 해석을 금지하는 우리 학계의 관행은 다양한 독해 위에 군림하는 '지배적 독해'의 억압적 성격을 말해준다. 우리의 동양철학계는 텍스트를 '주어진 진리'로서 신앙하려고 한다. 조선시대에 백호(白湖) 윤휴(尹鐫)는 주자학에 거스르는 해석을 했다고 사문난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지만, 아직도 이러한 풍토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이러한 기원중심주의의 태도 아래서 '나의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다. 우리의 철학계에서 모든 주제와 문제는 항상 연구대상이 되는 고대 사상가의 것이며, '나'는 그 사상가의 문제의식을 답습하는 충실한 '신도'일 따름이다. 이렇게 되면 부처님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는 손오공처럼, 우리는 그 사상가의 구도안에 종속되고 만다. 지나간 사상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주어진 진리체계'로 여기고, 여기에서 빗나가는 해석은 한 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학문하는 태도가 아니라 신앙하는 태도이며, 이러한 풍토아래서는 '나의 문제'와 '나의 고민'은 사고되거나 쓰여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기원중심주의와 원전중심주의의 관행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학계에는 의외로 고증학적, 문헌학적, 혹은 판본학적 고찰마저 미비한 점은 놀랍기만 하다.
'나'를 중심의 위치에 놓기
육상산은 "육경은 모두 나를 위한 각주에 불과하다"(六經皆我註脚)고 말한다. 그는 자신을 원전에 종속시킨 것이 아니라, 원전을 자신에게 종속시킨 것이다. '나'를 원전에 종속시키지 않고 역으로 원전을 '나'를 위한 주석이라고 보는 일은 혁신적인 '뒤집어 보기'이다. 서양철학을 보편에 놓고 나를 추숭자의 위치에 놓기보다는, 서양철학은 '나의 삶'을 위한 주석이라고 볼 수 없을까? 원전을 신성불가침의 비전(秘傳)으로 숭앙하기보다는, 원전을 '나의 고민'을 위한 주석으로 볼 수 없을까? 이렇게 '나'를 중심의 위치에 다시 세울 때, '식민지적 서구 추수주의' '현실과 유리된 탈맥락성' '지적 엘리트주의' '원전중심주의' 등의 문제는 절로 해소되게 될 것이다. 결국 동양철학에서 글쓰기의 문제는 "누가 글쓰기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회귀하며, 이는 결국 우리의 '삶'과 '현실' 그리고 '역사'의 문제로 귀결하게 된다.
출처 : text reading
글쓴이 : 여민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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