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그람씨의 헤게모니론과 이행의 문제틀

ddolappa 2008. 5. 17. 05:25

 

그람씨의 헤게모니론과 이행의 문제틀 

임   영   일

 

 

1. 문제의 제기

1920년대 이후 서구의 사상사는 본질적으로 차단된 통로의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암중모색하였던 패배의 지성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의 열기가 1차대전과 그 이후의 혼란된 서구사회를 휩쓸며 19세기 중엽 이후 도래한 새로운 혁명의 시대를 예고하는 듯하였으나 서구자본주의 사회의 이데올로기적·물리적 방어기제는 아직은 이를 와해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완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 혼란의 시기를 비집고 대두한 서구제국에서의 파시즘의 흥기는 인간의 자유와 이성의 가치에 대한 서구문명의 신념을 결정적으로 파괴하고 말았다. 파시즘은 인류의 역사상 유례없는 유혈의 야만사 brutal history를 펼쳐 놓고 몰락하였으나, 서구의 지성은 오랜 기간 동안 이 타격을 극복해 내지 못하였다. 2차대전 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재편된 세계자본의 질서는 자신의 과거사를 일탈의 한 시대사로 호도하면서 파시즘의 단죄를 스스로의 면죄부로 삼아 다시금 자유와 이성의 가치의 이데올로기적 독점자로 자처하였다. 이 새로운 자본의 시대는 간헐적으로 계속되는 자본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관리해 내면서 지배, 피지배를 막론한 모든 계급성원들을 자기확장의 논리 속으로 거의 완벽하게 포섭 subsumption해 내기에 이르렀고, 이행 transition의 문제틀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른 서구의 패배의 지성사는 아직도 그 긴 어둠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면서 "마침내, 마침내 우리는 보았다. 인류가 전쟁과 자본주의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을!"이라고 감격하였던 루카치 Lukacs의 좌절의 사상편력은 서구의 이 패배의 지성사를 가장 극적인 모습으로 보여준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한 소위 비판이론 critical theory의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음울한 전망을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구 지식인들의 보편적 멘탈리티를 잘 이해할 수 있다. 70년대 이후 대두한 제3세계 사회이론에 대한 서구학자들의 관심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자기사회에서의 이행의 가능성, 변혁에의 전망을 상실한 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약한 고리'에서의 변혁 가능성에 대한 일방적인 추수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씨에 대한 70년대 이후의 대대적인 관심의 확산은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람씨의 사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의 평가들이 제시되고 있으나, 우리는 특히 서구 사회과학계의 그람씨 연구 열기는 일차적으로 서구 선진자본주의 사회들에 있어서의 방기된 '이행'의 문제틀에 대한 이론적 돌파구를 그에게서 구해 보고자 하였던 분위기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람씨의 사상이 어떤 면에서 이러한 요구에 답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진 것이었는가? 우리는 우선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로, 20년대 이후의 서구의 대표적인 인텔리겐차 중에서 그람씨은 가장 독특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젊은 시절을 이탈리아에서의 직접적인 대중운동 지도자로서 보내면서 인터내셔날을 중심으로 한 노선투쟁, 이론투쟁에도 적극 가담하였던 인물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였듯이 경제주의적·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를 통박하면서 인간의 의지력이 역사 형성과정에서 갖는 지대한 의미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람씨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이라 불릴 수 있는 광범위한 이론적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중요한 것은 그람씨가 이 '열린 정치의 장'을 인간 의지의 각축장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개척한 '정치학'이 장은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의지력의 각축을 통한 이행의 정치학'의 장이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앤더슨 P. Anderson이 이야기하는 '의지의 낙관주의'도 곧 이것을 이름에 다름 아니다.

둘째로, 현대의 서구 사상가 중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진정한 강점을 철저히 인식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 그람씨였다는 측면이 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일련의 경제적 위기를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붕괴하리라는 소박한 낙관론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20년대와 30년대를 거치면서 자기재편의 과정을 통해 점점 더 확고한 지배력을 갖추어 가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옥중수고』, 특히 그 중에서도 「아메리카니즘과 포드주의」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다. 여타의 소박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는 "무엇이자본주의 체제의 강점인가? 무엇이 중대한 경제적·사회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지배를 지속시키게 하는 요인인가"를 묻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람씨 사상의 이 측면을 '지성의 패배주의'로 간주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다. 기존 체제의 강고한 보루체계에 대한 치밀한 분석이 이 체계의 지형(地形) 위에서의 피지배층의 대항 헤게모니 전략으로 끊임없이 수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수고』전체가 그러한 평가를 거부하고 있다. 패배주의란 기성체제의 지배양식을 추상화된 물상화 reification의 보편과정으로 절대화하면서 이성과 인간의지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채 사회의 주변부에 헛된 기대를 표명하며 자기몰락하였던 서구의 신좌파들에게나 합당한 레테르일 수 있을 뿐이다.

그람씨의 헤게모니론, 진지전과 기동전의 개념 수동적 혁명의 분석,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 국가와 민족·민중과 계급과 정당에 대한 그의 새로운 개념규정, 문화와 의식과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의 의미에 대한 재검토 등등의 모든 이론적 부분들은 기본적으로 이 두 측면의 구체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적으로 서구사회에 있어서의 이행의 전략으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람씨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 중에서 우리는 이 점을 고려할 때 지극히 경계해야만 할 시각들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적 구도 전체를 일종의 부르조아 데모크라시의 정치구도에 대한 해석으로 정리하려는 시도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시도는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을 의회주의적·다원주의적 부르조아 자유주의 정치체제의 지형 위에서 전개되는 각 집단들간의 파워 게임 power game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 경우 그의 전략은 거의 전적으로 진지전 war of position의 전략인 것으로 치부되고, 진지전과 기동전 war of movement의 관계는 동구와 서구가 다른 만큼이나 서로 상반되는 전략인 것으로 취급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라면 이행의 문제틀은 다시금 미궁 속으로 사상될 수밖에 없게 되며, 그는 압도적으로 '지성의 패배주의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람씨 이해의 이면에는 그의 사상체계를 관류하고 있는 핵심 개념으로서의 헤게모니 개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의 헤게모니론을 전적으로 상부구조의 이론인 것으로 파악하거나, 혹은 헤게모니가 정치권력의 이중적 측면인 물리적 강제력과 이데올로기적 지배(피지배층의 '자발적' 동의의 유발) 중 압도적으로 후자에 기반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람씨 사상에 대한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을 부정하고 그의 전체 체계는 끊임없이 이행의 문제틀 속으로 자기수렴하는 역동적이며 변증법적인 성격의 것임을 부각시켜 보고자 한다. 이 점을 보다 일관되게 정리하고자 한다면 그람씨 연구가 아직 체계적인 분석의 손길을 미치고 있지 못한 부분, 즉 공장평의회 활동기 및 파시즘 하에서의 정당투쟁 시기에 대한 분석이 그의 후기 저작인 『옥중수고』의 분석과 유기적으로 통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아직 대단히 미흡한 수준에 있고, 필자로서도 아직은 그 같은 작업에 임할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점은 차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우선 『옥중수고』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해 보고자 한다.

 

Ⅱ. 헤게모니론

그람씨는 『옥중수고』전체를 통해서 헤게모니 개념을 그의 핵심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명확한 일의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이 점 때문에 그람씨의 사상을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헤게모니 개념에 대한 정의도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헤게모니를 '지배계급의 세계관의 확산과 대중화를 통해 확보되는 피지배층의 동의 consent에 기반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규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혹자는 그것을 베버 M. Weber류의 정당화 legitimation의 개념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혹은 헤게모니를 곧 허위의식 false consciousness의 유포 및 유지구조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들은 모두가 그의 헤게모니론이 갖는 복합적인 구조와 문제틀을 일면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의 『옥중수고』가 갖는 단편성과 산만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헤게모니 개념을 집약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구절들을 충분히 간취해 낼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의 두 구절을 보자.

헤게모니의 정상적인 행사는 강제력과 동의의 조합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양자는 서로 균형을 이루어 강제력이 과도하게 동의를 압도하지 않도록 한다. 사실상 강제력이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 것임을 믿도록 만드려는 시도가 줄곧 계속되며, 이것은 소위 여론기관들을……통해서 표현된다.

헤게모니의 사실은 분명 헤게모니의 행사 대상인 집단들의 이익과 경향들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만 함을, 그리고 어떤 타협적 균형이 형성되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서 지도집단은 경제적·조합주의적 economic-corporate인 희생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희생과 타협이 본질을 건드릴 수 없는 것임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헤게모니는 윤리적·정치적인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헤게모니는 반드시 지도집단이 강제활동의 중추 속에서 행사하는 결정적 기능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람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첫째로 헤게모니란 경제적 생산과 재생산의 과정 속에서 명확한 자기기반을 갖는 한 집단 - 그람씨의 말을 빌자면 한 근본계급 fundimental class - 이 타 집단들에 대하여 - 혹은 전체 사회에 대하여 - 행사하는 계급적 지배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로, 이 지배력은 구체적으로는 물리적 강제력 force과 이데올로기적 통제에 기반한 동의 consent의 통합체로 나타난다. '정상적'인 상태의 헤게모니는 이 양자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면서 유지될 때 성립되는 것으로서, 그람씨의 표현을 빌자면 이 상태에서 사회는 상대적 안정기를 누리게 된다. 셋째로, 이 상태, 즉 강제력과 동의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는 헤게모니의 행사집단과 그 적용을 받는 피지배집단 간의 총체적인 역학관계의 결과로서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이 경우 지배·피지배 세력간의 상대적인 균형관계의 기반은 본질적으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있어서의 타협에 의해서 주어지며, 그 현상적인 표현이 곧 강제력과 동의의 균형에 의한 지배 헤게모니의 유지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강제력과 동의와의 균형이란 산술 평균적인 의미에서의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의 균형관계는 다시 그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강력한 물리적 강제력의 존재를 전제로 한 균형이며, 따라서 강제력이 배제된 동의란 있을 수 없다. 동의란 앞의 인용구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강제력이 다수의 동의에 기반한 것임을 믿도록 만드려는 시도'에 의해서, 즉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통제에 의해서 확보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헤게모니의 내용을 강제력과 동의의 변증법적 통합으로 해석하는 총체적인 해석에 동감할 수 있다.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을 정치적 상부구조에서의 정치권력의 이중적 요소, 즉 강제력과 동의의 두 요소 중에서 후자에 전적인 의미부여를 하며 해석하게 되며 헤게모니의 문제는 곧 베버 류의 정당화의 문제로 환원되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헤게모니 행사의 지형 terrain에 관한 문제 제기에 있어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람씨가 헤게모니 행사의 지형을 시민사회 civil society라고 하는 사적 private인 영역에 국한시키고 있다고 보는 일부 논자들의 해석은 국가 state와 시민사회, 혹은 정치사회 political society와 시민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그람씨의 논지를 역시 일면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보아진다. 그람씨의 국가 개념이 갖는 다의성에 대해서는 페리 앤더슨이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는 그람씨의 저작에서 이 문제는 세 가지 문맥으로 얽혀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즉, 국가와 시민사회가 서로 대척적인 관계에서 파악되는 경우, 국가가 시민사회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경우, 그리고 국가가 곧 시민사회와 동일시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러나 앤더슨의 이러한 정리는 다분히 기술적 descriptive인 수준에서의 분류적 파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분석적인 수준의 논의는 되지 못한다. 앤더슨은 그람씨의 『옥중수고』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다의성이 그람씨 사상의 자기모순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그의 저작을 보다 분석적으로 혹은 총체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그러한 해석의 한계는 금방 드러나게 된다. 우선 그람씨가 『옥중수고』 전체를 통하여 국가 State라는 개념을 알파벳 대문자로 줄곧 표시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의 국가 State란 곧 그의 표현에 의하면 통합국가 integral state의 의미인 것이다. 사쑨 A.S. Sassoon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람씨의 국가 개념은 제한된 국가 limited state와 확대국가 extended, enlarged state의 두 가지로 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람씨의 논의의 초점은 후자에 집중되고 있다. 그람씨에 의하면 이 확대국가(enlarged state, integral state 혹은 State)의 출현 시기는 명확히 근대,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조합이나 정당 등의 대중조직이 성장한 제국주의 시대(그람씨의 연대구분에 의하면 1870년대 이후)에 해당한다. 이렇게 이해되는 국가란 곧 '정치사회+시민사회'로 파악되는 국가이다. 그람씨는 『옥중수고』의 한 구절 속에서 국가의 역사적 성격 변화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고대국가와 중세국가에서는 공히 정치적·영토적 또는 사회적인 중앙집중은 미미하였다. 국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집단들의 기계적 블럭이었다… 현대국가는 사회집단들의 기계적 블럭 대신에 지도적이고 지배적인 집단들의 능동적인 헤게모니에 사회집단들을 종속시킨다.

따라서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경계 설정의 불분명성에 대한 앤더슨의 지적은 그람씨의 사상이 부르조아 사상으로 슬그머니 변질된 자기모순의 반영인 것이 아니라 현대국가의 복합적인 현실을 이해하려는 그람씨의 적극적인 시도의 산물인 것이다. 덧붙여 말해 두자면 그람씨 자신이 국가와 정치사회, 그리고 시민사회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적인 구분일 뿐이라는 점을 『옥중수고』의 도처에서 거듭 강조해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속에서도 해명되지 않는 본질적인 해석상의 문제는 남는다. 그것은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이 전체적으로 '상부구조의 이론'의 성격을 갖는다고 보는 입장에 대한 반론이 이상의 논지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앤더슨이 지적하고 있듯이 그람씨는 그의 '시민사회'의 개념 속에서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경우와는 달리 경제의 영역을 일단 배제시키고 있다. 이 경우 그의 헤게모니론, 혹은 헤게모니 행사의 지형으로서의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의 개념은 전체적으로 경제적 하부구조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그람씨 헤게모니론의 이 측면 때문에 헤게모니란 '윤리적·정치적인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경제적인 것'이라고 하는 그람씨 자신의 부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부구조의 개념인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람씨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공헌은 그가 '마르크스주의의 정치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광범위한 이론적 영역을 개척한 데에 있다는 사쑨 등의 평가도 결국은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람씨의 『옥중수고』에 대한 문면분석만으로는 이러한 평가들을 반박할 논거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그람씨가 헤게모니를 '……동시에 그것은 경제적인 것'이라고 부연하는 선상에서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어떤 유형의 국가라도 경제적·조합체적인 초기적 국면을 거쳐 나갈 수밖에 없다면, 새로운 유형의 국가를 출발시킨 새로운 사회집단의 '정치적 헤게모니'는 압도적으로 '경제적 질서'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관계 및 구조의 재조직화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와 생산세계의 재조직화가 수반된다. 상부 구조적 요소들은 그 수에 있어서도 소수에 불과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일종의 예견 foresight이나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질 뿐 '계획된' 요소들이란 거의 없다.

이러한 논의는 그람씨가 헤게모니 행사의 지형뿐만 아니라 그 국면 Phases에 대해서도 일관성 있는 고려를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이 경우 헤게모니 행사의 국면이란 곧 유기적 위기 organic crisis의 국면과 국면적 위기 conjunctural crisis의 국면 중 후자를 지칭하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경제적 모순관계로부터 파생되는 유기적 위기는 보다 치유하기 어려운 구조적 모순의 산물이라면 국면적 위기는 헤게모니의 개념에 의해 매개된, 보다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다. 기본적인 역사의 방향은 경제적 위기에 의해 직접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커다란 역사적 중요성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이 만약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면 국면적 상황이 전개될 지형을 형성시키고 그 위에서 적대하는 세력들이 조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국면적 상황의 지형 위에서 역사는 광범위하게 열려진 상황이 된다. 경쟁하는 세력들이 사용하는 전략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그 결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또한 이들 사이의 투쟁은 바로 이 결과에 의해 제약된다. 즉, 경제적 위기는 직접 혁명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부르조아지와 프롤레타리아 모두에게 기회가 열려 있는, 각개가 자기입장에 유리하도록 국면을 활용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람씨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방기되어 왔던 '정치학'의 장을 개척하였다고 하는 평가의 의미를 이보다 잘 정리해 주고 있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이를 곧 그람씨를 '상부구조의 이론가'로 해석하는 논거로 삼는 것은 무리가 있다. 헤게모니 행사의 국면에 대한 이 논의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비판 서설』에 있는 유명한 구절에서의 이론적 유추에 그 토대를 둔 것임을 우선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논의는 곧 역사적·정치적 분석에 있어서 유기적 상황과 국면적 상황의 정확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야기된 이론적인 두 오류, 즉 '경제주의'와 '이데올로기주의 ideologism'를 비판하는 맥락으로 연결되는 것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그람씨 헤게모니론을 '상부구조의 이론'으로서 정식화하고, 그럼으로써 그의 논의가 하부구조에 대한 관심과는 유리된 정치과학 Political science이라는 분과학문의장 속에 위치 지어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그람씨의 의도에 대한 대단한 곡해가 된다. 특히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이 의회주의적·다원주의적 부르조아 데모크라시의 정치구도에 있어서의 사회 세력간의 파워 게임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그의 사상이 '부르조아 사상으로 슬그머니 변질된 자기 모순'을 노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셈이 된다. 그람씨의 진정한 의도는 19세기 후반 이래의 의기양양한 '자본의 시대'에 있어서의 부르조아 지배양식의 발전과 그 본질에 대한 본질적 이해, 그리고 이를 통하여 서구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새로운 이행의 전략을 모색하려는 일반적인 문제틀 속에서 찾아진다. 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회세력간의 세력관계가 파국적인 균형 파괴로 귀결되면서 파시즘으로 모습을 드러낸 쎄자리즘 Caesarism으로 전개되었던 이탈리아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에 대한 이해와 실천적 타개전략의 모색이라는 문제의식이 그의 정치사상 전체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음 장들을 통해서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도록 하자.

 


Ⅲ. 이행의 문제틀, 진지전과 기동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사에서 헤게모니의 개념은 애초 러시아에서의 혁명전략의 모색과정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지체된 후진적인 러시아적 상황에 있어서 혁명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이중혁명 dual revolution의 틀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는 문제제기로 나타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플레하노프에서 레닌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논자들은 헤게모니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부르조아지의 혁명적 역량이 미성숙한 러시아적 상황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여타 종속계급들, 특히 농민계급과의 연대를 주도하여 일차적으로 짜리즘의 절대왕정을 타파하는 민주혁명의 주체가 되고, 이어서 사회주의 혁명의 과제까지를 완수해야 한다는 논지 속에서 제기하고 있었다. 트로츠키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구분하였던 것도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문제틀 속에서 이해된다. 즉,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란 민주혁명 단계에서의 계급연합의 주도력을 프롤레타리아가 장악하는 문제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이후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하여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과 세계관의 보편화를 통한 새로운 국가의 형성 - 궁극적으로는 그 소멸 -을 지향해 가는 문제로 각각 차별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틀은 러시아 혁명 이후 서구적 상황에 적용되면서부터는 그 내용을 달리해 가게 된다. 즉, 1922년 코민테른 제 4차대회 이후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 속에서의 헤게모니의 문제는 이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부르조아지의 지배양식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전화된다. 이 경우 헤게모니란 부르조아지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운동을 부르조아 지배의 사회·정치적 구도 속에 매몰시킴으로써 계급투쟁의 내용 자체를 정치투쟁과는 분리된 경제투쟁으로 제한하고, 그럼으로써 대의제 민주주의의 외피 속에서 자기지배의 구도를 영속화시켜 가게 된 상황을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이 구도의 이데올로기적 핵심은 부르조아지가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정치구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를 받아들이게 하였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은 플레하노프에서 레닌에 이르는 개념적 전사(前史)와는 직접 관련이 없고, 이 코민테른에서의 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그는 이 개념을 보다 확대하여 '안정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부르조아 지배 메카니즘을 지칭하는 것'으로 일반화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이 개념을 '서구에서의 부르조아 권력구조들에 대한 차별적 분석'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람씨가 헤게모니 행사의 지형으로서의 (통합)국가의 출현지와 그 시기를 1870년대 이후 서구의 선진자본주의 국가들로 설정하면서, (반)봉건적인 절대국가들이나 식민지적 상황에 있는 국가들을 배제하였음을 상기한다면 이 점을 보다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은 이러한 서구적 상황에서의 이행의 문제틀과 어떻게 접속되고 있는 것인가?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문제들을 차례로 조명해 보아야 한다. 그 첫째는 (통합)국가의 구체적인 구도로서의 정치사회+시민사회의 내용에 대한 점검이 될 것이고, 두번째로는 이 구도의 정치적 표출로서의 서구 리버럴 데모크라시 정치체제의 본질에 대한 검토이며,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지형 위에서의 이행의 전략으로서의 진지전의 내용 및 그것과 기동전과의 문제가 된다. 이 각각의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후 그람씨의 이행의 문제틀이 갖는 총체적인 의미를 정리해 보도록 하자.


헤게모니의 지형으로서의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

그람씨는 부르조아 지배의 권력적 표출이 강제력과 동의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 있고, 이 맥락에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두 영역을 차별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예컨대 정치사회를 '주어진 계기에서의 생산과 경제의 유형에 대중들을 복속시키려는 강압기구, 독재'의 영역으로 규정하고, 시민사회를 '교회, 노조, 학교 등의 민간조직체들을 통해 행사되는, 전체 민족사회에 대한 한 집단의 헤게모니'의 영역으로 구분짓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양자의 구분은 어디까지나 방법론적인 것일 뿐, 실제에 있어서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영역, 강제력과 동의의 지배양식의 행사는 (통합)국가의 지형 위에서 통일적으로 인식된다. 양자의 방법론적인 구분은, 그에게 있어서는 양자간의 유기적 관계를 인식하기 위한 관심 속에서 하나로 수렴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지배계급의 역사적 통일성은 국가 State속에서 실현되며, 지배계급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국가와 국가군(群)의 역사이다. 그러나 이 통일성이 단순히 사법적이며 정치적인 것이라 생각하면 잘못이다. 근본적인 역사적 통일성은 구체적으로 국가 혹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간의 '유기적 관계'로부터 결과한다.

그러면 그는 양자의 '유기적 관계'를 어떻게 상정하고 있는가.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간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하였으며, 국가가 위기로 동요하였을 때 시민사회의 완강한 구조가 즉시 표면으로 드러났다. 국가는 그 이면에 버티고 서있는 (시민사회라는) 요새와 보루를 둘러싸고 있는 외곽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시민사회가 매우 복합적인 구조로 형성되어 있는 서구적 상황에 있어서는 입법, 사법, 행정의 국가기구들을 주축으로 하여 형성된 정치사회의 구조란 일종의 상부구조적 외피(外皮)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이 외피의 이면에는 각종의 정당, 이익단체, 학교, 교회, 기타 이데올로기적·문화적 조직체들로 구성되는 복잡다기한 시민사회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고 이 구조가 곧 국가기구를 대상으로 한 정치권력적 지평에서의 투쟁에 대한 완충막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시민사회의 구조들은 다시 그 이면에 강력한 물리적 강제력(군사력, 경찰력)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뒷받침된다. 이러한 구조를 일종의 '양파껍질'에 비유한 한 논자의 설명은 지극히 설득력이 있다. "이런 점에서 부르조아 국가구조는 양파에 비유될 수 있을지 모른다. 헤게모니 시민사회의 외각피가 하나하나 벗겨질 때, 다시 말해서 동의를 상실하게 될 때, 그 내부로부터 적나라한 힘이 표출된다." 그람씨가 국가=정치사회+시민사회의 정식화가 가능함을 이야기하면서 이는 곧 '강제력의 갑옷으로 보호되는 헤게모니'로 전환시켜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강제력의 요소가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위기'의 시기에서이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가 안정적으로 행사되고 있는 동안에는 헤게모니의 외양은 압도적으로 동의의 모습을 띠게 된다. 그람씨가 『옥중수고』의 텍스트 중에서 국가=시민사회의 국면 전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경우가 바로 이것인데, 이 경우 정치권력의 중심지는 어디까지나 시민사회의 제도들에 놓여 있게 되는 것이다. 성공적인 부르조아지의 "정치적 민주주의 내에서 자본가의 헤게모니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시민사회의 전략적 중핵이며, 국가제도는 대중들을 직접 억압하지 않는다." 이러한 헤게모니의 구도가 전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정치체제가 곧 리버럴 데모크라시의 의회주의적 정치대표체가 된다. 이제 이 문제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정치체제

독일의 사민당을 포함한 서구의 좌파들은 일반적으로 서구의 의회제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대하여 소박한 환상을 갖고 있었던 이야기된다. 서구의 국가는 짜르 치하의 러시아와 달리 폭압적인 경찰기구가 아니며, 대중들은 정기적인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에의 접근이 가능하고, 따라서 사회주의 정권이 의회민주주의 체제 내의 참여를 통해 집권할 가능성도 상존한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서구의 역사적 경험은 이를 입증해 주지 못하였고, 서구 좌파들은 일반적으로 그 이유를 노동대중에 대한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적 통제에서 찾았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주 과제는 무장국가와의 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제약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 되었다.

그람씨의 헤게모니론을 강제력과 동의 중 후자에, 그리고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복합구도 속에서도 후자에 일방적인 강조가 두어지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그 역시 이러한 의회제 민주제의 구도 속에서의 참여의 정치학으로 폄화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헤게모니론의 구도 속에서의 전략의 향방을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중 후자에,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기동전과 진지전 중에서도 후자에 강조가 주어지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그의 헤게모니론은 자유주의 정치이론에서의 집단간 이익 갈등론의 수준으로 환원되게 될 것이다. 앤더슨이 지적하듯이 그러한 인식은 일종의 환상에 불과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서구 자본주의의 주된 이데올로기적 질곡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람씨 자신의 텍스트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람씨 자신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는 없음이 분명해진다. 우선 『옥중수고』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의회주의와 같은 '순수한' 형태를 폐기하는 것은 의회주의의 내용을 이루는 개인주의를 근본적으로 타파하지 않는 한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개인주의란 그 정확한 의미에 있어서는 이윤의 '사적 전유 individual appropriation' 및 자본과 사적 이윤의 경제적 이니셔티브의 장악이다.

이러한 구절은 그람씨가 의회주의 정치체제의 구도를 '참여를 통한 평화적 이행'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그는 분명 경제적 잉여의 사적 전유관계에 기반한 생산관계의 상부구조적인 정치적 외피로서의 부르조아 정치대표체라고 하는 의회주의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고, 이 체제의 폐기를 그의 근본적 문제틀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문제틀은 다음의 구절에서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불안정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세력체계는 의회주의의 지형 위에서 그 '보다 경제적인 균형'의 '합법적' 지형을 구한다. 그리고 이 합법적 지형의 폐기는 잠재적으로 숨죽이고 있는 사회세력들의 조직화와 각성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것의 폐기가 투쟁의 격화의 징후(예후)인 것인지, '그 역(逆)이 아니다.' 투쟁이 합법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때, 그것은 분명 위험한 것이 아니다. 위험한 것은 합법적 균형이 불가능하다고 인지될 때이다.

그람씨가 의회민주주의의 대의제 정치체제에서는 자유로운 정치투쟁보다는 투쟁하는 세력 내에서의 자기비판 self-criticism이 더욱 효과적이고 유익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나아가서 그는 의회주의의 합법적·제도적 틀과 기능보다는 잠재적 기능 latent function이 더욱 강고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의회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투쟁세력의 정치투쟁을 '의회화 par-liamentarization' 시키며, 나아가서는 자기비판의 내용 자체도 그렇게 만드는 강고한 지배계급의 질곡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람씨가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유사한 맥락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하는 앤더슨의 지적은 따라서 문면 그대로 이해될 것이 아니다. 베이츠 T.R. Bates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문제는 의회민주주의 정치체제와 파시스트적인 전체주의 체제와의 대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전체주의 정권 하에서보다는 자유민주주의 정권하에서가 혁명의 준비에 보다 용이하다. 왜냐하면 전체주의 정권은 정치의 배제를 자체의 목적으로 삼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1926년 뭇솔리니 치하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투옥된 이후의 『옥중수고』에서 그람씨는 이 점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고 베이츠는 보고 있다. 그람씨가 부르조아 대의제 정치체제를 기본적으로는 '질곡 lynchpin'으로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변혁의 전략 수행에 보다 효율적인 지형일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면, 그가 이 체제에의 '참여'가 아닌 어떤 모습의 대응방식을 구상하고 있었는지가 구체적인 문제거리가 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기동전과 진지전의 전략 개념 및 지배계급에 의한 '수동적 혁명'에의 안티로서의 '대항 헤게모니 counter hegemony' 전략의 내용을 검토해 봄으로써 이해가 가능한 문제이다. 이 점을 살펴보기 전에 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사에 있어서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정치체제의 문제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었고, 그람씨의 인식은 이와 어떻게 대비될 수 있는 것인지를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크스주의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민주주의 일반 democracy in general의 문제가 아니라 카우츠키 Kautsky가 말하였던 바 "누구(어느 계급)를 위한 민주주의인가?"의 문제로 상정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의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의회제도의 틀 내에서 정치적 선거권의 보편화와 정치적 경쟁의 체계로서 발전되어 왔고, 애초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내용의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층, 그리고 쁘띠 부르조아지 등의 종속계급들로 하여금 그 틀내에서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부르조아 민주주의는 종국적으로는 부르조아지의 권력기반의 약화를 초래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적대계급에 의한 정치적 승리의 가능성은 모든 계기에 있어 상존한다고 하는 『프랑스의 계급투쟁』에서의 마르크스의 진술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레닌에 이르르면 이러한 인식은 그 내용을 달리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생산양식의 발전단계와 형태를 구분하면서 경쟁 자본주의 단계에 상응하는 의회주의의 정치체제는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관료적·군사적 체제라는 보다 권위주의적인 형태로 이행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의회민주주의는 독점단계(1914∼1918 기간 이후) 이전의 과거사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의 한계는 차후의 역사과정에 의해서 입증되었다. 즉, 레닌 이후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 즉 독점자본주의는 권위적인 정치체제보다는 여전히 의회제 민주주의와의 결합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성공과 안정화를 꾀해 나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람씨의 민주주의 개념, 특히 그의 민주주의의 확장 expansion of Democracy의 개념은 레닌적인 인식의 한계에 대한 새로운 시사를 주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레닌의 인식 이면에 놓인 전제가 정치를 곧 국가체제(기구)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면, 그람씨는 이를 거부하고 복합적인 헤게모니의 장을 그 매개 지형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예컨대 레닌에게 있어서 부르조아 민주주의와 직접 direct or popular 민주주의의 관계가 단순히 의회제 정치체제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문제로 인식되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그람씨는 이를 헤게모니의 문제로 이끌어들여 국가권력 변혁 이전의 정치적 세력관계의 균형변화의 맥락에서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레닌에게 있어서 현재의 자본주의 국가와 맹아적인 사회주의 국가와의 투쟁으로 인식되었던 정치투쟁의 내용은 그람씨에게 있어서는 국가의 변혁 transformation of the state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문제, 보다 구체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확장의 문제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체제의 타파가 아니라 그 완성의 문제로 전환된다. 즉, 민주주의의 문제는 변혁 이후의 건설의 과제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곧 계급투쟁의 핵심과제로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람씨의 이러한 인식은 다른 한편으로는 변혁의 과정이 곧 건설의 과정이라고 하는, 그의 사회주의 건설의 문제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도 다른 모든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그람씨에게 있어서는 궁극적으로 서구에서의 이행의 전략모색이라는 최종적 문제의식 속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끝으로 그람씨 사상의 최종적인 핵심개념으로서의 기동전과 진지전의 문제를 개략적으로라도 정리해 보기로 하자.


진지전과 기동전

그람씨가 즐겨 사용하는 군사학적 비유의 하나로서 제시되고 있는 진지전과 기동전의 개념은, 강고한 시민사회의 참호체계가 발전되지 못한 동구(러시아)적 상황과 이와 대비되는 서구적 상황과의 차이에서 직접 추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기동전의 전략을 통한 이행의 최후의 역사적 사례였다고 그람씨는 본다. 볼셰비키 혁명의 열기 속에서 한때 중부 유럽을 휩쓸었던 모험주의적인 '국지적 무장공격 Teilaktion'의 전략이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었음은 기동전의 전략이 서구적인 상황에서는 이제 더 이상 효과적일 수 없음을 입증한 역사적 사례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970년대 이후의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국가조직과 시민사회의 다양한 사적 단체들을 포괄하는 방대한 현대 민주주의의 구조'를 발전시켜 왔고, 이제 이러한 통합국가의 지형은 "이전에는 전쟁의 '전부'였던 기동전의 요소를 단지 '부분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시기는 이제 노동조합과 정당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조직화된 대중이 정치의 내부에 존재하게 되고, 어떤 형식으로든지 대중적 정치개입의 잠재력을 보유하게 된 시기였다. 따라서 모험주의적인 파상적 국지전의 전략은 '대중들의 정치적 의식을 충격적으로 일깨우는 효과'를 가져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적 지지기반의 파멸적인 상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변혁전략의 내용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중들을 조직화하고 정치적 주체로서의 대중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적어도 그 필요조건으로 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그람씨가 생각한 진지전의 구체적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동구와는 달리 서구의 부르조아 지배체제가 국가기구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에 있어서의 외피조직을 완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시민사회의 보루체계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진지전의 논리는 국가기구에 대한 직접적인 정치투쟁 이전에 시민사회의 참호 체계에 대한 분쇄전략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지배계급은 시민사회의 영역 위에서는 강제력의 직접적 동원을 배제하고 그 대신에 '자신의 세계관을 확산하고 대중화함으로써 동의를 획득하고, 이것을 통해 전체 사회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도력을 장악'한다. 따라서 안정적인 부르조아 지배의 사회에 있어서는 대중들의 조직화된 동의의 기반 위에서, 지배계급의 특수이익이 곧 전체의 이익으로 표상화되고 피지배계급의 특수이익은 전체 사회의 부분이익으로 폄화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가 시민사회의 영역 위에서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통제력의 수준으로 환원되어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구도는 구체적으로는 지배계급을 중핵으로 형성되는 역사적 블럭 historical bloc의 틀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람씨가 이야기하고 있는 역사적 블럭의 내용은 코민테른에서의 전략적 개념인 정치적 계급투쟁 class alliance과는 그 내용을 달리하는 것이다.

 

계급투쟁의 내용이 '다양한 계급들 혹은 계급분파들이 한 생산양식의 우세한 상황 속에서 서로 연관되는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역사적 블럭의 개념은 한편 이러한 내용을 포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와의 통일성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람씨는 이런 의미에서 "물질적 힘이 내용을 이루고 이데올로기가 그 형식을 이루는 '역사적 블럭'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적 블럭의 양상은 여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민족통일운동과정에서 부르조아 계급이 형성한 역사적 블럭의 내용은 북부 공업지역의 부르조아지와 남부 농업지역의 상층 지주계급과의 동맹관계로 구체화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탈리아 부르조아지의 역사적 블럭은 1930년대까지도 근본적으로 불변하였으나 정치사회에서의 계급동맹의 양상은 국가의 형태나 정부구성의 계급연합에 있어서 다양하게 나타났었다고 그람씨는 지적한다. 역사적 블럭의 틀 내에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행사는 '동맹세력을 지도하며 적대세력을 지배하는' 계급적 지배양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구도 속에서의 이행의 전략으로서의 진지전의 개념은 곧 피지배계급에 의한 새로운 역사적 블럭 형성의 전략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지형 위에서의 제도적 조직체들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피지배계급의 독자적인 헤게모니 기구 hegemonic apparatus가 반드시 요구된다. 그람씨에게 있어서 이것은 곧 '현대의 군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정당이었다. 따라서 진지전의 전략에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조건이자 동시에 가장 결정적인 조건은 긴밀한 계급적 기반을 갖는 정치적 정당의 형성이 된다. 이것은 그람씨가 부르조아 의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참여론적인 인식을 거부하고 있음과 더불어서 진지전의 전략을 단순한 다원사회론적 지평에서의 '거점확보'의 전략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새로운 역사적 블럭의 형성은, 그리고 이를 위한 독자적 헤게모니 기구의 창출은, 피지배계급이 독자적인 지식인 집단을 형성해 냄으로써 가능해진다. 부르조아 헤게모니 하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자체의 지식인 집단,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체의 유기적 지식인 organic intellectuals 집단을 창출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람씨는 부르조아 사회에서 진행되는 대중의 문화적·교육적 수준의 상승 (비록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기구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나)이 이 난관을 줄여 줄 수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

 

진지전의 전략에서 이 유기적 지식인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들은 시민사회의 제 영역에서 지배계급에 의해 행해지는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메카니즘으로부터 피지배계급을 차단하고, 독자적인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의 대중적 확산을 꾀하며, 나아가서는 지배 헤게모니의 주요 기반으로서의 대중적 동의의 구도를 해체시키고, 핵심계급 성원들의 대중적 정치의식의 수준을 높여 나가며, 농민층을 비롯한 주변적 종속계급들을 핵심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유기적인 역사적 블럭 organic historical bloc의 틀 속으로 규합해 내고,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정치적 조직의 기반을 확대해 간다. 이런 의미에서 유기적 지식인 집단은 '영원한 조직가이며 영원한 설득자', 곧 '헤게모니의 조직자' 그 자체로 설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지전의 전략은 장기간에 걸쳐서 '무수한 대중들의 막대한 희생을 요구'하는 장기 지구전의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람씨의 말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 진지전은 일단 승리하면 결정적인 것'이 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이제 기동전의 전략은 '결정적이지 않은 위치의 획득이 문제인 한에 있어서 존속'할 뿐이다. 서구에서의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의 이행은 따라서 '정치적·역사적 상황에 있어서 절정의 국면으로' 접어들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진지전과 기동전의 관계는 전자가 후자를 전술적 차원에서의 것으로 포괄하는 상보적인 성격의 것이 되는가? 그람씨의 『옥중수고』는 이 문제에 관해 분명한 시사를 주고 있지 않다. 따라서 논자에 따라서는 기동전의 전략은 러시아적 상황을 그 절정으로 하여 역사적 유효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진지전과 기동전을 단계론적인 맥락에서 보아 전자가 후자의 전략적 준비기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양자의 관계를 대척적인 것으로 보는가, 상보적인 것으로 보는가, 아니면 상이한 단계의 전략들로 보는가 하는 문제는 그람씨의 논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람씨에게 있어서 이러한 헤게모니 투쟁의 장, 역사적 블럭의 주도권 쟁탈의 장은 '계급투쟁의 결과가 광범위하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 개방된 열린 정치의 장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람씨 사상의 본질적인 한 측면, 즉 그가 역사적 변혁의 문제를 사회세력간의 집합적 의지 collective wills의 각축장으로 설정하고 있었다고 하는 측면과도 긴밀히 연관된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이 헤게모니 투쟁의 구체적인 양상을 규정해 주는 세력관계의 다양한 계기와 수준을 총괄적으로 이해하는 문제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 점을 살펴보면서 그람씨 헤게모니론의 의미를 현실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 보도록 하자.


Ⅳ. 헤게모니의 계기와 이행의 문제

그람씨는 주지하듯이 경제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조류의 마르크스주의를 줄곧 통박해 왔던 인물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위기가 곧바로 부르조아 지배의 사회구도를 변혁할 수 있는 계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체제위기의 내용을 유기적 위기 organic crisis와 국면적 위기 conjunctural crisis로 나누어 차별적으로 인식하였다. 유기적 위기가 기본적으로 경제적 위기에서 파생되는 구조적 모순의 산물이라면 국면적 위기는 헤게모니의 개념에 의해 매개되는 보다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개념이다. 그람씨 자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위기가 발생하고, 때로는 수십 년에 걸쳐 위기상황이 계속되기도 한다. 이처럼 예외적으로 긴 위기의 기간은 치유 불가능한 구조적 모순들이 발현되고 있음을(성숙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의 구조를 고수하고 방어하려는 정치세력들은 어떤 한계 내에서라도 이를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온갖 시도를 감행한다. 이 부단하고 끈질긴 노력(어떤 사회구성체도 스스로가 이미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음을 인정할리는 없는 것이므로)이 '국면적'(위기)의 지형을 형성하며, 이 지형 위에서 적대하는 세력들은 조직화된다. 이 세력들은 특정한 역사적 과제들을 가능하게 하고 따라서 당위적인 요구로 하는 필요충분조건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분투한다.……

헤게모니의 계기로서의 역사적 위기의 성격에 대한 그람씨의 이러한 논의는 『옥중수고』 중 「현대의 군주」편에 수록된 세력관계의 다양한 계기와 수준에 대한 자세한 논급을 볼 때, 보다 분명한 모습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세력관계의 계기를 크게 셋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첫째는 사회세력관계 relation of social forces로서,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구조를 반영한다. 즉, 물리적 생산력의 수준을 토대로 한 다양한 사회계급들이 생산의 영역 속에서 독특한 위치와 기능을 가지며 형성하는 세력관계가 이것이다. 그람씨에 의하면 이것은 그 누구도 의지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완강한 현실'이며, 이것은 오직 특정사회 내에서 변혁의 필요충분조건이 존재하는지를 점검해 볼 수 있는 '근본적 자료 fundamental date'의 영역이기도 하다. 세력관계에 있어서의 두번째 계기는 정치세력관계 relation of political force로 주어진다. 다양한 사회계급들이 도달한 동질성의 정도, 자기인식, 조직화의 정도에 대한 평가의 장으로 이야기되는 이 계기는 '역사 속에서 표출된 집합적 정치의식의 다양한 계기들'에 상응한다. 세번째 계기는 공공연한 물리적 힘의 관계, 그람씨의 표현에 의하면 '군사력의 관계'이다.

 

그람씨의 말에 의하면 역사발전은 첫번째와 세번째의 계기를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진행되며 여기에는 두번째 계기는 줄곧 그 매개의 장으로서 역할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람씨의 논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계기는 두번째 계기인 정치세력관계로 설정된다. 그람씨는 이 계기는 근본계급들의 집합적 정치의식의 발전과정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다시 차별화 된다고 보고 있다. 아마도 계급의식의 발전과정으로도 전환되어 인식될 수 있을 이 단계들은, ① 계급 내 경제적 집단들이 초보적인 단계에서의 자기이익을 경제적·조합주의적 economic-corporate 수준에서 확보하는 단계, ② 계급 내 모든 성원의 이익 동질성의 인식이 확보되나 아직은 순수한 경제적 영역에 국한되는 단계, ③ 자기계급의 이익이 경제적 계급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인식하고 여타 종속적 집단들과의 동질성을 확보해 가는 단계로 각기 차별화 된다. 이 마지막 단계가 곧 가장 순수한 정치적 국면의 출발점으로서, 이것은 (하부)구조에서 복합적인 상부구조론의 결정적 이행의 국면이며, 기왕의 맹아적 이데올로기가 정당으로 조직적 구체화를 꾀하면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의 상황을 만들어 가는 국면이기도 하다. 이 단계를 거칠 때, 비로소 하나의 정치세력, 혹은 하나의 결합세력, 즉 역사적 블럭이 전 사회를 지배하면서 경제적·정치적인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지적·도덕적 intellectual-moral 수준에서도 여타 계급들을 지도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람씨에게 있어서 이러한 세력관계 분석의 의미는 '그것이 특정한 실천적 활동, 혹은 의지의 주도 initiative of will를 정당화함에 기여할 때 비로소 유용한 것'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어떠한 시점이 가장 저항을 덜 받을 수 있는 시점이며, 의지력의 과실이 가장 풍부할 수 있는 시점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 즉시 투입될 수 있는 영속적으로 조직화되고 장기적인 준비를 갖춘 세력'을 형성시키는 일이다. 다시 한번 군사학적 비유를 사용하면서 그람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본질적인 과제는 끈기 있고 체계적으로 이 세력을 형성, 발전시키며 더더욱 동질적이며 자기인식을 갖춘 콤팩트 compact한 존재로 가다듬는 일이다. 군사(軍史)의 경험이 이를 분명히 해준다. 모든 시기에 있어서 군대는 어느 순간에건 전쟁에 투입될 수 있도록 사전에 세밀한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람씨의 『옥중수고』전체를 통하여 이 부분만큼 그의 사고의 요체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구절은 아마도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그가 말하는 진지전의 개념적 내용도 이상의 서술 속에서 스스로 분명해진다. 그람씨의 구도 속에서 진지전의 전략의 후미는 광범위한 가능성 속으로 역시 열려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유기적 위기, 그리고 보다 극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적 위기의 지형 위에서 노동자 계급은 '계속 변화하는 정치적 개입의 장, 창조적이며 헤게모니적인 역할을 위한 기회'를 부여받는다. 노동자 계급이 이 기회를 수용해 내지 못하면, 위기의 순간에 부르조아 계급은 강제력의 동원(세번째 계기)을 통한 체제의 지탱을 꾀하고 연이어 스스로 경제를 재조직화하고 기존의 국가를 지지하는 역사적 블록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지배를 새로운 형태로 재조직화 할 것이다. 만일 이런 의미에서의 부르조아 계급에 의한 '수동적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러면서도 여전히 진보적 정치세력에 의한 적극적 개입의 가능성도 부재한다면, 이탈리아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그람씨가 가장 경고해 마지 않았던 상황이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력균형의 파국적 와해에 뒤이은 '쎄자리즘 Caesarism'의 대두를 말함이다. 그람씨는 서구의 그 어떤 마르크스주의자 보다도 이 점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1920년대 뭇솔리니 파시즘에 대해 취했던 태도를 그가 신랄히 비판하였던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람씨에게 있어서 진지전 전략의 후미가 열린 가능성의 장으로 던져져 있다고 하는 것은, 그가 20년대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자 중에서는 지극히 예외적으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임을 입증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홉스봄 Hobsbawm이 말하고 있듯이, "그는 설익은 '유로코뮤니스트'가 아니었다……새로운 10월 혁명이 불가능해지자 그람씨가 지속적 투쟁전략으로서의 '진지전'을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람씨는 '진지전'의 결과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진지전은 머지않아 곧바로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낳을 수도 있고, 또다른 '기동전'이나 다른 전략적 차원으로 변할 수도 있다……그람씨를 점진주의자 gradualist라거나 그 옹호자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자본주의 내에서 어떠한 점진적인 개혁이나 변화의 축적이……자동적으로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변혁시킬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람씨의 정치경력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는 현존하는 노동조합 조직체들이 피지배계급의 '헤게모니 기구'로서의 적합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곧바로 노동조합의 조직구도를 탈피하여 공장평의회 Factory Council 운동을 주도하였다. 기존의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더 이상 대중의 변혁적 요구를 유기적으로 조직화해 낼 수 있는 조직틀이 될 수 없다고 판단되자 단호히 그와 결별하고 공산당(PCI)의 창출을 주도하였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소비에트의 영향하에서 관료적 조직체로서의 성격을 띠어 가고 있다고 판단되자, 그는 '새로운 형태의 당'으로서의 전환을 모색하면서 대중적 기반의 확장을 위한 조직전략으로서의 '민주적 중앙집중제'를 주창하였다. 파시즘의 대두와 흥륭, 그리고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부르조아 수동적 혁명으로서의 개입주의 국가의 대두를 목격한 그는 뭇솔리니 치하에서의 혹독한 옥중생활 속에서도 그 어떤 이론가도 천착하지 못하였던 '부르조아 체제의 강점'에 대한 논구를 계속해 갔다.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의 전략모형의 이행이 부르조아 민주주의의 지형 위에서의 파워 게임 power game의 이론으로 후퇴 내지 타락한 것이라는 비판은 무엇보다도 그의 정치적 활동과 이론적 활동의 경력 자체에 의해서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논의 속에서 이행의 문제가 미궁으로 남아 있다고 하는 지적은 그의 사상체계 속에서 이 문제가 본질적인 과제로서 줄곧 던져지고 있다는 현재성(現在性)의 인식으로 수렴될 수 있는 것이지, 그를 '지성의 비관주의자'로 적시할 수 있는 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Ⅴ. 맺 는 말

일찍이 폴 피콘 Paul Piccone은 서구의 사상사에 있어서 80년대는 아마도 '그람씨주의'라고 불리 수 있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와 나아가서는 제 3세계의 사회과학이론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그의 사상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의 사상을 총괄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하다. 서구의 사회과학자들의 그람씨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는 서구사회에서의 방기된 이행의 문제틀에 대한 관심의 재흥이라는 맥락에서 주어지고 있다. 톰 나이른 Tom Nairn은 그람씨의 사상이 오늘날 '제 3세계'라 불리는 상황의 산물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홉스봄과 같은 학자는 대중적 동의의 창출을 관건으로 하는 혁명적 상황에 있어서는 어디에서나 그의 헤게모니론이 일반적 적합성을 가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 혹은 다행하게도 - 우리에게 있어서 그람씨의 사상은 아직은 열린 해석의 장으로 남아 있다.

 

구체적으로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무수한 주제들에 대한 천착이 선행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고, 나아가서는 그람씨가 겪지도 이해하지도 못하였고 그럴 수도 없었던 우리 나름의 무수한 주제들이 미결의 과제로 우리 앞에 산적해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독특한 흡인력으로 우리 앞에 다가서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그 어떤 사상가나 이론가와도 달리 자기체계의 완결성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의 사고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주제들과 과제들이 열린 가능성의 장 위에 펼쳐져 있음을 본다. 그가 온몸으로 겪어 나갔던 시대적 상황의 혹독함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하나의 신선한 경이로 비춰지기도 한다. '우리가 그의 노력을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은' 흡스봄에게 있어서 '다행한 일'일 것이다. "그람씨가 그랬듯이 우리도 독자적으로 그 과업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는 흡스봄의 희망은 역시 우리에게 있어서도 현재성으로 여겨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할 것이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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