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맑스주의의 확장과 소수자운동의 의의

ddolappa 2008. 5. 17. 05:25

 

맑스주의의 확장과 소수자운동의 의의 


진보평론  제1호  
윤수종(전남대학교 교수/사회학)  


1. 머리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한국 사회과학 및 인문과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맑스주의 등이 휩쓸고 지나갔다. 서구에서 이 ‘포스트주의’들은 자본주의 상품소비문화를 찬미하는 것에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혁신적 변화를 찬미하는 것(포스트포드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나아가 기존의 이성중심적인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서 탈중심적인 사고를 주장하고, 사회를 인식 주체에 의한 구성물로서 파악하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포스트주의적 사고의 흐름은 주로 자본주의 상품소비문화를 미화하거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상의 새로운 동향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논조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교조적인 ‘변증법적 유물론’(Diamat)의 역편향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에 대한 반격의 성격을 띠고 행해졌다. 점차 미셸 푸코와 같은 사람의 비판적 분석도 소개되어 왔으나, 전복적 사고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독자적 사회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사회구성체논쟁의 논자들도 포스트주의와 접맥되면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논자들은 과거(자신들의 주장)와 단절하고 자본주의 발전을 옹호하는 혁신적 변신의 모습을 보였다. 일부에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정식화되었던 논의도 포스트주의적 사고와 접맥되지 않을 수 없었고, 점차 알튀세르학파의 주장을 원용하면서 전개되어 나갔다. 한국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소개는 맑스주의의 전화라는 전망 위에서 논의가 확장되어 왔지만, 맑스주의의 위기를 내적으로 작동시키면서 돌파해 나가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데올로기론을 중심으로 하여 노동자운동과 맑스주의의 융합이라는 문제설정에 집착하면서, 여전히 전통적 맑스주의의 개념틀 속에 갇힌 채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해 내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2. 탈근대사상과 새로운 주체성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려는 노력은 이미 서구에서 다양한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또한 기존의 주류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사회현실과 인식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간 당연시해 오던 것들을 되짚어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 또한 많은 경우 ‘포스트주의’, ‘탈근대’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제기되었다.

흔히 ‘탈근대’라는 문제설정은 전근대-근대-탈근대 라는 시기구분식 문제설정에 매여 있다. 물론 ‘탈’근대라는 문제설정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반’근대라는 문제설정을 요구한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해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려는 생각에서, 기존의 근대적인 사유양식과 사회구성방식에 대해 대안적인 것을 찾아가려는 문제설정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설정에서 근대니 탈근대니 하는 구분방식 보다는 오히려 그 동안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주류흐름의 지배자적 다수자적 사고방식에 대항한 소수자적 흐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탈근대사상의 비판적 흐름 속에서 ‘홉스-루소-헤겔-(하버마스)’ 라는 다수(majeur)노선에 대(항)해서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니체-(들뢰즈)’라는 소수적(mineur) 사유를 강조하는 흐름을 제시할 수 있겠다. 두 흐름을 철학적 개념들을 축으로 구분해 본다면, 다수노선의 보편자-동일자-인식론-심연-외재성(목적론)-본질(절대자,신)-저 세계-권력(pouvoir)
-재현-정신-이성-계약-양도(매개,대표)-도덕(moralité)을 강조하는 입장에 대(항)하여, 무한자-차이-존재론-표면-내재성-특이성(singularité = multiplicité)-이 세계-역능(puissance)-표현-신체-욕망-공포(희망)-직접성(대표거 부)-윤리(éthique)를 강조하는 소수노선*주)을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수자적 사고흐름 속에서 탈근대의 문제제기를 단순히 이성비판과 해체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소수적 관점에서 사회를 재구성해 나가려는 문제설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주) ■■이러한 관점은 네그리, ■야만적 별종■, 푸른숲, 1977에 기초하여 정리한 것이다. 각각 대립시킨 개념들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을 참고하시오.■■

이러한 철학적, 사상사적인 두 가지 흐름은 당연히 인간사회의 구성원리와 사회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지녀 왔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추상적 구호 속에서 추상적 인간들의 개별의지를 일반의지로 위임(양도)했던 근대사회는 다수노선에 근거한 대표제 모델에 기초하여 좋은 대표자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였다. 맑스주의도 이 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대중의 역능을 강조했던 맑스주의는 대표제모델(민주집중제)과 아나키즘 사이에서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소수적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확장이 필요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유흐름에 따르면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해석을 달리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 세계사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소수노선에 입각한다면 색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노선에서는 역사(사회운동)를 부르주아혁명(상징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1917)을 구분점으로 하여 파악하는데, 이러한 파악방식은 어느 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는가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누가 얼마나 좋은 사람(집단, 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는가, 대표자가 되었는가가 준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소수노선의 관점에서는 공산당선언(1848년)과 1968년혁명(1968년) (그리고 작은 구분으로는 현실사회주의 붕괴, 1989년)을 구분기점으로 하여 역사(사회운동)를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공산당선언과 1968년 사이에는 중앙집권당, 즉 전위당 모델에 입각한, 지도와 대중이라는 대당에 입각한 실천운동(노동운동 중심)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이 지배적이었다면, 68년 혁명 이후에는 전위당모델을 비판하면서 분자적(moléculaire) 운동(노동거부에 기초한 자기가치증식운동, 여성운동, 소수자운동 등 ‘아우토노미아운동’*주))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 붕괴의 의미는 ‘전위당 모델에 입각한 대중운동’의 종결을 의미하며, 따라서 분자적 운동의 족쇄가 한층 풀린 것으로 이해한다.

*주) ■■아우토노미아운동의 사례에 대해서는 윤수종,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운동’ ■이론■, 14호, 1996.■■

이렇게 탈근대사상은 색다른 사유와 사회인식을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주체문제를 제기하였다. 탈근대사상은 한편으로는 구조주의를 매개로 하면서 구조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간 구조주의와 사회과학의 객관성(객관주의)은 주체문제를 없애 버렸다. 학사적인 흐름에서 정리해 보면, 프랑스의 철학 및 사회과학계는 소쉬르를 축으로 한 구조주의의 영향하에서 기존의 데카르트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노력은 근대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주체 문제를 상대적으로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이탈리아) 등은 데카르트적 주체로 돌아가지는 않으면서도 구조주의적 ‘주체없는 과정’을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탈근대적 주체성의 탐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탈근대사상의 실천적 함의는 탈근대적 주체에 대한 탐색의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체 문제를 놓치고 소비사회의 모사(simulation) 속에서 허무를 달래는 보드리야르 같은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소수적 사유방식은 이미 다수적 사유방식에서 가볍게 여기던 항목들을 중시여기고 전혀 다른 주체상과 사회상을 그려 나가려고 하였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주체철학과 이성의 승리는 곧바로 이성적인 인간상, 구체적으로는 백인-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백이-건강인-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 라는 표상을 준거로 하여 사회를 위계화해 나갔다. 맑스주의조차 보편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 상에만 매달려 사실은 새로운 주체에 대한 탐색을 하지 못하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은 68년 운동 이후 이러한 모델을, 근대적인 표준적 인간상을 파괴하려고 하며, 그 인간상으로부터 주변적이고 소수자적인 위치로 밀려난 개인들 및 집단들을 복권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이성을 축으로 한 근대적 구성은 광기에 대한 공포에서 생긴다고 본다. 따라서 이성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탈근대적 주체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광기연구에 집중하게 된다*주). 이는 사회구성적으로는 주변화된 집단들에 대한 연구로 나아간다. 자본가모델을 비판한 전통 맑스주의는 노동자모델을 자본가의 반대상으로 제시하는 변증법에 머물면서 결국은 근대적 절대모델(The Model)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양자(변증법)에 대한 비판이 탈근대적 주체찾기의 출발점일 것이다.

*주)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 68년 이후 광기연구가 성행한 것을 상기해 보자. 죄수, 정신병자, 동성애자, 어린이, 이민자, 여성, 주변자들...■■

3. 맑스주의의 확장

탈근대적 주체 찾기는 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면서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주의를 확장해 나가려는, 즉 맑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실천방향을 탐색하려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탈근대사상이라는 커다란 격랑을 헤쳐 나오면서 기존의 맑스주의는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점차 기존의 맑스주의가 객관적 분석과 필연성 논리에 사로잡혀 결국은 산노동(노동자계급)을 억누르는 위치로 전락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면서, 대표제 모델(레닌식 민주집중제)에 대한 비판과 역능에 기초한 사회구성과 아우토노미아적 조직화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기존의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확장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네그리(Negri)가 전개한 방식(내공법)으로서 맑스주의의 전통적 개념들의 내용을 현실에 맞춰 재해석해내면서 노동자계급(산노동) 속에서 전복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고, 나아가 다양한 노동범주들을 탐색해 나가는 것이다.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노동의 정치경제학으로 전환시키면서 전복의 정치학을 구성해 내는 방식이다*주). 기존의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말을 떼어 낸 채)은 맑스의 ■자본■에 매여서 자본의 동학을 설명하고 자본의 자기잘못을 지적해 주는데 바빴다. 네그리는 ■요강■을 대치시키면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 속에서 사회구성을 설명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회구성의 힘은 바로 산노동에서 나오지 산노동을 착취하는 지휘자였던 자본에게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주) ■■윤수종, ‘안또니오 네그리의 정치경제학 비판’, ■비판■, 창간호, 1997.■■

네그리는 노동자계급 속에서 주변성의 특징들을 파악해 내고 그러한 특징들의 변화 속에서 노동의 질적 변화(비물질적 노동으로의 변화)를 추적한다*주). 보편적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구체적인 다양한 노동자계급내부의 층들이 존재한다고 보며, 공장을 넘어선 사회적 공장이라는 인식으로 넘어간다. 이제 노동은 공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는 것들로 인식되고, 공장의 ‘생산적 노동자’만이 아니라 집안의 가사노동자에서 단란주점의 매춘부...까지 다양한 노동자층들을 포괄하는 노동자개념(사회적 노동자)으로 넘어간다. 디오니소스노동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이러한 노동 내부의 자율성(주변성)에 대한 탐색은 사회구성에서 다양한 사회층들을 포괄하는 논리로 나아가게 된다(우리는 모두 대표다).

*주) ■■A. Negri, M. Lazzarato, A. Corsani, Le Bassin de Travail Immateriel(BTI) dans La Metropole Parisienne, L'Harmattan, 1996.}}

이에 비해 국가는 노동의 구성장치로서 성립된다. 국가는 다양한 사회층의 노동을 구성해 내는 법적 장치를 주요한 도구로 갖는다고 한다. 네그리는 국가와 자본이라는 관계설정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라는 존재조건을 갖는 국가라는 문제설정으로 넘어간다. 노동의 공격에 대한 자본의 대응 속에 있는 위기국가라는 국가에 대한 문제설정은, 관리자로서, 경영자로서, 거시경제의 조절자로서 국가에 대한 상을 공격한다. 또한 공공지출 등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재생산적 전유라는 관점과 복지국가적 시설을 노동자계급의 공적 영역의 확보과정을 파악하는 지점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발상들은 기존의 경직화된 공산주의에 대한 상을 새롭게 하고 대중의 역능에 근거하여 아래로부터 이루어지는 구성권력에 대한 전망으로 나아간다*주).

*주) ■■Negri, Le Pouvoir Constituant,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의 전통적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프로이트주의(라이히)에 상당히 근거하면서 주체 문제를 탐색해 나가려는 가타리의 방식이다(외공법). 68년 혁명 이후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정신분석학과 철학을 새롭게 전개해온 사람이 가타리이다. 그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신요법(제도분석, 그리고 점차 나중에는 분열분석)을 전개하였고, 들뢰즈와 철학적 공동작업을 통해 전통적 사유를 해체하고 욕망에 기초한 유동적(유목민적) 사유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인간의 인식을 억압해(틀지워) 왔던 변증법에 대한 거부이자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적 변증법에 대항하여 유태적 기호독해를 통해서(들뢰즈) 또는 구조분석에 대항하여 기계를 들고 분열분석으로(가타리).

더욱이 가타리는 라이히(W. Reich)가 제시했던 정신분석과 맑스주의(정치)의 결합을 전진적으로 시도한다. 알튀세르처럼 비운의 짝짓기에 실패하여 우울해 있는 사람과 전혀 달리 가타리는 접합이 아니라 횡단을 통해 나아간다. 가타리는 기존의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 해왔던 구조분석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기계적 작동을 외치면서 새로운 집단적 주체성의 구성에 관심을 갖는다.

가타리는 기존의 정신분석에 대해 공격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를 계승한 라캉식의 환원론적인 정신분석에 반대하여 정신분석적 실천을 사회전체와, 정신치료를 둘러싼 사회적 장과 연결시켜 나가면서 사회비판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갔다. 또한 정신의학 안에서의 실천 자체를 곧바로 현실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실천과 연결시켜 나갔으며, 이렇게 다양한 부문(secteur)들과의 접속을 통해 새로운 집합체를 만들어 나가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타리는 맑스주의가 경시해온 미시적 작동에 주목하고 욕망의 흐름 위에서 전개되는 미시적 작동의 해방적 전개 및 축적 위에서만 거대한 작동의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분자혁명이란 상에 이른다*주). 끊임 없이 제도를 자신의 틀(장치) 속에 포획함으로써 다수 대중의 무한한 욕망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시선에 대항하여 욕망의 탈주선을 실험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가타리는 푸코의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대해서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작동시킨다(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주)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가타리의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맑스주의운동 내부에서도 새로운 실천방향들을 모색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였다. 인간의 사고와 실천을 틀에 가두는 방식들에 대해서 ‘횡단’을 외치면서 그 폭을 넓히려는 시도는, 국가에 대항하면서도 스스로 내부에 국가조직과 같은 사회상을 만들어 가는 반대운동으로서 전복운동이 아니라, 대중의 무한한 역능(puissance)에 기초한 끊임없는 생성적 움직임을 통해서만 기존의 국가틀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 갈 수 있다는 네그리의 아우토노미아 사상과 통하게 된다.

네그리와 가타리는 체제내화 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이러한 다양한 흐름들이 결집되어 전체 지배구조(국가)를 변형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들은 포스트주의자들이 말하는 현실 및 인식의 변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러한 변화들이 어떻게 개인의 전면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무엇이 그러한 과정을 가로막고 있는지 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네그리는 아우토노미아를, 가타리는 분자혁명을 외치면서. 이는 바로 맑스주의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길 아닐까? 이들의 주장은 제도적으로 단순화하자면 현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커다란 제도인 국가와 가족을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맑스주의를 확장하려는 이러한 두 방향은 한국 현실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노동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이론으로서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지층화와 욕망의 흐름을 구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의 분리로 특징지워지는 현 상황은 오히려 이론이 산노동(노동자계급) 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간과한 결과는 아닐까? 또한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노동자(상)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검은 근육질에 눈을 부라린 노동자상이 아니라, 자동기계 옆에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하려고 애쓰면서도 끊임없이 기계에서 분리되어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그래서 공장 바깥에 포진하여 새로운 비물질적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상! 여기서 네그리의 논의가 주는 함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방향은 노동운동이나 맑스주의이론이 여타 부문(secteur)들과 접속해야 할 것을 제기한다. ‘생산적 노동’으로 좁혀진 노동자상은 결국은 노조운동이나 정당(‘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사기)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횡단을 통해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운동, 환경운동, 다양한 소수자운동, 주변자운동, 대안운동들...과 접속함으로써만 초코드화하는 권력에 대항해서 대중의 역능(욕망)을 구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중심을 설정한 접합이 아니라 서로 자율적인 운동 속에서 접속할 것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겠다.

4. 소수자운동 - 새로운 정체성 찾기와 자유의 공간 만들기

소수자운동은 작은 운동이 아니다. 전지구적 현상이다. 단지 방향이 문제이다. 초코드화하는 운동이 아니라 분자화하는 운동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민족분규는 각 인종집단의 주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민족분쟁-분리운동-자신의 고유한 주체성 찾기라는 식으로 볼 수는 없을까? 미국의 이라크 공격, 유고공습은 미국식 주체성을 강요하는 행위이다. 미국식 생활양식을 모델화하여 강요하는 행위이다. 자! 베트공식 전인민의 주체화를 통해서, 모델화되지 않는 변화무쌍한 주체들의 등장을 통해서, 모델화된 주체성(미국식 주체성)의 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베트콩이 미국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다른 주체성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베트콩 이미지는 없다. 누구나 어디서나 베트콩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베트콩을 색출해 내서 제압할 것인가? 몰살의 방식만이 가능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에게 가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잔여물(살아남아서 점차 사라져 가는 인디언들, 그래서 동물원의 동물들 처럼 보호받는 사람들)은 있다. 미국은 지상전에서 승자가 될 수 없다. 전세계적 초강력 주체성을 강요하지만 다양한 주체성과 소통하지 못한 채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뿐이다. 그래서 스타워즈인가?

그리고 한국과 관련하여, IMF는 87년을 기점으로 80년대에 한국의 노동자계급(넓게는 대중들)이 확장해온 힘을 제압하려는 초국적 자본의 본능적 움직임이다. 음모? 전혀 ‘음모모임’하지 않고 눈빛으로도 가능하다! 깡패들이 조직원을 공채(공모, 모집)하는가? 눈빛으로 교감으로 정동작용(affection)으로 한다. 더욱이 주체성과 관련하여 IMF는 대중들을 기죽이는 것이다(IMF파시즘). 그 현상은 보장된 노동자와 비보장된 노동자의 균열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상황을 좀더 이론적으로 정리해 보자. 초국적 자본을 축으로 한 세계적인 통합된 자본주의의 전개라는 상황과 그 반대쪽에서는 각 인종들의 다양한 자기분출 및 분리주의운동이라는 분자적 움직임이 상충하고 있다. 초국적 자본을 축으로 한 권력은 분자적 움직임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마이클 조던에 대한 감동이 나이키 상표에 대한 동조로 바뀌기를 기대하듯이. 물론 아무리 그렇게 초코드화해 나가려고 해도 다양한 분자적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일정한 틀 속에 재영토화함으로써 포획장치 속에 집어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분자적 움직임은 다양한 주체되기를 통해서, 더욱 다형도착적인 베트콩 되기를 통해서, 소수자되기를 통해서 포획장치에서 벗어나 다른 기계들을 작동시킨다. 이러한 분자적 움직임은 색다른 주체들을 내세우며 색다른 공간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 색다른 주체들은 소수자운동으로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기 권력(현존 지배권력에 대항한 노동자권력, 여성권력, 게이권력, 레즈비안권력, 어린이권력, 실업자권력, 이민자권력, 매춘부권력, 죄수권력... 소수자권력)을 내세운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주체성) 찾기와 그 고유한 권력(역능)은 기존의 제도와는 다른 공간들을 창출함으로써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한 양상은 대안운동(흔히 다양한 공동체운동)을 통해 나타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은 상호 중복되어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맑스주의자들이 강박당하고 있는 자본주의극복이라는 엄숙한 담론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을까? 파괴와 극복 논리를 넘어서 생성과 구성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적인 ‘작동방식’을 문제삼아야지 자본주의를 문제삼아서 무엇을 만들어 갈 것인가? 자본주의의 반대상을? 자본주의적 작동방식 옆에 붙어서 ‘색다른’ 작동방식들을 증식시켜 나가기!

여기서는 다양한 운동들을 지목하고 간단하게 촌평하는 식으로 현재 한국의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에 대해 언급하고 평가해 보겠다.

<소수자운동>

노동운동(외국인노동자운동) - 노동자 내부의 주변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주변성 분석의 중요성). 제도화된 보장된 노동자(노조로 조직된 노동자)의 운동에 집중되어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비보장된 노동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해야 할 것이다. 성노동자, 여성노동자, 이민노동자, 비물질적 노동자(영상물제작팀이나 패션계 등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겠는가?) 등을 고려하면서 노동자운동의 변신이 필요할 것이다. 즉 새로운 변화된 노동자상에 걸맞는 조직방식 및 형태를 고안해 내야 한다. 소수자의 창조성(노동자 내부의 아우토노미아)이 발휘되면서 전체가 변형되는 과정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여성운동(주부운동) - 여성운동은 정치권력에서 할당된 배분운동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한편으로 있고 그와 맞물려서 내부의 위계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내부의 위계화를 만들어 내지 않고 기존의 제도를 변형시킬 수 있는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여성주의 잡지 IF에서 처럼 여성의 오르가즘 문제 등에 대한 쟁점화는 엄숙한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야 하는 함의를 던져준다. 엄숙하고 무성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적 자유 및 성적 만족을 동반하는 여성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맑스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계급해방이 이루어지면 여성해방도 이루어진다고 보았다는 식으로 단죄해 버리고 급진적 페미니즘의 흐름으로 성급히 뛰어간 여성주의 논의변화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소수자적인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확장을 생각한다면 여성은 즉각 중요한 주체로 떠오른다.

가사노동논쟁은 여성의 노동이 ‘가치생산적’이라는 논점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공장에 매인 노동의 성격을 사회화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레닌적 민주집중제를 파괴하는 선두주자가 된 다른 나라(이탈리아)의 경험이 있다. 남성에 지배받는 여성이라는 변증법적 대당식 문제설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색다른 형태(자기가치증식)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오토에로티시즘에 입각한 레즈비아니즘의 등장이 주목된다. 또한 질오르가즘, 크리토리스오르가즘을 넘어서 자궁의 자본주의적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 나아가 기존의 가족모델에서 벗어난 다양한 가족형태 및 성애형태에 대한 탐색 및 실험이 가능할 것이다.

어린이운동 - 그렇게 자유롭던(말 안 듣던?)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가서 한 달이면 복종하는 어린이가 되는 것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인가? 선생님들은 어린이들을 제압할 때 왜 받아쓰기를 주요 무기로 사용하는가? 왜 어른들은 흔히 ‘애들은 가라’, ‘애들은 몰라도 돼’라는 이상한 굉음을 계속 내고 있는가?(모두가 뱀장사란 말인가?) 어린이들의 욕망은 어떻게 표현되겠는가? 프랑스에서 어떤 라디오방송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생방송으로 내 보낸 일이 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그 대답을 들은 어른들은 쇼킹, 경악! 그 프로그램은 즉각 폐쇄(명령)되었다. (최근에는 유아신경증까지 발생한다니! 그것도 대량으로). 기존의 교육틀 안에서라도 내부자율성을 확대하는 운동이 요구된다. 의자에도 못 올라서던 어린이가 또래(같은 반) 어린이들과 함께 한 자율적 계획과 실험 하에 이루어진 야외놀이에서 위풍당당하게 행진하고 365계간을 오르내린다. (->공동육아, 대안학교운동)

청년운동(학생운동) - 대한(따이한)민국에서는 전혀 소수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청년들이 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전체 이념운동(및 실천활동)에서 주도해 온 것이지 청년들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왔는가? 거대 이념에 사로잡혀 몸을 버리고 운동해온 사람들의 결말은? 기철학? 건강학? 그것도 좋다! 정치권으로 진입(탈락자들의 피신처, 이른바 운동권에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사람들)? 대학 학생운동은 항상 사회문제 해결과 대학내부 문제 해결이라는 선택지에서 동요하고 있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고등학교까지는 그렇게 세계적으로 우수한데(물론 가장 심하게 시키니까) 대학졸업할 때 되면 왜 중간에도 못 끼는가? 장애물은? 군대? 취직? 학생보다 못한 교수? 10년전과 똑같은 강의노트? 힘들고 배울게 많은 강의를 피해서 적게 배우고 편한 강의 찾아 가기! 고시폐지운동! 학교폐지운동? 대학폐지운동? 제2대학운동! 탈학교운동.

동성애자운동 - 소수자적인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해 나간다. 잡지발간, 다양한 동호인 모임, 휴식공간... 컴퓨터를 통한 소통. 버디(Buddy)란 잡지. 인식의 변화는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실천적인 제도적 변화를 별로 가져오지 않는다. 정체성확보에서 공간확보(게이커뮤니티, 레즈비안커뮤니티)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변적인 폐쇄된 코뮤니티를 구성하는데 머무르는 경향이 비판받는다. 그러나 소수자는 항상 처음에는 주변자로, 이상한 것들로, 파렴치한 사람...으로 현상한다. 68년 혁명당시 히피들처럼!

실업자운동 - 현재는 구호차원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다. 지원이나 사회적 안전망 건설은 노동자계급의 공적 영역의 확보(공산주의의 전제조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현재는 쉼터개설 차원. 문제는 다시 업자(직업자)가 되는 방향에 있다기 보다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방향에 있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협동적 조직화나 노동자들의 기업인수 등의 전진적인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부에서 시도되고 있다(노동자기업인수지원센터).

매춘부운동(성노동자) - 매춘부의 인권, 직업권, 양육권 등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부 (내부의) 매춘, 부부 (내부의) 강간이 더욱 문제로 되고 있다. 언론매체는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식으로만 방송한다. 매춘부의 욕망? 매춘부들에게 돈을 대 주고 매춘부와 고객들 사이에 흐르는 욕망을 연구검토해야 한다. 거기서 얻은 분석을 기초로 좋은 사랑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왜 안돼?) 국가의 다양한 통제에 대한 저항. 매해연(매매춘 해결을 위한 연구회).

부랑자(갱)운동 - 넝마공동체(지금은 옷가지들을 모아 다리 밑에 모아두면 이민노동자들이 가져간다), 폭주족(?), 공인된 폭주족들(자동차경주자들)은 수입을 올린다. 갱조직의 훈련방식은 운동선수들의 훈련방식과 너무나 흡사하다나! 그 내부의 위계화를 깨는 수평화 움직임의 등장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죄수운동 - 아직 양심수 문제만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 죄수들의 생활, 징역제도, 죄수의 사상의 자유 문제 등, 죄수의 집필권(그람시와 네그리는 감옥에 있을 때 가장 고귀한 글들을 만들었다!), 죄수의 사랑권. 외부와의 통신권, 노동에 대한 보상권, 흡연권, 일과시간 내용선택권, 죄수의 조직권. 어디까지 죄수의 자유를 억압할 것인가? 거주이전의 자유만 박탈당한 것이지 결사권까지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그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 것과 그 개인들의 협동권을 박탈하는 것이 같은가?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노동자들의 ‘협동’(결과물)을 주로 착취한다.

중독자운동(마약, 알콜, 포르노...) - 경찰적 관점을 척결해야 한다. 전문가적 관점을 척결해야 한다. 이른바 대중매체 특히 TV에서 사회문제를 폭로하거나 보여주는 프로그램들 맨 끝에는 전문가들이 나와서(물론 꼭 책꽂이를 배경으로 하면서) 경찰 대역을 한다. 물론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경찰이다. ‘빨간 마후라’ 사건 이후 학생들의 토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자율적인) 자체토론을 시켰을 때에, 어떤 모범생이 결론 짓기를 ‘전국에 계신 아버지, 어머님들(이 말은 DJ의 ‘국민여러분’과 너무나 닮았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 이렇게 건강하고 명랑한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환자운동 - 의사권력의 무시무시함. 흰옷의 환상. 정신병원과 다양한 감금장치들(정신박약아나 .... 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의사의 직업성(열나는 환자의 진료기록부에는 fever라고 휘갈겨 쓴다. 낙태하러 가는 미혼모와 의사 사이의 엄청난 문턱->자율낙태운동). 정신요양원에서 사드(Sade)는 이른바 환자들과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면서 집단적 욕망을 불태웠다. 어떤 관리자도 통솔(?), 주도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권운동 -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인권이 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수자적 인권이 제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보편적, 추상적) 인권이란 문제제기는 부르주아사회에 균열을 가져오기 힘들다. 인권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항상 구체적이고 소수적인 입장에서 제기될 때에 현실의 지배적인 사회에 균열을 가할 수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에 다양한 인권(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접속되고 있다(이민자들, 동성애자들, 여성들, 보도 듣도 못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 사회권으로서 인권?

이상에서 지목한 것 말고도 주체성을 찾아 나서는 다양한 운동이 있을 수 있다. 자기정체성 찾기는 바로 개인들의 차이를 통합하거나 개인들의 공통성을 보편화함으로써 권력을 만들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특이성에 고유성에 기초하여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려는 방식으로 나아가 권력을 깨고 개인들의 특이성의 잠재력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특이화과정(singularisation)에 기초하여 개인의 전면적 발전은 가능하며 그 원칙은 자기준거화, 자기조직화를 통해서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기죽는 사람이 없어야, 지배장치에 맞춰주는 피지배기계가 없어야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 소수자운동은 바로 이러한 문제설정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대안운동>

90년대 들어 한국사회에도 다양한 대안적인 삶의 형태들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경직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정말 어떻게 다르게 살아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존의 권력은 여전히 통치하고자 하나, 많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특한 삶을 찾으려고 한다.

기존의 운동이 국가를 부정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또 다른 권력구성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면, 이러한 흐름에서는 권력을 없애는, 즉 통치하지 않는 삶의 형태들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실은 이러한 움직임이야말로 적대권력만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의 반대상(거울상)이 되어 버린 운동흐름에 대한 비판을 함의한다.

또한 기존의 운동이 국가와 권력의 상에만 매달려 생활에서 멀어진 사태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기도 한다. 국가권력과의 대결 속에서 사생활을 갖지 않는 운동가의 삶은 이데올로기가 벗겨진 오늘날 존립할 수가 없다. 이것은 대중들을 지도하는 전위운동가(지도)라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명령과 복종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통치와 복종이 아닌 서로의 작은 공동체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서(그렇다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녹색평론■식의 방향은 절대 아님! 멋진 자동차기계가 지닌 욕망을 그렇게 해서 없앨 수 있을까? 기계와 인간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는데!) 수평적인 관계망을 확장시키려는 움직임은 대안적인 운동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생활하는 대중들과 함께 하면서 또한 전통적인 생산 중심적인 사고 및 활동을 넘어서서,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형태, 기존의 권력이나 자본이 원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삶의 형태를 모색하게 된다.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활협동조합 움직임, 농촌에서 나타나고 있는 영농조합법인(위탁영농회사)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나타나는 생산자공동체들, 그리고 제도교육을 비판하는 대안학교 움직임, 공동육아 운동 등 대안적인 형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나타난 모든 형태들이 얼마나 공동체적이고 대안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영농조합법인들 같은 경우는 부실한 경우가 많이 있고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만들어져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각 형태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운동으로 성공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다른 방식을 제기해 주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공동육아 - 기존의 가족제도에 대한 대안형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꼭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어머니에게서 자라나야 한다는 엄청난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자라면 뭔가 잘못된 인간일 수 있다는 전제 또한 무시무시하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94년에 시작되어 현재 전국적으로 25개 정도가 운영되고 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자연친화교육, 지역사회 등의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교육, 폐쇄된 공간에서 한글이나 숫자를 익히게 하고 인지교육과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에서 탈피하여 어린이들의 자발적 흥미를 유도하고 어린이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종합적인 학습으로 프로젝트 중심교육을 실시하여 전인적 발달과 성장을 촉진하려고 한다. 또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열려져 있어 어린이와 교사. 부모사이에 권위적인 상하관계가 없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실제 공동육아는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교육에 관련된 모든 요인 즉 어린이, 부모, 교사, 지역사회, 문화의 영향을 받는 주체인 교사와 학부모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형태를 지향한다.

대안학교 운동 - 대안학교운동은 기존의 제도 학교교육이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부적합하다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대안학교들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현재 조심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전원학교, 생활협동체학교 외에도 방과후와 주말, 방학기간 중 자유로운 활동을 포함하는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들어가면 저녁(혹은 밤에) 나올 때까지 전혀 드나들 수 없는 교문, 교사와 학생 사이에 중단된 의사소통, 입시경쟁... 병영이 따로 없다. 적응하는 학생들이 기특하다. 그러면 대안교육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대안교육의 스펙트럼은 교육혁명부터 부분적 개혁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빠른 시간 안에 지식을 주입시키고 학생을 선발하고 통제하는 데만 익숙한 기존의 교육제도를 철폐하자는 데에는 공통적이다.
그리고 대안학교가 현실의 공교육의 외곽에서 겉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안학교가 현실의 제도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극소수의 학생을 위한 별도의 학교가 된다면 엘리트 교육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대안학교의 이념이 공교육 기관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장교사, 교육이론가, 학부모 등이 대안교과서나 새로운 교육방식 모형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 제도개혁은 대안들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오히려 활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예를 들면 교사가 ‘참된 내용’을 터득하고 학생에게 그 참된 내용을 가르친다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이런 점에서 대안교육이 오히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교사가 학생을, 의사가 환자를, 지식인이 무식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도록 도와주는 철저한 조력자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발토로프’식 대안학교, ‘프레네’식 대안학교라고 고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나이팅게일’ 어린이집처럼) 그 안에 있는 당사자들의 자율성에 입각한 다양한 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노동자공동체 - 봉제공장형태로 운영되는 소수인(5~20여명) 결합의 노동자공동체들, 노동자가 기업을 인수하는 형태도 나타난다. 그 형태는 노동자생산협동조합, 노동자소유주식회사, 노동조합생산자주관리기업, 국민운동방식의 기업(예,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등 다양하게 전개된다. 최근 노동자기업인수단의 활동 또한 주목된다.

농촌공동체 - 생명농업(유기농업, 자연농업, 기타 등등)에서 나타나는 대안적 사회관계들, 영농조합법인들 가운데 전진적인 공동체들을 들 수 있다. 종교를 매개로 약간 폐쇄된 공동체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색다른 내부 관계(새로운 협동방식)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

생활협동조합운동 -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생협은 진보세력의 요람 구실을 하고 있다. 일본과 이탈리아 생협의 공통점은 값싼 비용으로 물품을 공동구입하는 것 말고 교육, 환경, 여행■스포츠, 문화 등 조합원의 다양한 욕구를 묶어 사업화하고 있다.
우리 나라 생협운동은 아직까지 먹거리에 대한 욕구를 조직화■사업화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도 점차 ‘생활’의 공동성, 연줄망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띠는 것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 성남 주민생협의 경우 자녀교육 문제를 풀기 위해 주부들이 ‘어린이 창조학교’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영리 목적과 치료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기존 병원에 대한 대항의료기관으로 안성의료생협■안산의료생협■인천평화의료원 등이 생겼고, 교수■학생■직원의 복지 향상을 위한 대학생협이 속속 결성되면서 지역에 있는 생협들과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다.
생활협동조합은 전통적인 생산 중심지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활(특히 소비)을 중심으로 협동화 해 나가자는 방향으로, 여기서도 대안적인 삶의 형식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의료생협, 공제생협, 소비자조합 등 다양한 부문에서 전개가능하다. ‘한살림’의 사업담당자들 처럼 사업적 관심으로 기울어지면(‘(주)풀무원’으로 가라!) 이런 대안적인 성격은 줄어들 것이다. 아예 전문경영인을 내세워서 사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여기서 협동적인 성격을 통해 성원들 간에 색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경영적인 차원에서 ‘이익’관점에서만 고려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미국의 농산물 개방압력 하에 개방이 되었는데도 일본인들이 미국의 농산물을 소비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생활협동조합 등을 통해 고유한 네트워크를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러한 생활협동조합을 약화시키도록(깨도록) 일본(정부)에 압력을 가했다는 얘기가 있다. 자신들의 곡물메이져에 대해서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환경운동 - 환경운동은 환경보존, 오염퇴치, 나아가 지속가능한 발전(지겨워!)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도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생활방식(네트워크)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의 녹색운동도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녹색당이라는 형태로 모아가려는 구태의연한 방향이 있다. 당형태로 집중화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해 가는 다양한 집합체들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구의 녹색운동과 평화(반핵시위 등)운동에서 수십만 명이 집결하는 것은 전통적인 조직선(명령-동원)에 입각해서 동원된 대중이 아니다. 환경과 관련해 문제의식을 가진 작은 서클들과 네트워크들이 아름아름 수평적 연결들을 통해서 결집하는 것이다. 또한 그 작은 서클들과 네트워크들은 나름의 고유한 성원관계(자신들의 고유한 일상생활)를 유지하고 국제적인 연대까지 만들어 가면서 색다른 움직임을 벌여 나간다.
그리고 환경운동에서 나타나는 자연주의(‘자연으로 돌아가자’)적 경향에 대해서는 선택적인 사항이어야지 이념으로서 제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적인 무한한 자유를 주어도 금욕하며 산에 가서 도 닦는 사람이나 집단들이 나타나듯이, 무한한 자유는 자율조절이라는 주체들의 자기조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발점일 뿐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모델)를 정하고 그것을 운동방향으로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권력장치를 만들어낼 뿐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생산력발전을 무시한 채 자연주의니 인간주의니 하면서 테크놀로지를 거부한다는 전략은, 생산력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생산력의 전유방식까지 장악하려는 자본가에게 질 것이 뻔하다. 인간과 기계가 지닌 욕망을 어떻게 결합하여 즐거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전유, 재전유 운동으로). 또한 수돗물의 오염과 냇물의 오염에는 흥분하는 환경운동가가 자신의 집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부랑자에 대한 대책(생각, 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환경운동이야말로 다양한 부문들과의 접속을 제기하고 그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평화운동 - 과학의 대안적 사용방안 등을 제안할 수 있다.
대안적 네트워크운동 - 최근 진보네트워크가 출범하였다. 자본과 권력에 독립적인 정보화를 기치로 내걸고. 그런데 참세상이란 ID는 ‘참교육’ 만큼이나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요즈음은 ID가 성격을 규정짓는다!?). 적극적인 테크놀로지 전유라는 문제설정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해커운동(해커선언문)까지?
새로운 과학운동(■다른 과학■) - 과학적 결과와 과학연구를 대안적인 삶의 형태들과 결합시켜 나가는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독립영화운동 - 이것도 장사가 되니까 다시 틈새시장으로 진출한다. 열풍을 일으키는 영화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인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 - 음악활동 : ‘개클련’(개방적 클럽연대, 홍익대와 연세대 주변의 록클럽 11곳, 록밴드 50여개 팀이 모임), 음악웹진 ‘웹진공’과 잡지 ‘팬진공’을 냈다. ‘땅밑달리기’행사, 락클럽들(클럽문화)의 활동, 인디레이블(메이저 레코드사의 영향력 안에 묶여 있지 않은 저예산 독립음반사), 이들은 성공하면 돈벌이로 나가는가? 상품화된 대중문화의 공급지 역할? 정말 풀뿌리들과 접속할 수 있을까?
대안적 문화예술 및 상연공간 - Off-Theater(‘빵’ ‘살’):복합문화공간, 음악을 비롯하여 퍼포먼스, 전시, 영화, 무용 등 다양한 장르들이 자유분방하게 관객들과 만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하며, 공연자와 관객의 거리 좁히기를 시도한다.

전유, 재전유운동 - 빈아파트점거운동, 공공공간 공동사용운동(주말 공공기관 주차장 사용), 반-도로운동(anti-road struggle), 이탈리아의 사회센터운동, 세종문화회관점거운동(전유->재전유 운동: 자율인하, 관객으로서 입장료깍기->관객으로서 연주자나 배우 선택하기/이미자, 패티 김에서 서태지로->관객과 배우가 하나되는 색다른 공연하기) 등등.
이상 지목한 대안운동들은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즉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 가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겠다. 물론 그 각 공간들이 폐쇄적인 것에 머문다면 절대 자유의 공간으로 전화될 수 없을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코뮨주의자들과는 달리 열린 공동체를 지향해 나가는 방향설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항과 전복은 꼭 지배질서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지배질서가 힘 못쓰게 하는 다른 방식이 중요하다. 구소련은 전복(봉기)에 의해서 무너졌는가? 아니다. 공산당(CP) 독재에 진저리난 대중들이 권력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순간 무너져 버린 것이다. 물론 대중들이 ‘집강소’를 만들지 않으니 옐친같은 강패가 설치게 된다. 대중의 창의성(역능)은 그 자체가 자신의 준거를, 더욱이 자신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면 권력에 대해 전복적이다.

4. 결론

지금까지 언급한 이러한 운동은 거부와 부정이 아니라 긍정과 구성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거부와 부정 속에서 개인들 및 대중들이 지닌 창의성을 막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들 및 대중들의 창조적 역능에 기반하여 경건하고 무거운 삶이 아니라 즐겁고 가벼운 삶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흐름들은 그 누가 대단한 이론을 주장하고 그에 복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흐름 속에는 선도적으로 일을 꾸려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더 이상 명령하고 복종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 자발성과 창의성에 입각하여 수평적 칸막이와 수직적 위계를 깨 나가는 것이다.

자본과 국가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한,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시장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흐름이 당장 대중들의 많은 생활영역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무의식적인 복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기반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려는 흐름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권력장악이라는 승리관점에서 운동과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색다른 이질적인 흐름을 만듦으로써 기존의 지형을 넓혀 간다는 지리철학적 사고로 진전한다면, 그러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신사회운동, 시민운동과의 차별성을 잠시 언급해 두자. 신사회운동(론)에서도 정체성 찾기를 강조한다. 하버마스처럼 구조(체계)의 식민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밟힌 지렁이의 꿈틀거림으로서 신사회운동을 바라보기도 한다.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은 오히려 대중의 자생성과 창의성(역능)에 입각하여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지 지배적 구조에 대응한 산물이 아니다. 더욱이 소수자운동이 정체성 찾기에서 끝나지 않고 대안적 삶의 형태, 색다른 자유의 공간을 찾아 나서는 점이 주목된다.

시민운동은 정치적 지배에 대해 시민적 자율성의 영역을 확장하여 민주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상에 집착한다. 특이성이 무시된 개인들로서 시민에 의거하면서 다수의 공통성을 찾아서 운동화하려고 한다. 그에 비해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은 개별자들의 특이성을 공통화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 차이를 극대화하면서도 오히려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한다(스피노자적 코뮤니즘).

지금까지 운동을 지배해 왔던 승리적 관점을 약간 비판해 보자. 어느 마을에 농민회 회원이 한 두 명만 생겨도 이장의 활동방식이 변한다. 꼭 농민회원이 이장으로 당선되어야 이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민회원이 이장이 되면 기존의 제도화된 이장의 흉내를 내기 바쁘다. 농민회원은 이장에게 다른 시선의 존재를 알리고 다른 공간활동을 만들어 가면 오히려 사회를 풍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색다른 주체성(정체성)의 등장과 색다른 공간의 창출! 그렇다고 생산력발전을 두려워하여 자연주의로 돌아가는 방향설정은 위험할 것이다. 테크놀로지 및 공간에 대한 전유, 재전유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최근 ‘유럽의 좌파지배’라는 현상은 이미 그 좌파(사민당)는 진보의 꼬리를 쫓아가는 데도 바쁠 뿐인 집단임을 보여준다(승리관점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에 현혹되고 선거주의에 물든다). 지금 유럽을 선도하는 흐름은 오히려 ‘녹색’과 ‘평화’ [대안적 네트워크를 지닌 집단들 및 사고]라고 생각된다. 카프카의 말대로 ‘앞서가는 시계가 되라!’

지형도를 다시 그리기. 지도제작(cartographie). 이를 통해 다양한 활동이 증식되도록 만들기. 새로운 정체성의 등장은 이전에 논쟁적이었던 쟁점들을 더 큰 틀 속에서 이해하도록 해 주며, 따라서 그만큼 더 넓은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러나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권력장악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대중의 역능을 아래로부터 구성해내는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욱이 보편적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소수적 주체들의 다양한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을 코뮤니즘의 길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생산적 주체성들, 반체제적 특이성들, 그리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적 기질들의 발전과 옹호 그리고 표현은, 운동의 제일차적인 내용이자 과제로 되었다(주체성). 두 번째 과제는 생활양식의 생산과 재생산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집단적 노동력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집단성). 이것은 새로운 사회적 생산능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며, 자본주의적 그리고 사회주의적 구조들에 ‘대항해서’ 그것들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생산능력들을 조직하는 것이다(집단적 주체성).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고, 실험하고, 투쟁하라’*주).

*주) ■■Guattari, Félix & Negri, Toni, 1985, Les Nouveaux Espaces de Liberté, Chapitre 6.}}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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