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칼 마르크스

[스크랩]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하여

ddolappa 2008. 5. 17. 05:24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하여

 

윤 소 영

 

 

 차 례
1.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실천의 유물론' 또는 철학에 반한 혁명
2. {독일 이데올로기}: '역사과학' 또는 생산과 이데올로기
3. {자본}: 가치론과 '표상의 세계론' 비판
4. {자본}: 잉여가치론과 '역사변증법'
5.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일반화된 페미니즘

 

 

 

나는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의지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 루이알튀세르(1985)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는 '당-국가', '국가-당'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를 해방하고 그 이론적 개조를 시도할 수 있게 한다. 이같은 시도는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인 철학(니체와 하이데거)의 논쟁, 마르크스주의와 '인권의 정치'('포스트-민족적'인 국제주의로 귀결되는 '혁명적 보편주의')의 결합이라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조건 속에서 실현될 것이다.

 

18901990년의 '순환'의 종료는 '조직의 교리'로서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체의 이해관계('정통'과 '이단들'의 논쟁)를 해체시켰다.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운동의 세계관'도 '저자의 체계'도 아니다. 오히려 '철학', 경제학, 역사서술, 정치평론을 망라하는 마르크스의 전저작에 산포되어 있는 철학적 함의를 연구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절단' 이후에도 몇 차례의 '단절들'을 경험한다. '절단'이란 독일, 프랑스, (엥겔스를 매개로) 영국의 프롤레타리아들과 해후하고 그들의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독일 이데올로기'를 청산하고 사회적 관계의 문제설정을 발명하는 '불귀점'을 가리킨다. '단절들'은 1848년 혁명들의 실패, 파리 코뮌의 패배 같은 역사의 '나쁜 측면/방향'이 초래한 '정치경제학 비판'의 개시, 나아가 '경제주의'와 '진화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을 뜻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와 전화의 시도는 다름 아닌 마르크스(그리고 엥겔스)에게서 그 계기를 발견할 수 있다.

 

 


1.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실천의 유물론' 또는 철학에 반한 혁명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1845. 3.)는 마르크스의 이론적-정치적 '절단'의 지표이다. [테제]는 아직 포이어바흐적인 관점에서 최초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시도하는 원고 '정치경제학과 철학'(1844)과 헤겔, 포이어바흐를 포함하는 자신의 '이전의 철학적 의식을 청산하면서' 특히 슈티르너와 대결하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를 매개한다.

 

마르크스가 볼 때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은 '현실적 대상'(Gegenstand)을 의식적 또는 감각적 '대상'(또는 '객관', Objekt)으로 환원했을 뿐이다. 관념론의 '의식', 포이어바흐의 '감각' 또는 '생활'에 대해 마르크스는 인간의 현실적인 대상적 활동을 강조하는 새로운 '실천의 유물론' 또는 '반()철학'을 제시한다. 세계의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가 문제인 것이고, 이 때문에 실천, 즉 혁명의 관점에서 철학과 이론의 한계가 선언된다.

 

특히 종교적 자기소외, 즉 종교적-초감각적인 것과 세속적-감각적인 것으로의 세계의 이중화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비판이 불충분한 것은 세속적-감각적 세계 자체가 자기분열, 자기모순에 빠져 있고 이는 실천적 혁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혁명적 실천은 상황의 변화와 자기의 변화의 일치를 의미한다('교육자는 스스로 교육받아야 한다').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소외(또는 정치적 소외)를 비판하기 위해 종교적 본질(또는 정치적 유대)을 인간적 본질로 환원하지만, 이는 추상적 인간의 내재적 일반성으로서 '유적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 집합이라는 '현실적 본질'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이어바흐의 '철학적 인간학'(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론적 인간주의')을 지양하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관계의 문제설정('실천적 인간주의')의 단서라고 할 수 있다.

 

혁명적 실천과 '현실적 보편성'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혁명적 실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반혁명화, '국가에 의한 중단'에 반대하여, 평등주의적이며 공산주의적인 '사회운동'을 강조한다.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일치를 통해 발본적인 '형제애'에 도달한다는 '혁명의 원칙'의 일관성 있는 적용에 의해 정치혁명을 사회혁명으로 전화하려는 '영속혁명'(블랑키)이다. 혁명의 주체는 '인민중의 인민'으로서 차티스트 같은 조직된 노동자들을 비롯한 매뉴팩처와 가내수공업의 노동자들인 프롤레타리아들 또는 오히려 그들의 실천이다. 이런 관점에서 공산주의란 바로 '현재의 행위' 또는 '현재의 사태를 폐지하는 현실의 운동'이다.

 

이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철학적 원칙'은 '봉기적 원칙'에 의해 대체된다. 이렇게 '이론적 보편성'을 혁명적 실천으로서 '현실적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것이 바로 관념론의 '전도'로서 유물론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세계를 해석할 따름인 '감각', '생활', 또는 '물질'의 유물론이 아니다. 유물론은 주체의 의식이 세계의 표상을 구성한다는 '표상의 세계론'으로서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고, 여기에 주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프롤레타리아들의 실천인 것이다.

 

칸트에서 포이어바흐에게 이르는 '이론적 인간주의'로서 '철학적 인간학'의 특징은 인간의 '유적 본질'에 대한 실재론적이고 본질론적인 이해에 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단순한 명목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과학', 즉 '초개인적인 것'(le transindividuel)으로서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에 이르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개인주의'(individualisme)에도 '유기체론'(organicisme)에도 빠지지 않는 것은 이같은 '초개인성의 존재론' 때문이다(이 점에서 마르크스는 프로이트와 함께 스피노자주의자이다).

 

 

 

2. {독일 이데올로기}:

'역사과학' 또는 생산과 이데올로기

 

마르크스는 [테제]를 집필한 직후 엥겔스의 권유로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1844년말)를 읽게 된다. 슈티르너는 '자율적 개인'(또는 '에고'/'인격', personne)의 입장에서 지배 또는 권력에 대한 명목론적 비판을 전개한다. 이는 근대적 무정부주의 사상을 특징짓는 '개인차주의'(personnalisme)의 출발이자 니체와 포스트구조주의적인 '허무주의' 사상의 효시이다.

 

슈티르너에게 모든 보편성이란 제도적 추상, '허구적 보편성'에 불과하고, 따라서 현실적 보편성, 더욱이 혁명적 보편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고유성은 개인의 소유이고 개인의 자율성이 곧 독자성이다. 슈티르너는 헤겔이나 포이어바흐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특히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는 셈이다.

{독일 이데올로기}의 서론(1부 [포이어바흐])은 '분업'으로서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과학'의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이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1859)에서 하나의 '토픽'으로 제시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역사과학의 기본개념으로서 생산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도입한 것은 슈티르너에 대한 반비판을 위해서이다(주로 '말싸움'으로 이루어진 3부 [성 막스]는 전체 분량의 2/3를 차지한다).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현실적인 것의 전도'로서 '관념들의 자율화'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분업과 소유형태, 생산 및 교환양식에 의해 결정되는 이데올로기적 지배양식을 분석한다. 이는 객관정신, 특히 법치국가(또는 오히려 '민족 형태')의 보편성에 근거하는 헤겔의 역사철학적 보편사 셰마를 '유물론적으로 전도한다'.

 

마르크스는 '현실적인 것'으로서 생산과 교환양식에 근거하여 '시민적-부르주아적'(burgerlich) 사회의 지배양식을 비판한다. 이 사회의 현실은 부르주아 계급의 소유와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탈소유 사이의 '모순'에 의해 관통된다. 부, 생산성, 교환, 문화를 특징짓는 '개방과 배제' 또는 오히려 '내부적 배제'가 사회적 관계를 제한한다. 이같은 현실을 전도하는 이데올로기적 지배는 '부르주아적 특수성'을 '시민적 보편성'으로 승격시킨다.

 

그렇지만 이 사회는 그 자체로 유지불가능하고 '전변'(Umwalzung)의 전제를 내포한다. '모순'의 이론적, 정치적 해결은 '임박한 명령(injonction)'이다. '보편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관념이 제출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부르주아 계급과 달리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갖지 않고 또 이를 '보편적 이익'으로 표상하지도 않는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의 '고유성'(Eigenschaft), 즉 '사적 소유(Eigentum)'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오히려 생산력 총체를 영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소유라는 '부정적 보편성'이 '부정의 부정'에 의해 생산력의 영유라는 '긍정적 보편성'으로 전화된다. 프롤레타리아적 보편성은 초개인적 실천으로서 현실적 보편성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시스(노예의 실천으로서 '사물의 완성' 또는 필연)와 프락시스(주인의 실천으로서 '인간의 완성' 또는 자유)의 구별을 제거한다. 나아가 아렌트가 주장한 것과는 달리 전자에 대한 후자의 우위를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동일화한다.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적 실천은 통일되어 있고 상호 전화하는 것이다. 테오리아(이론)와 에피스테메(과학), 요컨대 '진리'의 기준은 실천에 있다는 그의 관점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관념론과 '낡은 유물론'이 '현실의 대상' 또는 간단히 '현실성'(Wirklichkeit, realite effective)을 의식 또는 감각의 대상/객관으로 파악함으로써 이론을 '직관/관조'(Anschauung)로 환원한 데 대해, 마르크스는 진리 또는 사고의 현실성의 기준이 주체의 활동으로서 포이에시스와 프락시스를 통일하는 실천임을 확인하는 셈이다.

 

'허구적 보편성'과 '상징적 폭력'이라는 쟁점

 

이 점에서 [테제]와 {독일 이데올로기} 사이에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의식의 생산'으로서 이론이라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이는 지적 생산물들로서 관념들의 생산, 요컨대 '지식노동'의 이론을 소묘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지식노동 이론을 그 자체로서 전개하지는 않고, 사회적 의식('상부구조')이 사회적 존재('토대')로부터 자율화되는 메커니즘만을 분석한다.

 

{반뒤링}(1878)과 원고 '변증법과 자연'(187382)에서 엥겔스는 인식론적 이데올로기 이론을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반면 그람시의 '실천의 철학'이나 그것을 발전시키는 게이모나의 '역사인식론'의 역사주의적 문제설정은 실천의 유물론과 역사과학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는 이같은 곤란들을 해결하기 위해 스피노자의 '인식의 종류' 이론, 특히 '공통의 통념' 개념을 원용하여 헤겔식의 '변증법적 논리학'을 대체하는 지식노동 이론을 시도한다.

 

어쨌든 마르크스에게 '관념들의 권력/역능'의 역설은 그것들의 힘이 현실적 힘, 상황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의식에 고유한 추상화에 의해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배제되는 관념들 자체는 현실적으로 무력하다는 데 있다. 이데올로기가 '지배적'(herrschend)이라는 것은 '현실의 전도'에 의해 '보편적 또는 총체적으로 군림한다(regner)'는 뜻이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바로 이 때문에 '권력/역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이같은 이데올로기 개념은 '과학의 타자'라는 실증주의적인 인식론으로도, 또는 모든 사고는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역사주의적 상대주의로도 환원될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서 이데올로기는 '무지'나 '주입'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의 논리'에 의한 헤게모니를 통해 지배한다.

 

그렇지만 또한 이데올로기 개념이 갖는 고유한 아포리아에도 주목해야 한다. 우선 '보편계급' 개념을 특징짓는 고유성의 박탈로서 '무소유'(eigentumslos)'무환상'(illusionslos)의 아포리아가 그것이다. 이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원천은 지배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계급이며, 이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착취의 모순'을 '이데올로기적 반역'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한다.

 

이 점은 [법률가적 사회주의](1886, 카우츠키와 공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원시기독교의 역사}(189495)에서의 엥겔스의 작업에 의해 정정된다. 엥겔스는 대중적인 정치적 세계관으로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 개념을 소묘하면서, 슈티르너의 반론을 초과하는 니체의 반론을 예상한다. 법에 기초한 '정교분리적' 세계관으로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에서 계급투쟁에 기초한 정치적 세계관으로서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이라는 지배적 세계관의 계기의 역사, 나아가 지배이데올로기의 원천은 피지배계급이라는 '집단적 신념'의 형성에서 대중과 국가의 변증법이라는 엥겔스적 관념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으로 발전한다. 알튀세르는 또한 이데올로기적 '권력/역능'(Macht)이 고유한 '권력/폭력'(Gewalt)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전자가 헤게모니로서 지배의 권력이라면, 후자는 국가의 제도적 제약과 강제를 함의하는 구성적 권력이다.

 

발리바르는 제도적 허구에 의한 추상적 보편화, 요컨대 '허구적 보편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논리('이데올로기의 동요')를 더 구체적으로 전개한다. 우선 루카치나 프랑크푸르트 학파(하버마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르크스에게 사회적 의식은 사회적 존재, 즉 분업과 생산의 이면이고, '지식의 경계'는 '교환 또는 교통의 경계'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개념에서 출발하여, '지적 차이', 나아가 '성적 차이' 개념에 근거한 '정치적 인간학'의 구성을 시도한다. 이는 스피노자와 프로이트를 원용하여 지식인과 남성의 존재조건으로서 학교교육과 가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헤겔적인 의미에서 '허구적 보편성'은 민족이라는 '허구적 공동체'에 의해 '총체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헤게모니 개념을 특징짓는다. 헤겔적인 보편성은 공동사회의 '일차적 소속'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적 자유가 세속화된 민족적 시민성이라는 '이차적 소속', 또는 문화라는 '규준화의 제약'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보편성'이다. 이같은 헤게모니는 '다원주의'를 용인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헤게모니는 '제도화' 또는 '정당화'에 대한 도전의 잠재성을 내포하는 것이며, 반면 '규준화의 제약'에 대한 저항이 곧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허구적 보편성의 한계는 '부정적 보편성'을 '긍정적 보편성'으로 전화하는 '부정의 부정'으로서 봉기적 보편성의 기초 위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허구적 보편성 개념을 '상징적 폭력' 개념과 결합해야 하는데, 상징적 폭력이란 현실적, 실천적 폭력과 구별되면서도 또한 폭력 일반을 조직하는 '폭력의 지성'이다. 민족 형태의 가부장제적 문화가 그 탁월한 사례이다. '민족 형태' 속에서 계급적대를 과잉결정하는 지적 차이와 성적 차이의 교착은 지식인과 남성을 동일화하는 가부장제적 문화와 공동체로부터 여성의 '내부적 배제'('가족으로의 유폐')로 특징지어진다. 지적/성적 차이의 인간학, 특히 '민족 형태'의 정치적 인간학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3. {자본}: 가치론과 '표상의 세계론' 비판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의 또 다른 아포리아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을 단지 '현실의 전도'로 특징지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50년대 이후 마르크스는 착취의 불변성을 비판하면서 혁명의 현실적 토대를 분석하기 위해 경제학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1848년 혁명들의 패배 이후 '의기양양한' 자본주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열정과 노고의 대가가 바로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 {자본} 1권(1867)이다.

 

{자본}에서 이데올로기 개념과 직접 관련되는 것은 물신숭배론이다. 그렇지만 이는 {자본}의 문제설정 전체, 특히 가치론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상품, 상품의 물신성, 교환과정, 상품유통 또는 화폐에 대한 분석으로 구성되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경제적 표상'에 대한 비판의 기초인 동시에 감각적-초감각적 상품세계의 '유령론' 또는 '가상현실론'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이론을 대체하는 새로운 '환상의 논리'이다.

 

상품과 화폐의 이론이 상품세계의 '객관성'에 대한 이론을 구성한다면, 물신숭배와 교환의 이론은 '주체성'의 이론에 해당한다. 이는 생산이라는 실천에 의한 객관성과 주체성의 동시적 구성을 보이는 넓은 의미에서 상품세계의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체화'(subjectivation), '주관화'(subjectification)가 곧 '예속'(sujetion)임을 보이는 주체성의 이론은 '표상의 세계론'으로서 관념론 비판을 발본화한다.

 

마르크스는 노동력의 상품화와 착취라는 '현실적 원인'의 분석을 통해 '외양의 해체'를 시도하기 전에, 사회적 관계의 '착각'(Schein), '현상'(Erscheinung)이라는 의미에서 '외양의 구성'을 설명한다. 이는 나중에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에서 발견되는 '상징적 사회화'의 최초의 이론이 경제적 표상의 외양으로 착취의 불변성을 근거짓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전제임을 뜻한다.

 

우선 마르크스는 '사용가치' 또는 오히려 '효용의 담지자'인 동시에 '가치의 담지자'로서 상품의 이중성이 구체적-개인적인 동시에 추상적-초개인적이라는 노동의 이중성을 표현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내적으로는 노동의 추상화를 표현하고 외적으로는 '교환가치' 또는 오히려 교환비율로 표현되는 가치의 형태적 전개는 '일반적 등가물'이라는 '보편상품'의 성립으로 귀결된다. 일반적 등가물을 물질화하는 동시에 관념화하는 화폐(귀금속이자 무매개적 가치 또는 오히려 '보편적 가치상징'으로서 화폐)의 성립은 이같은 상품적 사회화를 완성한다.

 

결국 감각적-자연적이자 초감각적-초자연적인 상품의 이중성이 상품과 화폐로 이중화된다. 이 때문에 '화폐물신'의 근거는 '상품물신'에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고전파적 노동가치론 대 중상주의적/신자유주의적 화폐주의라는 경제학적 본질론/실재론과 명목론 논쟁을 지양한다.

 

그렇지만 이같은 상품-화폐론은 상품생산의 보편화의 역사적 전제인 노동력의 상품화와 착취에 대한 분석으로서 정치경제학 비판의 논리적 전제이다. '외양의 구성'은 곧 '외양의 해체'를 위한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경제적 표상은 착취의 불변성의 근거가 아니라 그 '역사성' 인식의 전제이다. 여기서 비상품사회의 인격적 구속('사회적 유대')으로부터 개인적 자유를 해방하는 상품적 사회화('사회적 관계')를 또다시 부정하는 '노동자연합'에 의한 '생산의 계획화', 즉 '노동지출의 사회적 통제'라는 '부정의 부정'이 나온다. 마르크스가 과거와 미래, 또는 가상의 비상품사회에 대한 '사고실험'(즉 '사변')에 결코 만족하지 않는 것은 이같이 과학과 혁명을 결합하기 위한 것이다.

 

칸트적인 '표상의 세계론'에서 주체가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은 의식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칸트의 주체는 '자율적 의식'을 갖는 주권적인 '시민적 주체'(Subjekt, subjectum)라는 점에서 '초월자'에게 예속되어 있는 데카르트의 '신민적 주체'(Untertan, subjectus)와는 구별되는 부르주아 혁명 이후적인 근대적 주체이다(또 '자기의식'이라는 개념도 데카르트가 아니라 로크가 발명한 것이다). 칸트의 주체는 '선험적-초월적'이자 동시에 '경험적'이라는 점에서 실재론적이고 본질론적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표상의 세계론'을 비판하는 주체성의 이론을 제시하는데, 이는 실천의 유물론에 의한 '이론적 인간주의'로서 '철학적 인간학'에 대한 비판을 더욱 발전시킨 새로운 '초개인성의 존재론'이다. 상품세계의 구성은 인간의 활동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이라는 실천에 의한 객관성과 주체성의 동시적 구성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체성은 경험적-초월적이지도 명목론적이지도 않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 또는 오히려 상품세계를 특징짓는 '인식'과 동시에 '몰인식'을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의 무매개적 결합에 의해 구성되는 객관성으로 설명한다. 상품세계에 포섭된 주체성은 이같은 객관성을 자신의 행동의 '여건'과 '규준'으로 간주함으로써 일종의 물신숭배에 빠져 있다. 즉 경제계산으로서 경제인식의 조건인 경제적 대상의 수량화에 대한 몰인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경제주체는 자율적이고 주권적이라기보다는 상품이라는 물신에 예속되어 있다.

 

'상징적 보편성'과 '인권의 정치'라는 쟁점

 

그렇지만 물신숭배론을 가치론의 맥락에서 고립시켜 일반화할 수는 없다. 루카치의 '사물화론'에서 비롯되는 이같은 시도를 '일반화된 물신숭배의 문제설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는 상품적 객관성의 보편적 확장이 주체성의 '합리적' 규준이자 극단적 '소외'를 표현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프랑크푸르크학파의 근대성-합리성 비판이나 하이데거의 근대성-익명성 비판, 나아가 양자의 과학-기술 비판으로 계승된다.

 

루카치의 사물화 개념이 {자본}의 문제설정과 독립적이라는 것은 그가 사물화 비판을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의식'이나 '역사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라는 관념으로 보충함으로써 자신의 '혁명적 역사주의'를 근거짓는다는 점에서, 또는 이같은 비판이 하이데거 같이 상반된 '보수주의적'인 정치적 입장과도 별 무리없이 결합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증된다. 존-레텔이나 뱅상의 경우처럼 사물화 개념과 {자본}의 문제설정의 결합을 시도할 경우에도 그것을 이데올로기 개념과 결합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문제가 남는다.

 

이 때문에 발리바르는 물신숭배론을 '상징적 보편성' 이론으로 해석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파슈카니스는 자연법적 전통에서 법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루빈의 가치형태-물신숭배 분석과 짝을 이루는 사법() 이론을 전개한다. 상품-교환 이론이 가치의 담지자로서 상품이라는 경제적 물신에 대한 비판이라면, 그에 조응하는 사법-계약 이론은 주체성의 담지자로서 인격이라는 법적 물신에 대한 비판이다. 이같은 시도는 물신숭배론과 교환과정론의 결합을 통해 주체성 이론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파슈카니스는 여기서 '국가사멸론'이라는 좌익주의적 결론을 도출한다. 이같은 오류는 70년대 서독에서 이른바 '국가도출론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대두하는 맥락에서 '복지국가의 환상'을 비판했던 시대착오적인 역설에서 또다시 반복된다.

 

이에 대해 구는 교환과 계약에 공통적인 구조로서 '일반화된 등가성'에 주목한다. 이제 물신숭배론은 '상징적 질서' 또는 '상징적 사회화'의 이론으로 해석된다. 상품의 물신숭배가 대상, 가치로의 개인성의 외화라면, 인격의 물신숭배는 주체, 의지로의 개인성의 내화이다. 물론 이같은 경제적-법적 주체화-예속의 양식들 외에도 정신적-문화적 주체화-예속의 양식들이 더 있을 것이다. 이는 사회적 관계를 비롯한 개인적-집단적 무의식 등 다양한 초개인성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이같은 포스트마르크스적인 그 만큼의 관념론 비판들이 아직 이데올로기 비판에 이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데올로기 비판과 물신숭배 비판의 결합을 시도해야 한다. 마르크스에게서 인권의 해석이라는 쟁점이 제기되는 것은 이런 맥락이다. '1844년 원고', [유다 문제](1844)에서 인권은 불평등한 현실과 공동체의 허구 사이에서 인간적 본질의 분열의 사변적 표현에 불과하다. 프루동과의 논쟁, 경제적 자유주의 비판을 거치면서 {그룬트리세}(1857-58)에 이르러서, 인권의 담지자로서 인격은 상품유통의 관념화된 표상, 상품소유자('상업공화국'의 성원)로서 개인으로 비판된다.

 

그렇지만 상품물신과 인격물신을 비판하는 {자본}에서는 인권이 등장하는 상품유통과 인권을 폐기하는 착취이자 권력/폭력으로서 생산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점에서 '노동의 구체성'을 포섭하는 '자본의 추상화', 즉 '자본물신'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인권의 정치'로 해석할 수 있다. {자본}의 결론에서 마르크스는 단순한 '집산주의'를 비판하면서 '부정의 부정'을 통한 '개인적 소유의 재건'에 대해 말한다.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토대로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로서 개인적 소유는 '노동권'에 대한 마르크스적 정식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부르주아적 소유권을 제한하려는 프롤레타리아적 '노동권'이라는 관념과 이에 반대하는 부르주아적 '형제애' 사이의 논쟁은 1848년 혁명으로 소급하는 것이다. {공산당 선언}(1847)에서는 '형제애'를 발본화하는 노동자연합과 국제주의가 강조되지만, {자본}에서는 노동자연합에 의한 '생산의 계획화'가 '개인적 소유'를 보장하는 '노동권'과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발견된다. 이는 '현실의 운동'이라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를 개인들이 자신들의 존재조건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으로서 '사회화' 개념에 의해 더욱 구체화하는 것이다.

 

착취를 은폐하는 언어이자 계급투쟁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인권의 양의성을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쟁점으로 발전시킨 것은 엥겔스의 {반뒤링}이다. 이제 인권은 단순한 '허구'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상'(ideal) 또는 오히려 '갈등적 쟁점'(differend, 리요타르)이라고 할 수 있다. '허구적 보편성'에 대한 비판이 '봉기적 보편성'에 근거해야 한다면, 이는 곧 착취의 모순과 결합하는 이데올로기적 반역에서 인권이라는 '상징적 보편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비판이 국가라는 이데올로기적 권력, 이데올로기적 지배(헤게모니),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라면, 물신숭배 비판은 시장이라는 상품세계(상품적 사회화 또는 주체화-예속), 물신숭배적 일상성('습관'), 현실주의적/공리주의적 관념론에 대한 비판이다.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소외에 대한 이같은 이중적 비판은 마르크스에게서 자유화-해방의 조건이 또한 이중적임을 의미한다.

 

 

 

4. {자본}: 잉여가치론과 '역사변증법'

 

이데올로기 비판과 물신숭배 비판의 또 다른 철학적 함의는 사회적 관계 또는 인간적 본질의 '역사성'에 대한 것이다(반면 역사성 개념에서 마르크스의 동요가 인권의 정치와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으로서 역사변증법에 나타나는 시간과 진보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념을 검토하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점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우선 19세기를 특징짓는 역사의 '총체성'의 관념으로서 진보의 표상은 역사의 목적론, 즉 시간의 비가역성/선형성(나아가 기술적/도덕적 완전화와 변화능력/교육)인 동시에 불확정적 과정에 대한 묘사이다. 이 때문에 진보의 표상은 '예상된 확실성'으로서 희망이 아니라 '대중의 역능'에 대한 신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역사변증법에서도 불가피하다. 이에 대해 루카치의 '혁명적 역사주의'나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 역사적 진보에 대한 그람시나 벤야민의 내재적 비판 등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메시아주의'는 일종의 '역사적 의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서 역사변증법은 '역사인과성' 셰마, '역사성' 개념, '비동시대성' 개념이라는 세 개의 계기를 통해 전개되는데, 앞의 두 개는 {자본}에서, 뒤의 한 개는 {자본}의 자기비판에서 발견된다.

 

역사인과성 셰마

 

사회구성체의 진화와 생산양식의 전진의 내재적 기준은 자신의 존재조건을 통제하는 초개인적 능력으로서 '사회화'이다. 여기서 진보로서 진화 관념과 역사의 '인식가능성' 또는 '합리성' 테제가 결합된다. 이 점에서 {자본}은 19세기의 탁월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캉기옘)로서 진화주의와 무관하지 않다(이는 프로이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역사인과성 셰마는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전후 한 시기에 설정한 자신의 연구계획를 설명하는 1859년 서문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이 셰마가 제시하는 역사과학의 은유적 '심급론'에는 진화주의적 목적론과 생산양식의 모순론 사이의 내적 긴장이 존재한다(이같은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최종심의 결정'이라는 또 다른 은유를 사용한 것은 알튀세르가 지적한 대로 블로흐에게 보낸 엥겔스의 편지(1890. 9. 21.)이다).

 

이같은 연구계획은 물론 {자본}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실현된다. 그렇지만 일반적 셰마는 복잡화된다. 우선 진화주의적 목적론은 역사철학적 보편사의 시대구분을 생산력주의적 결정론에 의해 '유물론적으로 전도한다'(이는 엥겔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그렇지만 물신숭배론에 나오는 '사고실험'의 경우나 [노동일] 장에 나오는 봉건제와 자본주의의 비교에서처럼 계급투쟁은 설명의 원칙이 아니라 결과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특수한 대상을 분석하면서 일반적 셰마를 복잡화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혁명의 '임박성' 개념을 떠나 그 '필연성'을 사고하기 위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화(기술의 집중, 합리화, 보편화)와 프롤레타리아의 궁핍화(노동력의 단편화, 과잉착취, 노동자계급의 불안전성)라는 자본주의의 두 경향에 주목한다. 계급투쟁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는 실행자인데, 이는 {철학의 빈곤}, {공산당 선언}, 1859년 서문에서 채택되고 {반뒤링}에서 다시 원용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또는 생산과 소유 사이의 '모순'이라는 생-시몽적 정식화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같은 계급투쟁의 귀결로서 '부정의 부정'은 '장기지속'의 관점에서 프랑스혁명 모델을 발전시킨다.

 

생산양식 그 자체의 전화로서 자본의 축적운동에 대한 분석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계급투쟁을 묘사함으로써 이같은 특수화를 더욱 전개한다. 노동자들의 숙련, 공장규율, 임노동제와 자본주의적 감독의 적대의 진화, 고용과 실업의 비율(따라서 잠재적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의 진화가 곧 '자본주의의 역사'인 것이다. 노동과정의 일상적 적대로서 계급투쟁은 잉여가치의 생산방법들(자본가들의 계급투쟁), 그것들에 대한 반작용(그것에 의해 '교육받는'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투쟁), '사회적 조절'을 매개로 한 노동과정에의 국가 개입이라는 세 측면을 갖는다.

 

진보 비판과 역사성 개념

 

이렇게 역사철학적 보편사의 셰마는 계급투쟁의 현실분석, 적대의 개념에 의해 복잡화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에 의한 변증법의 첫번째 전화이다. 그렇지만 역사의 합리성의 아포리아는 더욱 부각된다. 이는 헤겔 역사철학 비판의 또 다른 쟁점과 관련되는데, 특히 마르크스의 프루동 비판에서 나오는 역사가 '나쁜 측면'('부정의 시련')에 의해 전진한다는 은유적 표현이 문제이다. 헤겔에게서 '이성의 간지'에 의한 '부정의 부정'이 결국 역사의 '좋은 방향'을 위한 일종의 '변신론'(, theodicee)이라면, 이같은 목적론에 대한 비판으로서 니체의 '초인론', 하이데거의 '부정신학', 특히 벤야민의 '천사론'은 역사의 '나쁜 방향'을 강조하는 일종의 '일반화된 종말론'이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진화주의의 틀내에서 진보 관념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시도한다. 이는 우선 자본물신에 대한 비판에서 진보의 아이러니에 대한 푸리에적 정식화로 나타난다. 즉 자본주의적 '합리성'에 실천적으로 조응하는 인간생명과 자원의 '무제한적 지출'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특히 경향의 역전, 반경향의 확립에 의한 모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그 과정, 즉 현실적 조건들 전체 속에서 파악되는 모순적 전개/발전에 대한 분석으로 나타난다. 진보는 적대의 전개의 귀결이자 적대에 대해 상대적이다. 요컨대 계급투쟁의 현실분석을 현실모순의 전개과정에 대한 분석으로 이해하는 마르크스에게 역사는 그 자체로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전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역사변증법은 반목적론적인 '불확정적 유물론'의 쟁점이 되고, 여기서 변증법의 전화의 두번째 측면이 나타난다.

 

알튀세르나 발리바르가 강조하는 대로 '자본의 추상화와 노동의 구체성'은 자본의 포섭에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특히 봉기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을 지지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에서의 계급적 관점'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의 최초의 계기로서 두 개의 노동자집단이 존재하는데, 자본주의적으로 '구성된' 노동자집단으로서 '자본-집단'과 프롤레타리아적인 '봉기적' 노동자집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집단'이 그것이다.

 

임금형태에 의해 전제되는 개인적 인격들은 축적운동에 의해 사회적 관계로서 자본 그 자체에 포섭된다는 의미에서 '자본-집단'이다. 이는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형식적 포섭'에 대응한다.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 노동자들의 존재(숙련/탈숙련, 실업/과잉노동, 내핍/강제소비)가 전체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자본의 논리의 관념적 항, 역사적으로 도달불가능한 논리적 한계이다. 자본주의적 '전제정'에 내재적인 물질적 불가능성이자 '억압의 최저한도' 때문에 혁명적 실천이 반작용으로 발생한다. 지연되는 불가능성으로서 현실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역사'는 새로운 '사회화'를 통한 그 현실적 해결의 필연성을 각인하는 것이다. '자본-집단'에서 '프롤레타리아-집단'으로의 이행이 곧 저항과 봉기이며, '노동권' 관념은 착취의 모순을 표현하는 이데올로기적 반역의 상징이다.

 

이같이 현실모순의 변증법은 계급투쟁의 변증법을 부연하면서 역사철학 비판을 실현한다. 역사변증법은 역사철학적 목적론이나 그것에 대한 종말론적 비판에서처럼 '역사의 의미/방향'이 아니라 '역사성'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고, 이같은 변증법적 역사성의 유물론적 성격은 그 내재적 인과성에 의해 표현된다. 이 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역사철학 비판과 스피노자의 그것 사이에는 '평행성'이 있으며, '불확정적 유물론'의 전통 속에서 니체와 하이데거, 벤야민의 그것과 '이단점'을 형성하면서 더욱 발본적인 세속적 반목적론을 제시하는 것이다.

 

반진화주의와 비동시대성 개념

 

그렇지만 진화주의적 진보 비판에 의해 역사의 총체성으로서 진보와 역사의 합리성으로서 진화 사이의 갈등은 심화된다. 파리 코뮌의 패배(1871)와 인터내셔널의 해체(1872)를 계기로 마르크스는 {자본}의 진화주의, 경제주의에 대한 정정을 시작한다. 이것이 국가, 이데올로기 개념과 관련되는 '이행'의 문제설정,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가능성이다.

 

개량주의와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의 협공 속에서 마르크스는 '마침내 발견된 노동자계급의 통치형태', 요컨대 '노동의 정치'로 새롭게 정의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이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사고하는 데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고타강령 비판], 1875; [바쿠닌 방주], 187475). '사회화가능성'(sociabilite)과 '통치가능성'(gouvernabilite)의 결합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아포리아는 혁명의 임박성과 보편계급에 대한 {자본}의 정정이 불충분함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행'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혁명적 실천이 복귀하면서, 역사적 시간의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시대성'이 문제가 된다. 이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서는 국가의 소멸을 예상하는 인권의 정치의 계기, 레닌과 마오에게서는 국가/비국가, '문화혁명'을 쟁점으로 하는 대중정치의 계기로 나타난다. 이에 따라 프랑스혁명의 모델은 이행의 문제설정으로 전화하는데, 이는 '부르주아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전화'로서 '영속혁명' 모델이 결국 레닌이나 마오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대체됨을 뜻한다.

 

또 마르크스는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코뮌(농촌공동체)의 생명력의 관련에 대한 인민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에 개입하여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가능성을 승인한다([미하일로프스키에게 보낸 편지], 1877;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 1881).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들의 역사의 서로 동시대적인 시간들의 다수성,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이한 사회구성체들의 역사적 발전의 길들의 다수성은 경제적 조건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건의 구체적 다수성, 나아가 반경향의 다수성을 의미한다.

 

역사철학적 보편사 비판은 이렇게 인과성과 역사성 개념 이후 반진화주의적 가설들로 발전한다. 역사적 시간의 '비동시대성'은 결국 역사의 '독자성'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변증법의 세번째 측면이다. 이제 '자본주의 일반'이 아니라 '역사적 자본주의'만이 있고, 역사의 일반성은 '역사적 개별성' 또는 오히려 독자적 역사성들을 인식하기 위한 '공통의 통념'일 뿐이다. 또 상부구조의 토대에 대한 '반작용'이란 오히려 그 '능동성'이고, 사회구성체의 복합성은 '최종심의 결정'이 아니라 '과잉결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권의 정치와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

 

{자본}의 경제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에서 귀결되는 반진화주의적 가설들은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억압된 것의 회귀'를 의미한다. '경제주의의 진실'은 경제의 '타자'로서 이데올로기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엥겔스를 거쳐 알튀세르에게 계승된 마르크스주의 전화의 방향이다.

 

알튀세르적인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의 필연성은 우선 마르크스의 사회적 관계의 문제설정의 인간학적 함의의 양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게는 처음부터 부정적 관점과 긍정적 관점 사이의 동요가 관찰된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 나타나는 '활동주의적' 관점은 사회적 관계를 혁명적 실천의 현재화로 이해하는 데 대해, {독일 이데올로기}의 '구성주의적' 관점은 사회적 관계를 생산력의 전개형태들로서 분업과 소유, 생산과 교환으로 이해한다. 이 때문에 전자의 실천의 철학에서는 '낡은 세계의 철거에 의한 공백'이 강조되고, 후자의 역사과학에서는 '낡은 세계 속의 새로운 것의 충만'이 강조된다. 또 의식의 환상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지적 차이와 헤게모니를 강조한다면, 의식의 소외로서 물신숭배에 대한 비판은 주체화-예속과 상징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자본}에서나, 특히 {자본}의 자기비판을 통해 마르크스는 이를 과학과 혁명 사이의 양자택일의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열려진 문제로 남겨 둔다. 진화주의와 경제주의에 대한 자기비판, 비동시대적인 독자적 역사성들에 대한 인식에서 혁명적 실천, 대중정치와 이데올로기의 복귀가 이 점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현재성의 유예된 질문으로서 역사성이다(이는 물론 역사의 전변도 진화도 아닌 내재적 인과성으로서 역사성을 말한다). 사회적 관계의 문제설정, 그 초개인성의 존재론은 사회적 관계의 단일성, 계급투쟁의 상관물로서 초개인성을 전제하지만, 계급투쟁의 내적 한계들로서 또 다른 초개인성, 말하자면 사회적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유대가 있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며 인간학적인 차이라는 또 다른 물질성을 통해 또 다른 내재적 인과성으로서 역사성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일반화된 경제'(생산양식)의 문제설정과 스피노자의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주체화양식)의 문제설정의 접합의 전제는 '인권의 정치'이다. 인권의 정치란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위한 초개인적 저항 또는 봉기이다. 이는 경제적 착취와 이데올로기적 지배라는 억압에 최저한도가 있음을 반증한다. 억압과 종속의 상황 속에 내재적 한계, 즉 인간적 실존과 양립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임계점, 단적으로 죽음, 궁핍, 타락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억압의 최저한도가 있기 때문에 저항과 봉기라는 '부정의 부정'이 있다.

 

그렇지만 또한 인권의 정치에는 고유한 아포리아가 있다. '말할 수 없는' 폭력에 대해 말하고, '볼 수 없는' 폭력을 보이는 저항과 봉기는 '대항폭력'(레닌/마오)과 '비폭력'(간디/킹)이라는 또 다른 '위험'을 내포한다. 교통과 지식의 경계의 '조숙한 초과'(forcage)로 특징지어지는 반역의 담론에 고유한 폭력이 수반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폭력의 조건들에 대한 분석으로서 반폭력의 문제설정이 필요하다.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는 정치와 그 '타자'(경제,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락'을 시도함으로써 정치의 '타율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먼저 마르크스에게서 자본주의의 현실모순은 폭력의 현실적 조건들을 의미한다. 자본의 포섭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과 봉기는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 함의하는 공장전제(소외된 과잉노동)와 산업예비군(대량실업)이라는 프롤레타리아적 '위험'의 양극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폭력의 내재적 인과성에 대한 이같은 분석을 어떤 '억압가설' 같은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이같은 구조적 분석의 인간학적 함의의 모호성이다. 특히 지적 차이를 '노동의 분할'로 환원하는 일종의 '노동의 인간학'에서 착취가 제거되면 폭력이 제거되고 이를 위해서는 혁명적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일종의 '초월론적 연역'이 발생할 수 있다. '노동의 정치'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아포리아는 혁명적 실천의 대항폭력의 이같은 '부인'(denegation)에 있다. 반폭력이 대항폭력의 자기파괴적인 효과들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가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결여된 '정치적 인간학'으로서 '교통의 인간학'이라는 문제는 정치의 또 다른 '타자'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스피노자의 비판에서 그 해결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지적 차이를 존재론적이고 인간학적인 차이로 파악하는 스피노자에게서, 이데올로기의 내적 전화로서 정치, 정치의 대중적 재정초로서 민주화는 '상징의 가상화'로서 '공통의 통념'이라는 사고의 교통의 구조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갈등들에 대한 그의 분석은 이데올로기적 지배에도 억압의 최저한도가 있고 여기서 이데올로기적 검열에 대한 대중의 저항과 봉기가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같은 또 다른 반폭력의 문제설정에 아포리아가 없는 것은 아닌데, 이것이 바로 인권의 정치에 미달하는 '대중의/에 대한 공포'이다.

 

어쨌든 해방운동의 그 자신의 물질적 조건들 속으로의 각인으로서 자유의 필연적 생성, 내재적 인과성을 사고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서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사이에서 반폭력적 문제설정이라는 '평행성'이 발견된다. 이를 사회적 관계의 역사성과 사회적 유대의 역사성 사이의 평행성, 또는 '사회화가능성'과 '통치가능성'이라는 두 개의 사회화 사이의 평행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와 스피노자 사이에 '동일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는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에게 공통적인 담론을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스피노자를 원용해 마르크스의 담론을 개조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적 갈등들과 억압의 최저한도라는 스피노자적 정식화는 '갈등들을 의식하고 투쟁으로써 해결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이라는 마르크스적 정식화로 개조할 수 있다. '상징의 가상화'에 고유한 폭력이 있다면, 이는 이데올로기적 지배가 헤게모니이자 폭력이라는 양의성을 '허구적 보편성'의 '상징적 폭력'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아가 인권의 정치는 이데올로기적 반역에서 '상징적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는 특히 이데올로기 비판과 물신숭배 비판을 결합할 것을 요구한다. 또 경제의 타자로서 이데올로기가 역사변증법의 한계를 가리킨다면, 이는 역사변증법 자체가 혁명과 과학의 결합이라는 열려진 질문이라는 뜻이다.

 

 

 

5.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와 일반화된 페미니즘

 

알튀세르적인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는 아직 고전적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지평 위에 머물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전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현실적 폭력으로서 착취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상징적 폭력('상징의 가상화')으로서 이데올로기('허구적 보편성')의 지배에 대한 반역은 인권의 정치('상징적 보편성')라는 맥락에서 노동에 대한 권리와 지식에 대한 권리의 접합, 노동자와 지식인의 연합을 근거짓는다.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가 고전적인 노동자운동 또는 인권의 정치나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에 머물 수 없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자본의 초민족화와 '민족 형태'로서의 법치국가의 해체, 요컨대 '세계화'(mondialisation, globalisation)로 인해 폭력의 조건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세계화'는 세계시장과 민족국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본주의의 변화를 분석할 것을 요구한다. 먼저 민족국가의 위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세계시장의 구조적 변화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노동과정이 민족국가의 틀 안에서 조직되기 때문에 민족국가가 아직 노동력을 관리해야 하지만, 대신 노동력의 관리 형태는 변화하고 이에 따라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또는 '사회-민족국가'로 대표되는 사회적 타협이 소멸한다. 8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대두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e)는 이를 상징한다.

 

세계시장의 구조가 변화하는 이유는 자본의 '초민족화'(transnationalisation)에서 찾아야 한다.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민족과 민족의 간극에서 활동하는 초민족적 자본은 전통적인 산업자본도 독점자본도 아니고 세계시장을 무대로 하는 금융자본이다. 초민족적 자본의 축적 메커니즘의 핵심은 노동생산성에 있지 않다. 노동력을 관리하는 민족국가는 자율적인 주체가 아니라 초민족적인 금융자본과 상호작용하고 또 오히려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

 

초민족적 자본은 금융순환을 통한 이자 수입에 큰 비중을 두지만, 여기에 첨단기술의 지대 수입을 추가해야 한다. 금융자본이 생산과정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금융순환을 통제하고 정보나 통신 같은 첨단기술을 통해 넓은 의미에서 지식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초민족적 자본은 또한 지구자원을 통제하는데, 육지의 자원이 거의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양의 자원이며 이제 지구를 통제한다는 것은 해양을 통제한다는 뜻이다(나아가 우주의 통제도 문제다). 선진국의 첨단기술 대부분이 교통통신이나 지구자원에 대한 통제와 관련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초민족적 자본에 의해 변화하는 세계시장의 구조적 특징을 '세계화'라고 한다면, 이에 대응하는 것이 '민족경쟁력' 또는 '국가경쟁력'(national competitiveness)이다. 세계화나 국가경쟁력이라는 신자유주의적 논리는 초민족적인 자본의 운동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이중적 효과인 셈이다. 국가경쟁력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축적 원천으로서 노동생산성이 상대화된다는 점이고, 이는 특히 중화학공업 노동자를 비롯한 산업노동자의 지위가 주변화됨을 뜻한다. 노동력의 관리 형태가 변화하고 사회적 타협이 소멸하는 것은 결국 이와 관련된다. 70년대 이후 선진국에서 등장한 '산업정책'은 국가경쟁력에 불리한 산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다른 나라로 이전하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선진국의 '탈산업화'(산업구조조정, deindustrialisation)는 산업의 '탈지역화'(입지조정, delocalis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경쟁력과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국가의 '공적 성격'을 문제삼는 '탈공공화' 또는 '민간화'(privatisation) 경향이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탈산업화의 또 다른 중요한 수단이 바로 탈국유화, 즉 민영화.사유화인 것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탈공공화는 경제부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세계화의 이데올로기적인 조건을 담당하는 학교교육과 교통통신, 특히 미디어의 탈공공화가 쟁점으로 제기된다. 대중의 '탈정치화'라는 '정치의 위기'는 정치의 미디어화 또는 이미지화의 진전이 야기한 것이다.

 

인권의 정치의 아포리아

 

근대의 '경계'에서 나타난 세계와 인류의 현실적인 '상호의존성'과 '통일'로서 '세계화'의 효과는 칸트 이래 '코스모폴리스적'인 유토피아의 종언, '보편주의적' 가치의 종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마르크스처럼 '이론적 보편성'을 대체하는 '현실적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의 초민족화에 의해 추동되는 '세계화'의 폭발적 모순은 바로 '적대의 유령'으로서 '배제와 불평등'의 세계화이다. 세계화의 효과로서 '안정적인 유력자(majorities)가 없는 약소자(minorities)의 일반화'가 새로운 역사성 인식과 모순의 내적 전화를 위하여 보편성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요구한다. 요컨대 보편성의 양상들의 모호성과 다의성에 주목하면서, 현실적, 허구적, 상징적 보편성의 셰마를 새로이 구성해 보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선 폭력의 '초객관적'(ultra-objectif)이고 '초주체적'(ultra-subjectif)인 형태가 폭력의 조건의 변화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생태/생명을 위협하는 '대재앙'과 관련되는 폭력의 초객관적 형태는 그 객관성/'자연성'의 과잉이 주체성/'사회성'을 압도함을 뜻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민족 형태의 위기에 따라 '인종주의'가 폭발하고 더욱이 종교라는 '억압된 것이 복귀하면서' 폭력의 초주체적 형태로 전도된다. 폭력이 제도의 기능작용의 일반적 조건이 되고 또 제도가 폭력의 조건 자체가 된다는 제도와 폭력의 동일화는 '약소자의 일반화'(또는 '우범자/불량배의 보편화')라는 세계화의 효과를 특징짓는다. 이같은 폭력의 이중적 '보편화'가 대중의 수동성과 의기소침으로 표현되는 봉기적 주체의 '이중구속'(double bind)의 원인이다.

 

'불복종'보다는 '순응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 미디어적 '대중문화'의 범람은 '현실모순'을 내재적으로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 속에서의 허구적 해결로 치환하려는 것이다. 특히 부르주아적 헤게모니의 해체에 따른 '규준화의 위기'가 자연발생적인 '주체의 분열', '노마드화'를 촉진시킬 때, 이는 집단적인 광기와 냉소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탈근대적 조건' 속에서 고전적 노동자운동으로 대표되는 인권의 정치가 아포리아에 당면할 때, 또다시 문제는 대중의 '지식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는 '문화혁명'인 것이다.

 

인권의 정치가 제기하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가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로 상징되는 봉기적 주체성의 구성적 역능을 표현한다면, 헤게모니와 규준화의 제약에 대한 도전으로서 이데올로기적 반역은 일체의 '강제와 차별'에 반대하여 '평등-자유'를 쟁취하는 봉기적인 권리로서 노동권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제도적이고 구성적인 '허구적 보편성'을 전복하는 이같은 권리를 이상적이고 봉기적인 '상징적 보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전자의 부정적 보편성은 인권의 정치라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 긍정적 보편성으로 전화한다.

 

그런데 노동권을 부정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를 민족적 시민성으로부터 내부적으로 배제했던 시민적-부르주아적 사회는 '복지국가' 또는 오히려 '사회-민족국가'에 의해 계급적대를 자본과 국가의 보편성에 포섭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고유한 계급정치, 계급문화를 시민적-부르주아적 사회가 '인정하는' 하나의 특수성으로 획득하게 된다. 자본의 초민족화에 조응하는 '사회-민족국가'의 위기로 인해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민족형태'의 해체가 비가역적이 되면서, 특히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강행되는 '노동의 권리'의 회수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코포러티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같은 일종의 '동일성의 정치'의 방어적인 관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비해 여성은 민족적 시민성으로부터의 '내부적 배제'가 훨씬 발본적인데다가, 더욱이 '차이 속에서 평등의 권리'로서 '여성권'을 주장함으로써, '포스트-민족적'인 상황에서 모든 약소자를 대표하는 상징적 보편성을 담지하는 새로운 봉기적 주체성으로 승화될 수 있다. 즉 여성해방운동이 여성정치, 여성문화의 특수성을 부르주아적으로 '인정받으려는' 방어적인 '동일성의 정치'를 넘어서, '성적 차이의 윤리'에 근거한 '문화혁명'에 의해 '정치의 전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래 여성은 '보편적 계급'이 아니라 오히려 탁월한 '역설적 계급'(장-클로드 밀네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적 차이의 윤리와 여성권은 '평등주의적' 지평에 머무는 역사적 페미니즘 자체의 전화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인권의 정치, 특히 고전적인 노동자운동의 전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계급적대와 노동권을 '포스트-민족적'인 상징적 보편성으로 승화함으로써 노동자운동이 스스로 전화할 수 있을지 아직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서려는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는 일반화된 페미니즘과 특히 그것이 시도하는 인권의 정치의 전화에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팔루스중심주의' 비판

 

헤겔은 여성의 독자성을 남성의 보편성에 포섭함으로써, 플라톤 이래, 아니 오히려 유목민족의 가부장제적 신화 이래, 여성의 '가족으로의 유폐'를 개념화한다. 여성에게 사랑과 재생산은 자신의 독자적 욕망이 아니라, 남성의 보편적 욕망에 포섭된 보편적 의무로서 성교/오르가즘과 출산/양육이라는 '추상적 노동'이다. 마치 자본에게 포섭된 노동자가 그런 것처럼, 여성에게 남성은 대체불가능한 보편자이지만 남성에게 여성은 대체가능한 개별자일 뿐이다. 헤겔은 이렇게 '성적 차이의 윤리'의 불가능성을 이론화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1844년 원고'에서 가족이란 여성을 상품화하는 '사적 소유'의 체계라는 푸리에주의적 관점에서 헤겔을 전도하고, 나아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해방은 가족이라는 역사적 현실의 전화, 결국 사회적 관계의 전화를 전제하는 것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나중에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에서 모계사회에 대한 바코펜의 분석을 원용하여 가족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이같은 관점을 구체화한다. 그렇지만 인터내셔널을 비롯해 고전적 노동자운동을 지배했던 것은 '가족임금'이라는 푸르동주의적 관념이었고, '가족임금'을 부당전제한다는 점에서는 {자본}의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본}과 고전적 노동자운동에서 '성적 차이'는 하나의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성/성욕 자체를 분석의 대상으로 설정하면서도, 또는 오히려 바로 그렇게 하기 때문에, '성적 차이' 개념의 부재라는 아포리아를 드러냈던 것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프로이트가 묘사한 '쾌락원칙' 또는 '생명의 욕동'(에로스)의 '억압'(갈등과 긴장)을 해소하는 전체성 또는 '양성성'의 욕망으로서 '죽음의 욕동'(타나토스)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는 결국 정신분석학(그리고 그것이 전제하는 문화인류학)의 상징적 사회화 개념이 자아의 이상 또는 초자아라는 니체적 '과잉인간'을 특권화함으로써 가족으로 유폐된 어머니/여성을 '과소인간'으로 격하한다는 점과 관련될 것이다. 어쨌든 성적 차이는 정신분석학적 지식의 한계이며, 이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발견의 역사'로서 낭만주의 문학/철학(나아가 니체/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과 '선택적 친화성'을 갖는 셈이다.

 

여기서 고전적 정신분석학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해석적 정치학'이라는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에 결여된 이데올로기 개념에 주목했던 라이히의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잠시 주목해야 한다. 그는 특히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 개념의 결여로 인해 계급적 조건들과 대중운동들 사이의 환원불가능한 편차, 또는 계급의 이론적 형상과 대중적 존재 사이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역사성 개념과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접합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라이히는 '사회적 관계'(경제적 합리성)와 '사회적 유대'(이데올로기적 비합리성)의 접합을 위해 노동과 가족, 계급투쟁과 성욕, 또는 역사와 무의식의 본원적인 통일성을 가정한다. 이것이 이후 다양한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적 이론들의 근본적인 질문으로서 '리비도 경제'의 '억압가설' 비판의 원형이 된다.

 

'리비도 경제' 비판과 '욕망의 정치'는 '무의식 없는 정신현상', '환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정치의 종언'의 낡은 망상을 되풀이할 뿐이다. 이같은 문제는 우선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개념이 정치의 '타자'로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점과 관련된다. 이는 경제 또는 계급투쟁의 현실분석을 결여한 정신분석학이 '사회학주의적' 국가관(프로이트)이나 국가와 가족의 '상동성'(라이히)을 부당전제한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

 

성적 차이의 윤리와 성별화된 권리

 

이 점에서 알튀세르가 프로이트가 아니라 스피노자에게서 정치적 탈소외를 위한 정치적 인간학을 모색했던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렇지만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에서도 '성적 차이'는 하나의 한계이다. 단적으로 스피노자적 정치에 고유한 아포리아로서 '대중의/에 대한 공포'는 '여성의/에 대한 공포'로 환유된다고 할 수 있다. 배타적 욕망('욕정')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유혹적 약함'은 남성/인간의 역능을 감소시키는 '멜랑콜리의 원인'이자 공동체를 파괴하는 '치명적 위험'이다.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형제애적'('동성애적')인 공동체에서 여성을 '내부적으로 배제한다'. 성적 차이를 사고할 수 없었던 스피노자에게 존재론적-인간학적 차이는 탈성화/탈성욕화된 것이고, 이 때문에 스피노자에게도 '성적 차이의 윤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여성은 역시 '요부'(치명적 여성, femme fatale)에 불과하다.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적인 반폭력의 문제설정을 넘어서는 페미니즘적 '정신분석학 비판'은 가부장제적/팔루스적 '상징의 가상화', 특히 민족 형태라는 '허구적 보편성'의 '상징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다. 동시에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유비되는 페미니즘적 '리비도 경제 비판'(이 점에서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스미스나 리카도의 고전파 정치경제학과 유비할 수 있겠다)은 여성의 재생산능력을 팔루스라는 상징적 등가물과 교환하는 가부장제적/팔루스적 '물신숭배'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팔루스중심주의 비판이라는 관념론 비판의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연다.

 

'성적 차이의 윤리'를 위해서는 성적 차이 자체를 하나의 '상징적 보편성'으로 인식하여 남성과 여성의 욕망을 승화하는 수밖에 없다. 팔루스적 등가(평등)의 상징은 성적 차이(차이를 조건으로 하는 평등)의 상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교통은 중립적인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차이에 입각한 사고 또는 문화의 초개인적 교환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욕구'(성적 매력)에서 '젠더의 완전화/현재화'로 승화하여 각성의 독자성이 동시에 보편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같은 교통의 전제이다. 이같은 '문화혁명'에 의한 '정치의 전화', 즉 '욕망의 정치', '죽음의 정치'가 아닌 '사랑의 정치', '생명의 정치'만이 폭력의 초객관성/초주체성이 강제하는 봉기적 주체의 '이중구속'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양성간의 유대와 교통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스피노자)도 '운명에 대한 사랑'(니체)도 아닌 '승화된 에로스의 윤리'(콜론타이?)에 입각해야 한다.

 

이같은 성적 차이의 윤리는 '인간적 존엄성'(여성의 육체와 이미지에 대한 착취 비판)에 대한 권리와 동시에 '여성적 동일성'(특히 '처녀성'과 '모성')에 대한 권리로서 여성권을 요구한다. 여성권이 여성의 육체와 성/젠더에 대한 권리, 생명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라는 점에서 성적 차이의 윤리는 일종의 '생-윤리'(bio-ethique)를 함의한다. 이는 초민족적 자본의 이윤의 주요한 원천인 생명관련 과학-기술(이른바 '제놈-프로젝트'로 상징되는 '생명공학')을 비롯한 생태관련 과학-기술의 초객관적 폭력에 대응할 새로운 봉기적 주체성의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국가가 소멸하지 않는 것처럼 가족이나 재생산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신자유주의하에서 전개되는 가부장제의 위기와 재생산의 '탈공공화'라는 역설에 대응하여, 아이(특히 딸/소녀)라는 전형적인 '과소인간'의 권리를 고려하면서 세대간의 유대와 교통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해준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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