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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 해방적 상상력 : 마르쿠제의 해방담론

ddolappa 2008. 6. 23. 21:50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해방적 상상력

- 마르쿠제의 해방담론


 

 


김누리(중앙대)



1. 서론: 해방의 이론가 마르쿠제


마르쿠제를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읽는 것은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책들이 현란한 수사와 정치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채 폐쇄된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인상을 주는 반면, 마르쿠제의 저작은 때로 논리적 비약과 모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인간해방의 전망을 열정적으로 모색하기 때문이다. 전망부재의 시대에 습관성 무력증에 빠진 오늘의 지식인들에게 마르쿠제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지적 전율의 기억을 되살려준다. 필자가 마르쿠제의 해방담론을 다루고자 하는 첫 번째 이유도 시나브로 ‘유토피아 권태증’에 감염되어가는 자신을 다시 한번 채찍질하려는 의도에서이다.

 

마르쿠제의 사상적 편력은 참으로 다채롭다. 이는 독일사상사의 특징을 이루는 ‘체계철학’의 전통, ‘철저한 사유’의 학풍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문학, 철학, 사회학, 심리학, 정치학, 미학을 넘나드는 그의 사상의 궤적은 참으로 광대하다 아니할 수 없다. 하이데거의 지도 아래 <헤겔의 존재론과 역사성 이론의 기초>(1927)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발표된 <이성과 혁명>(1941), <에로스와 문명>(1955), <일차원적 인간>(1964), <미적 차원>(1974) 등 일련의 저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헤겔의 관념철학,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쉴러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실로 19세기 이래 서구사상의 정신적 모험을 모조리 섭렵한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광대한 마르쿠제의 사상에는 하나의 일관된 정신이 관류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해방에 대한 실천적 관심이다. 그의 모든 저작은 인간을 억압하는 다양한 형태의 질곡을 분석하여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분석대상의 다양성과 연구의도의 일관성이 마르쿠제의 사상적 이력의 특징이다. 예컨대 그가 ‘문화’를 다룰 경우에도 그의 관심은 문화 자체의 속성과 본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인간해방과 맺는 관계에 집중되어 있고, ‘본능구조’를 다룰 때도 그것이 인간의 해방 혹은 억압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관심의 핵심이며, ‘예술’에 대한 연구도 초점은 인간해방에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권능에 맞추어져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마르쿠제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연구서인 <비판과 유토피아>에서 마르쿠제를 ‘해방의 이론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1960년대에 와서 완전히 꽃핀 허버트 마르쿠제의 사회이론은 팽팽한 긴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한편으론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의 전통을 계승한다. 마르쿠제의 대표적인 사회이론서인 <일차원적 인간>은 <계몽의 변증법>의 급진적인 지배이론적 시각을 전후 미국사회에 적용하려고 한 야심 찬 시도이다. 그러나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과는 달리 마르쿠제는 단순한 역사철학적 부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때론 신경에 거슬릴 정도의 고집과, 이론적 모순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강함으로 마르쿠제는 ‘해방의 이론가’로 남았다. 그는 후기자본주의의 ‘전체주의적’ 조건 하에서도 굴종의 감옥을 깨부술 방법을 모색했다.”1)


마르쿠제의 평생의 화두는 인간해방이었다. 물론 인간해방에 관심을 갖고 이를 이론적, 실천적으로 수행한 사상가는 적지 않지만, 마르쿠제처럼 해방의 관점을 평생에 걸쳐 견지한 사상가는 흔치 않다. 예컨대 마르쿠제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 활동한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의 경우 파시즘의 대두와 미국 망명 이후 초기의 사회변혁적 관점을 버리고 비관적, 염세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책’이라는 <계몽의 변증법>을 집필하기에 이른 반면, 마르쿠제는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의 비관적 역사철학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해방적 상상력’을 견지했다.

 

마르쿠제와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의 현실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1967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시위가 날로 격화되면서 학생운동의 열기가 68년의 정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에서 이 불세출의 세 사상가는 시대사에 대해 전혀 다른 대응방식을 보였다. 호르크하이머는 1967년 5월 7일 미국 대사관에서 열린 미군 고위 장성들을 위한 환영만찬에 참석하여 축사를 했고, 아도르노는 7월 7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학생들을 앞에 놓고 「괴테의 이피게니에에 나타난 순수한 인간성의 이념」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반면 마르쿠제는 7월 10일 독일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급부상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한 강연을 하고 학생들과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2) 1967년에 벌이진 이 세 장면은 세 사상가의 현실인식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호르크하이머의 비관적 현실주의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의 ‘집행인들’을 옹호하는 수준까지 세속화되었고, 아도르노의 염세적 역사관은 혁명의 와중에 ‘순수한 인간성’의 세계로 그를 인도했다. 유독 마르쿠제만이 인간해방과 사회변혁에 대한 줄기찬 모색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해방의 이론가’ 마르쿠제가 평생에 걸쳐 해명하고자한 것은 하나의 물음으로 집약할 수 있다.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사회적 비참’은 더욱 심각해지며, 교육을 통한 의식의 각성도 확대된 현대사회에서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객관적으로 볼 때 변혁이 필연적이지만, 이 변혁의 수행자로 규정된 바로 그 사회계층 사이에서 변혁의 필요성이 나타나지 않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3) 요컨대 마르쿠제는 혁명을 위한 객관적인 조건이 성숙된 상황에서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밝혀내고자 했다. 그가 헤겔에서 마르크스로, 또 프로이트로 관심의 중점을 옮겨간 것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을 가로막는 요인이 존재하는 결정적인 영역이 정신적인 영역에서 경제적인 영역으로 또 심층심리의 영역으로 옮겨갔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의 대두가 명확해졌고 그 때문에 나는 마르크스와 헤겔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프로이드에 대한 관심은 다소 늦게 찾아왔다. 모든 지적 작업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즉 진정한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 조건이 현실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대에 도대체 왜 혁명이 와해되거나 타도되었고, 구시대의 세력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더욱 악화된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했을까?”4)


‘진정한 혁명이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이 현실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대에’ ‘혁명이 와해되거나 타도된’ 이유는 무엇인가. 마르쿠제는 그 이유를 ‘총체적 지배’에서 찾는다. 선진산업사회는 물적 조건뿐 아니라 영혼과 욕망까지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이고,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진작 일어났어야할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르쿠제가 50년대에 집중적으로 프로이트 연구에 전념한 이유는 현대의 지배방식이 물리적 폭력에서 심층심리의 관리로 이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일어나는 욕망의 조작이 혁명의식을 잠재웠다는 인식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요컨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을 조작․통제하는 거대한 기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향상되고 물질적 풍요가 커가는 것을 기초로 해서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조정과 통제가 행해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이 후기자본주의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통제 메커니즘의 하나가 되고 있다.”5) 새로운 지배형태는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관리한다. 혁명의 필연성에 대한 이성적 의식뿐만 아니라 혁명을 소망하는 무의식적 욕망까지도 사전에 통제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그 결과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매일매일 ‘자본주의 체제’를 재생산한다. 이때 ‘개인의 머리 속에서 재생산되는 자본주의’가 해방의 욕구를 원천봉쇄해 버린다.

 

<일차원적 인간>은 마르쿠제가 ‘선진산업사회’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이다. 간단히 말하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모든 개인이 일차원적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마르쿠제의 진단이다. 일차원적 인간은 혁명을 몽상하지 않는다. 시장에 잘 순응하고,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맹종하며, 자기성찰 능력도 개성도 없는 자동인형 같은 인간이 일차원적 인간이다. 가장 ‘이상적인’ 일차원적 인간은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까지 훈육되어 시장의 요구에 즉각 조건반사하는 인간일 터이다.

 

<일차원적 인간>이 선진산업사회에서 개인이 어떻게 일차원적 인간으로 길들여지는가를 규명한 책이라면, 해방의 가능성을 열정적으로 탐구한 논문이 「새로운 감수성」이다. <일차원적 인간>은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감수성」은 전망을 모색한다.

 

이 논문은 ‘해방의 이론가로서’ 마르쿠제의 사상을 살피고, 특히 그의 문화이론6)과 관련하여 해방담론이 차지하는 의미를 밝히려는 시도이다. 마르쿠제의 해방담론을 논의하기 위해 위의 두 텍스트를 중점적으로 다루는데, 그 이유는 마르쿠제의 현실진단과 전망모색의 양 측면을 포괄적으로 살핌으로써 마르쿠제 해방담론의 전모를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 본론 제1장에서는 <일차원적 인간>의 분석을 통해 선진산업사회를 유지시키는 총체적 지배의 양상을 살펴보고, 제2장에서는 「새로운 감수성」 분석을 통해 마르쿠제가 구상하는 해방의 밑그림을 검토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에서는 ‘과학에서 유토피아로’ 이론적 실천적 강조점을 옮겨가야한다는 마르쿠제의 의미심장한 주장을 살피고, 그 뜻을 음미해볼 것이다.



2. 본론

 

 

2.1. 일차원적 인간

 

 

<일차원적 인간>은 혁명 부재의 현대적 상황의 원인을 미국사회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한 책이다. 이 책은 특히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한국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미국 사회를 모델로 삼고 있고,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이데올로기 또한 미국의 그것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차원적 인간>은 상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가설을 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가설은 “선진산업사회는 예견할 수 있는 미래에 있어서 질적 변혁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가설은 총체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 억제를 돌파하여 사회를 폭파할 수 있는 세력과 경향이 존재한다”7)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선진산업사회가 질적 변혁을 억제할 수 있는 역능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그것을 변혁시키려는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마르쿠제는 해방의 희미한 가능성을 본다.


 

2.1.1. 총체적 지배


 

<일차원적 인간>에서 마르쿠제의 관심은 ‘선진산업사회가 질적 변혁을 어떻게 억제하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의 대답은 명확하다. 선진산업사회는 ‘총제적 지배’의 사회이고, 총제적 지배에 의해 혁명의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다는 것이다. 그럼 총체적 지배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관철되는가. 마르쿠제는 총체적 지배의 범주를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기술합리성, 탈승화된 문화, 전도된 언어, 조작된 의식이 그것이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총체적 지배는 정치 영역에서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형태로 관철된다. 전체주의는 히틀러와 스탈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도 전체주의적으로 관리된다. 즉 총제적인 의식 조작과 욕망 조정을 통해 관리되는 것이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테러와 다르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내면화와 조작의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8) 히틀러와 스탈린이 강제수용소(아우슈비츠, 굴락)와 총제적 감시체제(게슈타포, KGB)를 통해, 다시 말해 테러와 공포를 통해 전체주의적 사회를 완성했다면,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변혁의 욕망 자체를 희석시키거나, 변형시키거나, 억압하거나, 궁극적으로는 거세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사회를 유지한다. 나아가 욕망조작을 통해 자발적 동조를 이끌어내어 헤게모니를 장악함으로써, 형식민주주의의 작동틀 안에서 전체주의적 사회를 만들어낸 것이다.9)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기득의 이익에 호소하는 욕구조작을 통해” “전체에 대항하는 유력한 반대파의 출현을 사전에 저지”한다. “특정의 통치형태나 특정의 정당정치만이 전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정당의 ‘다원주의’, 신문, ‘대항세력’ 등과 충분히 양립할 수 있는 특정한 생산, 분배 체제도 전체주의를 조장한다.”10)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지배는 어떤 양상을 띠는가.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유지되는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은 우선 끊임없이 허위욕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개인이 가진 욕구는 대부분 지배계급이 부여한 허위욕구에 불과하다.


“‘허위’ 욕구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특정 사회세력이 개인에 대하여 부과하는 욕구를 말한다. 그것은 고된 노동, 공격성, 궁핍, 불의를 영속시키는 욕구이다. 이 욕구를 채우는 일은 개인에게 있어서 대단히 즐거운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만족이 사회 전체의 병폐를 인식하고, 그 병폐를 개선할 기회를 포착하는 능력의 발달을 방해하는 데 일익을 맡는다면, 그것은 유지되고 보호해야 할 상태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행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병적 쾌감과 다를 바 없다.”11)


선진산업사회에서 개인은 지배집단이 부과한 욕구를 자신의 욕구로 착각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계급이 존재하지 않거나, 계급은 이미 평준화되어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다. “만일 노동자와 그의 보스가 동일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즐기고, 동일한 행락지로 떠난다면, 만일 타이피스트가 고용주의 딸과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치장한다면, 만일 흑인이 캐딜락 자동차를 소유한다면, 만일 그들이 모두 동일한 신문을 보고 있다면, 그 경우에 이러한 동일화는 계급의 소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회의 유지에 기여하는 욕구와 만족이 이 사회의 하층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는 정도를 가리키는 것이다.”12) ‘동일화’ 현상은 계급소멸의 증거가 아니다. 계급이 평준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다수의 사회구성원이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할 억압받는 사회계급이 이미 지배계급의 욕망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선진산업사회에서는 또한 생산과정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데, 이러한 현상도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데 기여한다.


“선진산업문화는 이전의 산업문화보다 한층 이데올로기적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생산과정 자체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자극적인 형식으로 만연된 기술적 합리성의 정치적 국면을 드러낸다. 생산기구와 그 산물인 상품과 서비스는 전체로서의 사회체제를 ‘팔거나’ 관철시킨다. 생산물은 인간을 사로잡고 조작한다. 생산물은 그 허위성에 대해 둔감한 허위의식을 증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유익한 생산물이 보다 많은 사회계층에 걸친 보다 많은 개인들에게 보급됨에 따라 생산물이 추진하는 교화는 단순한 선전을 넘어 하나의 생활양식이 된다. 그것은 좋은 생활양식으로서 질적 변혁에 저항한다.”13)


선진산업사회에서 교화의 주체는 당이나 국가가 아니다. 생산물이 인간을 ‘교화’한다. 인간을 ‘사로잡고 조작한다’. ‘생산물이 추진하는 교화’가 ‘생활양식’이 된다. 선진산업사회가 제공하는 상품의 홍수 속에서 개인은 최면상태에 가까운 마비된 의식을 지니게 되고, 생산물에 종속된다.

 

선진산업사회가 새로운 ‘전체주의적’ 사회라 해도, 사회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장악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탈적’ 문화도 존재한다. 일차원적 사유가 군림하는 현실에서도 “정신적, 형이상학적, 또는 보헤미안적인 일이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금주에 함께 예배를’, ‘왜 신을 시험하지 않는가’, 선, 실존주의, 비트족의 생활방식 등은 매우 많이 있다.” 그러나 지배문화를 거부하고 새로운 대안문화를 모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탈적’ 문화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지배문화에 포섭되어 있다. 그것은 혁명적 기능을 행하기보다는 통합적 기능을 담당한다. 즉 “이러한 항의와 초월의 방식은 이미 현상에 대해 적대적이 아니며 부정적이지도 않다. 그것들은 오히려 실용적인 행동주의의 의식적(儀式的)인 부분이고, 무해한 부정이며, 때문에 현상에 의해 그 건전한 음식의 일부로 즉시 소화되어 버리는 것이다.”14)

 

총체적 지배가 군림하는 곳에서도 일탈적 문화는 생겨나기 마련이지만 마르쿠제는 여기서 해방의 가능성을 기대하지 않는다. 일탈적 문화란 저항성이 탈각된 ‘무해한 부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60년대부터 미국에서 널리 만연되었고, 지금 우리나라에서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일탈적 문화가 사회적 해방과 거리가 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는 허위욕구와 계급평준화의 환상을 조장하고, 생산과정을 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며, ‘일탈적’ 문화를 무해한 수준에서 관리함으로써 테러와 공포에 의존하지 않고도 지배를 영속화하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를 만들었다. 이런 사회가 바로 ‘일차원적 사회’이다. 일차원적 사회의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필자는 ‘초소외’라는 개념을 사용하겠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소외’ 개념으로는 총제적 지배가 관철되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현실을 포착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왜 초소외인가. 마르크스는 소외 개념으로 물신화, 사물화를 통한 의식의 타자화 과정을 탁월하게 설명해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진산업사회에서 개인은 의식만이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타자의 것’에 지배당하고, 타자의 것을 내면화하고 있다. 이처럼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과 욕망까지도 소외된 상태가 초소외 상태이다. 마르크스가 보았던 근대 초기의 개인이 ‘소외’ 상태에 있었다면, 현대의 개인은 ‘초소외’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에서 초소외는 전면적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초소외를 재생산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용품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즉 그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 하이파이 세트, 실내에 2층 계단이 달린 주택, 주방기구 등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한다. 개인을 사회에 결부시키는 메커니즘 자체가 변하고, 사회적 통제는 그 사회가 만들어낸 새로운 욕구 속에 닻을 내린다.”15)


인간이 만들어낸 대상이 인간의 분신이 되어버린 현대의 상황은 초소외의 상태이다. 선진산업사회는 상품에 대한 욕망을 끊임없이 조장하여 개인을 그 욕망의 포로로 만듦으로써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하다. 마르크스가 예상한 사물화 과정은 후기자본주의사회에서 ‘초과달성’된다.

 

초소외의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에게 치명적인 것은 비판적 이성이 점차 약화되어 결국은 소멸해버린다는 것이다. “부정적 사유의 힘, 즉 이성의 비판적인 힘의 고향인 정신의 내적 차원이 상실되어 가는 사태, 이것은 바로 선진산업사회가 반대파를 침묵시키고 단속하는 물질적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대응현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생활을 형성하는 사물 속에서 자기를 되찾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물에 법칙을 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의 법칙을 그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16) 비판적 이성의 모태인 ‘정신의 내적 차원’이 소실됨에 따라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전도된 사태 속에서 해방의 가능성은 애초에 차단되어버린다.

 

이상으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현실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나타나는 특징들은 기실 우리가 현실에서 매일 겪고 있는 일상의 체험과 다르지 않다. 마르쿠제는 미국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체제란 형식적 민주주의의 외양을 쓴 전체주의적 지배체제에 불과하다는 점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기술합리성

 

 

전체주의적 민주주의가 총체적 지배의 정치적 국면을 이룬다면, 기술합리성은 총체적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기능적 영역이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기술은 이미 중립적인 물적 조건이 아니다. 선진산업사회에서 기술은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오늘날 지배는 기술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기술로서 영속되고 확장된다. 기술은 모든 문화영역을 장악하고 있는 거대한 정치세력들에게 큰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그 결과 기술은 인간의 부자유를 전면적으로 합리화한다.”17)

 

기술합리성은 지배의 양상을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전통적인 인격적 지배가 약화되고, ‘사물의 객관적 질서’라는 이름의 새로운 지배자가 등장한 것이다. “사회적 현실이라는 점에서,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는 여전히 지속된다. 그러나 기술에 의한 자연의 변형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사회는 인격적인 종속관계를 점진적으로 ‘사물의 객관적 질서’(경제법칙, 시장 등)로의 종속관계로 대치하고, 그것에 의해 지배의 토대를 바꾼다.” 이로써 현대의 지배는 과거에 비해 “고도의 합리성을 만들어낸다.”18) 기술적 합리성의 고도화의 결과 선진산업사회에서는 경제법칙이나 시장원리라는 ‘사물의 질서’가 새로운 지배자로 군림하고, 개인은 이러한 비인격적 지배에 속수무책으로 예속된다. 이른바 ‘합리적 질서’에 지배받는 현실은 개인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인격적 지배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개인은 총체적 지배의 현실을 인식하고 못하고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기술지배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착취도 합리화한다. “생존경쟁과 인간 및 자연의 착취는 더욱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되었다.” 여기서 합리화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로 과학적 관리와 분업은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그 결과 생활수준을 높여놓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장 파괴적이고 억압적인 특징까지 정당화하고 면책하는 정신과 행동의 패턴”을 만들어낸다. 그 결과 “과학적, 기술적인 합리성과 조작은 새로운 사회통제의 형식으로 결합된다.”19) 마르쿠제는 이미 50년대부터 합리화 자체가 지배의 수단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합리화가 아무리 전체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지배의 합리화이다.”20)

 

기술지배가 초래하는 ‘새로운 사회통제의 형식’은 근본적으로 전체주의적인데, 그것은 기술합리성의 내적 속성 자체가 전체주의적 경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 기술은 인간의 부자유에 대한 커다란 합리화도 제공하고, 자율적으로 되는 것과 자기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대한 ‘기술적’ 불가능성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이 부자유는 비합리적인 것, 또는 정치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의 안락을 늘리고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적 기구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기술적인 합리성은 지배의 합리성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보호하게 된다. 이성의 도구주의적 지평은 합리적으로 전체주의적 사회로 열리는 것이다.”21)


기술은 노동과 분업 과정만 합리화하는 게 아니다. 기술은 또한 ‘인간의 부자유’도 합리화한다. 기술에 의존해 편안한 삶을 영위하려는 욕망이 역설적으로 인간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이처럼 전례 없는 방식으로 기술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성은 철저히 도구화되며, 그 과정에서 사회 전체가 전체주의적으로 조직된다. 결국 기술합리성은 해방의 족쇄로 타락한다. “기술적 진보의 끊임없는 역동성 속에 정치적 내용이 침투했다. 기술의 해방적인 힘은 해방의 족쇄로 변하고 인간의 도구화로 변한다.”22) 이처럼 “마르쿠제의 사회분석의 주된 테마는 기술이 사회적 생산성 향상을 위한 중립적 매체가 아니라 익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비판하기 어려운 형태를 띤 지배의 매체라는 사실이다.”23)

 

 


탈승화된 문화

 

 

문화도 총체적 지배에 봉사한다는 점에서는 기술과 다르지 않다. 총체적 지배가 관철되는 ‘관리되는 사회’에서 문화가 행하는 역능에 대한 마르쿠제의 분석을 살피기에 앞서 마르쿠제의 문화론이 변화해온 과정을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 문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논의에는 문화를 바라보는 특정 관점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1937년에 쓴 「문화의 긍정적 성격」이라는 논문에서 마르쿠제는 ‘문화’24)의 ‘초월적’ 성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의 초점은 특히 전통적인 독일 이상주의 문화가 지닌 내면성, 관념성을 향한다. 근대 이후 문화란 결국 부르주아 문화이며, 이 문화가 지닌 정신성, 내면성, 관념성은 현실과의 대결을 회피하고 현실을 추상화함으로써 현실인식을 약화시켰을 뿐 아니라, 현실변혁의 욕구를 정신적 욕구로 순치시켰다. 이것이 마르쿠제가 말하는 문화의 ‘긍정적’ 성격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1964년에 미국에서 쓴 <일차원적 인간>에서는 완전히 바뀐다.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미국의 ‘일차원적’ 대중문화를 경험하면서 독일의 이상주의 문화를 재평가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차원적 인간>에서는 「문화의 긍정적 성격」에서와는 달리 이상주의적 문화가 지닌 초월성이 비판성의 모태로서 ‘구제’된다. 문화가 지닌 초월성을 통해서만 현실을 고정불변하는 세계, 실증적 세계로 보지 않고, 변화와 운동의 세계, 새로운 이상이 잉태되는 세계로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마르쿠제는 선진산업사회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는 우선 기술지배 사회에서 ‘고급문화’의 몰락을 목도한다. “기술합리성의 진보가 ‘고급문화’의 반항적, 초월적인 요소를 제거하였다. 사실 그것들은 현대사회의 선진 영역에서 지배적인 ‘탈승화’ 과정에 굴복한다.”25) 비판성을 상실하고 탈승화된 문화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 전락한다. “문화적 가치들은 일상적으로 관리되고 판매된다. 대중매체는 예술, 정치, 종교, 철학 등과 상업을 조화롭게 때로는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뒤섞으며, 이들 영역에서 상품이라는 공통점을 뽑아낸다. 영혼의 음악은 판매술의 음악이기도 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리 가치가 아니고 교환가치이다. 현상(status quo)의 합리성은 교환가치에 결집되고, 모든 다른 합리성은 그 지배 아래 놓인다.”26) 문화의 본질인 진리가치는 빛을 잃고, 그 대신 교환가치가 찬란하게 창궐한다.

 

교환가치로의 환원, 즉 상품화는 전면적이다. 심지어 정치적, 사회적 투쟁의 성과물도 상품화된다. 해방된 성도 예외가 아니다. “선진 산업문명은 성적 자유가 크게 확대됨으로써 기능하고 있다. 즉 이 자유가 시장가치가 되고 또한 사회적 습속이 된다는 의미에서 ‘기능한다’. 섹시한 여직원과 점원, 잘 생기고 건장한 젊은 지배인과 판매감독은 고도로 시장성이 높은 상품이다. 그리고 적당한 정부(情婦)를 갖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말단에 있는 사람의 출세를 돕기도 한다.”27)

 

이처럼 고급문화가 몰락하고, 문화 전반이 상품화되며, 성적 자유마저 시장에서 거래되는 사회에서 일상이 악몽의 이미지를 지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마르쿠제는 이오네스코의 도발적인 표현을 빌어 이런 정황을 적시하다. “강제수용소의 세계가 예외적으로 극악무도한 사회였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기서 본 것은, 우리가 실제로 매일 빠져드는 이 지옥같은 사회의 이미지이며,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정수였다.”28) 선진산업사회의 일상이 곧 아우슈비츠이다. 개인은 철저히 감시받고 관리된다. 개인의 의식과 욕망은 감독관의 의식과 욕망의 투사이다. 개인은 일차원적 사회라는 감옥에 갖힌 수인이다. 총체적으로 지배되는 사회에서 시행되는 개인에 대한 관리는 아우슈비츠 감독관들이 수감자들에게 행하던 감시를 능가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영혼과 욕망까지 관리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런 ‘지옥같은 사회’에서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을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영역은 예술이다. 예술에서만 총체적 지배의 현실에 대한 ‘위대한 거부’가 가능하다. 예술의 본질은 ‘부정’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부정의 합리성을 내포한다. 예술은 그 진보된 상태에서는 ‘위대한 거부’이다. 즉 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항의이다.”29) 마르쿠제가 문화 영역 중에서도 특히 예술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고, 말년에 예술론, 미학이론에 전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도된 언어

 

 

언어의 전도현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혹은 현실에서 빈번히 언어의 전도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그 사례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국가사회주의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치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사회주의자들을 강제수용소에 처넣은 일이라든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혹독하게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정의를 짓밟은 정당이 ‘민주정의당’이라는 이름을 당명으로 달았다든가, 노동자들을 생존의 벼랑으로 내모는 행위를 노동의 ‘유연화’라고 부른다든가 - 이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언어 전도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선진산업사회에서 이런 언어전도 현상이 갖는 새로운 점은 “이러한 거짓말들이 여론과 개인적 의견에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그 터무니없는 내용이 은폐되어 버린다는 점이다.”30)

 

이처럼 선진산업사회에서 전도된 언어가 횡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일차원적 사유방식이 2차원적 사유방식을 압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실증적 언어가 승리하고 변증법적 언어는 억압된다. “일차원적 태도와 행동”이 표현되는 커뮤니케이션 세계에서는 “2차원적 변증법적 사고방식과 기존 사회의 사고습관”이 대립된다. “마술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의식조작적인 요소가 말과 언어에 침투한다. 언어는 이성과 사실, 본질과 현상, 사물과 기능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동일화를 표현하고 촉진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다.”31) 이성과 본질과 사물을 추구하는 변증법적 언어 대신에 사실과 현상과 기능에 집착하는 실증적 언어가 승리한다. 이런 언어가 일차원적 태도와 행동의 토양을 이룬다.

 

나아가 언어는 기능주의에 포섭되어, 현실옹호의 수단으로 변질되어버린다. “만일 언어적 행동이 개념 전개를 저지하고 추상과 매개에 반대하고 직접적인 사실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사실의 배후에 있는 요소들의 인식을 거부하고, 그 역사적 내용의 인식도 배척하게 된다”.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기능적 언어를 조직한다.” “통합적, 기능적인 언어는 완전히 무비판적, 비변증법적 언어이다. 거기서는 조작적, 행태주의적 합리성이 이성의 초월적, 부정적, 비판적 요소를 흡수해버린다.”32)

 

기능적 언어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그 반역사성에 있다. “기능적 언어는 근본적으로 반역사적 언어”이다. 기능적 언어의 반역사성은 기억을 억압함으로써 기존질서를 안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과거의 기억은 위험한 통찰을 낳을지도 모르고, 기성사회는 기억에 있는 파괴적 내용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기억이란 주어진 사실의 전능한 힘을 파괴하는 ‘매개’의 일종”33)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학문에 전형적인 기능주의적 언어는 분석대상을 그 역사적 맥락에서 유리시키고, 운동의 관점을 배제한 채,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정태적 분석에 머물기 때문에, 역사적 해방의 전망을 선취하기 어렵다. 현상 자체만 보고 그것의 관계성, 역동성, 시간성을 보지 않은 채, 현실을 고정불변의 절대적 상황으로 인식할 때 해방의 전망은 열리지 않는다. 미국학문의 기능주의적 언어는 독일학문의 변증법적 언어와 확연히 대비된다. 기능주의적 언어는 실증주의적이고 행태주의적인 미국 학풍의 토대를 이루는데, 문제는 기능주의적 언어가 근본적으로 반역사적 언어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현실옹호의 언어로 전락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개념적 언어가 소멸하면서 그 자리를 이미지의 언어가 차지하는 현상도 일차원적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언어에 의한 통제는 반성, 추상, 전개, 모순 등의 언어적 형식과 상징을 축소하고, 이미지를 개념의 대용으로 삼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것은 초월적인 어휘를 부정하거나 흡수하고, 진리와 허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확립하고 부과한다.”34) 이미지의 언어는 ‘마술적, 의식조작적 언어’로서 진실에 근거하지 않지만, 무관심과 습관에 기대어 확산된다.

 


 

조작된 의식

 

 

탈승화된 문화 속에서 전도된 언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개인의 의식은 조작된다. 개인은 반성적 사유 없이 자신의 언어기관을 통해 ‘타인의 언어’를 실어나르는 존재로 전락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는데, 동시에 그것은 그들의 주인, 보호자, 충고자의 언어로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자신’, 자기의 지식, 감정, 소망을 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표현한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은 실상 “매스미디어가 그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고, 이것은 그들이 실제로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과 하나로 통합된다.”35) 매체에 대한 반복적인 접촉과정에서 개인의 의식은 지속적으로 조작된다. 이는 개인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매체에 의한 언어조작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개인의 실존적 운명은 아니다. 그것은 지배권력에 의해 ‘조성된’ 환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우리의 애증, 우울과 분노를 전하고자 할 때, 광고, 영화, 정치가, 베스트셀러 등이 사용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동차, 식료품, 가구, 동료, 경쟁자에 대해 말할 때에도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완전히 이해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그들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사유와 실천의 세계가 조작된 모순의 세계이기 때문이다.”36)


매체에 의한 조작이 반복되어 개인의 허위의식을 형성하고, 나아가 허위욕망을 부추기면 본질과 현상 사이에 조작된 관계가 형성된다. 개인은 권력에 의해 조작된 구호를 진리의 이름으로 수용하고, 자신을 희생한다. 조작된 의식의 결과로서 개인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프랑스와 페루는 탁월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계급을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정당을 위해 죽는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기업가를 위해 죽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배당금의 자유를 위해 죽는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그 관료제를 위해 죽는다. 그들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죽는다고 믿지만 국가를 지탱하는 돈을 위해 죽는다. 그들은 국민을 위해 죽는다고 믿지만 국민에게 재갈을 물리는 악당들을 위해 죽는다.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왜 사람은 이토록 깊은 암흑을 믿는가? 믿는다, 그리고 죽는다. 사는 것을 배워야할 때는 언제인가?”37)


전면적인 의식조작이 지속되는 한 해방의 가능성은 그 단초에서부터 차단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노예상태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자유의 상태라고 환상하는 개인에게 과연 해방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겠는가. “관리되고 있는 개개인, 즉 자기들의 불구성을 자신들의 자유와 만족으로 느끼고, 불구성을 재생산하는 개개인이 어떻게 자기 자신과 그 주인들로부터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가?”38)

 

 


2.1.2. 해방의 전망

 


 

이 암담한 상황에서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개인이 해방을 희망할 수 있는 여지는 남아있는가. 마르쿠제는 이러한 물음에 절망적인 대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그러나 해방의 전망을 갖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노예상태를 자각하는 것이다. “모든 해방의 전제는 노예상태를 자각하는데 기초하고 있고, 이 자각은 이미 대부분이 개인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욕구와 만족의 지배적인 힘이 우세하기 때문에 방해를 받는다. 해방의 최고 목표는 허위 욕구를 참된 욕구로 바꾸는 것이며, 억압적인 만족을 폐기하는 것이다.”39) 총체적 지배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노예상태를 자각할 수 없다. 타자의 언어로 말하고, 타자의 의지로 행동하며, 타자의 감정으로 욕망하면서도 스스로는 자유롭고 자율적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해방의 전제인 노예상태의 자각은 끊임없는 회의와 성찰이 필요한 지난한 작업이다.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계명을 철저히 실천하지 않는 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르쿠제는 개인의 결단과 성찰에 의한 자각에만 희망을 걸지는 않는다. 그는 진정한 자유의 세계가 가능하려면, ‘자유에의 강요’가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의 왕국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점에서 마르쿠제는 플라톤에서 루소로 이어지는 ‘교육독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확실히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 있기 전에 우선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자유의 물질적 전제를 창출해내야 하고, 개인의 자유롭게 발달하는 욕구에 따라 부를 ‘분배’할 수 있게 되기 전에 우선 부를 창출해야 한다. 또한 사회는 노예가 현재 진행 중인 사태와 그 변혁을 위해 스스로 행할 수 있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 전에, 우선 노예가 배우고 보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노예가 노예로서 생존하고, 그 역할에 만족하도록 미리 조건지어진 정도에 따라, 그들의 해방은 외부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시행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자유롭도록 강요’되어야 하고, ‘대상을 사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때로는 마땅히 봐야할 모습으로 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40)


‘자유에의 강요’는 마르쿠제가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사회에서 개인이 각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유일한 길로서 제시하는 대안이다. 총체적 지배에 틈을 만드는 것, 해방의 공간을 만드는 것은 결국 계몽의 전통, 이성의 권능을 복원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의 추진세력으로서 사회변혁의 주체는 사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마르쿠제는 기본적으로 회의적이다. 총체적 지배의 세계에서 어느 틈바구니에 그런 세력이 성장할 수 있겠는가. 개인이 총체적으로 관리되는 현대의 상황에서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듯이 경제적 토대의 변화가 자동적으로 변혁의 중심세력을 형성시켜주지는 않는다. 토대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해도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가 의식조작, 욕망조작을 통해 변혁의 의지를 원천봉쇄해버린다면 어떻게 변혁주체가 형성될 수 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현대의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발전의 내적 필연으로서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할 수 없다. 마르쿠제는 이러한 상황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변혁주체의 문제에 있어 애매한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변혁주체는 변혁과정 자체가 만들어낸다. “혁명의 주체는 변혁과정 자체에서 바로소 발전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적 실천, 의식의 발전, 행동의 전개 가운데 형성된다.”41) 총제적 지배를 파괴할 변혁주체는 총체적 지배에서 벗어나있는 어떤 틈, 어떤 외부가 아니면 형성될 수 없다. 그가 총체적 지배에 포섭되지 않은 사회의 타자, 국외자들을 변혁의 주체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보수적인 민중의 기반 아래에 있는 추방자와 국외자, 종족과 피부색이 다른 착취당하고 박해당하는 사람들, 실업자와 일할 수 없는 자들”, 즉 “민주주의적 과정의 밖에 존재”하는 자들만이 “혁명적”이다. “그들이 게임을 거부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한 시대의 종언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사실일 수도 있다.”42)

 

이것이 1964년의 상황에 대한 마르쿠제의 진단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그후 68혁명을 경험하면서 변화된다. 학생혁명의 이상주의적 열정과 정치적 파괴력을 보면서 사회변혁의 현실적 가능성에 좀더 많은 기대를 걸게 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또한 변혁주체에 대한 관점도 변화시킨다. 이제 노예상태를 자각하고 변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세력은 사회적 소수자나 국외자가 아니라 젊은 지식인이다. 그가 학생운동에 커다란 기대를 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일차원적 인간������을 쓰던 당시만 해도 마르쿠제는 변혁의 가능성에 대해 아직 ‘절망적인 희망’을 갖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결국 해방을 이루지는 못할지라도 노예상태를 자각한 사람은 이 체제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는 ‘위대한 거부’의 권유로 결어를 맺는다.

 


 

2.2. 새로운 감수성

 


 

2.2.1. 새로운 감수성

 


 

1964년에 쓴 <일차원적 인간>이 암울한 결론으로 끝을 맺고 있다면, 1969년에 나온 「새로운 감수성」43)은 사회변혁의 가능성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가 느껴지는 글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는 1968년의 ‘세계혁명’이었다.

 

마르쿠제는 젊은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에서 총체적 지배를 타파하고 자유의 왕국을 건설할 맹아를 본다.


“새로운 감수성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극복했기 때문에 더 이상 자신들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감수성이 될 것이다. 그들은 아우슈비츠와 베트남, 모든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재판소와 심문소의 고문실, 빈민가, 기업체의 기념비적 사원들을 만들어서 수용하고 망각해버린, 그리고 이 현실의 고급문화들을 숭배해온 그들의 위선적인 부모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지 말 것을 배워왔다.”44)


「새로운 감수성」에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구제했던 고급문화, 즉 전통적인 이상주의 문화가 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문화의 긍정적 성격」 이후 독일의 이상주의 문화는 비판-구제-비판의 순환을 겪게 되는 셈이다. 그가 이상주의 문화를 비판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그것이 근본적인 변혁의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고급문화의 초월성에 내재된 비판성은 구제하지만, 고급문화에 배어 있는 현실도피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측면을 문제삼고, 고급문화에 물든 ‘위선적인 부모들’과는 다른 ‘죄 없는 세대의’ 감수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새로운 감수성이란 새로운 혁명적인 세대의 감수성일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고급문화에 대한 대안적인 감수성이다. “기성문화에 대한 오늘날의 반란들은 그 문화 속에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반란, 즉 그것의 너무나 승화되고 분리되고 질서있고 조화로운 형식들에 대한 반란이기도 하다.”45) 새로운 감수성은 ‘고급문화’에 대한 반란이며, 그 추진세력은 전통적 문화의 외부에서 소외되어온 사회집단이다. 마르쿠제는 새로운 감수성을 전유함으로써 의식, 무의식, 욕망에 대한 총체적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요청되는 것은 바로 ‘심리혁명’이다. “인류의 역사를 지배와 예속의 역사로 만들어온 원인들”은 물론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것들”이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욕구와 본능까지도 형성시켜왔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 경제적 변화도 그것이 폭력과 착취의 맥락 밖에서 심리학적으로 수행되지 않는 한,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인간과 사물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되지 않는 한, 역사적 연속체의 단절을 이룩하지는 못할 것이다.”46) 역사적으로 연속되어온 기존의 지배방식, 전통이란 이름으로 의식, 무의식에 주입된 것들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심리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감수성은 나아가 기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태도도 변화시킨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아버지 세대’의 권위주의적 정치행태를 따르지 않는다. 새로운 감수성은 신좌파의 반권위주의적 기본정서로 이어진다.


“젊은이들은 사회주의 진영의 ‘심각한 정신’을 공격한다. 미니스커트는 제복에 대한 반발이며, 록뮤직은 소비에트 사실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사회주의는 경쾌하고, 멋지고, 유쾌할 수 있어야 하고, 반드시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런 것들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적인 요소라고 주장한다. 상상력이 지닌 합리성에 대한 신념, 새로운 도덕성과 문화에 대한 욕구, 이런 위대한 반권위주의적 저항은 급진적 변화의 새로운 방향과 차원, 그 변화의 새로운 수행자들의 출현, 그리고 이미 존재하는 사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주의의 새로운 전망 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47)


마르쿠제는 새로운 감수성이 촉발할 상상력, 새로운 문화, 반권위주의가 진정한 사회주의의 전망을 열어주리라 기대한다. 그럼 이 새로운 감수성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가. 마르쿠제는 새로운 감수성의 원천을 ‘미적 상상력’에서 찾는다. “더 이상 시장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그리고 더 이상 경쟁적 착취와 공포에 기초하지 않는 인간관계의 세계는 부자유스러운 사회에서의 억압적인 만족에서 해방된 감수성을 요구한다. 그 감수성은 현실의 양식과 형식에 민감한 것으로서 오직 미적 상상력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다.”48) ‘위대한 거부’의 형식이었던 미적 상상력은 이제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수단이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마르쿠제가 미라는 범주를 정치적 해방의 요소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태도는 미학을 일종의 정치 프로그램으로 이해한 쉴러의 ‘미적 교육론’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감수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쿠제가 마약을 통한 ‘환각’을 지각혁명의 한 형식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반란자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한다. 그들은 해방을 통상적이고 규칙적인 지각의 해체와 연결시키고 있다. ‘환각상태’는 기성사회에 의해서 형성된 자아의 해체를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일시적이고 인공적인 해체이다. 그러나 인공적이고 ‘사적인’ 이러한 자아의 해체는 비록 왜곡된 방법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해방의 급박함을 표현하는 것이다. 혁명은 새로운 미적 환경을 창조함으로써 사회를 지적으로 물질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지각의 혁명이어야만 한다.”49)


마르쿠제는 68혁명 당시 히피들 사이에 유행한 마리화나와 엘에스디 복용을 기존의 지각방식의 해체를 통한 새로운 지각방식의 습득과정으로 본다. 환각상태의 체험은 ‘왜곡된 방식’이긴 하지만 기성자아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자아의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고, 이 새로운 지각방식과 새로운 자아가 새로운 감수성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2.2.2. 해방적 상상력

 


 

새로운 감수성의 원천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은 총체적 지배의 현실을 자각하고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다. 마르쿠제는 상상력이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를 몰고올 것이라고 기대한다. “상상력의 힘은 도구적 이성의 독재와 그 도구적 이성의 실현에 의해서 불구가 된 감각경험 사이에서 억압되어 왔다. 상상력은 짧은 위대한 역사적 혁명 기간에만 해방되어, 새로운 도덕 체계와 자유의 새로운 질서들을 그릴 수 있었다. 만일 오늘날의 젊은 지식인들의 저항 속에서 상상력의 권리와 진실이 정치적 행동에의 요구가 된다면, 이 발전은 상황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50) 상상력은 해방의 전망을 열어주는 심리적 상태로서 상상력의 권리를 복원해야만 근본적인 사회변혁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상상력을 권좌에’가 68학생혁명의 핵심구호가 되고, 이 분위기 속에서 존 레넌의 ‘이매진’이 나온 것은 마르쿠제가 68혁명에 미친 영향의 정도를 가늠케 한다.

 

나아가 상상력은 새로운 감수성과 급진적 이성의 매개체가 된다. “이제 감수성과 이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에 대한 전망, 즉 감수성과 급진적 이성 사이의 조화가 억압적 이성의 힘과 한계를 넘어서 나타난다. 그러나 감수성은 지배의 합리성에 의해서 형성되고 보급되기보다는 합리적 능력과 감각적 욕구들을 매개해주는 상상력에 의해 인도될 것이다.”51) 마르쿠제는 여기서 독일미학의 전통적인 도식, 즉 감성과 이성을 매개해주는 것은 미적 상상력이라는 도식을 따르고 있다. 미적 상상력, 미적 감수성, 사태에 대한 새로운 지각능력, 심리적인 변화 - 이처럼 마르쿠제가 미적, 심리적 현상들을 중시하는 것은 총체적 지배에 의한 ‘내적 차원’의 불구화가 혁명부재의 근본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3. 결론: 과학에서 유토피아로

 


 

선진산업사회는 혁명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된 사회이다. “자유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가동시킬 수 있는 모든 물질적 정신적 힘은 이미 우리 가까이 와 있는”52)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부재한 이유는 “변혁을 위한 욕구의 결여나 억압” 때문이다. “선진 자본주의국가에서 노동계급은 더 이상 현존하는 욕구의 부정을 대변하지 않는”53) 것이다. 노동계급이 ‘현존하는 욕구’의 노예로 전락한 상황에서 요구되는 것은 주체의 각성, 즉 의식혁명이다.


“나는 주관적 요소에 대한 재평가와 규정이야말로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물질적, 기술적, 과학적 생산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 할수록, 이렇게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들에 대한 의식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책임이 더욱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이들 가능성에 반하는 의식의 주입이 현 사회의 특징적인 상황인 동시에 주관적 요소이기 때문이다.”54)


일체의 억압에서 해방된 ‘자유의 왕국’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의식을 둘러싼 공방이 현대의 사회적 투쟁의 핵심적 국면이다. 이처럼 ‘유토피아의 가능성에 대한 의식’이 문제인 까닭에 마르쿠제는 과학적 합리성의 지배 아래 압사한 유토피아의 정신을 복원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회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가 아니라, 과학에서 유토피아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55)


마르크스의 시대에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것이 진보적 의식의 징표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것은 과학적 냉철함보다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열정이다. 혁명의 부재는 과학적 분석능력의 부족에서 연유하는 게 아니라, 유토피아 정신의 결여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육체, 정신, 의식, 무의식, 영혼, 욕망까지도 전면적으로 관리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이 상실하고 있는 유토피아의 꿈, ‘해방적 상상력’을 복원해야만 해방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다. 마르쿠제는 바로 이 지점, 유토피아의 현실적 가능성을 현대의 어느 사상가보다도 분명한 언어로, 또 뜨거운 가슴으로 역설했다. 총체적 지배에 의해 노예상태에 처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것을 변혁하고자 하는 욕망마저 거세되어 버린 현대의 상황에서 과학에서 유토피아로 가야한다는 마르쿠제의 말은 ‘해방 무기력증’에 빠진 우리들에게 더욱 무거운 울림으로 다가온다.

 



 1)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 (Hrsg.): Kritik und Utopie im Werk von Herbert Marcuse, Frankfurt a.M. 1992, S. 9.


 2) Vgl. Wolfgang Kraushaar: Herbert Maucuse und das lebensweltliche Aporie der Revolte, in: Ders. (Hrsg.): Frankfurter Schule und Studentenbewegung. Von der Flaschenpost zum Molotowcocktail 1946 bis 1995, Band 3, Hamburg 1998, S. 196-199.


 3) 허버트 마르쿠제:������혁명이냐 개혁이냐. 마르쿠제, 포퍼 논쟁������ (홍윤기 편역), 사계절출판사 1982, 120쪽. 독일어 원문과 대조하여 표현을 일부 손질하였다.


 4) 앞의 책, 19쪽.


 5) 앞의 책, 27쪽.


 6) 마르쿠제에 있어 ‘문화’ 개념은 사회연구의 주요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광의의 개념이다. 문화란 “사회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정신의 의미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총체적 사회생활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즉 문화는 “정신적 재생산의 영역(협의의 문화)과 물질적 재생산의 영역(문명)이 역사적으로 구별이 가능하면서도 의미있는 동일체를 형성해왔음을 보여준다.” (마르쿠제: 「변증법적 범주로서의 문화」, <미학과 문화> (허버트 마르쿠제, 이근영 역), 범우사 1999, 15쪽.)


 7) 허버트 마르쿠제 (박병진 옮김): <일차원적 인간. 선진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연구>, 한마음사 2003, 13쪽. 독일어 원본과 대조하여 표현을 일부 손질하였다.


 8) 허버트 마르쿠제:<혁명이냐 개혁이냐>, 같은 책, 85쪽.


 9) 마르쿠제가 여기서 ‘전체주의’ 개념을 역사적 개념이 아니라 유형적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10) 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21쪽.


11) 앞의 책, 24쪽.


12) 앞의 책, 27-28쪽.


13) 앞의 책, 31쪽.


14) 앞의 책, 34쪽.


15) 앞의 책, 28쪽.


16) 앞의 책, 30쪽


17) 앞의 책, 171쪽.


18) 앞의 책, 173쪽.


19) 앞의 책, 175쪽.


20) 허버트 마르쿠제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 나남출판 1999, 52쪽.


21) 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189쪽.


22) 앞의 책, 190쪽.


23) Wolfgang Kraushaar: a.a.O., S. 200.


24) 독일어로 문화Kultur는 대체로 고급문화와 동의어로 쓰인다. 마르쿠제도 이 책에서 이런 보편적인 어법을 따르고 있다.


25) 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78쪽.


26) 앞의 책, 79쪽.


27) 앞의 책, 98쪽.


28) E. 이오네스코: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104쪽에서 재인용.


29) 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86쪽.


30) 앞의 책, 113쪽.


31) 앞의 책, 109-110쪽.


32) 앞의 책, 121쪽.


33) 앞의 책, 124쪽.


34) 앞의 책, 129쪽.


35) 앞의 책, 228쪽.


36) 앞의 책, 228쪽.


37) Francois Perroux: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241쪽에서 재인용.


38) 앞의 책, 288쪽.


39) 앞의 책, 26쪽. “정치투쟁의 장은 내 자시의 마음 속에 있다”는 독일 68운동의 지도자 루디 두치케의 말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40) 앞의 책, 62쪽.


41) 허버트 마르쿠제: <혁명이냐 개혁이냐>, 같은 책, 31쪽.


42) 허버트 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같은 책, 294쪽.


43) 크라우스하르에 따르면 ‘새로운 감수성’, ‘위대한 거부’, ‘질적 도약’, ‘지금 여기에의 충동’ 등 마르쿠제의 주체범주에서 나온 개념들은 선험적, 초월적인 전제를 배제하고 구체적인 개인을 중심에 두는 후설의 현상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Vgl. Wolfgang Kraushaar: a.a.O., S. 203.)


44) 허버트 마르쿠제: 「새로운 감수성」, <미학과 문화>, 같은 책, 176쪽.


45) 앞의 책, 199쪽.


46) 앞의 책, 176쪽.


47) 앞의 책, 178쪽.


48) 앞의 책, 179쪽.


49) 앞의 책, 189쪽.


50) 앞의 책, 181쪽.


51) 앞의 책, 182쪽.


52) 허버트 마르쿠제: <혁명이냐 개혁이냐>, 같은 책, 72쪽.


53) 앞의 책, 81쪽.


54) 앞의 책, 86쪽.


55) 앞의 책, 70쪽.


 

 

참고 문헌


허버트 마르쿠제 (박병진 역): <일차원적 인간. 선진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 연구>, 한마음사 2003.

허버트 마르쿠제 (이근영 역): <미학과 문화>, 범우사 1999.

허버트 마르쿠제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프로이트 이론의 철학적 연구>, 나남출판 1999.

허버트 마르쿠제 (유호종 역): <위대한 거부>, 광민사 1980.

홍윤기 편역: <혁명이냐 개혁이냐. 마르쿠제 포퍼 논쟁>, 사계절출판사 1982.

김문환 편역: <마르쿠제 미학사상>, 문예출판사 1992.

Marcuse, Herbert: Der eindimensionale Mensch. Studien zur Ideologie der fortgeschrittenen Industriegesellschaft, Herbert Marcuse Schriften Band 7, Frankfurt a.M. 1989.

Institut für Sozialforschung (Hrsg.): Kritik und Utopie im Werk von Herbert Marcuse, Frankfurt a.M. 1992.

Kraushaar, Wolfgang: Herbert Marcuse und das lebensweltliche Aporie der Revolte, in: Ders. (Hrsg.): Frankfurter Schule und Studentenbewegung. Von der Flaschenpost zum Molotowcocktail. 1946 bis 1995, Band 3. Aufsätze und Register, Hamburg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