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론/문화의 이론들

김동훈 - 타자

ddolappa 2008. 6. 23. 21:52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타자 (他者)

 

 

김동훈


I. 들어가는 글


20세기 들어 인류는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자신의 잔인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계몽주의 이래 서구인들을 사로잡았던 이념 중 하나는, 인간이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면 인류는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모두가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유토피아가 절대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매우 낙관적인 견해였다. 하지만 이런 믿음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특히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 전쟁은 인간이 이성을 주도면밀하게 사용하여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예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예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행해졌던 유태인 학살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잔인한 일들은 오늘날도 여기저기서 계속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비판자 중 하나인 아도르노는 이런 일이 계몽 자체의 내면에 숨어 있었을 뿐인 가능성의 발현이라고 말한다. 칸트의 계몽의 개념을 그는 사디즘의 주창자로 알려진 사드의 이론과 연결시키면서 철저한 동일성의 원리에 따르는 개별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자세히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가 결국에는 홀로코스트를 부르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이 유태인 학살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자. 2000년에 걸친 유태인의 방랑과 그에 얽힌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수많은 문제들, 한 마디로 줄여서 반유태주의의 문제들에 대해서 여기서 자세히 논할 기회는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유럽의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가 되었던 유태인들의 이질성이었다.


유태인들은 비록 자신들의 나라를 잃어버리고 유럽과 아랍 지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았지만 자신들이 살고 있던 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로 개종하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몸을 담고 있던 사회의 규범이나 관습에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 외에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했다.


기독교에서 구세주로 경배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민족이라는 종교적인 원한 외에도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유태인들의 문제는 ‘다름’의 문제였다. 필자가 프랑스에 유학하던 시절, 어학수업 중에 만난 한 리투아니아 학생의 말은 이 문제가 아직도 진행형임을 말해주는 좋은 예이다:


“나는 유태인들을 싫어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키는 것 까지는 내가 뭐라 말할 수 없겠지만, 그들은 내가 보기에는 자신들을 절대로 리투아니아 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사회적 관습의 문제나, 심지어는 자신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그들은 리투아니아의 국익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행동한다. 그래서 많은 리투아니아 인들은 유태인들이 이방인으로 우리 곁에 있으면서 우리들과 더불어 살기 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는 데 급급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태인 문제가 이 하나의 예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그리고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당연히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도덕적 만행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생존의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면 될 수록 다툼과 반목의 조건이 줄어들 것이라는 희망은 착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그것이 평화와 상호공존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는 있겠지만 결코 충분조건이 아님은 역사를 통해 검증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다른 영역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결되어져야 한다. 오늘 우리가 타자라는 개념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시도의 한 부분을 이룬다. 오늘 타자라는 개념을 살피면서 필자는 이 개념을 통해서 현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시도를 처음부터 포기한다.


그 이유는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현대사회에서 논의되는 순간, 그 논의 자체가 이러한 총체성을 거부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는 우리가 이 개념을 다루면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 말해두자면, 이러한 시도는 체계와 통일성이라는 범주들이 가지고 있는 은폐된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그것으로부터의 거리두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비인간적 만행과 압제, 테러와 전쟁을 해결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II. 몸 글


1. 타자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와 관습 중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환난상휼 (患難相恤) 이라는 덕목이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공동체적 의식을 나누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우리에게 남겨진 매우 중요한 자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상처들을 함께 극복하려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또 필자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개인주의의 차가움과 그들, 특히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고독은 필자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하게 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 사회가 그렇게 살기 좋은 사회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원정출산이나, 어떤 홈쇼핑에서 경품으로 제시한 이민 패키지에 보여준 많은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 자녀들 교육을 위해서 수없이 떠나는 이른 바 교육이민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를 꼭 그 안에서 살고 싶은 사회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는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왜 그런가? 정치적인 큰 문제들이나 불황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를 먼저 거론할 사람도 있겠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그것은 필요조건에 대한 이야기들일 뿐 충분조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부의 기준을 놓고 보면 미국이나 유럽 여러나라가 우리보다 조건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순전히 경제적인 장래의 가능성만 놓고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보다 훨씬 높은 실업율과 낮은 경제 성장률, 인종차별 등등, 적어도 외면적으로는 그렇게 끌릴 이유들이 없다.


그리고 외국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만나 구체적인 이유들을 들어보면 이런 문제들보다는 다른 문제들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금새 깨닫게 된다. 교육이민의 예를 들어보자. 누구나 여기서 예를 들게 되는 건 과중한 사교육비의 부담이다. 그것은 물론 공교육의 질에 대한 불신을 의미한다. 이 문제는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왜 이 문제가 고쳐지지 않고 있는가?


필자는 그 원인들 중에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공동체 의식과 공동체 문화라고 생각한다. 남들이 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고립되고 뒤쳐지는 것 같고……. 그리고 몇몇 사람들은 그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그 남’ 들이 없는 곳에 가면 찾아지리라는 희망, ‘또 다른 남’ 들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곳에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외에도 우리가 겪는 잘못된 공동체 문화의 예는 매우 다양하다. 내가 하기 싫거나 심지어는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녀야 되는 음주 문화, 타인들에게서 소외되고 여러 관계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여러 행사에 참여해야 하고 자신의 삶의 성공의 척도를 그런 관계에 있어서의 질적 양적인 성공과 결부시켜야 하는 우리의 모습도 그 예 중 하나이다.


또 다른 예는 남들도 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도 세상을 속이고 나를 속여야 한다는 논리이다. 부정부패가 우리 사회의 큰 악인 줄 누구나 알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건 이러한 남들로부터의 소외나 따돌림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누구나 한 번 쯤은 그렇게 이야기해 본 적이 있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이런 예들은 세세한 부분에서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런 예들에서 남들은 우리를 명시적, 암묵적으로 억압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나 현실적인 가능성과는 아무 상관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타인으로서의 우리’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예이다.


이제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인들은 우리 의식이 참 강하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들만큼 이합집산이 빠르고 어제의 동지가 쉽게 적이 되는 민족도 그리 흔하지 않을 듯싶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뒤집으면 거기에는 ‘네가 남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나의 적’이라는 논리가 강하게 깔려 있다.


여기서는 건전한 상호비판과 협력이라는 명제보다는 어떻게든 상대편을 이겨야 하고 그것도 항상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럴 경우 우리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남은 타도 내지는 배제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정치사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너무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 한편 우리는 남에 대한 태도로, 무관심 아니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필요한 만큼만 인정하고 다른 부분은 남의 존재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 경우,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크게는 남북한 교류의 문제일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 남한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작은 부분들을 살펴보면 또 다른 문제들이 여기저기 산적해 있음을 볼 수 있다. 대기업 강성노조 때문에 경제가 점점 어렵게 된다는 아우성 속에 저임금에 시달리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더욱 소외감 속에 시달리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대학교수 월급보다 많다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들이 일간 신문 경제면을 장식하는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실업자가 되고,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무관심, 그것은 우리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형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문제는 단지 소외당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사회의 도처에 있는 소외받는 이들, 장애인, 노인, 고아, 부랑인, 최저 생계비 이하의 소득층인 빈민, 동성연애자, 마약중독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이웃들의 문제이다.


이상의 예들에서 나타난 타자의 문제를 다시 모아 보자면,

1) 하나는 억압으로 다가오는 우리로서의 남의 문제이다.

2)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이들, 즉 남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우리의 증오와 배제의 논리이다.

3) 셋째는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거나 저항할 힘이 없어 보이는 남에게 우리가 행하는 착취 내지는 무관심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타자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을 새겨 보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자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여러 가지 문제를 조명하고 해결의 시도를 도와 줄 착상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2. 타자의 의미 변천에 관한 철학사적 고찰

(1) 철학에서 타자 개념의 위치: 우선 말해두어야 할 일은 철학에서 타자 개념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오늘 강조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실제로 다루면서 타자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는 건 사실은 1,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철학에서는 타자의 개념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개념적 도구였기 보다는 전통철학에서 생각하는 다른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데 필요한 보조 개념에 불과했다.


그 이유는 서구철학의 전통에 뿌리깊이 박혀있는 실체 중심적 사고 때문이다. 고정불변 하는 영원한 진리의 담지자로서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플라톤 이후 서구철학을 이끌어 온 중심 과제였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은 항상 자기 동일성, 본질, 실체와 같은 개념들이었다. 타자는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극복되어지고 이러한 동일성 속으로 포섭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것은 데카르트 이후 등장한 근대의 주체성의 철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동일성의 원리를 충족시켜서 철학의 근본 원리로 작용하는 개념/이념으로, 그 이전의 신이나 순수 존재 ens purum/순수 활동 actus purus 대신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자아 (res cogitans, 칸트의 경우 선험적 자아 das transzendentale Subjekt)를 내세웠다는 면에서 근대철학은 그 이전의 철학과는 차별성을 지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영원불변하는 그 무엇, 적어도 사고와 학문의 출발점으로서 굳건한 토대로 기능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는 그 이전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타자 개념의 지위가 바뀌게 되는 것은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실망과 좌절, 자아내지는 주체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의 출현 때문이다. 그 철학적 단초를 깊은 이론적 통찰을 통해서 제공하게 되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 정권 출범 당시 나치에 협력하고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나치 당원으로 머물러 있었던 하이데거에게서 나타난다.


그 후 그가 제공한 이러한 이론적 단초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그를 비판하고 타자의 개념을 전면으로 내세우며 철학적 논의를 진행시킨 철학자들로는 아도르노, 레비나스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이들의 이론을 자세하게 논하는 것이 지면과 시간 관계상 불가능하기에 우선은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에 관해서 필요한 경우에 한해서 이들의 사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들의 이러한 사상이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나타나거나 단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성으로서만 등장한 것은 아니기에 그 이전의 철학사에서 이들에게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던 몇몇 철학자의 사상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플라톤의 타자 (to heteron)에서 헤겔의 부정성 (Negativität)까지: 전통적인 철학에 있어서의 타자 개념


1)플라톤과 타자: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 소피스트에서 타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미 밝혔듯이 이 문제 자체의 해결이 그에게 있어 중심과제는 아니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진정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 소피스트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거짓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이었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표는 진정한 진리, 이데아의 세계에의 도달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진리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비 진리의 존재였다. 과연 비 진리가 존재할 수 있는가?


소피스트들은 비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들이라고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생각했다. 물론 플라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 진리를 이야기하는 이들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다루면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을 수 없으며 없는 것은 없고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거짓을 이야기한다. 즉, 없는 것을 있다고 이야기한다. 없는 것은 없고 있을 수 없다면 과연 이렇게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학문적으로 가능한가?”


그렇다. 일상생활에서 그들이 거짓말을 설파하고 다니는 것은 미망의 세계인 현실의 문제이지만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그러한 미망을 벗어나 순수한 이성적 인식에 도달하고자 하는 학문의 영역에서 과연 이러한 비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긴 논의를 여기서 다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을 말하자면 우리가 ‘비’ (아니다)라는 단어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꼭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원천적으로 말할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함으로써 학문적인 영역에서의 비진리가 생겨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따라서 소피스트들도 이런 면에서 정의가 가능해지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에서는 어차피 기독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절대)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라는 개념이 없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으며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절대 무라는 개념은 ‘절대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러한 존재 개념이 단순히 물질적인 실재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이 지향한 이데아의 세계가 우리가 접하는 현실세계와는 다르고, 오히려 현실세계가 미망의 세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존재한다는 말은 우리의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제한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존재라는 개념이 어떤 의미에서 사용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보거나 듣고, 만질 수 없는 것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존재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의문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물음이다. 우선 생각될 수 있는 대답은 정신적인 존재방식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수학이나 물리학의 개념들이라든지,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들 수 있다. 이것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우리가 그 개념들이나 단어들을 사용하기 전에는 물리적 현상의 틀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지도 않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우선은 간단하나마 이렇게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존재 개념에 대해 생길 수 있는 오해를 일단 막는 일은 앞으로의 논의를 통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철학적인 논의를 하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사용하는 개념들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대화에 임할 때가 있으니까.


이제는 플라톤의 이 같은 생각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다르다는 말은 이미 그것이 그 차이의 대상이 될 무엇을 전제로 한다. 무언가가 홀로 생각되어질 때 다르다는 말을 사용하는 적은 없다. 무언가에 대해 다르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다름의 대상이 되는 다른 무언가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다. 더 깊이 사고한다면, 다르다는 말은 이미 관계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 생각을 진전시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에 이르게 된다: “과연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서 안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도대체 다른 것과의 아무런 관련 없이 자기 스스로 만으로 정의되고 인식되어질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시도는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긍정 아니면 부정으로.


2) 칸트의 이원론적 타자: 위의 물음에 긍정으로 답한 대표적인 철학자로 우리는 칸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적어도 선험적 자아는 다른 어떤 것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해야 하며 모든 경험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오성적 인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또 그와는 정반대 측면에서 이러한 인간의 인식의 자료를 제공해 주는 물자체도 스스로 존재해야 한다. 이 둘 사이에는 물자체가 우리의 감각 능력을 촉발시킨다 (affizieren) 는 사후 관계 설정만이 가능하다. 물자체는 선험적 자아의 본질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며 선험적 자아도 물자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칸트에게 있어서 선험적 자아와 물자체는 절대적인 타자이다. 그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관계란 존재할 수가 없다. 오로지 촉발을 통한 사후적인 관계맺음이 있을 뿐이다. 들어가는 글에서 언급된 아도르노의 비판은 이러한 칸트 철학의 내용이 문화적 현상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난 데 대한 비판이다.


칸트에게 있어서는 어디서나 자기 동일성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으며 이러한 자기 동일성은 모든 차이를 무시하고 획일화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모든 개별적 주체는 선험적 자아의 자기동일성으로 귀일되어지고 주체의 그 외의 다른 영역들은 그 속에 포섭되어진다.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물자체로서 일차적으로 독립성을 지니긴 하지만 자아는 그러한 물자체 자신과의 관련 속에서 물자체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드러나는 현상으로서만 관련을 맺고 이러한 현상들을 자신의 자기 동일성의 논리에 포섭시킨다. 이것이 정치적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면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되고 그 극단적인 현상이 2차 세계 대전을 통해서 나타난 유태인 학살이라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도르노가 비판하고 있는 문화산업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획일화와 통제의 원리이다. 기계화와 자동화를 통하여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한편으로는 가장 중요한 노동의 일상에서 다른 노동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단조로운 분업노동을 통해서 각 개인은 파편화되고 획일화되어 간다. 다른 한 편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는 이러한 분업 노동의 결과로 공급되어지는 생산물에 대해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대로 순응하여 소비행위를 해야 한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파편화되면 될 수록 인간들의 삶은 획일화되어 가고 손쉬운 통제의 대상이 된다.


아도르노는 대중문화 속에 사는 현대인의 일상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자신의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한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근무시간이 평균 8시간이라고 생각하고 근무지로 출퇴근하는 시간을 2시간으로 잡는다고 치자.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10시간을 빼면 하루에 현대인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약 4시간 정도 되는데 이 시간은 노동의 강도를 점점 더 높임을 통해서, 다른 문제에 대한 숙고와 새로운 삶의 모습에 대한 꿈에 쓰여 지기보다는, 내일의 일을 위해서 에너지를 충전하는 데 쓰여 지게 된다.


그리고 주말이나 휴가 기간 동안에도 이러한 자유시간은 철저하게 통제되어 어디로 휴가를 떠나야 하는지,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하는지도 상품화되어 현대인들은 스스로에게 중요한 것보다는 어떻게 휴가를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문화산업 자체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할 선택권을 빼앗아 버린다는 이 같은 지적은 과장된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우리가 느끼는 세밀한 통제의 메커니즘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예를 들자면, 자본주의의 상품 생산과 대중매체를 통한 소비문화의 연결고리는 광고 산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개별화된 것이 사실은 규격화된 것이라는 앞서의 명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아무리 좋아도 똑같은 건 싫다”라는 문구가, 이미 99퍼센트 이상 규격화되어 있는, 아파트 광고에 사용되고, “당신만의 개성을 연출 하세요” 라는 문구가 대량생산되는 화장품 광고에 사용된다. 나만의 개성을 연출하기 위한 소비자의 구매는 결국 메이크 엎의 획일화 내지는 소수의 메이크 엎 패턴의 유행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서구적 개인주의가 극단적으로 추구되게 되면 오히려 가장 극단적인 획일화가 이루어지게 되며 그것은 칸트의 선험적 자아의 보편성이 현상으로 파악되는 자연에 가하는, 그리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가하는 획일화의 전체주의적인 억압이 된다는 것이 결국 아도르노가 하고 싶은 말이다.


모든 것을 하나의 보편성 속에 편입시키려는 선험적 자아의 톱니바퀴는 타자로서의 자연을 착취하고 상품적 획일성에 벗어나는 모든 개인들의 차이, 다름의 골들을 갈아엎어 강제로 아무런 차이가 없게 만들어 버린다.


3) 헤겔의 일원론적 타자: 주지하다 시피 헤겔은 칸트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자아와 타자가 본질적인 관련 속에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논리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타자’ (sein Anderes, das Andere seiner selbst etc.)라는 표현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나타난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A라는 구역과 B라는 구역을 나누는 경계가 있다고 치자. 이 경계는 어디에 속할까? A에? 혹은 B에? 둘 다에? 아니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일까? A와만 관련하여 헤겔은 이 경계 (Grenze)가 A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와 자아의 본질적인 상호관련성이 드러날 수 있는 통찰을 얻게 된다. 이 경계가 B에 속하면서 동시에 속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기에 A가 제대로 설명되기 위해서는 B 또한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현상으로 돌아와도 우리는 이런 통찰을 뒷받침하는 예를 무수히 발견하게 된다. 우선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긍정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부정적이라는 단어가 필수적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양이 있으면 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


둘 사이의 구별이 없다면 긍정적이니 부정적이니 하는 구별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터이기에 이러한 구별은 곧 두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둘 사이의 관계가 이미 우리에게 알려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긍정적이라는 말을 부정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정의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마지막 심급에 가서는 긍정적이라는 말은 부정적이라는 단어와의 연관성 없이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다. 따라서 타자는 항상 자아와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게 되면 따라서 '자신의 타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플라톤에게 있어서의 토 헤테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물론 헤겔에게 있어서는 소유격의 의미가 덧붙여져서 타자의 의미가 한층 강화되게 된다. 자아가 스스로를 확인하기 위해서 타자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스스로의 바깥으로 나아가서 타자를 확인하지 않고는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헤겔의 사고를 지배하는 원리는 이러한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타자로 대변되는 부정성 Negativität 에 의하여 추동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우리에게 파악되어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사고는 우선 타자의 입지를 강조하는 경향성을 지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의 이러한 사고는 그 이후 다양성을 강조하거나 억압을 거부하고자 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 있어서 마지막 단계가 자아의 자기 자신으로의 회귀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강조했던 총체성이 오히려 타자에 대한 자아의 억압을 더욱 강화 시킬 수 있다는 비판 또한 매우 거세었다.


실제로 그의 철학에는 이러한 보수적이고 전체 지향적인 모습들이 많이 보인다. 이런 이유로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그의 타자를 확인하는 방법론은 많이 따르게 되지만 그의 결론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방법론 자체도 결국에는 동일성의 원리에 지배된다 하여 거부하는 모습을 띤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타자'라는 개념을 통하여 표현한 사고는 이후 자아와 타자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론적 틀의 역할을 하게 된다. 구체적인 사상 면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하이데거나 데리다 등의 사고에 이러한 헤겔적 사고가 깊이 관통하여 흐르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하나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전체 또는 총체성이라는 말에 대한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에 대해서 우리가 그저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전체의 구성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이지 전체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전체에 대한 하나의 파악이나 전체에 대한 하나의 영향력의 행사가 통제 가능하거나 보편타당하다는 사고에 대해서는 거부의 의사를 분명히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전체가 없다고 말하는 건 자기 모순이기 때문이다.


만일 세 사람으로 구성된 어떤 단체가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단체의 전체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경계하는 건 그 세 사람의 모임으로서의 단체가 세 사람 각각의 자유나 존엄성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지 이 단체가 제대로 기능하는 조화로운 전체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체를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으로도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 인식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전체는 우리가 부분이나 구성요소, 구성원과 구분해서 어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개념이고, 그러한 한 부분과 전체는 헤겔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미 상호연관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전체는 절대로 사라져야 하는 개념이 아니고 사라질 수도 없다. 극단적인 개인주의자가 전체는 없고 오직 나만 존재한다고 아무리 외친다고 해도 전체는 있다. 문제는 그 전체가 어떻게 기능 하느냐 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서 우리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사상의 흐름에 대해 지니고 있는 편견부터 무너뜨려야 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한다고 여겨지는 사상가들의 담론 속에서 우리는 전체에 대한 거부, 주체의 해체, 심지어는 존재론의 원리에 대한 해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극단적으로 모든 연관관계를 부정하고 개별화만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선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사고하는 사상가는 적어도 내가 알기에는 하나도 없다. 문제는 이 전체 속에서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가이다.


3. 현대철학에 있어서의 타자 개념

앞서의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서구철학의 전통 속에서 타자 개념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이를 토대로 하여 이제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타자 개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이글 서두에서 우리는 타자의 개념이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예로 나치의 유태인 학살과 유태인들이 자신들이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예들은 사실 오늘날에도 무수히 많다. 다름이 인간을 얼마나 잔인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해 우리는 도처에서 그 증거들을 발견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루안다에서, 동티모르에서 등등 우리는 아직도 도처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진단한 바와 같이 이런 문제의 근저에 결국에는 타자에 대한 증오와 획일성에의 욕구가 스며들어 있다면, 타자를 통하여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상가들의 노력은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몸 글 초두에서 우리는 타자의 문제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 억압으로 다가오는 우리로서의 남의 문제

둘째,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이들, 즉 남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우리의 증오와 배제의 논리

셋째,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거나 저항할 힘이 없어 보이는 남에게 우리가 행하는 착취 내지는 무관심


이런 문제들은 타자 개념에 관한 철학적 성찰을 매우 강하게 윤리적인 측면에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 철학자들도 이런 측면과의 밀접한 관련 하에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1) 키에르케고르와 아도르노의 헤겔 비판

헤겔의 사고에 잠재되어 있는 전체주의적 가능성은 많은 철학자들에게 거부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실존을 강조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이다. 그는 헤겔이 자신의 '자아의 타자' 개념을 설명하고 변증법 전반을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한 말인 '이것도 저것도' (sowohl... als auch...)를 거부하고 우리가 추구하여야 하는 사고는 '이것 아니면 저것' (entweder... oder...) 이라고 주장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주장을 통하여, 자아를 알기 위해서 타자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와 타자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헤겔의 절대 이념이나 절대 정신은 자아와 타자의 차이가 모두 해소되는 일치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이 마지막 통일성에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될 것을 요구한다. 키에르케고르가 거부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구다.


그는 영원하기에 유한한 인간에게 절대적 타자인 신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결국 둘 사이의 관계에는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주장한다. 따라서 자아와 타자도 상호관계 속에 존재하긴 하지만 그 관계는 상호 배제의 관계이지 상호 귀속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배제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억압과 독재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상호배제의 개념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둘 중의 어느 하나가 타당성을 가지고 다른 하나는 도태되어야 한다는, 적어도 비 진리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결국에는 하나의 의지나 주장이 관철되고 다른 하나는 부정되거나 도태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키에르케고르가 맞서 싸우고자 했던 부패한 제도로서의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이러한 설정이 가지는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는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이 깔려 있다는 비판이 당연히 나오게 되고 이런 면에서 그의 생각은 타자의 의의를 인정한다는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헤겔의 이론보다 후퇴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어쨌든 그는 이런 점에서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대립과 배제의 관계 속에서 파악했으며 이런 점에서 둘의 관계를 처음부터 분리시키고 정적으로 파악한 칸트에 비해서는 헤겔에 많은 이론적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키에르케고르의 끊임없는 헤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을 헤겔 철학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이유도 일정 부분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더 중요했던 건 두 사람이 칸트와도 공유하고 있는 근대의 주체 개념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비슷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훨씬 더 논리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헤겔 자신의 방법론인 변증법의 내부에서 비판을 시도하는 아도르노의 이론은 이런 면에서 한층 더 타자의 권리를 고려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자아와 타자가 서로 변증법적 상호 연관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생각에는 일단 동의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상호 연관이 결코 하나의 총체성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변증법의 의미를 그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파악한다. 결론으로서 둘 모두가 어떤 하나의 전체 속에 포섭되어 규정되어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타자의 의의를 인정하고 동시에 총체성의 굴레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러한 이론적 가능성을 실제 이론에 있어서는 그다지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의 미학이론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일정한 예술분야에 대한 그의 편견이라든지, 대중문화에 대한 지나친 비판이라든지 하는 그의 구체적인 이론의 적용에는 오히려 하나의 예술형태나 내용, 문화형태나 내용이 옳고 다른 것은 그르다는 배제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실제로 그의 이론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이나 착상과는 달리 여기저기서 바람직하거나 옳다거나, 본질적이라는 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들을 사용하는 맥락은 자신의 이론에서 새롭게 정의된 맥락이기 보다는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는 배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맥락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채플린의 영화에 대한 그의 평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악의적이라는 냄새를 지울 수가 없다. 대중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비판의 의미를 이미 지나치게 넘어서는 그의 이러한 비판에는 귀족적인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그의 향수가 담겨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그가 키취 (Kitsch)라고 비난하는 많은 예술작품이나 예술 분야들이 사실 그러한 소위 고전들이 지니고 있는 내용이나 사상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것들은 다른 의미로 현대문화 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즈 음악이나 채플린의 영화에 대한 그의 거의 악의에 찬 비난은 사실 그의 부정 변증법의 이론적 맥락으로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래서 그의 변증법 이론 자체도 사실은 변증법의 내적 변혁이기 보다는 칸트적 이원론의 회귀가 아니냐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는 타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일별할 가치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서 타자는 헤겔에게 있어서 와 마찬가지로 자아와의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서만 파악되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상호연관 속에서 타자는 결코 자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자아와의 상호관계를 지속해 나간다.


따라서 전체는 이러한 상호관계의 고리들의 총화로 이해될 수는 있지만 결코 모든 내용들을 포섭하여 하나의 동일성의 원리에로 환원시킬 수 없는 것으로 된다. 모든 변증법적 과정의 완성으로서의 절대정신과 같은 마지막 심급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이론에서는 정신과 사회의 발전과정을 역동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문제는 이러한 발전과정의 목표 설정이라는 문제에 너무 집착했다는 데 있다. 그는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현실을 앞에 두고 절대적 악이라는 고정관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계몽의 변증법 속에서 나타난 지나친 현대 문명비판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게서 새로운 타자들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가능성이 모두 부정되는 한 결국에는 매우 회귀적인 사상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이러한 절대선과 절대 악의 기준이, 명시적이진 않다 할지라도, 이미 전제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키에르케고르에게서와 같은 배제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문제는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이러한 목표 설정 내지는 자아와 타자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역동적 과정이 지향하는 목표나 방향이 과연 절대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2) 하이데거와 존재론적 차이

하이데거에게서도 우선 키에르케고르에게서와  비슷하게 절대적인 차이의 개념이 등장한다. 존재자와 모든 존재자를 가능케 하는 존재 사이의 차이를 뜻하는 '존재론적 차이' (ontologische Differenz) 개념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와 키에르케고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신, 무한성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유한성의 철학을 추구했다. 따라서 존재는 최고의 존재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를 가능하게 하지만 존재자로서 파악될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존재하는 어떤 것을 이미 말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를 무엇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자와 존재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느끼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라고도 물을 수 없다면 우리는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기나 한가?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에 대하여 물을 수 있는 인간 현존재 (Dasein)라는 특수한 존재자를 통하여 가능하다. 하지만 그 해답은 결코 무엇이라 규정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언어로, 논리적 언어로 주어지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칸트 식으로 타자를 파악하게 될 경우 우리는 자연으로서의 타자이든, 다른 인간으로서의 타자이든, 동일성의 논리에 따라 획일화시키거나 착취하게 될 위험성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현대의 문화산업을 통하여,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도르노의 비판이었다. 이러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하이데거도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하이데거의 다른 점은 아도르노가 자신의 이성에 대한, 계몽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한계 내에 머물려고 했던 반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으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이성적 인식이나 이성적 행동은 더 깊은 존재인식에서 볼 때 이차적인 파생물에 불과하다.


여기서 그는 타자로서의 자연은 손 안에 있음 (Zuhandenheit)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른 인간들로서의 타자에 대해서는 함께 있음 (Mitsein)이라는 개념을 통해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 현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구성요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들과 교류하는 현존재의 존재방식은 배려 (Besorgen)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타자인식은, 타자가 본질적으로 자아 내지는 현존재와 관련을 맺으면서도, 적어도 다른 인간들의 경우에는, 그 이전처럼 종속되거나 배제되지 않고 남아 있으며 배려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타자 인식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하지만 타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그의 이해에는, 자연과학적 세계관, 기술 문명에 의한 자연의 착취에 대해 말하면서도 인간 현존재와 관련한 목적 (Zu)을 통해서만 타자로서의 자연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가 엿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필자도 환경파괴와 관련한 문제를 다루면서 타자로서의 자연이 가지는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태계로서의 자연의 고유한 의미를 인정하지 않고 인간의 목적과 관련하여서만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믿음 또한 버릴 수 없다.


어쨌든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사실 이러한 타자와의 관계 자체가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사실, 철저한 자기성 (Eigentlichkeit)을 통한 인간 현존재의 존재 확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성의 강조는 타자에 대한 그의 사고의 긍정적인 측면을 빛바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단순히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이야기함으로써는, 억압과 배제의 논리는 차단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인 착취나 억압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3) 레비나스와 타자에 대한 책임

타자의 문제를 윤리적인 차원까지 승화시킨 최초의 철학자가 레비나스다. 그는 타자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영접, 친절'(recevoir, acueillir, l'hosopitalité) 등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나타나는 자기성의 위험성, 즉 타자의 배제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하이데거에 있어서 타자는 인간 현존재의 실존 범주의 하나인 함께 존재함 (Mitsein) 의 구성요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하지만 하이데거의 윤리는 전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향해서 자신을 기획 투사하는 인간 현존재의 자기성 (Eigentlichkeit) 속에서 그 본질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마지막 심급에서 타자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인간 현존재의 본질적인 실존 현상으로서의 불안 (Angst)도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이다. 따라서 타자가 무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인 관심의 대상이라고도 보기도 어렵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이런 문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인간의 존재를 대화와 상호 영향의 지평 하에서 파악한다. 물론 그의 이러한 이론의 근저에는 유태교의 신에 대한 그의 종교적 신념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적 색채를 일단 제외시킨다면 그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해명의 가능성이 아주 풍부한 틀을 제시해 준다. 그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타자에 대한 억압이나 배제뿐만이 아니라 무관심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한다.


타자가 내게 그 얼굴을 보임으로써 나는 그 타자에 대한 원초적 책임을 지니게 된다. 그것을 레비나스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정의는 동일자, 자아보다 타자를 우선 생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아와 타자는 서로에게 원초적인 빚을 지고 있는데, 그것이 영접 또는 친절의 개념으로 우리에게 나타난다. 우리는 타자를 영접하고 친절하게 대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무는 도대체 어디에서 그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그것을 우선 절대타자로서의 신으로부터 찾는다. 그가 데카르트에게서 나타나는 신의 이념으로 돌아가서 우리 안에 있지만 우리를 넘어서는 무한성의 이념으로서의 신의 개념을 다루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차원에 머물지만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보통의 경우에는, 적어도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는, 타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착취에 최초의 이론적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고 여겨지는 플라톤 철학에 눈을 돌린다. 그에 따르면 플라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의 이데아였고 이것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존재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타자와의 관계임을 말한다는 것이다.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타자는 자아와 함께 전체를 이루지만 자아가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을 항상 담고 있기에 자아에 의해 획일화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름을 이유로 타자를 억압하거나 배제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하지만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사실 이론적인 일관성이 결여되어 보인다. 왜냐하면 타자에 대해 우리가 보여야 할 영접 또는 친절함 자체가 절대적인 다름이라는 개념으로부터는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요구는 사실, 나와 타자가 맺는 본질적인 관련으로부터 설명되어져야 한다. 이 본질적인 관계로 인해 타자가 겪는 고통이 결국에는 내게로 돌아온다는 인식이 선행되어야만 우리는 영접이나 친절함에의 요구를 정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론적 해명을 통해서만 우리는 다름을 용인 (tolerate)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인이라는 말 속에는 내가 옳고 상대편은 틀리지만 다른 이유로 내가 나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걸 유보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 편 이를 통해 우리는 다름에 대한 어떠한 억압에도 저항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상호 존중이 우선해야겠지만 이러한 관계가 파괴될 경우 우리에게 남는 선택은 획일화, 동일성, 배제의 논리에 저항하고 다시 상호 존중의 관계가 성립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III. 맺는 글: 현대사회에  있어서 타자 개념의 의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 문화에 있어 타자 개념은 억압과 강제적 동일화를 거부하는 틀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것은 억압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통일적인 운동을 부인하는 개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80년대 운동권의 논리에서 비판 받았던, 더 큰 적을 대항하기 위해서 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눈감아도 좋다는 식의 타협의 논리를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이런 면에서 타자에 대한 사고는 매우 급진적인 사고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타자에 대한 무관심한 인정이 아니라 억압과 부조리에 대한 거부의 차원에서 타자를 거론할 때, 한편으로는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대화와 의견조율이 중요한 일이 되지만, 그래서 타자에 대한 정치적 논의는 항상 평화론 적이다, 어떠한 동일화의 논리도 거부하고 극소수의 주변 집단이라도 배제 당하거나 소외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면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타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데는 단순히 타자를 인정하고 서로 신경 쓰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끈질기게 그리고 철저하게 나와 타자 사이의 문제들을 짚어보고 해결책에 대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필자는 타자 개념이 현대사회에 대한 철학적 담론에서 지니고 있는 이 같은 의미가 이 작은 글을 통해 조금이나마 밝혀졌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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