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스케치 - 단편들
김재인
(1) 고원의 사유
질 들뢰즈의 철학은 자기도 모르게 노예로 살아가게 되는 우리의 삶을 폭로하고 주인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주는 커다란 자극제이다. 스피노자와 니체 연구를 통해 들뢰즈는 노예로서 사는 삶은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삶이라고 알려준다. 노예는 일상과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의 초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역량(potentia, Macht)을 가지고 있고, 그 역량을 키우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삶의 기쁨은 그 역량이 커지는 느낌이고 슬픔은 그 역량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들뢰즈 철학의 실천적 과제는 개인과 사회가 기쁨을 증가시키는 길을 뚫어 가는 데 있다. 아직 있지도 않고 거저 되는 일도 없으므로 뚫어야 한다. 그 길 뚫기와 창조가 들뢰즈가 말하는 세상 속으로의 도망이다. 그의 이력은 이러한 도주선(逃走線)을 증언해 준다.
들뢰즈는 철학사가로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가 연구한 것은 이른바 ‘정통’ 철학사가 아니다. 그의 관심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 분석철학 같은 주류 ‘정통’ 철학이 아니라 스토아학파,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 니체, 마르크스, 베르그손, 푸코 같은 기이한 철학자이다. 특히 <베르그손주의>, <니체와 철학>,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는 저명한 연구가 마이클 하트가 지적하는 대로 들뢰즈 사상의 주요 진화 단계를 보여준다. 이것들은 그의 학위 논문인 <차이와 반복>에서 종합되어 표현된다.
하지만 들뢰즈는 매순간 철학사에서 도망간다. 그는 횔덜린, 클라이스트, 프루스트, 카프카, 마조흐, 투르니에, 제임스, 피츠제럴드, 아르토, 밀러, 로렌스 등 문학가들에게 자기 연구의 많은 부분을 할당한다. ‘기호(=징후)’의 다양한 스펙트럼과 작동을 밝히고(<프루스트와 기호들>) ‘소수 문학’과 ‘대항 문화’를 탐색하고(<카프카. 소수파의 문학을 위하여>) 사디즘-마조히즘을 통해 ‘법’과 ‘자유’를 탐구하고(<자허 마조흐 소개>) 로빈슨 크루소를 통해 ‘고독’과 ‘개인’의 문제를 밝히는(<의미의 논리>) 등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뚫는다.
한편 그는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에 관한 연구(<감각의 논리>)에서 서양의 미술사를 다시 쓰는 야심찬 작업을 시도하고 마침내 성공한다. 감각과 힘을 그린다는 과업이 베이컨에게서 어떻게 수행되는지를 보여준 들뢰즈는 그 작업을 확장시켜 영화로 나아간다. 베르그손의 이미지 이론과 베이컨의 감각 이론을 결합시킨 두 권의 영화 철학서(<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는 영화에 대한 책이기 전에 철학 책이다. 말년에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그에게 철학, 과학, 예술은 모두 창조 행위이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이 때 창조란 무엇보다도 ‘기쁜 삶의 창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들뢰즈 철학의 결정판은 스스로가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듯이 <천 개의 고원>이다. 이 책은 가타리와 함께 쓴 ‘자본주의와 분열증’ 둘째 권으로(첫째 권이 <안티 오이디푸스>이다) 20세기 사상의 고원이요 가장 긍정적인 책이다. 앞의 내용들과 더불어 여기에는 물리 화학, 생물학, 지질학, 정치 경제학, 음악 등 그들이 발견한 모든 영역에서 가장 긍정적인 것들을 접혀 있다. 그것들을 펼치는 것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2) 들뢰즈 철학을 어떻게 한국에 적용할 것인가?
왜 하필 들뢰즈인가? ‘동양’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이 시점에, 자살한 철학자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한국 사회에도 들뢰즈가 쓸모가 있을까? 사람들은 이렇게 진지하게 묻는 척하면서 들뢰즈도 폐기하고 넘어가려 한다. 어디로? 자신의 일상과 타성으로.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늘 결과만을 본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앎은 원인에 대한 앎과 함께 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IMF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하나의 결과이다. 실직과 감봉이 뒤따르고 삶은 힘겨워진다. 그러나 왜 IMF가 터졌는가? 지속적인 경상 수지 적자, 비정상적인 기업 활동(정치 자금과 부동산 투기 등)으로 인한 이윤 감소, 부패 사슬로 연결된 정경 유착 등이 원인이다. 그렇다면 IMF를 벗어나고 재발을 방지하는 길은 원인의 철저한 교정에 있다. 민주화가 그 방법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민주화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다시 알아가야 한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원인을 알기란 대단히 힘들고 귀찮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당한 선에서 알려는 노력을 접고 만다. 그것이 일상이고 타성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노예 상태를 원하고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일상의 타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들뢰즈가 강조하는 것이 ‘도주’이다. 여기서 도주는 다른 세계로의 도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시 세상 속으로 도망가기. 하지만 사방 꽉 막혀 있는 세상에서 도망갈 구멍을 찾을 수 없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실천적인 발상 전환이다. 길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길을 만들라는 것. 이것이 니체적인 의미의 창조이다. 모든 창조는 실천을 통해서만 이룩된다. 그리고 창조만이 사람을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만들어 준다. 거기에 능동적인 기쁨이 있다.
그러나 창조는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스피노자도 니체도 들뢰즈도 답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들뢰즈가 말하듯 우리가 어떤 철학자를 공부하는 것은 그를 모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했던 그런 일을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게 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들뢰즈를 따를 것이 아니라 그가 자기 시대와 상황에서 했던 그런 일을 지금 여기서 해야 한다. 그러려면 그가 자기 삶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일은 그의 삶과 상황과 저술에 대한 치밀한 독서를 요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일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들뢰즈 수용에서 빠진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왜 들뢰즈를 읽는가에 대한 물음 속에서만 우리는 들뢰즈를 읽는 보람을 느낄 것이고 우리 자신의 기쁜 삶을 창조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 마지막 자기 변신의 의미이다.
한국 사회에서 들뢰즈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소문은 가라. 이정우, 이진경 류의 사이비 해석도 보내 버려라. 다행이 그의 철학사 연구, 미학과 예술론, 윤리학과 정치학 저술들이 많이 번역되었다(물론 번역 상태를 보장할 순 없지만). 도주, 탈영토화, 기관 없는 몸체, 고른판, 내재성의 판, 리좀, 욕망하는 기계 등 그의 책들에 나오는 어려운 개념들은 일단 무시하고 가도 좋다. 먼저 느껴라. 단지 하나의 앨범에서 한두 곡 정도 흥얼거릴 수 있다면 족하지 않은가.
그렇게 들뢰즈를 읽되 자신의 삶을 걸고서 읽는다면 자기 변신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들뢰즈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은 그 다음 문제이다. 들뢰즈를 자기 변신, 자기 정신과 몸의 변화의 촉매제로 삼는 것이 한국에서 들뢰즈를 써먹는 첫 걸음이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들뢰즈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들뢰즈의 실천 존재론
잠에서 깨어 새로운 하루가 오리라는 것을 알 수 없는데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간다. 이런 부류의 믿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신비한 것이 아닐까? 삶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 신비는 온갖 부류의 실험가에게서 잘 드러난다. 실험이라는 것은 항상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다. 실험가는 이 위험에도 불구하고 실험을 행한다. 실험이 성공했다 하더라도 다음을 확신하지 못하면서, 거듭. 삶은 곧 실험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실천은 바로 이 실험이다. 안전판이 다 마련되어 있어 그 안에서 쇼하듯 행하는 가짜 실험이 아닌, 제대로 된 바닥조차 없는 곳에서 자기 스스로가 바닥이 되어가며 행하는 실험. 실천의 정확한 의미는, 일단 실천이 있고 나서야 뭔가 생겨난다는 데 있다. 존재보다 실천이 앞선다. 이것이 실천학적 접근이다.
관념론에서 실천은 관념의 확인에 불과했다. 들뢰즈가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관념 속에서의 실천이다. 그런 건 누군들 못하겠는가. 허나 삶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 것을. 안전한 도주로가 미리 마련되어 있다면 이미 도주가 아니라 관광이리라. 맹수들에 둘러싸이더라도 늘 안전한 사파리. 반면, 도주란 아무도 예측치 못했던 길을 뚫어가는 실천이다. 도주가 창조인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철학도 개념의 논리, 개념의 놀이에 불과할진대 그 자체가 관념이 아닌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한 응답의 필요 때문인지 철학은 실천의 도구라고 주장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이해된 철학과 실천의 분리는 모두 뿌리 깊은 오류다. 실은 실천은 실험이며, 그렇기에 철학을 포함한다. 문학 실천, 과학 실천, 예술 실천, 철학 실천 등 정치나 경제처럼 상식의 규모로 눈에 보이는 실천 말고도 여러 부류의 실험과 실천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철학은 가치와 의미를 다루는 실천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생각 실천이다. 가령 인간은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 또는 정당성을 묻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뻔뻔한 동물이 아니다. 행동의 순간에는 묻지 않는다 해도, 행동과 행동 사이의 휴식 시간엔 언제나 이것들을 되묻는다. 묻고 또 묻는다. 바로 이런 평가와 해석 작업을 수행하는 절차가 개념이다. 개념은 무색무취의 도구가 아니다. 개념은 그 자체가 평가와 해석이다.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고 보면, 개념을 어떻게 만들고 개정하느냐의 문제는 인간 삶의 핵에 닿아 있다.
가령 광기의 문제를 보자. 미쳤다는 것은 특정한 평가를 수반한다. 그런데 이 평가가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르다. 즉 미친놈에서 미친 분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는 것이며, 감금에서 권력 부여까지 다양한 실천이 연관되어 있다. 바로 이 평가를 다시 평가하는 작업이 철학의 본령인 것이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은 개념들의 보석상자로, 무엇보다 정신분석이라는 평가 방식을 비판하면서 다양체 생성이라는 대안을 마련한다. 시간과 이해관계와 자본의 투자 뒤에는 욕망과 무의식의 투자가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욕망과 무의식은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다. 현실에서는 생산의 사행(事行) 자체가 욕망이고 무의식이다. 정신분석은 현실의 생산을 정신의 영역, 즉 인간과 영혼이라는 테두리에 가두며, 그럼으로써 정신분석은 현실의 생산을 가로막으며 실천을 방해한다. 정신분석은 현실 그 자체를 대가로 치르면서 잘못된 현실의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신분석은 현대판 사제 권력을 행사한다. 스피노자의 고전적 물음, 즉 사람들은 왜 예속의 길을 자발적으로 욕망하는가라는 물음은, 20세기에 만연한 파시즘 속에서 그 답변을 절박하게 요구했고, 들뢰즈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패스워드로 제시한 것이다. ‘나’를 중심에 놓는 사유는 현실의 인식과 실천을 필연적으로 그릇되게 인도한다. 현실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이런 문제 상황에 대한 비판의 실천이라면, 『천 개의 고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대안의 창조이다.
분열증은 생산의 사행으로서의 현실 그 자체이다. 현실과의 풍부한 접촉을 가로막는 것이 바로 오이디푸스다. 오이디푸스는 욕망과 무의식을 ‘나’를 중심으로 ‘엄마’와 ‘아빠’가 펼쳐가는 가족극장으로 만든다. 이에 반해 밀러, 아르토, 로렌스 등 여러 분열적 작가가 말했듯 중요한 것은 ‘나’가 아니라 흐름이다. 그 흐름의 생산이 인위적으로 정지될 때, 병원에서 목격되는 그런 분열증 환자가 나온다. 흐름을 개방하라, 이는 곧 실험하고 생산하라는 의미이다.
분열은 새로운 틈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며, 그 자체로는 긍정의 운동이다. 분열증을 질병으로 평가하고 병원에 가둬야 할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질병이기 이전에 모든 것을 코드에서 해방시킨 자본주의의 운동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삼키지만 다시 토해낸다. 이 변태의 과정 때문에 ‘자본주의의 바깥’을 말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며, 역설적으로 ‘미침’만이 자본주의의 극한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 미침은 현실과의 접촉이라는 순수한 의미만을 지닐 뿐이다.
(4) <천개의 고원> 이 책을 말한다 - 몇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천 개의 고원>은 어렵다. 물론 부분적으로 쉬운 대목도 있고 저자들도 아무 데서부터나 읽으라고 권하고 있지만, 그건 저자니까 할 수 있는 말일 뿐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책은 아주 까다롭다. 역자의 입장에서도 저자를 따라 아무 데서부터나 읽으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독자들을 속이지 않기 위해 솔직히 말한다면 이 책은 정말 어렵다.
한번은 출판사에서 번역이 읽히지 않는다 하여 번역의 어떤 부분을 임의로 고쳤다. 그런데 고친 원고를 제3자가 원문 대조하여 검토한 결과 거의 역자가 원래 번역했던 상태 비슷하게 돌아왔다. 읽히지 않는 것은 원문이었지 번역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마땅한 입문서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원전은 원전을 통해 독파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아주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다. 수학, 음악, 전쟁, 건축, 뜨개질, 문학, 항해, 지리, 미술, 기술, 물리학, 화학, 지질학, 언어학, 경제, 장식, 기호학, 정신분석, 생물학, 정보이론 등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분야를 그것도 꽤나 깊이 있게 비판적으로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는 자신에게 친숙한 곳을 통해 이 책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역자로서 이런 괴물 같은 책을 번역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아직도 번역은 끝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역자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고른 번역 수준을 갖추는 일이었다. 위에 열거한 각 분야를 가급적 깊이 이해하면서 번역을 수행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무의미한 작업이 되겠기에. 그래서 번역 작업은 마냥 늦어졌다.
주위에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긴 했지만 번역과 관련해서 실제적인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다. 한번은 교정지 가득 빨갛게 문제제기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실제로 쓸모 있는 지적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지엽적인 지적이거나 틀린 지적이었다. 그러나 역자로서는 혹시나 해서 일일이 원문 대조를 하느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허망한 작업만도 몇 달이 걸렸다.
책을 그냥 상품으로만 본다면 독자들이 그 책을 가지고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하지만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책이란 사상을 전달하는 하나의 외피일 뿐이다. 사상은 돈으로 살 수 없으며 삶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책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역자가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가장 당부하는 것이 이 점이다.
<천 개의 고원>은 자기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만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찾지 않는 자에게 새로운 삶은 결코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 만들기 전에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삶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뭔가 깊은 오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의 궁극적 메시지는 ‘자신을 만들어라’라고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만드는 것은 세상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만 우회적으로 완성된다. 세상은 자신의 일부이며 자신은 세상의 꼭 필요한 일부인 것이다.
(5) 들뢰즈와 광기 - 정신분석에서 분열분석으로
1. 광기와 정신의학, 그리고 정신분석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을 특히 문제 삼는 까닭은 이렇다. 시대가 흐르면서 정신분석에서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정신분석은 자취를 감추어, 치료술, 적응 기술, 심지어 마케팅 기술 등 온갖 종류의 분야로 널리 퍼져 들어갔다.”(Dialogues p. 100) 즉, 정신분석 행위 그 자체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파고든 정신분석적 활동 전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정신분석과 무의식과 욕망을 발견했지만, 그와 거의 동시에 그것의 힘을 덮어버렸다. “정신분석이 무의식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심지어 무의식을 발견하기까지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천적으로는 무의식을 축소하고 파괴하고 몰아내기 위해서만 그렇게 한다. 무의식은 부정적인 것으로 여겨지며, 그것은 적이다.”(D p. 95)
“역사적으로 볼 때 정신의학은 광기라는 개념 주변에서 구성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이며, 반대로 이 광기라는 개념이 적용상의 어려움을 가졌던 지점에서 구성된 것 같다. 실제로 정신의학은 지성의 결여가 없는 망상들의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다. 한편으로 미친 듯 보이지만 “진짜로” 미친 건 아닌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은 자신의 여러 능력들은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자기 재산과 소유물들을 잘 관리할 줄 아는 능력을 발휘한다(편집망상 체제[régime paraoïaque], 해석 망상 등). 다른 한편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진짜로” 미친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방화, 살인 등 전혀 예기치 못한 돌발 행동을 자행한다(편집광 체제[régime monomaniaque], 정욕 망상이나 호소 망상 등). 정신과 의사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랬는데, 왜냐하면 그는 광기라는 개념과 유리된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엄밀히는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실제로 미친 사람들의 광기는 제 때에 알아보지 못했다고 정신과 의사는 비난을 받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이 두 극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사실 미쳤고 동시에 실제는 그렇지 않으면서 미친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온통 “일상생활의 정신 병리학”인 것이다. 요컨대, 정신의학은 광기의 개념을 세우지 못한 채 구성되었고, 바로 그 때문에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D p. 102)
정신분석이 정신의학의 뒤를 이으며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광기라는 개념의 부재 또는 모호성이 있다. 즉 ‘광기’라는 것이 먼저 있어서 그 개념이 정립되고, 그 후 이것을 다루기 위해 정신의학이 생긴 것은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학이 광기라는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현상을 둘러싸고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신의학은 광기 현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고, 이 틈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정신분석이다. 이처럼 오늘날 정신과 관련된 제반 문제에 정신분석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 비판을 하는 의의가 있다. 정신분석은 정신 현상을 둘러싼 올바른 연구를 위해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분열분석이다.
2. 왜 기표 또는 기표작용이 문제인가?
“무의식, 당신은 그것을 생산해야만 한다. 무의식은 억압당한 회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심지어 환상과도 아무 상관이 없다. 유년기의 회상들이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적인 유년기의 블록들을 가지고 아이-되기의 블록들을 생산한다. 각자는 자기가 숨겨 두었던, 항상 자신과 동시간적인 태반 조각을 실험 재료로 삼아 제작하거나 배치구성하는(agencer) 것이지, 자신이 나온 알이나, 그 알에 결부된 부모나, 거기서 이끌어낸 이미지들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을 생산하라.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아무데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실언이나 재치 있는 말이나 심지어 꿈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의식, 그것은 제작하고 흐르게 해야 할 하나의 실체이며, 정복해야 하는 사회적 정치적 공간이다. 욕망의 대상이 없듯이, 욕망의 주체도 없다. 언표행위의 주체도 없다. 흐름들만이 욕망 그 자신의 객체성이다. 욕망은 기표작용과 무관한 기호들의 체계(le système des signes a-signifiantes)인데, 이 기호들을 가지고서 사람들은 한 사회적 장 속에서 무의식의 흐름들을 생산한다. 욕망은 기성 구조들을 문제 삼지 않고서는, 핵가족이든 동네 학교든, 그 어떤 곳에서도 부화하지 않는다. 욕망은 항상 더 많은 연결접속들과 배치구성들(agencements)을 원하기 때문에 혁명적이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모든 연결접속들, 모든 배치구성들을 끊어버리고 꺾어버린다. 정신분석은 욕망을 증오하고, 정치적인 것을 증오한다.”(D pp. 96-97)
정신분석이 사용하는 “관념 연상 절차”(D p. 28)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진행된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1. 환자는 “je voudrais partir un groupe hippie”[나는 히피 무리와 떠나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조작자(=정신분석가)는 “pourquoi prononcez-vous comme gros pipi?”[왜 커다란 성기처럼 발음하지요?]라고 응답한다. 2. 환자가 Bouches du Rhône[부쉬-뒤-론. 프랑스 남쪽에 위치한 프랑스 행정구역의 하나]에 관해 말하면, 정신분석가 자신은 “bouche de la mère[어머니의 입]라고 내가 강조하는 여행에로의 초대”라고 주석을 단다.”(D p. 28) 이 두 상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표(signifiant)의 놀이, 즉 어떤 말을 발음할 때 일어나는 말장난들이다. 그리고 이 말장난의 대표적인 것이 은유와 환유이다.
“이 두 예는 가장 높은 기표에 기반을 둔 분석들이다. 그런데 피분석자도 정신분석가와 똑같은 정도로 알고 있어서, 굳이 정신분석가가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이런 트릭들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가지고 분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D pp. 99-100)
“프로이트의 가장 기괴한 몇몇 구절들 중에는 “펠라티오”에 대한 언급이 있다. 즉, 어떻게 페니스가 암소의 젖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고, 암소의 젖이 다시 어머니의 젖가슴에 해당하는 가치를 갖는가, 하는 것. 펠라티오는 “진짜” 욕망이 아니며, 다른 뭔가를 의미하고, 다른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식. 늘 그렇듯이 은유나 환유로 어떤 뭔가는 다른 뭔가를 상기시켜야만 한다.”(D pp. 95-96)
정신분석의 가장 큰 문제는 결국 현실과의 단절, 현실의 부정에 있다. 그러나 현실을 딛지 않고서는, 정신분석이건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건 설 수도 없을 뿐더러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현실 자체의 존재와 구성에 관한 작업이 곧 분열분석이 되겠다.
'철학자와 그의 사상 > 질 들뢰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0) | 2008.08.01 |
---|---|
[스크랩] 철학자들, 노마디즘의 소비화에 一助 (0) | 2008.08.01 |
[스크랩] 트렌드비평: 노마드론의 전개와 철학적 쟁점 (0) | 2008.08.01 |
[스크랩] 無知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 (0) | 2008.08.01 |
[스크랩] 느슨한 대중성 VS. 뻑뻑한 엄밀함 (0) | 2008.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