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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 | ‘노마드’, ‘노마디즘’은 최근에 들어와 널리 회자되고 있고 심지어 TV 선전에까지 등장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유목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유목적’이라는 말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아리송할 때가 많다.
한번 물어보자. 돈이 많아 고민하는 사람이 밤낮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과 월세를 마련하지 못해 밤낮 이사를 다니는 사람이 둘 다 ‘노마드’라면, 이 ‘노마드’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떤 중학생이 밤낮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세계에 빠져 있다면, 이 학생은 ‘노마드’인가? 늘 자기 골방에 앉아 있는 이 학생이 어떤 뜻에서 ‘노마드’인 것일까? 역으로, 늘 어딘가로 헤매고 돌아다니지만 마음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노마드인가? 도대체 ‘유목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한번 물어보자. 책 뒤 표지를 보니 이 책의 저자는 농사꾼인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는 ‘농사꾼 철학자’라고 씌어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노마드인가? 농사와 철학의 경계를 허물고 ‘농사꾼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노마드, 또는 (역시 요새 유행하는 말로서) ‘하이브리드’인가? 그렇다면 저자는 ‘침략주의자’인가?
또 물어보자. 이 서평을 쓰는 사람은 한 평생 다양한 종류의 담론들을 가로지르면서 사유했지만, 외국땅이라고는 나이 45세에 처음 밟아 봤다. 그렇다면 서평자는 노마드인가 정주민인가?
한국에 노마드니, 유목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생각들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말 ‘사유’해 본 적이 있는가? 사유를 해 보고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노마디즘’이라는 게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천의 고원』을 논하면서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이 “그 어떤 철학교과서보다 지적 유희가 심했고 당연히 더 난해했다”고 말한다. 『천의 고원』을 ‘철학교과서’라고 표현한 것도 참 우습지만, 자신이 “겨우 페이지 수만 넘겨본” 책이 “지적 유희가 심”한지 어떤지 어떻게 판단한 것일까?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지적 유희가 심한 책인가? 저자는 이 책을 읽고서 스스로 “막연한 인상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자. 도대체 어떤 책을 ‘읽고’서 막연한 인상만 가진 사람이 그 책을 ‘비판’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이 책에는 김지하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 ‘신유목주의’가 언급되고 있고 그것이 ‘비판’되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김지하의 글을 보니 좀 어이가 없다. “자동차, 휴대폰, 노트북, ...” 운운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도대체 이런 것이 들뢰즈/가타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것들은 들뢰즈가 ‘관리사회’라고 부른 현대 사회의 기술적 장치들 아닌가? 누군가가는 엉터리로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한국적 현상’ 아닐까?
“몽골의 초원길은 가타리와 들뢰즈의 말처럼 홈 파인 가로(街路)가 아니라 사방천지로 다 터진 매끄러운 길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방천지로 다 길을 트면 그것이 더욱 더 홈을 많이 파는 것이 아닌가? 들뢰즈/가타리에게서 ‘매끄러운 길’이라는 말이 도대체 성립하는가? 또 이들이 말하는 공간이 실제 공간만을 뜻하는 것인가?
“이동 마인드가 본질인 그들의 유목주의는 오늘날의 초국적 자본의 세계시장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충분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천의 고원』이 겨냥하는 주적이 ‘세계시장 제국주의’ 아닌가? ‘이동 마인드’라는 표현도 우스꽝스럽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이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가? 이동과 정지가 정도(degree)의 문제이지 어떻게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저자는 방안에서 농사를 짓는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초국적 자본처럼 부지런히 옮겨다니자고 했다는 말인가? 초국적 자본이 어떻게 이동 마인드인가? 오히려 그것은 자본으로 모든 삶의 양식들을 포획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분열증은 억압적인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초자아로 벗어나는 탈중심화 과정이기 때문에, [...]”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신’분열증 환자인가? ‘정신’분열증 환자가 철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초자아로 벗어나는 탈중심화”? 무슨 말일까? 초자아(=상징계)로 탈주한다? 아이들이 하는 말로 정말 ‘돌아버리겠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파편화되면서 순간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분열된 주체, 즉 분열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과 재생산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이 세계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자유롭게 파편화된다”? 파편화되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파편화된다는 것은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순간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 들뢰즈가 ‘쾌락’ 때문에 푸코와 결별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분열자가 자본주의를 위협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인간 아닌가! 이게 다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저자에게 묻고 싶다. 농사짓는 것을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 저자는 펄쩍 뛸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에 대해 최소 몇 년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땅을 잘 이해하고 농사의 기본을 익혀야 한다. 도구들 쓰는 것, 계절을 읽는 것을 비롯한 많은 공부들, 그리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 자연에 대한 믿음과 헌신.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저자에게 말하고 싶다. 사유하고 말하고 글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천의 고원』 같은 책을 읽으려면 최소한 당신이 농사를 짓기 위해 들인 노력만한 노력은 들여야 한다고.
우선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어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하나의 외국어를 자기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으며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철학이란 2500년 이상을 숙성해 온 학문이다. 그리스 철학과 제자백가를 터득하는 데에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역사가 2500년이 숙성해 온 학문이 철학이다. 그 끝에 『천의 고원』이 있다. 도대체 저자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나 말하는 것인가?
저자에게 물어보자. 철학이라는 게 무슨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 책 뒤표지에 ‘농사꾼 철학자’라고 버젓이 씌어져 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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