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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철학번역 논쟁의 불씨를 지핀 김재인 씨. © | 季刊 '문학동네' 봄호에 '『천개의 고원』이 『노마디즘』에게'라는 특이한 제목의 글이 실렸다. 사정을 모르면 암호 같은데 사정을 알면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다. 들뢰즈 철학개념을 둘러싼 두 학자의 오랜 물밑대결이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 글은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시도의 종착점으로 운위되는 '천개의 고원'을 국내에 번역소개한 철학자 김재인이 '천개의 고원'의 해설서인 '노마디즘'의 저자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에 대해 '공격적 반론'을 쓴 것이다. 김 씨가 반론을 펼친 까닭은 간명하고도 분명하다. 첫째, 이 교수가 '노마디즘'에서 '천개의 고원'을 번역한 김재인 씨를 '심하게' 비판한 것이 1차적 원인이다. 둘째, 이번 글의 앞머리에 밝혀진 것처럼 '노마디즘'을 통해 들뢰즈의 사상이 왜곡 유통된다는 것에 대한 김 씨의 판단 때문이다.
"이진경, 철학적 개념 엄밀히 읽지 못했다"
김 씨의 글은 세토막으로 나눠서 읽을 수 있다. 우선 이진경이 '노마디즘'에서 틀렸다고 말한 자신의 번역어 '고른판'(plan de consistance)과 '도주'(fuite)이 왜 정확한 번역인지를 꼼꼼히 옹호하고, 이진경의 번역어인 '구도'와 '탈주'가 왜 잘못된 번역인지를 지적한다. 다음으로 이진경이 '노마디즘'에서 들뢰즈 철학의 '실천철학' 및 '정치철학'적 뉘앙스를 捨象하고 '추상성'의 틀 속에 들뢰즈를 가둔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김 씨는 '계열화'에 대한 이진경의 해설은 "들뢰즈가 하지도 않은 말을 과잉해석한 것"이며, 철학적 개념을 엄밀하게 따지기보다는 '은유' 같은 유비적 장치를 도입해서 이해함으로써 추상화의 길로 빠질 뿐 아니라, '무위사상' 같은 반들뢰즈적 지대로까지 나아간다고 비판을 펼친다. 마지막으로 김 씨는 '노마디즘'의 들뢰즈 이해가 '수유연구실' 등에서의 대중강연을 통해 대중적으로 퍼지고 있음을 문제삼는다. 김 씨는 '대중화'의 미명에 붙잡혀 한 철학자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뒤로 젖히고, 어설픈 '전도'가 계속된다면 이 땅의 들뢰즈 읽기는 영원히 '국내용'에 머물 것이라고 진단한다.
아쉽게도 비판을 받은 당사자는 묵묵부답이다. 이 교수는 "해당 논문을 읽어볼 생각도, 반론의 필요도 못 느낀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관련 학계에서는 김 씨의 이번 비판이 매우 적절한 타이밍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교수의 정당한 답변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박성수 한국해양대 교수(철학)는 논문을 읽은 후 "김재인이 이진경의 잘못된 이해를 철학적으로 지적한 부분(스토아 철학, 계열 등)에 대해서는 김재인이 전적으로 옳다"라고 말한다. 진태원 서울대 강사(철학)도 "'사건'과 '도주' 개념을 설명하는 김 씨의 논리가 흥미로웠다"라면서 비판의 정당성에 표를 던지고 있다. 양운덕 고려대 강사(철학) 또한 "정당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든다"라는 입장을 보여 들뢰즈와 관련된 많은 학자들이 김 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김 씨의 비판 방식에 대해서는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박성수 교수는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철학전공자도 생각해내지 못할 정도의 뛰어난 사례설명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이 간과되고 있다"라는 점과 "이런 비판을 가능하게 한 들뢰즈에 대한 국내의 관심의 場을 일군 것이 역설적이게도 이진경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양운덕 씨는 "이진경이 거칠지만 크고 넓게 본다면, 김재인은 작은 것을 본다. 김재인의 지적이 물론 날카롭고 정확하더라도 둘이 '아귀'가 안 맞아서 시비거는 것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정형철 부산외대 교수(영문학)는 "둘 다 일장일단이 있으며, 이진경의 '노마디즘'이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을 장황하고 험하게 왜소화시켰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을 밝혔다.
이런 학자들의 반응에 대해 김재인 씨는 "논쟁의 초점이 '정확한 독서와 설명' vs '대중적 이해의 도모'로 가면 곤란"하다며 "철학적 논의에서 '정확성'이 결여된다면 들뢰즈의 이름은 다만 '고가 상표'이되 '위조 상표'가 될 뿐"이라는 단호함을 보였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문제제기가 "외국에서는 있을 수도 없는 초보적 번역논쟁"이며 "이런 저간의 사정을 무시한 채 이진경의 선험적 권위에 의거한 채 본질을 흐리는 논평이 오간다면 생산적이지 못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김 씨는 또한 "대개의 국내 들뢰즈 논자들이 원전을 접하지 못했다"라는 단언까지도 던졌다.
개념 해석 둘러싼 풍요로운 대화 기대
이정우, 서동욱 등 다른 들뢰즈론자들은 '비판받은 당사자'의 답변이 중요하다며 이런 왈가왈부에 대한 논평을 거절했다. 이 논쟁이 보여주는 긍정적인 풍경은 한국의 들뢰즈 수용이 '철두철미한 이해'가 쟁점이 될 만큼 숙성될 조짐이 보인다는 점이다. 철학에 대한 이해는 개념에 대한 견고한 장악 없이는 '헛것'임을 '근대 학문'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성수 교수는 "김재인이 들뢰즈 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설서를 쓰는 게 논의를 생산적으로 이끌어갈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라고 지적함으로써 전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판을 받은 이 교수의 반응이 나오지 않는다면 이번 논란은 한 철학자의 독백에 가까운 외침으로 머물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학계에서 이진경 번역의 부정확함은 어느 정도 공인될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두 학자가 갈라지는 철학적 심연으로 내려가지 못한 채 유행하는 몇몇 언어들을 인용하는 것으로 들뢰즈를 소비해갈 것이다. 이번 비판이 국내에 나온 유일한 들뢰즈 해설서에 대한 것이었고, 다시 들뢰즈를 나름대로 해석하고 설명한 책이 나오고 나면 들뢰즈는 (국내 풍토에 비춰볼 때) 이미 잊혀진 뒤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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