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 니체를 수정하며
김 진 석
첫째 착지점--- 힘과 권력이 엄청난 문화적 혼돈 속에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권력’개념을 정치학적으로 혹은 정치철학적으로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철학사에서 실현한 커다란 성취는 그 개념을 공식적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순수할 정도로 솔직하면서도 동시에 뻔뻔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개념화.
그 개념화가 놀라운 업적인 것은 아마도 두 측면에서 드러날 것이다. 우선 기존의 철학과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측면에서 보자. 여기서 기존의 진리에의 의지 혹은 사제적 욕망 자체가 이미 권력에의 의지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른 측면은 앞으로 철학이 이 권력에의 의지를 둘러싼 다양한 기술과 기제를 분석하는 일을 건너뛸 수 없다는 데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푸코의 권력 분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그 과정에서 철학은 단순히 기존의 철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 세계에 대한 분석, 곧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등과 섞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한 권력 개념은 현실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가 말하는 강자의 개념이 자연주의적이고 다소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데에서도 드러나듯이, 철학적이다. 따라서 그 개념은 한편으로 매우 현실적인 분석을 촉진하고 부추기면서도, 어느 순간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접어든다. 다르게 말하면, 실제로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행사 방식들과 모습들을 그저 냉정하거나 차분하게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바람직한 철학적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준인가? 현실적인 강자이면서도, 자연주의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능동적인 덕을 고독하고 순수하게 실현하는 자.
한 예. ‘지배욕(Herrschsucht)'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니체가 주장했던, 이제까지 가장 저주되었던 “세 가지 나쁜 것”의 하나이다. 여기서 짜라투스트라는 지배욕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지배욕: 또한, 유혹하듯이 순수한 자들과 고독한 자들에게 오르고, 저 위의 자족적인 높은 곳으로 오른다. 유혹하며 자줏빛 기쁨을 하늘에 그리는 사랑처럼 타오르며.
지배욕: 그러나 높은 것이 저 아래 권력을 갈망한다면, 누가 그것을 병적인 욕망(Sucht)이라 부를 텐가? 정말이다, 쇠약하고 병적인 것은 그런 갈망과 내려감에는 없다!
고독한 높이가 영원히 홀로 고독해하고 자족하지 않기를. 산이 골짜기로 오고, 높은 곳의 바람이 낮은 곳으로 오기를.
홀로 고독 속에서 충분히 자족할 수 있는 높이에게 오른 후, 그릇에서 흘러넘치듯이, 저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행위, 지배욕. 이런 문학적 수사는 얼마나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가? (실제로 이런 지배욕의 정당화는 플라톤에서 나타났던 철인 왕의 전통에 서 있는 듯하다). 그리고 높은 자존심으로 들끓는 자들에게 얼마나 그들의 세상을 위한 대의를 정당화하게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철학적 비유는, 그것이 화려한 만큼, 공허해지기 쉽다. 고독한 자들은 누구나 자신의 순수한 고독에 지독하게 자부심을 가지건만, 사실 그 순수를 철학적인 명제의 차원에서만 주장하는 것은 ‘기껏해야’, 슬프게도 기껏해야, 철학적-형이상학적 주장이기 쉽다. 혹은 고독한 영혼들이 집착하기 쉬운 낭만적 정취일 듯하다.
개념적으로 분석하자면, 니체가 주장한 고독한 높이, 지배욕이 그리로 올라가고 다시 흘러넘치면서 저 아래로 내려오는 그 높은 자리는 사실 일종의 초월성에 의존하고 있다. 비록 그 초월성이 플라톤에서 발원하는 그것과 똑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리고“높은 곳에 있는 순수하고 고독한 자”가 국가를 다스릴 왕의 권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존재가 세속적인 권력관계와 권력행사를 초월한 형이상학적 높이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그 높이는 현실적으로는 검증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닌 초월적 높이다. 따라서 아주 쉽게 누구에게나 맹목적으로 혹은 악의적으로 남용되기 십상인 초월적 높이다. 남용의 가장 유명한 예는 히틀러의 제3제국에서의 니체 숭배이다. 물론 나찌 정부가 니체를 숭배한 것이 순전히 니체 탓은 아닐 것이고, 단순히 사상가 니체의 자업자득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니체는 타락한 권력에 대해 독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순수한 높이에서 발원하는 권력에 대한 니체의 열정이 아마도 바로 니체 사상이 현실 속에서 남용되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제3제국 이후로 권력을 분석하는 일이 점차 이런 초월성에서 벗어나게 된 데에는 아마도 이런 끔찍한 남용 앞에서의 각성이나 겁이 알게 모르게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물론 니체가 순진하게 그런 형이상학적 권력만 갈구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실제로 다양한 인식작용에서 작동하는 권력관계를 서술했고, 타자를 곁눈질하는 인정욕구 속에 감추어진 권력욕구를 분석하였으며, 말하고 은유하는 행위와 실천이 실행하는 권력관계도 서술했다. 다만 그런 서술과 분석 속에서 그는 힘의 위계질서를 상정하고 증거하려 했다. 여기에 철학적이고 다소 형이상학적인 요구가 스며들어 있다. 현실적 권력관계를 냉정하게 서술하면서도, 끝까지 냉정하지는 못한 채, 그는 힘들의 정의로운 위계질서를 설명하고 요구하려고 했다.
우리의 과제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권력 관계를 초월한 순수한 높이를 설정하지 않은 채, 현실적 권력 관계에서 찔리고 터지고 때로는 알게 모르게 기생하는 모습을 그대로 서술하는 데 있다. 철학적 높이를 담보한 채 권력과 폭력 관계를 초월하여 그것들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기면서, 네 발로 기든 두 발로 기든 세발로 기든 혹은 n-발로 기든, 분석하기. 초월에서 포월(匍越)로 가기.
둘째 착지점--- 니체가 정치철학적인 관점에서 근대사회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 혹은 이의는 다음이다: 이미 오랫동안 기독교적 가치가 다른 철학적 사회적 가치와 결합해온 서구에서는 약자의 가치가 점점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혹은 이미 약자의 가치가 대세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약자의 도덕은 기독교와 결합한 과거의 가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연장했다고 여겨지는 민주주의적 현대 혹은 사회주의(평등을 원칙으로 삼는)에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는 여기에 강자의 힘으로 도전하고 그것과 싸우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이 싸움이 승산 없는 일임을,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싸움임을 뼈아프게 느낀다. 곧 저 고독한 높이가 망각될 염려를 하고 있는 니체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배하고 지배하려는 모든 것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적 병적 혐기(嫌忌), 현대적 지배혐오증”이 점차 정신적이고 가장 정신적인 것(예:객관적 학문) 속으로 스며들었다고.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니체는 인간의 모든 인식과 실천에 스민 현실적 권력관계를 서술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정신적-육체적으로 초월하는 순수한 높이에의 갈망에 시달리는 한편, 권력과 지배를 혐오하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애가 탄다(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그저 타자들을 곁눈질하면서 사회에 적응하는 수동성과 대립된 니체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들뢰즈도 그렇다). 사회주의적 평등에 대한 니체의 혐오는 좌파들로 하여금 니체가 파시즘의 원조라는 비난을 하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결코 파시스트는 아니다. 그런 비난은 어처구니없다. 그는 자신의 매부까지 참여한 안티세미티즘을 비난하기도 했고, 프러시아의 힘을 자랑하는 비스마르크를 조롱하기도 했다. 후대의 파시즘이 악용한 ‘힘과 권력’의 사상적 원조라고 니체를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마치 전체주의적 권력을 행사한 소련의 행각 앞에서 마르크스를 전체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러나, 전혀 실수를 안 했다고는 하기 어렵다. 당시의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잘못을 한 것은 아닐지라도, 자신의 손으로 책임지고 장악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순수하기에 위험한,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사상을 말한 것이다. 한 사상가의 철학은 책임 있는 문화가 되지는 못한 채, 땅바닥에서 뒹구는 말로 머물었고, 폭력적인 정치집단들이 그 말을 남용한 셈이다.
이제 우리는 현실 권력관계를 초월한 저 순수한 높이를 포기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적 평등 앞에서는 다소 혹은 훨씬 유연하게 처신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많이 부족한 사회(민주)주의적 형평과 분배를 강력히 요구해야 할 거이다. 앞으로 최소한 한 세대에 걸쳐 적극 도입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회적 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시스템을 우리는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그 즉시 모든 지배와 권력, 그리고 폭력이 없는 상태의 민주주의, 곧 이상주의적 민주주의(혹은 맹목적 민주주의)를 신봉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이상주의도 현실적 권력관계가 실행되는 현장을 초월한다. 일종의 유토피아적이며 평화주의적 근본주의. 그러므로 우리는 파시즘과 근본주의 혹은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에 착지한다.
셋째 착지점 -- 근본주의? 이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리는 한 번 물어봐야 한다. 도대체 우리는 폭력을 아는가, 라고. 이렇게 물어야 하는 이유는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적이며 가시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물리적인 폭력이나 억압적인 정치적 권력이 폭력인 것은 말할 것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폭력 분석으로서는 공허하다. 폭력 분석은 그것이 매우 고차원적인 문화적-교육적 기제 안에서 다양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서술하고 또 분석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흔히 말하는 교육 차원에서 개인들이 보이는 능력이나 미학 차원에서 개인들이 가지는 섬세함과 능력들은, 개인들이 인식하건 안 하건 또 그들이 인정하건 안 하건, 실제로 그들 사이에서 폭력으로 작용한다. 다른 예. 합리성도 일종의 지적 폭력임은 니체뿐 아니라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분석에서도 드러났다. 아무리 객관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평가하더라도, 그 관점은 사람들이 따르고 승복할 수밖에 없는 기준을 마련하는 일이며, 일단 그 기준이 확보되면, 비록 밖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폭력은 합리적 관리와 통제에 내내하게 된다. 더 나아가 가장 지적이고 보편적인 폭력은 니체가 지적했고 부르디외도 강조한 대로, 바로 지적-문화적 보편성 혹은 인류학적 보편성에 있다. “우리는 훌륭한 문화인이다”라는 긍지 혹은 자존심 자체가 폭력을 내장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지적 폭력들이 솔직하게 혹은 적나라하게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이면서도 동시에 문화적이고 지적인 가치를 표방하고 또 생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이들 지적 담론이 폭력이라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말과 감정과 육체에 깊이 새겨진 폭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미 가치가 보장된 지적 기준으로 여기면서 합리성과 보편성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것들이 더러운 폭력을 초월해서 깨끗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곤 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지적 착각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흔히 마르크스와 루카치 이후에 이야기되었듯이,‘허위의식’에 사로잡힌 것일까? 그런 설명은 너무 철학적이거나 주지주의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더 나아가 니체는 가장 이성적이고 고상한 철학적 사유 자체가 강력하고 강제적인 차별과 폭력에 의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느끼고 고발하였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은 폭력적인 것을 이성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데 있지 않다. 고도의 정신성 자체가 벌써 매우 폭력적인 배제와 훈련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폭력을 도덕적으로 배제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도 성공하기 어렵다. 도덕적 엄격함 자체가 이미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혹독한 강제와 폭력을 통해서만 실현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근본주의의 문제와 직면한다. 자신이 유일하고 보편적인 해결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사회적 갈등해결 방식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다시 폭력적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폭력 시스템 안에서 개인들이나 집단들은 때로는 인식하지 못한 채 때로는 많건 적건 어쩔 수없이 폭력적인 방식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단순히 도덕적 원칙에 근거해 비난한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자신은 모르거나 부인하지만, 폭력적이다. 순수하게 깨끗한 도덕적 원칙이나 우월성에 근거하기에 자신은 전혀 폭력적이 아니라는 이 부인(否認)은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폭력을 내면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달리 실존적 상황에서 개인들이나 집단이, 특히 상대적으로 약한 쪽의 개인이나 집단들이 어쩔 수 없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었음을 냉정하게 혹은 반성하면서 분석하는 담론은 폭력을 그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무조건 배제해야 할 ‘악’으로 보지도 않는다.
주의할 점이 있다. 만일 어떤 개인이 이러한 근본적 주장만을 되풀이하지도 않고 또 타자의 근거 있는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폭력적 방식을 무조건 비난하는 대신, 실천적으로 조용히 민주주의적 평등을 위해 혹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일한다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사랑할 만하다. 그러한 실천적 행위와 근본주의적 지적 담론은, 부분적으로 겹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서로 다른 것이다. 후자가 경우에 따라서 혹은 결과적으로 한 사회의 민주주의적 혹은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위해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일종의 지적 폭력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치 자신들의 손은 전혀 ‘더러운’ 폭력과 관계가 없다는 듯이 말짱한 혹은 해맑은 표정을 한다.
예는 많다. 교육현장에서 모든 폭력적 요소들이나 야만적 요소들을 추방하고 전인 교육을 추구해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근본주의. 민족적 움직임이나 열정은 노동 계급의 보편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는 민족 초월적 근본주의. 모든 생명은 고귀한 것이기에 어떤 생명의 씨앗에도 해를 입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성적 차별이나 민족과 종적 사이의 싸움에는 눈을 돌리는 생명 근본주의. 국가주의적 폭력뿐 아니라 ‘우리 안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씨앗이 있다면 아주 근절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파시즘에 빠질 것이라는 ‘일상적 파시즘’류의 근본주의. 모든 갈등과 전쟁은 나쁜 것이기에 근본적인 반전주의와 평화주의를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근본주의(곧 현실적인 상황을 초래한 시스템을 실제적으로 대체할만한 시스템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는 대신, 외교적이나 정치적인 전략을 넘어서 그저 보편적 반전주의만을 내세우는 평화주의). 또 소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타락시키기에,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존재 근본주의. 부드럽고 여성적인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할 때 그것이 일종의 실천적 전략임을 부인하면서, 무조건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보편성으로 여기려는 노자적 근본주의.
이론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미묘한 점은, 이들 근본주의가 대부분 정치적 파시즘에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며 일단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 듯하다. 파시즘이나 맹목적인 폭력에는 마땅히 반대해야 하지만, 무조건적이며 유토피아적인 근본주의도 적지 않은 점에서 권력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권력과 폭력브이 존재방식에 대해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티 파시즘은 매우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태도에 대한 전적인 기준으로 통용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파시즘을 잡는다면서 자신도 모르게 무반성적 근본주의로 떨어지는 것도 우리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파시즘을 비판하는 일은 기본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파시즘에 반대한다면서 근본주의로 떨어지는 일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근본주의로 빠지는 안티 파시즘이나 안티 폭력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파시즘 비판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앞에서 우리는 벌써 파시즘과 근본주의 혹은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가는 길을 찾았다. 이제 우리는 그 길보다 더 좁은 길, 곧 안티 파시즘과 근본주의 사이로, 안티 폭력과 근본주의 사이로 가야 할 듯하다.
넷째 착지점 -- 우리는 길을 찾은 듯하다. 이제 그 길을 가기만 하면 될 듯하다. 그러나 길, 잘 닦인 길은 그냥 ‘저 앞에’나 있지는 않다. 마치 정글 속에서 끊임없이 칼과 도끼를 휘두르면서만 길을 찾듯, 여기도 그렇다. 더구나 권력과 폭력이 아수라로 얽히고설킨 공간 아닌가.
권력과 폭력이 모든 악의 근원으로 여겨질 만큼 문화는 혼돈 상태에서 웅웅거린다. 그렇다. 그것들이 너무 커졌거나 너무 견고해졌다. 그러나, 근원? 수사적인 존재일까, 아니면 실체적인 것일까. 그 근원을 콱 틀어막거나 파내면 일은 깨끗하게 해결되는 것일까? 그래, 그런 희망이나 기대를 가질 만도 하다. 오늘날 인간이 도달한 문화를 위협하는 위험에서 나온 물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근원이 있는 것일까?
니체는 권력이나 폭력이 독립적인 실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만 뿌리 뽑거나 틀어막으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실체라고 여겨지는 않는다. 그것들이 아주 지대하고 괴기스런 영향을 끼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기능적 혹은 경향적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활동과 실천과 함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식, 의지, 욕구, 혹은 정치, 경제, 학문, 과학, 기술, 예술 등등의 발전이나 진행과 함께 발전하거나 진행하는 기능 혹은 경향. 다르게 말하며 모든 문화 활동과 함께 경향적으로 혹은 기능적으로 끼어들거나 내재하는 메커니즘 혹은 기제.
그렇다, 권력이나 폭력은 문화의 짝패이다. 문화로 극복하거나 뿌리 뽑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과 함께, 그것에 의하여, 때로는 심지어 그것을 위하여 존재하는 활동이나 작동이다. 문화가 상승하는 단계마다 기존의 잔인함이나 폭력을 승화시킨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승화’란 그것을 초월적으로 극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세련되게 만들고 가공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여기서부터 문화의 숨겨진 얼굴에 대한 니체의 다양한 발견이 생긴다.
“전쟁하는 것을 잊어버렸을 때, 인간에게서 아직도 많은 것을 (혹은 심지어 비로소 많은 것을)기대하는 것은, 공허한 들뜸이며 아름다운 영혼을 뽐내는 일이다(……) 문화에는 열정과 죄악과 심술궂음이 결코 빠질 수없다.”“인간의 끔찍함의 확장은 문화의 모든 확장의 부대현상이다.”“사람들은 문화와 문명 사이에 놓여있는, 밑을 알 수 없는 적대성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의 위대한 순간들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말하자면, 부패의 시대였다." “우리가 더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의 정신화와 심화에 놓여있다.” “나는 더 높은 문화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이동하는(그리고 어떤 중요한 의미로 그것을 결정하는), 언제나 더욱 커지는, 잔인함의 정신화와 숭배를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가리켰다.”
폭력과 잔인함에 대해 ‘양심’을 강조하는 인도주의적 관점도 니체는 이 맥락에서 혹독하게 비판한다. 양심은“흔히 믿듯이,‘사람 안의 신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잔인함의 본능이다. 더 이상 바깥으로 제 짐을 덜지 못하게 된 후, 거꾸로 돌아서게 되는 잔인함의 본능.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문화의 숨겨진 근거 중의 하나인 잔인함이 여기서 처음으로 조명되었다.”
결국 문화는 역사 속에서 잔인함과 폭력을 극복하기커녕 그것을 오히려 심화시키고 정신적으로 만들고 내면화시키는 꼴이다. 심지어 그것들을 없애려고 들수록 그것들은 바로 이 없애려는 시도 자체에 내면화되고, 이 시도를 통해 더 정신적인 모습을 한다. 따라서 모든 폭력과 갈등을 근원에서 근절하려는 근본주의적 시도는 기껏해야 그것의 이면이거나 그것의 정신적 짝패이며, 따라서 그것이 내세운 목표에 결코 도달할 수없다.
그런데 현재 문화에는 폭력에 대한 근본주의적 사고가 넘친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문화가 폭력으로 들끓을수록 그것에 대한 평화주의적 혹은 생태주의적 시각은 넘칠 것이다.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역설. 현재 사회가 갈등으로 부글부글하는 것은 사실이며, 갈등의 정도와 양상도 더 강화되고 세분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 반비례하여, 모든 갈등을 심리적으로 없애려는 심리적 치료방법들도 더 극단적인 양상을 띤다. 여러 이의가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정신분석적 치료가 비교적 갈등과 불안의 현대적 경향을 정면에서 마주보려 한다면, 이들 근본주의적 심리치료 방법은 아예 갈등의 근원을 없애고자 한다. 불교적 구분 없음이나 노장 사상에 귀의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문화의 존재 방식을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축소시키거나 환원하려고 하는 듯하다. 명확히 하자. 사회가 민주적이 될수록, 갈등이나 충돌은 그만큼 더 발생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부정적이지도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아마도 두 측면이 복합된 상태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갈등들의 싹을 무조건 싹둑 뽑으려고 하거나 죄악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어떤 사회적-문화적 차원에서 발생하는지 인식하고 평가하고 가능하면 해결할 방식을 찾는 일이다. 사회관계와 정치관계가 상이한 권력과 재화를 가진 개인과 집단들의 관계인 한, 거기에는 갈등과 폭력이 없을 수가 없다. 민주주의 사회가 약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확보하는 체제인 한, 이들의 요구가 갈등을 유발하는 듯하겠지만, 이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사회적 정치경제적인 차원에서 특권적 권력이나 폭력은 민주사회에서 부패를 조장할 뿐이다.
다만 이 지점에서 니체가 땅에 발을 붙이는 방식은 우리가 하는 방식과 좀 다르다. 그는 문화의 성숙과 개화가 잔인함을 정신적으로 만들고 심화시키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너무 약자의 고통에 연민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아니 이 연민을 혐오하고 저주하기까지 했다. 강한 생물체가 상처에도 불구하고 쑥쑥 자라듯이, 그는 건강하거나 높은 문화는 문화적 상처나 아픔조차 이기고 성장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의 사상은 아직도 사회적 차이나 문화적 차별이 강한 힘과 긍정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의 산물인 셈이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우리가 현재 누리고 또 앞으로 더 확장된 모습으로 누릴 문화 민주주의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없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다. 혹은 체질상 문화의 귀족적 존재방식에 더 무게를 두었다. 혹은 너무 철학적인 방식으로 문화의 존재를 사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그와 다른 걸음으로 착지한다. 더 낮은 곳으로 착지한다. 우리는 정치경제의 차원에서뿐 아니라 문화의 차원에서도 더 확대된 민주주의를 원하고 요구한다. 특히 정치의 차원에서 그렇다. 대중이 정치적으로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1인 1표의 정치적 권리는 다른 어떤 영역에서보다 진보적이다. 여기서는 비교적 대중과 민중의 손에 최종적인 권력이 놓여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차이의 열정을 모조리 없앨 수 있다고 나는 여기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갈등과 폭력을 깨끗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문화의 영역에서 전망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문화적 행위와 실천은 다른 어떤 영역에서보다 차이의 열정에 의해 뒷받침되고 또 이끌리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체성은 오늘날 무엇보다도 문화적 정체성에 의해 확보되고 구성되는데, 이 정체성은 그저 평화적 다원성 덕택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차이의 열정이 있는 곳에 차별의 냉정도 있기 쉽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다. 문화, 더 높은 문화는 인간에게 분홍빛 희망이면서 동시에 분홍빛 위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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