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호
니이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이전에는 신이 있었다는 말인가? 아니, 그것은 니이체 이전까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식 속에 신을 품고 살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이란 무엇인가? 로고스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의 형이상학이다. 그리하여 니이체는 그동안 인간을 지배하고 있던 이성과 논리의 세계에서 돌아선다. 결국 니이체는 이전까지의 모든 지배적인 담론을 회의하는 것이다.
특히 니이체는 도구적 이성이나 헤겔식의 거대주체에 대해 반발한다. 그것은 인간을 완성시켜나가는 행위가 아니라, 생명을 질식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다. “니이체는 아버지의 죽음, 신의 죽음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모든 이야기(또는 역사)에는 아주 싫증이 나서, 이 주제에 관한 끊임없는 논의, 그가 살던 헤겔적인 시대에 이미 유행하고 있던 이런 논의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다.”1)
그렇다면 니이체는 주체를 포기하고 말살하자는 것인가? 우리의 논의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1. 헤겔에 대한 반기
니이체는 헤겔을 거부하고 쇼펜하우어(1788∼1860)와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 근본적으로 헤겔이 ‘절대정신’을 통해 세계를 선한 것으로 보고 있다면, 니이체는 그것을 거부한다.
쇼펜하우어 또한 헤겔에 반대한다. 헤겔은 세계를 완전히 실재적인 것으로 보고, 세계 자체의 목적을 이 땅의 행복에다가 두었다. 그러나 세계란 원하는 것을 충족하게 되어도 여전히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처음부터 이성이나 과학의 세계와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 또한 사회적 질서를 재창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세계 과정의 핵심은 의지와 충동이다. 주관적이면서 논리적이지 못한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그저 의지이며 한 걸음 나아가 영원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이 없는 밤으로부터 삶으로 일깨워져서, 의지는 스스로를 끝도 없고 한도 없는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을 요구하고, 괴로워하고, 헤매이는 수없이 많은 개인들 중의 한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무서운 꿈을 꾸는 것처럼, 서둘러 그 이전의 무의식 상태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의지의 소망은 한이 없고, 그의 요구는 지칠 줄을 모른다. 그리고 충족된 소망들 하나하나는 새로운 소망을 낳는다. 세상에서 가능한 만족은, 의지의 요구를 진정시키고, 그 욕망에다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해주고, 그 마음의 밑이 빠진 심연을 채워주기에는 충분치가 못하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그리하여 그는 인간이 우주적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과 개별화로 이끄는 움직임 사이에서 분열되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그의 염세적 세계관의 출발이다. 그리하여 그의 술집에는 술취한 미학자들이 들끓고 지적으로 정신병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도피처로 삼고서 몰려든다.
키에르케고르 또한 헤겔뿐만 아니라 맑스의 계급없는 사회에도 반대한다. 그는 삶에는 편들지만 이론에는 반대한다. 그는 객관적인 이성보다는 인격이 끼어들고 결단을 내리는 행동과 삶을 추구한다. “내가 무엇을 인식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해야만 할 것에 대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나의 사명을 이해하는 것과, 신이 진정으로 내가 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은 진리를 발견하자는 것이요, 나에게 있어서는 진리란, 내가 그것을 위해 살고 죽을, 그런 이념을 발견하는 것이다.”(1835년 일기)
그는 ‘나Ich’, 이 ‘나’의 일회성과 내면성, ‘나’의 이런 내면성에 바탕한 삶을 찾아 헤맸다. 비록 세계가 멸망한다고 할지라도 키에르케고르는 ‘나’의 실존과 씨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하나의 체계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단순한 포괄적인 지식 이상의 것인, 인격적인 실존의 특색과 독자적인 활동 등을 낙인찍어 주는 자다. 그런 면에서 실존하고 있는 ‘나’에게는 일반적인 뜻의 완결된 개념적인 뜻은 없다. ‘나’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는, 언제나 완결되지 않은 존재이다. 여기에서 ‘나’는 보편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단독자와 개별자가 된다. 그리하여 현실은 개별적인 것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 개별적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것이 된다. 헤겔은 ‘나’를 전체 과정을 위한 단순한 하나의 계기로 끌어내리지만, 키에르케고르의 ‘나’는 스스로 개념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스스로 결단을 내리기를 원한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합리적인 것을 가려버릴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자유는 무한한 것이며, 무에서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제나 ‘비약Sprung’할 수 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은 역설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니이체는 말한다. “가상적 세계가 유일한 세계이다. 참다운 세계란 단지 허위로 가득찬 세계일 따름이다.” 니이체는 이러한 역설로부터 사유를 시작한다. 이성보다는 충동의 세계, 곧 그것으로 은유를 형성한다는 니이체의 전략은 예술 쪽에 많은 상상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헤겔이 가상과 환상을 버리고 현상에서 고차원적인 현실을 만들려고 했다면, 니이체는 예술을 ‘가상을 향한 선의’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헤겔식의 예술에 대한 개념의 지배는 다의적인 기표들의 합작으로 대체된다. 니이체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한 그것이 본질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본질 너머에 있는 ‘살아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미학을 통해 도덕과 형이상학에 대항하려는 야심찬 기획을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진리라는 것을 ‘현실’도 ‘이성’도 아닌 은유들, 환유들, 의인화들의 집단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2. 니이체의 등장
니이체Friedrich Nietzsche는 1844년 작센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1900년 8월에 죽었다. 그는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받고, 바그너와 친교하면서 세계에 대한 안목을 늘려 간다. 특히 초기 니이체 저작에 그들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는 『음악의 정신으로서의 비극의 탄생』이나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바이로이트의 R 바그너』 등의 표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첫번째 시기에 쇼펜하우어 철학을 가지고서 그리스 비극을 새롭게 해석해내고자 한다. 이 때 디오니소스적 요소(의지로서의 세계)와 아폴론적 요소(표상으로서의 세계)의 발견은 이미 쇼펜하우어를 뛰어넘어 새로운 예술의 이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때 바그너가 미래의 재단에 아폴론과 예수를 올려놓았다면, 니이체는 디오니소스를 그 재단에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니이체는 마침내 바그너와 결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가 보기에 바그너는 기독교·게르만적 예술 이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은 한낱 게르만 국가주의, 또는 민족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아아, 너마저도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니이체는 그런 바그너를 보며 절규한다.
두번째 시기에는 앞의 개념에서 나아가 형이상학에 반대하는 옛부터 내려오는 목소리와 냉정한 인식과 자유로운 정신에 대한 찬미를 듣게 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 『즐거운 학문』(1882) 등을 통해 자신이 그 동안 금기시했던 주지주의자, 소크라테스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오래 가지 않고 바로 세번째 시기에 들어선다. 그는 본격적으로 ‘권력에로의 의지’에 천착한다. 이때 『짜라투스트라』(1883)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학』(1887) 등의 대표 저술들이 산출된다.
니이체가 보기에 맑스는 너무나 저속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지나치게 기독교적이었다. 니이체는 그들을 조롱하고 싶었는 지도 모른다. “아, 위대한 사상이 이렇게도 많구나. 이것들은 풍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 위대한 사상들은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렸다가, 점차로 텅 비게 한다! 너는 네 자신을 자유롭다고 하느냐? 나는 너의 지배적인 사상을 듣고 싶지 않다. 너는 과연 멍에를 벗어난 그런 사람인가? 자기의 예속을 내동댕이칠 때, 자기의 궁극적인 가치마저 내동댕이치는 사람들도 많다.”(『짜라투스트라』) 이런 점에서 그는 부정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철학을 증대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어떤 긍정적인 것을 명확하게 제공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포리즘 형태의 독특한 문체로 모든 가치를 뒤집기만 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면 그런 비판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 또한 니이체를 정신착란증에 걸린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개인사적 비판이나 자구(字句)를 해석하는 데 그치는 인상주의적 비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니이체의 본질은 무엇일까? 니이체는 권력지향적이고, 파괴를 일삼고, 복수심이 강한 그러한 자였을까? 사람들은 병적인 니이체의 신체에 대해 너무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이 니이체를 곡해한다. 우리는 니이체가 서구 형이상학 전체와 과감히 씨름을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니이체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이성의 자리에 ‘권력’을 놓고, 도덕을 부정하고 삶을 긍정하겠다는 것이 곧 니이체다. 그런 지점에서 니이체는 새로운 근대를 연다.
3. 니이체의 권력이론
캘리니코스가 정리한 근대성과 포스트모더니티를 말하는 니이체의 테제를 살펴보자.2)
⑴ 개별 주체는 허구이며, 역사적으로 우연한 구성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내부에 담긴 무의식적인 충동을 놓칠 수 있다.
⑵ 자아의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 즉 상이한 권력 중심들이 지배를 획득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계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⑶ 권력을 향한 의지는 인간의 역사(정치, 사회, 도덕, 미학 등) 안에서 작용하는 끊임없는 갈등이다.
⑷ 근대의 과학적 합리성도 자연을 지배하려는 권력을 향한 의지의 한 충동인데, 이러한 충동을 통해서 불변하는 현실의 내적구조를 드러내게 된다.
니이체에게서 개인은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이다. 그는 사회적 삶의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의 사상은 반사회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반현대적이다. 때로 그의 ‘주인의식’은 반민주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는 비굴한 약자를 싫어한다. 그는 자기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강한 인간’을 꿈꾸었던 것이다. ‘초인’은 가치의 창조자요, 짜라투스트라는 가치를 알려주는 자이고, 디오니소스는 이 가치들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초인은 슈퍼맨이 아니라 라깡식으로 말하자면 기표로서의 본질이다. 그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꼭 기독교적 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니이체는 언제나 상징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모든 논리적인 글쓰기마저 비웃는다. 그에게 있어서 ‘신’은 서구 역사의 이성과 논리의 힘이었다. 그것은 플라톤에서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또는 칸트, 헤겔을 거쳐 추구되어온 존재와 사유의 일치, 통일성의 탐구로 정의되는 형이상학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신을 죽였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도덕에 대한 전쟁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도덕은 언제나 보다 나은 세계를 암시하는 계몽을 선동한다. 그는 관념론적·행복주의적·기독교적 도덕을 독일적인 도덕이라고 하면서 부정한다. 인도의 파괴의 여신 칼리가 상징하는 것처럼 살과 피로 이룩된 우리 앞에 놓여진 이 세상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새로운 도덕, 삶의 도덕을 찾아낸다. 여기에서 니이체의 ‘우리 자신이 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가 나온다. 즉, 짜라투스트라가 나온다.
그리하여 새로운 도덕율이 요구된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모든 이성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선언이다. 니이체는 말한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권력의 감정을, 권력에로의 의지를, 권력 그 자체를 드높여 주는 모든 것이다.” 이때 삶은 권력에로의 의지이다. 이러한 ‘권력’을 물리적인 힘이나 법률의 힘 따위로 잘못 파악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기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것이 권력인데, 니이체가 그것이 있을 때 선이고 그것이 없으면 악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지배권력의 힘 따위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니이체는 기독교나 그것의 이상(理想)이 악을 가장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기독교도들은 단지 신의 노예일 뿐이다. 그 노예들은 괴로움, 비천함, 겸손, 친절, 착함, 동정, 인내, 따뜻한 마음씨 등을 ‘선’이라고 말하지만, 니이체가 볼 때 그것은 거짓말이다. 자기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한 기독교도들이 스스로를 위안삼기 위해서 ‘진정한 선’을 나쁜 것이라고 속이고서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선’은 고귀하고, 힘세며, 아름답고, 풍부하다. 이것은 기독교의 선과는 반대된다. 그런데 노예들은 프란체스코처럼 노예의 철학을 만들고,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고귀한 ‘주인철학’을 매도한다. 본래 가치있는 것은 생존 자체요, 자연이며, 순수한 자연적인 모든 생성이다. 그리하여 니이체는 말한다. “나는 생성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첫번째로 생존을 미적으로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두번째로 모든 죄의 개념들이 객관적으로는 가치가 없다는 것과, 모든 삶이 필연적으로 공정하지 못하고 주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세번째로 모든 목적들을 부정하고, 인과관계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꿰뚫어보는 것이다.” 이제 그에 의해서 이성의 세계는 붕괴된다. 달리 말해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주체는 길을 잃는다. 이런 점에서 그는 현대 정신의 고갈을 보여주는 최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이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을 죽인 개인은 제자리를 찾게 되고, 타자나 광기들이 인정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된다. 그것은 곧 근대를 넘어선 현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제 신의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야 하는가? 바로 디오니소스다.
니이체는 세계의 역동성을 발견한다. 우리의 ‘나’는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자유는 필연성이고, 우리의 의지는 시간과 존재의 영원한 순환 속에서, 막대한 힘을 가지고 거듭해서 되돌아오는 그런 세계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의 이 막대한 힘은 늘어나지도 않고,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으며, 스스로를 창조하고, 파괴하며, 영원한 후퇴와 전진이 원을 그리는 가운데,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다시 파괴한다. 즉 디오니소스이다. 인간은 이런 세계 안에 있다. 인간은 이 세계와 이 세계의 영원한 생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나폴레옹과 마키아벨리조차도 種으로서 인간의 향상에 공헌하고 있다면서 감동을 한다. 그들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수한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놓거나 살해한 그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자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니이체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당시의 여러 상황에서 그들은 가장 역동적인 사유를 하는 그런 사람일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이 니이체를 매혹시켰지만, 그것은 니이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표적이 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은 히틀러조차도 니이체의 초인 사상으로부터 나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헤겔이나 바그너 식의 게르만 국수주의에서 발생한 인물이지, 니이체의 핵심을 이루는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니이체는 독일이라는 제국의 거만하고 공허한 국가주의에 반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진정한 독일인’에 대한 사랑이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발견한 독일인은 북방인과 아리아인의 속성이 죽어버린 독일인이었다. 그래서 진정한 독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게르만 정신(아폴론)과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정신(디오니소스)을 혼인으로 맺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고대 정신이 결핍된 독일인에게 욕을 퍼붓는다. “독일인은 인종적으로 조금도 순수하지 않고, 독일인의 가슴에는 이중적인 영혼들이 살고 있으며, 독일인은 다른 민족보다 불가해하고, 뚱뚱하고, 모순투성이고,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속을 헤아릴 수 없고, 뜻밖이고, 겁쟁이다.” 그의 독일인에 대한 노여움은 폭발한다. 특히 그는 루터처럼 교활하고 세속적인 사람을 싫어한다. 루터는 기독교 정신의 고전적인 덕목들을 모두 말살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니이체가 기독교 정신을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삶의 본능과 삶의 풍부함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욕설을 퍼부을 뿐이다. 그는 죄·양심·의지의 자유 등 긍정적인 힘을 발명해 내어 사랑·동정·겸손·희생 따위의 기독교 근본개념들을 삶에 적대되는 노예의 도덕이라고 증오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매달린 하느님’은 삶에 대한 저주이다. 교회는 모든 가치를 가치없는 것으로, 모든 진리를 거짓말로, 모든 공정한 것을 파렴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나마 기독교의 고귀한 것을 말살시켜 저속한 것으로 만들었기에, 그는 루터를 반란을 일삼는 불손한 농부이며, 비난만 하는 악마이며, 우악스럽고 무식한 사람이라고 증오하는 것이다.
‘니이체 읽기’는 그림이 없는 액자에 초인을 그려넣기이다. 그것은 니이체의 초인이라기보다는 독자의 초인이 될 가능성이 많다. “초인은 지나가는 것이요 몰락하는 것이며, 다리(橋)요 피안에 대한 동경이요, 그 혀로써 우리를 핥아주는 번갯불이요, 사람들에게 주입되는 광기요, 평균적인 인간과는 다른 발생 조건과 부양 조건 하에 최고로 성품이 좋은 이의 전형이요, 독자적인 생활 영역을 갖고 있고, 아름다움·용기·문화·가장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의 생활 양식을 위한 힘으로 넘치는 종족이요, 모든 커다란 사치를 즐길 수 있고, 덕의 명령이 압제를 할 필요가 없을 만큼 힘세고, 절약과 좀스러움이 필요없을 만큼 힘세고, 절약과 좀스러움이 필요없을 만큼 부유한 긍정적인 종족이요, 선과 악의 피안이요, 희귀한 식물들을 위한 온실이다.”(『권력에로의 의지』) 이런 면에서 그가 추구하는 초인은 이성적인 모든 것을 넘어선다.
그는 역설로서 진리를 말하고자 하고, 그의 문체에서 힘을 내뿜고자 한다. 그것은 은유와 계시의 세계이다. 그는 일부러 논리적인 것을 거부하면서 아포리즘을 선택한다. 논리로서 이 세상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탈구조주의자 식으로 말하자면 언제나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기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비극/희극, 선/악, 초인/해체 사이의 경계를 위험스럽게 거닐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니이체의 역동성은 나온다. 세계를 꿰뚫는 통찰이 나온다.
그렇다 해도 니이체는 필연성과 영원한 회귀를 주장하는 형이상학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론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라, 후에 라깡이 말하는 기표로 돌아가고자 하는 해체의 형이상학일 수 있다.
“니이체는 순간적인 것을 한 단계 올려놓고, 역동성을 찬양하면서, 현재와 새로운 것을 미화하면서, 그는 미적으로 동기유발된 시간 의식과, 순수한 내적 현존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3) 그런 면에서 니이체는 다분히 유미적이다. 니이체는 말한다. “예술만이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훌륭한 수단이며, 삶의 대단한 유혹이자 자극제이다.” 어쩌면 니이체는 세계를 ‘자기자신을 생산하는 예술작품’으로 본다. 예술의 불안정성, 다원성, 역설 등을 세계의 모습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창조하는 인간’이 되기를 열망한다. 그리하여 그는 괴테를 찬양한다. “괴테는 스스로를 훈육하여 전체적 인간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그는 자기자신을 창조했다.” 즉, 니이체가 보기에 괴테는 자기자신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자기 지시성을 향한 니이체의 열정은 자기 창조를 향한 충동과 결합되어 자신을 어떤 면에서 최후의 낭만주의자인 동시에 최초의 모더니스트로 만들고 있다.
4. 니이체 이후
알랭 투렌은 사회의 내부에 ‘이드의 세계’와 ‘사회운동의 세계’ 두 갈래의 흐름이 있다고 말한다. “ 니이체가 위치해 있는 이드의 세계는 질서의 규범들과 도덕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세계이다. 다른 쪽의 세계는 나와 나의 자유의 세계로서 주인이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게 하려는 사회질서에 투쟁하는 사회운동들의 세계가 있다.”4)
그것들은 대립되어 있지만, 그 대립을 인정할 때 투렌은 실증주의와 폐쇄적인 역사주의에 대한 니이체의 공격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순응주의, 실용주의, 합리주의에 대항하는 니이체의 역동성이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주체의 성립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개인과 전체로 환원시켜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흐름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구분시키지 않을 때 하버마스의 니이체 비판같은 것이 나올 수 있다.
하버마스는 헤겔의 ‘근대성의 자기비판적 재확인’이 근대성의 담론을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17세기 혁명의 결과로 인해 전통적 규범이 붕괴됨으로써 근대성의 자기정당화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체성의 구현체는 과학, 도덕, 예술뿐만 아니라 국가나 사회로 확대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주체성을 ‘자아 관계의 구조’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유한한 개별 인간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발전을 통해서 인간 역사의 기초를 마련하는 절대자와 동일한 것”5)으로 만드는 우를 범한다.
하버마스는 니이체를 비판하길, 겉보기에 보편타당한 그의 주장 뒤에는 단지 주관적 가치평가로 그치고 말 수 있는 권력 주장이 은폐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에의 의지’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파멸적 마조히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니이체의 “정신은 아무런 생각없이 자신의 가상 구조물이 가지는 권력과 자의성에 대한 향락에 심취한다. 세계는 어떤 의도와 어떤 텍스트의 근거 위에도 서 있지 않은 위장과 해석의 조직으로서 나타난다. 가능한 한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 감수성과 함께 의미창조적 능력은 ‘권력에의 의지’의 예술적 핵심을 이룬다.”6)
이러한 하버마스의 말은 학자의 태도라기보다는, 대중들이 니이체를 통해 현실을 도피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는 니이체 언설의 자구 해석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하버마스는 말한다. “권력이론은 과학적 객관성의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동시에 과학적 발언의 진리에 영향을 주는 총체적, 자기비판적 이성 비판을 수행할 수 없다.”7)
그리고는 니이체에 의해 시작된 이성비판은 자신과 같은 계열인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의해서나 만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버마스와 같이 이성적인 눈으로 볼 때는 모순적인 기표의 본질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보이는 니이체의 작업은, 역설적으로 환경철학(생태철학)이나 페미니즘 등에 많은 계시를 던져주고 있다. 자신이 모순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자기자신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니이체의 위대함은 합리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준거점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생의 철학』은 현대성의 지적 표현이면서도 주지주의로 치장한 도구적 합리성에 반발하는 니이체의 저술이다. 이런 점에서 니이체는 현대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최초의 인물로 볼 수 있다. 알랭 뚜렌은 말한다. “주체의 개념은 현대성을 합리화와 세속화로 환원시켜버린 계몽주의의 합리주의를 파괴하기 전에는 도출될 수 없다. 니이체와 더불어 사회적 삶의 매력이 다시 발휘되기 시작한다. 나는 그 한복판에 주체의 개념을 둘 것이다.”8) 즉, 니이체를 통해서 새로운 주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 니이체의 권력이론은 인간학적(바타이유), 심리학적(라깡), 역사적 방법(푸코), 형이상학 비판(하이데거, 데리다) 등에 의해 계승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들뢰즈처럼, 또는 다른 방식으로 니이체를 극복하고자 한다. 니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면서도 결국은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자 한다. 그러한 점에서 들뢰즈는 ‘니이체가 새로운 오디푸스 구조를 만들고 있다’9)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마침내 본격적인 현대성이 개화된다.◑ (문학평론가)
출처 : 배드민턴과 일상
글쓴이 : 겨울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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