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비트겐슈타인

[스크랩] 쿤과 비트겐슈타인 - 언어게임 관련

ddolappa 2008. 7. 5. 00:45
 

           쿤과 비트겐슈타인

                -패러다임과 언어 게임을 중심으로-





1. 머리말


인간이란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물음들은 무엇에 대한 단일한 특성, 즉 본질이 있다는 믿음 아래 있다. 본질은 어떤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이며, 부수적이고 가시적인 것들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진리라고 믿어왔다. 이러한 진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대에는 모든 사물의 배후에 있는 원형, 즉 이데아로, 중세에는 부동의 원동자인 의 모습으로, 근대에는 논리적인 확실성으로 진리는 그 자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진리는 언제나 그것의 수정체 같은 순수성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지속적인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기에는 너무나 먼 이상이었다. 끊임없는 진리 추구의 수난사 속에서 현대의 포스터모던 담론은 그것을 발견하기에 몰두하는 대신 그것의 본성을 묻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러한 담론은 진리의 본성이 허구임을 드러내고, 그것의 해체를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패러다임, 언어 게임, 개념 체계 등은 이러한 담론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본질주의에 대한 거부를 표명한다.

근대 이후 인류에게 눈부신 성장의 결과를 가져다준 과학은 자명하고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믿어져왔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서구의 지성사를 지배하고 있을 때 쿤(T. Kuhn)은 패러다임(paradigm) 이론을 통해 혁명적 반론을 제기한다. 쿤에 따르면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화한다. 관찰은 합법화된 기존의 이론에 의존하며(관찰의 이론 의존성),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론조차도 과학자 집단의 합의 아래 있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바뀌면 개념 체계가 바뀌고 따라서 사람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된다.(공약 불가능성)(2절)

이러한 쿤의 주장은 한 언어가 다양한 게임에서 각각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과 접맥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 대응 구조를 갖는다는 전기의 이론을 거부하고 언어의 쓰임에 주목한다. 언어에 본질적인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반영하는 다양한 언어 게임이 있다는 통찰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을 묻는 대신 그것의 용도를 묻는다.(3절) 패러다임과 언어게임은 맥락을 떠난 객관적이고 본질적인 체계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즉 쿤이 과학을 패러다임 내부의 합의에 따른 활동이라고 보았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언어게임 내부의 규칙 따르기라고 규정한다. 우리가 자명한 원리라고 믿는 것조차도 일종의 규약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다원성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라는 난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언어 게임, 패러다임은 공약 불가능한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 패러다임과는 명백한 차이를 갖는다고 본다.

그것은 언어 게임이 삶의 형식이라는 지반을 토대로 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언어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의 삶의 형식이 한 시대의 문화ㆍ역사를 반영함과 동시에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포함하는 중층적인 개념이라고 파악한다.(4절) 따라서 공약 불가능성이라는 난점을 가진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 게임을 통해서 이해될 때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의 난점을 극복하고, 다원성으로 이행해갈 수 있다고 본다.



2. 패러다임


급속한 과학의 발달은 실제적인 인간의 삶에 기적과 같은 풍요로움을 안겨 주면서 과학은 의심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과학이 인류의 이상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일 때 쿤은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화한다는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그러한 믿음이 오류라고 지적한다.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이렇게 변화된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전의 패러다임, 혹은 대안적 패러다임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서로 경쟁하는 정치 제도들 사이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경쟁하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선택은 과학자 사회생활의 양립되지 않는 양식 사이에서의 선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과학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과학은 절대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쿤은 과학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공동체 과학자 사이의 구성원에 의해서 공유된 신념, 가치, 기술 등에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모든 관찰은 이론 중립적일 수 없다.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은 퍼즐 풀이와 유사한 것이다. 정상과학은 퍼즐을 푸는 사람들이 확실한 해답을 알고, 풀이를 얻는 데 필요한 규칙과 지침을 터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퍼즐과 유사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과 지침은 정상과학 내부에서 인정된 것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정상과학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정상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이상 현상들이 누적되면서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때 혁명은 개인의 혁명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혁명이다. 이러한 전환은 기존의 연구 방법과 관점에 변화를 가져오고, 개념 체계의 변화를 동반한다. 달튼(J. Dalton) 이후에 화합물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구성비 불변의 법칙에 의해 정의된 그것에 가깝게 접근하게 되었다. 그러한 법칙은 이전의 개념 체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화합물의 개념에 따라 산이라든지 새로운 비 금속류, 소금들은 합금이라든지 용액으로부터 떼어 내어 화합물로 분류되었다. 즉 자연과 그 용어가 이전과는 다른 연관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물론 화합물이라는 말 자체는 그대로 사용이 되었지만 화합물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유사 관계가 변하게 되었다.

경쟁 관계에 있는 패러다임은 비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를 평가할 수도 없다. 패러다임들은 각각 다른 법칙과 가정들을 받아들이며, 전혀 다른 개념 체계를 갖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은 양립 불가능한 하나의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과 동일시된다. 따라서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 경험이다. 이러한 쿤의 과학관은 논리실증주의의 정통적 과학관과 명백히 대립된다. 논리실증주의에서 과학은 확증이 가능한 이론 체계로 간주되기 때문에 과학은 역사적으로 축적되면서 발전하는 것이지만, 쿤에 있어서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패러다임보다 우월한 것일 수 없고 모든 이론은 동일한 패러다임 안에서만 비교될 수 있다. 따라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배운다는 것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이 변화하게 되면 통상적인 문제와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의 타당성을 결정하는 데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난다.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타당성이 입증된 이론이라고 할지라도 절대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타당성을 갖는다. 요컨대 쿤에 있어서 패러다임과 무관한 순수한 객관 세계란 있을 수 없다.



3. 언어 게임


실험과 관찰에 의해 구축된 체계적 이론이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학문이라는 믿음은 근대 이후 학문의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과학적인 엄밀함만이 진리에 접근하는 통로라는 믿음 아래서 인식의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해 반성적 회의를 거듭했던 데카르트는 인간의 정신이 객관적인 세계를 표상한다는 뿌리 깊은 믿음의 선구자가 되었다. 확실한 인식을 통해서 사물의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는 현대에 이르러 언어에 본질이 있다는 믿음으로 대체되면서 본질주의ㆍ정초주의ㆍ표상주의 전통을 형성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본질을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가 단지 인간의 열망을 표출하는 활동이라고 주장하면서 본질주의를 비판하고, 다원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기의 철학적 활동이며, 전기의 활동과는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이며, 곧 지식의 한계라고 본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접근하는 방식은 지속적으로 언어에 집중되어 있으나 언어를 보는 방식에 따라 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눠진다. 전기의 그는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보고, 언어가 세계의 논리적 그림이기 때문에 그것이 고정적이고, 일의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후기의 그는 언어가 이미 짜여진 구도를 반영하는 그림이 아니라 인간의 의도와 욕구를 표출하는 활동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전기의 사고를 대표하는 그림 이론(picture theory)을 거부하고, 그것의 쓰임을 강조하는 게임 이론(game theory)을 내세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활동들의 전체를 언어 게임이라고 부른다.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활동의 일부, 또는 삶의 형식의 일부임을 부각시키고자 의도된 것이다. 언어가 활동이거나 삶의 형식이라는 것은 언어가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하나의 행위가 어떤 상황, 맥락 속에서 의미를 갖듯이 하나의 언어는 언어 게임 속에서 이해되어야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를 게임으로 파악한 것은 게임이라는 낱말이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하지만 공통점은 없는 다양한 대상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기 게임, 카드게임, 공으로 하는 게임, 몸으로 하는 게임 등을 모두 게임이라고 부른다. 그것들은 공통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유사성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유사성들을 가족 유사성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유사성들을 가족 유사성이란 낱말에 의해서 말고는 더 잘 특징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몸짓, 용모, 눈 색깔, 걸음걸이, 기질 등등 한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유사성들은 그렇게 겹치고 교차하기 때문이다.


게임들이 공통으로 갖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듯이 언어는 본질을 갖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 안에서 그것이 쓰이는 방식에 따라 언어의 의미는 결정된다. 모든 기호 각각은 자체로는 죽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그것에 생명을 주는가?-사용에서 그것은 산다. 전통적인 철학이 본질을 추구해 왔다면 비트겐슈타인은 게임 이론을 통해 차이와 다양성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주어진 일반 개념에 의하여 명명된 모든 사물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징이나 일련의 특징은 없다. 즉 그 사물들 모두가 공유하는 본질은 없다. 물론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잘 정의된 한계를 규정함으로써 일반 개념의 의미를 단일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개념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특수한 목적을 구획하기로 선택한 게임의 어떤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심지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마저도 본질적이지 않다. 과학적 정의에 있어서도 오늘날에는 A라는 현상의 경험적 동반 물로 간주되는 것이 내일은 ‘A’의 정의로서 사용된다.



4. 삶의 형식


인간의 실제적인 삶의 형식이 언어 게임을 이루기 때문에 언어에 본질적인 의미가 있을 수 없다고 본 비트겐슈타인의 통찰은 쿤이 과학의 확실성을 부정한 맥락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나 쿤이 하나의 패러다임이 일관성 있는 규칙과 완벽한 해석에 따르지 않고, 패러다임의 직접적 점검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함으로써 그 스스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과 그의 용어에 유사성이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듯이, 본질을 부정하는 점에 있어서는 유사성을 갖는다.


다수의 게임이나 의자나 나뭇잎에 공유되는 어떤 속성들을 논의하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용어를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익히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분류 층의 모든 구성 요소들에 대해서 동시에 모조리 그리고 거기에만 유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특성이 묶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전에는 관찰되지 않았던 활동에 직면하여 우리는 게임이라는 용어를 적용한다.


본질은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되는 쿤과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은 보편과 절대를 부정함으로써 다원성에 접근한다. 그러나 본질에 대한 부정은 통상적으로 상대주의 문제와 공약 불가능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곧바로 객관주의/상대주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번스타인(R. J. Bernstein)은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 자연과학의 철학에서 객관주의/상대주의 논쟁을 전면에 드러나게 했다고 보고, 언어 게임, 삶의 형식의 문제와 함께 이러한 논쟁을 복잡하게 얽히게 했다고 지적한다. 번스타인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이나 언어 게임은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공약 불가능한 개념이다. 그러나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 쿤의 패러다임과는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고 본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한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듯이, 언어 게임은 삶의 형식이라는 지반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쿤이 패러다임 간의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그의 이론에서 소통 가능성을 전혀 발견할 수 없는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을 언어 게임의 가능 근거로 설정함으로써 극단적인 상대주의로 나아가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언어 게임의 규칙 따르기다. 그리고 삶의 형식을 공유하는 한, 여기서 논쟁은 있을 수 없다. 삶의 형식은 다양한 언어 게임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관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인간이 공유하는 하나의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설명보다는 기술을, 생각하기보다는 보기를 권장한다.


규칙에 따라 행해졌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가령 수학자들 간에) 아무런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관해서는 예컨대 아무런 논쟁이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언어가 작용하는 (예컨대 어떤 하나의 기술을 주는)발판에 속한다.


나는 매우 특수한 상황들 속에서 자라난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지구가 50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가르쳐 왔으며, 그래서 그는 또한 이를 믿는다. 이 사람에게 우리는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지구는 이미 오래 전에 생성되었다고 하는 따위를.-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세계상을 주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이는 일종의 설득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삶의 형식을 갖는 것으로 봄과 동시에 종으로서의 인간이 자연적으로 경험하는 많은 경험 명제들을 삶의 형식의 일부로 봄으로써, 삶의 형식을 언어 게임의 지반으로 설정한다. 그것은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확실성이 아니라 우리가 종으로서 공유하는 경험적인 확실성이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다만 많은 경험 명제들을 가질 뿐이다. 팔이 절단된 사람에게 팔이 다시 자라나지는 않는다는 것이 그러한 명제 중 하나이다. 목이 잘린 사람은 죽으며 결코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이다. 삶의 형식을 언어 게임의 지반으로 설정하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은 과학혁명으로부터 출현하는 정상과학적전통은 앞서 간 것과는 양립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실상 동일 표준상의 비교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전적인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쿤과는 명백한 차이를 갖는다.



5. 맺음말


본질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것을 획득하려는 노력은 인간이 사유를 시작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지속되어왔다. 본질은 변화와 소멸을 경험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불변하는 것으로서 진리로 여겨져 왔다. 가변적인 현상들 속에서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믿음은 근대의 급속한 과학의 발달과 함께 정점에 달한다. 과학적 확실성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것이라는 믿음이 모든 학문 영역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 쿤과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믿음이 오류라는 점을 지적한다. 쿤은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과학이 점진적으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고, 모든 관찰과 실험은 패러다임 내부 과학자들의 신념과 가치와 기술에 의존하며 무엇도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각각의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세계이며 이들은 전혀 양립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세계의 그림이기 때문에 언어에 본질이 있다는 전기의 이론을 스스로 거부하고 비판함으로써 언어가 유동적인 인간의 활동을 표출하는 도구라고 보고,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의 게임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즉 그에 따르면 언어에는 본질이란 있을 수 없고 다만 쓰임만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은 본질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그러나 필자는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이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쿤의 패러다임과는 명백히 다르다고 보았다. 각각의 패러다임은 양립할 수 없는 체계를 갖기 때문에 공약 불가능성이라는 난점을 갖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은 인간의 일상적인 삶의 형식을 언어 게임의 가능 근거로 설정하면서 극단적인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다양한 언어 게임들을 제약할 수 있는 지반으로서의 삶의 형식은 자연적인 인간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역사ㆍ문화적인 세계관이다. 본질을 부정하는 그 자체의 특성만으로 패러다임과 언어 게임은 공약 불가능성이라는 난점을 갖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성으로서의 삶의 형식을 통해 이러한 개념들이 이해될 때,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허무주의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참고문헌


반즈, B. {패러다임}, 정창수 역, 서울: 정음사, 1986.

번스타인, R. J.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과학과 해석학 그리고 실천}, 정창호 외 역, 서울: 보광재, 1996.,

비트겐슈타인, L. {확실성에 관하여}, 이영철 역, 서울: 서광사, 1990.

_______. {철학적 탐구}, 이영철 역, 서울: 서광사, 1994.

쿤, T, S. {과학혁명의 구조}, 김명자 역, 서울: 까치, 2004.

핏처, G.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박영식 역, 서울: 서광사, 1987.






출처 : B눈O눈D의 회색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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