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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理 哲學 論考]를 中心으로 -
200004228 哲學科 3年 최정주(崔精周)
1. 들어가는 마당.
“비트겐슈타인은 20세기의 위대한 哲學者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食傷한 문장이 되어버렸다. 英美 哲學的 風土에서의 學에 대한 그의 影響은 두 말 하면 잔소리가 되는 격이다.
특히 論理 實證主義로 代表되는 그 學派는 비트겐슈타인이 젊은 시절 내 놓은 [論理哲學論考]를 聖經 대하듯 모시고 받들었었다. 왜 그랬을까?
비트겐슈타인은 [論考]에서 哲學의 方法論으로서 論理學을 제시하는 듯이 보인다. 世界는 言語로 對應될 수 있고, 즉 命題의 眞僞與否는 實在 世界와의 對應 關係에 의해 가려진다고 하는 主張이었다. 여기서 意味를 가지는 命題는 말할 수 있는 것이고 意味를 가지지 않는 問題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論考 7]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沈黙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 때까지의 西洋 哲學은 終末을 가지는 듯 했고, 실제로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점에서 意見을 같이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러한 生角은 [論考]에 대한 誤解들로 인해 起因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自身이 選擇한 이러한 [論考]의 命題들이 曖昧할 수 있다는 것을 人定하였지만, 어떤 狀況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理解할 수 있다고 하였다. 1) 이 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단 말인가?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神秘한 것2)으로 보았다. 이는 東洋 思想과도 깊은 聯關性이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哲學이란 무엇인가?]의 저자인 K.T.판도 仙佛敎와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3) 이러한 東洋의 思考와 西洋의 思考方式은 큰 差異가 있다. 西洋의 主流였던 基本的인 存在論은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이다. 東洋의 存在論은 비록 全體的인 意味를 가지지는 않지만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있는 것은 있고 또한 없는 것이다.”와 같은 存在論的 世界觀이다. 이 것만 가지고서 단순히 分析적인 것이고 綜合적인 것이라 쉽게 判斷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神秘的인 要素는 空間的으로 西洋이라는 곳에 살았던 哲學者들에게는 쉽게 理解될 問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現在는 여려 硏究가 進陟되어 비트겐슈타인 硏究者라면 이러한 시각을 잘 이해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問題4)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 言語로 表現되어지기 위해서 하나의 統一的인 基準이나 體系를 提示할 수는 없다. 그래도 그것을 東洋의 여러 思想과 생각을 同一視하려는 시도는 比較의 側面에서 좋은 것이다. 하지만 헛소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論理 哲學 論考]에 관한 글이기에 이 말할 수 없는 것, 즉 비트겐슈타인도 삶으로만 보여주었던 行動들에 대해서 어떻게 表現하여야 하는가에 대해 깊은 苦悶에 빠졌었다. 하지만 實在 世界와의 對應關係를 考慮하여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살던 그 모습의 哲學, 즉 삶의 哲學을 단지 敍述5)할 뿐이라는 매우 [論考]적인 結論을 내리게 되었다. 때문에 그의 삶 속에서 그리고 哲學에서 나타나는 逆說의 問題를 敍述해보기로 하였다.
2. 펼치는 마당.
2.1 - 老子의 逆說.
逆說이란 무엇인가? 이는 paradox를 飜譯한 것이다. para는 反對하다의 뜻이고, doxa는 常識的인 見解를 뜻한다. 때문에 常識에 反하는 見解를 意味한다.6) 그 중 ‘거짓말쟁이 역설’이라는 逆說이 있다. 이는 p와 ~p가 한 문장 속에 함께 있는 命題와 같은 것이다. 이에 대한 證明은 歸謬法을 통해 證明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러셀은 이러한 矛盾, 逆說이 자기 言及性으로부터 온다고 結論지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類型理論(계형理論)으로 提示한 部分에도 약간 言及되어 있다. 하지만 이 逆說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의 한 소피스트는 이 逆說의 問題를 결국 解決하지 못하여 自殺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7)
이러한 逆說은 그 曖昧함으로 인해 여러 混亂을 가져올 수도 있다. 老子의 逆說 또한 後世의 學者들에게 많은 批判을 받았다. “왜 道를 道라 하지 말라 하며 당신을 道라고 指稱하는가?“와 같은 批判은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逆說이다. 그렇지만 老子의 삶은 그에 대한 비판에 대해 답을 할 必要는 없었다. 비록 隱居하며 살았지만 그 깊은 뜻은 은거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대한 모든 關心과 그리고 矛盾된 現實에 대해 打開하며 뛰쳐나갈 힘이 있음에도 진정한 學을 위해 그는 참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는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對答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믿는 것에 대해 철저히 實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참된 완벽함이라 믿는다.
도경 1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경 4장. 道沖而用之或不盈
도경 21장. 道之爲物, 惟恍惟惚
道德經에는 道에 관한 여러 가지 言及이 있다. 이 道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노자에 의하면 ‘이것이 道다’라고 말할 수 있는 道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도, 즉 絶對的인 眞理가 될 수 없다. 絶對的인 眞理는 이른바 <도라 하지 않는 도>이다.8) 人間의 知識이나 말로는 ‘이것이다’하고 表現할 수 없는 不可思議한 것이다. 이것을 알았다고 하면 벌써 그것은 絶對의 眞理일 수가 없고 이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도리어 絶對的인 眞理가 들어있는 逆說的인 存在인 것이다. 다만 要請할 따름이다. 이 외에도 14장, 25장, 37장등의 道에 관한 直接的인 言及들은 전부 道의 性格이나 特性을 敍述한 것들이다. 4장에는 도의 쓰임에 있어서의 特徵, 21장에서는 特性을 說明하는데, 이는 분명 老子가 意圖하지 않았던 矛盾이 글로 表現된 것이다. 만약 老子가 이러한 자신의 矛盾을 생각했더라면 “나의 <道德經>을 理解한 순간 내 말은 헛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든지 “사다리를 끝까지 올라간 후에 그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9)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道라는 것은 분명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과 통하는 部分이 있다. 老子의 逆說을 제시한 것은 이 둘의 共通點을 찾기 위함이 아니다. 이 둘의 差異점을 찾아보기 위함이었다. 위에서 言及한 것처럼 이 둘이 提示하는 몸짓은 다르다.
2.2 - 비트겐슈타인의 逆說.
2.21 - [論考]의 世界觀.
[論考]에서 나타나는 言語 理論은 간단히 말해서 “그림이론(picture theory)”과 “眞理함수이론(truth-function theory)"의 두 가지로 되어 있다.10) 비트겐슈타인은 이 言語理論을 통해서 命題의 本性을 解明하는 것을 그의 目標로 둔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論旨를 이끌어 가기 위해 어떠한 先驗的인 存在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要素命題11)이다. 12) 이러한 要素命題들로부터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면서 비트겐슈타인의 存在論은 形成된다.
言語는 命題로 되어 있다.13) 모든 命題들은 要素 命題로 分析될 수 있으며 要素 命題의 眞理 함수이다. 要素 命題들은 직접 대상을 指示하는 이름들의 直接的인 結合體이다. 그리고 要素 命題들은 대상들의 直接的인 結合인 事態들의 論理的 그림이다. 事態들은 結合되어서 다양한 複合 事實들을 構成하며, 이 複合 事實들이 世界를 構成한다. 그러므로 言語는 眞理 함수적으로 構成되어 있으며, 그것의 本質的인 機能은 世界를 敍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言語의 限界를 갖게 되며, 결국 같은 말이지만 世界의 限界를 갖게 되는 것이다.
2-22. 말할 수 없는 것의 逆說.
이러한 世界觀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區分하게 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말할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는 그냥 보여질 따름이다. “그것들은 신비로울 따름이다”14)
어떤 것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敍述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命題로 表現된다. 여기서 참인 命題는 自然 科學의 全體이며,15) ‘말할 수 있는 것’은 ‘自然 科學의 命題들’ 혹은 ‘經驗的 命題들’과 同一하다.16) 그러면 數學, 倫理學, 美學, 形而上學 등의 命題들은 어떤 意味를 가지는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이들은 命題 속에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들은 言語 속에서 言語의 限界를 超越하고자 하며, 그리하여 世界를 超越하고 있기 때문에 無意味(senseless)하든가 혹은 헛소리(nonsensical)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形而上學的인 問題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反對의 立場을 취하고 있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道德的 價値, 美的 價値, 삶의 意味 등은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問題라고 말한다. 다만 보여질 뿐이라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는 엇지만 단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인 것을 區分하는 것이 哲學의 基本問題라고 생각하였다.17)
이제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態度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哲學的 命題들은 참, 거짓의 問題가 아니다. 이는 헛소리이다. “哲學的 著述에 基盤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命題들과 물음들은 거짓이 아니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다. 結論的으로 우리는 이러한 種類의 물음에 어떠한 答辯도 할 수 없다. 단지 그것들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立證할 수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命題들과 물음들은 우리 言語의 論理를 理解하지 못하는 狀態에서 나타나고 있다.”18)
이러한 言語 論理에 따르면 어떻게 實在가 있는가, 즉 어떤 事態들은 存在하고 다른 어떤 것은 存在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이다. 그런데 實在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意味 있게 말해질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19) 이것을 말하려고 하는 形而上學者들은 誤解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論考]7의 命題 속에서 분명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類推할 수 있다. 이것은 世界의 意味이다. 宗敎, 倫理學, 藝術 등은 形而上學과 같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이며 그것은 世界를 超越한 것이다. “世界의 意味는 世界 바깥쪽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 世界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價値도 존재하지 않는다. ... 왜냐하면 일어나고 또 存在하는 경우란 모두 偶然的이기 때문이다...偶然的이 아닌 것은 世界 안에 存在할 수 없다. ... 그것은 世界 바깥쪽에 놓여져 있어야 한다.”20) 이제 우리는 意味 있는 것과 無意味한 것 헛소리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言語의 限界 안에서만 事物에 대해서 意味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言語의 限界에 관해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결국은 無意味한 命題가 되며, 그 限界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한다면 결국 헛소리가 된다. 이러한 意味, 無意味, 헛소리를 區分하지 못하면 [論考]를 反形而上學的으로 誤解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헛소리들은 逆說的으로 더 중요한 것이다. [논고]의 서문에서 밝히듯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자신이 말하는 첫 번째 문제 즉 論理的 問題보다는 2번째의 문제인 倫理的 問題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비트겐슈타인은 비록 이전의 形而上學者들에 대한 批判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그러한 形而上學的인 問題들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에 있어서 形而上學, 倫理學, 宗敎, 그리고 藝術은 모두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여줄 수만 있는 超越的인 領域들에 속한다. 表現할 수 없는(혹은 神秘的인)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이다. [논고]의 전반적인 요점은 명백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엄밀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言語의 論理와 그 機能 역할을 명확히 區分함으로써 충분히 可能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論考]의 逆說이다.
비트겐슈타인의 倫理學 講義의 結論을 보면 그의 立場을 잘 알 수 있다. “나의 전반적인 性向, 그리고 倫理나 宗敎를 말하거나 記述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傾向은 言語의 限界에 부딪히고 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갇혀 있는 새장에 부딪히는 것은 완전히 또 絶對的으로 希望이 없다. 倫理學이 窮極的인 삶의 意味, 絶對的인 善, 絶對的인 價値에 관한 그 무엇을 말하려 하는 욕구에서 나온 것인 한, 그것은 科學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말하는 것은 어떠한 意味에서도 우리의 知識을 擴張시켜 주지 못한다. 그러나 倫理學은 결코 내가 개인적으로 깊이 敬意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人間 精神의 어떤 傾向에 대한 하나의 記錄이며, 나는 나의 삶을 위해서 그것을 경솔히 여길 수 없게 된다”21)
2-3. 마지막 逆說. -意圖한 逆說
老子에 대한 批判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批判은 사뭇 恰似하다. “道를 道라 하면 그것은 진정한 道가 아닌 것이거늘, 어찌하여 노자 당신은 道에 관하여 言及을 하시는지요?” 라는 질문과 “그는 哲學的 命題들은 陳述 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 그리고 나서 그는 침묵을 지키는 대신에 하나의 완전한 哲學書를 著述하였다.”22) “그렇게 말할 바에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낳다.”23)
老子에 대한 批判에 대한 老子의 對應은 沈黙으로 一貫한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2-1에서 老子의 對應 方法은 비트겐슈타인과 差異점을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窮極的인 意圖에서는 같은 것이다. 그 차이점은 다만 老子는 “사다리를 버려라”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은 “사다리를 버려라”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 같은가?
老子 思想에 있어서 言語란 方便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과 매우 恰似한 점이다. 왕필의 解釋에 따르면 오히려 孔子가 이러한 도에 대해 더 높은 境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삶의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이다. 이는 노자와 비트겐슈타인은 ‘方便을 선택하였다’의 문제이다.
中國 思想史에서 손꼽히는 천재로서 老子의 "道德經"에 대한 가장 權威 있는 주석서를 執筆한 것으로 유명한 思想家 왕필에게 "無가 萬物의 근본인데, 老子는 無의 思想을 펼쳤고, 孔子는 無를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老莊思想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을 왕필에게서 다분히 儒家 思想에 대한 老莊思想의 優位를 主張하는 답을 期待하고 던진 이 질문에 대해 왕필은 뜻밖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孔子는 聖人이다. 모름지기 聖人은 無를 體得하고 있는 存在이다. 또, 無란 가르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는 有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老子는 '有'의 테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에게 부족했던 '無'를 가르친 것이다." 요컨대 왕필은 春秋時代의 그 어지러운 世界에 대해 絶望했던 것은 孔子와 老子가 다르지 않지만, 노자는 有爲를 無爲로써 공격하는 것에 그친 아웃사이더였던 데 비해, 孔子는 이를 넘어서 現實을 變革하고자 奮鬪한 經世家로 이해했다고나 할까?
즉 이러한 立場에서 왕필은 孔子를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立場에서 누구를 더 높이 評價한다는 것은 그다지 意味가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았느냐에서 내가 배우는 점일 뿐이다. 어쨌든 노자와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언어의 方便性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類似點을 보인다. 이는 피할 수 없는 逆說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命題들을 理解하게 된 누구들지 결국 그 命題들이 헛소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 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그가 [論考]에서 궁극적으로 의도하고자 했던 解明을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깊은 反省을 통한다면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는 結論이다. 때문에 솔직한 것이며 또한 탁월한 것이다.
- - “言語와 世界의 本質은 무엇인가?” “言語와 世界의 限界는 무엇인가?” 와 같은 물음들을 提起하고 그러한 물음들에 答辯을 하고자 함으로써 ([論考]가 하려고 했던 것처럼) 결국은 그 물음과 答辯 둘 다가 엄밀히 헛소리를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認識하게 되는 過程에 의해서만 讀者의 處地는 나아지게 되며 世界를 올바르게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해서 讀者가 사다리를 오른 후에 사다리를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2) |
바로 이러한 逆說이 비트겐슈타인이 意圖했던 最高의 逆說이 아닐까 생각한다.
3. 나가는 마당.
지금까지 逆說의 問題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哲學을 보았다. 사실 逆說의 問題를 보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비트겐슈타인의 [論考] 전체 내용을 그냥 整理한 기분이다. 그만큼 그 逆說이 意味하는 바가 심오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흥미로운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哲學보다는 그의 삶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判斷했으며,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보인다. 톨스토이적인 儉素함,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東洋的인 意味의 그런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다만 그렇게 사는 것이 더욱 좋겠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하는 일종의 반증이 아니겠는가? 또한 친했던 사람들에게 보이는 그의 난폭한 성격, 항상 난폭했던 것 아니었더라도 어느 순간 그가 난폭해지는 모습을 보면 그는 분명 어떠한 形而上學的 問題를 깊이 體得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만큼 확실히 자신의 意圖를 表出한다는 것은 그만큼 솔직한 것이고 자신의 생각과 行動의 一致에서 오는 모습이리라.
中國 宋나라의 哲學者인 周敦頤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다. <太極圖說>의 創始者인 그는 삶의 문제에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目的 없는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聖人이 되는 것이 目標라면 당신은 聖人이 된 다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 와 같은 질문을 하며 人生의 가장 큰 目標는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작은 배를 타며 강을 거닐고 있는데, 빈 배가 와서 내 배를 가로 막으니 누구에게? 어떻게? 화풀이를 할 것인가? 내가 욕을 할 대상도 없고 목적도 없거니와.. 그냥 강을 거니는 것이라고 한다. 비록 나는 25살 밖에 안됐지만, 이런 경구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는 분명 아직 學의 깊이 매우 짧아서 오는 結果이지 싶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이란 참으로 흥미롭다. 비록 그의 哲學은 매우 難解하여 어떻게 그를 제대로 理解할 수 있겠는가 싶지만 나는 나대로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그의 삶은 당연한 것이고 숙제의 핵심에 걸맞게 그가 보여주는 逆說의 意味에서 나는 진정 지적 감수성을 전수 받는다는 생각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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