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번역본은 (한국어임에도!)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그걸 지적하는 게 명예훼손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지만 여하튼 역자는 집요하게 자신의 명예를 챙기고 있다(리뷰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나의 페이퍼는 알라딘의 책소개 페이지에서 블라인드 처리돼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임시 접근금지' 돼 있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다). 한번 더 이야기하지만, 출판사나 역자나 책을 전량 폐기하고 전면 개역판을 내는 게 그나마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다.
컬처뉴스(08. 02. 29) 랑시에르, 데뷔전에서 곤욕을 치르다
“맑스주의라는 단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사유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맑스주의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맑스주의이다.”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이 말을 살짝 비틀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라는 이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맑스주의자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이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알튀세르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올해 초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감성의 분할』(2000)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자크 랑시에르(1940~ )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랑시에르는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1965)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시킨 제자 4인방, 즉 피에르 마슈레(1938~ ), 로제 에스타블레(1938~ ), 에티엔 발리바르(1942~ ) 중 ‘셋째’로서 알튀세르가 그랬듯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분야에서 ‘파격적인’ 사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공식 데뷔작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통해 스승과 떠들썩하게 결별한 랑시에르가 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말이다.
랑시에르의 사유가 파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의 분야, 즉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파격적인’ 정의에서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랑시에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북유럽판에 수록된 인터뷰(2006년 8월 11일자)에서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저는 철학이 그 자체에게 뭔가 독특한 임무를 부여해 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독특한 대상이 없는 셈이죠. 따라서 저는 차라리 철학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위치/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정의에 부합하게 랑시에르는 문학, 정치학, 미학, 역사학, 사회학, 영화학, 교육학 같은 분과학문의 주제/대상뿐만 아니라 스테픈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설치미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 여정을 통해 미학과 정치를 조우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조해냈다. ‘감각적인 것의 배분/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 바로 그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는 ‘치안’(la police)이다. 즉,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가 바로 치안인 것이다. 그렇지만 치안이 단순히 어떤 구조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권력, 예컨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la politique)는 치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존재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편적 평등이라는 개념(“우리도 우리의 몫을 가지기에 합당한 존재이다”)에 근거해 각자의 몫을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다. 즉, 치안이 만들어놓은 질서(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거슬러 감각될 수 있는 것을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가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곧 민주주의와 동의어이며,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정치체제라기보다는 치안이 자신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체의 아르케(근본 원리)에 대한 부정이고, 아르케에 대한 이런 부정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라는 평등의 공리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인 셈이다.
또한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의 나눔/배분을 둘러싸고 형성되기에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미학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충실한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의 조우는 그 상동성(相同性)의 발견으로 가능해진다.
랑시에르의 저작으로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2005)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 그리고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정치학이라는 자신의 두 가지 테제에 근거해 랑시에르가 당대의 프랑스 정치현실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작품이다.
그 정치현실이란 길게는 실업자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난 1995년 이후부터, 짧게는 2001~0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정치현실로서, 프랑스 내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프랑스 공화주의가 자랑스러워하는 “자유, 평등, 박애”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하라고 외치면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민주주의는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며 민주주의의 요구(즉, 평등의 요구)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찬물을 끼얹고 있는 세태를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전혀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건드리기에 따라 ‘엔(사타구니/aine)만큼 후끈 달아오를 ‘엔’(증오/haine)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책의 날카로움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무디게 만든 번역 탓이다. 흔히 『국가』와 『정치가』로 옮겨지는 플라톤의 저서를 『공화주의』와 『정치』로 옮겨놔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그냥 그렇다고 쳐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낳은 정세 자체에 대한 무지는 조금 참기 어렵다.
가령 랑시에르가 이 책의 목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서론의 첫 번째 문단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가상의 침략 이야기를 꾸며내서 프랑스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젊은 여인,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 ……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렇게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민주주의 대한 증오』의 옮긴이가 “가상의 침략 이야기”로 옮긴 사건은 지난 2001년 7월 11일, 어느 23세의 여성이 파리의 지하철에서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6명의 흑인들에게 유태계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13개월된 아기가 폭행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해 프랑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말한다(*영역본 주석에는 200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됐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국내 치안의 문제는 이주민들 때문이라는 극우적 주장들이 빗발쳐 나오곤 했는데, 며칠 뒤 CCTV에 당시 사건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이 여성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옮긴이가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고 옮긴 에피소드는 지난 2004년 3월 14일 프랑스 의회가 공립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압도적인 찬성 표결로 통과시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문제를 말한다.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이기 때문에 “가면”이라고 옮기면 안 된다. 가면이라고 부를 만한 다른 이슬람 상징물은 부르카(안면 가리개)이다. 또한 이슬람 남자들은 히잡을 착용하지 않기 때문에 두루뭉수리하게 “청소년들”이라고 옮기면 원래의 맥락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옮긴이가 “초등학교”로 옮긴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은 프랑스의 소수 엘리트 양성기관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그랑제콜 준비과정에 입학해야 하는데, 이 준비과정에 들어가려면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한다. 그러고도 준비과정에서 2~3년을 더 준비해 과목별로 한 달간에 걸친 엄격한 경쟁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 그랑제콜의 하나인 파리고등정치학교가 지난 2001년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 출신의 학생들을 필기시험 없이 면접과 서류전형만으로 뽑는다는 새로운 입시계획안을 발표했고, 이는 극심한 찬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내놓은 단 한 가지 답변, 즉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말하며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안타깝게도, 우리는 공공연히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자들에게 랑시에르가 뿜어대는 그 십자포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지면의 한계로 더 쓸 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알라디너 로쟈님의 페이퍼(“반목의 철학, 불화의 번역” http://blog.aladdin.co.kr/mramor/1911702)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관심 있는 분들은 좀 귀찮더라도 영어본이나 불어본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은 분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요약본이라고 할 만한 랑시에르의 논문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를 읽으시면 되겠다. 이 논문은 『아듀 데리다』(맥밀란/2007)라는 데리다 사망 추모 강연회 논문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문제는 이 책이 비싸다는 것이다. 74.95달러. 정치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지식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것도 돈이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 하자 많은 국역본이 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현상’은 이 국역본의 완성도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텐데, 마지막으로 책을 사놓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라 자신을 책망할 몇몇 독자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한국어를 읽을 수 없는 랑시에르를 축하하며 한마디.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2. 29.
P.S. 이미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는데, 랑시에르는 아감벤과 함께 올 한해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가 될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앞다투어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적인' 철학자의 새로운 사유가 우리말로 번역/소개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리뷰의 제목대로 그의 '데뷔전'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이 점은 <호모 사케르>가 깔끔하게 번역돼 나온 아감벤과 대조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감성의 분할> 또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분할'이란 제목부터 '분배'나 '배분'으로 옮겨지는 게 더 적절했을 것이다(영어로는 'distribution'). 이 책 또한 불어본이나 영어본과의 대조없이 읽어나가는 건 고난도의 독해력을 요구한다.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의 사정은 좀 나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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