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권력 - 박정자 : Michel Foucault
2000-05-30 박 정자 : 푸코와 데리다 논쟁
권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감옥에 가거나 총에 맞아죽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는 권력의 추구와 쟁탈, 그리고 그 빼앗김과 이동의 연대기이다. 흔히 사람들은 권력을 왕 한 사람, 대통령 한 사람에 집중되는 정치 권력으로만 생각한다. 이것이 소위 주권이라는 사법적 개념이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즉 모든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데, 각자가 전적으로 자기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타인의 욕구와 부딪쳐 자신의 생존권이 부정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권리의 일부를 양도하여 모든 사람을 위압하는 공통의 힘을 하나 만들어낸다. 이때 권리의 양도는 상호간에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 계약이고, 모든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힘이 바로 국가권력이다. 이것이 소위 자연권 사상에 기초한 계몽주의 사상가들, 특히 홉스의 주권이론이다. 홉스는 계약에 의한 이 인위적인 거대한 힘을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기괴한 상상의 동물 리바이어던으로 불렀다. 그리고 상호간에 맺어진 사회계약의 이행을 정의라고 했고, 그 파기를 부정의(不正義)라고 했다. 왜냐하면 계약이란 그것을 제대로 지킬 때 합법이고, 그것을 파기했을 때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사회계약론이다. 사람들이 양도하는 최초의 권리가 주권을 구성하며, 따라서 정치권력의 모태는 계약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억압의 가설이 생겨났다. 권력이 계약의 조항을 준수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 섰을 때 그것이 바로 압제이며 억압이라는 것이다. 민중 저항권의 합법성 이론도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푸코는 라이히(Reich)가 주장한 이 억압의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선 그는 이 권력 이론이 갖고 있는 소위 《경제주의》적인 개념을 반박한다. 그것은 권력이 마치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구체적 물건이어서, 사법적 행위나 계약이라는 권리 개설 행위에 의해 그 전체 혹은 부분이 남에게 이양되거나 양도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돈으로 사고 파는 물건처럼 권력도 남에게 주거나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어떤 대통령이 자기 친구에게 후임의 대통령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거나, 라틴 아메리카의 소위 바나나 공화국들에서 군 장성들이 자기들끼리 대통령을 서로 돌려가며 했다는 사실은 이런 권력의 개념을 떠받쳐 주기도 한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이 이처럼 누군가에게 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재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사된다는 것, 그리고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권력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와 그 지배 관계 안에만 존재하는 무정형의 추상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권력이란 그 자체로 힘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유일하게 국가 원수에만 집중되는 단 하나의 정치 권력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힘의 불균형이 바로 권력관계이고, 지배관계의 비대칭(非對稱)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나 권력관계가 있다. 그것은 가정, 직장,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마치 모세혈관처럼 미세한 망을 형성하고 있다. 푸코는 라이히의 개념에 대립되는 이런 권력 개념을 잠정적으로 니체의 가설이라고 정해 놓는다. 이 가설에 따르면 국가 권력의 기원은 사회 계약이 아니라 전쟁과 투쟁에 의한 지배관계의 추구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합법적 저항권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게 된다. 계약을 파기한 불법적 불의(不義)의 권력에 대해 주권의 원래 소유자인 민중이 저항하는 것은 합법이며 정의라는 것이 저항권의 근거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권력과 부정의(不正義)의 권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력은 원천적으로 투쟁적 힘의 관계이며, 남을 억누르려는 탐욕적인 지배 관계라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라이히의 가설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푸코는 권력의 기원이 계약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역사적인 전쟁을 문제삼는 것은 바로 권력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것이다. 그의 텍스트는 세 개의 층위로 되어있다. 우선 가장 표면적인 층위에는 게르만 민족의 골(Gaule) 침입이나 노르망의 잉글랜드 침입 같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보는 여러 역사가들의 관점이 있다. 그리고 제일 밑바닥에는 푸코가 왜 이런 역사 기술의 측면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는가의 문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우선 텍스트의 표면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프랑스의 국가 형성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5-6세기경에 대체로 지금의 프랑스를 이루는 지역에는 켈트(Celtes)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켈트를 바탕으로 남쪽에서 침입해 온 로마인들과 동북쪽에서 침입해 들어온 게르만(German)족등 세 종족이 혼합하여 현재의 프랑스인과 프랑스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켈트는 인도-유러피안족의 하나로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갈라타(Galata)로 불렀고, 로마인들은 갈리아(Gallia)로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땅은 골(Gaule) 지방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켈트어였으나 지금은 지명이나 몇 개의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기원전 2세기말에 로마는 마르세이유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지방을 병합하여 이 일대를 로마의 한 주(provence)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현재 남불의 프로방스 지방이 되었다. 기원전 58년에 줄리어스 시저가 골 전토를 정복하여 기원 원년에는 프랑스 전체가 로마 제국의 하나의 속주(屬州)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5세기까지 근 5백년 동안 골인들은 로마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켈트어는 점차 소멸되고 사람들은 거의 라틴어만 쓰게 되었다. 이것이 갈로-로멩(Gallo-Romain)시대이다. 그러던중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동북쪽의 야만인인 게르만족이 침입했다. 그리고 침입자들 중 가장 강력한 프랑크(Frnacs)족의 수장(首長) 클로비스(Clovis)가 다른 만족(蠻族)들을 모두 제압하여 메로벵 왕조(428-751)를 건설했다. 그 부족 이름인 프랑시아(Francia)가 프랑스(France)로 된 것이 프랑스의 제1왕조이다. 그러니까 정복의 결과 형성된 왕과 귀족의 가문들은 정복 민족인 게르만인(프랑크족)이고, 그 신민을 구성하는 일반 백성은 골인들이었다. 11세기에 노르망(프랑스의 서북부 지방)의 정복자 기욤(Guillaume, 영어로는 William)이 잉글랜드에 침입하
여 왕과 지배층을 형성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렇게 아득한 최초의 전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프랑스의 왕과 지배계급은 천년이 넘도록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때는 17세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이유궁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으로 지금도 온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들여 그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이곳을 관광할 때 우리는 관광 가이드로부터 이 화려한 왕궁이 귀족들을 견제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절대왕권을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귀족과 왕은 한 통속의 지배계급이 아닌가라는 우리의 막연한 상식이 여기서 잠시 흔들린다. 그러다가 우리 조선 시대에도 조광조의 개혁이니,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이니 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떠올린다. 파리의 루브르궁을 떠나 파리 근교의 베르사이유궁으로 이주한 루이 14세는 5천명의 권세 있는 귀족들을 궁정에 거주하게 했고, 그외 5천명의 귀족들을 궁 근처에 살게 했다. 자기 영지를 떠난 귀족들은 지방에서의 세력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자기 영지에서 그냥 살수도 없었던 것이, 궁정에 거주하지 않으면 특혜, 관직, 연금, 이권 등을 얻을 수 없었다. 《짐이 본일이 없는자》라는 왕의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유죄선고나 다름 없었다. 베르사이유에서의 화려한 생활은 파산을 초래할 정도의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국왕의 교묘한 계략이었다. 모든 귀족들에게 호사를 강요하고 사치를 명예로 알게 함으로써 그들의 재력을 바닥나게 한 것이다. 이제 귀족들은 왕의 은혜에 기대지 않고는 일상 생활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했다. 왕과 귀족의 대립 관계에서 왕이 완전히 승리했다. 17세기의 귀족 역사학자인 불렝빌리에(Boulainvilliers)의 새로운 역사 담론이 나온 것이 바로 이때였다.
불렝빌리에는 우선 프랑크족이 갈로-로멩 지역에 침입하여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로마 제국을 격파할수 있었던 이유를 로마의 골 정복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정복자인 로마인들은 토착의 군사 세력인 골의 귀족 무사들을 무장 해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귀족을 새로 형성했는데, 그것은 무사적인 귀족이 아니라 행정적인 귀족이었다. 이 행정적 귀족들이 골의 로마화를 선도했고, 골인들의 부(富)를 끌어내어 로마에 유리한 재정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이 민간적 사법적 행정적 귀족들은 로마법에 정통하여 그것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능력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라틴어를 할줄 알았다. 새로운 귀족은 어학 실력과 사법 수행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 지배자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법률 지식에 정통하다는 것이 신흥 상류 계급의 구성 요인이 된 것은 그후 유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의 원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토착의 군사 귀족을 다 제거했으므로 로마인들은 라인강 저편에서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을 때 침략자들로부터 골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용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용병의 유지는 엄청난 재정을 필요로 했다. 골인들은 용병으로 나가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용병을 유지할 비용도 부담해야 했다. 자연히 산업은 정체되고 사람들은 가난해졌다. 소수의 프랑크 군대에 골이 맥없이 굴복한 것은 이런 총체적 황폐화의 상태 안에서였다.
그럼 이번에는 골에 들어와 갈로-로멩 체제를 격파하고 프랑스 왕국의 시조가 된 프랑크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금발 머리의 기골이 장대한 이 야만인들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우선 로마인들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무사적 귀족의 존재에서 나왔다. 게르만인들은 근본적으로 각기 자유스럽고 독립적인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사 귀족들의 위로 왕이 있기는 했지만 그 왕의 기능은 평화시에 분쟁을 해결하고 사법적 문제를 다루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수장(首長)을 뽑는 것은 강력한 조직과 권한이 필요한 전쟁 기간뿐이었고, 그것도 공동의 동의에 의해 선출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수장과 왕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 일치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국의 시조격인 클로비스는 민간의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수장이었다. 이 프랑크의 무사 귀족들은 완벽한 자유를 누렸는데, 이때 자유란 남을 존중하는 도덕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기주의, 탐욕, 전쟁에의 취미, 정복과 약탈에의 취미를 뜻하는 자유였다. 《무례하고, 거칠고, 용맹스럽고, 경박하고, 신의가 없고, 탐욕적이며, 참을성이 없고, 성마른 자유의 애호자》라고 불렝빌리에는 게르만의 야만인을 묘사했다. 이들은 너무나 자유스러워서, 다시 말하면 너무나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하여 자신들이 뽑은 전쟁의 수장이 로마적 의미에서의 군주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유스럽게 지배와 정복을 탐하여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다. 전쟁의 수장이었던 왕은 골 영토의 주인이 되지 않았고,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했다. 말하자면 아득히 먼 봉건제도의 시작이었다. 그 유명한 스와송의 항아리의 일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전쟁의 수장이며 민간의 재판관인 클로비스가 전리품을 분배하면서 한 항아리를 보고 《이건 내가 가져야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전사가 일어나 《당신은 이 항아리를 가질 권리가 없소. 아무리 왕이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 가져야 하오.》라고 말했다. 이 일화를 특별히 발굴하여 역사의 상식으로 통용시킨 것은 불렝빌리에였다. 이처럼 왕과 대등하던 군사 귀족들은 점차 권력과 부를 잃고 서서히 왕권에 예속된다. 스와송의 항아리의 두 번째 일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에게 항아리를 갖지 못하도록 했던 무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클로비스는 세월이 한참 흐른후 군대를 사열하다가 그 무사를 발견하자 커다란 도끼를 집어들고 《스와송의 항아리를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 무사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귀족에 대한 왕의 권한이 강화되는 순간이었다. 어떤 과정으로 이런 결과가 생겨났을까? 처음에 게르만인들은 골인들에게서 무기는 몰수했지만 땅은 그대로 소유하게 했다. 그들은 원래 싸우는 것이 직업인 무인들이었으므로 농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골의 농민들에게 지대(地代)만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 그들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대가로 게르만의 무사들에게 현물지대를 지불했다. 산업과 안보의 역할분담인 셈이다. 봉건 영주와 소작인 사이에는 행복한 공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수의 군대가 거대한 나라를 정복했다는 사실은 프랑크의 군대가 골 지방에서 당분간 전쟁 태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만 수장이었던 사람이 군사 체제의 연장에 따라 민간의 수장을 겸하면서 그 권력이 강화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귀족에 대한 왕권 강화의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러나 무사 귀족의 권한 박탈이라는 현상의 뒤에는 왕권과 골의 구 귀족 사이의 연합이라는 좀더 섬세하고 미묘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프랑크 군대가 골에 들어왔을 때 가장 고통을 느낀 계층은 농민이 아니라 (그들은 프랑크의 무사 계급과 행복한 공존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땅과 무기를 몰수당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토지가 없었으므로 유일하게 남은 도피처는 교회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로 도망쳤다. 교회로 들어간 골의 귀족들은 교회 체제를 발전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유포시킨 신앙 체계에 의해 민중들 사이에 깊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교회 안에서 라틴어 실력을 연마하고 로마법을 갈고 다듬었다(중세 이전의 교회는 강력한 사법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갈로-로멩 시절의 신흥 귀족이 라틴어와 사법 지식에 능통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한편 점차 힘이
강해져간 프랑크의 군주들은 자기 동족인 게르만의 귀족을 견제하여 로마 방식의 절대 왕권을 건설할 필요를 느꼈다. 이때 그들은 민중에 그토록 영향력이 있고, 또 라틴어 실력과 함께 로마법에 그토록 정통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디에서 연대 세력을 찾을 수 있었을까? 군주가 절대 왕권을 형성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새로운 군주들의 자연스러운 동지는 당연히 교회에 피신했던 골의 옛 귀족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라틴어와 로마법의 지식, 그리고 사법의 수행 능력과 함께 절대왕권의 커다란 연합 세력이 되었다.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의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다. 게르만의 귀족들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 것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게르만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다. 중세 말까지 백작이건 남작이건 귀족들은 모두 문맹이었고 유일하게 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들은 성직자뿐이었다. 다시 한번 언어와 권력과의 미묘한 관계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 잡는다. 여하튼 모든 새로운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교회와 왕은 귀족들을 계속 무지 상태에 남겨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교회가 피안의 삶을 강조한 것도 그런 계략의 일환이었다. 소유와 지배에 탐욕스럽고 현재에 집착했던 게르만의 무사들은 점점 나약해져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마침내 재산과 권한을 완전히 박탈당한 기사(騎士)적 인간, 혹은 십자군적 인간으로 변신했다. 십자군 원정이야말로 귀족이 완전히 피안의 세계를 지향했을 때 일어난 당연한 결과라고 불렝빌리에는 말한다.
그러면 불렝빌리에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이런 식의 역사 기술은 불렝빌리에가 처음이었다. 사실상 하나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이미 그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 역사를 말하는 시대, 그 역사를 말하는 사람의 성향과 숨은 의도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모든 역사 기술은 언제나 어느 편인가의 권력의지에 물들여져 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순결한 역사 기술은 하나도 없다. 6.25의 북침설을 주장하는 수정주의 이론에는 이승만 이래의 남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주의 성향 세력의 의도가 있고, 이미 4세기경에 임나(任那) 일본부라는 식민지를 한반도에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역사 기술은 식민지 침략의 저의를 정당화하고 있다. 역사는 단순히 여러 힘의 관계를 분석하고 판독하는 틀이 아니라 그것을 수정하고, 역사적 앎의 질서를 통제하면서, 자기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자기의 역사 기술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은 결정적으로 전략적 고지를 차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불렝빌리에의 관심은 최초의 전쟁에서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강자는 약해지고 약자는 강해졌는가의 문제이다. 처음에 프랑크의 귀족들에게 힘을 준 것은 그들이 직접 토지를 취득했다는 사실이다. 토지의 직접적인 소유주로서 현물 소득을 올림으로써 부(富)를 축적했고, 그 부를 기초로 힘을 확보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힘을 가져다 준 바로 그 요인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광대한 토지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며 점차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왕으로부터 멀어져 자기들끼리의 전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싸움만 할줄 알면 되었으므로 그들은 교육, 훈육, 라틴어 학습, 학문적 지식 같은 것을 모두 소홀히 했다. 한편 프랑크 침입 초기에 토지를 완전히 박탈당하여 극도로 무력한 존재가 된 골 귀족들은 교회로 들어가 민중에 대한 영향력과 법률 지식을 키웠다. 이것이 그들을 왕의 조언자로 만들어 조금씩 왕에게 가까이 가게 했고, 결국 과거에 그들로부터 빠져나간 경제적 부와 정치권력을 다시 얻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불렝빌리에의 숨은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귀족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 왕과 맞먹었던 권력과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겉껍데기 이름만 남은 채 무력한 계급으로 전락한 귀족들에게 분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반란에의 호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앎, 오로지 앎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조차 소홀히 했던 권력 체계의 한 중요한 고리, 즉 앎을 재탈환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이 그의 비장한 웅변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였다.
17세기이래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 조직을 연결하는 앎-권력의 메카니즘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는 푸코가 불렝빌리에의 역사 담론에 매혹된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불렝빌리에는 권력의 기원이 전쟁에 있음을 드러낸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앎과 권력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부각시킨 역사가였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의 앎을 누가 제공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실질적인 권력의 소유자는 그 앎의 제공자이고 군주는 사실상 그의 꼭두각시일 가능성이 있다. 불렝빌리에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한 대상은 루이 14세의 앎을 형성해 주던 왕실의 행정감독관이나 재정감독관이었다. 왕의 교묘한 정책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완전히 무력한 계급으로 전락한 귀족들에게 재판관, 검사, 법률가, 재판소 서기들의 앎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으로 그들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함정에 몰아 넣었으며 그들의 사법권마저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행정감독관들의 앎 또한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어 들어가는데 기여했으므로 귀족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왕이 권한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끌어내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앎 덕분이었다. 이것은 행정적인, 특히 경제적 수량적 앎이며, 효과적인 조세제도와 세금 징수에 대한 앎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 14세 시대에 국가의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있던 이 행정가들과 법률가들은 무슨 계급이었는가? 그들은 제3신분,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지였다. 서양 역사에서 앎-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였다.
부르주아지는 수천 년간의 정복과 지배의 역사 속에서 사상 처음으로 총칼이 아닌 앎을 지배의 무기로 들고 나온 계급이다. 그리고 그들의 앎은 17세기까지는 어디까지나 법률적 행정적 앎이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제3신분은 역사에 정치적 기획을 투입하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최초의 법이나 힘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기서 자신들의 모습을 재발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중세 이전의 역사에서 아무리 눈을 씻
고 찾아 보아도 자기들 조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자연법에 근거하여 사회계약론을 주장하며 선량한 미개인을 부각시켰던 루소의 사상은 바로 당시 특권계급의 먼 조상인 게르만의 역사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제3신분의 염원의 표출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대해 이처럼 소극적이었던 부르주아지가 적극적으로 역사를 정치 투쟁의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은 대혁명 이후 19세기부터였다. 시예스(Sieyes), 오귀스탱 티에리(Augustin Thierry), 기조(Guizot)등의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정복과 피지배라는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도시와 민족이라는 두 축 위에서 제3신분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도시의 가설에 의하면 게르만의 정복자와 골의 피정복자는 행정권과 정부 장악을 놓고 서로 경쟁을 했는데 그것은 농촌과 도시의 대결이었다. 농촌은 게르만이고 도시는 골의 민중을 뜻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이 원래 자기 나라에서 갖고 있던 자유를 골인들에게도 허용하여 갈로-로멩 시절부터 국토의 여기저기에 자치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5세기에 침입한 게르만은 야만인들이었으므로 도시에는 관심이 없이 광활한 들판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10세기까지는 도시가 패배했으나 10-11세기부터 북쪽에서는 북구의 모델에 따라, 남쪽에서는 이탈리아의 모델에 따라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도시 사회가 승리했다.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라 도시가 가진 부(富),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의 삶의 방식과 존재 양식, 그리고 혁신적 사고와 행동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의 승리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를 보편계급으로서 정당화해주는 가설은 그 무엇보다도 민족의 개념에 의해서이다. 민족(nation)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긴 17세기에 그것은 귀족과 동의어였다. 국토의 단일성이나 특정의 정치적 형태, 혹은 어떤 특정의 지배권에 대한 복종 체계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 때의 민족 개념에는 국경이 없고, 한정된 권력체계가 없으며, 국가도 없었다. 그것은 공통의 신분, 관습, 풍습, 그리고 고유의 법(국가적 법이 아니라 한 집단 내부의 규정)을 가진 개인들의 집단일 뿐이었다. 따라서 민족은 국경선과 제도들의 경계선을 초월하여 형성되는 단일한 신분을 뜻했다. 말하자면 민족은 바로 귀족이었다.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 모든 나라의 귀족들은 같은 민족이었다. 그들과 대립하는 세력은 국경선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라 안에서 다른 관습과 법을 가진 다른 신분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민족 혁명의 개념이나 종족의 개념이 나왔고, 마침내 계급의 개념이 나왔다. 서양인들이 계급 투쟁을 말할 때 그들의 아득한 집단 무의식 속에서 계급의 적은 곧 타민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정할 수 있다. 한편 절대왕정 옹호자들의 가설에서는 왕이 민족을 구성하는 절대 요인으로 떠올랐다. 그들에 의하면 단일한 땅 위에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풍습, 그리고 단일한 법을 가진 다수의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민족은 아니다. 집단 구성원 각자가 살아있는 육체적 실체인 왕과 법률적이며 동시에 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그것이 민족이 된다.
마침내 대혁명을 기점으로 부르주아지의 민족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풀렛을 썼던 시예스에서부터 민족은 곧 부르주아지를 뜻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명시적인 법과 그것을 제정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을 정의하는 요소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존속하고, 그들의 법률이 적용되고, 그들의 입법기관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직업》과 《직책》이다. 직업이란 농업, 수공업, 공업, 상업, 자유업 등이고, 직책이란 군대, 사법, 교회, 행정부 등을 가리킨다. 하나의 민족은 상업, 공업, 수공업의 역량이 있을 때만, 그리고 군대, 사법부, 교회, 행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있을 때만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역사 안에 진입하여 역사적으로 존속할수 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민족을 창조하는 것은 계약도 아니고, 법도 아니며, 합의도 아니다. 또 공동의 법률이나 입법기관을 갖지 못하다면 아무리 재화나 직업 수행의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민족을 구성할 능력은 있으나 실제로 민족은 아닌 것이다.
18세기말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것이 바로 이 가설이었다. 당시에 실제적으로 농업, 상업, 수공업, 자유업들이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 여러 가지 직업들을 수행하는가? 제3신분, 오로지 제3신분이다. 누가 군대, 교회, 행정부, 사법부를 움직이는가? 물론 중요한 직위는 귀족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예스는 이 기구들의 10분의 9가 제3신분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프랑스에는 공동의 법이 없이, 귀족에 적용되는 법, 제3신분에 적용되는 법, 성직자에 적용되는 법이 있을 뿐이고, 입법기관도 없었다. 프랑스는 민족을 구성하는 형식 여건인 공동의 법과 입법기관이 없으므로 민족국가가 아니다라는 말이야말로 제3신분의 노골적인 정치 구호인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민족의 역사적 실체적 존재를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있다는 말은 《제3신분이야 말로 완벽한 민족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망명귀족 몽로지에(Montlosier)는 왕권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가함으로써 대혁명 이후 완전히 몰락한 귀족계급의 아픈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세 이래 프랑스의 특권계급이 단순히 게르만의 정복 민족으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골, 로마, 게르만의 세 지배제도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원래 켈트족만이 있던 골이나 로마가 지배하던 갈로-로멩 시대에도 지배계급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 시대의 지배제도가 혼합된 특권계급이 바로 민족이었다. 그리고 이들 지배계급을 제외한 나머지 신민과 농노들은 귀족계급과 동등한 다른 민족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민족의 밖에 있는 존재들일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민족이 아니었다. 그런데 왕정은 이 이름 없는 거대한 집단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인민으로 만들었다. 조공 신민들에게 조공을 면제해주고, 도시들에게 권리를 부여한 것등이 그것이다. 이 새로운 민족, 새로운 인민이 다름 아닌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이다. 왕은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새 계급의 활력과 저항을 이용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 반란등 프랑스의 역사를 통털어 모든 민중 봉기의 뒤에는 왕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고 몽로지에는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이 왕정으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왕정은 혼자서 국가 권력을 거머 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제3신분에 맡겼다. 이제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떠맡았다. 법률, 행정, 재정등 실질적으로 국가 전체를 떠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 껍데기의 반대 세력인 귀족은 이들에게 조그만 권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혁명으로 분출되었다. 몽로지에는 이 부르주아 혁명을 왕이 자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속적으로 귀족의 권리를 빼앗아 그것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 주는 과정의 최종 단계는 결국 마지막 한 줌 남은 왕의 권한까지도 그들에게 내어 주는 단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대혁명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왕정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그는 비꼬았다.
이제 텍스트의 세 번째 층위를 말할 차례이다. 푸코는 무슨 말을 해도 언제나 권력의 문제로 돌아간다. 광인을 말할 때도, 섹스를 말할 때도, 감옥을 말할 때도 그는 언제나 권력을 말하고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광대한 삼림 속의 행복한 미개 시대로부터 음모와 모험이 가득찬 암흑의 중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이미지 속에서, 그리고 사소한 에피소드도 엄청난 진실의 암호가 되는 그런 역사의 잔 재미 속에서, 우리는 그가 권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권력은 왕조의 역사가 강변하듯 정복의 당당한 권리가 아니고, 17세기 영국의 의회파들, 또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듯 계약의 산물도 아니다. 권력이 먼 조상의 정복에서 유래했던 시대도 물론 있었다. 근대 이전 왕정의 시대까지가 그랬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보편계급을 자처하며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근대 이후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서, 다시
말하면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단순한 격언 속에 감추어진 무서운 앎-권력의 도식이야말로 푸코의 일생을 관통하는 열쇠의 말이다. 이 앎-권력의 지배구조가 17-18세기에는 인간의 육체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으로 나타났고, 19세기, 그리고 20세기에 와서는 종(種)으로서의 인간 전체, 국민 전체를 생물학적으로 조절하려는 권력의 야심으로 나타났다. 소위 생물-권력(bio-pouvoir)인 것이다. 나치즘이 극단적인 예이지만 현대의 가장 민주적인 국가에서도 속깊이 감추고 있는 정책이다. 불치병 환자나 광인들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이 북구, 프랑스, 미국에서까지 과거에 비밀리에 행해졌고, 또 어쩌면 지금도 행해지고 있을 것이라는 기사가 얼마 전에 나온 적이 있다. 푸코 사후 십 수년 만에 그의 가설을 밑받침하는 실체가 드러난 셈이다. 이 새로운 생물-권력이 이처럼 오만하게 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것은 사회 전체를 위험한 불순분자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미명하에서이다. 《사회를 지켜야 한다》(Il faut d fendre la soci t )라는 책 제목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생물-권력 담당자들의 구호를 야유하기 위한 역설적인 제목인 것이다.
모든 현상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계략과 음모를 찾아내는 푸코의 담론은 20세기 철학의 지평을 단숨에 뒤집어 놓은 전복적이고도 흥미진진한 가설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모든 현상의 뒤에 X 파일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만연된 음모설의 먼 진원지가 아닐까. 음모가 있다면 과연 누구의 음모란 말인가? 권력이라는 한 마디 말로 그것을 지칭했지만 권력은 구체적으로 누구라는 말인가? 푸코 자신도 권력은 실체가 아니고 단지 추상적인 관계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기본 개념인 시리즈의 역사, 또는 에피스테메의 갑작스러운 단절과 변환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것과 함께 그의 가설의 최대 취약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의 가설은 여하튼 재미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생긴다는 지배관계, 인간 사이의 그 영원한 권력관계가 있는 한 그의 가설은 오래도록 그 풍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2000-05-30 박 정자 : 푸코와 데리다 논쟁
권력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감옥에 가거나 총에 맞아죽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람들은 권력을 추구한다.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는 권력의 추구와 쟁탈, 그리고 그 빼앗김과 이동의 연대기이다. 흔히 사람들은 권력을 왕 한 사람, 대통령 한 사람에 집중되는 정치 권력으로만 생각한다. 이것이 소위 주권이라는 사법적 개념이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즉 모든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데, 각자가 전적으로 자기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타인의 욕구와 부딪쳐 자신의 생존권이 부정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기 권리의 일부를 양도하여 모든 사람을 위압하는 공통의 힘을 하나 만들어낸다. 이때 권리의 양도는 상호간에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사회 계약이고, 모든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가상적으로 만들어낸 인위적인 힘이 바로 국가권력이다. 이것이 소위 자연권 사상에 기초한 계몽주의 사상가들, 특히 홉스의 주권이론이다. 홉스는 계약에 의한 이 인위적인 거대한 힘을 구약성서 욥기에 나오는 기괴한 상상의 동물 리바이어던으로 불렀다. 그리고 상호간에 맺어진 사회계약의 이행을 정의라고 했고, 그 파기를 부정의(不正義)라고 했다. 왜냐하면 계약이란 그것을 제대로 지킬 때 합법이고, 그것을 파기했을 때는 불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의 사회계약론이다. 사람들이 양도하는 최초의 권리가 주권을 구성하며, 따라서 정치권력의 모태는 계약이라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억압의 가설이 생겨났다. 권력이 계약의 조항을 준수하지 않고 그 한계를 넘어 섰을 때 그것이 바로 압제이며 억압이라는 것이다. 민중 저항권의 합법성 이론도 여기서 나왔다.
그러나 푸코는 라이히(Reich)가 주장한 이 억압의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우선 그는 이 권력 이론이 갖고 있는 소위 《경제주의》적인 개념을 반박한다. 그것은 권력이 마치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구체적 물건이어서, 사법적 행위나 계약이라는 권리 개설 행위에 의해 그 전체 혹은 부분이 남에게 이양되거나 양도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돈으로 사고 파는 물건처럼 권력도 남에게 주거나 서로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우리의 어떤 대통령이 자기 친구에게 후임의 대통령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거나, 라틴 아메리카의 소위 바나나 공화국들에서 군 장성들이 자기들끼리 대통령을 서로 돌려가며 했다는 사실은 이런 권력의 개념을 떠받쳐 주기도 한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이 이처럼 누군가에게 주어지거나, 교환되거나 재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행사된다는 것, 그리고 행위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권력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와 그 지배 관계 안에만 존재하는 무정형의 추상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권력이란 그 자체로 힘의 관계이다. 그렇다면 권력은 유일하게 국가 원수에만 집중되는 단 하나의 정치 권력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힘의 불균형이 바로 권력관계이고, 지배관계의 비대칭(非對稱)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나 권력관계가 있다. 그것은 가정, 직장, 사회의 모든 분야에 마치 모세혈관처럼 미세한 망을 형성하고 있다. 푸코는 라이히의 개념에 대립되는 이런 권력 개념을 잠정적으로 니체의 가설이라고 정해 놓는다. 이 가설에 따르면 국가 권력의 기원은 사회 계약이 아니라 전쟁과 투쟁에 의한 지배관계의 추구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합법적 저항권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하게 된다. 계약을 파기한 불법적 불의(不義)의 권력에 대해 주권의 원래 소유자인 민중이 저항하는 것은 합법이며 정의라는 것이 저항권의 근거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권력과 부정의(不正義)의 권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력은 원천적으로 투쟁적 힘의 관계이며, 남을 억누르려는 탐욕적인 지배 관계라는 것이 푸코의 생각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너무나 오랫동안 라이히의 가설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푸코는 권력의 기원이 계약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역사적인 전쟁을 문제삼는 것은 바로 권력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기 위한 것이다. 그의 텍스트는 세 개의 층위로 되어있다. 우선 가장 표면적인 층위에는 게르만 민족의 골(Gaule) 침입이나 노르망의 잉글랜드 침입 같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와같은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보는 여러 역사가들의 관점이 있다. 그리고 제일 밑바닥에는 푸코가 왜 이런 역사 기술의 측면에 그토록 관심이 많았는가의 문제가 깔려 있다.
그렇다면 우선 텍스트의 표면을 차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문제는 프랑스의 국가 형성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5-6세기경에 대체로 지금의 프랑스를 이루는 지역에는 켈트(Celtes)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 켈트를 바탕으로 남쪽에서 침입해 온 로마인들과 동북쪽에서 침입해 들어온 게르만(German)족등 세 종족이 혼합하여 현재의 프랑스인과 프랑스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켈트는 인도-유러피안족의 하나로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갈라타(Galata)로 불렀고, 로마인들은 갈리아(Gallia)로 불렀다. 그리고 그들이 살던 땅은 골(Gaule) 지방이었다. 그들의 언어는 켈트어였으나 지금은 지명이나 몇 개의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기원전 2세기말에 로마는 마르세이유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 지방을 병합하여 이 일대를 로마의 한 주(provence)로 만들었으며, 그것이 현재 남불의 프로방스 지방이 되었다. 기원전 58년에 줄리어스 시저가 골 전토를 정복하여 기원 원년에는 프랑스 전체가 로마 제국의 하나의 속주(屬州)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 5세기까지 근 5백년 동안 골인들은 로마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켈트어는 점차 소멸되고 사람들은 거의 라틴어만 쓰게 되었다. 이것이 갈로-로멩(Gallo-Romain)시대이다. 그러던중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동북쪽의 야만인인 게르만족이 침입했다. 그리고 침입자들 중 가장 강력한 프랑크(Frnacs)족의 수장(首長) 클로비스(Clovis)가 다른 만족(蠻族)들을 모두 제압하여 메로벵 왕조(428-751)를 건설했다. 그 부족 이름인 프랑시아(Francia)가 프랑스(France)로 된 것이 프랑스의 제1왕조이다. 그러니까 정복의 결과 형성된 왕과 귀족의 가문들은 정복 민족인 게르만인(프랑크족)이고, 그 신민을 구성하는 일반 백성은 골인들이었다. 11세기에 노르망(프랑스의 서북부 지방)의 정복자 기욤(Guillaume, 영어로는 William)이 잉글랜드에 침입하
여 왕과 지배층을 형성한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이렇게 아득한 최초의 전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프랑스의 왕과 지배계급은 천년이 넘도록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때는 17세기가 되었다.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수립한 루이 14세가 지은 베르사이유궁은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궁으로 지금도 온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들여 그 후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이곳을 관광할 때 우리는 관광 가이드로부터 이 화려한 왕궁이 귀족들을 견제하는 도구로 사용되어 절대왕권을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기여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귀족과 왕은 한 통속의 지배계급이 아닌가라는 우리의 막연한 상식이 여기서 잠시 흔들린다. 그러다가 우리 조선 시대에도 조광조의 개혁이니, 왕권과 신권(臣權)의 대립이니 하는 이야기가 있음을 떠올린다. 파리의 루브르궁을 떠나 파리 근교의 베르사이유궁으로 이주한 루이 14세는 5천명의 권세 있는 귀족들을 궁정에 거주하게 했고, 그외 5천명의 귀족들을 궁 근처에 살게 했다. 자기 영지를 떠난 귀족들은 지방에서의 세력을 상실했다. 그렇다고 자기 영지에서 그냥 살수도 없었던 것이, 궁정에 거주하지 않으면 특혜, 관직, 연금, 이권 등을 얻을 수 없었다. 《짐이 본일이 없는자》라는 왕의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유죄선고나 다름 없었다. 베르사이유에서의 화려한 생활은 파산을 초래할 정도의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국왕의 교묘한 계략이었다. 모든 귀족들에게 호사를 강요하고 사치를 명예로 알게 함으로써 그들의 재력을 바닥나게 한 것이다. 이제 귀족들은 왕의 은혜에 기대지 않고는 일상 생활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했다. 왕과 귀족의 대립 관계에서 왕이 완전히 승리했다. 17세기의 귀족 역사학자인 불렝빌리에(Boulainvilliers)의 새로운 역사 담론이 나온 것이 바로 이때였다.
불렝빌리에는 우선 프랑크족이 갈로-로멩 지역에 침입하여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로마 제국을 격파할수 있었던 이유를 로마의 골 정복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는다. 정복자인 로마인들은 토착의 군사 세력인 골의 귀족 무사들을 무장 해제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귀족을 새로 형성했는데, 그것은 무사적인 귀족이 아니라 행정적인 귀족이었다. 이 행정적 귀족들이 골의 로마화를 선도했고, 골인들의 부(富)를 끌어내어 로마에 유리한 재정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이 민간적 사법적 행정적 귀족들은 로마법에 정통하여 그것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능력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라틴어를 할줄 알았다. 새로운 귀족은 어학 실력과 사법 수행의 능력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다. 지배자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것과 법률 지식에 정통하다는 것이 신흥 상류 계급의 구성 요인이 된 것은 그후 유구한 역사를 통해 하나의 원형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토착의 군사 귀족을 다 제거했으므로 로마인들은 라인강 저편에서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을 때 침략자들로부터 골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용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용병의 유지는 엄청난 재정을 필요로 했다. 골인들은 용병으로 나가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용병을 유지할 비용도 부담해야 했다. 자연히 산업은 정체되고 사람들은 가난해졌다. 소수의 프랑크 군대에 골이 맥없이 굴복한 것은 이런 총체적 황폐화의 상태 안에서였다.
그럼 이번에는 골에 들어와 갈로-로멩 체제를 격파하고 프랑스 왕국의 시조가 된 프랑크인들은 과연 누구인가? 금발 머리의 기골이 장대한 이 야만인들의 힘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우선 로마인들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무사적 귀족의 존재에서 나왔다. 게르만인들은 근본적으로 각기 자유스럽고 독립적인 무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사 귀족들의 위로 왕이 있기는 했지만 그 왕의 기능은 평화시에 분쟁을 해결하고 사법적 문제를 다루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수장(首長)을 뽑는 것은 강력한 조직과 권한이 필요한 전쟁 기간뿐이었고, 그것도 공동의 동의에 의해 선출하는 것이었다. 전쟁의 수장과 왕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었지만 가끔 일치하기도 했다. 프랑스 왕국의 시조격인 클로비스는 민간의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수장이었다. 이 프랑크의 무사 귀족들은 완벽한 자유를 누렸는데, 이때 자유란 남을 존중하는 도덕적인 자유가 아니라 이기주의, 탐욕, 전쟁에의 취미, 정복과 약탈에의 취미를 뜻하는 자유였다. 《무례하고, 거칠고, 용맹스럽고, 경박하고, 신의가 없고, 탐욕적이며, 참을성이 없고, 성마른 자유의 애호자》라고 불렝빌리에는 게르만의 야만인을 묘사했다. 이들은 너무나 자유스러워서, 다시 말하면 너무나 오만하고 자만심이 강하여 자신들이 뽑은 전쟁의 수장이 로마적 의미에서의 군주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유스럽게 지배와 정복을 탐하여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골의 땅을 차지했다. 전쟁의 수장이었던 왕은 골 영토의 주인이 되지 않았고, 전사들 각자가 직접 승리와 정복의 과실을 향유했다. 말하자면 아득히 먼 봉건제도의 시작이었다. 그 유명한 스와송의 항아리의 일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전쟁의 수장이며 민간의 재판관인 클로비스가 전리품을 분배하면서 한 항아리를 보고 《이건 내가 가져야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 전사가 일어나 《당신은 이 항아리를 가질 권리가 없소. 아무리 왕이라도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 가져야 하오.》라고 말했다. 이 일화를 특별히 발굴하여 역사의 상식으로 통용시킨 것은 불렝빌리에였다. 이처럼 왕과 대등하던 군사 귀족들은 점차 권력과 부를 잃고 서서히 왕권에 예속된다. 스와송의 항아리의 두 번째 일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에게 항아리를 갖지 못하도록 했던 무사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클로비스는 세월이 한참 흐른후 군대를 사열하다가 그 무사를 발견하자 커다란 도끼를 집어들고 《스와송의 항아리를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 무사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귀족에 대한 왕의 권한이 강화되는 순간이었다. 어떤 과정으로 이런 결과가 생겨났을까? 처음에 게르만인들은 골인들에게서 무기는 몰수했지만 땅은 그대로 소유하게 했다. 그들은 원래 싸우는 것이 직업인 무인들이었으므로 농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다만 골의 농민들에게 지대(地代)만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 그들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막아주는 대가로 게르만의 무사들에게 현물지대를 지불했다. 산업과 안보의 역할분담인 셈이다. 봉건 영주와 소작인 사이에는 행복한 공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수의 군대가 거대한 나라를 정복했다는 사실은 프랑크의 군대가 골 지방에서 당분간 전쟁 태세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 기간 동안만 수장이었던 사람이 군사 체제의 연장에 따라 민간의 수장을 겸하면서 그 권력이 강화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것이 귀족에 대한 왕권 강화의 첫 번째 이유이다.
그러나 무사 귀족의 권한 박탈이라는 현상의 뒤에는 왕권과 골의 구 귀족 사이의 연합이라는 좀더 섬세하고 미묘한 다른 이유가 있었다. 프랑크 군대가 골에 들어왔을 때 가장 고통을 느낀 계층은 농민이 아니라 (그들은 프랑크의 무사 계급과 행복한 공존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땅과 무기를 몰수당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토지가 없었으므로 유일하게 남은 도피처는 교회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로 도망쳤다. 교회로 들어간 골의 귀족들은 교회 체제를 발전 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유포시킨 신앙 체계에 의해 민중들 사이에 깊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교회 안에서 라틴어 실력을 연마하고 로마법을 갈고 다듬었다(중세 이전의 교회는 강력한 사법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갈로-로멩 시절의 신흥 귀족이 라틴어와 사법 지식에 능통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것은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야기이다. 한편 점차 힘이
강해져간 프랑크의 군주들은 자기 동족인 게르만의 귀족을 견제하여 로마 방식의 절대 왕권을 건설할 필요를 느꼈다. 이때 그들은 민중에 그토록 영향력이 있고, 또 라틴어 실력과 함께 로마법에 그토록 정통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디에서 연대 세력을 찾을 수 있었을까? 군주가 절대 왕권을 형성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새로운 군주들의 자연스러운 동지는 당연히 교회에 피신했던 골의 옛 귀족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라틴어와 로마법의 지식, 그리고 사법의 수행 능력과 함께 절대왕권의 커다란 연합 세력이 되었다. 라틴어는 공식 언어가 되었고, 학문의 언어, 법률 언어가 되었다. 게르만의 귀족들이 그들의 권한을 잃게 된 것은 그들이 다른 언어 체계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게르만어를 말했고 라틴어를 몰랐다. 중세 말까지 백작이건 남작이건 귀족들은 모두 문맹이었고 유일하게 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들은 성직자뿐이었다. 다시 한번 언어와 권력과의 미묘한 관계가 우리의 관심을 사로 잡는다. 여하튼 모든 새로운 법체계가 라틴어 칙령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교회와 왕은 귀족들을 계속 무지 상태에 남겨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교회가 피안의 삶을 강조한 것도 그런 계략의 일환이었다. 소유와 지배에 탐욕스럽고 현재에 집착했던 게르만의 무사들은 점점 나약해져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마침내 재산과 권한을 완전히 박탈당한 기사(騎士)적 인간, 혹은 십자군적 인간으로 변신했다. 십자군 원정이야말로 귀족이 완전히 피안의 세계를 지향했을 때 일어난 당연한 결과라고 불렝빌리에는 말한다.
그러면 불렝빌리에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이런 식의 역사 기술은 불렝빌리에가 처음이었다. 사실상 하나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역사적 기술은 이미 그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그 역사를 말하는 시대, 그 역사를 말하는 사람의 성향과 숨은 의도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모든 역사 기술은 언제나 어느 편인가의 권력의지에 물들여져 있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순결한 역사 기술은 하나도 없다. 6.25의 북침설을 주장하는 수정주의 이론에는 이승만 이래의 남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회주의 성향 세력의 의도가 있고, 이미 4세기경에 임나(任那) 일본부라는 식민지를 한반도에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역사 기술은 식민지 침략의 저의를 정당화하고 있다. 역사는 단순히 여러 힘의 관계를 분석하고 판독하는 틀이 아니라 그것을 수정하고, 역사적 앎의 질서를 통제하면서, 자기 편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자기의 역사 기술이 역사적 진실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은 결정적으로 전략적 고지를 차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불렝빌리에의 관심은 최초의 전쟁에서 누가 승자고 누가 패자냐의 문제가 아니라 왜 강자는 약해지고 약자는 강해졌는가의 문제이다. 처음에 프랑크의 귀족들에게 힘을 준 것은 그들이 직접 토지를 취득했다는 사실이다. 토지의 직접적인 소유주로서 현물 소득을 올림으로써 부(富)를 축적했고, 그 부를 기초로 힘을 확보할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힘을 가져다 준 바로 그 요인이 그들을 무력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광대한 토지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살며 점차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왕으로부터 멀어져 자기들끼리의 전쟁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싸움만 할줄 알면 되었으므로 그들은 교육, 훈육, 라틴어 학습, 학문적 지식 같은 것을 모두 소홀히 했다. 한편 프랑크 침입 초기에 토지를 완전히 박탈당하여 극도로 무력한 존재가 된 골 귀족들은 교회로 들어가 민중에 대한 영향력과 법률 지식을 키웠다. 이것이 그들을 왕의 조언자로 만들어 조금씩 왕에게 가까이 가게 했고, 결국 과거에 그들로부터 빠져나간 경제적 부와 정치권력을 다시 얻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불렝빌리에의 숨은 의도는 무엇인가? 그는 귀족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에 왕과 맞먹었던 권력과 재산을 다 탕진하고 겉껍데기 이름만 남은 채 무력한 계급으로 전락한 귀족들에게 분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반란에의 호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앎, 오로지 앎이라고 그는 역설하고 있다. 그들 계급이 권력의 정상에 있을 때조차 소홀히 했던 권력 체계의 한 중요한 고리, 즉 앎을 재탈환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전투는 더 이상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앎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이 그의 비장한 웅변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였다.
17세기이래 국가 절대주의와 행정 조직을 연결하는 앎-권력의 메카니즘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는 푸코가 불렝빌리에의 역사 담론에 매혹된 이유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불렝빌리에는 권력의 기원이 전쟁에 있음을 드러낸 역사가일 뿐만 아니라 앎과 권력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부각시킨 역사가였기 때문이다. 최고 권력자의 앎을 누가 제공하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실질적인 권력의 소유자는 그 앎의 제공자이고 군주는 사실상 그의 꼭두각시일 가능성이 있다. 불렝빌리에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한 대상은 루이 14세의 앎을 형성해 주던 왕실의 행정감독관이나 재정감독관이었다. 왕의 교묘한 정책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완전히 무력한 계급으로 전락한 귀족들에게 재판관, 검사, 법률가, 재판소 서기들의 앎은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궤변으로 그들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함정에 몰아 넣었으며 그들의 사법권마저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행정감독관들의 앎 또한 귀족의 권한과 부를 좀먹어 들어가는데 기여했으므로 귀족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왕이 권한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복종을 끌어내고 재정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앎 덕분이었다. 이것은 행정적인, 특히 경제적 수량적 앎이며, 효과적인 조세제도와 세금 징수에 대한 앎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 14세 시대에 국가의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고 있던 이 행정가들과 법률가들은 무슨 계급이었는가? 그들은 제3신분, 다시 말해서 부르주아지였다. 서양 역사에서 앎-권력의 메커니즘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은 부르주아 계급과 함께였다.
부르주아지는 수천 년간의 정복과 지배의 역사 속에서 사상 처음으로 총칼이 아닌 앎을 지배의 무기로 들고 나온 계급이다. 그리고 그들의 앎은 17세기까지는 어디까지나 법률적 행정적 앎이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제3신분은 역사에 정치적 기획을 투입하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최초의 법이나 힘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기서 자신들의 모습을 재발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중세 이전의 역사에서 아무리 눈을 씻
고 찾아 보아도 자기들 조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자연법에 근거하여 사회계약론을 주장하며 선량한 미개인을 부각시켰던 루소의 사상은 바로 당시 특권계급의 먼 조상인 게르만의 역사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제3신분의 염원의 표출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에 대해 이처럼 소극적이었던 부르주아지가 적극적으로 역사를 정치 투쟁의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은 대혁명 이후 19세기부터였다. 시예스(Sieyes), 오귀스탱 티에리(Augustin Thierry), 기조(Guizot)등의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정복과 피지배라는 이원론적 개념이 아니라 도시와 민족이라는 두 축 위에서 제3신분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도시의 가설에 의하면 게르만의 정복자와 골의 피정복자는 행정권과 정부 장악을 놓고 서로 경쟁을 했는데 그것은 농촌과 도시의 대결이었다. 농촌은 게르만이고 도시는 골의 민중을 뜻했다. 왜냐하면 로마인들이 원래 자기 나라에서 갖고 있던 자유를 골인들에게도 허용하여 갈로-로멩 시절부터 국토의 여기저기에 자치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5세기에 침입한 게르만은 야만인들이었으므로 도시에는 관심이 없이 광활한 들판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10세기까지는 도시가 패배했으나 10-11세기부터 북쪽에서는 북구의 모델에 따라, 남쪽에서는 이탈리아의 모델에 따라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도시 사회가 승리했다. 군사적인 승리가 아니라 도시가 가진 부(富), 행정능력, 도덕성, 특정의 삶의 방식과 존재 양식, 그리고 혁신적 사고와 행동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부르주아지의 승리였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를 보편계급으로서 정당화해주는 가설은 그 무엇보다도 민족의 개념에 의해서이다. 민족(nation)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긴 17세기에 그것은 귀족과 동의어였다. 국토의 단일성이나 특정의 정치적 형태, 혹은 어떤 특정의 지배권에 대한 복종 체계와는 관련이 없었다. 그 때의 민족 개념에는 국경이 없고, 한정된 권력체계가 없으며, 국가도 없었다. 그것은 공통의 신분, 관습, 풍습, 그리고 고유의 법(국가적 법이 아니라 한 집단 내부의 규정)을 가진 개인들의 집단일 뿐이었다. 따라서 민족은 국경선과 제도들의 경계선을 초월하여 형성되는 단일한 신분을 뜻했다. 말하자면 민족은 바로 귀족이었다. 국가의 경계선을 넘어 모든 나라의 귀족들은 같은 민족이었다. 그들과 대립하는 세력은 국경선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나라 안에서 다른 관습과 법을 가진 다른 신분이었다. 여기서 그 유명한 민족 혁명의 개념이나 종족의 개념이 나왔고, 마침내 계급의 개념이 나왔다. 서양인들이 계급 투쟁을 말할 때 그들의 아득한 집단 무의식 속에서 계급의 적은 곧 타민족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정할 수 있다. 한편 절대왕정 옹호자들의 가설에서는 왕이 민족을 구성하는 절대 요인으로 떠올랐다. 그들에 의하면 단일한 땅 위에 단일한 언어와 단일한 풍습, 그리고 단일한 법을 가진 다수의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민족은 아니다. 집단 구성원 각자가 살아있는 육체적 실체인 왕과 법률적이며 동시에 물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그것이 민족이 된다.
마침내 대혁명을 기점으로 부르주아지의 민족 개념이 정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풀렛을 썼던 시예스에서부터 민족은 곧 부르주아지를 뜻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의 민족이 있기 위해서는 명시적인 법과 그것을 제정하는 기관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민족을 정의하는 요소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존속하고, 그들의 법률이 적용되고, 그들의 입법기관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이 필요한데, 그것은 《직업》과 《직책》이다. 직업이란 농업, 수공업, 공업, 상업, 자유업 등이고, 직책이란 군대, 사법, 교회, 행정부 등을 가리킨다. 하나의 민족은 상업, 공업, 수공업의 역량이 있을 때만, 그리고 군대, 사법부, 교회, 행정부를 구성할 능력이 있을 때만 민족으로 존재할 수 있고, 또 역사 안에 진입하여 역사적으로 존속할수 있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민족을 창조하는 것은 계약도 아니고, 법도 아니며, 합의도 아니다. 또 공동의 법률이나 입법기관을 갖지 못하다면 아무리 재화나 직업 수행의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민족을 구성할 능력은 있으나 실제로 민족은 아닌 것이다.
18세기말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무기로 사용한 것이 바로 이 가설이었다. 당시에 실제적으로 농업, 상업, 수공업, 자유업들이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 여러 가지 직업들을 수행하는가? 제3신분, 오로지 제3신분이다. 누가 군대, 교회, 행정부, 사법부를 움직이는가? 물론 중요한 직위는 귀족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시예스는 이 기구들의 10분의 9가 제3신분에 의해 그 기능이 수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프랑스에는 공동의 법이 없이, 귀족에 적용되는 법, 제3신분에 적용되는 법, 성직자에 적용되는 법이 있을 뿐이고, 입법기관도 없었다. 프랑스는 민족을 구성하는 형식 여건인 공동의 법과 입법기관이 없으므로 민족국가가 아니다라는 말이야말로 제3신분의 노골적인 정치 구호인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민족의 역사적 실체적 존재를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집단이 있다는 말은 《제3신분이야 말로 완벽한 민족이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망명귀족 몽로지에(Montlosier)는 왕권과 부르주아지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가함으로써 대혁명 이후 완전히 몰락한 귀족계급의 아픈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중세 이래 프랑스의 특권계급이 단순히 게르만의 정복 민족으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골, 로마, 게르만의 세 지배제도가 혼합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원래 켈트족만이 있던 골이나 로마가 지배하던 갈로-로멩 시대에도 지배계급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세 시대의 지배제도가 혼합된 특권계급이 바로 민족이었다. 그리고 이들 지배계급을 제외한 나머지 신민과 농노들은 귀족계급과 동등한 다른 민족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민족의 밖에 있는 존재들일뿐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민족이 아니었다. 그런데 왕정은 이 이름 없는 거대한 집단을 하나의 민족, 하나의 인민으로 만들었다. 조공 신민들에게 조공을 면제해주고, 도시들에게 권리를 부여한 것등이 그것이다. 이 새로운 민족, 새로운 인민이 다름 아닌 제3신분, 즉 부르주아지이다. 왕은 귀족으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특권을 박탈하기 위해 이 새 계급의 활력과 저항을 이용했다. 영주들에 대한 도시의 저항, 지주들에 대한 농민 반란등 프랑스의 역사를 통털어 모든 민중 봉기의 뒤에는 왕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다고 몽로지에는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과거에 귀족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력이 왕정으로 이전되었다. 이때부터 왕정은 혼자서 국가 권력을 거머 쥐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계급에 기대지 않고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정은 자신의 사법부와 행정부를 제3신분에 맡겼다. 이제 제3신분은 국가의 모든 기능을 떠맡았다. 법률, 행정, 재정등 실질적으로 국가 전체를 떠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 껍데기의 반대 세력인 귀족은 이들에게 조그만 권리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혁명으로 분출되었다. 몽로지에는 이 부르주아 혁명을 왕이 자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속적으로 귀족의 권리를 빼앗아 그것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 주는 과정의 최종 단계는 결국 마지막 한 줌 남은 왕의 권한까지도 그들에게 내어 주는 단계라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스 대혁명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왕정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그는 비꼬았다.
이제 텍스트의 세 번째 층위를 말할 차례이다. 푸코는 무슨 말을 해도 언제나 권력의 문제로 돌아간다. 광인을 말할 때도, 섹스를 말할 때도, 감옥을 말할 때도 그는 언제나 권력을 말하고 있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광대한 삼림 속의 행복한 미개 시대로부터 음모와 모험이 가득찬 암흑의 중세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이미지 속에서, 그리고 사소한 에피소드도 엄청난 진실의 암호가 되는 그런 역사의 잔 재미 속에서, 우리는 그가 권력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권력은 왕조의 역사가 강변하듯 정복의 당당한 권리가 아니고, 17세기 영국의 의회파들, 또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이 말하듯 계약의 산물도 아니다. 권력이 먼 조상의 정복에서 유래했던 시대도 물론 있었다. 근대 이전 왕정의 시대까지가 그랬다. 그러나 부르주아지가 보편계급을 자처하며 지배계급으로 부상한 근대 이후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서, 다시
말하면 앎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단순한 격언 속에 감추어진 무서운 앎-권력의 도식이야말로 푸코의 일생을 관통하는 열쇠의 말이다. 이 앎-권력의 지배구조가 17-18세기에는 인간의 육체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으로 나타났고, 19세기, 그리고 20세기에 와서는 종(種)으로서의 인간 전체, 국민 전체를 생물학적으로 조절하려는 권력의 야심으로 나타났다. 소위 생물-권력(bio-pouvoir)인 것이다. 나치즘이 극단적인 예이지만 현대의 가장 민주적인 국가에서도 속깊이 감추고 있는 정책이다. 불치병 환자나 광인들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이 북구, 프랑스, 미국에서까지 과거에 비밀리에 행해졌고, 또 어쩌면 지금도 행해지고 있을 것이라는 기사가 얼마 전에 나온 적이 있다. 푸코 사후 십 수년 만에 그의 가설을 밑받침하는 실체가 드러난 셈이다. 이 새로운 생물-권력이 이처럼 오만하게 인간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것은 사회 전체를 위험한 불순분자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미명하에서이다. 《사회를 지켜야 한다》(Il faut d fendre la soci t )라는 책 제목도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 생물-권력 담당자들의 구호를 야유하기 위한 역설적인 제목인 것이다.
모든 현상의 뒤에서 보이지 않는 권력의 계략과 음모를 찾아내는 푸코의 담론은 20세기 철학의 지평을 단숨에 뒤집어 놓은 전복적이고도 흥미진진한 가설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모든 현상의 뒤에 X 파일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만연된 음모설의 먼 진원지가 아닐까. 음모가 있다면 과연 누구의 음모란 말인가? 권력이라는 한 마디 말로 그것을 지칭했지만 권력은 구체적으로 누구라는 말인가? 푸코 자신도 권력은 실체가 아니고 단지 추상적인 관계일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기본 개념인 시리즈의 역사, 또는 에피스테메의 갑작스러운 단절과 변환의 이유를 밝히지 못하는 것과 함께 그의 가설의 최대 취약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렇게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의 가설은 여하튼 재미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생긴다는 지배관계, 인간 사이의 그 영원한 권력관계가 있는 한 그의 가설은 오래도록 그 풍미를 잃지 않을 것이다.
출처 : 배드민턴과 일상
글쓴이 : 겨울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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