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다시읽기] 산문에 고인 ‘침’ 시로 뱉었나/최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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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사대주의·사립교 횡포 통탄 40년 지나도 빛나는 예언자적 지성 날품팔이 문필가 애환엔 가식없는 유머 철철 ‘은근짜’ ‘어벌쩡’ ‘쌩이질’ ‘멱씨름’ ‘마치질’… 아름다운 우리말도 한가득 | |
고전 다시읽기/<김수영전집2:산문>
지난해 연말, 어느 모임에서 “김수영 시인은 (단군 이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했다가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는 참석자 한 분의 면박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내 주장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다. 반쯤 물러나 “김수영은 가장 위대한 현대시인”으로 바로잡았다. 김수영(1921-1968)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도 능했는데 <김수영 전집:산문>(이하 <산문>)은 그 증거다.
<산문>은 김수영의 수필, 시사 에세이, 문학론과 시론, 시작노트·편지·일기·시월평 등에다 미완성 소설에 이르기까지 가장 뛰어난 한국 현대시인이 남긴 산문을 망라한다. 김수영은 1960년 성탄절 일기에서 “암만해도 나의 작품과 나의 산문은 퍽 낡은 것같이 밖에 생각이 안 든다” 했으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전집이 출간된 1980년대 초반에도 20년 가까운 세월이 무색할 만큼 새로웠지만, 그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도 신선하다. 물경 40여 년이 지났어도 김수영의 예언자적 지성은 빛난다.
“나는 이북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업은 남북서한 교환이나 인사교류에 선행되어야 할 획기적인 뉴 프런티어 운동인줄 안다.” 실제로 남북관계가 눈 녹듯 풀리기 한참 전에 우리 출판인들은 당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북한 문학작품과 원전을 펴냈다. 4.19 1주년을 맞아 “일주일이나 열흘 후에는 또 어떻게 될는지” 아직 안심하긴 빠르다 한 것은 마치 한 달 후에 일어날 5.16 군사쿠데타를 예언한 듯하다.
또, 김수영은 “외국에나 갔다온 영어 나부랑이나 씨부리는 시인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문단의 풍토와 미 8군납품을 내세우는 간장 광고에서 한걸음 나아가 미국배우를 흉내 낸 우리 영화배우의 미 8군납품용 연기를 개탄한다. <산문>에 나타난 역사가 오래된 꼴불견은 비단 미국과 관련한 일그러진 세태만이 아니다. “사립국민학교의 이사장 같은 사이비교육자들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당국의 방임”도 이에 못지않다. 1960년대의 버스와 택시 승객들마저 ‘전통가요’를 즐기는 운전기사의 횡포에 시달렸다는 대목에 이르러선 두 손 다 들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이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운동을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정부의 처사가 상식화되어가고 있는 사태처럼”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일은 없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김수영의 일갈은 김지하 시인의 ‘풍자냐, 자살이냐’로 이어졌지만, “시나 소설 그 자체의 형식은 그것을 쓰는 사람의 생활 방식과 직결”된다는 김수영의 문학론은 다분히 생활적이다. 그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산문은 가식이 전혀 없고, 유머가 철철 넘친다. 끊임없이 ‘여편네’를 들먹이는 건 ‘형사 콜롬보’ 저리 가라다. 빚을 받아내기 위한 상황설정과 그것이 전개되는 양상은 아주 배꼽을 잡는다.
“부지런히 빚을 받아내기 위한 최후의 경우에 내가 연출해야 될 활극까지도 면밀히 상상하고 있었다. 그 상상 안에서, 여편네와 함께 새벽에 기습을 한 채무자의 집 마당에서 우리들은 채무자 부부와 대결을 하고, 나는 그들의 큰아들인 고교생에게 얻어맞고 쓰러져서 녹십자차에 실려간다. 그런데 녹십자의 앰뷸런스로 말하자면 그것이 그렇게 때를 맞추어서 손쉽게 출동해줄 리가 없으니까, 사전에 약간의 ‘연극준비’가 필요하다.”
김수영이 토로하는 날품팔이 문필가의 애환을 듣노라면 40년 전 그의 형편과 요즘의 내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원고료가 제꺽제꺽 들어온다는 점에선 오히려 내가 한결 낫다. 김수영은 “일해다 준 돈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더 어려”웠으니 말이다. 몇 푼 안 되는 원고료와 외국잡지 번역료조차 떼먹기를 일삼았던 당시의 출판사와 신문·잡지사 관계자들은 그러고도 속이 편했을까? 이런 것을 두고 낭만이 있던 시절의 추억인양 미화하면 곤란하다.
자유기고가 설움 책으로 달래
그러면 김수영은 어디서 자유기고가의 설움과 아픔을 달래고 위안을 받았을까? 그것 바로 책이었다. 그에게 “노점 서적상을 배회하여 다니며 돈이 될만한 재료가 있는 잡지를 골라 다니는 것은 고달픈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대로 구하려던 책이 나왔을 때는 계 탄 것보다도 더 반가”웠다. <산문>에는 독서가로서 김수영의 안목을 짐작하게 하는 책이 몇 권 언급된다. 김수영이 책상으로 사용하는 탁자 위 스탠드 앞에 <신동아><사상계>와 함께 놓여 있는 “<파르티산 레뷰>”는 <창작과 비평>의 모델이 되었다는 외국의 진보 잡지다. “<40년 전의 조선>이라는 영국여자가 쓴 기행문”(‘말리서사’)은 김수영의 시에도 등장하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거대한 뿌리’)의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 거의 확실하고, “귀여운 처자를 거느리고 소록도 재건의 일선에 나선 청년군의관”(‘소록도 사죄기’)은 아무래도 이청준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실제 주인공인 듯싶다. 그는 1961년 5월 1일 독료한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뜨거운 마음으로, 무수한 박수를 보내면서 읽었다.”
책을 소장하는 문제에선 “너무 좋은 책은 집에 두어두고 싶지 않”은 마음과 “무기로서 (책을) 쌓아두어야 한다”는 다짐이 엇갈린다. 그러면서 김수영은 갓 등단한 시인들이 읽을만한 진지한 시 관련서가 드문 현실과 우리 시의 지성의 결핍을 안타까워한다. “지성이 없기 때문에 오늘의 문제점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진정한 현대시가 안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산문>에 묘사된 김수영이 겪은 서점의 불친절과 열악한 번역출판 실태는 좀 민망하긴 하지만 1960년대 서점·출판가의 실상을 알리는 귀한 증언이다. 당시 서울과 종로거리 일대의 서점들은 손님이 5분 남짓 책을 살펴보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책을 펴보기가 무섭게 서점 직원이 다가와 위압을 가하는 것은 예사고, 심지어는 책을 빼앗고 내쫓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강도는 약해도 나도 이와 비슷한 일을 여러 번 경험했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무슨 책을 찾느냐고 물어보는 주인이 버티고 있는 서점은 두 번 드나들기 싫다. 김수영은 덤핑번역, 오역 투성이의 부실한 번역, 남의 번역을 베끼는 작태를 거론하면서 “도대체가 우리나라는 번역문학이 없다”고 단언한다.
김수영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10개’로 어린시절의 역사와 신화가 담긴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 등을 든다. 나는 <산문>에 나오는 아름다운 우리말로 ‘퇴짜’ ‘뗑깡’ ‘어벌쩡’ ‘똥고집’ ‘쌩이질’ ‘멱씨름’ ‘마치질’ ‘밭쟁이’ ‘할애하다’ ‘머리악을 쓰다’ 따위를 꼽고 싶다. “지면관계로 부득이 할애한다”는 표현은 ‘할애하다’에 상반되는 두 가지 뜻이 있음을 시시한다. 김수영이 아름답게 여기는 우리말과 내가 <산문>에서 찾은 아름다운 우리말은 김수영의 시어와 맥이 닿는다. “내가 써온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뿐이다. 혹은 서적어와 속어의 중간쯤 되는 말들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고어도 연구해본 일이 없고 시조에 대한 취미도 없다”
“시어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
<김수영 전집>은 2003년 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초판 출간 석 달 만에 찍은 “3판”, 그러니까 1판 3쇄로 <산문>을 다시 읽었다. 초판보다는 개정판이 읽기 편할 것이다. 그런데도 초판으로 <산문>을 다시 읽은 것은 알차고 단단한 책이라는 첫인상이 지워지지 않아서다. <산문> 초판은 한 면마다 33줄에 이르는 8포인트 활자가 빽빽하다. 요즘 나오는 책의 한 면이 보통 20줄 안팎으로 짜인 걸 감안하면 뭐든 들어갈 틈이 없는 <산문> 초판 본문의 밀도가 능히 짐작되리라. 페이퍼백 장정의 단단한 매무새는 사반세기가 흘렀어도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다.
서평자 추천 도서
김수영 전집 민음사 펴냄(1981, 개정판 2003) (김수영 시인의 누이동생 김수명 엮음)
김수영을 읽는다 오봉옥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펴냄(2005) (시선집 <사랑의 변주곡> 수록작 해석)
살아있는 김수영 김명인·임홍배 엮음 창비 펴냄(2005) (김수영 연구의 현주소)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김명인 지음 소명출판 펴냄(2002) (석사 논문을 바탕으로 한 김수영론)
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2001) (현재로선 유일한 김수영 전기)
50자 서평
◇ 도도(인터넷서점 알라딘 회원 리뷰)=“얼핏 산문 모음집으로 보이는데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것은 그 기저에 흐르는 근본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솔직함과 위선에 대한 강한 경멸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 cppopoya(인터넷서점 yes24 회원 리뷰)=“개인전집 역사상 가장 간결하면서도 정수만 담은 최고의 전집이다. 김수영의 초기 작품은 난해하기 그지 없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생활이 배어 나오고 한자보다는 우리말이 작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문집에는 거의 발가벗다시피 한 김수영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 cmorello5(네이버 블로그 독서일기에서)=“보석과도 같은 책이었다. 어쩌면 인간이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자신의 치부마저도 솔직히 고백하는 담담한 문체. 그 담담함 속에 묻어나는 필자의 용광로 같은 열정. 시대의 고통 속에서 양심을 지키며 시를 썼던 시인의 가슴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그 평범한 내면의 고백이다.”
▽ 다음주 이후 고전 <문명화 과정>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50자 서평에 참여해주세요. 전자우편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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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6-04-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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