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2008. 가을호)
관념의 시와 몸의 시
―김백겸 시집 『비밀정원』(천년의시작, 2008)
―윤관영 시집 『어쩌다, 내가 예쁜』(황금알, 2008)
김 남 호
1. 자본의 바다를 떠도는 사유의 뗏목:『비밀정원』
김백겸의 『비밀정원』은 요즘 나온 다른 시인들의 시집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환상을 노래하되 세계와 존재의 본질을 천착한다는 점에서 미래파와 다르고, 환한 깨달음을 노래하되 금세 캄캄해진다는 점에서 선시풍의 시들과 다르다. 내면의 섬세한 서정성을 내보일 때조차도 세계와의 불화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 신서정과 다르고, 절망을 노래하면서도 무겁거나 어둡지 않다는 점에서 묵시록적인 시들과 다르다. 그러나 이 모든 분류항들이 합쳐진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니 단지 ‘다르다’는 차별성만으로 곧 정체성을 규정하려 드는 데는 논리적 비약이 따른다. 하지만 시가 아무리 낯설고, 숨겨진 사유가 오묘하고, 드러난 이미지들이 다의적이고 중층적이라 해도 읽을 수 없는 시는 없는 법. 오히려 이런 불편한 요소들이야말로 이 시집의 양도할 수 없는 매력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
『비밀정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테일보다도 큰 틀에서 시집 전체를 조감(鳥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은 시인이 각박한 현실의 벽에 부딪치면서 결코 이를 수 없는 유토피아를 찾아가는 낭만적 아이러니를 기본 구도로 삼고 있다. 다만 현실의 어둠을 그리는 데 너무 많은 시편들이 동원되다보니 시집 전체의 색깔이 어둡게 보이는 것이고, 어둠의 원인을 탐색하다보니 철학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 철학적 사유에 비유의 옷을 입히다보니 알레고리가 도드라져서 신화(神話)나 우화(寓話)의 모습을 띠게 된 것이다.
먹장구름이 세상을 뒤덮었고 흰 뱀 같은 죽음이 빗줄기로 쏟아지는군요
풀과 모래들은 바람에 쓸리며 울고
기아와 재난을 예고하는 공포의 대왕이 탄 마차와 말들을 후려치는 채찍질처럼
천둥과 번개가 검은 하늘의 배를 가르는군요
꿀의 아버지인 벌들이 태양의 나라에서 땀을 흘리는 세계는 멀어지고
태양의 아들인 황금이 태양을 잊어버린 분노의 세계가 다가와 있군요
-「황금도시」부분
인용한 부분은 4연으로 된 시에서 맨 마지막연이다. 인용하지 않은 앞부분에서도 묵시록적이고 종말론적인 상황이 길게 서술되고 있다. 이 시의 키워드인 ‘황금’은 자본주의적 욕망이고, 그 욕망을 지렛대삼아 움켜쥔 폭압적 권력이고, 그 권력이 미구에 불러올 ‘검은 용’이거나 ‘먹장구름’이다. “황금은 세상의 욕망과 힘을 빨아들인 자본의 바다”가 되고, 자본의 바다에는 “황금도시”가 있고, “매트릭스 조합으로” 만든 “황금제국”이 있다. 그 제국에서 “주민번호5312171405813인 내가” “계좌번호 26801408502001”에다 넣을 “숫자고기”를 잡기 위해 “아침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한다. ‘황금도시’는 ‘회색도시’의 반어적 표현인 셈이다.
그런데 김백겸의 시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반어적’ 표현이다. 그의 시집에서 종종 구사되는 이 비유법은 그다지 힘을 쓰지 못한다. 왜냐면 시적 긴장이나 어떤 효과를 노려서 왜곡하거나 상반되게 말을 비트는 것이 반어법일 텐데, 직유를 통한 세부 묘사와 친절한 정황 설명으로 그의 시는 긴장이 생겨날 만큼의 압력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적 긴장의 감소를 불러온 이 ‘실패’는 그의 시를 느슨하게 보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의 시가 80년대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시절의 강력한 공감과 호소력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목이다.
어쨌거나 시인의 인식에 따르면, 이 황금도시의 시민들이 극도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공포의 주체가 곧바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마는 비극적 아이러니에 있다. 즉, 내가 공포를 주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공포를 받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거울을 나르시스처럼 들여다보면
거울 또한 나를 응시하는 빛나는 괴물임을 그 옛날에 알았네
손을 내밀면
거울이 내 손을 잡고 거울 뒤편의 궁전으로 초대할까 무서웠네
눈감고 부모와 형제가 있는 환한 집으로 돌아왔네
(.......)
회사의 수위들이 출근길에 빠른 경례를 부치고
젊은 직원들이 도표와 숫자를 물고 일개미처럼 기어가는 현실 세계
뇌 안의 올빼미 눈이 감시카메라처럼 돌아가고
뇌 안의 당나귀 귀가 음파탐지기처럼 바쁜
내가 조직사회의 큰 괴물이 된 후부터
-「괴물들」부분
이게 바로 ‘황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맨얼굴이다. 거울이 나를 비추는 순간 나는 거울을 비춘다. 나를 무한복제하면서 동시에 공포를 무한증식시킨다. 서로가 서로의 괴물이다. “혼이 나간 사람들에게 깊고 푸른 절벽을 보여주는”(「빛 물고기」) 괴물들이고, “태어난 적도 없고 죽은 적도 없으므로 죽일 수도 없는”(「죽지 않는 아이」) 괴물들이다. 내가 “당신의 등에 매 자국을 시퍼렇게 남”기면 “막대기에 놀란 당신은 숨 막힌 어린 짐승의 얼굴”로 나를 돌아보지만, 거기 서 있는 것은 “막대기를 든 내가 옷만 바꿔 입은 당신의 다른 모습”(「가면놀이」)일 뿐이다. 어디를 돌아봐도 나밖에 없는, 따라서 어디에도 내가 없는 공포! 이 공포는 아버지의 것이면서 아들의 것이고, 과거의 것이면서 미래의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이 같은 인식이 다음과 같은 가편을 만든다.
공간도 구부리고 시간도 잡아당기는 블랙홀 게임나라에서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오네
눈은 상추 어린잎같이 초롱초롱하고
뺨은 장작의 불길처럼 활활 타오르는 피를 가진
내 아이가 공룡처럼 이빨을 드러내고 성큼성큼 걸어오네
내 피와 살과 뼈를 갈아 마신
내 지식과 감정과 욕망을 먹어치운
내 아이가 칼을 겨누고 다가오네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비단보자기로 싼 옥보다 귀하고
금고에 넣어둔 금 거북이보다 값진 내 미래의 몸이 다가오네
눈으로 보는 순간 괴로움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귀로 듣는 순간 권태는 은 쟁반의 구슬로 변하는
내 업장(業障)이 다가오네
-「죽지 않는 아이」부분
두렵지만 미워할 수 없는 괴물, 피하고 싶지만 피해갈 수 없는 업장(業障, Karma)을 그로테스크하면서도 경쾌하게 노래한 이 시는 이번 시집의 대표작으로 꼽아도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그만큼 이 작품은 시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잘 집약하고 있다. 모든 것을 왜곡하고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세계지만 그래도 사랑스럽게 껴안고자하는 시인의 절대긍정이 삶을 버티는 힘이란 걸 이 시는 보여준다. 어둠에 함몰되지 않고, 내 안팎의 괴물들에게 저항하도록 하는 배후는 바로 이런 긍정의 힘일 것이다.
이와 같은 낭만주의적 기질은 시인으로 하여금 어디에도 없는 ‘비밀의 방’(시집『비밀 방』)을 찾아 기웃거리게 하고, ‘비밀정원’을 찾아 발과 눈을 기진하게 한다. ‘방’이든 ‘정원’이든 신의 눈길로부터 숨길 수 없다는 점에서 절망적이지만,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낭만적이다.
정원의 입구가 드러났다
입구 안에는 황금사과가 새벽의 어둠 속에서 빛났다
곧 사라질 신비를 향해 심장이 두근거렸고
발걸음을 멈춘 내 자아를
늙은 역사가 호기심으로 쳐다보았다
늙은 역사가 내 뒤를 따르면 비밀은 새 이름을 지울 것이 분명했다
정원의 입구를 그냥 지나쳤다
-「비밀정원」부분
이 시의 키워드인 ‘비밀정원’은 여러 측면에서 그것이 거느리는 상징과 의미를 따져볼 수 있겠으나,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시인의 상상력이 빚어낸 이상향의 메타포로 읽는 것도 이 시의 한 독법일 것이다. 끝없이 찾아 헤매지만 끝끝내 찾을 수 없는 곳, 누설(漏泄)로 시작해서 거부(拒否)로 끝나야 하는 곳,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곳, 부재(不在)로써만 존재(存在)하는 곳. 바로 ‘낭만주의’의 거처인 유토피아다.
그러므로 청학동천(靑鶴洞天)을 찾아 나섰다가 이끼 아래 새겨진 네 글자만 더듬어보고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파한집(破閑集)』의 이인로(李仁老)처럼, 비밀정원은 그 입구에서 황금사과만 확인하고 그냥 지나쳐야 마땅하다. “지식과 경험의 울타리에서 문지기로 사는 늙은 역사의 간섭 때문”이건, “피안을 질투한 죽음의 훼방 때문”(「비밀정원」)이건 그 입구를 지나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설 수 없기에 ‘비밀정원’은 더욱 신비롭고, 끝없이 반복되는 이 ‘미수(未遂)’로 인해 유토피아적 에너지는 더욱 강력해지지 않겠는가. ‘늙은 역사’의 뿌리칠 수 없는 호기심처럼.
2. 직립의 몸으로 받쳐든 언어의 집:『어쩌다, 내가 예쁜』
윤관영의 『어쩌다, 내가 예쁜』은 시를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집이다. 등단 15년 만에 나온 처녀시집이지만 시선집에 다름 아니라는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록된 시편들 사이에는 시간의 단층이 예사롭지 않을 터. 하여 한 권의 시집 속에 다양한 사유와 목소리 들이 뒤섞여 있을 텐데도 독자가 그것들을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일관된 호흡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시라는 언어적 매개 이전에 시인의 몸과 삶으로부터 직접 풍겨져 오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 그리고 느긋함에서 연유한 것이리라.
그가 보는 풍경의 속도는 그의 걸음걸이를 추월하지 않아서 느긋하고, 그가 바라보는 사물의 높이는 그의 시선의 높이쯤에 머물러 있어 앙감(仰瞰)이나 부감(俯瞰)에서 오는 어질머리가 없어 편안하다. 그의 시는 일상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라 그의 아픔은 쉽게 공감될 수 있고, 오랜 시간 곰삭은 사유여서 그의 깨달음은 묵직한 것조차도 무겁지 않다. 덤덤할 때도 있지만 담백한 뒷맛이 일품이고, “앞발 드는 흰둥이의 목덜미를 쓸어”(「볕 좋은 봄날에」)주듯 스스로를 쓰다듬는 시인의 자기애(自己愛)에는 시적 포즈가 없어서 쿨하다.
그의 시집은 대개의 첫 시집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작품 간의 간극이나 편차가 별로 없어서 어디를 펼쳐 읽어도 좋다. 하지만 더 맛있게 읽으려면 시집을 뒤에서부터 역으로 읽기를 권한다. 발표순으로 배열했다고 했으니 근작부터 읽는 셈이다. 시인과 더 가까이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작품부터가 아니라 아예 시인이 쓴 「연보」와 「시작노트」부터 읽기를 권한다. 그러면 읽는 내내 시인이 곁에 앉아 있을 것이다.
새벽에, 개똥을 두엄더미에 던지며
처먹고 똥만 싼다고 부삽 득득 긁지만,
기분 좋은 투정도 있기는 있는 것이다
투정에 걸리는 밤송이와 도토리집은
부삽질을 부드럽게 한다
저를 열어 제 속의 것 떨어뜨린 것이
바짝 세운 가시를 그대로 두고
무른 안부터 녹아 가면서, 금세
거름빛을 닮아가는 중인 것이다
부삽이야말로 밤송이 까는데 제격이지만
발에 밟힌 밤송이는 이슬에 젖어
눅눅한 것이어서, 가시마저
밤 궁둥이마냥 이뻐 보이는 것이어서,
돌팍을 텡텡 쳐보기도 하는 것인데
눅진한 아침도 이때, 흠칫
이슬을 터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봐도
내가 이쁠 때가 있는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쁜」전문
맨 끝에 수록한 이 시집의 표제시다. 이 시를 읽으면 “부삽으로 개똥을 두엄더미에 내다버리면서 구시렁대는 시적 화자의 눅진눅진한 어조”(오탁번, 시집의 뒤표지 글)가 실물감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개똥을 타박하던 시인은 개똥과 함께 나뒹굴고 있는 밤송이와 도토리집을 보고 문득 한소식을 얻는다. “저를 열어 제 속의 것 떨어뜨린 것이/바짝 세운 가시를 그대로 두고/무른 안부터 녹아 가면서, 금세/거름빛을 닮아가는” 이 이쁜 것들 속에 은근슬쩍 자신도 끼워 넣는다. 그러면서 밤송이 던지듯 툭 던지는 결구, “가끔은 내가 봐도/내가 이쁠 때가 있는 것이다”라는 시인의 이 진술 앞에서 독자는 쿡, 하는 웃음과 함께 따끔거리는 아픔을 느낄 것이다. “가끔은”이라는 부사어 때문이다. 그동안 내다버리고 싶을 만큼 밉고도 싫었을 ‘자신을/삶을’ 이 부사어가 안간힘으로 감추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짤막한 부사어가 감당하기에는 감추려는 것들이 너무 커서 금세 탄로나버리고 만다. 악의 없는 타박과 가벼운 웃음과 감출 수 없는 탄로 사이에서 이 시의 감동은 생성되고 확산되고 독자에게로 배어든다. 윤관영 시의 감동은 이런 식이다.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것들은 대개 이처럼 작거나 소외되었거나 잊혀져가는 것들이다. 그것들 속에 삶의 진실이 들어 있거나, 만지작거릴 수 있는 깨달음이 숨어 있거나, 글썽이는 회한이나 감동이 고여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시인은 ‘슬픔’이나 ‘아픔’ 따위의 말들보다는 ‘굴욕’이나 ‘모욕’에서 더 강력하게 시적인 힘을 받는다고 했지만(「연보」), 굴욕이든 모욕이든, 그보다 더한 어떤 참담함이든 시가 되고 문학적 감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슬픔이나 아픔이나 절망의 코드로 숙성시키는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는 법.
비밀번호도 잊어버릴 만큼 잔고가 말라버린 어머니의 ‘슈퍼뱅크통장’에서 노인에게 지급된 교통비보조금마저 인출해야 하는 시적 화자에게 ‘어머니’는 어찌 눈물겨운 ‘어, 머니(money)’가 아니었겠는가. 그래도 시인은 “수표발행비용 250원”을 자기가 지불했노라고 짐짓 어기대고 있지만(「어, 머니, 어머니여!」), 그 어깃장이 은폐한 흉통의 쓰라림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혼해버린 “사위 노미” 야속해서 “사위의 대가리”를 후벼 파버린 (이웃 노인의) 가족사진을 보며, “문창호지 손구멍처럼/환했다”는 딴전(「가족사진」) 역시 구멍 뚫린 아픔에 대한 ‘공감의 몸짓’이 아니겠는가. 그런 탓에 윤관영의 시에서는 절제나 반성에서보다도 엄살이나 너스레에서 더 지극한 아픔을 느낄 때가 많다.
불알에 땀 찰 때
팬티를 한 번 뒤집어 입으면 좋다
물론 다 엄살, 아직은
살만해서 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세레스 한 대 분의 모래를
목욕탕 이층과 삼층에 올려보면 안다
-「맞다, 엄살」부분
“우리가 ‘엄살’이라 부르는 것은 아픔을 유난히 예민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화려하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 그러나 시적 엄살은 전염성이 높지만 흉내 내기는 어렵다. 아름다운 엄살 이전에는 숱한 몸살의 시간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신형철, 「시 읽어주는 남자」) 숱한 몸살의 시간으로 치자면 ‘짐바리꾼’으로 사춘기를 지나야 했던 그의 몸살만한 이력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쉽게 표절할 수 없는 ‘엄살의 감동’은 오롯이 지난 시절의 숱한 몸살들이 선사하는 감동에 다름 아니다. 다음과 같은 너스레도 전적으로 윤관영의 것이기에 훌륭한 시가 된다.
누가 밥 먹었냐 물으면 고맙다
국 있는 밥을 먹으면 큰 대접받은 것 같다
밥솥을 양 발바닥에 얹고
김치와 콩장과 멸치에 김치 멀국을 부어
건듯 저어 먹는 밥은
저붐이 필요 없다
비빔밥은 맛이 아니고 종합이다
고마움에는 미각이 없다
형님, 콩국수 한 그릇하십시다
전화 받고는 울 뻔했다
-「밥, 밥, 밥」부분
먹는 일만큼은 누구에게나 요긴하고 절실한 문제일 테니 “누가 밥 먹었냐 물으면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으레 할 수 있는 진술이겠지만, “고마움에는 미각이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면 서늘해진다. 신문지도 한 장 없이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밥솥을 양 발바닥에 얹고” 꾸역꾸역 밥을 비벼 먹어보지 않은 자라면 감히 닿을 수 없는 지경이 아닌가. 그때 그렇게 목구멍으로 넘긴 게 어찌 밥이랴!
그에게 삶은 관념이 아니다. 철저하게 몸이고, 그 몸의 겪음이다. 그러니 삶에서 건져 올린 그의 시에는 관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시집은 지독한 ‘몸의 언어’로 이루어진 땀냄새 나는 시집이고, 질통을 짊어지고 ‘목욕탕 삼층’을 올라가는 후들거리는 시집이다. 그리하여 내리 짓누르는 중력과 맞서며 곧추서려는 직립의 시집이고, 그 자세 그대로 화석이 되고픈 우직한 시집이다.
떡판을 들자면
바벨을 드는 느낌이야
어깨만큼 다릴 벌려 허릴 굽히면
엄지 손톱에 오는 촉촉한 감
한호흡 정지시키는 그때
그 때 나는 직립이다
-「나는 직립이다」부분
그의 시집을 다 읽고 나면 단전을 돌아 “작은창자가 다 따듯”(「시인의 말」)해져올 것이다. 그러면 곁에서 내내 조는 듯이 앉아 있던 그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느릿느릿 악수를 청해올 것이다. “누가 한잔 하자면 난딱”(「밥, 밥, 밥」) 따라나설 것 같은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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