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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친일파 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선생

ddolappa 2008. 8. 14. 14:46

친일사전 편찬 뒤엔 ‘넝마주이 사학자’ 있다
2005/08/31 오 전 9:41 | 스크랩 글모음



친일파 연구에 일생 바친 고 임종국 선생
선친·은사 친일행적까지 책 서문서 사과


“친일파들에 의해 1949년 와해된 반민특위 정신은 1989년까지 온전히 임종국 선생 개인이 이어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땅에 친일파 연구의 씨앗을 뿌린 임종국 선생께 친일인명사전을 바친다.”(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29일 박정희, 김성수, 방응모, 홍진기, 김활란 등 1차 ‘친일인명사전’ 등재 예정자 3090명의 명단과 행적 등을 발표했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이후 처음 시도된 대규모 친일인사 선정작업으로, 친일 청산이라는 민족사의 숙원을 풀 분수령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인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은 한 재야 사학자의 필생의 노력이 없었다면 결실을 맺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편찬위가 친일인명사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은 1990년대 후반부터였으나, 사업의 정신적 뿌리는 39년 전에 출판된 재야 사학자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깊이 박혀 있다.

편찬위와 민족문제연구소는 “영원히 은폐될 것 같았던 친일의 어두운 역사는 1966년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이라는 이름으로 그 전모의 일단을 드러냈다”며 “우리는 오늘 옷깃을 여미고 새삼 그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그가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으나 마치지 못하고 병고 속에 유명을 달리하면서 후학들에게 물려준 숙제가 바로 친일인명사전이었다”며 “그는 친일문제 연구의 단초를 열고 기초를 닦았다”는 헌사를 덧붙였다.

초야에 묻혀 한 평생을 친일문제 연구에 바쳤던 임종국은 누구인가? 역사적인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앞에 두고 민족문제연구소는 무엇 때문에 그에게 헌사를 마다지 않는가? 그의 불꽃같은 60평생을 되돌아 보자.


문학청년에서 30년 친일연구 외길로


임종국은 1929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1956년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학창시절부터 그는 정치학도로서 자신의 전공보다는 시인 이상 연구에 몰두한 문학청년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이상전집’을 펴냈고 1959년 <문학예술>지에 ‘비(碑)’를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인으로서, 평론가로서 촉망받는 젊은 문학도였다. 그는 이 시기 활발한 문학활동을 벌이면서 2년여간 신구문화사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가 문학에서 친일문제 연구로 진로를 바꾸게 된 계기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이었다. 그가 각종 친일파 연구서의 서문에 쓴 글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묶어 정리하면 이렇다.

“1965년, 온 나라를 들끓게 한 한일회담 소식이 알려지면서 임종국은 1945년 해방 직후 자신의 고향에서 직접 체험한 어떤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해방 당시 17살 소년이던 그는 일본으로 곧 쫓겨나게 될 한 일본군을 동네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패전의 분루를 삼키며 17살 소년을 무섭게 노려보던 그 일본군은 ‘두고 봐라. 20년 후에 다시 돌아온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무서운 눈빛의 그 일본군의 말대로 정확히 20년 후 체결된 굴욕적인 한일협정은 37살 성인이 된 그에게 너무도 충격이었다. 문학이라는 자신의 진로를 바꾸어 친일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나서 1966년 저 유명한 <친일문학론>를 펴낸다.”


66년 <친일문학론>으로 당대 문호들의 친일행적 폭로
선친 친일행적까지 책 서문서 사과…역사학자의 참 모습 보여


임종국은 친일문학론 집필의 배경에 대해 “한일회담의 대한민국 정부 대표가 ‘제2의 이완용’ 운운하며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이대로 보고만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다짐은 해방이후 처음으로 친일파 문제를 제기한 친일문학론 집필로 이어진다. 친일문학론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이광수(일본이름·香山光郞), 최남선, 김동인(東文仁), 김동환(白山靑樹), 김팔봉(金村八峯), 노천명, 모윤숙, 유진오, 이무영, 이효석, 정비석, 주요한(松村紘一), 채만식, 최정희, 백철, 조용만 등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쟁쟁한 명사들이 일제시대에 썼던 글을 고스란히 발굴해 실었다.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민족문학가들이 실은 ‘천황과 일제를 위해 매국과 매족의 글을 헌납했음’을 만천하에 밝혀낸 증거물이었다. 또 해방 뒤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세력이 권력의 중심부에 자리잡으면서 금기의 성역이 된 친일문제에 대한 화두를 던져 지식인 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특히, 임종국은 책 서문에서 자신의 부친인 임문호(천도교 당수, 조선농민사 사장)와 대학 은사인 유진오(고려대 총장, 대한민국 헌법 기초자)마저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 정중히 사과하기도 했다. 임종국의 이같은 행위에 대해 후학들은 “자신과 주변에 보다 엄격했던, 역사학자로서 냉정함과 균형감, 공정성을 잃지 않은 참다운 역사 연구의 자세를 견지한 이정표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넝마주이 역사학자라는 비아냥, 그러나 “민족사 그르친 건 친일파”


그러나, 친일문학론으로부터 시작된 임종국의 외길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가 친일문학론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친일파 연구는 ‘금기의 성역’이었다. 반민특위의 실패 등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친일파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부로 세상을 호령했다. 학계에 내로라 하는 역사학자, 정치학자들이 숨을 죽이고 있던 시절, 그는 단기필마로 금기의 성역에 뛰어든 것이다. 제도권 학자들은 자료 발굴을 위해 헌책방을 뒤지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사는 등 악전고투하는 그에게 ‘넝마주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는 왜 넝마주이 역사학자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민족사를 가장 크게 그르친 자가 친일파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한국전쟁 당시) 패주 행렬 속에서 본 젊은 죽음들, 그들을 그 꼴로 한 장본인이 친일파였다. 제2의 매국 반민법을 폐기한 것도 친일파였다. 한말 가렴주구로 번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제1의 매국을 했고, 총독부에 영합하면서 친일을 했다. 해방 후에도 개과천선은커녕 반민법을 폐기하면서 독재와 부패 끝에 유신을 불러들였다.”

필생의 작업에 대한 그의 작심은 처음부터 단호했고, 친일이 유신으로 이어졌다는 역사에 대한 통찰력은 시대를 초월한 혜안이었다.


반민특위 정신을 혼자서 지켜와, 61살 나이에 지병으로 숨져
임종국상 제정 등 기념사업 활발


친일문학론 발표 뒤 잠시 주춤했던 임종국의 친일 연구는 1970년대 들어 본격화된다. 그는 이때부터 연구영역을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군사·예술 등 사회 전역에 걸친 친일문제로 확산하고, 연구방법은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고찰을 한다.

80년대 들어 임종국은 건강이 악화돼 천안 교외에 ‘요산재’라는 외딴집을 짓고 집필활동에 전념한다. 일제침략사와 친일파들의 배족사를 규명하기 위한 저작들을 쏟아낸다. 81년 <정신대 실록>을 시작으로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년), <밤의 일제침략사>(1984년), <일제하의 사상탄압>(1985년), <친일문학 작품선집>(1986년), <친일논설 선집>(1987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2>(1988~1989년) 등을 잇따라 내놓는다.

집필이 한창이던 시절에 임종국은 친일파 개인의 친일행적은 물론 그 집안의 친일내력까지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또, 임종을 앞둔 시점까지 임종국이 “침낭과 식기를 챙겨 근대 문헌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던 고려대 도서관에서 몇 날이고 나오지도 않고 아무도 손대지 않던 먼지 가득한 책들과 씨름했다”(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야기는 친일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후 임종국은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친일파의 행적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10권짜리 <친일파 총서>를 집필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임종국은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 1, 2>를 내놓은 뒤 병마와 싸워 이겨내지 못하고, 1989년 11월12일 죽음을 맞는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61살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친일파가 주류가 된 척박한 이 땅에 친일문제 연구의 씨앗을 뿌린 분”이라며 “친일파에 의해 1949년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을 1989년까지 온전히 임종국 선생 개인이 이어왔다고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종국 선생의 업적을 기르기 위해 지난 3월 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고인에 대한 문화훈장 추서를 추진하기로 했다. 또 고인의 기일인 11월12일에 맞춰 친일청산에 기여한 문화예술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등을 대상으로 임종국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을사늑약 100년, 해방 60년을 맞는 오늘, 일제 청산의 단초를 마련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친일파 연구에 평생을 바쳤던 한 넝마주이 사학자의 그늘진 무덤에 희망의 빛을 선사했다.

출처 : 이우식 문학카페
글쓴이 : 鐵面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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