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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과 죽음, 그리고 비로소 시작

ddolappa 2008. 8. 1. 00:40

 

사랑과 죽음, 그리고 비로소 시작

화두: ‘사랑은 언제나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이다.’

죽음을 삶의 문제로 이해한 철학자는 많다. 우선 두 사람을 징검다리 삼아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니체와 바타이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려는 의지, 그것은 죽음조차도 기꺼워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 비겁한 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Wille zur Liebe: das ist, willig auch sein zum Tode. Also rede ich zu euch Feiglingen!”

한편 바타이유도 『에로티즘』에서 앞의 니체의 구절을 연상시키는 말을 한다:

“‘에로티즘이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승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il est possible de dire qu'il[=l'erotisme] est l'approbation de la vie jusque dans la mort.”

두 사람의 말은 비슷한 어조를 풍긴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함의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말에서, 왜 사랑은 죽음까지도 긍정하는가? 아니 그보다도,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기서의 죽음을 몸의 죽음, 즉 생리적이고 물리적인 죽음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몸의 죽음을 죽음에 관한 논의에서 배제할 수도 없고, 배제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끝, 종결, 그러니까 결국 정지로서의 죽음일 뿐이며, 산 자인 우리의 논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 산 자는 산 자로서의 죽음을 지니고 있다(따라서 앞서 니체의 표현에서 zum Tode는 영어로 하자면 toward death나 dead라는 의미보다는 within death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within은 with와 in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산 자의 죽음은, 집합 관계로 표현한다면, 삶의 여집합이 아니라 삶의 부분집합이다. 따라서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삶에 붙어있는 그 무엇이다. 우리가 아주 쉽게 하는 오해, 즉 삶과 죽음이 반대이며 모순이라는 생각은 어서 떨쳐버려야 한다.

죽음은 차라리 삶의 극한, 삶의 경계일 것이다. 그것은 수학에서의 극한과 흡사하다. 다시 말해, 수학에서 극한은 끊임없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결코 도달하지는 못하는 어떤 잠재적 지점이다. 마찬가지로 삶은 죽음에 끊임없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죽음에 도달하지는 못한다. 만약 삶이 죽음에 닿는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삶은 없어지기 때문이다(자살이 삶 속에서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상기해 보면 이 점은 쉽게 증명된다).

이 극한은 0점의 성격을 지닌다. 존재 세계에서 0점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수학에서는 마이너스가 존재하지만 존재 세계에서 마이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속도는 최소가 0(즉 정지)이고 그 최소로부터의 어떠한 변동도 플러스일 뿐이다. 또한 온도를 보더라도, 최소치인 절대온도 0°K에서부터의 그 어떤 변동도 플러스일 뿐이다(온도라는 것이 사실 분자의 운동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수학의 용어를 빌면, 존재 세계에는 절대값만 존재하며(플러스 1과 마이너스1은 절대값으로 하면 모두 1이다) 그 절대값의 최소치가 0이다. 죽음이 삶의 극한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앙토냉 아르토가 “기관 없는 몸체Corps sans Organes”(CsO로 약칭)라고 부르는 그러한 존재론적 0의 상태를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 개의 고원』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CsO는 강렬하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았고, 지층화되지 않은 물질, 강렬한 모체, 강렬함=0이다. 하지만 이 0에는 어떠한 부정적인 것도 없으며, 부정적인 강렬함들, 반대되는 강렬함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물질은 에너지와 똑같다. 강렬함이 0에서 출발해서 커지면서 실재(le reel)가 생산된다. 우리가 CsO를 유기체의 확장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지층 형성 이전의 충만한 알, 강렬한 알로 다루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극적인 전환이 생겨난다. 이제 우리는 죽음까지도 긍정한다는 말을 새로운 시작을 긍정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이 바꿈은 단지 낱말의 바꿈이 아니며 오히려 몸과 마음의 전적인 변신이다. 새로 시작하는 몸은 죽음을 스치듯 찍고 돌아서는 자의 몸이며, 그 전의 몸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죽음을 스칠 정도의 절실함은 죽음마저도 성격을 변화시킨다. 이것은 절대 긍정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용기이다. 용기가 없다면 존재의 가장 낮은 곳, 삶의 최저점까지 갈 수 없을 것이고, 또는 자의든 타의든 그곳까지 갔다 하더라도 온몸이 굳어버려 돌아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랑을 죽음과 관련시키면, 거기에는 반드시 용기가 눈에 띈다. 용기는 시작의 다른 이름이며 절망과 포기의 반대말이다.

카뮈는 『반항인』의 앞머리에서 지나가듯 이렇게 말한다. “절망이란 전체적으로는 모든 것을 판단하고 원하는 것이지만 개별적으로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것이다.”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은 듯한 이 말은 절망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논의는 이어지는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끝)

 

 

 문학과 지성사 기획연재: 이 기쁜 철학 -김재인-

출처 : 지식
글쓴이 : 한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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