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과학철학

[스크랩] (9) 세탁기가 ‘남편해방’ 시켰다? - 이상욱

ddolappa 2008. 8. 20. 02:55

타자기 등장으로 여성 비서들 단순기능공 전락
세탁기 냉장고 보급에도 가사노동시간 그대로
인공수정 개발로 여성 임신·출산·압박감 더해
기술 자체가 아니라 발전과정 여성 참여가 중요
한겨레
» 세탁기·냉장고 등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평균 가사노동시간은 줄지 않았다. 여성이 혼자 해야할 일은 더 많아졌고 남성은 외려 자유로워졌다. 기존 성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도입만으로 요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진 어렵다. 사진은 ‘대한민국 남편들 다 벗어라’는 카피를 단 삼성전자 세탁기 광고. <한겨레> 자료사진
기술 속 사상/⑨ 기술과 여성
 

타자기라는 새로운 사무기술이 보편화되면서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던 비서들은 능동적인 지위에서 지시받은 문서를 기계적으로 작성하는 수동적 처지로 전락했는가? 가사노동을 돕거나 대체할 수 있는 세탁기와 같은 수많은 기술의 발전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해방되어 사회 각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는가? 피임법을 비롯한 각종 생식보조기술은 여성에게 출산과 양육의 다양한 선택권을 보장해줌으로써 여성해방에 일조했는가?

 

이상의 질문들을 인터넷 토론방에 올려놓는다면 다양한 답변과 그에 대한 재반박이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처럼 기술과 여성의 관계는 중층적이면서 논쟁적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대강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제시되었다. 기술결정론이란 기술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기술이 그렇지 못한 기술을 대체하는 내부 논리에 의해 발전하는데 비해 사회는 그렇게 선택된 기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는 생각이다.

 

로봇 주치의·자가용 비행기 ‘환상’

 

2040년이 되면 나노로봇이 몸 안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점검하고 문제가 있는 곳을 즉시 고쳐서 평균수명이 100살을 돌파할 것이라는 최근의 기대에 찬 미래기술 시나리오나, 필자가 어린 시절 들었던, 2000년에는 각 가정마다 날아다니는 자가용 비행기를 한 대씩 갖추어서 전세계 곳곳을 자유롭게 여행하게 되리라는 꿈같은 이야기가 대강 이런 시각을 따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기술과 여성을 바라 본 20세기 중반까지의 연구들은 특정 기술이 성불평등을 강화하거나 약화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어 타자기의 도입은 상당한 자율성을 가진 비서로서의 여성의 적극적 지위를 단순한 타자수의 지위로 강등시켰는데 비해, 세탁기는 여성을 힘든 빨랫감으로부터 해방시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이나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분석이 이에 해당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1970년대 여성해방의 시기에 각종 피임기술은 여성이 자신의 출산능력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게 해준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피임기술의 도움으로 성생활과 출산 사이의 필연적 고리를 거부하고 보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 구체적인 여러 사례연구를 통해 기술과 여성의 관계를 외부적으로 결정된 기술이 여성의 활동이나 지위에 고정된 영향을 끼친다는 생각이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워드프로세서 등의 사무자동화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여성과 기술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았음에 대한 연구가 한 예이다. 사무자동화가 여성 사무원들 전체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었다기보다는 원래 존재하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단순한 문서작성에 요구되는 숙련도가 사무자동화 기술의 도입으로 낮아지자, 단순 타자수의 지위는 더욱 낮아지고 전문 비서의 지위는 오히려 높아진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동질적인 어떤 집단으로 상정하고 이에 대해 기술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방적 영향을 끼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컴퓨터 조판기술의 발전과정에 대한 신시아 콕번의 연구 또한 이 점을 강조한다. 현재 컴퓨터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쿼티(QWERTY)체계(키보드의 왼쪽 위 여섯 글자를 따서 이름붙인 문자배열 체계)는 원래 타자기 자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를 사용한 조판기술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쿼티 체계는 강력한 라이벌이자 쿼티와는 매우 다른 라이노타이프 체계와 경쟁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쿼티 체계가 승리를 거두게 된 데는 당시 높은 임금을 받으며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하던 라이노타이프 식자공의 힘을 무너뜨리고 노동의 통제권과 비용절감을 달성하려는 관리자의 이해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부부 함께 하던 일도 아내 몫으로

 

» 가사기술과 가사노동 관계를 분석한 코완의 책.

이 과정에서 낮은 임금에 오직 타자기만 다룰 줄 아는 여성 타자수들은 비자발적 동맹자 구실을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도 표준조판을 지나치게 크게 만듦으로써 조판기술과 근육사용을 본질적으로 결합시키고 결국 여성을 식자공 지위에서 배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성과 노동자, 관리자 계층은 각자가 지닌 복잡한 사정에 따라 사무기술의 도입과정에서 복잡한 동맹관계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맺으며 기술의 발전경로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세탁기와 냉장고와 같은 가사기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1860~1960년 사이 미국의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줄지 않았다는 루스 코완의 연구는 가사기술의 해방적 기능을 맹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다. 세탁기를 사용하여 빨래를 하는 것이 손으로 빨래판을 이용하여 빨래를 하는 일보다 상당한 시간과 노력의 절감을 가져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코완은 가사기술이 널리 보급되는 과정에서 함께 일어난 몇 가지 변화가 평균 가사노동 시간을 일정하게 묶어두었다고 지적한다. 우선 세탁기와 같은 가사보조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으로 큰 힘이 드는 가사노동은 남편과 아내가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혼자 빨기 어려운 큰 이불 같은 것은 남편이 거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사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힘든 일들이 이제는 여성 혼자 할 만한 일이 되었고, 남편들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힘을 보태지 않게 된다. 또한 세탁기의 등장은 가족구성원의 ‘기대 수준’을 높여서 결국 자주 빨래를 하게 했다. 빨래하기가 무척 힘든 일이었던 시절에는 웬만큼 더러워도 대강 참고 지냈던 가족들이 이제는 새하얀 셔츠와 깨끗한 속옷을 당연히 하게 되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변화에는 1930년대 이후 세균설이 의학계를 넘어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지면서 청결의 생활화가 전면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주효했다. 게다가 이런 청결을 책임지고 가정을 제대로 ‘관리’하는 것이 행복한 주부의 사명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지면서, 주부들은 전통적으로 주부의 가사노동에 포함되지 않던 자녀의 교육문제나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가정이라는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구실까지 당연히 떠맡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좁은 가사노동은 줄어들었지만 주부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임무로서의 가사노동 총량은 줄어들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 특수성 고려한 기술발전을

 

이 점은 아무리 노동의 한 측면을 간편하게 해주는 기술이 도입되더라도 여성과 남성의 관계나 여성의 구실과 지위에 대한 기존 관념이 바뀌지 않는 한 기술만으로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변화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통상 ‘시험관 아기’로 알려진 체외수정 등의 생식보조기술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인다. 생식보조기술은 흔히 아기를 갖고자 하는 부부의 열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꿈의 기술로 선전되었다. 하지만 이 기술에 대해 여성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자손을 낳아 기르려는 선택을 담당하는 구실과 함께 생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존재하면 마땅히 그 기술을 사용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 있는 피해자로서의 구실 모두를 담당하곤 한다. 그러므로 생식보조기술 자체가 여성을 출산의 우연적 성격에서 해방시킨다는 단순한 분석보다는 동일한 기술 내용도 사회적 맥락이 달라짐에 따라 다르게 수용될 수도 있고, 기술이 발전되는 과정이나 내용도 여성의 적극적인 선택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이상욱/한양대 교수·철학

실제로 서양에서 여성들은 자신에게 본질적인 행위인 출산에 참여하는 권리로부터 남성과 기술의 연합의 의해 배제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7세기 말까지도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산파의 도움을 받아 자연분만했다. 하지만 핀셋이 발명되면서 남성 의사는 ‘과학적인 방식으로’ 출산을 주도할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고 실제로는 핀셋이 득보다 해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산파를 몰아내고 출산과정에서 여성을 수동적인 지위로 강등시켰다.

 

이처럼 여성과 기술의 관계는 기술이 여성에게 주는 영향이 아니라 여성이 기술의 발전과정에 때로는 주연으로 때로는 조연으로 참여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에 기반한다면 최근 의학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성인지의학(gender-specific medicine)처럼 기술의 발전방향을 보다 여성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여성의 참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조정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Freiheit in mir
글쓴이 : 김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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